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아

무아설과 윤회설은 불교라는 건축물의 두 기둥

무아설과 윤회설은 불교라는 건축물의 두 기둥

 

6월의 마지막 날 경주 기림사 동암에서 호진스님을 만났다. 가뭄을 해갈하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다섯 시간 가량 이어진 만남은 호진스님의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 출간을 계기로 어렵게 이루어졌다. 1981년 파리 제3대학(소르본)에서 받은 호진스님의 박사학위 논문을 우리말로 번역해 1992년 선보인 책을 다시 보완해 펴낸 책이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스님이 천착(穿鑿)해온 무아와 윤회를 심도 있게 다룬 책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책이 출판된 지 20년이 넘었다. 다시 손질 해야겠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를 다시 발간한 소감을 담담하게 밝힌 스님은 “1년이라는 시간을 바쳐 연구하고 보완했다”면서 “이 책이 ‘30대 학생이 쓴 논문’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 수 있었고, 여러 부분에서 부족한 점을 발견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지난 2000년 동국대 교수직에서 스스로 물러난 호진스님은 경주 기림사 동암에서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바깥출입은 손꼽을 정도로 드물다. 오직 책을 벗 삼아 지낼 뿐이다. “별다른 뜻이 있어 외출을 자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책 보고 글 쓰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호진스님은 흔한 휴대전화도 없고, 인터넷도 하지 않는다. “시간을 아껴 공부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때문일 것이다. 스님은 원고를 쓰는데 오랜 시간을 할애한다. 고치고 또 고치며 완성도를 높인다. 학문에 대한 완벽성과 함께 잘못 기술하면 안 된다는 책임감에 따른 것이다. 당신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스님 뜻에 따라 이날 인터뷰도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불광출판사)에 집중됐다.

 

“무아를 내세우면 윤회설은

성립 근거를 잃어버리고

윤회설이 무너지면 불교는

존재 이유가 없어져

반대로 무아설을 포기하면

더 이상 불교일 수 없지만

불교는 이 상반된

두 가지 설을 양립시켜야 한다”

초기불교부터 후기불교까지

이어져 온 이같은 ‘난제’…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 개정판에서

나선비구경 비롯해 베다 브라흐마

우빠니샤드 아함경 등을 통해

‘양립문제’까지 심도 있게 살펴 ‘주목’

 

- 무아와 윤회의 양립은 불교학계의 오랜 논쟁이었나?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는 불교 발상지인 인도에서 붓다의 생존 당시에 제기됐다. 붓다의 열반 후에도 수백 년 동안 이 문제로 여러 가지 설(說)이 나왔고, 이것은 부파불교(部派佛敎)의 발생 이유가 되기도 했다. 현대불교학이 시작된 유럽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초기에 ‘가장 열띤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대승불교권에서는 윤회와 무아의 문제가 화두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토론의 대상은 아니었으며, 호진스님이 20여 년 전 책을 출간한 후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호진스님의 책이 2010년 <근현대 한국불교명저 59선>에 선정된 것도 무아ㆍ윤회의 양립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까닭이다.

 

- ‘무아’는 무엇인가?

“불교의 중심 문제는 인생의 괴로움(苦)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은 인간의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되며, 욕망과 집착은‘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일어난다. 괴로움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욕망이다. 그것은 ‘내(我)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불교는 ‘나(我)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규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나’라는 것은‘고정 불변한 어떤 것’이 아니라, 몇 종류의 요소가 임시로 모여 이루어진 실체(實體)가 없는 존재, 즉 ‘무아적(無我的)인 것’이다. 이것을 확실히 이해할 때 더 이상 욕망을 일으킬 수 없게 된다.”

 

- 그렇다면 윤회는?

“불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교리는 윤회설이다. 이 사상은 불교 이전에 성립됐다. 그러나 불교는 윤회설을 처음부터 불교 고유의 사상으로 생각했다. 불교는 윤회사상을 전제로 출발했다. 불교의 거의 모든 교리는 윤회사상 위에 세워져 있다. 왜냐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무아와 윤회가 양립(兩立)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호진스님의 이야기다. “무아를 내세우면 윤회설은 성립 근거를 잃어버린다. 윤회설이 무너지면 불교는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반대로 무아설을 포기하면 불교는 더 이상 불교일 수 없다. 이같은 상황에서 무아설과 윤회설은 양립할 수 없다.

 

그렇지만 불교는 이 상반된 두 가지 설(說)을 양립시켜야 한다.” 호진스님은 “무아설과 윤회설은 불교라는 하나의 건축물을 세우는 두 개의 기둥”이라면서 “무아설을 포기할 때 불교는 더 이상 불교가 아니고, 역시 윤회설을 제거해 버릴 때 불교라는 구조물은 붕괴되고 만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고민은 초기불교부터 후기불교에 이르기까지 난제였으며, 다양한 해결책이 모색됐다. 초기경전에서 내놓은 해결책은 뿟갈라설, 식설, 상속설 등 3가지였다. 이를 내용으로 경전이 만들어졌고, 부파불교에서 확대 발전되어 나름대로 다양한 설이 만들어지고, 추종자들이 부파(部派)를 만들었다.

 

호진스님은 이 책에서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을 비롯해 <베다> <브라흐마> <우빠니샤드> <아함경> 등을 통해 무아설과 윤회설의 내용을 짚어보고, 양립의 문제를 심도 있게 살폈다.

 

- 1981년 박사학위 논문, 1992년 책과 비교해 이번 개정판에서 달라진 부분은?

“<우빠니샤드>의 윤회와 해탈, 그리고 초기불교의 무아(無我)와 열반(涅槃)에 관한 것이다. <우빠니샤드>에 나타난 윤회와 범아일여(梵我一如) 문제를 전보다 깊이 탐구했다. 초기불교 부분의 핵심에서는 전과 동일하지만, 더욱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살폈다.”

 

호진스님은 은사 법인스님 권유로 대학에 진학했다. 종비생(2기)으로 동국대 불교학과와 대학원을 마치고, 로제 르베리에(Roger Leverrier, 한국명 여동찬) 교수의 소개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1972년이다. 일반인들의 해외유학도 드물던 상황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삐엘끼비르 가톨릭수도원에서 수도사들과 생활하며 프랑스어를 익힌 후 1974년 파리로 옮긴 뒤에 1976년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아 소르본 대학에 진학했다. 유학 10년, 고학(苦學) 끝에 무아와 윤회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심사 당시 “이 분야의 연구 중 가장 깊이 있는 논문”이라는 찬사와 함께 최고 점수인 ‘트레 비엥’을 받았다.

 

지안스님(조계종 고시위원장)은 “30여 년 전 박사학위 논문과 20여 년 전 책을 깊은 연구와 고찰을 거쳐 보완해 선보인 개정판은 호진스님의 투철한 정신과 성실함으로 가능했다”면서 “무아설과 윤회설이 상충되는 소지가 있는데, 호진스님이 이를 잘 분석했다”고 독자들의 일독(一讀)을 권했다.

 

사실 불교에 있어 무아와 윤회의 관계는 쉽게 정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여전히 활발한 연구와 토론, 논쟁이 생산적으로 이뤄져야 할 ‘난제’ 임에 틀림없다. 호진스님이 무아설과 윤회설의 양립 문제에 주의를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호진스님은 “의도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가 ‘문제 제기’를 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했다.

 

■ 호진스님은 …

1964년 직지사에서 출가했다. 은사는 법인스님(천안 각원사 조실). 동국대와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초기불교를 전공했다. 종교학 박사.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로 2000년까지 초기·부파불교를 강의했다. <인도불적답사기> <성지에서 쓴 편지>(공저) <인도불교사> <아쇼까왕 비문>(공역) 등의 저서와 <불교의 노동문제> <윤회이론의 기원> <불멸연대고(佛滅年代考)> <나선비구경 연구>(1), <초기불전성립연구>(1, 2), <아쇼까왕과 불교> <불교의 죽음 이해> 등의 논문이 있다.

[불교신문3118호/2015년7월4일자]

[출처] 무아설과 윤회설은 불교라는 건축물의 두 기둥|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