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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열반, 허공, 택멸, 비택멸


불교에서 설하는 최고의 이상향(완성된 깨달음의 세계).

내용

'반열반(般涅槃)’이라고도 하며, ‘멸(滅)·적멸(寂滅)·이계(離繫)·해탈(解脫)·원적(圓寂)’의 의미를 가진다. 이 열반에 관한 사상은 우리 나라에서 열반종(涅槃宗)의 창종 이래 널리 연구, 전승되었다. 원래 열반은 불을 입으로 불어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 등을 나타내며,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없애서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말한다.

이는 곧 생사를 넘어선 각(覺)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표이다. 인간이 망집 때문에 괴로워하고 업을 짓게 되는 것은 결국 자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일 고(苦)와 무상(無常)과 비아(非我)의 이치를 바르게 깨달아서 바른 지혜를 완성한다면, 생사윤회의 근본인 망집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이러한 인식을 긍정하게 될 때, 이미 그 무엇을 자아 또는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추구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지를 실현하고 진리에 대한 인식을 터득하기 위하여서는 수행에 힘쓰고 계율을 지켜 선정(禪定)을 닦아야 한다. 그러한 수행의 결과로 진리를 터득하고 망집을 단절한다면 인간은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탈의 경지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불사(不死)·안락(安樂)·적정·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은 마치 바람이 활활 타오르는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의 바람으로 불어 꺼서 모든 고뇌가 사라진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열반은 탐욕과 괴로움과 근심을 추월한 경지이기 때문에 인간의 유한한 경험 안에서는 그 어떠한 말로써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다만 체득한 자만이 이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실천적인 문제에 있어서 불교는 세속적인 평범한 생활로는 결코 참다운 열반에 도달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세속에는 극단적인 두 가지 생활방식이 있다. 하나는 감각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생활이며, 다른 하나는 많은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고행의 실천이다. 이 환락과 고행이라는 양극단을 피한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중도에 의하여 진실에 대한 바른 인식, 바른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열반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열반에는 8종의 법미(法味)가 있다. 열반은 생멸변화가 없이 항상 머물러 있는 상주미(常住味)가 있고, 다시는 미혹된 생사가 계속하지 않는 적멸미(寂滅味)가 있으며, 영원히 늙지 않고[不老], 다시는 죽지 않으며[不死], 청정하고[淸淨味], 허허로이 통하며[虛通味], 움직이지 않고[不動味], 항상 행복한 맛[快樂味]을 갖추고 있다.

또 이 열반에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덕(四德)이 있다. 상덕은 상주의 뜻으로 열반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멸변화가 없는 덕을 갖추고 있음을 밝힌 것이고, 낙덕은 안락의 뜻으로 생멸변화가 없는 세계에는 생사의 고뇌가 없고 무위안락한 행복만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아는 망아(妄我)를 여읜 진아(眞我)를 말하는데, 아덕은 8대자재(八大自在)를 갖춘 아를 표시하는 것이다. 정은 청정의 뜻으로, 혹(惑)·업(業)의 고통을 여의고, 담연하게 청정한 과덕이 있음을 말한다. 이 상락아정을 현대적 용어로 바꾸면 영원·행복·자재, 번뇌가 없음으로 풀어 볼 수 있다.

열반에 대해서는 2열반·3열반·4종열반 등의 분류가 있다. 2열반은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구분되는데, 이에 대하여서는 소승과 대승이 그 주장을 달리한다. 소승에서는 열반을 번뇌가 다 없어진 상태라고 본다. 소승의 경우, 유여열반은 번뇌는 다했지만 육체는 아직 남아 있는 경우이고, 무여열반은 회신멸진(灰身滅眞)의 상태로서 모든 것이 아주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대승에서는 열반을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하여 상락아정의 4덕을 갖추지 못한 소승의 열반을 유여열반이라 하고,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여열반이라 칭하여 이것을 최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대승에서는 소승의 무여열반에 아직 미해결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첫째는 삼계(三界) 안의 진리와 일에 대한 미혹은 없지만 삼계 밖의 무명번뇌가 남아 있고, 둘째는 삼계 안의 유루업(有漏業)은 없지만 삼계 밖의 무루업은 남아 있으며, 셋째는 삼계 안의 분단생사(分段生死)는 없지만 삼계 밖의 변역생사(變易生死)는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 삼여(三餘)라 하여 번뇌여(煩惱餘)·업여(業餘)·과여(果餘)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천태종에서는 3열반설을 따랐다. 3열반은 성정열반(性淨涅槃)·원정열반(圓淨涅槃)·방편정열반(方便淨涅槃)이다. 성정열반은 만법의 실성(實性)인 진여(眞如)를 뜻한다. 이 진여가 본래 불생불멸하여 물들일 수도 없고 깨끗이 할 수도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원정열반은 지혜로써 번뇌를 끊고 증득한 열반이며, 방편정열반은 지혜로써 진리를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출현하고, 인연이 다하면 입멸하는 것이다. 이를 나무가 다 타서 불이 꺼짐에 비유한다. 이 3열반은 열반을 체(體)·상(相)·용(用)의 이론에 맞추어 논리를 전개시킨 것이다.

4종열반은 우리 나라에서 유식종(唯識宗)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시켰다. 여기서의 4종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만유와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인 진여이다. 그 진여의 성품이 청정하여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고 생멸이 없이 적정한 열반을 가리킨다.

유여의열반은 번뇌장(煩惱障)을 끊고 나타나는 진여이다. 번뇌는 소멸하였으나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다. 무여의열반은 유여의열반의 상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오온(五薀)이 화합한 몸까지 소멸하여 완전히 몸과 마음이 없어진 곳에 나타나는 열반이다.

무주처열반은 번뇌장뿐만 아니라 소지장(所知障)을 끊고 얻는 열반이다. 소지장마저 끊었으므로 생사와 열반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는 깊은 지혜를 얻게 되고, 대비(大悲)가 있으므로 열반에 머무르지 않고 생사계의 중생을 교화하며, 대지(大智)가 있어 생사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히 미계(迷界)를 여의었으므로 무주처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주처열반은 대승보살 정신에 입각한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이 열반에 대한 학설을 가장 논리정연하게 전개시킨 이는 신라의 고승인 원효(元曉)이다. 그는 ≪열반경종요 涅槃經宗要≫를 통하여 당시의 열반에 대한 이설들을 총정리하고 독창적인 그의 학설을 전개시켰다.


택멸

택멸(擇滅, 산스크리트어: pratisajkhyā-nirodha, 팔리어: patisavkhā-nirodha) 또는 택멸무위(擇滅無爲)는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575법 가운데 허공(虛空) · 택멸(擇滅) · 비택멸(非擇滅)3무위(三無爲) 중의 하나이고, 또한 유식유가행파의 5100법 가운데 허공(虛空) · 택멸(擇滅) · 비택멸(非擇滅) · 부동(不動) · 상수멸(想受滅) · 진여(眞如)6무위(六無爲) 중의 하나이다.[1][2][3]

 

택멸(擇滅)은 간택력(簡擇力)에 의해 획득되는 멸(, nirodha)을 뜻하는 택력소득멸(擇力所得滅)의 줄임말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과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서는 모두, 택멸(擇滅)"모든 유루법(有漏法)의 계박(繫縛)을 떠난다"는 이계(離繫)의 뜻을 그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2][3] 그러나, 설일체유부에서는 택멸(擇滅)을 실재하는 객관적 존재()로 파악한 반면, 유식유가행파에서는 택멸(擇滅)은 실재하는 객관적 존재가 아니며 법성(法性)의 특정한 상태 또는 모습을 가설적으로 칭한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택멸(擇滅)은 해탈(解脫) 또는 열반(涅槃)과 동의어이다.[1]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과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는 모두, 택멸 즉 열반이 무위에 속한 것으로 수행(무루 유위법, 무루혜의 간택력, 반야)에 의해 증득(證得)되는 것이지 유위의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 즉 유위의 결과가 아니라고 본다.[4]

 

설일체유부

 

택멸(擇滅)은 간택력(簡擇力)에 의해 획득되는 멸(, nirodha)을 뜻하는 택력소득멸(擇力所得滅)의 줄임말이다. 간택력은 무루의 지혜[無漏智 또는 無漏慧]의 식별력을 뜻하는데, 택멸은 무루의 지혜가 4성제를 개별적으로 간택하여 이에 따라 획득되는 멸()이다. 이러한 멸, 즉 택멸은 곧 무루의 지혜의 간택력을 사용하여 모든 유루법(有漏法)의 계박(繫縛)을 멀리 떠남으로써 성취되는 해탈(解脫),[5] 곧 열반(涅槃)과 같은 말이다.[1]

 

달리 말하면, 택멸(擇滅)은 성문(聲聞)의 제자가 지혜를 사용하여 간택함으로써 견() · ()의 계박을 멀리 떠나서 적멸한 참된 공[眞空]의 이치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2]

 

설일체유부는 575법의 법체계의 75법 각각을 모두 개별적 실체라고 보았으므로, 75법에 속한 택멸(擇滅) 또한 하나의 실체라고 보았다.

 

유식유가행파

유식유가행파에 따르면 택멸(擇滅) 또는 택멸무위(擇滅無爲)는 장애를 바르게 끊는다[正斷]는 뜻에서 지어진 명칭이다. 택멸(擇滅)은 이계(離繫), 즉 계박을 떠난다는 뜻으로, 모든 유루법(有漏法)의 계박을 떠나서 진리(眞理)가 현현되는 것이다.[3]

 

3무위(三無爲) 각각을 개별적 실체로 파악한 설일체유부와는 달리 유식유가행파에서는 6무위(六無爲) 각각이 모두 실재하는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 법성(法性), , ()과 무아(無我)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진여(眞如)를 식()의 전변에 의지하여 가설적으로 여섯 가지로 나누어 세운 것이라고 하였다.[3]


비택멸

택(擇), 혹은 택력(擇力)에 관계없이 무위(無爲)인 법.

내용            

택(擇, prati-saṃkhyā)이란 “~을 살핀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불교의 성스러운 지혜로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멸(滅, nirodha)이란 사라짐, 또는 사라진 존재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택멸(擇滅, prati-saṃkhyā-nirodha)이란 불교의 성스러운 진리로 살펴서 번뇌 등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모여서(saṃ) 구성된(skṛta)” 법(法, dharma), 즉 유위법(有爲法, saṃskṛta-dharma)이 아니라, 사라짐의 상태에 있는 법이기 때문에 무위법(無爲法, a-samskṛta-dharma)에 속한다.

비택멸(a-prati-saṃkhyā-nirodha)이란 불교의 성스러운 진리로 살피지 않아도 처음부터 무위법의 상태에 있었던 것을 말한다. 여기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이다. 이것은 모여서 구성된 존재[유위법]가 택에 의하여 무위법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무위법이다. 다음은 조건[연(緣)]이 없어 유위법으로 나타나지 못한 법이다. 즉 나타날 조건이 영원히 결여되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이것 역시 유위법에서 무위법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위법이다. 이와 같이 택, 혹은 택의 힘[택력(擇力)]과 관계없이 처음부터 무위법에 속했던 법이 비택멸, 비택멸법이다. 비택멸을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 비수멸무위(非數滅無爲), 비지연멸(非智緣滅)이라고도 한다.

『구사론』 제6권에서는 정정한 지혜[무루지(無漏智)]의 힘에 의해 번뇌가 생기지 않는 것이 택멸이고, 번뇌의 발생 조건이 결여되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비택멸이라고 하였다. 『대비바사론』 제31권은 "택멸이란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모든 소멸로서 모든 법이 소멸하면서 번뇌의 속박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반면 비택멸이란 힘들게 애쓰거나 가행(加行)을 하는 등의 법을 간택한 결과로 생긴 소멸이 아니다. 성문(聲聞)들은 과(果)를 얻은 후에 번뇌가 더 이상 계속 발생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적멸의 이치를 깨닫는다. 이것은 간택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비택멸무위라고 한다."라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