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속성 삼법인(三法印)― 무상․고․무아 ―Dr. O. H. de A. Wijesekera(실론대학 산스크리트어 교수)지음. 이지수 옮김
도봉별곡2021. 1. 13. 13:58
존재의 세 가지 속성 삼법인(三法印)― 무상․고․무아 ―Dr. O. H. de A. Wijesekera(실론대학 산스크리트어 교수)지음. 이지수 옮김
1. 무상(無常, anicca)
삼법인(三法印)의 개념은 불교의 해탈관을 이해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삼법인이란 현상계에 속하는 모든 사물의 보편적 속성이다. 즉 이는 아니짜(anicca), 둑카(dukkha), 아나따(anattā)이다. 아니짜란 무상, 덧없음 또는 변천성이며, 둑카란 불만족스러움, 고통스러움, 괴로움 또는 아픔이며, 아나따란 무아, 영구적 자아의 부재, 혹은 비실체성이다. 참다운 통찰(vipassana)과 깨달음에 이르려면 형성된 모든 사물과 과정(saṅkhāra) 내지 모든 현상(dhamma)이 가지고 있는 이들 세 보편적 특성을 관조해야 한다. 이 세 가지 근본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불법(Buddha Dhamma)이 제시하는 최고의 영적 완성을 성취하는 열쇠라고 말할 수 있다.
삼법인 중 그 첫 번째인 무상, 즉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덧없는 변천성은, 경전에서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교설이다. 불법에 따르면, 그것이 신이건 인간이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유기물이건 무기물이건 간에 영구불변하거나 고정 영속하는 것은 없다.
모든 사물은 변천한다는 이 불교의 개념, 다시 말해 불교의 무상의 법칙은 유명한 ‘제행무상(諸行無常, sabbe saṅkhārā aniccā)’(『중부』Ⅰ권, 228쪽)으로, 좀 더 일반적으로는 ‘행은 실로 무상하다(aniccā vata saṅkhārā)’라는 어구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두 어구는 형성된 모든 사물이나 과정이 변천․무상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연구나 어떤 신비적 직관의 결과가 아니라 관찰과 분석에 의해 도달한 체험적 판단이다.
이는 편견없는 사고에 바탕한 것이며, 따라서 순수한 경험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증지부』의 「대품」(大品, 4법수, 100경)에서 세존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비구들이여, 형성된 모든 것[行, 有爲, 상카라, saṅkhāra]은 무상하며, 형성된 모든 것은 불안정하며, 형성된 모든 것은 안락과 만족의 원인이 되지 못하니, 우리는 이 형성된 모든 것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넌더리를 내고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할 것이니라.”
여기서 ‘형성된 모든 것-상카라’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이어지는 교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비구들이여, 지금부터 수십만 년 후에 제2의 태양이 출현하면서 그 뜨거운 열기로 인해 비가 내리지 않게 되고, 모든 초목이 시들어서 말라죽고 냇물과 작은 강들이 말라붙을 때가 올 것이다. 또 제3의 태양의 출현과 더불어 갠지스나 야무나와 같은 큰 강들도 말라버리고, 모든 호수뿐 아니라 큰 바다조차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메루(수미산) 같은 큰 산, 아니 이 광활한 대지마저도 거대한 우주적 대참극 속에 김을 뿜기 시작해서 마침내는 불바다를 이루게 될 것이다. (……) 비구들이여, 이렇듯 형성된 모든 것(상카라, saṅkhāra)은 무상하며, 불안정하며, 안락을 꾀할 거리가 못되니, 그 무상한 본성을 성찰하여 그에 대한 집착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 가르침으로 미루어보아 ‘상카라’라는 말이 얼마나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상카라’란 말은 자연스럽게 발전 또는 진화한 결과로 존재하게 된 모든 사건, 모든 현상을 다 포괄할 뿐 아니라 그것들이 조건지어져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조건지어 지면서 언젠가는 끝이 나서 다시는 볼 수 없게 사라져가게 될 운명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뜻까지 내포하고 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존재(being)란 없고, 다만 끊임없는 생성[有, becoming, bhava]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이전의 원인들이 빚어내는 소산이며, 따라서 의존관계에 의해 생겨난[緣已生, paṭiccasamuppanna] 산물이다. 이전의 원인들 자체도 영속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똑같이 부단하게 생성되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시간적으로 단지 앞서는 측면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동적 과정들이 연쇄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이해해야 하며, 창조되거나 형성된 모든 것은 다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뜻이지 그 자체의 성질 외에 바깥에 있는 제3의 그 어떤 힘에 의해서 창조·형성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일체 사물을 ‘함께 형성된 것(saṅkhata)’으로 간주한다. 이 문맥에서 ‘함께 또는 더불어 형성되었다’는 말은 선행적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나거나, 혹은 생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계에서 경험되는 모든 것이 선행적 조건, 혹은 과정에 의존하여 일어나고 생성되었으며 또 모든 것은 소멸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상응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생성된 모든 것은 사라질 성질의 것이다(yaṁ bhūtaṁ taṁ nirodhadhammaṁ)’(2상응, 49경). 이 법칙은 미물에 대해서나 대범천(大梵天)과 같은 최강의 신에 대해서나 똑같이 적용된다. 『장부』의 열한 번째 경에서는 범천일망정 자신을 영원한 존재로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리스 데이비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물이건 사람이건 한 개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이미 주변과 별개로 불거지게 되었다는 뜻이며, 일단 주변으로부터 튕겨나면, 불안정하고 일시적이어서, 반드시 사라져가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천신들의 경우에는 수십만 년을 살 수도 있으나 어떤 곤충의 경우에는 단지 몇 시간을, 그리고 어떤 화학물질의 경우에는 단지 몇 초간밖에 지속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이건 시작이 있자마자 바로 그 순간에 종말은 시작되는 것이다.”
「미국에서의 강의」에서
이 무상법의 윤리적 의의는 『장부』의 열일곱 번째 경인 「대선견왕경」(大善見王經, Mahā-Sudassana Suttanta)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제자 아난다에게 과거의 유명한 왕인 대선견왕의 영화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가 소유했던 많은 도시와 보물, 궁전에 대해서 그리고 얼마나 많은 코끼리와 말과 수레, 여인 등을 거느렸으며, 그가 이룩한 제왕으로서의 위업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죽는 광경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으신다.
“보라, 아난다여. 이 모든 것들[有爲法]이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채 잊혀지지 않았느냐. 이렇듯 아난다여, 모든 상카라, 유위의 현상계는 무상하구나. 아난다여, 상카라는 믿을 것이 못되는구나. 아난다여, 이것만 봐도 그러한 상카라에 대해 염증을 내고, 넌더리내어,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장부』 Ⅱ권, 198쪽)
부처님께서 형성된 모든 사물과 조건지어진 과정들을 무상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규정하셨을 때, 무엇보다도 염두에 두신 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이 특수한 과정들의 무더기(saṅkhārapuñjā)였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일차적으로 해탈의 길을 제시한 대상이 바로 인간이었으며, 그런 점으로 보아 그 분께서 주로 관심을 기울인 대상도 인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요 문제는 인간의 참된 본질을 알아내는 일이었으며 불법의 놀라운 독창성도 바로 이 분야에서 이룬 위대한 발견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 인간 본성에 관해 내리신 결론은 그 분의 무상에 대한 일반 개념과 완전히 일치한다. 즉, 인간이란 몇 가지 요소들의 복합이며 지속적인 인격체로 보이는 것도 실은 간단없이 변화하고 있는 과정의 집합으로 사실 하나의 지속적 생성(bhava)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을 물질성[色], 느낌[受], 지각[想], 형성력[行], 의식[識]의 다섯 쌓임[五蘊]으로 분석하셨다. 세존께서는 경전에서 이 각각의 쌓임들이 무상하고 불안정한 것임을 거듭거듭 역설하셨다. 『장부』가운데 유명한 「대염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에서 세존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모든 범주들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본성을 가진 것임을 관(觀)하도록 가르치신다.
“물질성은 실로 이와 같다. 그것이 비롯되는 것이 실로 이와 같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실로 이와 같다. 다른 네 쌓임, 즉 느낌, 지각, 형성력, 의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장부』 Ⅱ권, 301쪽)
사실, 영적 삶의 최고 극치는 여섯 가지 감각적 접촉영역[六入]의 허망한 성질을 올바로 인식한 결과로 온다고 한다. 『중부』의 백두 번째 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실로, 비구들이여, 이것이 구경평화에 이르는 온전한 길이니 여래는 이에 대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했던 것이니라. 그것은 바로 감각적 접촉의 여섯 영역에 대한 여실(如實)한 이해이며, 그들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여실한 이해이며, 그들의 평온함과 고통스러움에 대한 여실한 이해이며, 집착없이 그들로부터 벗어나는 길에 대한 여실한 이해이다.”
(『중부』Ⅱ권, 237쪽)
윤회를 연속시키는 원인, 달리 표현하면, 생성(bhava)을 지속시키는 것은 이들 여섯 가지의 감각적 접촉의 영역이며, 그래서 이들이 유위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유위법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빠알리 경전에 자주 반복되는 문장이 있다.
“실로 형성된 모든 사물은 생성, 소멸하게 마련이다. 태어난 것은 죽음에 이른다. 생성의 종식이야말로 지복(至福)이니, 그것이 평화이다.”
2. 고 - 불만족성[苦, dukkha]
현상계의 형성된 모든 사물과 과정이 갖는 첫 번째 특성인 무상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다루었다. 삼법인의 두 번째는, 모든 윤회하는 존재의 보편적 특성은 고(苦)라는 것, 즉 존재의 전반적 불만족성이다. 실제로 둑카(dukkha)라는 빠알리어는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 말 중의 하나이다. 영어로는 흔히 sorrow(슬픔), 혹은 ill(불행), 심지어 어떤 이는 pain(아픔), suffering(고통)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역어들은 너무 특수화되었거나, 너무 제한적 의미의 단어이며, 또 대개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빠알리어의 ‘둑카’가 뜻하는 바와 같은 의미를 표현하지 못한다. 게다가 빠알리 경전에서도 이 말이 여러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번역하기가 더 어렵다. 넓게 철학적인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고 좁게 심리학적인 뜻으로 쓰인 것도 있으며 더 좁은 뜻으로 신체와 관련해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unsatisfactoriness(불만족성)’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둑카의 넓은 철학적 의미를 가리키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적어도 삼법인이라는 이 특수한 맥락에서는 아마도 가장 적합하게 옮긴 술어라고 생각된다.
일부 불교 저술가들이 뭐라고 말했건, ‘둑카’의 실재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불교의 가장 본질적 개념을 드러내는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신 후 행하신 첫 설법에서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이 개념을 정형화시키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 중 고성제이다. 태어남이 고이고, 늙어감이 고이고, 병듦이 고이고, 죽음이 고이고,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고이다.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그것도 고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그것 역시 고이다. 요컨대 집착에 근거한 이 ‘나’라는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가 바로 고이다.”
(『상응부』5상응, 421경)
‘불만족성’이라는 보편적 사실에 대한 이와 같은 관찰이 부처님께서 발견하고 선포하신 영적·도덕적 향상체계의 중심축이라는 것은 편견에 젖지 않은 불교연구가라면 누구나 곧 깨달을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모든 경험의 시작과 지속과 종말, 이것이 중생의 전 세계(loka)인데 그 경험의 중심은 그 자신의 개체성[名色], 다시 말해 그 개체를 구성하는 오취온(五取蘊) ― 물질성, 느낌, 지각, 형성력, 의식이다. 이 개체성의 가시적 근거가 신체인데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이 신체는 지, 수, 화, 풍의 네 기본 요소로부터 도출된 물질적 구성요소들의 산물이다. 그래서 신체를 두고 사대(四大)로 구성되었다하며 따라서 사대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이라고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무상’의 장(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대의 보편적 특성은 무상성이며, 사려깊은 사람이라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굳이 많은 학식을 필요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둑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상의 이해가 전제되는 만큼 사대(四大)의 무상함에 대해 조금 더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물의 요소가 맹렬하게 기세를 부릴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땅의 요소가 사라질 것이니 그것의 덧없는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무너져 파괴되고, 변천할 것이다. 또한 물의 요소가 말라버려, 단 한 치의 땅을 덮을 물도 바다에 남지 않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때에는 이 물의 요소가 덧없는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무너져 파괴되고, 변천할 것이다. 불의 요소가 맹렬히 일어나서 모든 지표를 삼키고 더 이상 집어삼킬 것이 없을 때야 비로소 그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날엔 이 불의 요소가 그 덧없는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파괴될 것이다. 바람의 요소가 맹렬하게 일어나 촌락과 도시와 지상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고 마침내 스스로 기운이 빠져 쓰러질 때가 올 것이다. 그때에는 이 바람의 요소는 그것의 덧없는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무너져 파괴되고, 변천할 것이다.”
(『중부』Ⅰ권, 187쪽)
그러므로 네 가지 기본요소에 포함되는 모든 것은 보편적인 무상의 법칙에 종속됨을 보여주며, 이 네 기본요소의 파생물인 육신도 그 기본 구성물과 동일한 운명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간단히 추리할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여 육신과 감각기관에 기반한 우리 개체의 나머지 구성요소들의 무상성, 혹은 변천성을 밝히신다.
“비구들이여, 육신[物質性]은 무상하다. 그리고 육신을 생성시키는 토대가 되는 것[四大] 역시 무상하다. 무상한 것으로부터 생성된 것이 육신일진대 어찌 그것이 영구할 수 있겠는가?
감각과 느낌은 무상하며, 이들을 생성하는 토대가 되는 것, 즉 신체에 의존한 감각기관도 역시 무상하다. 무상한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감각과 느낌일진대, 어찌 그것이 영구할 수 있겠는가? (……) 마찬가지로 지각과 형성력 그리고 의식, 이 모든 것이 무상한 것으로부터 생긴 것이며 따라서 무상할 수밖에 없다.”
(『상응부』3상응, 23경)
모든 것에서 생성과 변천과 소멸을 관찰할 수 있다. 개체를 이루는 그 모든 것의 이와 같은 무상한 성질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덧없고 본질적으로 비지속적이기 때문에 만족스런 경험을 위한 근거가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무상한 것은 무엇이건 바로 그 무상성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것이다(yad aniccaṁ taṁ dukkhaṁ 『상응부』3상응, 22경). 그러므로 모든 인격체 또는 개체 (그것이 윤회하는 과정에서 이 세상 또는 저 세상에서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리고 개체성에 의존할 뿐인 저 모든 경험 세계 등 모든 것은 결국 불만족스러운 것이라는 불교의 진리가 확립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구들이여. 육신은 영원한가, 아니면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 그것은 만족스러운가, 만족스럽지 못한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 지각, 형성력 그리고 의식, 이 모든 것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그것들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 그것은 만족스러운가, 만족스럽지 못한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중부』Ⅰ권, 139쪽)
그래서 이 보편적 불만족성은 윤회세계의 모든 경험의 전반적 특성으로 간주되며, 여기서 둑카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가 성립된다. 이지적인 사람에게는 이 모든 이야기가 자명한 것으로 들릴 것이다. 그런데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기본원리를 이루는 이 자명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관심조차 가지려들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좀더 깊이 탐구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괴로움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마음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심리는 즐거운 것은 추구하고 즐겁지 못한 것은 피하게 마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을 앞에서 사용하던 어휘로 표현하자면, 중생은 자기에게 만족스러운 것은 좇아가고 불만족스러운 것으로부터는 뒷걸음쳐 물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 불교 비판가들은 유정물의 모든 심리가 즐거움의 여부에 그처럼 강력하게 지배당한다고 규정할 확실한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을지 모른다. 이러한 분들에게는 현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도 부처님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던 사실을 잠시 상기시켜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프로이트는『쾌락 원칙을 넘어서』(Beyond The Ple- asure Principle)라는 그의 유명한 저서를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한다.
“정신분석학적 견해로 볼 때 우리는 정신적 사건의 경로가 쾌락 원칙에 의해 자동적으로 통제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사건들의 경로는 반드시 불유쾌한 긴장에 의해 발단되며, 그 최종적 결과는 그 긴장의 완화, 즉 불유쾌를 피하고 쾌락을 얻도록 방향을 잡는다고 믿는다.”
이렇게 해서 프로이트는 그의 심리과정 연구에 그가 ‘경제적’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을 도입하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2500여 년 전에 같은 원칙을 거의 똑같은 용어를 써서 공식화하셨다는 것은 인류 사상사를 통해 주목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만일 인간이 본성상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한 것을 피하려는 자신의 무의식 과정에 의해 추동(推動)된다면, 자신의 모든 경험을 무상과 불만족성으로 규정하는 철학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깨달음 직후에 이 보편적 괴로움에 관한 진리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맑은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극히 소수일 뿐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불만족성’에 대한 이 간략한 해설을 매듭짓기 전에 한가지 점만은 꼭 밝혀두어야 할 것 같다. 즉 ‘만족스럽지 못함’의 실상이 그처럼 모든 경험의 보편적인 특성이라면 불교는 별 수 없이 비관주의를 표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구심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견해가 전적으로 그릇된 것임은 경전 자체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불교에서 사물을 보는 데는 낮은 관점과 높은 관점의 두 관점이 있다. 괴로움을 관찰함에 있어서도 물론 이 두 관점이 있다. 낮은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경험세계, 즉 감각과 느낌의 영역[受, vedanā]에는 즐겁거나 행복한 느낌[樂受], 불쾌하거나 불행한 느낌[苦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不苦不樂受]이 있다.
모든 개인적 경험에 두루 적용되는 낮은 차원의 상대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 주어진 순간에 있어 개인적 및 환경적 조건에 따라 서로 우열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세상에는 ‘불행’과 마찬가지로 소위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느낌을 더 깊이 검토해보면, 이 세 가지 유형의 경험들 사이에는 반드시 공통분모가 있다. 즉, 이 세 종류의 경험이 모두 무상 혹은 변천이라는 보편적 속성에 종속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리뿟따는 세존께 만일 감각과 느낌의 본성에 관해 질문 받으면 이같이 답해도 괜찮겠는지 묻는다.
“감각과 느낌에는 정녕 세 가지가 있으니, 벗이여, 즐거움, 괴로움,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것의 세 가지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경험은 모두 무상하다. 그리고 무상한 것은 무엇이나 둑카를 야기시키는 것임을 알 때 그들 경험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마지막 문장에서의 ‘둑카(dukkha)’는 이 장(章)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철학적인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에 대해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사리뿟따의 말을 흔쾌히 수긍하셨다.
“옳다. 사리뿟따여, 바로 말했다. 그것이 바로 그러한 질문에 요령있게 답하는 정확한 방법이다. 감수된 것은 어떤 것이든 (무상한 것이며) 모두 둑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yamkiñci vedayitaṁ taṁ dukkhasmiṁ).”
(『상응부』 2상응, 53경)
윤회세계의 모든 경험은 이러한 의미에서 ‘감수된 것(vedayita)’이며 따라서 윤회세계의 모든 생성(bhava)을 높은 관점에서 볼 때에는 둑카, 즉 불만족스러운 것이라는 의심할 나위없는 대명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또한 확고부동한 불교의 낙관론, 즉 윤회세계의 고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있고, 절대적 평화와 적정(寂靜)의 안식처가, 다시 말해 열반의 절대 행복이 있다는 대긍정 역시 이 둑카의 명제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3. 무아(無我, anattā)
무상과 불만족성이라는 두 법인에 대해 이상과 같이 논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무아’ 혹은 ‘무실체성’이라는 불교의 기본적 개념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개념은 불교의 모든 기본적 사상 가운데서 말썽의 소지를 가장 많이 안고 있는 것으로서, 수많은 주석가나 학자, 비판자들에 의해 구구한 해석이 전개되어 왔다. 서양의 불교학도들에게는 이른바 ‘무아설’이라고 하는 것이 개인적인 창의력과 번쇄한 변증능력을 과시하는 절호의 기회로 이용되어 왔지만, 반드시 성공적인 것은 아니어서 그들 사이에서나 심지어는 동일 저자의 여러 저작 속에서도 첨예한 모순을 노정시켰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불교권의 여러 학파 간에서도 이 개념은 난제 중의 난제였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들 해석자들이 가장 애를 먹게 되는 주된 원인은 ‘자아(attā)’라는 낱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결여하고 있는 탓이 아닐까 한다. 사실 저술가들이, 특히 서양의 저술가들이 ‘아따[自我]’에 대하여 별다른 개념정의도 갖추지 않고 단지 불교연구에 착수하기 이전에 그들에게 익숙한 유신론적 혹은 범신론적인 철학이나 종교체계로부터 빌려온 ‘영혼’이니 ‘에고’니 하는 개념만으로 무장한 채 무아설에 대한 논의로 뛰어든다는 것부터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는 그러한 해석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없으며, 다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강조하고자 한다. 즉, 빠알리 경전에 나오는 ‘자아(attā)’라는 말은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에 성행하던 여러 가지 역사적인 개념들을 반영하여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그러한 특수한 맥락을 검토하는 가운데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삼법인 중 세번째로 모든 사물[一切法]의 보편적 특성(sabbe dhammā anattā)을 표현하여 ‘아나따(anatta)’라는 형용사가 사용된 맥락에 한정짓고자 한다.
앞의 두 장(章)은 형성된 모든 사물과 과정들의 무상성과 그리고 이들로부터 나온 이른바 오취온의 일반적 불만족성을 다루었으며, 특히 이 중 두 번째 장(章)에서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셋으로 나뉘는 감각과 느낌[受]을 다루었다. 그리고 일반적 불만족성[苦]이라는 두 번째 특성은 무상성이라는 첫 번째 특성으로부터 직접 도출되는 것임을 밝히고자 관련된 경문을 인용하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모든 경험의 일반적 불만족성의 필연적 결과로서 삼법인의 세 번째 진리에 대한 자각, 즉 모든 물질적·정신적 상태와 현상의 보편적 특성이 바로 ‘무아’임을 어떻게 깨닫게 되는가를 밝힐 때가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부터 들어보자.
“비구들이여, 물질적 형태[色]는 무상하다. 그리고 무상한 것은 어느 것이나 불만족스럽다. 불만족스러운 것은 무엇이건 무아이다. 그리고 무아인 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
(『중부』 Ⅰ권, 139쪽)
개체를 이루는 다른 네 가지 쌓임, 즉 감각과 느낌[受], 인식과 지각[想], 심리적 과정과 반사작용[行], 마지막으로 개인의 의식자체[識]에도 똑같이 정밀한 논리가 차례로 적용된다. 특히 무아의 보편적 특성을 마지막으로 의식에 적용한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이 설명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이룬다. ‘윈냐나[viññāṇa, 識]’라는 빠알리어가 유정물의 가장 내면적인 심적 경험까지 포함한 것임을 상기한다면, 부처님께서 생각하셨던 ‘무아’의 특성이 어떻게 예외를 용납하지 않고 엄정한 구속력을 지닌 개념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부처님 이전이건 이후이건 철학자들이 생각해낸 가장 세련된 자아 혹은 에고라는 개념은 어떤 식으로건 또 어떤 점에서건 자의식, 즉 ‘나는 나이다’라는 의식상태와 관련된 것이었다. 부처님의 경우 이 자의식 또는 ‘나라는 생각(I-ness)’조차도 무상성과 불만족성이라는 불가항력적 특성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그리고 이 특성들에 지배되는 것은 무엇이건 ‘무아’이므로, 이 ‘나’ 의식은 환상 혹은 오류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형용사 ‘무아(anatta)’의 중요한 의미이다. 『중부』의 148경인「여섯의 여섯경」[六六經]에 이 개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자세한 분석이 나온다.
“만일 혹자가 눈(보는 작용)을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눈이 생하고 멸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분명하기 때문이다. 눈의 생멸이 확실한 이상 눈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자아가 생멸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므로 눈을 자아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눈은 무아임이 증명된다. 마찬가지로 만일 혹자가 형상(색 또는 보여 지는 대상)을 자아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똑같은 이치로 옳지 않다. 그러므로 눈과 그 눈이 인지한 형상 모두가 무아이다. 똑같은 논리가 시각적 의식[眼識]에도 (만일 이것을 자아라고 여긴다면) 적용되며, 다시 시각적 접촉[眼觸]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눈, 그 대상인 형상, 시각적 의식, 시각적 접촉이 모두 무아이다. 그것은 또한 ‘이상의 넷으로부터 일어나는’ 느낌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눈, 그 대상, 시각적 의식, 시각적 접촉, 그 결과적 느낌, 이 다섯 가지가 모두 무아이다. 그것은 또한 마지막으로 이상의 다섯과 연결된(본능적) 욕망(taṇhā)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눈과 그 대상, 시각적 의식, 시각적 접촉, 그로 인한 느낌, 그리고 마지막으로 욕망, 이 여섯 가지 모두가 무아이다.
그리고 눈, 또는 시각에 적용된 것이 똑같이 다른 다섯 감관(마지막 것은 감각기관으로서의 마음[意, mano])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마음이 자아라고 말해도 그 또한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마음[意], 혹은 그 대상[法, dhamma], 의식(意識), 심적 접촉[意觸], 그 결과적 느낌, 이 모든 것과 연결된 욕망이 자아라고 주장하는 것도 허용될 수 없다. 그들 모두는 무아이다. 이 무아인 것들을 놓고 ‘이것이 나의 것이다’ ‘나는 이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구적 개체성, 혹은 인격체의 개념이 발생하는 것이다.
영구적 인격체라는 견해를 지멸(止滅)시키는 길은 보기, 듣기, 냄새맡기, 맛보기, 몸으로 접촉하기, 생각하기 그리고 그들에 부수되는 현상을 ‘나의 것’ 등으로 간주함을 멈추는 일이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자아 혹은 영구적 인격체[有身, sakkāya]라는 견해의 윤리적 의미를 설하신다.
“눈과 시각 대상을 조건[緣]으로 하여 시각적 의식이 일어나며, 이 셋 모두의 만남이 접촉이다. 그 접촉으로부터 느낌이 일어나며, 그것에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다. 사람은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그것을 반기고, 환호하고 움켜잡으며 열정적 경향[執着]을 일으킨다. 또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는 괴로워하고, 불행을 느끼고,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비통해하며, 혐오감을 일으킨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그 느낌의 발생, 소멸, 쾌적, 위험, 가져올 결과 등에 대해 참다운 인과적 이해를 갖지 못하여, 그로 인해 일종의 무지적 경향이 생겨난다. 따라서 먼저 쾌락적 감정의 열정적 경향을 버리지 않고서는, 또 불쾌한 감정의 혐오적 경향을 버리지 않고서는, 무덤덤한 감정의 무지적 경향을 피하지 않고서는, 무지를 버리지 않고서는, 그래서 고(苦)가 일어나는 것을 발생과정에서 중단시키지 않고서는 고를 지금 여기서 종식시키는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시각에 대하여 적용된 것이 나머지 다섯 감각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중부』 Ⅰ권, 139쪽)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완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개체[名色]의 전 발생과정을 관(觀)함으로써 자아 혹은 영속적인 인격체의 개념을 분석하고 나아가서 이 그릇된 오류를 발생시키는 원천인 경험 전체를 그 구성부분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말고 세밀하게 분석하도록 제자들에게 훈계하신다.
이상의 서술에서 무상, 고, 무아의 세 개념, 즉 삼법인이 불교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밑받침하는 세 주춧돌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삼법인의 타당성을 확신하게 되면 이는 곧 불법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 되며, 따라서 이 확신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는 어중간한 타협점이 있을 수 없다. 불교도를 자칭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주관적·객관적 양면으로 경험하게 되는 이 세계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해 깊이 숙고해보는 것이 마땅하며, 또 세존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그러한 확신으로부터 파생되는 윤리적 원리를 우리 자신과 사회생활에 적용하여, 마침내 이 세 가지 속성[三法印]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즉 열반의 영원한 희열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