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따마 붓다. 역사와 설화 / 문화문고 / 성열/강남포교원장
불교설화에 관한 접근과 개인적 의견
불교 설화는 무시해야 한다. 가령, 붓다가 마야부인의 옆구리로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했다는 것은 채택해서는 안 되는 꾸민 이야기일 뿐이다. 과학적 합리성을 무시한 것은 붓다의 '如實知見있는 그대로 보라.'는 대명제를 무시한 것이 된다는 것에 내 신념의 전체를 이룬다.
나는 불자의 자격이 없으며 될 생각도 없다.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매우 훌륭한 학문이라는 매력이 충분하다. 그러므로 오랜 절 생활을 해왔지만 종교적 측면에서 접근해본 적은 없다. 다만 소승을 모르고 소승과 대승을 구별하는 행태나 교를 모르고 선만이 최고라는 것이나 원시불교를 모르고 현대불교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는가를 의심하는 사람이다. 붓다의 原音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것을 찾아 가는 路程이 있을 뿐 외에 다른 방법은 불가능하다. 현재 원음에 가장 접근한 것은 스리랑카에 패엽경으로 보관한 빨리어 장경이다. 그 소중한 것을 끊임없이 빨리어를 바로 번역하는 전재성 박사의 작업은 필연적 업보다.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는 기쁨을 어디에 비길 수 없음을 행운으로 여긴다. 많은 분들이 이미 일본어나 영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번역하니 중역이 된다. 구전의 양이 많아지면서 전달의 단계를 거치면서 정확하지 않음을 인정하면서 경전으로 옮기는 것이 정확하다고 여겼듯이 중역도 단계를 거치면서 사견이 들어가며 정확도는 당연히 떨어진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불교를 종교로 생각하지 않고 철학으로 간주/생각하고 공부하면서 느낀 것들이 있다. 얼마나 붓다의 원음/오리지널 사운드Original Sound에 가까운가? 그것이 중국으로 진입하면서 부득이 노장 사상과 유학 사상의 결합을 통한 格義佛敎의 성격을 띠었다면 중국불교로 완전하게 편입하여 극복한 사람이 중앙아시아 쿠차 국의 불운한 公子 구마라집이 맞는가? 그렇다면 중국불교의 특징인 禪佛敎는 불교인가? 왜 선불교는 교종을 경시하는가? 과연 깨어남이든가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경계인가? 敎禪一致, 禪敎雙手, 定慧雙手를 주장한 지눌 대사를 오늘의 선종 계열의 조계종은 그를 開祖로 삼는가? 禪의 頓漸은 어는 것이 맞는가? 티베트 불교의 漸悟漸修는 어떤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는가? 頓悟頓修가 맞다면 保任은 필요한가?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법은 과연 붓다의 수행법과 가장 가까운가? 고대 인도에서 발생한 붓다의 가르침은 왜 밀교화로 퇴행하고 결국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가? 공사상을 보완한 유식사상이 최후의 불교 사상인가, 그후에 발생한 사상은 없는가? 여래장 사상은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은 언젠가는 붓다가 된다.’는 여래의 가능성을 간직/잉태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씨앗이 반드시 나무로 자란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 이 ’반드시‘가 성립하려면 여래장은 가능성이 아니라 일종의 실체를 말하는 것이 되므로 무아론과 배치되는 면이 있다. 여래장 사상의 대두는 사실 윤회라는 기약 없는 고통 속에서 대승불교를 수용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끝이 난다는 안전장치에 대한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실제로 대승경전들에는 ’붓다의 受記‘라는 결정적 언급이 나타나있으므로 이 언급의 연장선에서 여래장에 대한 논의도 존재하지만 여래장은 안전장치가 되는 동시에 실체가 된다는 점에서 ’연기‘라는 변화원리를 주장하는 불교의 핵심 사상과 충돌을 피하지 못한다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없을까.
대승 사상의 붓다의 가르침, 곧 원시불교와의 乖離관계는? 三法印 無常 · 苦 · 無我를 주창한 붓다의 가르침 중 영원불멸의 아뜨만, 곧 梵我一如 사상을 부정하면서 無我論에서 과연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 법통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과연 누가 붓다의 법통을 이었으며 남진제, 북송담 등의 주제를 이루는 선문답-선문답은 동문서답이라는 시인으로서의 시적 의심-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서, 이것이 의미 있는 짓인가? 이런 스스로의 질문들을 비롯한 의문을 풀기 위해 기어코 결행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주제로 한 서사시를 쓰는 것이다. 얼마나 풀지 아직은 모른다. 다만 자유롭고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그러나 단단한 마음으로 시작한다. 가까운 도반은 나의 시도를 응원할,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처절하게 시작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장난을 닮았으므로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집중이 필요한 때다. 無時禪 無處禪. 나마스떼: 당신 안의 신에게 내 안의 신이 인사드립니다. 옴 마니 반 메훔: 연꽃 속의 보석 같은 이여.
-71학번의 대학 1학년 때 서클 선배로부터 권유를 받은 책 중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이 E. H. Carr/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마침 대학생들의 데모 이슈는 표면적으로는 교련 반대와 대학의 병영화였으나 실은 반정부, 반체제였으며 영구집권을 위한 헌법 개정을 사전에 막기 위한 데모였고 대학생들과 박정희는 극한적으로 대립하였고 박정희는 군대를 동원하여 휴교령으로 학생들의 집단화를 막았다. 휴교령으로 학교는 막았고, 집으로 가면 어머님의 데모하지 말라는 간곡함에 갈 곳이 없어 깊숙한 절로 가서 역사, 철학 등 공부를 하려다가 느닷없이 받은 책이었으니 신기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그때 그 책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던, 소위 불온서적이었으니 그 선배의 목적은 따로 있었겠지만 지금은 명백/궁금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 책들의 위대함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금서로 정해야 했던 그들의 논리의 유치함과 탐욕을 포기할 수 없다는 두려움을 비웃어야 한다. 하숙집에서 곤봉을 뒤로 숨긴 형사 둘이 닥쳐와 선배나 후배 등을 잡아가면 어김없이 30분 후에는 그의 방을 뒤지려고 다시 나타난다. 남은 자는 그 30분의 골든타임 안에 소위 불온서적을 추려내 다른 곳에 숨겨야 했다. 저자는 그 시대를 ‘신과 해가 외면한 어둠의 시대’라 칭한다. 그 책의 저자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끈임 없는 대화’라 규정했다. 그러면서 “역사가는 사실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다…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어내고 또한 자신의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한다. 둘 중 어느 한쪽에 우위를 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갖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데없는 존재다. 자신의 역사가를 갖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하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라고 덧붙여 설명한다. 나는 성경을 비롯한 모든 경전이 ‘승자의 기록’, 또는 ‘살아남은 자의 恣意的 해석’이라는 것에 대해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나, 카는 “완전한 객관적 실증주의란 불가능하다”면서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는 고전학자 알프레드 에드워드 하우스먼의 명언을 인용한다. 동시에 현재의 목적을 위해 과거 사실을 주관적으로 왜곡하는 오류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나는 불경에 대한 오랜 나의 주관적 사유를 전개한다. 해석은 나의 몫이고 그에 대한 반론이나 비난을 받는 것도 온전히 나의 몫임을 모르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동안 경험하는 것은 지극히 적고 작으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해석은 과학적 합리성을 외면한 기적 등은 설화로 규정하여 객관적 사실과 분명히 분별하였다. 모든 종교의 경전에 기적과 설화가 넘치는 것은 다분히 불순한 의도가 끼어 있으므로 내가 글을 써야하는 까닭이다.
고대 인도에는 유적으로 봐서 분명 문자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나 그들의 세 가지 베다 사상을 살펴보면 아리비아 숫자를 발명한 민족답게 미래를 중요시 했으며 과거를 무시했으므로 기록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으므로 문자의 발달이나 기록을 남긴 문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그들은 거의 기억에 의지했다는데 동의한다. 붓다의 기록도 아소카 왕이 문자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더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어학상 구전에는 당연히 흥미로운 요소가 들어가야 오랜 생명력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부분 ‘슬로카’라는 8언4구 방식의 운문체로 구성하고 온갖 설화를 집어넣어 재미롭게 꾸몄을 것이므로 그 행위를 옳고 그름의 시빗거리로 삼을 필요가 없다. 어차피 사실 관계를 따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저자가 쓰는 서사도 당연히 일어나기 어려운 기적을 닮은 허황한 설화는 빼고 저자의 시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힙리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작성한 것임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학창시절 가장 흥미를 느낀 과목이 법철학이었다. 교재도 없던 시절, 그 시절을 온통 깡그리 한 독재자가 휴교령으로 4년을 찬란하게? 수놓았으니 출석 자체가 의미 없는 메아리 없는 소리였다. 교수들도 이름을 한 번 불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나오지 못하는 제자들 때문에 자괴감으로 차마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열망/정으로 치장한 한 인간의 욕심 때문에 생긴 일이지만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아직도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그 더러운 업을 자식들이 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有業報無作者라는 불가 無我論의 대명제에 대해 다시 더듬어볼 마음이 생기는 것은 나만의 심정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런 맥락에서 딱히 같지는 않겠지만 ‘나는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는 명제에 부딪치게 된다. 달리 할 일이 없어 도서관에 다니며 흥미를 가졌던 문학에 대해 우연히 접할 기회가 생긴 덕분에 세 권의 시집을 냈으니 그것도 어릴 때부터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은 연유가 된다. 도서관에 다니면서 처음 접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으니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마천의 ’사기열전‘이었고 다음에 천체물리학, 철학, 종교, 문학의 순으로 천천히 섭렵하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 중에 어쩌다 철학 강의를 하게 되고 철학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며 흥미를 느꼈다. 최근부터는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는 교수들로부터 철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서관은 공공시설이므로 종교에 관한 강의는 거의 하지 않는다. 노장철학이나 공맹사상에 대해서는 자주 강좌를 개설한다. 그것도 잠시, 건강이 나빠져 먼 곳이거나 가기 불편한 곳은 피하게 됐다. 그러나 뒤늦게 생긴 지적호기심 덕분인지 그 동안 명상하며 느낀 현상 등에 관하여 직접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시 철학 사상을 더 깊게 공부했으니 이 책이 그 첫 작업의 산물이다. 또한 손녀가 태어나서 그가 20살에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내기로 약속했으니 지켜야 한다. 이것이 그 첫 산물이라고 본다.
우리가 80년을 살면서 겪는 것보다 겪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많듯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겸손의 마음을 놓지 않을 수 있다면 회한이 덜 할 것이며 번뇌 또한 줄일 수 있다. 嗚呼哀哉라! 죽을 때가 가까워져야 통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으니 그것 또한 삶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지난 것은 모두 역사가 된다. 글로 남기거나 말로 남겨 후세에 전할 때 과연 ‘如實知見’, ‘있는 그대로’ 전달이 될까? 수많은 역사가들의 견해는 ‘아니다’고 한다. 역사는 시대적 상황과 기록자의 사견, 기억자의 오류, 소실 등으로 인해 잘못 전해지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런 상황을 감안하고 절대적이라고 믿으면 다시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 사람의 마음은 심찰나에 17번 또는 1초에 십만 팔천 번이나 변한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원래 고향이 영광이므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영광 백수에서 일으킨 원불교 모태신앙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당시 영광인 거의 모두가 그렇듯이 어머니가 하셨던 사업체의 상호가 아버님이 지으신 원광이었으며 나의 이름은 定南으로, 선정의 定과 나무아미타불의 南이니 한눈에 봐도 불교식이다. 원불교는 어린 시절 목사의 아들과 친했던 나는 교회에 다녔는데, 후에 그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당장 원불교 교당으로 데리고 가서 꼼짝없이 중학교 시절에는 입시기간을 빼고 알아듣지도 못하고 흥미도 없는 2대 정산 종사의 책을 읽으며, 원불교 교당을 아버지와 함께 몇 년 다니면서 교무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거기서 받은 원불교 법명은 京星이었으나 한 번도 사용한/써먹은 적이 없을 만큼 관심은 없었다. 대학에 가서 접하게 된 불교는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공부와 직장에 다닌 관계로 멀어졌다. 기억하건데 그때 선가귀감, 선문답집과 육조단경, 반야심경 등을 접했으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40년이 지난 반야심경 한 권 뿐이다. 어머님이 생전에 읽으면서 손때가 묻은 원불교전서는 돌아가신 후에 받아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을 뿐이며, 어머님이 생각나면 간혹 떠들어본다. 어머님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꽤 많은 재산을 정리하면서 주변의 서운한 점을 들어주고 남은 것으로 양로원을 설립하고 운영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유산을 받지 못한 것이 내게는 훗날 자립이라는 더 큰 유산을 받았음을 안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그런 것들을 잊고 살다가 먼 훗날이 되어서야 불연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후덕산 이인 원장님에게서 주로 유식론과 간화선, 퇴현 전재성 박사님께 초기 경전 등, 여운 김광하 선생님께 초기 경전을 공부하고 도반들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 다시 불교 공부를 하면서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은가, 아니면 더 나아가 종교의 영역까지 들어와 있는가를 궁금해 하다가 내 생각을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에 펜을 들었다. 그러나 아는 척하다가 목을 크게 다치면서 펜으로 쓸 수 없게 되었으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나 통증이 심해 포기했다가 ‘인생사 새옹지마’ 또는 孟子(맹자)는 고자장구(告子章句) 하편에서 大任是人(대임시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은 한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릴 때에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의지]를 시험하며, 몸[근골(筋骨)]을 힘들게 하고, 배를 곯게 하여 육신을 궁하게 하며, 온갖 유혹으로 그 행실에 혼란을 준다. 그러므로 마음이 움직이고 참을성이 생겨나며, 이로운 점이 많아져 못할 일이 없게 된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心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窮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는 맹자의 교훈을 좌우명으로 삼아 잊지 않고 간직하며, 언제까지 통증과 친구삼아 싸우며 살 수는 없다는 소명의식이 들면서 다시 시작한다. 다행히 꾸띠(개인 수행처) 혜덕암에서 지난겨울을 지내면서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부족함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중단할 수는 없다. 이미 늙어버려 무소유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욕심을 부린 들 쓸모가 없어진 나의 존재이유가 된다고 본다. 철저하게 과학적 관점에서 서술하되 부족하면 도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더 배우고 익히며, 보충하고 수정하며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작업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과학이란 반드시 실험기구를 통한 과정을 통해 증명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고 훗날 증명이 될 것을 예정하고 가설이라 이름을 붙인다. 과학의 본질은 변화다. 다행히 불가의 입장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입장을 변함없이 주장하므로 두 분야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에 동질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다름이 없다고 본다. 오늘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블랙홀 사진을 찍으면서 100년 만에 증명이 됐다고 떠들고 있지만 더 진화한 실험기구를 통해 다른 이론이 나오면 뉴턴의 법칙이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일부 부정이 되듯이 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대상으로 하는 거시적 방향이지만 양자역학은 물질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운동법칙으로 변동하는가를 연구하는 분야다. 현재는 17개의 쿼크/소립자가 최소단위이지만 앞으로 더 정밀한 실험기구가 진화하면 현재의 이론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의 정치적 성향은 사회민주주의, 가장 나쁜 일상은 아침에 일어나 정치에 관심 점심에도, 저녁에는 거품을 물고 토론하는 짓, 원래 토론이란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 차이로 결론을 낸다는 것은 어렵다. 법대는 정치학에 정치학과는 헌법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 교수의 조심스런 언어 구사는 지금도 마음 아프다. 한때는 어느 정치가의 정치 입문 계기를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래도 적극적 행태인 정치로 보는 입장이므로 거기로 뛰어든다고 해서 거기에 동감했지만 혹시는 역시가 됐다.
내 문학적 소양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앞에 살았던 큰매형의 서가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내 키보다 높은 서가를 장식한 그분의 책을 틈날 때마다 읽은 것으로 시작한다. 서울대를 합격하고도 가난한데다 부양할 가족이 너무 많아 다니지 못하고, 돈을 벌어 고려대를 합격하고도 다니지 못한 그분은 책으로 한을 풀어간 것 같다. 어려운 현실에도 지적 호기심으로 그 많은 책들을 마련하고도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세무공무원으로 재직한 그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것으로 소양을 싾은 나와 조카들도 당장은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 다만 셋째 여자 조카는 드라마 작가는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하고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다. 남편과 그는 민주투사가 되어 오늘도 평범한 생활인이 되어 지낸다. 조카사위는 군부 독재정부에 찍혀 제대로 직장생활을 하지 못했다. 가족 모두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의 기억도 거짓말을 한다. 다만 방식에 따라 수동태, 중동태, 능동태로 분류할 수 있다.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면 족한데 여러 번 이야기하는 것은 차마 통증을 거론하는 것은 민망하다. 그러나 잠을 청할 때 가장 좋은 법문은 지휴 스님의 ‘깨달음은 없다’에 점수를 준다. 오온은 내가 없다는 주장인데 그러므로 자아는 없다는 주장에 동의하므로 지적 갈등이 없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손녀와 약속한 책을 쓰는 자세는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상식적 사실만을 서술할 뿐이며, 예를 들어 탄생과정에서 나오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나 붓다가 왕자였다는 것은 다만 ‘포교를 위한 과장법’으로 돌릴 예정이다. 분명 설화와 사실을 분명 가리는 것은 붓다의 말씀으로 봐서도 올바른 짓임을 주장한다. 어쩌다 밤중에 깨어보면 소적 울음소리 여전하고 산짐승 우짖는 소리 변함없이 들린다.
혜민 스님의 ‘참나’에 대하여 아트만 사상이라는 무아론자인 포항공대 수학 교수 강병균 교수의 소리는 내게 온 산을 흔드는 호랑이 울음소리로 들린다. 의문이 깨지 않았다는 은유적 상징이다. 성철 스님의 대한 돈오돈수에 대해 사기꾼 같다는 소리에 “에이”하고 반발하는 도반의 소리는 내게 다시 생각하라는 의미로 들린다. 나름의 수행방식이 다르고, 수행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서운할 것도 없다.
230.마가다王 빔비사라와 꼬살라데위/웨데히(마가다왕 마하꼬살라의 왕, 빠세나디의 누이) 사이에 아자따삿뚜 탄생
231.빠세나디는 마하꼬살라의 아들
242.비구들의 수행
하루일과 흔히 六時行道라 하여 밤낮을 여섯으로 쪼개어 지냈다. 다만 음식은 오전에 탁발을 하므로 재가자들이 주는 대로 버리지 않고 먹었는데 채식에 한정하지 않았다. 三淨肉에 한하여 어류나 육류도 먹을 수 있었지만 이튿날까지 보관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三淨肉: 자기를 위해 죽여지는 것을 보지 않는 과 소리를 듣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여진 것이라고 의심되지 않는 육류.
244.포살
-自恣 布薩, poṣadha<산>
어느 때 붓다께서 일사능가라(一奢能伽羅) 숲속에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나는 두 달 동안 좌선하려 한다. 밥을 가져오는 비구와 포살할 때를 제외하고 비구들은 내게 오지 마라.”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두 달 동안 좌선하셨는데, 밥을 갖다드리는 비구와 포살할 때를 제외하고는 어떤 비구도 세존께 가지 않았다.
<雜阿含經 제29권 제11경>
자자(自恣)는 여름 안거가 끝나는 날에 수행자들이 한곳에 모여 자신의 잘못을 서로 고백하고 참회하는 의식이다. 포살(布薩)은 ⓢpoṣadha ⓟuposatha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고, 단식(斷食) · 정주(淨住) · 선숙(善宿)이라 번역한다.
출가자들은 음력 매월 15일과 29일(또는 30일)에 한곳에 모여 계율의 조목을 독송하면서 그동안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고, 재가(在家)의 신도는 6재일(齋日), 즉 음력 매월 8 · 14 · 15 · 23 · 29 · 30일에 하루 낮 하룻밤 동안 8재계(齋戒)를 지키는 의식이다. 8재계는 다음과 같다.
*8재계
① 이살생(離殺生)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다.② 이불여취(離不與取)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는다.③ 이비범행(離非梵行)청정하지 않은 행위를 하지 않는다.④ 이허광어(離虛誑語)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⑤ 이음제주(離飮諸酒)모든 술을 마시지 않는다.⑥ 이면좌고광엄려상좌(離眠坐高廣嚴麗牀座)높고 넓고 화려한 평상에 앉지 않는다.⑦ 이도식향만이무가관청(離塗飾香鬘離舞歌觀聽)향유를 바르거나 머리를 꾸미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⑧ 이식비시식(離食非時食)때가 아니면 음식물을 먹지 않는다. 곧, 정오가 지나면 먹지 않는다.
247.창조주는 없다. - 바라문이여, 일체의 모든 법은 원인과 조건을 따라 생기는 것이지 창조주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면 참다운 도리를 얻을 것입니다.
*바라문들에 모함 또는 사주에 의해 출가할 수밖에 없었던 고따마는 훗날 성도 후 샤카족을 방문해서 만난 바라문 –자신을 모함하여 출가하게 한 –을 만나 연기법, 사성제, 무상 고 무아 삼법인, 중도, 팔정도, 오온, 貪瞋痴 삼독에 대해 자세하게 설한다.
250.붓다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들은 梵行을 돕는 훌륭한 사람이다.
사리붓다(사리자) - 우빠딧사? - 生母와 같고 나의 首弟子이며, 법륜을 굴릴 사람이며, 내 다음 자리를 얻어야 할 사람이다. / 자타카경, 숫타니파타, 맞지마니까야에 수록.
목갈라나 – 꼴리따? - 養母와 같은 사람이다.
–마하갓사빠는 흔히 보리수라고 하는 삡빨라나무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삡빨라야나라 하며 마치 金像처럼 잘 생겼다고 함.
262.샤카족의 교만을 항복을 받다.
282,고띠까와 왓깔 리가 자살한 곳 - 이시길리/수정 요망
282.친척들은 거의 출가하고 남은 붓다의 사촌 도또다나의 큰아들 마하나마만/샤카족 최후의 왕이 되었으나
284.붓다의 고향 방문에 대한 설이 여러 가지 – 성도 후 2년이 맞다는 필자의 생각
285.숫도나다의 임종 – 붓다 39세 때. 성도 후 5번째 안거.
287.숫도나다의 茶毘 - 붓다는 “이 세상은 무상하고 고통은 가득하다. 영원한 것이란 어디에도 없고 몸뚱이마저 덧없다. 한세상을 산다는 것이 환상과 같고, 타오르는 불꽃과 같으며, 물에 비쳐진 달그림자와 같다. 모두가 그렇게 잠시 있어 보이는 것뿐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 불길을 열기로 보지 말고 욕심의 불길로 보아라. 욕심의 불길은 이 불보다 뜨겁다. 그러므로 무상한 몸으로 잠시 살다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의 괴로움에서 해탈의 즐거움을 얻어야 한다.”고 숫도다나의 다비식에서 설한다.
291.장인 숩빠붓다의 불만
292.꼬살라 위두다바왕 샤카족 멸망. 후에 거론.
298.야소다라의 출가
311.위빠사까?
313.성도 후 45회의 안거 붓다의 아들 라훌라가 구족계를 받은 후 14번째 안거를 지냈으며 44번째 안거까지 모두 25번의 안거를 함께 지냈다.
315.붓다와 동갑이었던 빠세나디는 꼬살라국의 왕으로서 100명의 이복형제와 100여 명의 신하를 죽였다.
318.빠세나디의 신하 중 준하는 붓다에게 호의적, 깔라는 부정적. - 이야기 전개 붓다는 깔라 계열의 모함으로 출가.
375.샤카족의 멸망
424.임종 열반
433.경전 결집
445.신격화되는 붓다.
2019. 6.6. 도봉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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