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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무아(無我)의 실천론/월간해인

무아(無我)의 실천론/월간해인

 

삼라만상 일체만유(一切萬有)가 의거하고 있는, 세계성과 영원성을 본질로하는 궁극적인 진리 그 자체는 결코 부분적일 수 없고 평면적일 수 없고 정태적(靜態的)일 수 없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체적이고 입체적이고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언제나 전체적이고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존재와 생명의 참 모습(諸法實相)을 향하고 있는 불교사상의 특징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삼법인(三法印)의 법문(法門) 역시 매우 유기적인 짜임새로 조직되어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 만큼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일반화되고 정형화된 삼법인의 바른 의미와 내용은 항상 종합적인 견지에서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할 줄 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가 운데에서 우선 제법무아인(印)에 대한 문제만을 살펴보기로 하되, 무아에 대한 교리적 해설보다는 무아 사상의 실천적 의의 및 그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몇 가지 관견을 피력해 보려 한다.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法) 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라고 한 중아함(中阿含)의 말씀을 새삼 인용할 필요도 없이 연기법(緣起法)은 확실히 불교의 핵심 적인 사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다시피 연기법은 인간과 우주의 어떤 궁극적인 제일 원인 (第一原因, Prima causa)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고 하는 연기의 기본 공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연기법은 오직 무상(無常)한 제법(諸法)의 상호 작용 및 관계에 의한 생멸 변화(生滅變化)만을 인정한다. 이러한 연기법에 입각하여, 시간적인 측면에서 제법을 규정한 것이 “제행무상”의 법인이고, 공간적인 측면에서 제법을 규정한 것이 “제법무아”의 법인이다. 여기에서 제법무아라 함은 “물질적, 정신적 그리고 모든 현상적 존재(諸法)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無我)”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간이든 사물이든 그 어떤 것도 영원 불변하는 개체나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기치를 내세우는 우파니샤드 철학의 중요한 개념인 브라흐만(Brahman)과 아트만(atman) 같은 존재는 무아셜 (無我說) 의 견지에서는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상 불교의 무아설은 우파니샤드 철학의 아트만을 부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아설은 자칫 잘못하면 왜곡되어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리하여 우리를 허무주의나 도덕적 회의로 이끌어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불교의 무아사상을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은 무아설이 업보(業報) 라든지 윤회(輪廻)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불교의 여러 경전에는 “무아이기에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지만 선악(善惡)의 업은 없어지지 않는다(無我無造無受者善惡之業亦不亡)”는 내용의 가르침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무아윤회설(無我輪廻說)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영혼의 불멸을 인정하는 상주론(常住論)이나 인격의 연속성을 무시하고 도덕적 인과율과 책임을 부정하는 단멸론(斷滅論)을 똑같이 배척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이러한 무아윤회설의 타당성은 더욱 굳건해진다.

 

요컨대 무아란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實我)를 부정하는 것이지, 유한한 것이긴 하지만 여기 이렇게 숨쉬고 느끼고 생각하는 나(假我)까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잊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아(無我)라는 말 앞에서 우리들은 대부분 당혹해 마지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본래 없는 것인데 “자기 발견”이니 “자아 완성”이니 하는 말들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처님께서는 “나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고 있으며,「법구경」에서는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도 곧 나다”라고 설한다. 또 다음과 같은 이때에서도 우리는 부처님의 뜻이 “참된 나”를 찾는 데에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녹야원에서 초전법륜(初轜法輪)을 마친 부처님은 우루벨라를 향해 가시는 도중 나무 그늘에서 잠시 선정에 든 일이 있었다. 그때 마침 그 부근에는 남녀 동반하여 행락을 나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여자가 다른 사람들이 노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타서 귀중한 재물들을 챙겨 달아났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부근을 찾아 헤매다가 나무 그늘에 앉아 계신 부처님을 향해 “혹시 그런 여자를 보지 않으셨는가요?”하고 물었다. 이때 부처님은 마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젊은이들이여, 잃어버린 자기 진심을 찾는 일과 도망친 여자를 찾는 일 중에서 어느것을 더 시급하게 찾아야 한다고 보는가?”

 

나라는 실체가 없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나에게 의지해야하며 참된 나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가르치는 이 모순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부사의(不思義)한 “참 나”의 세계를 문자로 설명한다는 것은 무척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이에 이르러서는, “참 나”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어떤 것인지, 또 “참 나”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개략적으로나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참 나(眞我)”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기 위해서, 우선, 헤겔과 야스퍼스의 명제를 한가지씩 검토해 보자. 헤겔은 “진실한 무한(無限)은 유한한 것의 배후 또는 피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유한한 것의 참다운 현실이다” 라고 말한다. 또 야스퍼스는 “인간 존재는 인간 형성이다(Mensc-hsein ist Menscwerden)”라고 말한다. 다시 풀이하면, 헤겔은 “무한”이라는 개념은 “유한한 현상과 존재”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는 태도를 지니며, 야스퍼스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어떤 것으로 보지않고 만들어지고(창조되고) 채워져야할 어떤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참 나에 대한 개념 정립을 위해서 위의 두 명제를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참 나를 찾는다”거나 “참 나를 깨닫는다” 또는 “나에 의지한다”고 할 때에, 자칫하면 참 나를 현실적인 나(假我)를 떠나 있는 어떤 완성체로 생각하기 쉬운데, 어떤 완성체로서 존재하는 나란 결국 실체아(實体我)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무아”의 본래적인 의미를 떠올려 볼 때 그러한 “완성체의 나” 역시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실체가 있는 불변의 대상적 존재는 어떠한 유형이든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불교의 기본 태도임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생사와 열반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처럼, 생사 속의 가아(假我)와 열반(涅槃)의 진아(眞我) 또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현실의 나”를 떠나서 참 나를 찾으려고 하는 모든 기도는 어리석은 것이요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가아(假我)의 참다운 현실에 대한 각성을 자기 발견이라 하고 가아의 참다운 현실을 향한 노력을 자아 완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우주적 생명 그 자체 또는 존재의 영원한 법칙과 원리 자체를 참 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참 나라기보다는 오히려 참 나의 기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성싶다. 다시 말해서, 참 나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유(有)와 무(無)가 화해하는 곳에서, 영원과 순간이 손잡는 곳에서 찾을 수 있음과 동시에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 나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무아의 실천”에 앞서 반드시 한번쯤은 상기시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무아 사상을 우리들의 구체적인 현실속에서 실천하려 할 때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에 대해서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아를 통해서 나에 대한 집착(我執)의 어리석음을 배우게 된다. 불교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나에 대한 집착, 나의 것(我所)에 대한 집착을 경계한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아집으로 말미암은 불행하고도 어두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람들은 나에 집착함으로써, 나라는 관념에 얽매임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왜곡되이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순리(順理)를 거스르게 되어 일을 그르치며 문제를 일으킨다.

 

인간 사이의 모든 불편한 관계는 거의 모두가 이 아집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아집을 버린다 하여 모든 일에 소극적인 자세로 임한다든지 행동이 위축된다든지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심지어는 거미줄처럼 얼키고 설킨 수많은 인간사의 매듭을 아예 풀어보려들지도 않으면서 외면해버린다면 그것은 더욱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집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객관화시키라는 것이지, 무엇이든지 무조건 양보하거나 체념하거나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무아를 실천한다는 것은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서고 나서야 할 때 나서는 것이다. 결코 무조건 물러서서는 안 된다. 창조적 질서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있는 일이라면 주저함없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무아행(無我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무아 사상을 전체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사회화시키는 것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개성과 특수성을 마음껏 살려낼 수 있을 때, 무아행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불교의 무아행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아행이란 나를 끝없이 죽여 가며 동시에 나를 끝없이 살려내는, 그 중도적(中道的) 노력과 실천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