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는 선종과 교종에 관한 양종의 고찰을 요한다. 즉 불교사원에서는 좌선을 수행 하면서도 염불과 관경도 병행하여 왔다. 승려들은 ‘할’과 ‘불자’를 흔들기도 하고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을 독경하기도 한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특색이며 다른 나라 불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한국불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조계종의 특성이다.
본고에서는 통불교적인 한국불교에서 선불교의 전래, 신라 말과 고려 초에 개산된 9산산문과 조계종과 관계를 고찰할 것이고 특히 조계종 중흥조인 보조지눌과 고려 말에 제종포섭을 한 태고보우와 동시대 고승인 나옹혜근을 중점으로 고찰하기로 한다. 그리고 불교국가였던 고려의 불교정책과 법통관계를 비중 있게 다루고자 한다.
불교가 전래된 후,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불교는 화랑정신은 국가발전에 원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선도적 역할이 지대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불교가 귀족화 되고 왕권이나 귀족의 비호아래 점차 청정수행가풍이 훼손해짐에 따라 타락해 갔다. 고려시대에 승려들의 수행이나 청정가풍이 고려시대, 특히 무신집권시대에 와서는 더욱 세속화되어 갔다. 이때 보조지눌의 신선한 정혜결사의 수행가풍이 되살아 16국사를 탄생시켰고 대각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전래되므로 한국불교는 한동안 발흥하였으나 고려 말 왕권이 쇠약과 원의 침략으로 고려는 혼미에 빠짐과 아울러 귀족화 된 불교는 본래의 청정수행가풍이 사라졌고 결국 나라를 좀 먹는 집단으로 추락 되어졌다. 물론 그 시대에도 끝내 수행자의 올곧은 정신과 백생들의 정신적 스승들이 출현하여 면면히 이어 오니 특히 고려말의 태고국사와 나옹왕사의 법화는 혼탁한 예토에 꽃이고 빛이었다.
이때 성리학이 고려가 새로운 이슈로 1,000년을 내려오던 불교는 본래의 사명을 못할 때,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주자학이 차츰 시대적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중국 북송이후 남송은 혼란기를 맞이하게 된다. 성리학을 완성한 주희와 불교계를 주도하던 대혜종고와 논쟁이 있었고1) 주전론을 펼친 대혜가 귀양을 가게 된다. 그리고 260여년이 지난 후, 성리학은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에 있어서 똑 같은 결과가 초래된다. 고려를 멸망시킨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에 의한 새로운 조선을 건국하게 되고, 신라나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가 교체되는 시기를 맞게 된다. 국가나 불교가 애민과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지 못했고 각고의 자기 채찍이 없는 결과로 보여 진다.
*이때는 북송(960-1127) 말이고 남송(1127-1279)의 초 혼란기였다. 당대(618-906)의 왕성한 불교가 오대(五代, 907-960)를 지나면서 점차 총림은 부를 축적하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따라서 승려들은 귀족화, 부유화되어 선원의 선승들을 수행에 전념치 않고 나태해지고 세속화 된다. 그 결과 사회를 끌고 갈 수 있는 힘을 잃는다. 새롭게 발흥하는 주희의 성리학이 시대적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성리학자들은 崇儒抑佛의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 후 시대적 흐름은 260년이 지나면서 사회를 지도하던 불교가 성리학의 발흥으로 한국불교도 중국과 같은 결과가 초래한다. 숭유억불이 진화된 혹독한 展儒滅佛로 이어진다.
1) 9산선문과 선법 전래
한국의 선은 4조 도신(道信, 580-651)에게 전법을 받은 법랑法朗이 처음 선을 전래하지만 절손이 되고, 혜능의 남종선이 전래된다. 한국에서 오늘날 까지 지속되는 남종선은 서당지장과 백장 회해에게 사법을 한 도의 원적이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니 한국의 초조가 된다. 제자 염거를 거쳐 체징 때 헌안왕 4년(860)에 전남 장흥 보림사에서 가지산문을 개산하게 된다. (보조비문, 『조당집』17권)
9산선문 중 가장 일찍 산문을 열게 된 홍척의 사법은 도의보다 늦으나 흥덕왕 3년(828)에 실상산문을 개창한다. 개산조 홍척은 도의와 동시대인으로 사법은 도의보다 늦었으나 산문을 개창한 것은 9산산문 중 가장 빠른 흥덕왕 3년(828)이다. (『조당집』17권)
동리산문은 문성왕 1년(839)에 서당지장에게 사법한 혜철에 의해 개산되며 전남 곡성 태안사가 주 사찰이며 그의 문하에 도선, 여대사 등이 알려졌다. 특히 도선은 풍수지리와 도참설의 대가다.
사굴산문은 마조의 제자 염관제안에게 사법한 통효범일에 의해 문성왕 9(847)년에 사굴산문을 개창하였으며, 9산산문 중 가장 번창하였다. 범일 문하에 낭원개청, 난공행적 등이 있다. (참조, 『조당집』17권, 낭원국사 오진탑비)
마조의 제자 불광여만과 마곡보철에 인가를 받고 문성왕 1년(839)에 귀국한 무염에 의해 보령 성주사에서 성주산문을 개산한다.(참조, 최치원 선 비명 ∙ 진정국사 저 『선문보장록』)
마조의 제자 남전보원에게 사법하고 문성왕 9년(847) 귀국하여 쌍봉사에 법석을 연 개산조 도윤이 선풍을 선양하였다. 그의 제자 징효절중이 사자산 흥녕사를 확장하여 도윤의 선풍을 천양하니 이것이 사자산문이다.(참조, 『조당집』 17권)
회양산문은 신라 헌강왕 5년(879)에 도헌이 문경 회양산 봉암사에서 개산하였다. 그 뿌리는 신라 법랑으로부터 시작된다. 법랑은 4조도신의 법제자이고 신행에게 전법하였고 법랑은 입당하여 옥천신수의 손제자 보지공에게 심인을 받았다. 그 후 신행의 3대손인 지증도헌(도선)이 회양산문을 개산하였으며, 또 도헌은 마조의 법자인 창주신감에게 사법한 쌍계진감(혜소)의 법을 받아서 6조혜능의 법손이 된다.(참조, 봉암사 지증국사비, 봉암사 정진국사비)
수미산문은 9산산문 중 가장 늦게 성립된다. 개산조 이엄은 진성여왕 10(870)에 입당하여 운거도응에게 사법한다. 행사로부터 5대를 내려가면 조동종의 개조인 동산양개의 제자 운거도응에 사법하고 입국하니 고려 태조15년(932)에 태조가 교칙으로 황해도 해주 수미산에 개산한다.
한국 9산산문과 중국의 5가7종 선문의 관계를 고찰하여 볼 것 같으면 9산산문 어느 것도 5가(위앙종 운문종 조동종 임제종 법안종)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제일 늦게 개산한 수미산문 이외의 신라시대 개산한 8산산문은 모두 5가 선종파의 분파 전에 갈라졌으며 마지막 조동종은 스승 동산양개와 제자 조산본적의 산 이름을 따서 조동종이란 이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엄이 운거도응에게 사법할 때는 조산본적이 출세하기 전이고 조동종이란 명칭이 생기기 전이었다. 모두 6조, 조계혜능의 남종선 연원에 뿌리를 둔다 할 것이다.
2) 득도사得度師와 사법사嗣法師 문제
신라 말의 한국 선맥이 500여년을 사라지지 않고 그 법계가 전승되는 것은 중국과 다른 방법에 의한 전등을 이어 오기 때문이다. 중국 5가 7종의 선맥은 오직 법을 이은 사법사嗣法師를 정사승正師僧으로 하는 반면에 한국불교의 법맥은 머리를 깎고 승려를 만들어준 득도사得度師를 정사승으로 하기 때문이다. 국교가 불교인 고려는 신도의 증가에 의하여 종단으로 인정되면 종문의 독립을 조정에서 공식 허락하고 동시에 국영의 사찰관리권을 위임했다. 정부에서는 승록사僧錄司라는 관청에다 별철 <승적부僧籍簿>를 두고 사찰의 주지와 승관의 자격고시인 승과항목僧科項目에 종선과宗選科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승직임명에 필요한 법계를 수여했다. 이와 같은 까다로운 관리는 국교인 불교가 국가의 한 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9산산문에 한 종문으로 득도하면 다른 산문으로 이적이 어렵기 때문에 9산산문이 형성된 이래 이적은 한 두 예가 역사상 기록이 보일 뿐이다.
2. 보조의 한국선 형성
앞에서 논술한 것과 같이 남종선이 전래한 이래 고려 태조 까지 9산산문이 나누어 개산되고 고려시대에 와서는 조정의 가호를 받아 교와 선이 흥성하였다. 신라 400년간 불교가 국교가 되어 조정에서 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공경대부가 행정상으로 국가에 종사한다면 승려는 불법으로 나라를 옹호하고 국사에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위로는 왕자로부터 아래로는 권문세가의 자제들 까지 불문에 귀의하여 점차 고려불교는 사회를 리드할 수 있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교학의 발전은 신라시대의 한국불교학은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원측의 『유식론』, 의상의 『대승화엄법계도』로 대표되는 화엄학 등이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러나 禪學의 경우 신라 말기와 고려 초에 9산산문이 형성되었으나 전래 역사가 짧아 중국의 선을 선양하는데 불과하였다. 고려 보조국사(普照知訥, 1158-1210)가 출현함으로써 선문이 교종을 압도할 정도로 9산 선문이 세력을 얻고 통칭 조계종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선종이 발흥 된다.
1) 구산선문을 조계종으로 융섭
앞 장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의 선맥은 조계혜능의 법손에 의한 남종선의 전래된 것이며, 중국 당대에 극성하여 사회를 선도했던 5가 7종의 법손들이 아니다. 임제종이니 조동종이니 하는 종파의 법손이 아닌 조계의 혜능의 법손이다. 따라서 고려에 상용되었던 조계란 말은 처음 어떤 종파라기보다 선종의 시조 혜능의 법손이란 의미가 강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선문9산을 총칭할 때는 선종禪宗, 혹은 선적종禪寂宗, 달마9산이라 하며 그 명칭이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불교통사』 저자인 이능화(李能和, 1868-1945)는 보조의 정혜결사 때,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로 바뀌어 지며 조계산명이 처음 쓰였다고 주장했다. 그 후 산명을 따라 조계종명이 성립되었다고 하였으나, 보조 이전에 조계란 말이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계 9산, 혹은 ‘조계종 가지산하’, ‘조계종 굴산문하’라 하는 말이 자연 생겨나게 된다.
대각국사 의천(大覺義天, 1055-1101)이 천태종을 창립 후에 선종으로 칭하고부터는 천태선종과 구별하기 위해, 9산선문은 중국선인 5가五家가 분립하기 전 조계산 혜능의 법손에 의해 창립되었으므로 자연 혜능이 주석하던 산명을 따서 조계종이라고 칭하였다. 따라서 9산산문은 대각국사가 숙종2년에 천태종을 창립한 때, 조계종이란 명칭으로 굳어졌다. 불교계는 5교 양종, 교종인 5교와 선종의 양종, 조계 ᛫천태 양종이 된다. 조계종 명칭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지울 수 있는 보조지눌의 행장을 살피고자 한다.
보조의 법명은 지눌知訥이고 목우자牧牛子는 그의 별호이다. 8세(1166)되던 해 사굴산문 범일의 원손인 종휘宗暉에게 득도하고 25세에 승선僧選에 입격하였다. 그리고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하여 조도祖道를 재흥하고자 서약을 한다. 그 후 청원사에서 『육조단경』을 보다가 스스로 얻은 바가 있었고 경북 예천 하가산 보문사에서 이통현의 「화엄론」을 보고 마음을 다졌다. 그 후 『정혜결사문』을 짖고 정혜사를 창설하였다. 다음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하루는 『대혜어록』을 보다가 홀연히 깨달음이 있었다. 뒷날에 조정으로부터 그가 주석하던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송광사로 사액을 받으며 공인된다. 보조는 11년 간 송광사에 주석하며 법을 설하고 참선 수양하니 학자와 왕공장상들이 따르는 자가 수 백인이었다. 희종 6년(1201)에 53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사법제자이며 송광산 2세인 한국 선시의 시조, 혜심(眞覺慧諶, 1178-1234)을 출생시켰다. 그리고 고려 말 까지 법통이 이어지니 조계산 송광사에서 16국사를 낳는다. 스님의 저서로는 『정혜결사문』『진심직설』『수심결』『성초심학입문』『간화결의론』『원돈성불론』『법집별행록절요병입기』『염불요문』등이 있다.
보조의 가르침은 근기에 맞추어 대기설법을 하니 곧 교학자로 하여금 화엄론의 입장에서 원돈문으로 들게하고, 선학자에게는『육조단경』과 신회(荷澤神會, 684-758)의 종지를 공부하여 돈오문으로 들게 하여, 진여의 체용體用이 곧 정혜定慧임을 깨닫게 하였다. 그 후 이통현(李通玄, 635-730)의 『신화엄경론』을 만나 선의 종지宗旨와 화엄의 종지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고, 또 『대혜어록』을 통하여 정혜가 부서져 사라지지 않음을 증득하였다. 그 결과 선적등지문惺寂等持門과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의 삼문을 지어 근기에 알맞게 학인을 제접하였다.
보조의 가르침 돈오점수頓悟漸修로써 이후의 한국의 불교, 조계종의 종지가 되었다. 곧 정혜겸수定慧兼修로 화엄 ᛫천태 ᛫선학의 일체 종파를 포괄한 후, 결국 정혜겸수를 깨뜨려서 첫째 성적등지문으로 선승을 융섭融攝하고 다음 원돈신해문으로 교승을 융섭하고 최상승인 제3 경절문에 들게 하여 선의 참 소식을 밝혔다. 그리고 보조의 저술 중 『염불요문』이 있다. 보조는 염불을 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연민하여 진염불眞念佛의 소식을 전하니,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염하여 스스로 마음이 아미타불이고 자신의 성품이 본래 청정함을 이 자리에서 알려면 오직 선관으로 반문염불反聞念佛을 행하는 것이 염불이라 주창한다. 이것은 선으로써 염불을 융섭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대각의천의 교관겸수설敎觀兼修說로 선종을 포함하고자 함에 반하여 선종으로써 교종을 융섭하였다. 보조의 정혜겸수를 바탕으로한 돈오점수는 한국 조계종의 종지가 완성됨으로 9산선문은 모두 보조의 종지를 이음으로 오는 내적인 통일은 한국선종사상 비약적인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정혜겸수설에 의하여 선승과 교학승이 모두 보조의 문하에 모이므로 선교일치의 풍광이 벌어졌다. 그의 종지에 감동을 받아 9산산문의 선승들이 보조의 법맥을 사승嗣承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회양산문의 승형(承逈, 1172-1221), 가지산문의 일연(普覺一然, 1206-1289) 등이 있고, 교종의 승려로서 수원 창성사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에 의하면, 진각이 화엄종 낙용사 주지 일비一非에게 득도하고 중국에 들어가 화엄종의 승려로서 선장禪丈 만봉萬峰에게 전법을 받고 귀국하여 <대화엄종사선교도총섭大華嚴宗師禪敎都總攝>이 되었다. 또 임계일이 찬한 「만덕산정명국사어록집서萬德山靜明國師語錄集序」에 의하면 한국 천태종의 문하로서 조계종 승려에게 사법했으나 본종의 종파에는 변동이 없다. 정명은 천태종 승려로서 조계산 송광사 2세 진각혜심 조계종 종지를 얻은 뒤에도 천태종 본사에 돌아가서 천태종의 소의경인 『법화경』을 지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풍광을 이능화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보조가 죽은 후, 진각 청진 진명 회당 자정 원감 자각 담당 묘명 자원 혜각 각엄 정혜 고봉(이상 모든 사람은 『해동불조원류』에서 16조사로 만들어 졌다)화상 등등이 서로 이어졌다. 나옹왕사 환암국사 역시 본사가 있으니, 고로 송광사는 헤동의 보배로운 영산도량이요 조계산 보림사가 된다.6)
또 한 예는 진주 단속사 주지 대감국사 탄연(大鑑坦然, 1070-1159) 은 중국 임제의 법손 개심介諶의 인가를 받아 그의 제자가 되어서 귀국하여 임제의 9대 손이라고 자랑했지만 그의 득도사는 굴산산문 통효범일의 원손이어서 입적 후 비명碑銘에는 <조계산 굴산하 단속사 대감국사지비曹溪宗 堀山下 斷俗寺 大鑑國師之碑>라고 그의 산문을 명확히 표현했다. 또 승형은 원래 회양산문 봉암사에 득도한 승려로서 고종27년에 선종대선에 합격한 후 조계산 보조지눌에게 참학하여 법요를 얻었다. 후일 승적을 회양산문에서 조계산 4세국사 진명(眞明混元,1191-1271)에게 전적하여 굴산문중이 되었다. 일연(普覺一然, 1206-1289)은 가지산문 진전사에서 득도. 고종 14년 선불장에 나가 상상과에 입격하였다. 그 후 굴산산문 보조에게 원사遠嗣하고 개당한다. 그러나 이 두 분이 보조계통의 승려로 오인하기 쉬우나 당시 사법사가 정사승正師僧이 아니라, 국가의 승적부에 오른 득도사나 그 산문에 의해서 인증되기 때문에 득도한 산문의 이름으로 남게 된다. 일연도 사후, 편액에 <조계종 인각사 가지산하 보각국존曹溪宗 麟覺寺 迦智山下 普覺國尊>으로 남았고, 승형 역시 보조를 법사한 후, 굴산산문 대찰인 단속사의 주지로 임명 되었다.
그리고 삼각산 중흥사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송나라의 임제종 고승 석옥(石屋淸珙, 1272-1352)의 법을 사승하고 개당하여 임제19대 법손 태고라고 한껏 자랑했지만 그의 득도사는 조계종 가지산 도의의 원손인 회암사 광지廣智이기 때문에 그가 입적 후, 비명에는 <고려국사 대조계조계사조高麗國史 大曹溪嗣祖>라 각인되어 그의 소속 종파가 조계종인 것을 명시하였다. 이러한 예는 바로 득도사得度師를 정사승으로 여기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조정에서 관리하는 관청인 승록사僧錄司에 승적부가 있고 거기에 따라 각 산문의 소속 사찰에서 국가의 관리 하에 승과僧科를 실시하고 같은 산문 사찰 주지도 임명하기 때문이다. 산문을 이전하는 것은 아주 드물며 쉽지 않았다.
이와 같이 보조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각 산문의 종지가 통일되고, 선풍이 융성하여 가히 일색을 이루었다. 송광사 16국사와 고려 말에 나옹혜근이 환암혼수 등이 출생하여 태고보우가 출현하기 전 까지 고려 말 선종의 법통은 굴산산문이 이끌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보조의 통불교적인 정혜겸수에 의한 돈오점수의 조계종 종지가 보조에 의하여 내적으로 통일됨에 이르러 9산선문은 모두 즐겨 이 종지를 사승嗣承하게 됨에 한국선종사상 획기적인 비약을 하였다. 보조 이후 16국사와 나옹, 환암, 각운, 함허, 지엄, 서산 등을 이어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 선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 고려 말 전등관계
전등傳燈이란 무엇인가? 불교의 혜명을 계속 상전相傳하여 후세에 유전流傳하는 것이 마치 등燈과 등이 불꽃을 서로 전하는 것과 같이 상속相續 유전하는 것을 뜻한다.
앞에서 밝혔듯이 나말 이후 전등관계는 득도 후 산문에 등록이 되어 승적에 오르게 되면 오직 처음 삭발하고 치의를 입은 절의 법등을 이었다. 선의 전래로 9산선문을 개산한 이래 9산선문의 승려로서 중국의 5가7종의 선장에게 구법사승求法嗣承한 고려의 선승들이 수 십 인이 있으나, 귀국하여 종파 상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예를 들자면 단속사 <대감국사비大鑑國師碑>에 의하면 ‘오직 대감국사가 그런 분이다. 종파를 고찰할 것 같으면 스님은 임제의 9대 법손이다.’라고 명기되어 있으나, 한국의 조계종 사굴산 범일의 법손인 혜소국사에게 사법하였기에 위와 같이 사후 조계종 굴산 하의 승려라고 입비하였다.
굴산산문 문경 묘적암 요연了然을 득도사로 한 나옹혜근도 중국에서 임제종 양기파 평산처림에게 전법을 받은 임제의 19대 법손이지만 그의 탑명에는 임제종이라는 말을 찾아 볼 수 없고 <고려국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 시 선각탑명高麗國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 重興祖風 福國祐世 普濟尊者 諡 禪覺塔銘>으로만 남겨질 뿐이다. 위의 선장들이 임제종을 열고 세웠다면 임제종조가 될 수 있으나,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후 태고 역시 <고려국사 대조계종사高麗國史 大曹溪宗師>라는 전액이 전한다. 태고가 조계종 이름하에 9산선문을 통합하고자 원융부를 설립했다하여 임제종 종조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득도사를 정사승으로 여기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조정에서 승록사僧錄司라는 관청을 두었으며 관리하는 승적부가 있고 거기에 따라 각 산문의 소속 사찰을 국가에서 관리 하에 주지로 임명하기 때문이다. 산문을 이전하는 것은 아주 드물며 쉽지 않았다. 고려 말 불교를 대표하는 백운 ᠊ 태고 ᠊ 나옹도 역시 그의 비명이나 기록에 임제종 양기파의 석옥청공이나 평산처림의 전법을 이었다고 알렸으나 결국 입적 후, 자기의 본 산문이나 비명, 어록에 의해 이름이 오늘날 까지 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태고나 나옹이 귀국하여 새로운 산문을 개창하여 공인되어야 새로운 산문이 서고, 그 산문은 국가에서 관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조는 조선 명종19년(1564)에 서산대사(淸虛休靜, 1520-1604)가 저술한 책 『선가구감』 서문에는 ‘조계 퇴은曹溪 退隱’으로, 그리고 뒤편에 선조12년(1579) 발문을 쓴 그의 제자 사명당(松雲惟政, 1544-1610) 역시 조계종유 사명종봉 유정曹溪宗遺 四溟鐘峰 惟政 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중기에 가장 우뚝한 선가의 거장인 서산이나 사명당 역시 조계를 생명처럼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3) 태고의 통합9산 선풍
태고(太古普愚, 1201-1282)의 법명은 보우이고 태고는 그의 당호다. 13세에 가지산문 원손 광지廣智에게 득도하고 26세에 화엄선에 입격한다. 38세에 송도 전단원에서 무자화無字話를 참하다가 정월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다. 41세 때 삼각산에 태고암을 짓고, 『태고암가』를 지었다. 이때 태고라 자호하였다. 충묵왕 2년 (46세,1346년) 때 원元에 들어가서 하무산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 에게 「태고암가」를 바치니 석옥이 「태고암가」가 발문을 짓고 가사를 주어 신표信標하였다. 법을 인가받고 다음 해 귀국하여 용문암 소설암에 있었다. 공민왕 5년, 왕의 청에 의하여 봉은사에서 설법을 하고, 왕사로 삼아 광명사에 원융부圓融府를 두어 9산을 통합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조계종의 종명은 대각의천 때부터 성립하고 보조지눌에 의하여 한국 특유의 종지가 확립되어 내적으로 통일되어온 이래, 공민왕 5년 태고보우에 의 외적으로 통일되어 조계종 성립되었다. 태고는 공민왕 17년 신돈의 무고로 속리산에 금고 되었다가 신돈 사후, 20년에 국사가 되었다. 우왕 8년에 입적하니 우왕 11년 태고사에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가 있다.
태고는 전승되어 오는 조계종풍, 특히 보조의 제3 경절문풍徑截門風을 선양하였다. 일심을 깨닫는 법요를 설하기를
‘금부처 나무부처처럼 바로 앉아 모든 선악을 조금도 생각하지 말고 몸과 마음 법을 모두 버리면, 나고 사라지는 먕념은 다 없어지고, 없어졌다는 그 생각마저 없어질 것입니다. 어느 듯 마음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아 의지할 곳이 없어지고 심신이 갑자기 텅 비어 허공을 의지한 것이 될 것입니다. 거기서는 밝고 또렷하며 또렷하고 밝은 그것이 앞에 나타날 것이니, 바로 그때 부모가 낳아주기 전에 본래면목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곧 바로 깨치면 마치 물을 마시는 사람이 차고 따뜻함을 저절로 아는 것과 같아질 것입니다.(『태고집』「법어」, ‘현능이 심요를 청함’)
이러한 태고의 설법은 보조가 대혜(大慧종고,1089-1163)의 경절활구를 체달하고 『간화결의론』을 저술하여 경절문을 세운 문풍과 차별이 없다. 그리고 대혜의 법사法師인 원오(圓梧克勤, 1063-1135)선사의 간화선을 선양한 것과 같다. 또 보조가 『염불요문』을 지어 염불선을 설한 것과 같이 태고의 『염불약요』에 의하면 염불공안을 타파하여 선으로 염불을 융섭하였다. 이런 것을 볼 때, 태고가 보조의 종풍을 계승하였다고 볼 것이다. 다만 보조가 설정한 삼문 중에 제3, 경절문을 적극 선양하였다.
4) 한국의 임제종법맥 고찰
조선 전기의 불교는 태조나 세종의 후기, 세조를 제외하고는 숭유억불 정책에 의한 핍박, 사태로 인하여 승려는 팔천八賤의 하나로 도성 출입도 금해지고, 흥천사와 흥덕사를 제외한 사찰은 모두 폐사시켰고 도첩제를 두어 승려가 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조사하여 환속시켰다. 따라서 불교의 사찰은 거의 산중으로 들어가게 되어 점차 법등마저 희미해진다. 중종 때 문정왕후의 섭정으로 승과가 회복됨으로 당시 두 분의 출중한 승려가 급제를 하니 서산휴정과 사명유정이다.
앞장에서 서술한 것 같이 태고의 법계를 명확히 가름함이 한국불교의 법맥을 세우는데 중요하다. 그만큼 태고보우의 비중이 한국불교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태고가 임제 제17대 법손인 하무산 석옥청공의 법을 이었고, 또 9산을 통합하여 일문으로 만든 사실을 들어 한국의 선종을 임제종이라 부르고 태고의 법손을 임제종 승려라 하는 주장이 대두하였다. 이것은 앞장에서도 살펴본 것같이 태고가 임제종 양기파 석옥의 인가를 표방했지만, 스스로 임제종의 종사라고 한 적은 없다. 신라 말과 고려 초에 교종의 승려들이 입당하여 중국의 선승들에게 전법을 인가받고 귀국하여 그들은 산문을 개산하여 9산선문을 일으킨 이후, 9산선문의 승려로서 중국의 5가 7종의 선장들에게 전법하고 귀국한 선승들이 수십 인이 있지만 그들이 하나같이 조계종 구산선문의 승려로서 종파 상 변동이 없었다. 앞장에서 살핀 대감국사 탄연, 백운선사, 나옹왕사, 또 화엄종의 승려로서 중국의 일비선사에게 전법을 받고 귀국한 진명국사는 대화엄종사로 그의 본분을 지켰다.
그러나 대각국사 의천은 귀국하여 천태종을 열고 세웠으므로 한국의 천태종조가 된 예와는 태고의 경우가 다르다 할 것이다. 그러나 태고의 비명이나 어록, 행장에도 임제종을 개창했다는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후 비명에 <고려국국사 대조계사조高麗國國師 大曹溪嗣祖>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고, 그의 법제자인 환암혼수(幻菴混修, 1320-1392)의 비명에도 <책위국사 대조계종사冊爲國師 大曹溪宗師>라 하였고, 또 그의 제자인 대지국사 찬영(大智粲英, 1328-1390)의 비에도 <왕사 조계종사王師 曹溪宗師>라고 하였다. 태고의 선맥은 가지산 도의국사의 법맥에다 고려 말 임제종 양기파의 법맥을 같이 사승하였지만, 앞에도 살펴본 것같이 득도사가 정사승正嗣僧의 전통을 갖는 한국 선맥이 그 당시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사후 조정에서나 제자들이 만든 전액과 비명에 모두 조계종사로 나타나 있다.
3. 나옹계의 득세와 그 법손
1) 고려 말 나옹과 환암
나옹은 태고와 동시대에 활동한 선의 거장이다. 그는 굴산산문의 후예 요연了然에게 득도하였다. 당시는 성리학이 태동되어 점차 불교가 흔들리고 있을 때, 태고와 더불어 조계종풍 선양하여 일반 유신들의 배불사상을 연화軟化시켜 고려불교를 꽃피우게 하였다.
29세에 원나라에 가서 서천西天 지공(指空, ? -1361)을 참견하고 다음 임제종 양기파의 처림(平山處林, 1279-1361)에게 인가를 받았다. 37세에 원의 수도 연경 광제사에서 개당하였고 원元나라 황제가 금란가사와 비단을 내렸고 황태자는 금란가사와 상아불자 내리며 우대하였다, 39세 되는 공민왕 7년에 귀국하여 오대산에 주석하니 공민왕이 조정으로 불러 심요법을 듣고 만수가사와 수정불자를 내려주시고 해주 신광사에 주석케 하였다. 공민왕 20년에는 광명사에서 오교양종五敎兩宗의 납자를 모이게 하고 선교대선과를 봄에 나옹에게 주관케 하니 이것이 공부선工夫選이다. 이어 왕사로 봉하고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증흥조도 복국우세 보제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 勤修本智 重興祖道 福國祐世 普濟尊者>란 법호를 내리고 송광사에 주석케 하였다. 그 후 양주 회암사에 있다가 밀양 영원사 주지로 칙명을 내리니 병을 얻어 여주 신륵사에 잠시 머무르다가 향년 57세로 입적한다. 시호를 선각왕사禪覺王師라 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나옹을 중심으로 한 굴산산문의 승려들의 많은 활약을 볼 수 있다. 나옹과 태고의 비석에 양쪽 모두 상수제자로 올라 있는 환암혼수 국사, 조선 태조의 왕사인 무학자초, 송광사 16국사 중 마지막 국사 고봉법장, 회암사주지 국일도대선사 승모, 대선사 지연, 또 무학의 법을 이은 함허득통, 함허의 뒤를 잇는 혜각 신미, 홍준, 신미를 잇는 학조 · 학열과 홍준을 잇는 설잠 등 수 백인의 그의 문도와 문손들이 활동하였다.
2) 환암혼수의 법계문제
환암(幻菴混修, 1330-1392)의 사법문제는 일찍이 논란이 있었다. 현금의 법계는 태고보우 – 환암혼수 – 구곡각운 – 벽계정심 – 벽송지엄 – 부용영관 – 청허휴정· 부휴선수, 로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청허의 사법을 논의하기 전에 환암과 구곡의 사법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청허의 사법계통이 확실해진다. 태고계에서는 환암을 태고의 사법제자임을 태고행장기나 비명에 기재되어 있고, 나옹계에서도 환암을 나옹의 사법제자라고 나옹의 행장 및 비명에 기재되어 있다. 이것이 후대에 사법문제가 일으키게 된다.
우왕 11년(1385), 이색(李穡, 1328-1396)이 찬한 <태고보우원증국사 탑비명후음기太古普愚圓證國師 塔碑銘後陰記>에 ‘문도 국사 지웅존자 혼수(門徒 國師智雄尊者混修)’라고 기재 되어 있고, 또 우왕 9년(1383)에 문인 유창이 『태고어록』에 찬한 <원증국사행장기圓證國師行狀記>에는‘상수 제자로서 첫째 환암화상이 있으니, 지금의 국사 정변지 지웅존자이다. (其堆爲上首輩者 曰幻菴和尙 今爲國師正辯智雄尊者)’로 간단히 기재되어 있다. 아무런 상황이나 사자상승한 기연에 관한 기사가 없다.
그러나 우왕 3년(1377) 이색 찬한 나옹의 기록 <여주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후음기驪州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鐘碑後陰記>에는 ‘문생 전 주지 송광을 널리 통하고 원융한 묘법과 걸림이 없는 큰 지혜로 두루 제도한 대선사 환암혼수 (門生 前住持 松廣廣通 无涯圓妙 大智普濟大禪師 幻菴混修)’라 또 우왕 10년(1384)에 이색이 찬한 <평양도 연산부 묘향산 안심사 나옹사리 성종비 후음기平壤道 延山府 妙香山 安心寺 懶翁舍利 石鐘碑 後陰記>에는‘문생 이름이 비구 국사 대조계종사이며 선교도총섭이며 불심의 종지를 깨쳐 자비를 운송하여 나라에 복과 삶을 이롭게 하고 무궁한 묘를 보인 대선사 정변지웅존자 환암혼수(門生 名目 比丘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 師正遍智雄尊者 幻菴混修)’라고 기재되어 있다. 두 가지 기록이 모두 문생 질門生 秩 제일 앞에 환암을 각인했고 나옹의 비는 태고보다 빨리 세워진다. 또 조선 태조 2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환암이 오대산 신성암에 있을 때 나옹혜근 화상도 역시 고운암에 있었고, 만나서 도의 요체를 물었다, 뒷날 나옹이 금란가사와 상아불자와 산형의 주장자를 믿음의 유물로 전했다.
위와 같이 나옹과 환암은 사자嗣子관계의 기록이 있다. 예로부터 전법 상 불조의 신물을 줌은 바로 사법적 포신表信이라 했다. 이런 기연이 기재된 예를 살핀다면 태고보다는 나옹으로부터 사법되었다고 본다. (정황진, 『불교지』 「조선불교의 사법계통」, 신집 제5호, 참조)
한국에 선이 전래된 九山禪門이 세워진 뒤에는 각 산문이 한 개의 종문으로 문풍을 선양하였다. 보조 때 조계종 이름이 성립된 후에는 각 산문이 조계종 이후도 각 파별로 그대로 산문을 유지하여 왔다. 이것은 득도하여 법명이 득도사의 소속 산문 본사에 등록되면, 행각 중이든 중국에 유학을 하든, 타 산문이나 종파에 구법하드라도 그 사법사 산문이나 타종파의 사법사의 승려 행세를 하지 않았다. 九山禪門 해조국사 담진(慧照曇眞, 1045-1121)은 고려 선종 때 입송入宋하여 임제종의 7대 법손 도진(淨因道臻, 1014-1093)의 인가를 받고 귀국하여 임제종이 인가하였음을 말하였지만 임제종 종사가 아닌 조계종 九山禪門의 종사로 입적하였다. 또 앞장의 승형이나 일연의 예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선초기의 법맥을 살펴 보건데 서산의 법조法祖가 되는 벽송지엄 이후의 법계는 확실하지만 벽송 이전에 계보는 애매모호한 것도 사실이다. 환암혼수 같은 경우 당시 대학자 이색(牧隱李穡, 충숙왕15-태조5)이 찬한 비명이니 여하간 두 개의 비명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외로 나옹 – 환암 – 구곡의 법계는 모두 九山禪門에서 득도한 분들이고 당시 고려에서는 득도사가 제1사승이 되니 이치상 더 신빙성이 있다.
해안(中觀海眼, 1567- ? ) 이나 언기(鞭羊彦機, 1581-1645)가 윗대를 맞출 때, 상황이나 편리에 의해 문중의견이 모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아무리 서산이 구전했다 하더라도 환암혼수 하에 구곡각운(龜谷覺雲, 1318-1383) 역시 그렇다. 환암은 1330년에 태어나서 1392년에 입적하였고, 구곡은 1318년에 태어나 1383년에 입적했다. 그리고 구곡은 사굴산문의 졸암의 득도제자이며 사법제자다. 벽계정심 역시 그렇다. 조선 초기 만우, 홍준, 신미, 수미, 상총, 학조, 학열 등 많은 선장들이 혹독한 대우를 받으며 도성금지와 팔천八賤으로 천대도 견디면서 파계를 하지 않았는데, 어쩠든 환속한 거사에게 정법을 이은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벽계는 구곡에게 원사하였다 하는 것도 어느 기록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제2장
본고의 한 주제인 함허득통을 잇는 혜각존자 신미(慧覺信眉, 1403-1480)의 행리行履와 법통을 살펴보고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에 끼친 영향을 고찰하고자 한다. 더욱이 조선(1392-1910)건국의 국시인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특히 조선 초, 건국공신들의 집요한 불교말살과 유교숭상은 1,000여년을 이어오던 불교는 조선건국의 사대부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지며 불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요설로 간주된다. 이러할 때 나옹을 잇는 환암혼수ㆍ무학자초ㆍ고봉법장 등은 모두 九山禪門의 제자로서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고승들이다.
1. 조선 건국과 숭유억불 사대교린 정책
고려 중기 이후 한국의 선과 선맥을 이어오던 조계종 九山禪門은 조선 초 함허 득통 후, 갑자기 절맥이 되고 자취를 감춘다. 물론 고려 말, 무신정권과 외침으로 인해 조정은 정상적인 국가로 힘을 잃고, 관리들은 부패해지고 한축을 담당하던 불교 역시 개인의 영달과 부의 축적 등은 조정과 함께 기울이지고 있었다. 마치 중국의 남송 때 천하를 주도하던 선종이 청렴가풍을 유지하지 못하여 사회와 백성들에게 외면당하듯이 이때에 새로운 이념체재를 확립한 주희의 성리학으로 주도권이 넘어 간다. 새 세력 역시 숭유억불을 주장하였고, 이것을 막기 위한 대혜 종고의 애씀도 무력하듯이 260년을 지나면서 한국불교에도 똑 같은 결과가 왔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신진 성리학에 의한 왕조가 탄생되었다. 이때 국시로 세운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과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은 조선 500년간에 계속되었다. 말 그대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박하고 배불한다는 것이 골자다. 사대교린은 중국을 섬기고 그 외의 국가에 대해서는 사귄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불교를 보호하였으나, 제3대 태종은 경외의 70사찰을 제외한 모든 사찰의 토전 조세를 군자에 영속하고 노비를 분속시켰고, 이어 의정부와 개성, 서울에 각종의 사찰 일사一寺만 두고, 부府나 목牧에는 선종이나 교종 사찰 하나씩만 두게 하였다. 제4대 세종 초기의 승려 도성 출입금지 등 혹독한 배불정책을 폈으나, 후기에는 불교를 옹호하여 신진 사대부들이 억불을 끊임없이 폈으나 적극 견제하였다. 세종은 애민의 의지로 한글인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당시 유학자에 몰린 불교를 충분히 활용하여 나라 글인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적극 펼쳤다. 훈민정음을 이과과거에 넣어서 하급관리들을 뽑았고 집현전을 통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들었으며, 『석보상절』을 위시하여 많은 불경을 언해하여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6대 세조는 호불하는 정책과 불경간경 기관이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신미와 그의 문도 학조, 학열과 홍준 등의 승려들을 통하여 많은 불경을 언해했다. 그 후 성종과 연산군을 잇는 불교 억압 배불 정책은 아주 세부적이고 적나라하게 펼쳐져 불교는 쇠약일로로 걷고 드디어 산중사찰로 명맥만 잇게 되었다. 조선 초기 약간의 예외 말고는 조선 500년간 불교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그들의 생명인 불조의 혜명인 전등마저 희미해졌다. 오직 부녀자들의 민간기복 신앙으로 남게 될 수밖에 없었다.
1) 사라진 함허를 잇는 전등법계
본고의 핵심주제인 혜각존자慧覺尊子 신미信眉는 태종 3년(1403) 영산김씨 김훈金訓의 장남, 김수성金守省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숭록대부를 지낸 김종경이고, 어머니는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이행李行의 딸인 정경부인 여흥 이씨이다. 그의 큰 동생은 김수경이고 둘째 동생은 조선초기의 유학과 불교에 밝은 김수온이다. 그리고 막내 동생 김수화 이렇게 4남 1녀의 장남이었다. 어려서 외조부인 이행으로부터 사서삼경을 읽었으며, 13세(1415)되던 태종15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소과를 준비할 때, 태종 16년(1446) 옥구병마절도사로 있던 아버지 김훈이 조모 상을 마치지도 않고, 임지를 떠나 돈독한 사이었던 당시 상왕인 정종과 만난다. 태종 편에 있던 신료들이 불충불효를 저지른 김훈을 탄핵하였다. 곧 전라도 내상으로 유배되었고 6월에 본향인 영동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15세(1417) 때 김수성은 태종에게 상소 하였고, 이에 김훈은 영동의 농사農舍로 옮겨졌고, 4월 25일 바깥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집안의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는 담력과 재능을 가진 수성의 장래를 걱정한 나머지 조부 김종경은 서울 외가댁으로 보냈다.
외조부 이행은 당대에 석학이었다. 불자였고 성리학과 우리말[이어俚語]과 대가였다. 어린 외손자의 장래를 위해, 총명한 수경을 위해 평산 자모산 연봉사에서 『금강경오가해설의』를 마치고 양주 회암사에 주석하고 있던 함허당에게 보낸다. 이행 역시 함허당의 스승인 무학국사의 제자였기에 결정이 가능했다.
이행은 부도를 숭신했다. 일찍이 성석린의 무리와 같이 승려에게 공양을 했고 불경을 외웠다. 불교를 믿은 지 오래 되었다. 行之崇信浮屠 曾與成石璘輩飯佛誦經 其信之也久矣
젊은 김수성은 외조부의 인격과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문의 길을 가게 된다. 이때 심정과 집현전의 동료들의 수군거림을 벗어나 삶의 길을 택하게 된다. 훗날 쓰여진 글이지만 김수성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는 글이 있다. 집현전 직제학 박팽년이 세종의 유훈인 신미의 법호에 대한 반대의 상소문에 잘 나타나 추정할 수 있다.
신미는 간사한 중입니다. 어릴 때 학당에 입학해 함부로 행동하고 음란 방종해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학도들이 사귀지 않고 무뢰한으로 지목했습니다, 그 아비 김훈이 죄를 입게 되자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 박탈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잠적해 머리를 깎았습니다. 이 중은 참을성이 많고 사람을 쉽게 유혹하며 밖으로는 맑고 깨끗한 듯 꾸미고 속으로는 교활하고 속이는 것을 감추어 연줄을 타서 이럭저럭 궁금宮禁과 줄이 닿아 있습니다. 참으로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치는 간사한 인간의 우두머리입니다. 어찌 선왕을 속이고 전하를 혹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겠습니까.(『문종실록』, 권2, 문종원년(1450), 7월 15일.)
그리고 부친 김훈이 죄인의 몸으로 대마도정벌에 참가한 것이 다시 문제가 되고 또한 폐위된 정종과 가깝게 지낸 죄로 가산을 몰수당하고 관노로 전락하게 되자 고향에서 멀지 않은 속리산 법주사의 복천암으로 출가하여 천태종의 행호行乎의 제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신미의 출가에 대하여 박해진은 양주 회암사에서 함허당 득통을 은사로 출가하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외조부 이행은 무학자초의 제자로『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義』의 저술과 강설을 끝내고 양주 회암사에 내려와 주석하고 있던 득통(涵虛得通, 1376-1433)에게 보냈고, 함허당은 손수 김수성의 머리를 깎아주고 신미라는 법명을 내렸다고 했다.
함허당은 고려 말 왕사였던 나옹-무학-함허의 법계이고 나옹은 서천지공과 임제종 양기파의 평산처림을 사승한 당대의 최고의 선장이었다. 함허당은 당호이고 법명은 기화이며 득통은 호다.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21세 되던 해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다. 당시의 배불의 삿된 논을 깨뜨리고 정의를 제시하기 위하여 『현정론顯正論』을 저작하였다. 그리고 『금강경오가해』를 설의하여 고려 진각혜심 국사의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버금가는 저작을 남겼다. 특히 염불을 종문 내의 수업으로 융섭하여 속가에서도 염불을 권장하였다. 보조지눌의 선교 융합사상으로부터 『염불요문念佛要門』을 설한 것을 바탕으로 고려 말 태고와 나옹의 어록에도 기록되어 염불선念佛禪을 전하듯이 함허에 이르러서는 이런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났고 이것이 조계종의 한 뿌리가 되었다. 신미 역시 함허의 시봉으로 나옹으로부터 이어오는 선의 종지와 교관을 전수 받았다. 세종은 함허의 선풍을 듣고 세종 3년(1421)에 동생인 성녕대군의 능침인 대자암에 주지로 임명하였다. 함허는 대자암에서 모후인 원경왕후(1365-1420)와 성녕대군의 천도재를 지냈다. 이때 신미가 3년 동안 함허를 시봉하며 왕실의 불사를 주관하는 법을 배웠다. 세종은 대자암으로 행차하여 함허에게 법문을 청했다. 함허의 현풍에 세종은 많은 감화를 받았고, 1444년 같은 해에 광평대군을 다음 해에 평원대군과 소헌왕후의 임종으로 만년에 이르러서는 외유내불外儒內佛하는 호불好佛 국왕으로 돌아서는 단초가 되었다.
2) 사찰 혁파와 불교의 전락
예조에서 상소한 이단인 불교의 혁파 내용은 ‘선종 18개 사찰전지 4,250결’, 교종 18개 사찰전지 3,700결을 국가가 몰수하였다. 세종 6년(1424) 4월 5일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을 합쳐서 교종으로 합쳐 줄이는 불교계혁이 있었다. 집현전의 의견을 종합한 내용이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조정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불교 탄압을 내세워 세종을 압박했다. 그 핵심에 있는 집현전은 척불斥佛과 멸불滅佛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불교를 점진적으로 개혁하고 그 존속은 인정하는 정책을 폈다. 이때, 경주 봉덕사의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국보29호)과 연복사 대종을 녹여 가마솥으로 쓰자는 건의가 있었고 세종은 불허했다. 연복사의 철확 2개가 녹아 가마솥이 되었다.
태종의 3주기 불사를 끝낸 함허는 세종께 물러남의 글을 올리고 운악산 현등사로 거처를 옮기며 신미를 불러서 일렀다. 제자 신미에게 함허는 속리산 법주사에 가서 공부에 전념하라 하면서 시 한편을 주었다.
젓대 한 가락 휘돌아 치는 곳 一聲長笛徘徊處
산 아래 개울가에서 너를 보낸다 山下溪邊送客時
가고 머무는 자취 다르다 마라 莫謂去留蹤自異
산 개울 구름 달은 내 말을 알걸 溪山雲月語須知
세종 6년(1424) 신미는 법주사에서 일평생 도반인 수미(妙覺守眉, 1403- 1405 )를 만났다. 신미는 수미와 함께 법주사에서 대장경을 읽으며 참선을 했다. 얼마 후 선원에 입방하겠다고 헤어졌다. 신미는 복천암으로 들어갔다. 대장경에 묻히는 나날이었다. 경전의 번역이 마땅하지 않을 때, 범어를 읽으면서 바로잡았고, 「실담장悉曇章」을 읽으며 부처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범어도 익혔다. 티베트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를 살피게 되었고 노력과 타고난 언어감각이 날로 밝아졌다. 대장경을 읽고 각필로 된 구결 분석에 매달렸고, 구결 속에 숨어 있는 향찰의 원리 천지자연의 법칙을 찾아 연계하는데 집중했다. 구결에서 실마리를 찾은 것은 함허당과 외조부 이행의 가르침 덕이었다. 인체의 비밀을 알아내는데 신미는 범패梵唄에 능한 승려[魚丈]의 도움을 받았다.
함허당은 세종 15년(1443) 3월 25일 가벼운 병을 보이더니 4월 1일 새벽 임종게를 읊고 좌탈입망에 들었다. 경북 문경 회양산 봉암사, 세수 58세 법랍 38세였다. 문인 야부가 쓴 행장과 시자 각미가 쓴 『함허어록』이 있다.
2. 세종의 훈민정음과 신미
1)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세종 16년(1434) 어떻게 하면 누구나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자를 만들겠다는 화두가 세종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것은 세종 10년(1428) 진주의 김화라는 자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으켰다. 예禮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의 국가, 충효가 근본인 예의지국 조선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종은 큰 충격을 받고 『삼강행실도』를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므로 나라의 근본을 세우겠다는 다짐을 한다.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게 위해 유신들에게 모범이 될 충신 효자 열녀들을 기록하여 시詩와 찬讚을 붙이고 그림을 그려 넣어 백성들이 알기 쉽게 간행할 것을 명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윤리 도덕 교과서를 간행한다 해도 충분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기서 세종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글자의 창안에 눈을 돌리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세종은 당시 명을 대국으로 섬기고 조공을 하며 눈치를 보는 신생국 조선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고 유학을 국교로 하며 한자를 국어로 하는 사대부들의 반대에 부딪힐 것을 고민한 끝에 이중적인 비밀 프로젝트로 나라 글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불교계의 리드인 효령대군과 의견을 나눈 끝에 세종은 효령에게 복천사에 주석하고 있는 신미를 추천 받는다. 신미는 당시 30세가 넘는 젊고 패기 있는 선승으로 구결과 범어 주역 등 삼재(三才, 天·地·人)에 정통해 있었다. 세종이 기획한 새로운 문자 창제에 알맞은 인재였다. 세종은 세자 문종, 효령, 수양, 안평대군 이외는 비밀리 했다. 수양에게 시켜 복천사에 있는 신미를 불러올렸다. 처음 세종이 신미의 이름을 듣고 불러 담소를 나누었다. 신미의 대답이 이치에 맞고 의리義理가 정밀하고 넓었다. 아뢰고 답함이 세종의 뜻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로부터 세종의 대우가 두터웠다.
初世宗大王聞尊者名 自山召至 賜坐從容 談辯迅利 義理精暢 秦對稱旨 自是 寵遇日融
신미는 세종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해 올렸다.
태종에 의해 훈구공신들이 많이 숙청되었지만 나라를 만들고 정권을 창출에 깊이 관여한 신흥세력이 새로운 세력의 등장하는 기미만 보여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정권의 특색, 조금이라도 다른 세력의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잘라내기 마련이다. 이러한 본색을 잘 알고 있는 세종은 전혀 이 비밀 프로젝트가 세어 나가지 않게 주의시켰다. 곧 신미와 세종의 가족만이 참여하게 된다.
사실 대다수 훈민정음은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으나, 그것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1443)한 후, 집현전 학자인 신숙주 성상문 등이 운음韻音을 살피는데 세종으로부터 명을 받고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세종실록』에서도 세종이 홀로 창제했음을 밝히고 있다.
세종의 가장 큰 업적은 한글창제다. 세종의 한글창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는 공동 창제설이다. 조선 전기의 학자 성현이 집필한 『용재총화』에 이런 기록이 있다.
“세종이 언문청을 설치하고 신숙주, 성삼문에게 명해서 언문을 만들었다.”
이것이 공동 창제설의 진원지이다. 조선 중기 허봉(許篈, 1551-1588)의 『해동야언』이나 후기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은 모두 『용재총화』의 이 기록을 인용했다. 그러나 『세종실록』의 기록은 다르다.
이달에 임금이 직접 언문 28자를 만들었다.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본떴는데,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 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한자)에 관한 것과 우리말[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다. 글자는 비록 간요하지만 전환이 무궁한데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렀다.
(『세종실록』세종 25년(1443) 12월 30일)
『세종실록』은 임금이 직접 만들었다고 전한다. 즉 훈민정음은 세종의 단독 창제인 것이다. 집현전 학사들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집현전 학사들의 당시 상항을 살펴보면 최항은 1443년 훈민정음이 반포될 무렵에야 집현전 학사가 되었고, 신숙주는 훈민정음 창제 2년 전인 세종 23년(1441)에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가 이듬해 훈련주부가 되어 일본에 건너갔다. 그리고 박팽년은 세종16년(1434)에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 학사가 됐고, 성삼문은 세종 20년(1438) 식년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으로 들어온 것은 세종 28년(1446) 9월 이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될 무렵 집현전에 들어왔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그들이 실제로 한글 창제에 깊이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1443) 4년 전부터 자주 병석에 누워있었다. 이때 효령대군이 추천한 신미가 그 주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신미는 범어와 팔리어 티베트어 몽고어 일본어와 주역 삼재와 우리말[俚語]에 능통한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에 주역의 역할을 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집현전의 실제의 최고 책임자인 부제학 최만리 등의 연맹된 상소문의 반대 이유를 간단히 밝히면, 첫째 지성으로 대국을 섬기는데 어긋남이 있고, 둘째 몽골 일본 여진 서하 티베트와 같은 오랑캐들이 문자를 만듦을 본받으면 오랑캐가 되는 것이고 대국이 넓어 지역마다 방언을 사용하는데 따로 글자를 만든 일이 없고, 셋째 이두와 같은 문자는 한자에 의지해 써 옴으로 한문을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하여 아무 폐단이 없는데 굳이 새 글자를 만들 필요가 없지 않느냐, 넷째 언문으로 기록해야만 형刑의 행정이 되고 이두로는 제대로 되지 않음이 아니라 이것은 형행자行刑者의 자질문제이고, 다섯째 여론을 널리 살펴보지도 않고 하급관리들을 명해서 갑자기 일을 벌려, 세상에 공포하려 함은 타당치 않고, 여섯째 세자가 덕성이 함양되었다 해도 아직은 성스런 학문에 더 매진해야 하는데 언문이 유익하다 해도 이것은 선비의 육예六藝의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반대를 한다.
그렇다면 신미가 범자를 영향을 받아 실제로 한글 창제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이 거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 숭유억불이라는 통치이념을 가졌던 집현전 학자들 중에 불교를 배척하는 유학자들의 반발로 신미에 대한 기록이 고의적으로 누락시켰고, 또한 임금이 직접 지었음으로 모든 논쟁을 잠재우고 훈민정음을 오랫동안 지키고자 하는 의도와 절대 신임하는 신미를 보호하고자 하는 세종의 마음 씀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창제(1443) 후, 3년 동안 당시 집현전 젊은 학사들은 창제한 훈민정음을 가지고 운서韻書(한자를 음으로 가지고 분류하는 사전)편찬에 참여하였다. 그것은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도 잘 나타난다.
세종 28년(1446)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 정인지는 그의 서문에서 "계해년(세종 25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처음으로 창제하셔서 예의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라고 말해 세종이 직접 만들었음을 분명히 했다. 『훈민정음해례』에서도 세종은“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창제한, 세종 최대의 업적이었고 신미가 중생들을 위해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祐國利世)한 보살로서 지극한 행위였다. 동시에 내적으로는 불교적인 것도 다분히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2) 훈민정음 창제의 이유
글자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은 한자와 다른 글을 창제하는 것은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세종 역시 그런 반대를 예상했을 것이다. 왜 세종은 그렇게 어렵고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대를 예상했음에도 한글을 창제했던 것일까? 그 이유가 훈민정음해례의 어제 서문에도 잘 나타난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나날이 쓰기에 편리하도록 함에 있느니라.(수양대군 ,『석보상절』, 세종 29년(1447))
세종은 백성들이 글을 몰라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최만리가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상소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형살에 대한 옥사를 이두문으로 쓴다면 문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 차이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다. 지금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쓰고 읽어서 듣게 한다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다 쉽게 알아 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세종실록』, 세종26년(1444) 2월 20일)라고 하지만, 세종은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익히게 함으로써 그들이 사대부들에게 부당하게 당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고, 반면에 사대부의 질서를 흔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만리가 훈민정음 창제는 결국 노비도 글을 알게 만들어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는 상소였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독점해 왔던 지식과 정보의 힘이 쉬운 글자 한글의 창제로 인해 백성들에게로 분산되는 것이고 백성이 글을 알게 되면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력이 길러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대부들이 향유하고 있는 지위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결국 사대부들이 구축한 신분제와 성리학의 이념이 비판받고 부정되는 사태가 온다는 것이다.
3) 신미가 주역이 된 몇 가지 이유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영향을 준 것으로 주장하는 설을 범자 모방설이다. 김수온의 『복천보장』에 의하면 신미가 대장경을 읽을 때, 한역이 의문 나거나 의미 전달이 명확하지 않을 때, 범어를 공부하여 뜻을 밝혔다고 한다. 또 <복천사사적비>에는“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고 있던 신미에게 한글 창제중인 집현전 학사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학자 성현(成俔, 1439-1504)은 『용재총화』에서 ‘훈민정음은 범자에서 나왔다.’했고,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언문은 범자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밝히고, 조선 후기 운음학자인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훈민정음 연원은 무릇 범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으며 근래의 상현거사 이능화(李能化, 1968-1945)도 그의 저서 『조선불교통사』에서 훈민정음자법이 범자에 근원한 것을 말하며 비슷한 용례까지 들고 있다. 그리고 최근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범어연원설이 이어 제기되고 있다. 범어(실담자, 산스크리트어)는 4~5세기 인도의 불교의 대승경전을 담던 고상한 문화글자로 『금강경』 『법화경』『화엄경』 등은 범어로 쓰여 있다. 범어연원설에 합당한 사람은 세종의 신임을 받으며 범어와 주역, 삼재와 속어에 전통했던 신미가 있을 뿐이다.
또 신미가 깊이 참여했음을 읽은 수 있는 대목이 『훈민정음해례본』의 어제 서문을 살펴보면 한자 원문은 54자이고 언해문은 108자다. 이 숫자는 불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법수法數를 옮겨왔다. 또 하나는 『훈민정음해례본』을 처음 간행할 때는 한문본으로만 되어 있고 언해본은 1년 뒤에 간행한 『석보상절』 앞머리에 수록 되어있다. 여기에도 범상치 않는 33이라는 법수를 숨겨놓고 있다. 즉 훈민정음의 쪽 수가 33쪽으로 되어 있다. 33천의 대천세계, 곧 33천의 하늘에 울려 퍼지듯, 훈민정음에 대한 기원이 서려 있다.
이는 백성들의 마음에 뿌리 내린 불심을 수용함과 동시에 곧 108번뇌, 백성들의 고통이 어려움이 사라지고 자비가 널리 확산되고 보급되는 보이지 않는 기도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후 언문청을 설치하여 불경을 언해한 것과, 세조 때 간경도감의 불경언해를 신미와 제자 학열, 학조 등이 주도했고 언해의 80%가 불경임을 볼 때,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했다는 근거로 충분할 것이다.
또 세종의 신미에 대한 배려를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대문은 『세종실록』에도 나타난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자들의 빗발치는 상소에서 드러난다. 세종이 신미를 부를 때 도성에 들어올 때 관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는데 이것에 대한 상소가 『세종실록』에 실려 있다. 승려는 팔천八賤의 하나였다. 특히 ‘세종은 유신들의 극심한 반대를 예상하고 세자, 효령대군 수양대군 안평대군 신미, 5인에게 훈민정음 창제를 극비리에 명하였다.’는 기록은 신미에 대한 신임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세종은 임종을 앞두고 신미를 침전으로 불러 예를 갖추어 법사法事를 행했고 유훈으로 세자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无礙 慧覺尊者>라는 시호諡號를 내리라고 당부를 하여 문종 즉위 원년에 사호賜號하였다. 이러한 총애는 바로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인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祐國利世]’한 공로에 의한 성은이었다. 숭유억불의 국시를 근본으로 하는 나라, 빗발 같은 유신들의 반대 상소에도 끝내 이와 같은 성은을 내림이 가능할까?
세조가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을 읽으면서 이 부분을 마치기로 한다. 세조의 수기手記로 된 이‘권선문’은 최초의 한글 권선문이었다. 사실 혜각존자 신미에게 주는 글이라 느껴지는 권선문은 스승 신미에 대한 고마움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상원사 주지는 신미였다.
세상에는 일곱 가지 중요한 일이 있는데, 삼보, 부모, 임금과 선지식이 그것이다. 삼보는 현실을 박차고 떠남을 근본으로 하고, 부모는 자식을 키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임금은 백성을 보호함을 근본으로 삼고, 선지식은 미혹에 빠진 자를 인도함을 근본으로 삼는다. 나는 일찍이 대군 시절 때부터 혜각존자를 만나 서로 도가 맞으며 마음이 화합하였다. 항상 속진의 길에서 나를 포섭하여 이끌고 나로 하여금 항상 깨끗함을 지니게 하여 탐욕의 수렁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이 어찌 대사(신미)의 공덕이 아니리요. 다겁의 깊은 인연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토록 계합할 수 있으리오. 또한 내가 병이 들었음을 듣고 주야로 수백 리 길을 달려 왔었으니 이것을 고상한 일로 삼지 않으면 어찌 중생을 제도하는 대비大悲라 할 수 있겠는가. 놀라고 감동하여 흘리는 눈물이 그지없다. 또한 스승께서는 학열 스님, 학조 스님과 함께 나를 위해 옷을 팔아 영찰靈刹을 중창하는 비용으로 쓰고자 함을 들었다. 스승이 나를 위해 마음 쓰는 것을 보니 나 역시 스승을 위해 감은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까닭에 나는 스승들을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얼마간의 비용을 보태 구경의 올바른 연緣으로 삼고자 한다. 이것이 직심直心의 보리菩提인 것이다. 이에 세자에게 부촉하여 영원히 후사後嗣로 드리우고자 한다.
불제자 승천체도열문영무 조선국왕 이유
혜각존자를 스승으로 대하는 세조의 진솔한 마음이 잘 담겨있는 이 권선문을 본 왕비와 세자, 공주, 원로대신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를 비롯해 8도의 수령방백과 장수 등 230명에 달하는 신료들이 세조와 마찬가지로 직접 이름을 썼다. 세조의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국보 292호)은 한문 권선문과 함께 한글 권선문이 수록되어 있고 번역된 훈민정음은 필사된 가장 오래된 것이고 수결은 고문서 연구와 정음(正音)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466년 여름 세조는 상원사 중창 낙성식에 참여하여 큰 불사를 끝마친 신미와 학열 등에게 감사를 표하고 선비들을 대상으로 과거시험을 열기도 했다. 세조의 지극한 공덕이 있었기에 상원사 앞 계곡물에서 목욕을 하다 문수동자를 만나고 등창이 다 나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4) 세조의 간경도감과 신미
세조 7년(1461) 간경도감을 만들고 성종 2(1471)년에 폐지되기 까지 11년 존속하였다. 불경을 언해하고 간행하는 국가사업을 제도화한 기관이었다. 이곳에서 신미를 주축으로 수미, 홍준, 설잠, 신미의 제자 학열, 학조 등에 의해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에 이어 『영가집언해』 『금경경언해』 『반야심경언해』 『아미타경언해』 『원각경언해』 『수심결언해』 『법어언해』 『몽산법어약록언해』 등은 지금까지 밝혀진 언해본들이다. 이 책들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만들어진 언해본들로서 귀중한 국어학 자료 생산과 국어학사의 체계화에 기여하여 한자본 불서를 언해한 문화사적 공로가 오늘날 학자들에게 평가 칭송되고 있다. 특히 주요 불경언해로 불교의 근본이념과 교리이해에 도움을 주었고, 보기 어려운 귀중한 장소자료章疏資料를 생산하여 남김으로 불교학 연구에 기여하였다. 또 세조는 신미, 수미, 학열, 학조 등을 시켜 해인사 대장경 50질을 인출하여 각 사찰에 나누어 주었다. 이 국역사업은 주로 세조가 중심이 되고 신미가 언해를 주관 간행했다. 수미·홍준·설잠·학조·학열 등과 윤사로는 황수신 김수온 한계희 등의 왕명의 의하여 참여했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주도적 역할을 헸고 세조의 스승이며 세조의 맨토였던 신미는 간경도감에서 최고 책임자로 수많은 불경을 간행하고 언해본을 통해 선교禪敎의 족적을 남겼다. 신미는 성종11년(1480) 5월 속리산 복천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세수 78세 법랍 64세였다. 학열ㆍ학조 등의 제자가 다비를 치루고 복천사 뒤 동편에 <수암화상탑>에 사리를 모셨다. 이 유적은 2,000년, 4월 5일 보물(제1416호)로 지정되었다.
5. 신미의 전등법계 고찰
1) 신미의 법계
신미의 행리가 당대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 실록에는 거의 기록되지 않고 간승姦僧이란 말 뒤에는 여지없이 신미란 이름이 나타났다. 필자가 늘 마음이 가는 것은 왜, 나옹-환암·무학·고봉-함허를 잇는 법계가 어째서 사라지고 말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2016년, 졸저 『선, 초기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 너머』를 출간하였는데 마지막 장에는 「선종의 선맥보와 선맥도」를 수록하였다. 고려 말과 조선을 잇는 뚜렷한 법통인 함허의 대가 끊어져 있어 이것에 대해 야룻한 느낌, 무상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즘 몇 년 사이 훈민정음을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창제했다는 정설을 깨뜨리고 범어에 능통한 신미란 스님이 주관을 하였다는 설을 들었다. 또한 그가 함허의 제자라는 말을 들었다. 신미의 법계에 대해 많은 가설이 대해 살피며 필자는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앞 장에서도 밝혔듯이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는 전통적으로 불교 자체를 나라에서 관리하여 왔다. 정권의 두 축이었던 조정의 행정과 정신적 토대이었던 불교는 두 축의 하나였고, 어느 것 하나 소홀이 할 수 없는 국정이었다. 조정에서는 승록사라는 관청을 두었고 별철로 승적부를 만들어 승려들을 관리하였다. 승려들은 득도한 종파를 이적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각 종파에 승과를 두고 승과에 입격한 승려들에게 품계를 내리고, 그에 따라 각 종파의 사찰에 주지로 임명하며 임금이 주는 시호를 사호하였기에 고려불교의 전등은 500년간을 이을 수 있었다. 중국의 5가 7종의 전등은 입실면수入室面授, 즉 스승과 제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여 법거량法擧量으로 깨달음을 인가하는 것을 철칙으로 하였다. 이럴 경우 전등이 단멸되는 경우가 많다. 스승은 제자의 깨달음을 인가하므로 법자가 되고 전등이 되기 때문이다.
그 혁혁하던 나옹의 법맥이 무학을 거쳐 함허에 이르러 무후無後가 되는 이유, 왜 법손이 사라지고 없는가? 헤아려 보면 조계종 九山禪門이 보조지눌과 보조지눌을 잇는 조계산 송광사의 15국사를 위시하여 수많은 고승대덕들은 어디로 갔을까?
신미의 전등傳燈은 행호行乎의 사법, 벽계정심碧溪淨心의 사법과 함허의 법자라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 행호의 사법에 대하여 알아본다. 김용곤은 행호의 제자라는 근거는 행호가 입적을 했을 때, 행호와 사이가 두터웠던 효령대군에게 게송을 지어 보냈다는 데, 근거를 둔다. 게를 지어 보냈으니 행호의 문도일 것이다? 당시 효령대군은 세종의 형으로 비승비속의 생활을 하며 많은 고승들을 세종에게 천거 및 알선을 해주었다. 행호는 신미보다 대선배이며 태종이 치악산 각림사를 창건한 날 행호에게 주관하게 했으며, 태자암을 지어 주지로 임명을 받았다. 세종이 즉위하여 판천태종사判天台宗師를 역임한 천태종의 종사이었다. 그리고 불탄 만덕산 백련사를 효령대군의 도움으로 세종12년(1430)~세종18년(1436)에 천태종의 수행결사인 백련사를 준공하여 세종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큰스님이었다. 신미 역시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세종을 친견한 젊은 스님이었다. 지금도 큰 스님이 열반하면 많은 후학들이 만장을 쓰고 게송을 지어 애도의 정을 표하는 것은 오랫동안 내려오는 불교의 전통이다. 게송을 지어 효령대군에게 주었다 하여 문도로 보는 것은 억지로 추측한 것으로 생각된다. 행호는 『문종실록』에 문종원년(1450) 귀양처인 제주도에서 입적하였다.
둘째, 벽계정심의 법을 이었다는 추정설이 있다. 2009년 복천암에 펴낸 『선교도총섭 수암당 신미 혜각존자 실기』에 의하면 벽계의 법을 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벽계정심은 환암혼수의 제자 구곡각운의 법통을 이은 선승이다. 천봉만우, 고암천긍과 같이 구곡의 제자로 되어 있다. 아마 평생 도반인 수미가 벽계의 법을 이었으므로 생겨난 추축일 것이다. 벽계정심은 구곡각운의 법을 원사했다고 한다. 벽계의 제자로는 묘각수미 벽송지엄 등이 있다.
셋째, 함허당에게 득도하고 사법한 신미는 나옹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무극의 법신[無極之法身]인 불조의 혜명을 이었다. 신미가 함허의 법계라는 주장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서 확인된다. 『훈민정음과 혜각존자 신미평전』의 저자 박해진은 함허의 불조혜명인 무극의 법신에 감화되어 무극의 법신 자체가 일평생 신미의 화두가 되었고 이것에 무화되어 일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해동의 불법은 고려 말에 이르러 두 감로문이 있다. 태고국사와 나옹왕사이다. 두 스님은 이미 법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세력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스님들은 모두 두 분의 문하에서 나왔다. 마침내 조선불교의 종조가 되었다. 나옹이 한 번 전하여 무학을 얻었고 무학은 한 번 전하여 함허를 얻었다. 함허는 『원각경소초』 『금강경설의』를 저술하여 종문에 큰 공을 세웠다. 조선 세조때 신미, 홍준, 사지, 학열, 학조 등의 법사들은 모두 함허의 법파들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느냐 하면 세조가 이들에게 함허의 서책을 교정하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서
“신미가 여러 선사의 법어를 많이 번역했는데, 그 중에 유독 나옹스님에 관한 것을 많이 번역하고, 또한 신미가 왕명을 받아들어 교정한 함허화상의 『금강경설의』도 역시 나옹 법손의 찬술임을 지적하며 나아가 신미와 백암이 불서를 유통시켜 조선 선교가 실로 큰 도움을 받았다
하는 점을 언급하며 신미를 나옹-무학-함허를 잇는 법계로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책에서 신미를 세조의 스승으로 정리하고 있다. 앞 장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된 『상원사중창권선문』(국보292호)에서 읽었듯이 세조와 신미의 서로 보살핌이 지극하였음을 충분히 추측이 된다 할 것이다. 필자 역시 이 논고를 작업하면서, 나옹-무학-함허-신미-학열ㆍ학조의 법맥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8천의 하나였던 승려들의 호국애민은 신라의 화랑도를 잇는 한국불교의 주된 실천적인 특징으로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ㆍ병자호란을 통한 의승병의 역할은 실로 눈부시다 할 것이다. 이론만 아닌 실참실수의 보살행은 불교본래의 행行인 동시에 한국불교의 전통이었다.
2) 해안에 의해 법계 정리
국시가 숭유억불인 조선 건국의 정책이 조선초기의 숭불군주에 의해 면면히 이어오던 불교가 쇠락의 길을 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정에 의해 각종으로 분파되어 활성화되었던 불교가 선교 양종으로 통합하고 엄격한 도첩제에 의해 승려 수가 줄어들고 도성에 있던 사찰을 흥천사와 흥덕사만 남기고 모두 조정에서 환수하여 국유화하였다. 그리고 승과제도 폐기 등 심한 척불억승斥佛抑僧의 법난 속에서 승단은 가통과 종맥마저 상실당하고 만다. 그리고 본고 1장에서 한국불교의 전등문제를 고찰하면서 고려 중엽 보조지눌의 선풍 즉 보조의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로 대변되는 선과 교의 회통은 염불선을 통합한 통불교적인 보조선의 특징으로 나타났음을 보아왔다. 이와 같은 내적인 전통은 고려 말 태고나 나옹과 환암혼수와 구곡각운, 벽송지엄을 이어 청허휴정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어 한국불교의 중추사상으로 현금에 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에 의해 8천으로 천대되던 승단을 국가에서도 소홀이 할 수 없게 되었고 백성들은 훈민정음 보급으로 눈을 뜨게 향상되고 민초와 하나인 불교와 승려를 보는 시각이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법계가 다시 정리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서산대사(淸虛休靜, 1520-1604), 사명당(松雲惟政, 1544-1610). 처영(雷黙處英, ?) 영규(騎虛靈圭, ? ) 각성(碧巖覺性, 1574-1659) 등의 승장들이 의승병을 모집하여 많은 전공을 남겼고, 특히 서산과 사명당은 명종 때에 부활된 승과에 급제함으로 차후에 일어난 왜란에 큰 전공을 세웠다. 서산대사는 73세의 노구인데도 불구하고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어 승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평양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스승 서산을 이어 팔도도총섭이 된 사명은 많은 전투에 큰 공을 세웠고, 선조 37년(1604)에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이듬해에 왜란으로 끌려갔던 3,000여명의 백성들을 데리고 오는 중요한 성과를 올렸다.
승려들의 호국으로 백성들의 생각이 바뀌고 조정 역시 불교를 억압하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승려들도 자각을 하며 승단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법통에 관심을 갖게 되며 법계를 정립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특히 서산의 후기 제자에 속하는 해안이 태고-환암-구곡-벽계- 벽송-부용-서산ㆍ부휴의 법계를 추산하여 문중들에 동의를 얻고, 언기는 서산이 입적(1604) 때는 24살의 청년이었고 1625(45세)년에 지은 〈봉래산운수암종봉영당기蓬萊山雲水庵鍾峰影堂記〉에 처음 태고법통설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언기는 휴정의 제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의 법계를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그리고 언기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낸 태고법통설은 기존의 나옹법통설과 더불어 휴정의 문하에서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옹법통설을 버리고 태고법통설을 정통으로 확립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은 1640년에 중관해안中觀海眼이 쓴〈사명당행적四溟堂行蹟〉에 실려 있다. 서산이 입적 후 20여년이 지나 서산의 후기 문손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아래와 같은 법계로 일통된다.
(사명)대사의 정통 제자인 혜구, 단(丹獻 등이 전국의 문도들과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청허 는 능(能仁의 63대, 임제의 25세 직계 자손이다. 영명은 법안종이고, 목우자牧牛子는 별종別)이며, 강월헌江月軒은 평산으로부터 분파된 것이다. (중관해안, 『사명당행적』)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사적 근거가 타당치 않는 일방적인 선언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태고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 나옹을 잇는 무학, 함허, 신미, 홍준, 학열ㆍ학조 등이 태조, 세종, 문종, 세조를 잇는 외유내불外儒內佛의 군주들의 총애, 신진 사대부들의 정권이나 유학을 본분으로 하는 당위성에 의한 억불, 반목, 질시, 척불의 상대였던 나옹계보에 의한 전등을 피한 것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또 어쩐 일인가.
참고문헌 및 논문
[논문]
권상로, 조계종은 조선에서 자립한 종파
이재열, 오교양종과 조계종통에 관한 고찰 한국조계종 성립사 연구 민족사 1989
정황진, 조선불교의 사법계통 불교 신집 제15호
강대현, 실담장에 나타난 동아시아 불교가의 실담에 관한 연구 위덕대학 박사학위논문 2015
경북 영주 출생. 법명 醉玄. 당호 越祖. 18세에 선문에 든 이후, 동암성수, 탄허택성, 고송종협, 퇴옹성철, 서옹상순, 설악무산 등 제조사를 참문하다. 서옹 선사에게 7년간 일곱 차례 西來密旨를 묻고 受法建幢하다(임신년 8월). 설악 선사로부터 傳法偈를 받다(임진년 2월).
• 시집으로는 『눈 속에 핀 하늘 보았니』, 『습득』, 『조실』, 『물 흐르고 꽃피고』 등.
• 논저로 『반야심경강론』, 『표현방법론으로 본 선시연구』, 『선의 시각으로 읽는 반야심경』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