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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元曉의 淨土往生信仰의 敎學的 根據와 特色

元曉의 淨土往生信仰의 敎學的 根據와 特色

정 태 혁*

(한국정토학회 회장, 동국대학교 명

 

Ⅰ. 머 리 말 원효의 교학에 대해서는 이에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발표된 바 가 있다. 그의 많은 저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원효의 교학체계는 너무도 다 양하다. 그것은 대승불교의 정수를 꾀 뚫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원효의 다양하고 심오한 불교적 이해가 그의 교학으로 나타나서 그 의 사상을 이루었고, 그것이 정토왕생의 신앙으로 나타나 있는 것 이다. 따라서 원효의 정토왕생 신앙은 원효의 삶의 목적이요 도정이며 삶 의 전체인 것이다. 그의 삶, 그의 신앙이 대승불교 그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의 교 학이나 신앙은 신라인의 인생관, 세계관을 이루게 했고, 신라를 거 쳐서 고려나 이조시대의 우리 조상에게 이어졌고 오늘에 사는 우리 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하듯이 원효에 있어서는 불교에 대한 모든 지식이 우리의 것으 로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다시 정리하여 원효를 다시 보고, 우리를 다 시 볼 필요를 느낀다. 다시 말하면 원효의 정토왕생은 우리의 이상 이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음미하면서 그의 맛을 재발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대로, 주어진 그대로, 그가 말 한 그대로, 무조건 따르기만 한다면 그것은 음식을 맛도 보지 않고 그냥 입에 넣어 주는 대로 먹는 것과 같이 나의 것이 못되기 때문 이다. 원효의 사상은 인도의 불교이면서 그 맛은 한국의 맛을 가졌고 중 국의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빛은 다르게 나타나 있다. 이러 한 원효의 정토신앙은 한국적이라고 하면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은 대승불교의 참 맛과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그런 것이 라고 생각된다. 이제 이러한 독특한 맛과 색깔을 가려 보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학문은 그런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은 이러한 생각에서 원효의 정토왕생신앙의 교학적 근거를 찾 아보려고 한다.

 

Ⅱ. 大覺一心에는 穢土나 淨土가 없으면서 있다.

 

1. 虛空과 같이 없다.

 

이 세상은 허망하여 꿈과 같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이 세상이 무상 하기 때문에 꿈과 같이 실답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꿈을 가지라 고 할 경우에는 이런 뜻이 아니고 어떤 이상적인 세계를 가지라고 하는 뜻이다. 원효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한바탕 큰 꿈이라고 했 다. 한 큰 꿈이기 때문에 꿈과 같이 본래 없는 생사윤회 속에서 오 탁에 빠지는 예토인 사바세계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또는 저 고요한 세계인 열반의 세계에서 적멸 속에 머물기도 하나, 이러한 “동란과 적멸은 중생들의 마음에 나타난 현상이니, 한바탕 큰 꿈 에 지나지 않는다”(若斯動寂 皆是大夢)고 했다. 중생들의 삶은 꿈속에서 산다. 그러한 꿈은 어디까지나 꿈에 지나 지 않아 실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생은 꿈을 먹고살기 때문에 그 꿈을 깨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러한 꿈에는 괴로움과 적멸 만이 따른다. 고와 낙의 두 극단을 쫓아서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 면서 영원히 생사윤회 속에 떠내려가고 있다. 이러한 중생의 현실 을 그대로 원효는 보았다. 열반경종요에서도“부처님의 뜻은 지극 히 평등하여 올바르게 열어서 중생들의 온갖 서로 다른 쟁의를 조 화시키고(和百家之異諍) 시끄러운 사생(四生)들로 하여금 둘이 없는 실다운 본성으로 돌아오게 하고(遂便擾擾四生僉歸無二之實性) 어둡 고 어두운 긴 잠에서 깨어나서 함께 큰 깨달음의 지극한 과위에 이 르게 한다(切切長睡 疊到大覺之極果).

 

지극한 과위란 큰 깨달음이다 (極果之大覺也).”라고 했다. 중생들의 견해는 생사윤회의 긴 잠에 들어서 꿈속에서 보는 것을 고집하는 것과 같아서, 잠이 깨어보면 그런 것들은 모두 허망된 것 이요, 그릇된 것임을 알 수 있듯이, 그런 잠을 깨고 크게 깨달은 부 처님의 세계만이 실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실다운 어떤 것 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꿈이 깨어 살아진 그 마음이니(體實性而 亡心) 실다운 깨달음의 본 성품은 둘이 아니다.(實性之無二也) 진실 함과 허망함이 혼융되어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混眞妄而爲一)” 라고 했다. 중생이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중생의 본성이라고 보면서도 중생 심과 불심이 둘이 아니기에 허망한 꿈과 실다운 어떤 것이 원융무애하게 혼융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점을 원효는 “중생의 심성은 융통무애하여 태연하기 허공과 같다”(然夫衆生心性 圓融無碍 泰若 虛空)고 했다.

 

2. 바다와 같이 있다.

 

우리의 본래의 마음은 꿈도 가지고 있고, 꿈에서 깬 실다움도 모두 가지고 있다. 꿈속의 안온함과 괴로움을 모두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 이 중생이면서 부처의 지혜와 중생구제의 자비를 다 가지고 있다. 일심은 하나의 어떤 마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므 로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것과 저것의 옳고 그름을 가려낼 뿐이다. 이것을 원효는 원융무애하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고, 그것을 허공과 큰 바다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는 정토나 예토가 없으나, 방편으로는 정토와 예토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일심의 원융무애함을 나타낸 것이요, 일심의 원융함을 보이는 것이다. 본래 불교에서는 화엄경이나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미“삼계(三界) 는 허망하여 오직 한 마음이 짓는다”(三界虛妄但是一心作)고 하거 나, “삼계는 오직 마음이 있을 뿐이다”(三界者唯有心)라고 하거 나, “삼계는 오직 마음이라고 경에서 설하기 때문이다”(以契經說 三界唯心)라고 하여, 이 세계는 오직 마음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고 한다.

 

그러므로 꿈도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이요, 그것은 실재하 는 대상이 아니지만,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한정이 있게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유식이십론 참조) 그러므로 정토나 예토도 한 마음에 나타난 꿈과 같다. 한 마음을 크게 깨달으면 정토도 없고 예토도 없으나, 중생들은 생사의 흐름에 따르는 긴 꿈에 끄달려서 그것을 실다운 것으로 생각하고 가위도 놀리고 꿈을 해몽하면서 고통도 느끼고 기쁨도 느낀다. 이러한 것이 중생의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한번 깨달으면 긴 꿈에서 깨어나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그 긴 꿈을 문득 열어 버리면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진실된 세계가 또한 그 속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꿈이 허망된 것임을 안 사람은 이미 그 꿈은 허망된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닌가, 진실로 내가 무아(無我)임을 안 사람은 무아가 아닌 참된 진아(眞我)를 보는 것과 같다. 이것은 우리의 본심이 원융무애함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을 원효는 큰 바다에 비유하고 있다. “마치 큰 바다와 같아서 그 본성이 윤활하여 능히 인연에 따라서 거역하지 않는다”(猶巨海 故 其性潤滑, 能隨緣而不逆) (무량수경종요). 이와 같이 원효는 큰 꿈을 깬 각자의 세계에서는 정토도 없고 예토도 없으나, 중생의 세 계에서는 인연에 따라서 예토와 정토를 나타내서 모두 수용하면서 융통무애하게 중생을 구제한다고 보고 있다.

 

원효가 말한 대각 일심은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고 정토와 예토를 인연에 따라서 나타내는 원융무애한 부처와 중생의 두 세계를 떠나 지 않는다. 이러한 원효의 일심에 대한 이해는 대승불교의 유심연기의 깊은 뜻 을 그대로 보인 것이요, 원융무애한 화엄법계의 일즉다 다즉일(一卽 多 多卽一)의 실상 그대로를 본 것이었다. 이렇게 봄으로써 정토가 한 마음에서 전개될 수 있고, 예토의 중생을 정토로 인도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무량수경(無量壽經) 상권에서 법장(法藏)보살이 수행이 다 이루어져서 “일체 모든 현상의 실상은 본래 비어있고, 모양이 없으며 바랄 것이 없는 법에 머물러(住空無相無願之法) 짓지 않고, 일으키지도 않아 모든 것은 헛개비와 같다고 관하였다.”(無作無起 觀法如化)라고 하고, “그러기에 법장비구가 태어나는 처소는 마음대로 자유자 재하였으며, 한량없는 법문이 저절로 우러나와 수없이 많은 중생을 교화하여 안온하게 하고 위없는 바른 진리를 깨닫게 하였느니라” (隨其生處, 在意所欲, 無量寶藏自然發應, 敎化安立, 無數衆生, 住於無 上正眞之道)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법장비구가 성불하여 정토를 건설한 것을 말한 것이다. 용수(龍樹)의 공(空), 연기(緣起)의 도리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니 공이 무(無)이면서 유(有)요, 있고 없음에 걸리지 않고 자재로이 인연에 따라서 유도 취하고 무도 취하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공의 참 뜻을 보인 것이다.

 

용수의 공의 사상이 생명 있는 살아있는 진리로서 현실세계에 구현 되어, 정토건설로 나타나게 된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실로 용수의 공이 원효에 의해서 정토신앙으로 승화되어 살아있는 부처님의 생명 있는 가르침으로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원효가 무량수경종요에서 “깨달음의 경계로 말하면 예토인 이곳도 없고 정토인 저곳도 없어 본래의 일심에는 생사와 열반이 (대립되 는) 둘이 아니다. 그러나 근원으로 돌아간 대각은 공을 쌓아서 비로소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이 생사의) 긴 흐름에 따르는 긴 꿈을 단번에 깰 수는 없는 것이다. (중생들을 위해서) 성인이 자취를 나타내시니 석가모니부처님이 이 사바세계에 나타나셔서 오악을 경계하고 선을 권하셨으며 아미타여래가 저 안양국을 다스리시어 삼배를 이끌어 왕생케 하시는 이러한 권적은 이루다 말할 수가 없다”(以覺言之, 無此無彼, 穢土淨國 本來一心 生死涅槃 終無二際 然 歸原大覺 積功及得 隨流長夢 不可頓開 所以聖人垂迹…… 至如牟尼 尊, 現此裟婆 誡五惡而勸善 彌陀如來 御彼安養 引三輩而導生, 斯菩 權迹 不可具陳矣)고 하였다. 이것은 대각의 일심은 무(無)에도 머무르지 않고 유(有)에도 떨어지지 않는 원융무애한 중생의 심성 그대 로임을 보인 것이다. 실로 깨달음의 일심은 언어도단이요, 원융무애함으로 있고 없음을 떠났으나, 그 속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나 이것이 원융무애한 법 계의 실상이다.

 

3. 本來一心의 本質과 그 모습 본래일심이란 ‘근본으로부터 온 하나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근본’이란 부처의 마음, 깨달음의 마음 곧 마음의 근원이니, 근본마음이다. ‘왔다’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세계로 온 것이니, 중생심, 번뇌심, 망녕된 마음이다. 그러므로 본래의 한 마음의 ‘하나’는 불심, 각심과 다르면서도 같은 마음이다. 번뇌에 쌓인 중생심이 그대로 부처의 마음과 만나는 마음이다. 따라서 ‘하나’가 아니고 이것(중 생)과 저것(부처)이 만난 하나다. 그래서 원효는 “본래일심에는 생사와 열반이 마침내 둘이 아니다”(生死涅槃 終無二際)라고 했다. 대각을 이룬 부처가 자취를 드리워서 중생에게 가르치고 극락세계 와 사바세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도 불심과 중생심이 다르면서도 하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고, 아미타부처님이 극락세계를 서방에 건설하시고 중생을 그리로 인도하는 것도 불심과 중생심이 만나는 것이다.

 

원효가 무량수경이 중생이 중생심을 가지고 “부처 님 나라에 왕생하는 인(因)과 과(果)가 둘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 다”(此經……佛土因果之眞典也)고 하고, 다시 이경이 “원(願)과 행(行)의 깊고 비밀스런 뜻을 밝히고(明願行之密深) 부처의 과덕(果 德)이 길고 먼 것을 나타냈다”(現果德之長遠)고 한 것이 이것이다. 원은 원생극락(願生極樂)의 마음이니, 중생이 불국에 왕생하려고 원 할 때에 두 마음이 하나가 된다. 이것이 곧 행으로 나타나서 한마음 그대로 왕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심(至心)이라고 하는 마음도 이 한마음이요, 세친(世親)이 “세존이시여, 내가 일심으로 진시방무애광여래께 귀명하여 안락국에 생하기를 원하나이다”(世尊我一心 歸命盡十方無碍光如來 願生安樂 國)하고 정토론(淨土論)에서 말한 일심도 이런 마음이다. ‘내가 한마음으로’라고 한 것은 세친이 자기의 마음을 토로한 것이다. 세친의 마음이 세존에게 다가가는 귀명심(歸命心)이다. 이 마음은 세친의 개인의 마음과 세존의 불심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귀명하게 된다. 귀명(歸命)이란 귀의(歸依)보다 더 깊은 뜻이 있 다. 귀명에는 이미 나는 없다. 나와 부처는 하나가 되어 무아의 아(我)로서 내가 일심으로 귀명하는 것이다.

 

이때에 부처님에게 중생이 예배하는 것이 있다. ‘진시방무애광여래’라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것은 찬탄문이다. 진시방에 걸림없는 지혜의 당체인 여래 이신 아미타불을 찬탄한 것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면 이게 나와 부처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래서 ‘원생안락국’은 작원(作願)이니, 여래께 귀명하는 세친의 마음그대로다. 이미 세친은 중생의 범부가 아니다. 원은 부처님의 본원이므로 본원 그대로 생하는 것이다. 이때에 중생이 무생(無生)의 생(生)이 된 것이다. 실체가 없는 생이기 때문에 인연생(因緣生) 이다. 사바세계가 곧 안락국이 된 것이다. 이것이 안락국에 원생하는 것이다. 사바세계는 중생심의 세계요, 안락국은 불심의 세계이므로 이미 일심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바세계의 행자가 인(因)이 되어 정토에 왕생하면 그것이 과(果)이니, 인과가 하나요, 전념(前念)과 후념(後念)이 하나로 상속되는 것 이다. 이것이 ‘일념내지 십념’(一念乃至十念)이다. 일과 십은 다르지 않다.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不二不異).

 

이와 같이 원효가 말한 일심은 일즉일체(一卽一切)요, 범불일여(凡 佛一如)의 일심이다. 사바와 극락이 하나가 되는 일심이요, 부처의 지혜와 자비는 이 일심에서 나온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바세계와 극락세계를 나타내서 중생을 부처의 세계로 인도하게 된다. 중국의 담란(曇鸞)은 우리가 일심으로 되지 못하는 것을 들어서 이 일심을 설명하기를 삼종의 불상응(不相應)이 있으니, 하나는 신심이 불순(不淳)하고 신심이 한결같지 않아서 결정심(決定心)이 없고, 신심이 상속되지 않아서 잡념이 들기 때문이라고 하고 이 셋은 서로 이어진다고 하고, 이와 달리 이 셋이 잘 상응되면 그것이 일심이라고 했다(淨土論註下). 여기에서 신심(信心)이 주가 된다. 신심은 범부인 나의 마음과 부처인 원왕생심이 하나가 된 것이다. 이 신심에 는 두 마음이 하나가 되었으나, 하나이면서 둘이 원융되어 있는 그러한 신심이다. 그래서 원효는 중생심을 불심으로 가게하기 위한 참회와 염불을 권한 것이다. 본래의 일심을 지혜의 면에서 보면 부처님의 지혜가 모두 이 한마 음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 불지도 나누어보면 네 가지 경계로 나타나니 흔히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다. 이 중에서 대원경지는 최상승지(最上勝智)로서 이로부터 다섯 가지 수승한 지혜가 나왔다고 하고, 이 대원경지는 법신(法身)이라고 하여 마음의 본원에 돌아간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경계를 뚜렷이 비추니, 무등 (無等)이요, 무륜(無倫)이요, 최상이요 최승(最勝)인 지혜이지만 모든 경계가 한없이 많지만 다 한 마음 안에 들어간다(如是萬境無限, 咸入一心之門)고 하고, 이렇듯 부처님의 지혜는 겉모양을 떠나 마음의 근원에 들어간 것으로 지혜와 한마음이 혼연히 같아서 둘이 아 닌 것이다(佛智離相 歸於心原, 知興一心 混同無二).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같으니, 그러므로 한 경계도 이 지혜의 밖으로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없다(以始覺者 卽同本覺 故無一境 出此智外)고 했다. 그리하여 이 대원경지는 여래의 근본지혜이므로 근본식(根本識)을 뒤집어서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간 것(始轉本識 方歸心原)이라고 설 명하고 있다. 이렇듯 원효에 있어서는 앙신(仰信)의 대상도 이 일심일뿐이요, 여 래법왕의 불가사의한 지혜의 힘을 믿을 뿐이다. 따라서 멀고먼 저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도 부처님의 힘을 믿으면 그 한마음으로 찰 나 사이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게된다.

 

Ⅲ. 淨土는 權迹의 方便

 

1. 大覺本心의 化現인 부처님의 垂迹 우리가 본심으로 돌아와서 대각의 본래의 경지에 이르러 본지불(本 地彿)에 이르면 그 본지불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취 를 나타내니, 이것은 자비의 나타남이다. 이렇듯 방편의 권적이 없으면 부처의 지혜도 아니고 자기의 본심도 아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방편의 문을 열어서 인도하게 되니, 중생의 근기에 맞춰서 상배(上輩)는 권선(勸善)으로 공덕을 쌓게 하고, 중배(中輩)는 가르침을 베풀어서 악(惡)을 멀리 하게 하며, 하배(下輩)는 정토를 설하여 사바세계의 인고(忍苦)를 벗어나 안양의 저 국토에 머물게 한다고 했다. 안양의 국토는 바로 그것이 열반의 세계요, 본심으로 돌아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효는 무량수경종요에서 삼배(三輩)의 중생을 모두 건지기 위해서 안양국을 다스려서 그 안양국(安養國)으로 인도하여 왕생하도록 방편을 보인다(彌陀如來 御彼安養 引三輩 而導生, 斯等權迹)고 했다. 이 말은 바로 무량수경 제2 여래정토과(如來淨土果)에서 설한바, “부처님이 아난에게 고하시되, 법장보살이 이미 성불하여 현재 서방에 계시어, 10만억찰을 지나서 그 부처님세계가 있으니, 그 이름이 안락(安樂)이니라”(佛告阿難法藏 今巳 成佛 現在西方 去此十萬億刹 其佛世界 名曰安樂)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여기서 말한 안락세계는 극락세계(極樂世界)라고도 하는 것이니, 범어의 Sukhavati는 안락이라고도 번역되고 안양(安養)이라고도 번역되며 극락이라고도 번역된다. 그러면 왜 아미타부처님이 극락세계를 서방에 건설하시어 거기에서 현재 설법하고 계시는가?

 

2. 西方은 無量光·無量壽의 世界 서방에 극락세계가 있다고 했다. 서방이란 마치 이 세계를 밝게 비추는 태양이 안주하는 곳이므로 우리 중생도 그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태양은 생명의 근원이니, 자비의 극치요 원천인 태양이 동쪽에서 뜨기 시작하여 서쪽으로 지면 긴 밤이 온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안식이다. 무한한 생명을 키우기 위한 휴식이요 관조의 시간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밤은 어둡기만 하고 두렵기만 한 시간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은 죽음이 삶의 끝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나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위한 것이다. 마치 태양이 서쪽하늘에서 그늘진 곳에 있는 모든 사물을 비추듯이 부처님의 자비도 한 사람의 중생도 빠짐없이 건지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는 법장보살의 서원 그대로 인 것이다. 이렇듯 부처님은 동쪽, 남쪽, 서쪽에서 상배, 중배, 하배의 모든 중생을 모두 극락의 안식처로 인도하시는 자비의 상징이다. 서쪽의 부처님은 특히 하배의 중생까지 구제하고야마는 분이시다. 그러므 로 무량한 지혜와 자비가 갖추어진 아미타불은, 곧 무량광불(無量光 佛)이시며 무량수불(無量壽佛)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분은 서방에 계신다고 한 것이다. 서방과 아미타는 둘이 아닌 지혜와 자비 그것이다. 무량광불이나 무량수불은 바로 우리의 마음의 덕을 그대로 상징한 것이므로, 극락세계도 마음에 건설되는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있는 현실적인 마음에 건설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 의 마음에 한해서 건설되는 것이다. 대각을 얻는 부처의 마음은 서 방에 건설된 극락세계인 것이다.

 

3. 極樂世界는 멀고도 가깝다. 또한 이 세계는 10만억불국토를 지나서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생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는 너무도 현격한 차이가 있어서 중생 쪽에서 보면 너무도 먼 거리에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나라에 가는 것은 너무도 힘이 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량수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법장보살도 “불가사의한 영겁의 세월을 두고 수행 공덕을 쌓았으므로(於不可思議, 兆載永劫 積植菩薩無量德行) 법장비구가 태어나는 처소는 마음대로 자유자재하였으며(隨其生處 在意所欲) 한량없는 법문이 저절로 우러나와 수 없이 많은 중생을 교화하여 안온하고 위없는 바른 진리를 깨닫게 하였다(無量寶藏 自然發應, 敎化安立, 無數衆生, 住於 無上正眞之道)”라고 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리 먼 극락세계도 쉽게 갈 수 있건만은 가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易往而無人), 왜냐하면 극락세계는 어느 누구도 남김없이 가게 하겠다는 서원이 이루어졌으므로(其國不逆違) 아미타불의 원력을 의심 없이 믿기만 하면 그 마음이 부처님과 통하여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자연히 이끌려 왕생하게 된다(自然之所牽)고 무량수경에서 설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원효도 상배(上輩)에 속하는 사람은 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면서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하는 관(觀)과 그리로 가는 행(行)을 닦으면 관행과 원이 화합하여 그 곳에 날 수 있고, 중배인 (中輩人)도 정인(正因)인 보리심을 발하여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적은 선이라도 닦으면서 저 나라에 낳기를 원하면 그 관행과 이 원이 화합하며, 하배인(下輩人)도 보리심을 발하는 정인(正因)을 밝히고 내지십념(乃至十念)으로 부처님을 오로지 생각하고 저 나라에 낳기를 원하면 이런 부정성인(不定性人)이라도 이 원과 행이 화합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했다.(無量壽經宗要 : 往生人, 上輩 人, 中輩人, 下輩人 참조) 이렇게 볼 때에 서방극락세계는 지극히 멀고도 가까운 곳이요, 지극히 가기 어려우면서도 쉬운 곳임을 알 수 있다. 중생의 힘으로는 가기 어렵고 먼 곳이지만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본 원력에 의지하면 쉽고도 가까운 것이다. 이 어찌 부처님의 자비본심의 나타남이 아니겠는가.

 

4. 淨土는 항상 說法하시는 大涅槃의 世界 부처님의 자비방편으로 서방에 극락세계를 건설하심은 그것이 곧 우리의 본래의 마음의 세계를 말한 것이나, 그 자리는 열반의 경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량수경에서 “저 불국토는 청정하고 안온하며 미묘하고 쾌락하여 무위열반의 경계와 같으니라”(其 國土淸淨安穩微妙快樂 次於無爲泥洹之道)(無量壽經上卷 第2章 如來淨土果)라고 하였고, 원효도 열반경종요에서 “안락을 받는 것이 곧 해탈이니, 참으로 해탈한 자는 곧 여래요, 여래는 곧 열반이다”(如 下文言, 受安樂者卽解脫, 眞解脫者卽是如來, 如來卽涅槃)라고 하는 경문을 인용하여 열반이 곧 정토임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본 바와 같이 열반은 번뇌를 끊어 없앤 세계요, 번뇌를 일으키지도 않는 세계이므로 그것은 해탈한 세계요, 지극히 안락한 세계다. 그러므로 안양국이요 묘락세계이니, 정토다. 그러나 정토는 여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설법하고 있는 세계(今現在說 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미타경에서 “이로부터 서방으로 십만 억 불토를 지나서 세계가 있으니 극락이라 이름하며, 그 땅에 부처님이 계셔 아미타라고 이름하니, 지금 현재 설법하신다(從是西方 過 十萬億佛土, 有世界 名曰極樂 其土有佛 號阿彌陀 今現在說法)고 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열반의 세계는 우리가 가야할 저 피안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러한 열반의 세계는 우리가 그리워하고 바라마지 않는 모든 것을 갖춘 곳이라고 말해질 수 있으니, 그것을 구체적으 로 표현한 것이 정토의 갖가지 장엄이다. 세친은 정토의 장엄을 대원경지, 평등성지, 묘관찰지, 성소작지 등 지혜의 장엄으로 보고 있으나, 원효는 정토의 장엄을 극란의 내면의 세계인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의 네 가지 덕으로 표현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원효는 열반경종요에서 “사덕(四德)은 법신의 뜻이 되며, 또 이 사덕은 열반의 뜻도 된다”(是卽四德, 是法身義, 又此四德, 是 涅槃義)고 하고, 열반경의 덕왕보살품(德王菩薩品)의 경문을 소개하여 “불성을 봄으로써 열반을 얻는다. 상과 낙과 아와 정을 큰 열반이라 이름한다”(以見佛性 而得涅槃, 常樂我淨 名大涅槃)고 하였다. 또한 열반경 제3 애탄품(哀歎品)에는 “아(我)라고 함은 곧 부처라는 뜻이요, 상(常)이라 함은 곧 법신이라는 뜻이요, 낙(樂)이라 함은 곧 열반의 뜻이요, 정(淨)이라 함은 곧 법 그대로의 뜻이다”(我者 卽是佛義, 常者卽法身義, 樂者是涅槃義, 淨者是法義)라고 하였다. 원효는 이 사덕에 공통되는 뜻이 있고 구별되는 뜻도 있다고 하면 서 “이렇게 구별되는 것은 중생의 세계와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곧 중생에 있어서는 색신이 무상하고 생사가 있는 고해(苦海)이고, 자아(自我)가 주가되고 있으며, 비법에 의지하여 더럽게 물들어있기 때문이다(染濁).

 

따라서 저 부처의 세계는 정(淨)이요, 낙 (樂)이요, 아(我)요, 상(常)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사덕 중에서 특히 정토라고 하여 정(淨)으로 네 가지 모두를 회통하고 있는 것 이다. 정(定)에 들어서 청정함에 이르면 현실세계의 고와 무아와 무상과 부정함을 볼 수 있으므로, 이것을 떠난 세계, 곧 현실을 부정 한 피안의 세계가 보인다. 그러므로 열반경 애탄품(哀歎品)에서도 “고(苦)와 공(空)과 무아(無我)를 보지 않고 어찌 상과 낙과 아(我) 와 정(淨)을 볼 수 있겠는가”(尙不得視苦空無我 況得常樂我淨) 라 고 하였다. 현실을 바로 보아 이것을 투철히 통과하여 부정하지 않 고서는 진실한 피안의 세계를 볼 수 없다. 부처님의 신덕(神德)의 세계는 중생의 현실세계를 무아·무상·고·부정으로 그대로 보고, 이것을 투철하게 관하여 부정하면 상·낙·아·정에 이를 것이다. 또한 우리가 상·낙·아·정의 사덕을 증득하지 않고 어찌 고·무 아·부정·무상을 여실히 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진실로 인생이 고요, 무아요, 무상을 보는 사람은 상·낙·아·정을 본 성자인 것 이다. 그래서 석존도 고·무상·무아를 설하시어, 그릇되게 상· 낙·아·정에 빠지지 않게 가르치신 것이다. 정토는 적정인 유여열반(有餘涅槃)에 머물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 槃)인 대열반(大涅槃)의 세계이므로 아미타불이 항상 설법하신다.

 

5. 方便은 眞實이다. 권적(權迹)이란 권화(權化)라고 말해지는 것이요, 방편(方便)이라고 도 말해진다. 권화, 권적은 부처님이 중생을 구해하기 위해서 짐짓 화해서 나타나시는 것이므로 화신불(化身佛)이다. 화신불은 거짓이 아니다. 자비의 진신(眞身)인 것이다. 따라서 방편도 가화(假化)가 아니고 진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서방정토의 건설은 권적이므로 방편설이라고 하여 진실이 아닌 것 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방편은 결국 버려지는 것이라고 하여 교(敎)도 방편이니 교는 버리고 선으로 들어간다고 (捨敎入禪)하여 교는 거짓이요 선은 진실이라고 차별을 두는 일이 없지 않고, 정토는 권적이니 진실은 유심(唯心)이라고 하여 정토가 방편이니, 진실로는 없다고 보는 사람이 있고, 방편은 결국 버릴 것 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릇된 견해이다. 정토는 권적(權迹)으로 불심을 열어서 그의 진실임을 보인 것이다. 원효는 법화경종요에서 “묘법은 마치 연꽃과 같아서 꽃으로 표현된 속에 진실한 이치인 씨가 들어 있듯이(華而含實) 묘법을 설함에 너무도 그것이 깊으므로 그 진실함에 권(權)을 같이한다(義理深泰 實而帶權).

 

묘법이 깊고 크다는 것(理深泰者)은 진실과 방편이 둘도 없고 다름도 없다(無二無別也). 말을 교묘하게 나타냈다는 것은 방편을 열어서 진실을 보인 것이다.(辭巧敷者, 開權示實也)”라고 했다. 따라서 서방에 극락세계가 있어 아미타불이 지금 설법하신다고 하는 교설은 방편이므로 이 방편을 열어서 진실을 보인 것이다. 또한 원효가 무량수경종요에서 “크게 깨달음으로 보면 예토와 정토가 본래한 마음이요, 이것과 저것이 없으나 성인이 권적을 드리웠다(無此無彼…… 聖人垂迹)고 하고, 생사열반이 대립되지 않는다(生死涅槃 終無二際)”고 했다. 그러므로 생사가 곧 열반이요, 정토와 예토가 둘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서 부처님이 자비로 중생을 위 해서 방편을 보이신 것이다. 원효가 법화경종요에서 방편을 설명하면서, “방편에 네 가지 뜻이 있다고 하고, ①은 부처님의 방편지(方便智)로 설한 교(敎)요, ②는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가 되는 업(業)에 따라서 분류한 것이요, ③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기 위해서 나누는 것이요, ④는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나누어 진실에 상대하는 것이라고 하고 여러 가지 방편문은 진실의 모습”이라고 하였다. 곧“어떤 경우에나 교묘히 방편문을 열어서(巧開方便之門) 삼승(三乘)을 집착하는 소견을 멸하며, 교묘하게 일승(一乘)의 지혜를 내게 했다.”(巧開方便之門, 巧滅 執三之見, 巧示眞實之相)고 말하고 있다.

 

이러하므로 서방에 정토가 있어서 아미타불이 설법하시니, 그리로 왕생하기를 원하여 염불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방편설이며 진실한 우리의 근본일심이니, 진실로 저 서방에 우리가 왕생할 미타찰인 것이다. 원효는 법화경의 궁자유(窮子喩)에서 보듯이 궁자가 그 동안 머물던 여정은 이승(二乘)이나 삼승(三乘)이다. 이러한 것이 방편이다. 이승이나 삼승은 모두 일승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회삼귀일(會三歸 一) 또는 개삼회일(開三會一)은 중도의 도리라고 하여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不異而非同)고 했다. 실(實)과 권(權), 지혜와 자비, 교와 선은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방편인 손가락과 진실인 달은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방편이란, 범어로 우파야(up-aya)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은 ‘가까이 간다’는 뜻이 있어서 접근, 방편, 권(權), 인연(因緣)의 뜻으로 사용된다. 흔히 방편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고도 한다. ⓛ방(方)은 법(法)이요, 편(便)은 용(用)이다. ②방은 문(門)이니, 능히 통하는 것이므로 진 실로 통한다는 뜻이다. ③방은 비(秘)요, 편은 묘(妙)의 뜻이다. 비 는 묘이니, 법은 思量할 수 없으므로 비요, 그의 나타남은 묘다. 대승불교시대에 있어 용수(龍樹)는 자비라는 말 대신으로 방편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그리하여 방편이라는 말이 깨달음을 얻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유마경(維摩經)의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에서는 “방편은 지혜에 의하지 않으면 속박이 있게 되고(無慧方便縛) 방편에 의하지 않으면 지혜도 속박이 있게 된다(無方便慧縛). 지혜와 방편이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에는 해탈이 있다.(有方便慧解 有慧方便解)”라고 했다. 이것을 배에 비유하여 일체 중생을 피안으로 가게 하는 배와 같다고도 말한다. 이것은 방편과 반야(般若)가 둘이 아닌(不二) 관계를 말하는 것이니, 이 둘은 서로 원융되는 것임을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계를 우유와 물이 섞여 있는 것과 같다고도 하여 반야와 방편을 나누지 않고 반야방편(般若方便)(praj~nop-aya)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속에는 깨달음과 중생제도가 같이 따르고, 선(善)과 적정이 같이 있으며 법계 그대로의 상태에 있게 된다. 이것이 선교방편(善敎方便)이라고 한다. 용수는 중론(中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 論) 등에서 이에 대하여 상세히 말하고 있다. 용수는 중론에서 공(空)을 방편으로 설한다고 하고, 우리가 말할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를 가설(假說)로써 나타내어, 우리의 언설의 대상, 생각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대성을 가진 가설이므로 일단 부정되면서 절대적인 본래의 세계로 돌아 들어간다고 말했다.

 

용수가 중론의 벽두에서 말한 불멸불생(不滅不生), 부단불상(不斷不 常), 불이불일(不異不一), 불래불거(不來不去) 등 팔불(八不)로써 일체를 부정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 부정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같이 있으니 부정즉긍정(否定卽肯定)이 된다. 또한 지도론에서는 ‘부처는 대자비심으로써 중생을 연민히 여기므로 방편으로 법을 설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의 예로는 한없이 많이 있으나, 특히 법화경의 여러 비유품은 바로 이러한 것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방편은 용수에 있어서는 공이라는 것과 자비라는 서로 다른 것이 만나는 것이니, 불이(不二)의 관계다. 이것이 공의 내용이 되기도 한다. 흔히 방편으로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을 만나서 밝은 달을 보는 것은 둘이 아닌 진실을 깨닫는 것이므로 이것이 새로운 가치로서의 전환인 공이요, 깨달음이다. 따라서 방편은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고도 하며, 방편바라밀(方便波羅密)이라고도 한다. 또한 지도론(智度論)권1에서는 “보살은 방편력으로써 유(有)와 무(無)의 이변(二邊)을 떠나서 중도(中道)를 행한다”고 하고 있다.

 

이러하므로 방편은 버려야 할 것이라고 하여 사교입선(捨敎入禪)으로 그릇 이해하는 것은 교가 방편이고 선이 진실이라는 분별에 떨어진 견해이며, 서방정토는 방편이요 본각일심은 진실이라고 분별하면 이것은 불교의 근본입장을 모른 것이 된다. 이런 뜻에서 원효는 부처님이 정토를 보여 방편으로 중생을 왕생케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원융무애한 법의 실상 그대로의 세계인 것이다.

 

Ⅳ. 願行和合으로 往生한다.

 

1. 上輩人의 願行化合 불교는 인과의 도리를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여래가 정토를 건설 하여 중생을 그리로 인도하는 것도 이 인과의 도리에 의해서 설해 지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다만 여래의 본원력을 받기 때문에 그 힘을 감득함에 따 라서 수용하는 것이니, 스스로의 업인(業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나, 본원력이 있어서 중생이 감득하는 것이므 로 감득하는 것과 본원력은 인과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 에도 중생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여래의 본원이 아니랴, 그러므로 왕생인은 많은 경론에서 다르게 말해지나, 관무량 수경에서나, 또는 세친의 정토론(왕생론)에서도 왕생인을 설하고 있는 것에 의하여도 그렇고, 무량수경에서도 왕생인은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원효는 무량수경종요에서 왕생인을 설명하면서 무량수경의 삼배인(三輩人)의 설을 인용하고 있다. 무량수경하권 중생왕생인(衆生往生因)에서 “아난아!……. 모든 중생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 신심을 일으켜 환희하여 내지일념으로 지심회량하여 저 나라에 낳기를 원하면 곧 왕생할 수 있으니, 거기에 머물러 퇴전하지 않나니, 오직 오역(五逆)과 정법을 비방하 는 자는 제외 되나니라.”(阿難, 諸有衆生 聞其名號 信心歡喜 乃至 一念 至心廻向 願生彼國 卽得往生, 住不退轉 唯除五逆 誹謗正法)라고 하시고, 다시 “아난아, 시방세계의 모든 천신과 인민의 지심으로 저 나라에 낳기를 원하는 이들에는 무릇 세종류의 사람이 있나니라”(佛告阿難 十方世界 諸天人民 其有至心 願生彼國 凡有三輩) 한 것에 대한 설명이다.

 

원효는 이에 따라서 상배(上輩), 중배(中輩), 하배(下輩)의 모든 사람이 정토에 왕생하는 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하여 원과 행의 화합(願行和合)이라는 말로 결론지었다. 원행화합은 인과의 도리 그대로요 인연법 그대로인 것이며, 여래가 중생을 구제하는 본회(本懷)인 것이다. 원효는 상배인이 사문(沙門)이 되는 것은 정인방편(正因方便)이라고 하고, 발보리심(發菩提心)은 정인을 밝힌 것이고, 전념피불(專念彼 佛)은 관(觀)을 닦는 것을 밝힌 것이고, 작제공덕(作諸功德)은 행 (行)을 일으킨 것을 밝힌 것이니, 이들 관과 행은 조인(助因)이 되고, 끝으로 원생피국(願生彼國)은 중생의 원심이 아미타불에게 향해 가서 여래의 원과 중생의 원이 하나가 된 것이므로 이들 다섯 가지가 갖추어진 것이 상배인의 왕생인이라고 정리했다. 여기에서 원효는 중생의 인행(因行)과 왕생원은 여래의 원행과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 듯 하다. 그래서 원효는 “행원이 화합하여 왕생을 얻기 때문이다”(行願和合乃得生故)라고 단언했다.

 

2. 中輩人의 願行化合 무량수경에서 설한 중배인이 ①비록 사문이 되지 못하더라도 보리 심을 발하는 것은 정인을 밝힌 것이요 ②오로지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것과 ③다소나마 선공덕을 닦는 것은 이것은 관과 행이 되어 왕생을 위한 업을 원만히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또한 ④저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니, 이 네 가지 중에서 앞의 셋은 행이 되고 뒤의 하나는 원이 된다. 원과 행이 화합하여 왕생의 인이 되므로 극락정토에 반드시 왕생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중생의 원행화합이 부처님의 원행에 화합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왕생의 인연이 있게 된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경과가 얻어지는 것이 진리이다. 불법은 이런 인연의 도리를 떠나서 있을 수 없으니, 정토의 왕생도 왕생의 인이 있으면 반드시 왕생이라는 과가 있게 마련이다. 여기서도 중생의 원행이 원만하면 여래의 원행과 만나서 여래의 본 원력을 감수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3. 下輩人의 願行化合 원효는 하배인 가운데는 두 가지 부류의 사담이 있다고 하고, 각각 그들에게는 세 가지 왕생인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가사 공덕을 짓지 못하더라도 무상보리심을 발하는 것은 정인(正因)을 밝힌 것이요, 둘째로 내지십념(乃至十念)으로 오로지 저 아미타불을 생각하면 이것은 행업(行業)을 원만히 하는 조인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지극한 마음으로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들 세 가지는 부정성인(不定性人)의 왕생인을 밝힌 것이 라고 하고, 이것도 앞의 두 가지는 행이 되고 뒤의 것이 원이 되어 원행(願行)이 화합(和合)하여 왕생의 인이 된다고 했다. 혹은 깊은 진리의 법문을 듣고(聞甚深法) 환희심으로 믿고 즐거워 하면(歡喜信樂) 이것은 보리심을 발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정인(正因)이 되고, 둘째로 내지일념(乃至一念)으로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것(念於彼佛)은 조인(助因)이 되어 왕생업을 원만히 하게 되는 것이며, 셋째로 지성심으로 저 극락세계에 낳기를 원하는 것(以至誠 心 願生彼國)이니, 앞의 두 가지는 행(行)이요, 뒤의 하나는 원(願)이 되어 행과 원이 화합(和合)하여 왕생인이 된다고 했다. 여기에서도 행원화합(行願和合)의 도리가 곧 왕생인임을 밝혔다.

 

4. 元曉의 願行二門 이상에서 정성인(定性人)이건 부정성인(不定性人)이건 간에 부처님 이 정토를 건설한 원행에 맞추는 행원을 가지고 원행화합의 인연의 도리에 의해서 모든 중생이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했다. 이것은 불교의 근본법인 인연의 도리 그대로인 것이다. 용수(龍樹)에 있어서는 이행도(易行道)로서 설해진 왕생행(往生行)은 문명(聞名)에서 일심(一心) 공경심(恭敬心) 신심청정(信心淸淨)을 거쳐서 억념(憶念)과 칭명(稱名) 경례(敬禮)의 행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친(世親)에 있어서는 오념문(五念門)으로 설해지니, 예배(禮拜), 찬탄(讚嘆), 작원(作願), 관찰(觀察), 회향(廻向) 의 다섯으로 나타냈다. 그러나 원효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이 각각 다른 업력의 결과로 현실적으로 서로 다른 처지에 놓여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사문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선업을 지을 수 있는 사람과 이런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으므로, 근기의 여하에 관계없이 이들 모든 중생들을 모두 왕생케 하려면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왕생인을 닦고, 다 같이 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원효는 ①원생피국(願生彼國) ②발보리심(發菩提心) ③전념피불(專 念彼佛) ④선공덕(善功德)으로 요약하였다. ①은 원(願)이요, ③, ④ 는 관(觀)과 행(行)이다. 이 중 ③의 전념피불은 관에 해당하고, 일념(一念)내지 심념(十念)은 행이다. 그러므로 원효의 왕생문은 원과 발보리심과 관행의 세 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①발보리심이 정인(正因)이 되고, 이 정인을 돕는 조인(助 因)이 ②의 관과 행이며, 여기에 ③원생피국(願生彼國)이 화합해서 왕생이 이루어지게 된다. ①의 정인과 ②의 조인인 관행이 합해져서 중생의 업인(業因)이 되 니, 이로써 중생이 여래에게도 향해서 가는 것이 되므로, 비로소 부처의 본원의 원과 중생을 인도하기 위한 설법의 행이 화합하게 되고, ③의 원생피국(願生彼國)은 여래의 여래의 원행과 중생의 원행이 만나게 되므로 이때에 부처와 중생이 만나게 되니, 이때에 중생은 불퇴전의 위치에 머물게 된다. 그러므로 원효의 왕생문은 무량수경의 삼배인(三輩人)의 설에 의해서 독특한 교학적인 체계를 갖추어 특색 있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원효에게 있어서는 모든 중생이 여래에게로 가는 두가지 문, 곧 원 (願)과 행(行)의 화합이 있고, 여기에 여래의 자비의 원행이 있어서, 서로 이것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근본원리인 연기 의 도리 그대로의 모습이다.

 

부처의 깨달음의 세계인 정토도 부처만의 원행만이 아니고 중생의 원행이 있어서 있게 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는 법 그대로 인 것이다. Ⅴ. 맺 음 말 이상으로써 원효의 정토왕생사상의 바탕이 되는 교학체계를 살펴보 았다. 원효는 무량수경이나 아미타경이나 관무량수경만이 아니라 여러 경 론의 깊은 연구를 통해서 정토신앙에 도달됐다. 본래 깨달음인 무분별지(無分別智)의 경지에서 보면 정토나 예토(穢 土)의 구별이 없겠지만, 분별지(分別智)의 경지에서 보면 구별이 있다. 자비의 문, 세속의 문에서는 구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래는 지혜로써 이것을 보고, 중생구제의 자비방편으로써 정토가 설해지고, 세속에 얽매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원효의 정토관은 대각일심(大覺一心)1)이라는 본심에서 원융무애하게 나타나는 법계의 실상인 것이다. 법계의 원융함을 있는 그대로 보는 깨달음은 일심이라고 하는 것이니, 일심의 근본자리(眞)에서는 정토도 예토도 구별이 없으나, 일심의 나타남인 중생의 자리(俗)에서는 있다. 이것은 법의 원융한 부사의한 모습이요, 공(空) 그대로인 것이요, 지비불이(智悲不二)·진속불이(眞俗不二)·정예불이(淨穢不二)의 묘법이니, 실로 법계의 실상 그것이다. 그러므로 정토는 진과 속이 만나는 곳이니, 중도(中道)그대로의 실현이다. 아미타불의 원행에는 진(眞)에서 속(速)으로의 회향이 있고, 중생의 원행에는 속(俗)에서 진(眞)으로의 왕생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정토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만나고, 부처는 항상 설법하며 중생은 일심전념으로 항상 염불하는 것이다. 모든 대승교학은 정토교에 이르러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니, 원효는 이것을 알았다.

 

용수의 공(空)의 세계가 극락세계로 나타나서 생명을 얻어서 부처의 설법과 중생의 왕생이 있게 되고, 세친의 근본아뢰야식(根本阿賴 耶識)이 아미타불로 나타나서 지혜의 빛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자비행이 있게 되고, 여래장(如來藏)의 불성(佛性)이 법장보살의 사십팔대원의 성취로 나타나서 무량광, 무량수의 영원한 산 부처로서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원효는 이러한 것을 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그의 정토신앙은 깊고 넓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증(證)에서 해(解)로, 다시 해에서 행(行)으로 이어져서, 드디어 신(信)으로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아진다. 이것은 자연법이(自然法爾) 그대로다. 중에서 신으로 이어지는 대원상(大圓相)은 시작이면서 끝이요 끝이면서 시작이고 중간도 이와 같아 원융그대로다. 따라서 원효의 정토신앙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고, 원효의 염불은 부처에게 의지하는 행이면서 원이고, 앙신(仰信)이면서 열반의 안락함이였다고 보아진다. 정토는 중생들이 꿈에서 깬 대각의 세계에서 나타난 것이므로 진실 한 세계라고 했다. 깨닫지 못한 중생의 꿈의 세계는 허망한 것이니, 정토, 예토의 대립이 있고 그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꿈을 깨고 보면 꿈에 보았던 예토를 떠나서 안온한 정토로 가게 된다.2)

 

이것이 극락세계로의 왕생이요, 꿈의 현실화인 것이며, 우리가 가야 할 곳이다. 인생은 꿈을 깨고 꿈을 현실화하여 진실한 세계로 가고자하는 것이다. 정토는 내 마음속의 깨달음의 진실한 세계인 동시에 저 서방에 건설된 극락세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깨달은 자기가 있으므로 깨닫지 못한 중생이 있으니, 깨닫지 못한 중생을 인도할 정토는 십만억불국토를 지나서 저 서방에 건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토는 차토(此土)에도 건설되고 피토(彼土)에도 건설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과 저것은 다르지 않으니, 차피불이(此彼不二)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면 곧 차토의 공덕장엄을 본다(若人心淨便見此土功德藏嚴)3)고 한 바와 같이 마음이 청정하면 저 불국토의 장엄도 볼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정하면 이 땅의 예토가 정토로 바뀔 것이요, 저 서방 극락세계를 볼 것이다. 원효는 이 땅에서 정토를 보았기에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춤을 추었고, 저 서방에도 극락세계를 보았기에 극락왕생을 원했다.(願生彼國) 원효는 승(僧)에서 속(俗)을 떠나지 않았기에 스스로 속복을 입고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하고, 입적(入寂)한 뒤에 설총(薛聰)이 그의 소상(塑像)을 분황사에 모실 때에 설총이 예배하니, 홀연 설총을 돌아보았다(旣入寂也聰塑眞容芬皇寺時旁禮像像忽回顧)고 하니, 이것은 진속불이(眞俗不二)요 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음(生死涅槃終無二 際)을 보인 것이 아닌가?

 

정토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렇듯 걸림이 없는 무애인으로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이 예사다. 승에도 머물지 않 고, 속에도 떨어지지 않음이니, 승으로 있으면서도 속을 떠나지 않 는 것이 되어야 하고, 속에 있으면서도 승을 떠나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역대 정토신앙의 대덕들은 모두 이런 길을 걸었 다. 오직 시대적인 상황과 인연에 따른 역사인식에 따라서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는 것이니, 원효의 일생은 진에서 속을 떠나지 않았으니, 신라시대의 당시의 시대적 인식으로 나타난 대승사상으로서의 정토교학의 실천이었다고 생각된다. 역사인식에 따른 방편은 인연을 살리는 자비행으로 나타나니, 중생에게로 다가 가는 부처님의 뜻이다. 원효의 정토신앙은 시간를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지 않으면 않된다고 생각된다.

각주 1) 정철호의 박사학위논문인 「元曉의 淨土信仰과 사상에 관한 연구」

에서는 이것을 一心二門으로 해석하고 있다. 2) 藤能成, 「元曉에 있어서의 往生因에 관한 考察」(不堂論叢 16輯),

p.24에서 ‘정토는 가는 곳이 아니라, 꿈에서 깰 때가 바로 정토이고,

…… 원효에 있어서는 이러한 자각 속에 정토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3) 유마경 佛口品, 「潟淨其心, 隨其心淨卽佛土淨」, 이 경구에서

“마음이 청정하면 불토가 청정하다”고 한 것을 흔히 유심정토설로 보고 있다.

[출처] 元曉의 淨土往生信仰의 敎學的 根據와 特色|작성자 불교기초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