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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붓다의 무아론 설명



한자경 교수가 내지른 사자후 '불교의 무아론' 중에서

49.[잡아함경]<유아경>에서 붓다는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의 물음에 대해 세 번이나 무기를 보이다가, 그 무기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내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부터 내려오는 私見을 더할 뿐이다. 만일 내가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부터의 의혹을 더할 뿐이다. 내가 어지 의혹을 더하게 할 수 있겠는가? 본래부터 있었는데 이제 단멸하였다고 말하겠는가? 본래부터 자아가 있어 지속한다고 하면, 그것은 常見이다. 이제 단멸한다고 하면 그것은 短見이다.”

 

붓다는 둘 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둘 다가 본래 있는 자아의 존재를 일단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함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즉 일정 기간 자기 동일성을 恒常된 것에 대해서만 상이나 무상, 즉 불멸이나 단멸을 물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두 관점은 다 무상하지 않은 자아 존재를 인정하는 有我론에 속한다. 일정 기간 변하지 않는 자기 동일적 자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아론적 관점을 붓다는 私見이라고 말한다. 자기 동일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아란 찰나 생멸하는 무상한 존재라는 것이 불교 無我론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붓다는 위의 물음에 한마디로 자아는 없다라고 답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할 경우 우리가 가진 의혹이 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인가? 우리에게 무상하지 않은 恒常된 자아는 없지만, 그래도 무상하게 항상 변화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 연속되는 그런 자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붓다가 인정하는 자아, 즉 연기의 자아이며 업의 자아인 오온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앞의 인용에서처럼 자아에 대한 단견과 상견을 모두 비판한 후, 이어 중도의 견해로서 연기와 업을 설한다.

 

51.-그러므로 불교가 말하는 일체 존재의 무상성 또는 우리 삶이나 자아의 무상성은 우리 젊음과 청춘이 너무 짧고,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기에, 단지 7~80년밖에 지속하지 않기에, 언젠가는 죽어야 하기에 무상하다는 것이 아니다. , 덧없다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아 죽게 된다거나, 무생물도 시간이지나면 색이 바래고, 닳아 없어지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존재가 끝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의 순간 자체 안에 비존재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안에 이미 비존재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존재의 핵이 자리 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것을 공이라고 부른다. 그 공성 때문에 어느 존재도 그 어느 순간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매순간 생멸을 거듭한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견이나 단견으로 주장되는 자아, 즉 자기 동일성을 가지는 恒常된 자아와 붓다가 설하고자 하는 중도의 자아, 즉 연기 법칙에 따라 업으로써 이어지는 자아는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 자기 동일적 자아가 없이 과연 연기나 업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 일생에서의 자아의 자기 동일성 문제를 두 순간에서의 행위자의 동일성 여부로 집약시켜봄으로써 상견이나 단견 상의 자아와 업의 자아가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밝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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