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我는 三法印(혹은 四法印)의 하나로 불교철학의 특색을 보여주는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우빠니샤드(upanisad)의 아뜨만(atman)과 비교되는 개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빠니샤드의 중심철학이 아뜨만론(atma-vada;我論)이고 불교철학은 이에 반하여 無我論(anatma-vada)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관점에서 볼 때, 불교철학의 無我는 우빠니샤드의 아뜨만(我)과 상호 반대되는 용어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방식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불교의 無我論은 우빠니샤드의 아뜨만론을 否定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반대말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그 개념내용도 반대라고 단정하는 것은 無理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어떤 철학체계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의 의미는 그 철학체계 속에서 그 용어의 의미를 적출하여야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교철학에서 無我라고 하는 표현의 ‘無’와 ‘無我’개념을 재고찰해 보고자 한다.
‘無我’를 재검토하고자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無我’라는 용어는 한문번역이라는 점이다. 단지 한문번역이라는 점때문에 이것을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阿含經보다 비교적 철학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있는 雜阿含經을 보면 無我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無我’라고 하는 용어보다는 ‘非我’라고 하는 용어가 더 일반적이고 자주 쓰이고 있다. 이 점은 南傳의 빨리(pali)經典과 대조해 볼 때 흥미있는 것이다.
빨리經典의 anatta를 漢譯의 阿含에서는 ‘無我’와 ‘非我’로 각각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또 漢譯經典의 原典이라고 하는 梵語經典에서는 어떤 말이 사용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漢譯經典의 서로 다른 글 가운데에서 ‘無我’와 ‘非我’가 아무런 반성없이 혼용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漢譯經典의 원전이라고 하는 梵語經典에서도 ‘無我’와 非我’에 대응하는 용어는 anatma(n)임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無我’와 非我’ 가운데 어느 것이 보다 적절한 용어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無我’와 ‘非我’에서 ‘我’라고 하는 말의 내용이다. 즉 우빠니샤드의 아뜨만과 동일한 내용인지 아니면 다른 내용인지를 알아보기 이전에 불교철학에서의 ‘我’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셋째, ‘無我’와 ‘非我’에서 ‘無’와 ‘非’는 그 표현내용이 다르다는 점이다. 無는 有와 對를 이루는 것으로 존재의 상태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非는 是와 짝을 이루어 어떤 내용의 肯定과 否定을 표현하는 말이다. 따라서 ‘無我’와 ‘非我’는 마구 혼용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몇 가지 점에 유의하여 無我의 의미를 밝힘으로써 어설프게나마 불교철학 전반에 대한 이해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無我에 관한 검토는 기존에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無我’대신 ‘非我’를 주장하는 英國의 C.Rhys Davids와 日本의 中村元의 견해를 특히 염두에 두고자 한다.
Ⅱ. 無我와 非我
1. 無我와 非我
漢譯經典의 無我와 非我는 빨리경전과 비교해 볼 때, 동일한 용어를 번역한 말임을 알 수 있다. 단, 빨리經典이 漢譯經典의 원전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서로 다른 漢譯經典을 빨리경전과 비교하여 無我와 非我가 동일한 용어의 번역임을 밝혀보고자 한다.
…… rūpaṃ bhikkhave anattā. vedanā anattā. ……. (S. 22. 14)
이상의 漢譯 ?阿含經?과 빨리經典을 비교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漢譯經典은 色의 無常을 대표적으로 거론한 다음 受想行識도 無常하다고 일괄적으로 언표하고 있다. 또, 五蘊이 無常한 것과 마찬가지로 五蘊은 苦․空․非我라고 총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빨리經典은 S. 22. 12에서 五蘊의 無常함을 하나하나 거론하고 있으며, S. 22. 13에서는 五蘊의 苦를 설명하고, S. 22. 14에서는 五蘊의 非我를 말하고 있다.
이 글은 佛說五蘊皆空經이라 하여 大正藏 제2권 p.499 下에 독립적으로 실려있기도 하다.
위의 인용 중에서 (33)의 ‘色非是我’는 (34)의 ‘色非有我’와 같은 말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非是我는 非有我와 동일한 의미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佛說五蘊皆空經에서는 ‘色不是我’라고 하고 있다. 어느 경우에서든 色이라 하는 용어는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非是我, 非有我, 不是我 라고 하는 句節이다. 非是我와 不是我는 표현상 我의 否定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非有我는 좀 다르다. 왜냐하면 非有我는 단순한 我의 否定이 아니라 有我에 대한 否定이기 때문이다. 즉 非有我는 我의 有(있음,存在)에 대한 否定(非)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我와 有我는 의미내용을 달리한다. 我는 단순한 대명사이지만 有我는 我의 존재상태와 관계있는 말이다. 그러면 非是我와 非有我 가운데 어느 쪽이 좀더 타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빨리경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빨리어는 漢文과 언어구조가 다르고 漢文經典의 原典이라고 하는 梵語原典의 梵語와 그 언어구조가 상호접근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위에 인용한 漢文經典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빨리경전은 S. 22. 59 이다. S. 22. 59에서 色非是我 혹은 色非有我와 같은 문장은 ‘rūpaṃ bhikkhave anattā’이다.
다시 ‘色非是我’ ‘色非有我’와 ‘rūpaṃ bhikkhave anattā’를 一對一로 對應시켜보면 rūpaṁ-色, bhikkhave-比丘, anattā-非是我 혹은 非有我가 된다. 즉 anattā를 漢文經典은 非是我 혹은 非有我로 번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anattā는 否定을 의미하는 a(n)과 我를 나타내는 attā(attan)로 구분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용법을 살펴보면 ‘無我’ 보다는 ‘非我’가 원래의 의미에 충실하다. 이렇게 본다면 anattā에 가까운 번역은 非有我보다는 非是我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非有我의 有는 有無의 有가 아닌 虛辭的인 표현법이라고 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즉 attan은 有我라기 보다는 我의 의미로 보는 것이 온당한 것처럼 anatta 역시 非我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以色無我故’와 對應하는 표현도 ‘yasmā ca kho bhikkhave rūpam anattā tasmā rūpam ……’이다. 여기에서 無我라는 용어는 anattā와 상응함을 알 수 있다.
여하튼 anattā는 attā의 否定이다. 단 그것이 存在의 否定인지 아니면 단순한 부정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이 점에서 漢譯 잡아함경의 용례와 그 頻度數는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無我와 非我라고 하는 말의 出現頻度數를 비교하여 보면, 無我보다는 非我가 훨씬 많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非我라고 하는 단순한 否定은 無我라고 하는 存在의 否定보다 그 否定의 범위가 넓다고 하는 점에 다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자면 我의 意味가 存在이건 槪念이건 관계없이 非我는 我의 否定的 表現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非有我나 無我는 我의 存在에만 관계되는 否定的 表現이기 때문에 그 否定의 범위가 限定的 制限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思考의 柔軟性이 制約을 받게 된다.
이렇게 보면 문제가 되는 것은 我의 내용과 非我의 主語이다. 즉 我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非我라는 述語와 관계되는 主語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불교철학에서의 我가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非我 보다는 無我라고 하는 말이 고정적으로 사용되었을까?
2. 我
我의 의미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우빠니샤드의 아뜨만과의 비교뿐만이 아니라 불교철학의 근본내용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항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불교의 無我論은 우빠니샤드의 아뜨만론과 상대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我가 반드시 우빠니샤드의 아뜨만과 상대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뜨만과 다른 내용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입장과는 다른 각도에서 불교의 無我와 우빠니샤드의 아뜨만에 대한 견해는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인용된 경우를 살펴보면 한결같이 我가 五蘊(色․受․想․行․識)으로 간주되는 경우를 지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我는 五蘊의 我이다.
阿含經을 보면 “於此五受陰正觀非我非我所”라 하여 ‘色이 만일 我라면 色에 病苦가 생길 까닭이 없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色은 無我인 까닭에 病苦가 생기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受想行識도 마찬가지이다. …… 五受陰은 我도 아니고 我所도 아니다’라고 한다. 또 ‘沙門이나 婆羅門이 我를 헤아리는 것은 모두 五受陰에서 그러는 것이다’라 한다. 즉 五受陰은 我도 아니고 我所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경우 我와 관계되는 것은 五蘊이다. 일반적으로 色은 외적인 것이고, 受想行識은 내적인(정신적인) 것으로 크게 분류하여 名色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五蘊, 즉 이름이나 외형은 我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色은 我가 아니고, 受도 我가 아니고, 想도 我가 아니고, 行도 我가 아니고, 識도 我가 아니다. 이렇게 五蘊이 我가 아니라고 하는 근거는 五蘊의 無常이다. 즉 ‘色無常, 無常卽苦, 苦卽非我’의 論據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無常한 것은 모두 我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我는 常한 것이라는 迂廻的인 표현으로 看做할 수도 있다. 더불어 我는 情緖的으로 樂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常=樂=我라고 하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는 언급하지 않고 단지 無常한 五蘊은 我가 아니라고만 한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苦, 我所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非我非我所’에 이어지는 글을 보면 “如實觀察, 如實觀察已, 於諸世間都無所取, 無所取故無所著, 無所著故自覺跡槃”이라 한다. 世間의 我는 我所로 이어지고, 我所는 取著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無常, 苦, 非我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다시 말하자면 일상적인 경우에 我라고 하는 것은 無常과 苦의 乖離에서 출발하는 取著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동시에 이것은 모든 取著의 根源이다. 無常은 情緖的인 것이 아니라 如實한 觀이다. 반면에 苦는 情緖的인 것이다. 無常한 것을 常한 我로 보고 所有 取著하는 속에서 苦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如實한 觀과 無常한 情緖 사이의 乖離를 脫離하고자 하는 것, 즉 乖離라고 하는 束縛으로부터의 解脫이 非我가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다. 非我는 常한 我가 아닌 無常한 五蘊의 我를 常한 我로 보고 그것에 取著하는 世間의 마음을 矯正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常한 我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無常한 五蘊의 我는 분명히 克服의 對象이다. 그것을 ‘非我 非是我’라고 하는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어떤 我가 있다 없다는 것이 아니라 五蘊의 我는 (常한) 我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我의 意味가 多元的이라는 것이다. 世間의 我로부터 해탈한 出世間의 我를 想定하는 것이다. 다만 世間의 我는 世間의 言說로 否定될 수 있지만 出世間의 我는 그 존재를 世間의 言說로 否定하거나 肯定할 수 없는 것으로 언어표현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出世間의 我를 想定한다는 것은 形而上學的인 논의를 수반하게 되어 결국 戱論에 빠지게 되고, 出世間의 我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에는 그에 대한 표현방법의 문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논자는 이 두 가지 문제점의 해결이 ‘無我’라고 하는 용어와 깊이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無我’라는 표현으로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無我의 無는 有無의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世間의 언설로 出世間의 我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둘째, 我는 所有의 對象이 아니라는 것이다. 主體는 主體일 뿐 對象的인 客體가 아니기 때문에 五蘊과 같이 對象化되어 표현될 수 없다. 따라서 我는 主語와 述語로 구분되어 표현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述語的으로 對象化 客觀化될 때, 우리는 그것을 否定的으로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對象化되고 二分化되었을 때, 所有欲이 생겨나게 되고 거기에서 苦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二分化는 서로간의 갈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갈등은 서로에 대한 소유와 배타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은 苦이고, 苦의 근원은 無常한 五蘊이 我라고 보는 왜곡된 見解이다. 바로 이 점을 非我와 非我所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五蘊뿐만 아니라 眼耳鼻舌身意의 六入(六根)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說破하고 있다.
과거․미래의 眼은 無常하다. 하물며 현재의 眼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 耳鼻舌身意도 이와 같다.
眼耳鼻舌身意의 六入이 無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도 苦이고 非我이다. 또 六根(六內入處), 六境(六外入處), 六識身 모두에 대해서도 ‘六內入處如實無我’, ‘六外入處如實無我’, ‘六識身如實無我’라고 한다.
이상을 정리하여 보면, 非我나 無我의 主語가 無常한 五蘊․六根․六境․六識身으로 이루어진 我라고 한다면 非我라고 하든 無我라고 하든 그 내용에는 별 차이가 없는 듯하나 ‘我와 我所 그리고 나 자신’이라는 말을 고려한 다면 非我라고 함이 온당하다고 할 수 있다. 즉 無我는 ‘我와 我所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我와 我所 그리고 나 자신이 있다’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독립적인 용어로써 無我의 ‘無’자를 살리고자 한다면 無의 我라고 표현하여 일상적인 我와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我는 表現說明이 가능한 일상적인 我와 解脫의 我는 구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無我는 主語를 필요로 하지 않는 語句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無我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經典上의 文脈에는 적용될 수 없다.
3. 無와 非
無我와 非我에서 술어로 사용되고 있는 無와 非는 각각 우리말의 ‘없다’ ‘아니다’에 해당한다. ‘없다’와 ‘아니다’는 否定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뉘앙스는 사뭇 서로 다르다.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있지 않다는 의미의 존재 부정이고, ‘아니다’라고 하는 말은 敍述肯定의 否定이다. 따라서 無는 非와는 달리 有와 관계되는 말이다. 이렇게 否定을 나타내는 無와 非가 我의 개념과 결부되어 非我 혹은 無我라는 용어로 정착된 것이다. 이제 앞의 논의와는 다른 관점에서 無我와 非我의 타당성을 검토해보자.
‘有’는 無와 一對一로 대응하지만 ‘非’는 그렇지 않다. 이 점은 ‘無’와 ‘非’를 구별짓는 특징적인 요소이다. 有無는 我에 대한 二元的인 사고를 강요하며 동시에 我의 有無를 想定하게끔 한다. 그리하여 有我 혹은 無我라고 하는 형식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我를 有無形式으로 束縛․規定한다. 이에 반해서 非는 어떤 형식으로 我를 규정하지 않고 단지 我를 否定할 뿐이다. 이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된다.
① 無我의 경우
有我
我
無我
② 非我의 경우
有我 非有我
我 非我
無我 非無我
①의 경우는 無我가 我를 有我와 無我의 二元化를 강요함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상황이다. 결국 無我는 我를 否定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有我를 否定하는 형식이 되어 형이상학적인 戱論에 빠지게 된다.
②의 경우는 我를 직접 否定함으로써 我를 有無形式으로 파악하는 ①과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고 有我와 無我 모두 否定하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이것이 ‘非’의 論理이다.
따라서 ‘非我’의 肯定은 ‘我’이고, ‘無我’의 肯定은 ‘有我’이다. 이런 관계에 있는 非我와 無我를 우리말로 옮기면 ‘我가 아니다’와 ‘我가 없다’가 된다. 이 말을 主語인 五蘊․六根․六境 등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非我의 경우에는 ‘五蘊(六根․六境)은 我가 아니다’가 되고, 無我의 경우에는 ‘五蘊(六根․六境)에는 我가 없다’ 혹은 ‘五蘊(六根․六境)은 我를 갖고 있지 않다(五蘊非有我)’가 된다. 따라서 非我와는 달리 無我는 존재 혹은 所有의 의미와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局限시켜 볼 수 있다. 이것은 五蘊의 我를 存在․所有形式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五蘊의 我에 대한 存在․所有形式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無’와 ‘非’가 가지고 있는 否定的인 의미만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구분하여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五蘊의 我 이외에 다른 我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즉 我라고 하는 일상적인 存在․所有形式으로서의 無常의 我 이외에 다른 我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점을 좀더 명확하게 하는 것은 無我와 非我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인가 하는 것을 규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Ⅲ. 十四無記와 我
我라고 하는 용어가 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아뜨만이라고 한다면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수반한다. 따라서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한 태도를 고찰함으로써 我에 대한 태도 또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十四無記라는 용어를 들 수 있다. 이제 無記의 입장을 보여주는 구절을 인용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자.
세계와 我는 常인가? 세계와 我는 無常인가? 세계와 我는 常이기도 하고 無常이기도 한가? 세계와 我는 常도 아니고 無常도 아닌가? 세계와 我는 끝이 있는가? 끝이 없는가? 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끝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사후에 영혼은 후세로 가는가? 사후에 영혼은 후세로 가지 않는가? 가기도 하고 가지 않기도 하는가? 사후에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닌가? 정신과 육체는 같은가? 정신과 육체는 다른가? …… 어찌하여 이 열네 가지 난해한 문제에 대해서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까?
즉 14가지 문제에 대해서 답변을 하지 않은 것이 바로 無記이다. ?大智度論?은 계속해서 그 까닭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常이라고 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고, 斷이라고 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 이와 같은 설명은 有無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세계와 我는 끝이 있는가? 끝이 없는가?’라고 할 때 ‘있다’ ‘없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我의 有無에 관해서 답을 하는 것은 올바른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두 가지 견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有見과 無見이다. 여러 沙門과 婆羅門이 이 두 가지 견해를 익히고 암송하여 바른 법을 따르지 않고 如實하게 알지 못하면 이들은 沙門과 婆羅門이 아니다. …… 여러 沙門과 婆羅門이 이 두 가지 견해를 독송하고 잘 생각하여 (마침내 그 有無見을) 버리고 如實하게 안다면 이것이 沙門은 沙門行을 지키는 것이고 婆羅門은 婆羅門行을 아는 것이다. …… 그러므로 여러 比丘들은 이 두 가지 견해를 익히고 암송할 것이 아니라 버리고 멀리하여야 한다.
이어서 ‘有見과 無見은 구체적으로 欲有見, 色有見, 無色有見과 有常見, 無常見, 有斷滅見, 無斷滅見, 有邊見, 無邊見 등의 62見’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有無의 견해를 갖는 것은 올바른 법을 따라서 如實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如實하게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
위에서 有無의 견해를 갖는 것은 올바른 법에 따라서 如實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올바른 법을 따라 如實하게 안다고 하는 것은 일단 有無의 견해를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有無의 견해를 갖지 않는 것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世間에서는 有無의 두 가지 종류에 依止하여 取함이 있게 된다. 取함이 있으므로 有에 依止하거나 無에 依止하게 된다. 取함이 없으면 마음이 取․住․計하지 않게 된다. ……이것을 二邊을 떠나서 中道的으로 말한다고 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無明에 緣한 行이고’로부터 ‘苦가 取集하게 됨’까지와 ‘無明이 滅함으로 行이 멸하고’로부터 ‘苦가 滅하게 됨’까지를 말한다.
여기에서 올바른 법에 따라 如實하게 안다고 하는 것은 中道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緣起法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色은 常한가 無常한가? 無常합니다. 無常한 것은 苦인가? 苦입니다. 色이 無常하고 苦라면 이것은 變異法이다. 이것은 我所이고, 我이고, ‘나 자신’인가? 아닙니다. …… 一切識이 ‘我도 아니고 我所도 아니고 나 자신’도 아님을 아는 것을 如實하게 안다고 한다. …… 집착함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열반을 얻는다.”
이것은 無常․苦의 變異法을 我․我所․‘나 자신’이 아니라고 아는 것이 如實하게 아는 것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如實하게 안다고 하는 것은 世間의 變異法을 緣起法에 따라 有無의 二邊을 떠난 中道的인 입장에서 헤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입장이 불교철학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즉 我의 有無에 관한 판단은 無記, 즉 沈黙의 언어로 대신하여 세간적인 有無判斷을 拒否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견해, 즉 世間的인 有無判斷을 拒否하는 입장을 따른다고 할 경우 불교철학을 단순히 無我論이라고 하는 것은 無理가 아닐 수 없으며 나아가 그것은 불교철학이 지향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왜곡시킬 염려가 있다. 왜냐하면 불교는 我의 有無에 대한 판단을 中道的 입장에 따라서 拒否하고 沈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有)我에 대한 無我라고 하는 표현은 반드시 再考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我가 ‘있다’ 혹은 ‘없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법에 따른 如實見이 아닌 有見과 無見에 속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沙門과 婆羅門이 취할 ‘行’이 아니다. 이와 같이 有無見에서 벗어나 沙門과 婆羅門이 취할 ‘行’의 기초를 마련해주는 것은 바로 ‘非’의 論理이다. ‘非’의 論理를 통하여 我의 有無에 대한 形而上學的인 戱論에서 벗어나 解脫을 향한 沙門 ‘行’, 婆羅門 ‘行’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Ⅳ. 우빠니샤드의 아뜨만과 佛敎의 我
일반적으로 우빠니샤드의 아뜨만과 브라만은 동일한 實體로 파악되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와 구조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과 나아가 그것은 불교철학의 我論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은 간단하게 답하기 어려운 난해한 문제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편의상 불교철학의 無我와 깊이 관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내용, 즉 五蘊이라는 용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왜냐하면 本稿는 無我라고 하는 용어, 그 중에서도 ‘無’字의 부적절함을 제시하고 그것을 ‘非’字로 하는 것이 타당함을 밝히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우빠니샤드의 아뜨만과 불교의 我에 관한 깊이 있는 比較의 基礎를 마련할 端緖를 찾고자 할 뿐이다.
그러면 우선 우빠니샤드는 아뜨만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는 것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우빠니샤드의 아뜨만
눈 속에 보이는 사람이 아뜨만이다. …… 이 육신은 장식을 아름답게 하면 그렇게 되고, 옷을 잘 입으면 그렇게 되고, 깨끗하게 하면 그렇게 되고, 눈이 멀면 봉사가 되고, 절름발이가 되고, 불구가 된다. 이것은 육신이 사라지면 곧 소멸한다. 나는 이런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
꿈 속에서 즐겁게 뛰노는 사람이 아뜨만이다. …… 비록 이 육신이 봉사가 되어도 그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고, (이 육신이) 절름발이가 되어도 그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고, (이 육신이) 傷害를 입어도 그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그를 죽이거나 그의 옷을 벗기면 그는 불쾌함을 느끼거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나는 이런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이상에 대해서 Radhakrishnan은 “이 두 가지 상태(깨어서 육신을 느끼는 상태와 꿈 속의 상태)에서 자신은 內外의 對象을 경험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 상태를 통하여 인간은 외적인 대상의 변화뿐만 아니라 내적인 대상의 변화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이 아름답게 장식되거나 불구가 된다는 것은 외적인 대상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고, 꿈 속에서 육신이 불구가 된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쾌함을 느낀다거나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 것은 내적인 대상의 변화에 따른 심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나 모두 변화, 즉 無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는 행복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나는 이런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라고 하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이것은 內外의 變異法에서 아뜨만은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이며 이에 대한 불만족을 ‘이런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빠니샤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꿈을 꾸지 않고 잠을 잘 때, 그것이 바로 아뜨만이다. …… 이 사람은 스스로 나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멸되어 버린 사람이 된다. 나는 이런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이 말은 主客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면 그것 또한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혼수상태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혼수상태의 無差別은 善惡과 生死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아뜨만을 了知한 상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아뜨만을 了知한 상태는 主客을 명확하게 구별할 줄 아는 상태이며 동시에 그것은 善惡 生死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을 아뜨만이라 하고 아뜨만을 了知한 상태라고 하는 것일까?
이 육신은 죽는다. 죽음이 육신을 取한다. 육신은 不死․非肉身인 아뜨만의 居住處이다. …… ‘이 냄새를 맡자’고 아는 것이 아뜨만이다. 코는 냄새를 맡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을 하자’고 아는 것이 아뜨만이다. 발음은 말을 하기 위한 것이다. …… ‘이 생각을 하자’고 아는 것이 아뜨만이다. 마음은 그의 신성한 눈이다.
아뜨만은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결코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 파괴할 수 없다. 그것은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무집착하다. ……
육신은 不死이며 非肉身인 아뜨만의 居住處일 뿐이며, 眼․耳․鼻․舌․身․意라고 하는 감각기관은 아뜨만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불교적인 용어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의미상으로 眼․耳․鼻․舌․身이라고 하는 色身과 마음이라고 하는 受․想․行․識․身은 모두 아뜨만이 아니다라고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이상을 보면 우빠니샤드에서도 五蘊을 아뜨만이라 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아뜨만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다시 말하자면 이것 혹은 저것으로 대상화할 수 없으며 대상을 이해하는 절대주체이기 때문에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뜨만은 객관적으로 대상화되지 않기 때문에 개념적인 영역을 벗어나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아뜨만은 상대의 언어영역 속에서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주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을 우빠니샤드에서는 아뜨만은 ‘이것이 아니다. 아니다’ 혹은 아뜨만은 ‘무엇을 하자’고 아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2. 불교의 我
불교에서 五蘊은 我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면 불교에서의 ‘나 자신’이라고 하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 것인가? 그리고 ‘나 자신’의 ‘有無’에 대한 ‘無記’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나 자신’이라고 하는 말을 볼 수 있다.
자기는 자기 자신의 安息處이다.
여기에서 자기는 attā의 번역이며 동시에 이 말은 우빠니샤드의 ātman과 동의어이다. 또 용어는 다르지만 ‘자기는 자기 자신의 安息處이다’라는 표현은 우빠니샤드의 ‘육신은 不死․非肉身인 아뜨만의 居住處이다’라고 하는 구절을 상기시켜 줄 정도로 유사한 문장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자의 ‘자기 자신’과 후자의 ‘아뜨만’은 각각 attano와 ātmano를 풀이한 말로 같은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그러나 우빠니샤드에서는 ‘不死․非肉身’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그러한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즉 우빠니샤드의 아뜨만은 不死이며 非肉身이라고 하는 屬性을 가지고 있는 것인 반면에 불교의 자기 자신은 명확한 屬性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우빠니샤드에서는 어떠한 屬性으로도 구속할 수 없는 아뜨만을 지향하고 있으면서도 그 표현에 있어서는 아직 철저하지 못한 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이런 모순점을 解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절대주체, 즉 ‘아뜨만’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방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빠니샤드에서도 ‘아뜨만은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지만 有無를 벗어난 沈黙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우빠니샤드와 불교의 目的은 世間의 束縛을 벗어나 解脫하는 것이다. 이러한 解脫은 體得의 世界이다. 體得의 世界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沈黙으로 대답한 것이다. 불교의 沈黙은 우빠니샤드의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고 한 말에 比肩될 수 있다. 解脫은 言說의 領域이 아니라 體驗의 세계이므로 有無斷常의 상대적․이원적인 범위를 벗어난 절대주체의 경지이다.
그러나 우빠니샤드는 아뜨만을 설명하려고 하는 면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불교는 ‘자기 자신’을 굳이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접근방법상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實踐의 問題와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불교는 解脫의 成就에 관심을 두고 있는 반면에 우빠니샤드는 解脫의 理解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우빠니샤드와 불교가 상이한 면을 보여주게 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빠니샤드는 아뜨만을 대상화하여 직접 言明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하고 있지만, 불교는 ‘자기 자신’을 개념화하거나 대상화하여 摘示하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우빠니샤드는 아뜨만론으로, 불교는 無我論으로 지칭되고 있지만, 불교는 我의 有無에 대해서는 沈黙의 言語로 답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점은 우빠니샤드에서 解脫이라고 할 수 있는 아뜨만의 성취와 佛敎의 解脫을 비교하기 곤란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非我를 주장하면서 初期佛敎에서는 결코 ‘아뜨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우빠니샤드 등의 사상과 상당히 밀접한 연관을 갖고서 독자적인 實踐的․倫理的 아뜨만론을 전개하고 있다. 단, 우빠니샤드 철학이 아뜨만을 형이상학적 실체로 보고 있는데 대하여 불교는 이와 같은 견해를 확실히 거부한다고 하는 中村元의 견해는 ‘非’의 論理性을 간과한 표현이다. 즉 우빠니샤드와의 관련성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實踐的․倫理的 아뜨만론’이라고 하는 표현은 ‘非’의 論理에 따라 ‘實踐的․倫理的․理論的 非我論’이라고 수정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아뜨만론이라고 할 정도로 우빠니샤드와는 다른 아뜨만의 의미내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이 불교의 기본입장이라고 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實踐的․倫理的 아뜨만론’이라고 하는 표현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나아가 이것은 또 다른 아뜨만을 想定하게 됨으로써 形而上學的인 戱論을 야기시킬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불교는 무슨 까닭에 아뜨만의 有無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 것일까?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보면 實踐을 통한 解脫을 위해서는 우빠니샤드와 같은 아뜨만에 대한 개념적인 논의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이런 관점에서 ‘非’의 論理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불교는 我가 없음을 주장한다고 하는 無我論이라는 用語는 再考되어야만 하고 그것은 ‘實踐的․理論的인 非我論’이라고 하는 말로 수정․교체되어야 할 것이다.
Ⅴ. 결론
지금까지 無我와 非我라는 용어를 통하여 그 의미내용을 살펴보았다. 종합해 보면 無我라고 하든 非我라고 하든 世間의 我를 부정하는 의미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無我는 世間의 我․我所라고 하는 所有와 관계된 存在의 無를 말함으로써 出世間의 無所有와 관련된 存在의 有를 理論的으로 想定하도록 함으로써 形而上學的인 論議를 誘發하는 반면에 非我는 變異法의 無常과 苦라고 하는 如實觀과 世間的인 情緖사이의 乖離의 束縛을 벗어난 非對象的이고 非客體的인 자기 자신의 解脫을 實踐的으로 指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無我는 직접적으로 世間의 所有(欲)를 지적함으로써 世間의 我는 所有로 이루어진 굴절되고 일그러진 妄想의 我라고 하는 것은 잘 보여주고 있지만 有無의 斷․常見을 벗어난 불교의 緣起觀에 충실하지 못한 면이 있다. 한편 非我는 非라는 말때문에 생겨나는 漠然함은 있지만 有無를 벗어난 입장에서 世間的인 我의 無常과 苦의 乖離를 如實하게 볼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無我보다는 체계적이고 불교의 緣起觀에 철저한 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中道의 實踐行인 八正(聖)道 가운데 精進의 실천적인 면모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有無의 판단을 떠난 中道的 立場이 불교철학의 根幹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면 無我라고 하는 표현은 불교의 기본적인 관점에 違背되는 것이다. 그리고 有無의 二邊을 벗어나는 논리의 구조가 ‘非’의 논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我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無我는 非我로 표현되어야 한다.
불교는 我의 有無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無記의 입장을 고수하려 하고 있지만 우빠니샤드의 아뜨만과 불교의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말을 비교해 볼 때, 前者는 이해, 즉 知的인 측면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後者는 세간의 有無를 떠난 緣起觀의 이해에 바탕을 둔 實踐, 즉 體得에 초점을 맞추는 進一步한 面貌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我가 없다고 하는 ‘無’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世間의 五蘊은 我가 ‘아니다’라고 하는 緣起觀에 따른 ‘非’의 논리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불교를 無我論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철학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빠니샤드의 아뜨만론과 불교의 非我論(無我論)의 깊이있는 비교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해를 가져올 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런 현상이 오늘날 불교의 無我論은 우빠니샤드의 아뜨만론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는 결론을 이끌어내도록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本稿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빠니샤드의 아뜨만과 ‘자기 자신’에 대한 無記를 바탕으로 한 불교의 解脫은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반면에 中道的 緣起觀을 바탕으로 한 불교의 無記는 불교의 해탈과 우빠니샤드의 해탈을 비교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따라서 이 점은 앞으로 광범위하고 진지한 연구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결국 非我나 無我는 모두 五蘊의 我를 否定하고 束縛으로부터의 解脫을 의미하고 있는 점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으나, 無我는 世間의 餞倒된 我와 이것이 근간이 되어 이루어지는 我所라고 하는 所有形式이 ‘없음’을 밝혀주는 용어이며, 非我는 有無의 二邊을 떠난 緣起的인 입장에서 餞倒된 世間의 我를 否定함으로써 개념적인 논의를 떠난 논리적이고 실천적인 내용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無我보다는 非我가 불교철학의 기본입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我의 有無에 대한 沈黙(無記)이 解脫을 體得하지 못한 世間의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루어진 方便說이라고 하는 점과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용어를 고려한다면 불교의 我에 대한 입장을 단순히 우빠니샤드의 我論에 대한 無我論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非我論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非’가 함축하고 있는 實踐性과 論理性이라고 하는 양측면을 소홀히 생각함으로써 非我論을 불교의 아뜨만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왜 無我라고 하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수용되었을까? 이 문제 또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이것은 ‘非’의 論理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중국인의 理解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보여진다. 달리 말하자면 초기에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될 당시 중국인이 ‘非’를 바탕으로 한 불교의 ‘實踐的 理論的 空’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空’과 ‘無’를 동일하게 보았음을 示唆한다. 이러한 오류가 시정되지 않은 채 오랜 세월 동안 전해 내려오면서 독립적인 용어로 정착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無我는 非我로 수정되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