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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詩山會 제80회 산행 "북한산(비봉)"

詩山會 제80회 산행 "북한산(비봉)"

 

생략하옵고...

 

지난 일요일 "북한산(비봉)" 산행후기를

신(원우) 이사가 오늘 써서 보내왔기에

 

공람하오니 당일 산행에 참석하지 못한

산우들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지난번에 공지한 바도 있었습니다만,

지리산 종주 계획(5/3~5/5일, 2박 3일)을

준비하고 계시오니 참석하실 산우들은 빠른

시일 내에 총무에게 연락바랍니다...

 

그리고 치악산 산행(3/16) 예약 관계상 꼭

명일(3/5일)까지 참석여부를 연락바랍니다...

 

청평에서 김종화 배.

 

 

시산회 제 80회 “북한산” 산행기 (2008.03.02 / 신원우)

 

 

참석자 : 8(김종화, 나창수, 신원우, 염재홍, 이원무, 이재웅, 임용복, 조문형)

 

 

春三月이다.

어느새 2008년도 두 달이 지나가고 춘삼월의 첫 일요일이다. 아침에 고구마, 곶감, 컵라면을 챙겨 집을 나서려니 집사람이 비가 올 것이라고 예보 했다며 우산을 챙기란다. 좀 일찍 나서서 지하철을 이용해서 1010분 전에 불광역 2번 출구에 도착했으나 아무도 안 보인다.

 

조금 기다리니 반갑게도 이원무를 만나고, 염재홍, 조문형, 김종화, 이재웅이 보이기 시작한다. 김총무의 인원 점검 후 지하철 문 밖에서 기다리던 나창수 원장, 임용복 수석 등 모두 8명의 산우들이 합류하여 단출하게 산행이 시작 되었다.

 

지난달 예봉산 산행 뒤풀이를 하던 다래원에서 이번 산행은 가까운 북한산으로 하기로 정작 제안했던 이경식 산우가 안 보인다며 누군가 한마디 하기도 했다. 날씨가 풀리고 계절이 계절인지라 정말 많은 등산 인파가 지하철 안과 밖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웅성거리고 있다. 이제 등산은 명실 공히 국민운동(여가활동)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나보다.

 

불광역에서 구기터널 방향으로 환경정책평가연구원, 여성정책연구원, 보건사회연구원 앞을 지나서 옛 용화1매표소(현 탐방지원센터)를 들머리로 족두리봉을 향하였다. 요즈음 아침운동을 해서인지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그래도 들머리에서의 첫 오름은 숨차고 힘들다. 나만 그런 건가?, 아니겠지? 모두 비슷한 것이려니 여겨두자. 평소에 뒤에서 따라올 때 더 힘들었던 터라 앞장서서 임용복 산우와 담소하며 한참을 오르는데 뒤에 우리 일행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나즈막한 봉우리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눈 발이 날리기 시작 한다. 포근한 날씨에 살포시 내려오는 함박눈, 함박눈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시가지와 산들의 어우러진 풍광, 낭만적이다. 나창수 원장이 싸온 달콤한 딸기와 이재웅 산우의 자유시간 초코렛으로 먹산 세리모니를 시작하고, 사진담당 이원무 산우의 디카에 모두 한 컷의 사진을 담았다.

 

족두리봉을 끼고 향로봉을 향해 가는 오르락 내리락 눈 발 속의 산행, 아기자기하고 그런대로 괜찮다는 느낌이다. 지난 번 예봉산은 밋밋하게 오르고, 먼지 속을 헤매고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지난 산행과 비교하면 한결 낫다는 중론이다. 하기야 예봉산과 북한산을 어찌 같은 반열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국립공원인데...

 

누군가 시간을 물어 시계를 보니 열두시 하고도 12분을 지나고 있었다. 점심 먹을 장소를 찾으니 마땅치가 않다. 마침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널찍한 곳을 물색하여 자리를 펴려하니 난데없이 일지광풍(한줄기 바람)이 일어, 딴 데 가보라고 한다. 하늘이 막는 곳에서 굳이 밥을 먹을 이유가 없다. 다른 곳을 물색하려고 내려오다가 비봉 아래에서 갈림 길을 만났다...

 

임용복 산우가 몇 차례 다닌 적이 있는 잘 아는 진관사계곡과 비봉을 지나 사모바위에 이르는 능선 길을 두고 어디로 갈까? 망설이는데 흩날리는 눈 발로 시계도 좋지 않으니 여러 산우들의 뜻을 모아 임 수석의 추천대로 진관사 계곡 길을 택하기로 하고 하산이 시작되었다.

 

 

북향의 골짜기 길이라 눈이 쌓여서 모두 아이젠을 착용하고 바삭거리는 소리를 즐기며 여유 있게 내리막길을 재촉했다. 춘삼월에 눈 쌓인 골짜기를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으면서 멸치대가리를 크게 외쳤다. 점심은 하산하여 돼지 바비큐에 한잔하기로 했다.

 

그러나 배꼽시계가 가리키는 허기 때문에 잠간 쉬면서 간단한 요기를 하기로 하였다. 이원무 산우의 찹쌀떡, 내가 싸온 고구마, 곶감.... 먹산 세리모니를 마치고 한참을 내려오는데 골짜기 아늑한 곳에 요란한 텐트가 나부끼는 것이 보인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시산제 행사장이다.

 

그냥 지나치려 하니 기어코 와서 한잔하고 가란다. 산에서 직접 따서 담근 산초술이 감칠맛 난다. 안주까지 김치와 돼지머리 고기를 감아 손으로 권하며 입을 벌리라고 한다. 자연과 함께하는 산사람들의 인심이란게 다 그러하리라.

 

사람의 힘이 아니라 자연의 힘 일게다. 자연 속에 안겨 있으니 너그러워 질 수 밖에, 정겨운 풍경이다. 얻어먹기만 하고 줄게 없어 좀 그러던 차에 이재웅 산우가 아까 돌리다 남은 자유시간 초코렛을 대여섯 명의 여자들만 골라 나눠 준다. 체면치레 잘 했다고 경우에 밝은 임용복 산우의 칭찬으로 이어진다. 기분이 좋은 정경이다...

 

산을 내려오며 詩山會始山祭도 다음부터는 일월 달 보다는 춘삼월이 어떤가? 하는 논의가 있었다. 지난번 유명산 시산제 때 어지간히 추웠고, 어설프던 기억 때문이리라. 건설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앞으로 회장단이 고려해 볼 일이다.

 

그리고 32일 오늘 총동창회 산악회 행사가 관악산에서 열리고 있다는 총무님의 전갈이다. 우리 시산회 산행과 연동을 시키는 것이 옳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부터 그리 하자는 중론이다. 회장단은 참고 하시라. 예전에 총동문회 등산모임에서 무슨 좋지않은 사연이 있는 듯한데 과거사에 메이기보다는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거라면 미래를 위해 산우들이 좋다면 좋은 게 아니겠는가.???

 

천년 고찰 진관사를 내려와 근처의 시산회에서 예전에 가 보았던 돼지 바비큐 집을 찾았으나 문을 닫았다. 그전에 등산시 숯불에 구어 먹던 바비큐가 너무 맛있어 모두 그 맛을 못 잊고 너무들 아쉬워한다. 돼지 바비큐 대신 오리로 메뉴를 정하고 그 옆집에서 오리구이에 맥주에다 빈대떡 파전으로 점심을 마무리하였다...

 

오늘 동반시(“도보순례”) 낭송은 북한산(비봉) 코스를 자주 등반 한다는 염재홍 산우가 한단다...

 

“도보순례” / 이 문 재

 

나 돌아갈 것이다.

도처에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질 것이다.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짐짓 무시할 것이다.

 

 

 

 

나 돌아갈 것이다.

무심했던 몸의 외각으로 가

두 손 두 발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한없이 작아질 것이다.

 

어둠을 어둡게 할 것이다.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즉각 반응할 것이다.

하나하나 맛을 구별하고

피부를 활짝 열어 놓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눈을 쉬게 할 것이다.

 

이제 일하기 위해서 살지 않고

살기위해 일할 것이다.

생활하기 위해 생존할 것이다.

어두워지면 어두워 질 것이다.

 

 

섬진강 도보순례, 작년에 국립공원 제도 도입 40주년을 기념하는 “국립공원 40일 도보순례”, .. “강 따라 산 따라” 무작정 걷고, 또 걷던 생각이 난다. 좀 난해 하지만 그럴싸 하다...

 

오늘도 살 빼러 산에 왔다가 살 붙어서 돌아가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먹는 것을 좀 줄이려고 해도 자꾸 땡기니 아니 먹고 버틸 재간이 없다... 시원한 맥주에 오리고기는 정말 맛있다... 그런데 점심으로 싸가지고 온 컵라면도 다시 집에 싸가지고 가기로 하고 점심은 오리고기에 파전, 빈대떡 안주로 맥주를 마시고 때운 터라 그냥 헤어지기는 모두 섭섭해 한다...

마지막 뒷풀이는 노래방을 가기로 모두 마음이 모아졌다... 불광역 근처에 이원무 산우의 담양 초등핵교 여친이 운영하는 노래방(좋은 노래방)에 들러 기분좋게 노래 한곡씩 하고 오늘의 모든일정을 마쳤다... ............. <국립공원관리공단 신 원우 씀>

 

[추신] : “진관사의 시대별 역사”

 

진관사(津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로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1011(顯宗 2)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진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志)」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진다. 전해 내려오는 연기설화(緣起說話)에 의하면 고려 제5대 경종(景宗;975~981) 때로 거슬러 올라가 981(景宗 6)에 경종이 죽고, 성종(成宗)을 거쳐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獻哀王后;964~1029)는 그의 아들 송()이 왕위에 올라 목종(穆宗)이 되었을 때 천추태후(千秋太后; 獻哀王后)가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된다. 또한 태후는 성종년간에 김치양(致陽)과 정을 통해 몰래 사생아를 낳게 되었고 마침내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이런 정쟁(政爭) 가운데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獻貞王后)와 태조(太祖) 아들인 욱(, 安宗)의 사이에서 난 대량원군(大良院君) ()이 왕위 계승자로 봉해진다. 이를 기회로 태후는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하여 대량원군을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임을 꾀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량원군을 다시 진관대사(津寬大師)가 혼자서 수도하는 삼각산(三角山)의 한 암자로 축출하게 된다.

 

대원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12세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하게 하였다. 대량원군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내게 되는데,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니 대량원군 순이 제8대 현종(顯宗)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대량원군은 재생의 은덕에 대해 고개 숙여 감사하고,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神穴)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神穴寺)로 바꾸기를 청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神穴寺)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津寬寺)라 명하였으며,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됐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1011년 가을에 시작해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을 보았다.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 , 서 승당이 각 30, 청풍당(淸風堂)과 명월요(明月)가 각 10, 제운루, 정재소, 일주문, 해탈문, 종각, 창고 등 상당한 규모로 건립 되었다. 또한 불상과 장엄구, 일상도구 등 사찰에 필요한 일체의 모든 것을 현종이 지원하였다. 현종은 이 진관사에 최고의 정성을 모아 불사를 이룩한 것이다. 완공 하던 해 10월에 낙경법회(慶法會)를 연 후 진관대사를 국사로까지 책봉하였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신 원 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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