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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지눌(知訥) 보조국사(普照國師) ◈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지눌(知訥) 보조국사(普照國師) ◈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원문-독음-번역문(김원각)

 

아래의 글은 지눌(知訥)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의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다. 이 글의 내용은 당시 출가 수행승들이 수행은 하지 않고 세속적인 타락에 빠져있는 있는 것을 개탄하고, 나아가서 불가의 본분인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닦아나가자고 호소한 글이다. 이는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불교의 병폐를 파헤친 것 같아 출가자나 재가자에게 많은 경종을 울려주는 법문이라 하겠다.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에 관한 글이기 때문에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이란 글 제목인듯 하다. 번역은 시인이자 역경위원인 김원각님의 문장이다.

 

<1>

한마음 미혹해 번뇌 일으키면 중생 한마음 깨달아 묘용 일으키면 부처. 恭聞 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 공문 인인지이도자 인지이기 離地求起 無有是處也 이지구기 무유시처야 迷一心而起無邊煩惱者 衆生也 미일심이기무변번뇌자 중생야 悟一心而起 無邊妙用者 諸佛也 오일심이기 무변묘용자 제불야 迷悟雖殊 而要由一心則離心求佛者 미오수수 이요유일심즉이심구불자 亦無有是處也 自妙年 投身祖域 역무유시처야 자묘년 투신조역 遍參禪肆 詳其佛祖 垂慈爲物之門 변참선사 상기불조 수자위물지문 要令我輩 休息諸緣 虛心冥契 요령아배 휴식제연 허심명계 不外馳求 如經所謂 若人欲識佛境界 불외치구 여경소위 약인욕식불경계 當淨其意如虛空等之謂也 당정기의여허공등지위야 삼가 들으니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난다’ 하였다. 땅을 떠나서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한 마음이 미혹해서 끝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사람은 중생이고, 한 마음을 깨달아서 한없는 묘용을 일으키는 사람은 부처이다. 미혹됨과 깨달음이 비록 다르지만 요는 마음이므로 마음을 떠나 부처를 찾는 것은 또한 있을 수 없다.

 

나는 소년시절부터 조사문에 투신하여 두루 선방을 찾아다녔는데, 불조(佛祖)께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신 문을 살펴보건대,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반연을 쉬고 마음을 고요히 비워서 밖으로 구하지 않게 함이었다. 말하자면 경에서 “만일 사람이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기를 허공처럼 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凡見聞誦習者 當起難遇之心 범견문송습자 당기난우지심 自用知慧觀照 如所說而修則可 자용지혜관조 여소설이수즉가 謂自修佛心 自成佛道 而親報佛恩矣 위자수불심 자성불도 이친보불은의 然返觀我輩 朝暮所行之迹 연반관아배 조모소행지적 則憑依佛法 裝飾我人 즉빙의불법 장식아인 區區於利養之途 汨沒於風塵之際 구구어이양지도 골몰어풍진지제 道德未修 衣食斯費 雖復出家 도덕미수 의식사비 수부출가 何德之有 噫夫欲離三界 하덕지유 희부욕리삼계 而未有絶塵之行 徒爲男子之身 이미유절진지행 도위남자지신 而無丈夫之志 上乖弘道 下闕利生 이무장부지지 상괴홍도 하궐이생 中負四恩 誠以爲恥 以是長歎 중부사은 성이위치 이시장탄 其來久矣 기래구의 무릇 보고, 듣고, 외고, 익히는 자가 마땅히 만나기 어려운 마음을 찾아 스스로 지혜로써 관조하여 말한 것처럼 닦아간다면, 참으로 스스로가 불심을 닦고 스스로가 불도를 이루어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돌이켜 우리 무리들이 조석으로 하고 있는 행적을 보면 불법을 빙자해서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꾸미고 이해 득실의 길에만 매달리며 세속적인 일에만 골몰하여 도덕은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다시 출가한들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슬프다.

 

삼계를 여의고자 하나 번뇌를 끊으려는 수행이 없으니 한갓 남자의 몸일뿐 대장부의 뜻이라고는 없다. 그래서 위로는 큰 도를 어기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이 없고, 가운데로는 네 가지 은혜를 저버리는 꼴이니 참으로 부끄럽다. 내가 이를 장탄식하여 온 지가 오래였다.

 

 

<2>

 

소임따라 인연따라 성품기르며 걸림없이 살면 실로 통쾌한 일.

 

歲在壬寅正月 세재임인정월 赴上都普濟寺談禪法會 부상도보제사담선법회 一日與同學十餘人 約曰罷會後 일일여동학십여인 약왈파회후 當捨名利 隱遁山林 結爲同社 당사명리 은둔산림 결위동사 常以習定均慧 爲務 禮佛轉經 상이습정균혜 위무 예불전경 以至於執勞運力 各隨所任而經營之 이지어집로운력 각수소임이경영지 隨緣養性 放曠平生 수연양성 방광평생 遠追達士眞人之高行則豈不快哉 원추달사진인지고행즉기불쾌재

나는 임인년 정월에 서울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나아갔다가, 어느 날 동학 십여인과 함께 약속하기를 “이 법회가 끝나면 응당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숨어서 함께 한마음이 되어 항상 선정을 익히고 지혜 닦기를 힘쓰며, 예불하고, 경 읽으며, 울력하는데 이르기까지 각자 소임에 따라 경영하여 인연 따라 성품을 기르며 평생을 걸림없이 살면서 멀리로는 달사와 진인의 높은 행을 따른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諸公聞語曰 時當末法 正道沈隱 제공문어왈 시당말법 정도침은 何能以定慧 爲務 不如勤念彌陀 하능이정혜 위무 불여근념미타 修淨土之業也 수정토지업야

이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이런 뜻으로 말했다.

“지금은 말법(末法) 시대라 정도가 숨었는데 어찌 선정과 지혜 닦기에 힘쓰겠는가. 차라리 아미타불을 부지런히 염불하여 극락정토의 업을 닦는 것만 못하리라.”

 

余曰時雖遷變 心性不移 여왈시수천변 심성불이 見法道之興衰者 是乃三乘權學之見 견법도지흥쇠자 시내삼승권학지견 有智之人 不應如是 君我逢此最上 유지지인 불응여시 군아봉차최상 乘法門 見聞薰習 豈非宿緣 승법문 견문훈습 기비숙연 而不自慶 返生絶分 이불자경 반생절분 甘委權學人則可謂睾負先祖 감위권학인즉가위고부선조 作最後斷佛種人也 작최후단불종인야 念佛轉經 萬行施爲 是沙門 염불전경 만행시위 시사문 住持常法 豈有妨碍 然不窮根本 주지상법 기유방애 연불궁근본 執相外求 恐被智人之所嗤矣 집상외구 공피지인지소치의 華嚴論云 此一乘敎門 화엄론운 차일승교문 以根本智爲所成 名一切智乘 이근본지위소성 명일체지승

이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간은 비록 변천한다지만 사람의 심성(心性)은 변하지 않는다. 법도(法道)에 흥쇠가 있다고 보는 것은 삼승권학(三乘權學: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 등 삼승인을 위하여 방편으로 가르친 것)이며, 지혜 있는 사람은 그렇지가 않다. 그대들과 나는 가장 훌륭한 교법(敎法)을 만나서 보고, 듣고, 익히니 어찌 과거로부터 쌓아온 인연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스스로 경사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그런 인연을 끊어버리고 권학인(權學人:삼승의 근기를 가진 사람)으로 만족한다면 이는 선조의 뜻을 저버리고 끝내는 부처의 종자마저 끊어버리는 사람이 되고 만다.

 

염불하고 독경하고 만행(萬行)을 닦는 것은 사문(沙門)으로서 항상 행하는 법이니 어찌 서로 방해가 되겠는가. 그러나 근본을 공부하지 않고 형상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한다면 지혜 있는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화엄론>에도 보면 ‘일승교문(一乘敎門:일체 중생이 성불한다는 입장에서 그 구제하는 교법이 하나뿐이고 또한 절대 진실한 법의 문)은 근본지(根本智:일체 현상은 본질에서는 차별이 없는 것을 아는 지혜)로써 성취하는 것이므로 일체지승(一切智乘:모든 존재에 관해 포괄적으로 아는 대승적인 지혜를 이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3>

 

道와 더불어 상응하는 자만이 지혜와 경계가 스스로 융합 .

十方世界 量同虛空 爲佛境界故 시방세계 양동허공 위불경계고 一切諸佛 及以衆生 所有心境 일체제불 급이중생 소유심경 互相參入 如影重重 不說有佛無 호상참입 여영중중 뷸설유불무 佛世界 不說有像法末法 如是時分 불세계 불설유상법말법 여시시분 常是佛興 常是正法 此乃了義經 상시불흥 상시정법 차내요의경 但說有此方穢土 別方淨土 단설유차방예토 별방정토 有佛無佛處所 及像法末法 유불무불처소 급상법말법 皆爲不了義經 개위불요의경

 

시방세계란 곧 허공과 같아 전부가 부처의 경계가 된다. 그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이나 중생의 마음과 그 경계가 서로 합쳐지는 것이 마치 그림자처럼 겹쳐지는 것이니, 부처가 있고 없음의 세계를 말하지 않으며, 상법(像法:부처님 입멸후 1천 년의 정법시기가 지난 후의 1천 년 기간)이나 말법(末法)이 있음도 말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항상 부처님이 출현하며 항상 정법이라 한 것이 요의경(了義經:절대 진리를 말한 경. 一乘實敎)이고, 더러운 세계나 깨끗한 세계가 있다거나 부처님이 계시는 곳, 안 계시는 곳, 또는 상법과 말법이 있다고 말한 것은 불요의경(不了義經:진실의 세계로 유인하는 방편의 가르침. 三乘權敎)이 된다’하였다.

 

又云如來 爲一切邪見顚倒衆生 우운여래 위일체사견전도중생 示現出興 略說少分福德境界 시현출흥 약설소분복덕경계 而實如來 無出無沒 唯與道相應者 이실여래 무출무몰 유여도상응자 智境自會 不作如來出興滅沒之見 지경자회 부작여래출흥멸몰지견 但自以定觀二門 以治心垢 情在相存 단자이정관이문 이치심구 정재상존 我見求道 終不相應 須依智人 아견구도 종불상응 수의지인 自 驕慢 敬心徹到 자최교만 경심철도 方以定慧二門決擇 先聖敎旨如斯 방이정혜이문결택 선성교지여사 豈敢造次 輒有浪陳 기감조차 첩유낭진 誓遵了義懇苦之言 서준요의간고지언 不依權學方便之說 불의권학방편지설

 

또 이르기를 ‘여래가 사견(邪見)에 빠진 일체 중생을 위해 출현하여 복덕의 경계에 대해 간략히 말씀했으나 실제로 여래는 나타나거나 사라짐도 없다. 오직 도(道)와 더불어 상응하는 자만이 지혜와 경계가 스스로 융합하여 여래는 출현하거나 사라진다는 소견을 내지 않는다. 단지 스스로 선정(禪定)과 관조(觀照)의 두 문에 의해 마음의 때를 다스리는 것이다.

생각이 있고 형상이 있어서 아견(我見)으로 도를 구한다면 끝내 상응하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지혜 있는 사람을 의지하여 스스로 교만함을 꺾고 공경하는 마음이 사무쳐야만 비로소 선정과 지혜의 두 문으로써 결정한다’하였다.

옛성현의 가르친 뜻이 이러한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헛되이 보내리오. 맹세코 절대 진리의 간절한 말을 따르고 방편으로 베푼 말에는 의지하지 말아라.

 

 

我輩沙門 雖生末法 稟性頑痴 아배사문 수생말법 품성완치 若自退屈 着相求道則從前學得 약자퇴굴 착상구도즉종전학득 定慧妙門 更是何人 所行之事 정혜묘문 갱시하인 소행지사 行之難故 捨而不修則今不習故 행지난고 사이불수즉금불습고 雖經多劫 彌在其難 若今强修 수경다겁 미재기난 약금강수 難修之行 因修習力故 漸得不難 난수지행 인수습력고 점득불난

 

우리 사문들이 비록 말세에 나서 품성이 둔하고 어리석다 해서 만일 스스로 물러나서 형상에 집착하여 도를 구한다면 전부터 배워온 선정과 지혜의 묘문(妙門)은 누가 행해야 할 일인가. 행하기 어렵다 해서 버리고 닦지 않는다면 현재 익히지 않으므로 다겁을 지낸다 해도 더욱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만일 지금 억지로라도 닦는다면 그 닦기 어려운 행도 닦고 익힌 힘 때문에 점점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4>

 

세속의 즐거움 오래가지 않는데 마음 닦지 않고 늙음 기다리나 .

 

古之爲道者 還有不從凡夫來者耶 고지위도자 환유부종범부래자야 諸經論中 還有不許末世衆生 제경논중 환유불허말세중생 修無漏道乎 수무루도호

예로부터 수도하는 자가 범부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자가 있었던가. 모든 경론 중에 말세 중생에게 출세간의 도 닦기를 허락하지 않은 데가 있던가.

 

圓覺經云 末世諸衆生 心不生虛妄 원각경운 말세제중생 심불생허망 불설여시인 현세즉보살 화엄론운 佛說如是人 現世卽菩薩 華嚴論云 若言此法 非是凡夫境界 약언차법 비시범부경계 是菩薩所行 當知是人 滅佛知見 시보살소행 당지시인 멸불지견 破滅正法 諸有智者 不應如是 파멸정법 제유지자 불응여시 不勤修行 設行不得 佛失善種 불근수행 설행부득 불실선종 猶成來世積習勝緣 故唯心訣云 유성내세적습승연 고유심결운 聞而不信 尙結佛種之因 學而未成 문이불신 상결불종지인 학이불성 唯盖人天之福 유개인천지복

<원각경>에 “말세 중생이 마음에 헛된 망상을 내지 않으면 부처님은 이런 사람은 현세의 보살이다” 했고, <화엄론> 에는 “법(法)은 범부들이 미칠 경계가 아니고 보살들이 행할 일이라 한다면 이런 사람은 불지견(佛知見)을 소멸시키고 정법을 파괴할 자임을 알아야 한다”했다.

그러니 지혜 있는 자는 이런 걸 알고 부지런히 수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령 수행을 하고 깨달음이 없더라도 선종(善種)을 잃지 아니하여 오히려 내세에 좋은 인연을 쌓고 익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유심결>에는 “듣고 믿지 않는다 해도 부처가 될 씨앗의 인을 맺을 수 있고, 배우고 이루지 못했다 해도 오히려 인천(人天)의 복을 덮는다” 하였다.

 

由是觀之 不論末法與正法時殊 유시관지 불론말법여정법시수 不憂自心昧之與明 但生仰信之心 불우자심매지여명 단생앙신지심 隨分修行 以結正因 遠離劫弱 수분수행 이결정인 원리겁약 當知世樂非久 正法難聞 당지세락비구 정법난문 豈可因循 虛送人生 기가인순 허송인생 如是追念 過去久遠已來 여시추념 과거구원이래 虛受一切信心大苦 無有利益 허수일체신심대고 무유이익 現在卽有 無量逼迫 未來所苦 현재즉유 무량핍박 미래소고 亦無分齊 難捨難離 而不覺知 역무분제 난사난리 이불각지 況此身命 生滅無常 刹那難保 황차신명 생멸무상 찰나난보 石火風燈 逝波殘照 不足爲諭 석화풍등 서파잔조 부족위유 歲月飄忽 暗 老相 心地未修 세월표홀 암최노상 심지미수 漸近死門 점근사문

이렇게 본다면 말법과 정법의 때가 다름을 말하지 말며, 자기 마음의 어둡고 밝음을 근심하지 말고 단지 신앙의 마음을 내어 연분을 따라 수행함으로써 정인(正因)을 맺고, 겁약한 마음을 멀리해야 한다.

마땅히 알라. 세속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고, 정법은 듣기 어려운데 어찌 하루하루 헛되이 보낼 것인가.

생각해 보면 아득한 과거부터 몸과 마음의 온갖 괴로움을 받아 아무 이익이 없었고, 현재에는 한없는 핍박을 받고 있고, 미래에 받을 괴로움 또한 끝 없으나 이를 버리고 멀리하기가 어렵구나.

그런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니 하물며 이 목숨의 생멸이란 무상하여 한 순간도 보전키 어려운 것이 반짝이는 불빛, 바람 앞의 등불, 흘러가는 물결, 낙조(落照) 등에도 비유하지 못할 것이다. 세월이 급하고 빨라서 늙음을 재촉하는 데도 마음을 닦지 않고 점점 죽음의 문으로만 다가가고 있구나.

 

 

<5>

 

밤낮으로 수행 괴로움 벗어나고 자기 허물 알아 뉘우치고 고쳐라 .

 

念昔同遊 賢愚雜還 今朝屈指 염석동류 현우잡환 금조굴지 九死一生 生者如彼 次第衰殘 구사일생 생자여피 차제쇠잔 前去幾何 尙復恣意 貪瞋嫉妬 전거기하 상부자의 탐진질투 我慢放逸 求名求利 虛喪天日 아만방일 구명구리 허상천일 無趣談話 論說天下 或無戒德 무취담화 논설천하 혹무계덕 空納信施 受人供養 無慙無愧 공납신시 수인공양 무참무괴 如是等僭 無量無邊 其可覆臟 여시등참 무량무변 기가복장 不爲哀痛乎 불위애통호

옛 동지를 생각해보면 현명한 이, 어리석은 이도 있었고, 지금도 손가락을 꼽아보니 아홉은 죽고 한 사람만 남았으나 산 사람도 이처럼 쇠약해졌는데 앞으로 얼마나 남았길래 방자한 생각을 내어 탐욕부리고, 화내고, 질투하고, 아만심과 방일로 명리를 구해 헛된 세월 보내고, 쓸데없는 말로 천하를 논하며, 계덕(戒德)도 없이 공연히 보시만 받으며, 남의 공양을 받되 아무 부끄러움도 없구나. 이런 온갖 허물이 한없고 끝없는데도 덮어버리고 애통히 여기지 말란 말이냐.

 

如有智者 當須兢愼 策發身心 여유지자 당수긍신 책발신심 自知已過 改悔調柔 晝夜勤修 자지이과 개회조유 주야근수 速離衆苦 但依佛祖誠實之言 속리중고 단의불조성실지언 爲明鏡 照見自心 從本而來 위명경 조견자심 종본이래 靈明淸淨 煩惱性空 영명청정 번뇌성공 而復勤加決擇邪正 不執己見 이부근가결택사정 부집기견 心無亂想 不有昏滯 不生斷見 심무난상 불유혼체 불생단견 不着空有 覺慧常明 精修梵行 불착공유 각혜상명 정수범행 發弘誓願 廣度群品 不爲一身 발홍서원 광도군품 불위일신 獨求解脫 독구해탈

만일 지혜 있는 자라면 응당 조심하고 삼가서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고, 자기 허물을 알아 뉘우치고 고쳐서 조화로운 마음으로 밤낮 부지런히 수행해서 빨리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조(佛祖)의 성실한 말에 귀의하여 거울로 삼아서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신령하고 밝고 청정하여 번뇌의 성품이 공(空)함을 비추어 보고, 거기에 다시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가려서 선택하되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말라. 그리고 마음에 어지러운 생각이 없되 흐리멍텅해서는 안되며, 단견(斷見)을 내어서도 안되며, 공(空)과 유(有)에 집착해서도 안되며, 깨달음의 지혜가 항상 밝아서 정밀하게 청정한 행을 닦으며 큰 서원을 세워 널리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이는 홀로 해탈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 或病苦所惱 여혹세간사무 종종견전 혹병고소뇌 或邪魔惡鬼 所能恐怖 有如是等身心 혹사마악귀 소능공포 유여시등싱심 不安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불안즉어시방불전 지심세참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이제중장 예념등행 소식지시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동정시위 혹어혹묵 일체시중 無不了知自他身心 從緣幻起 무불료지자타신심 종연환기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공무체성 유여부포 역여운영 一切毁譽是非音聲 喉中妄出 일체훼예시비음성 후중망출 如空谷響 亦如風聲 여공곡향 역여풍성

만일 세간의 갖가지 일에 얽매이거나 혹 병고의 괴로움을 받거나 또는 사마악귀(邪魔惡鬼)의 공포를 받아 몸과 마음이 불안하거든 즉시 시방 부처님 앞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을 덜어야 한다. 이때, 예불과 염불을 평등하게 행해야 하며, 업장소멸과 잡념 쉬는 것을 때를 맞추어 하라.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말하거나 침묵할 때나 언제든지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은 다 인연 따라 생긴 허망한 것이어서 비어서 주체성이 없음이 마치 물거품 같고, 구름의 그림자 같으니, 칭찬하거나 헐뜯거나 시비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마치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소리와 같은 줄을 깨달아 알 것이다.

 

 

< 6 >

 

누락

 

< 7 >

 

 

선정과 지혜 두 수행 의지해서

마음의 때 다스림 옳고도 옳다 .

 

史山人 問圭峰宗密禪師

사산인 문규봉종밀선사

凡修心地之法 爲當悟心卽了

범수심지지법 위당오심즉요

爲當別有行門 若別有行門

위당별유행간 약별유행문

何名禪門頓旨 若悟心卽了

하명선문돈지 약오심즉요

何不發神通光明

하불발신통광명

 

사산인(史山人)이 규봉 종밀선사에게 묻기를 “마음을 닦는 법이 바로 마음을 깨닫게 합니까, 아니면 별도로 수행하는 문이 있습니까. 만약 별도로 수행하는 문이 있다면 어떻게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돈지(頓旨:수행 단계를 뛰어넘어 단번에 깨닫는 종지<宗旨>)라 할 수 있겠으며, 만약 마음을 깨달았다면 왜 신통광명을 일으키지 못합니까”하였다.

 

答曰識氷池而全水 藉陽氣而鎔銷

답왈식빙지이전수 자양기이용소

悟凡夫而卽眞 資法力而修習

오범부이즉진 자법력이수습

氷銷則水流潤 方呈漑滌之功

빙소즉수류윤 방정개척지공

妄盡則心靈通 始發通光之應

망진즉심영통 시발통광지응

修心之外 無別行門

수심지외 무별행문

 

이에 대답하기를 “얼은 연못이 다 물임을 알지만 빛을 받아야 녹는 것처럼 범부가 곧 진리인줄 알지만 법력을 빌려 닦고 익혀야 한다. 얼음이 녹으면 흐르는 물이 되므로 물을 대고 씻는 보람이 있고, 망념이 다하면 마음이 신통하므로 비로소 신통과 광명이 일어나는 것이니, 마음을 닦는 외에는 따로 수행하는 문이 없다”하였다.

 

以是當知 不愁相好 及與神通

이시당지 불수상호 급여신통

先須返照自心 信解眞正 不落斷常

선수반조자심 신해진정 불락단상

依定慧二門 治諸心垢 卽其宜矣

의정혜이문 치제심구 즉기의의

若也信解未正 所修觀行 皆屬無常

약야신해미정 소수관행 개속무상

終成退失 是謂愚夫觀行

종성퇴실 시위우부관행

豈爲智人之行哉

기위지인지행재

 

그러므로 상호(相好)나 신통에 대해서는 근심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마음을 관조하여 믿음과 견해를 참되고 바르게 가져 단(斷)이나 상(常)에 빠지지 말고 선정과 지혜의 두 수행문에 의지해서 마음의 때를 다스림이 옳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믿음과 견해가 바르지 못하면 수행하는 관행(觀行)이 다 무상에 속하여 마침내 물러나 상실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의 관행이요, 지혜로운 사람의 수행은 아니다.

 

他敎家 亦有簡辨觀行 深淺得失

타교가 역유간변관행 심천득실

其義甚詳 爲學人 唯習言說

기의심상 지위학인 유습언설

或高推聖境 不能內求自心 亦不

혹고추성경 불능내구자심 역불

能鍊磨日久 知其功能耳

능연마일구 지기공능이

且如元曉法師云 如諸世間 愚夫觀行

차여원효법사운 여제세간 우부관행

內計有心 外求諸理 求理彌細

내계유심 외구제리 구리미세

轉取外相故 還背理去遠 若天與地

전취외상고 환배리거원 약천여지

所以終退沒 受無窮生死

소이종퇴몰 수무궁생사

 

교종에서도 관행(觀行)의 깊고 얕음과 잘되고 잘못됨을 잘 분석하여 그 뜻이 자상하건만 학인들은 오직 언어만 익히고 혹은 성인의 높은 경계로만 미루어 둔 채 안으로 자기 마음에서 구하지 않고, 또한 오래 연마하지도 않고 단지 공능만 알려고 한다.

이래서 원효법사는 이렇게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의 관행은 안으로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모든 이치를 찾되 그 이치를 아주 세밀하게 찾다가 그만 바깥 현상계를 취하게 되기 때문에 도리어 이치를 등져서 하늘과 땅처럼 멀어진다. 이 때문에 타락하여 끝없는 생사를 받게 된다.”

 

 

< 8 >

 

보살은 참되게 비추는 지혜로

모든법의 경계를 증득해 안다 .

 

智者觀行 與此相反 外忘諸理

지자관행 여차상반 외망제리

內求自心 求心至極 忘理都盡

내구자심 구심지극 망리도진

盡忘所取 取心都滅 所以能得至無

진망소취 취심도멸 소이능득지무

理之至理 畢竟無退 還住無住涅槃

리지지리 필경무퇴 환주무주열반

又復小聖計心 先有生性故

우부소성계심 선유생성고

過微心得心滅無 無智無照 不異空界

과미심득심멸무 무지무조 불리공계

大士解心 本無生性故

대사해심 본무생성고

離細想不得滅無 眞照智在 證會法界

이세상부득멸무 진조지재 증회법계

 

그러나 지혜 있는 이의 관행은 이와 반대이다. 밖으로 모든 이치를 잊고 안으로 마음을 찾되 찾는 마음이 지극하므로 이치를 다 잊어버리고 취해야 할 대상도 잊어버리므로 취해야 할 마음마저 없어진다. 이때문에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를 얻게 되고 마침내 물러남이 없게 되어 도리어 머무름이 없는 열반에 머물게 된다.

또 소승의 성인은 마음이 있다고 헤아린다. 그래서 먼저 성품(性品)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너무 미세한 마음으로 마음이 아주 없어지는 경지에 들어가서 지혜도 없고 비춤도 없어서 허공의 경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보살은 본래 성품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미세한 생각을 버리지만 마음이 아주 없다는 생각도 없이 참되게 비추는 지혜가 있어 모든 법의 경계를 증득하게 된다.’

 

如是辨別愚夫與智者 小乘及大乘人

여시변별우부여지자 소승급대승인

觀行得失 不隱微毫 是知若禪若敎

관행득실 불은미호 시지약선약교

古今得意觀行之人 皆達自心

고금득의관행지인 개달자심

妄想攀緣 本自無生 智智用中

망상반연 본자무생 지지용중

無有間斷 證會法界 永與愚夫小乘

무유간단 증회법계 영여우부소승

途路且別 豈可不觀自心

도로차별 기가불관자심

不辨眞妄 未積淨業

불변진망 미적정업

而先索神通道力耶

이성색신통도력야

比夫未解乘舟而欲怨其水曲者哉

비부미해승주이욕원기수곡자재

 

이와 같이 어리석고 지혜로운 이와 소승과 대승의 관행에 대해 그 득실을 분별하여 털끝만큼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선종이나 교종에서 고금을 통해 관행의 의미를 바로 안 사람은 다 자기 마음을 통달하여 망상과 반연이란 본래 일어난 곳이 없다. 그래서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의 작용이 끊임이 없어서 법계를 증득해 알므로 영원히 어리석은 이와 소승과는 그 길이 다르다. 그런데도 어찌 자기 마음을 관하지 않고 진실과 허망을 분별하지 않아 깨끗한 업을 쌓지 않고 먼저 신통과 도력만을 찾는가. 마치 배를 부릴줄은 모르면서 물굽이를 원망하려는 이와 같구나.”

 

問若約自己眞性 本自圓成

문약약자기진성 본자원성

但任心自在 合他古徹 何須觀照

단임심자재 합타고철 하수관조

而無繩自縛乎

이무승자박호

答末法時代 人多乾慧 未免苦輪

답말법시대 인다건혜 미면고륜

運意則承許託假 出語則越分過頭

운의즉승허탁가 출어즉월분과두

智見偏枯 行解不等 近來禪門

지견편고 행해부등 근래선문

汎學輩 多有此病 皆云旣自心本淨

범학배 다유차병 개운기자심본정

不屬有無 何假勞形 妄加行用

불속무유 하가노형 망가행용.

 

물었다. “만약 자기의 참 성품이 본래부터 원만히 이루어졌다면 자재롭게 자기 마음에 맡겨 두어도 옛 법에 부합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관조함으로써 노끈도 없는데 스스로 결박을 받으려 하는가.”

대답하다. “말법 시대의 사람은 꾀 많은 지혜만 많아서 고통의 굴레를 벗지 못하며 마음만 내면 곧 허망하고 거짓된 것을 받들고 말을 내면 곧 분수를 지나치고, 지견이 모자라고 메마르고, 행과 앎이 같지 않다. 요즘 선문에서 공부하는 자들은 흔히 이런 병이 많아서 ‘마음은 본래 청정해서 유무(有無)에도 속해있지 않는데 왜 몸을 수고롭게 하여 억지로 수행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말한다.

 

 

 

< 9 >

 

선정과 지혜 닦기 전념하지 않고

본성만 믿고 안주할 수 있겠는가 .

 

是以 無碍自在之行 方捨眞修

시이효무애자재지행 방사진수

非惟身口不端 亦乃心行迂曲

비유신구부단 역내심행우곡

都不覺知 或有執於聖敎

도불각지 혹유집어성교

法相方便之說 自生退屈 努修漸行

법상방편지설 자생퇴굴 노수점행

違背性宗

위배성종

不信有如來 爲末世衆生 開秘密之訣

불신유여래 위말세중생 개비밀지결

固執先聞 擔麻棄金也

고집선문 담마기금야

知訥頻遇如此之類 雖有解說

지눌빈우여차지류 수유해설

終不信受 但加疑謗而已

종불신수 단가의방이이

何如先受信解心性本淨 煩惱本空

하여선수신해심성본정 번뇌본공

而不妨 依解薰修者也

이불방 의해훈수자야

 

이 때문에 걸림 없고 자유로운 행만 본받고 참된 수행은 버리니, 몸과 마음이 단정치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구부려졌는데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어떤 이는 경전에서 말한 법상(法相)의 방편설에 집착하며 스스로 퇴보하는 마음을 내고, 점수(漸修)의 행에만 애를 쓴다.

그러니 성종(性宗:만법의 근원인 진실한 본성을 종지로 하는 선종을 뜻함)을 어기고 부처님이 말세 중생을 위해 열어 놓은 비밀한 말씀(오묘한 진리)을 믿지 않고 먼저 들은 것만 고집하니 이는 삼(麻)은 등에 지고 금덩이는 버리는 것과 같다.

나는 자주 이런 유의 사람을 만나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그들은 믿지 않고 도리어 의심하고 비방할 뿐이었다. 다시 한번 ‘심성은 본래 깨끗하고 번뇌란 본래 없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의지해 수행하는 것이 어떠한가.

 

外攝律儀而忘拘執

외섭률의이망구집

內修靜慮而非伏捺 可謂於惡斷

내수정려이비복날 가위어악단

斷而無斷 於善修 修而無修

단이무단 어선수 수이무수

爲眞修斷矣 若能如是

위진수단의 약능여시

定慧雙運

정혜쌍운

萬行齊修則豈非夫空守默之痴禪

만행제수즉기비부공수묵지치선

但尋文之狂慧者也

단심문지광혜자야

 

밖으로는 계율을 지키면서도 구속이나 집착을 잊고, 안으로는 선정(靜慮)을 닦되 억지로 생각을 눌러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른바 악을 끊되 끊으면서도 끊음이 없고, 선을 닦되 닦으면서도 닦음이 없어야 참으로 닦고 끊음이 되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으면서 아울러 온갖 행을 닦아 나간다면 헛되이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이나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에 어찌 견주겠는가.

 

且修禪一門 最爲親切

차수선일문 최위친절

能發性上無漏功德 若得意修者

능발성상무루공덕 약득의수자

於一切時行住坐臥 或語或默

어일체시행주좌와 혹어혹묵

念念虛玄

염념허현

心心明妙 萬德通光 皆從中發

심심명묘 만덕통광 개종중발

安得求道 恃本性而自安

안득구도 시본성이자안

不專定慧乎

부전정혜호

 

또 참선 수행은 가장 친절한 문이다. 성품에 갖추어져 있는 무루(無漏)의 공덕을 개발해주니 만일 뜻을 내어 닦는 자는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또는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언제고 간에 생각 생각이 비고 심오하며, 마음 마음이 밝고 오묘하여 온갖 덕과 신통 광명이 이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도를 구함에 있어 어찌 선정과 지혜 닦기에 전념하지 않고 본성만 믿고 안주할 수 있겠는가.

 

 

 

<10 >

 

 

지혜는 법으로 空을 觀하니

생사를 벗어나게 하는 것.

 

翼眞記云 定慧二字 乃三學之分稱

익진기운 정혜이자 내삼학지분칭

具云戒定慧 戒以防非止惡爲義

구운계정혜 계이방비지악위의

免墮三途 定以稱理攝散爲義

면타삼도 정이칭리섭산위의

能超六欲 慧以擇法觀空爲義

능초육욕 혜이택법관공위의

妙出生死 無漏聖人 因中修行

묘출생사 무루성인 인중수행

皆須學此 又此三學 有隨相稱性之別

개수학차 우차삼학 유수상칭성지별

隨相如上說 稱性者 理本無我戒也

수사여상설 칭성자 이본무아계자

理本無亂定也 理本無迷慧也

이본무란정야 이본무미혜야

但悟此理 卽眞三學耳

단오차리 즉진삼학이

 

<익진기>에 보면 ‘선정과 지혜라는 두 말은 바로 삼학(三學:계, 정, 혜)의 준말로서 갖추어 말하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이다. 계율은 잘못을 막고 악을 고친다는 뜻이니, 삼악도에 떨어짐을 면하게 함이요, 선정은 진리에 부합하여 산란한 마음을 수습한다는 뜻이니, 여섯 가지 욕망을 뛰어넘게 함이요, 지혜는 법으로 공(空)을 관(觀)한다는 뜻이니 이는 생사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성인은 처음 수행할때 다 이것을 배웠기 때문에 삼학이라 한다’ 하였다. 또 이 삼학은 상(相)으로 따지는 것과 성품으로 따지는 구별이 있다. 상으로 따지는 것은 위에 말한 것과 같고, 성품으로 따진다면 ‘진리에는 본래 ‘나’가 없다는 것이 계율’이고, ‘진리에는 본래 어지러움이 없다는 것이 선정’이며, ‘진리에는 본래 미혹됨이 없다는 것이 지혜’이다. 이런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삼학이다.

 

先德曰 吾之法門 先佛傳授

선덕왈 오지법문 선불전수

不論禪定精進 唯達佛之知見

불론선정정진 유달불지지견

此卽但破隨相對治之名

차즉단파수상대치지명

不壞稱性三學

불괴칭성삼학

故曹溪云 心地無非自性戒

고조계운 심지무비자성계

心地無亂自性定 心地無痴自性慧

심지무란자성정 심지무치자성혜

此之是也

차지시야

 

또 옛 스님은 ‘내 법문은 과거 부처님이 전해주신 것이지만 선정과 정진을 논하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통달하게 할 뿐이다’하였으니, 이것은 상(相)으로 따지는 이들의 삼학을 깨뜨린 것이지 성품으로 따지는 삼학을 부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조계 스님이 ‘마음에 잘못이 없음이 자성(自性)의 계율이요,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선정이며,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지혜이다’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又所言禪者 有淺有深 謂外道禪

우소언선자 유천유심 위외도선

凡夫禪 二乘禪 大乘禪 最上乘禪

범부선 이승선 대승선 최상승선

廣如禪源諸詮集所載 今之所

광여선원제전집소재 금지소

論心性本淨 煩惱本空之義

론심성본정 번뇌본공지의

是當最上乘禪 然於用功門中

시당최상승선 연어용공문중

初心之人 不無權乘對治之義

초심지인 불무권승대치지의

故此勸修

고차권수

文內 權實幷陳 不可不知也

문내 권실병진 불가부지야

 

또 말한 선에도 얕고 깊음이 있다. 말하자면 외도선, 범부선, 이승선, 대승선, 최상승선 등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선원제전집>에 실려 있는 것과 같다. 지금 말한 ‘심성은 본래 깨끗하고, 번뇌란 본래 없다’고 하는 이 이치는 바로 최상승선(가장 근기가 뛰어난 선, 즉 조사선을 뜻함)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차츰 공덕을 쌓아가는 수행의 문이 있어야 하겠기에 권승(權乘:근기가 얕은 이를 위해 방편으로 가르침)과 대치(對治:서로 대칭되는 것을 나타내어 가르침)의 뜻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권수문(勸修文)에는 방편과 절대의 진리를 아울러 말했으니 그렇게 알라.

 

 

 

<11 >

 

 

선정은 능히 번뇌의 화살 막으니

지혜 지키는 창고요 공덕의 복밭 .

 

定慧名義雖殊 要在當人 信心不退

정혜명의수수 요재당인 신심불퇴

剋己成辦耳 智度論云 若求世間近事

극기성판이 지도론운 약구세간근사

不能專精 事業不成 況學無上普提

불능전정 사업불성 황학무상보리

不用禪定 偈云 禪定金剛鎧

불용선정 게운 선정금강개

能遮煩惱 禪爲守智藏 功德之福田

능차번뇌 선위수지장 공덕지복전

塵蔽天日 大雨能淹之 覺觀風散心

효진폐천일 대우능엄지 각관풍산지

禪定能滅之 大集經云 與禪相應者

선정능멸지 대집경운 여선상응자

是我眞子 偈云 閑靜無爲佛境界

시아진자 게운 한정무위불경계

於彼能得

어피능득

淨普提 若有毁謗住禪者

정보리 약유훼방주선자

是名毁謗諸如來 正法念經云

시명훼방제여래 정법염경운

救四天下人命 不如一食頃 端心正意

구사천하인명 불여일식경 단심정의

起信論云 若人聞是法已 不生怯弱

기신론운 약인문시법이 불생겁약

當知是人 定紹佛種

당지시인 정소불종

必爲諸佛之所授記

필위제불지소수기

 

선정과 지혜의 이름은 다르나 요는 본인의 신심이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데 있다. <지도론>에 ‘세상의 하찮은 일도 전념하지 않으면 사업을 이룰 수 없는데 하물며 위없는 도를 배우면서 선정과 지혜에 힘쓰지 않아서 되겠는가’ 하고 그 게송에 「선정은 금강의 갑옷이라 능히 번뇌의 화살을 막고, 선정은 지혜를 지키는 창고라서 온갖 공덕의 복밭이로다. 분주한 티끌이 하늘 해를 덮으면 큰비가 그것을 씻어주고, 망상의 바람이 마음을 흩뜨리면 선정이 그것을 없애준다」하였고, <대집경>에는 ‘선정에 든 사람이 나의 참된 아들이다’ 하고 그 게송에 「한적하고 고요한 무위(無爲)의 부처 경계여, 거기에서 깨끗한 지혜를 얻는다. 만일 선정에 머무는 이를 비방하면 여래를 비방함이다」했고, <정법염경>에는 ‘온 세계의 인명을 구제해도 잠시 마음을 단정히 하고 뜻을 바르게 가지는 것만 못하다.’ 했고, 또 <기신론>에는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 나약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 사람은 부처의 종자를 이어가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미래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예언을 내릴 것이다.

 

假使有人

가사유인

能化三千大天世界滿中衆生

능화삼천대천세계만중중생

令行十善 不如有人 於一食頃

영행십선 불여유인 어일식경

正思此法 過前功德 不可爲諭

정사차법 과전공덕 불가위유

是知依此修行 諸善功德 不可勝言

시지의차수행 제선공덕 불가승언

若不安禪靜慮 業識茫茫 無本可據

약불안선정려 업식망망 무본가거

臨命終時 風化逼迫 四大離散

임명종시 풍화핍박 사대이산

心狂熱悶 顚倒亂見 上無衝天之計

심광열민 전도난견 상무충천지계

下無入地之謀 惶恐怖 失所依憑

하무입지지모 장황공포 실소의빙

形骸蕭索 猶如蟬

형해소색 유여선세

迷途綿邈 孤魂獨逝

미도면막 고혼독거

 

가령 어떤 이가 온 세계의 중생을 교화하여 열 가지 선행을 하게 해도 잠깐 이 법을 올바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못하며, 이는 앞에 말한 사람의 공덕보다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였으니 이로써 선정에 의해 수행하면 선(善)의 공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선 수행을 잘하지 못하면 업식이 아득하여 의지할 근본이 없다. 임종시에는 병고에 시달리고 육신이 무너질 때는 마음은 미친 듯이 극도의 괴로움에 휩싸이고 소견은 뒤바뀌고 어지러워 하늘에 오를 꾀도 없고 땅에 들어갈 방도도 없다. 그리하여 당황하고 두려움에 질려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해 형색은 매미 껍질처럼 쓸쓸해지고, 아득하고 망망한 길을 외로운 혼이 홀로 갈 수밖에 없다.

 

 

 

< 12 >

 

 

마음의 문 열리지 않으면

바깥경계 끌려 혼미에 빠진다 .

 

雖有寶玩珍財

수유보완진재

一無將去 雖有豪族眷屬

일무장거 수유호족권속

竟無一人追隨救護者 是謂自作自受

경무일인추수구호자 시위자작자수

無人替代矣 當是時也 將何眼目

무인체대의 당시시야 장하안목

以爲苦海之津梁

이위고해지진량

莫言有少分有爲功德 免此患難

막언유소분유위공덕 면차환란

 

재산이 많으나 하나도 못가져 가고, 귀한 종족의 권속들이 있으나 한 사람도 따라와 보호해줄 이도 없다.

이는 제가 지어 제가 받는 것이니 대신할 사람이 없다. 이 때 어떤 안목(眼目)으로 이 고해(苦海)를 건너는 다리로 삼겠는가. 약간의 유위(有爲)의 공덕이 있다 해서 이 환란을 면할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百丈和尙云 縱有福智多聞 都不相救

백장화상운 종유복지다문 도불상구

爲心眼未開 唯緣念諸境 不知返照

위심안미개 유연념제경 부지반조

復不見佛道 一生所有惡業

부불견불도 일생소유악업

悉現於前 或怖或  六道五蘊現前

실현어전 혹포혹환 육도오온현전

盡見嚴好舍宅 舟船車輿 光明現赫

진견엄호사택 주선거여 광명현혁

爲縱自心 貪愛所見

위종자심 탐애소견

悉變爲好境 隨所見 重處受生

실변위호경 수소견 중처수생

都無自由分 龍畜良賤 亦摠未定

도무자유분 용축양천 역총미정

 

백장 스님은 ‘복과 지혜가 있고 많이 들은 것만으로는 구제되지 않는다.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바깥 경계에 끌려 마음을 비춰볼 줄 모른다. 결국 불도를 알지 못하므로 일생의 악업이 앞에 나타나면 두렵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육도와 오온이 앞이 나타나면 모두가 아름다운 좋은 집이나 배나 수레나 빛나는 광명으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함부로 굴려 탐애하는 소견이 일어나 모두가 좋은 경계로만 변하게 되고 그 소견을 따르다 보면 마침내 죄업이 무거운 곳에 태어나므로 전연 자유가 없다. 그래서 용이나 축생, 양민이나 천민으로 태어나도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한다’하였다.

 

是以凡有高識遠志之人

시이범유고식원지지인

先須深觀三世業報 毫髮不差

선수심관삼세업보 호발불차

無地可逃 今若緣差 不能進修

무지가도 금약연차 불능수진

後必受苦 良可傷哉 卽於初中後夜

후필수고 양가상재 즉어초중후야

爾忘緣 兀然端坐 不取外相

격이망연 올연단좌 불취외상

攝心內照 先以寂寂 治於緣慮

섭심내조 선이적적 치어연려

次以惺惺 治於昏沈 均調昏散

차이성성 치어혼침 균조산혼

而無取捨之念 令心歷歷 廓然不昧

이무취사지염 영심역력 확연불매

無念而知 非彼所聞 一切境界

무념이지 비피소문 일체경계

終不可取 若隨世緣 有所施作

종불가취 약수세연 유소시작

悉當觀察應作不應作 萬行無廢

실당관찰응작불응작 만행무폐

雖有所作 不失虛明 湛然常住

수유소작 불실허명 담연상주

 

그러므로 높은 식견과 원대한 뜻이 있는 사람은 먼저 삼세의 업보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어 도망할 곳이 없으니, 만일 지금의 인연을 어그러뜨려 마음을 닦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괴로움을 받을 것이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깊이 관찰하여 항상 고요히 하여 온갖 인연을 잊고, 단정하게 앉아 바깥 세상을 버리고 안으로 마음을 비춰보되 먼저 고요함으로써 생각을 다스리고, 다음에는 깨어있음으로써 혼미함을 다스려야 한다. 혼미함과 산만함을 다스리되 취하고 버리는 생각이 없이 마음이 밝고 확 트이어야 생각 없이 알게 되고,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경계도 취하지 않아야 한다. 혹 세상 인연 따라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관찰하면서 수행을 폐하지 않는다면 비록 하는 일이 있더라도 밝음을 잃지 않고 고요히 머물게 될 것이다.

 

 

 

< 13 >

 

 

법이란 것은 중생의 마음인데

중생은 밖에서 도 찾으려 한다 .

 

一宿覺云 寂寂謂不念外境善惡等事

일숙각운 적적위불념외경선악등사

惺惺謂不生昏住無記等相

성성위불생혼주무기등상

若寂寂不惺惺 此乃昏住 惺惺不寂寂

약적적불성성 차내혼주 성성불적적

此乃緣慮 不寂寂不惺惺

차내연려 불적적불성성

此乃非但緣慮 亦乃入昏而住

차내비단연려 역내입혼이주

亦寂寂亦惺惺 非唯歷歷 兼復寂寂

역적적역성성 비우역력 겸부적적

此乃還源之妙性也

차내환원지묘성야

 

일숙각이 ‘고요함이란 외부의 선악 등을 생각하지 않음이요, 깨어있음은 혼미한 마음을 막는 것이다. 만약 고요함만 있고 깨어있지 않으면 그것도 혼미함이요, 깨어있되 고요하지 않으면 그것도 세속의 생각일 뿐이며, 고요하지도 않고 깨어있지도 않으면 그것은 세속 생각일뿐 아니라 혼미에 빠지는 것이다. 고요하고 깨어있으면 그것은 또렷이 밝을 뿐만 아니라 겸하여 고요함이니, 이것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묘한 성품이다’하였다.

 

十疑論註云 無念者 卽是眞如三昧

십의론주운 무념자 즉시진여삼매

直須惺惺寂寂 不起攀緣 實相相應

직수성성적적 불기반연 실상상응

先德云 凡夫有念有知

선덕운 범부유념유지

二乘無念無知 諸佛無念而知

이승무념무지 제불무념이지

如上言敎 是修心人 定慧等持

여상언교 시수심인 정혜등지

明見佛性之妙門也 有智之人

명견불성지묘문야 유지지인

切須審詳

절수심상

豈可徒標大意 而便棄修行耶

기가도표대의 이편기수행야

 

<십의론주>에는 ‘무념(無念)이 바로 진여삼매이다. 고요하고 깨어있어야 반연을 일으키지 않아 실상과 서로 응한다’하였고, 또 옛스님은 ‘범부는 생각도 있고 아는 것도 있고, 이승(二乘)은 생각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며, 부처님은 생각이 없이 안다’고 하였다. 이런 가르침이 바로 마음 닦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져서 불성을 밝게 보는 묘문(妙門)이 되는 것이다. 지혜있는 사람은 세밀히 살펴야 하는데 어째서 대의만 표방하고 수행을 버려서야 되겠는가.”

 

問曰諸佛妙道 深曠難思

문왈제불묘도 심광난사

今只令末世衆生 觀照自心 而希佛道

금지영말세중생 관조자심 이희불도

自非上根 未免疑謗 予笑曰前來問意

자비상근 미면의방 여소왈전래문의

何爲自高 此問何爲自卑 且莫草草

하위자고 차문하위자비 차막초초

吾語汝 馬鳴菩薩 撮要百本大乘經典

오어여 마명보살 촬요백본대승경전

造起信論 直標云 所言法者

조기신론 직표운 소연법자

謂衆生心 是心卽攝一切世間

위중생심 시심즉섭일체세간

出世間法 依於此心 顯示摩訶衍義

출세간법 의어차심 현시마하연의

蓋恐衆生 不知自心 靈妙自在

개공중생 부지자심 영묘자재

向外求道耳

향외구도이

 

물었다. “부처님의 심오한 도는 깊고 넓어 생각하기 어려운데, 지금 말세 중생들에게 자기 마음을 관조하여 불도를 이루게 하니, 그가 높은 근기가 아니고는 의심하고 비방할 것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전에 물은 뜻은 그리도 높더니 지금 묻는 것은 왜 비속한가? 너무 경솔하지 말라. 그대에게 말하리라. 마명보살은 백 권의 대승경전을 추려서 <기신론>을 지었는데 그 벽두에 ‘법이란 것은 중생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세간과 세간을 벗어난 법을 포섭하였으므로 이 마음에 의해 마하의 큰 뜻을 나타낸다’하였다. 이는 중생이 제 마음이 신령스럽고 자재함을 알지 못하고 밖에서 도를 찾을까봐 걱정해서이다.

 

 

 

< 14 >

 

‘없다’ ‘있다’ 자기소견 고집하니

어떻게 그들과 도를 이야기하나.

 

圓覺經云 一切衆生 種種幻化

원각경운 일체중생 종종환화

皆生如來圓覺妙心 猶如空花

개생여래원각묘심 유여공화

從空而有 裵相國云 血氣之屬 必有知

종공이유 배상국운 혈기지속 필유지

凡有知者 必同體 所謂眞淨明妙

범유지자 필동체 소위진정명묘

虛徹靈通 卓然而獨尊者也 背之卽凡

허철영통 탁연이독존자야 배지즉범

順之卽聖

순지즉성

 

<원각경>에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허망한 모습들이 다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심오한 마음에서 생기는 것으로서, 마치 눈병 때문에 나타나는 허공 꽃이 허공에서 생겨난 것과 같다’하였으며, 배상국은 ‘생명이 있는 자는 반드시 아는 것이 있다. 아는 것이 있는 자는 반드시 그 바탕이 같은 것이니, 이른바 진실하고 깨끗하고 밝고 심오하며 텅 비었으며 신령하고 통달하여 홀로 높은 존재로다. 이것을 등지면 범부요 그것을 따르면 성인이다’하였다.

 

雲盖智禪師 常謂門人曰但莫瞞心

운개지선사 상위문인왈단막만심

心自靈聖 此等是諸經論

심자영성 차등시제경론

及天下善知識 所留言句中微旨也

급천하선지식 소유언구중미지야

但時人 自欺自瞞 日用而不自信自修耳

단시인 자기자만 일용이불자신자수이

脫或有信之者 不加決擇 隨情向背

탈혹유신지자 불가결택 수정향배

未免斷常 而堅執已見 豈可與之語道也

미면단상 이견집이견 기가여지어도야

 

운개 지선사는 제자들에게 ‘마음을 속이지 않으면 마음은 스스로 신령하고 성스럽다’하였다. 이런 말들은 여러 경론과 선지식들이 남긴 말 가운데 핵심이 되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스스로 속이기 때문에 나날이 마음을 쓰면서도 믿지도 않고 닦지도 않는다. 혹 믿는 이가 있어도 가려서 결정하지 못하고 감정에 따라 따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여 ‘없다, 있다’하는 생각에 빠져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니, 어떻게 그들과 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問曰修多羅中 演說百千三昧

문왈수다라중 연설백천삼매

無量妙門 布網張羅 該天括地

무량묘문 포망장라 해천괄지

諸菩薩 依敎奉行 至於斷證階位則遂

제보살 의교봉행 자어단증계위즉수

有三賢十地 等妙二覺

유삼현십지 등묘이각

今但依惺惺寂寂二門 對治昏沈緣慮

금단의성성적적이문 대치혼침연려

終期究竟位者 如認一微 以爲窮盡

종기구경위자 여인일미구 이위궁진

瀛渤 不其惑乎

영발 불기혹호

 

물었다. “경전 가운데 여러 가지 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법을 연설한 것이 그물처럼 덮여 하늘과 땅을 다 둘러쌌으니, 모든 보살이 그 가르침대로 받들어 행하여 번뇌를 끊고 열반을 증득하는 지위에 오르게 되는 삼현·십지(둘 다 보살 수행의 지위를 뜻함)와 등각·묘각(등각은 제51위, 묘각은 최고 지위인 佛果의 자리임)이 있는데, 단지 성성(惺惺)과 적적(寂寂)의 두 가지 법에 의해 혼미함과 번뇌의 생각들을 다스려 최종의 지위를 얻겠다는 것은 마치 작은 물거품을 보고 바다를 보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잘못된 것 아닙니까.”

 

答今時修心人 具佛種性

답금시수심인 구불종성

依頓宗直指之門 發決定信解者

의돈종직지지문 발결정신해자

直了自心常寂 直然惺惺 依此而起修故

직료자심상적 직연성성 의차이기수고

雖具修萬行 唯以無念爲宗 無作爲本也

수구수만행 유이무념위종 무작위본야

 

대답했다. “현재 마음을 닦는 사람은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있어서 바로 깨달음을 가르치는 돈종(頓宗)의 문에 신해(信解)를 가진 이는, 자기 마음이 본래 고요하고 깨어있음을 알고 거기에 의해 수행하기 때문에 비록 만행을 한다 해도 무념(無念)으로 종을 삼고, 무작(無作)으로 근본을 삼는다.

 

 

< 15 >

 

 

명분 다툼 지견의 장애 일으키나

마음 깨끗하면 그것이 바로 진리.

 

以無念無作故 無有時劫地位

이무념무작고 무유시겁지위

漸次之行 亦無法義差別之相

점차지행 역무법의차별지상

以具修故 塵數法門 諸地功德

이구수고 진수법문 제지공덕

妙心體具 如如意珠 此中惺惺寂寂之義

묘심체구 여여의주 차중성성적적지의

或直約離念心體 或約

혹직약리념심체 혹약

用功門說之 故修性俱圓 理行兼暢

용공문설지 고수성구원 이행겸창

修行徑路 莫斯爲最

수행경로 막사위최

 

무념, 무작이기에 시간과 지위 등 점차로 닦는 수행이 없고, 또 법이니 뜻이니 하는 차별상이 없는 가운데 수행하기에 많은 법문과 모든 지위의 공덕이 묘심(妙心)에 갖추어져 있음이 여의주와 같다. 이 안에 ‘깨어 있고, 고요하다’는 이치를 바로 생각을 떠난 마음에서 말하기도 하고, 혹은 공부를 쌓는 법에서 말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과 본성이 다 원만하고 이치와 실천이 함께 통달하니 수행의 지름길로 이보다 훌륭한 것이 없다.

 

但得意修心 脫生死病爲要

단득의수심 탈생사병위요

何用名義諍論 而興見障乎 而今

하용명의쟁론 이흥견장호 이금

若善得離念心體 卽與佛智相契 何論

약선득이념심체 즉여불지상계 하론

三賢十聖 漸次法門 圓覺修證儀云

삼현십성 점차법문 원각수승의운

頓門無定位 心淨卽名眞 起信論云

돈문무정위 심정즉명진 기신론운

所言覺義者 謂心體離念

소언각의자 위심체이념

離念相者 等虛空界 無所不遍

이념상자 등허공계 무소불변

法界一相 卽是如來平等法身

법계일상 즉시여래평등법신

 

요는 마음을 닦아 생사의 병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데, 왜 명분 다툼으로 지견의 장애를 일으키는가. 만약 ‘생각을 여읜 마음’을 얻으면 곧 부처의 지혜를 얻는데 왜 삼현이나 십성 등 점차로 깨달아가는 법을 논하는가. <원각수증의>에는 ‘돈문(頓門)에는 일정한 지위란 없고 마음이 깨끗하면 그것이 바로 진리이다.’했고, <기신론>에는 ‘깨달음이란 마음 자체가 생각을 여읜 것을 말한다. 생각을 여읜 상태는 허공과 같아서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서, 온 법계가 한 몸이다. 이것이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다.’ 하였다.

 

又云 若有衆生 能觀無念者

우운 약유중생 능관무념자

卽爲向佛智故 四祖 謂融禪師曰

즉위향불지고 사조 위융선사왈

夫百千三昧 無量妙門 盡在汝心

부백천삼매 무량묘문 진재여심

故知 若不了自心 圓該諸法 又不知聖敎

고지 약불요자심 원해제법 우부지성교

千途異說 隨順機宜

천도이설 수순기의

無不指歸自心法界 而返執文字差別義門

무불지귀자심법계 이반집문자차별의문

又自生怯弱 望滿於三祗行位者

우자생겁약 망만어삼지행위자

非性宗得意修心者也 如有此病

비성종득의수심자야 여유차병

請從今改

청종금개

 

또 ‘만일 어떤 중생이 무념(無念)을 잘 관할 수 있다면 곧 부처의 지혜로 향한다.’하였다. 그리고 사조 도신(道信)스님은 융 선사에게 ‘수없는 삼매와 한량없는 법문이 모두 네 마음에 있다.’ 하였다. 그러나 제 마음이 모든 법을 포용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또 성인의 가르침이 천 갈래로 다르게 말한 것은 근기에 따라 자기 마음의 법계로 돌아가게 한 것인데도 도리어 글자의 차별에 집착하고, 거기에다 나약한 마음으로 삼아승지(三阿僧祗:보살이 부처되기 위한 수행절차. 또는 그 햇수를 말함)의 수행절차가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성종(性宗)에 뜻을 두어 마음을 닦는 자가 아니다. 만일 이런 병이 있거든 당장 고치기를 바란다.

 

 

 

<16 >

 

 

나날이 쓰고 보고 깨닫는

마음의 성품이 바로 큰 해탈

近於故人處 得五位修證圖

근어고인처 득오위수증도

乃建州大中寺講學沙門永年 排定

내건주대중사강학사문영년 배정

杭州祥符寺傳華嚴敎明義大師曇慧

항주상부사전화엄교명의대사담혜

重祥定 其序云 夫無上菩提

중상정 기서운 부무상보리

在三數劫外 五位修行 六道圓滿

재삼수겁외 오위수행 육도원만

方能證得 今列頓漸兩途 若圓頓門

방능증득 금열돈점양도 약원돈문

從衆生界 善男子等 具佛種性

종중생계 선남자등 구불종성

一念背塵合覺 不歷僧祗 直至悟界

일념배진합각 불력승지 직지오계

謂之頓超見性成佛 若三乘漸次

위지돈초견성성불 약삼승점차

五位聖賢 須歷三祗 方成正覺

오위성현 수력삼지 방성정각

 

근래 친구한테 <오위수증도>를 얻었다. 건주 대중사의 강학사문 영년이 초안했고 항주 상부사의 화엄학자 명의대사 담혜가 세밀히 감정한 것이다. 그 서문에 ‘위없는 지혜는 아승지겁을 두고 오위(五位)의 수행과 육바라밀이 원만해야 증득한다. 그러나 지금은 돈(頓)·점(漸)의 두 길이 있다. 만일 원돈문(圓頓門)으로 본다면 중생계의 불성을 갖춘 선남자들이 한 생각의 번뇌를 버리면 깨닫게 되므로 아승지겁을 거치지 않고 바로 깨달음의 경계에 이르는데 이는 단박에 초월하여 견성 성불하는 길이요, 차츰 닦아가는 삼승의 길은 오위의 성현이 삼아승지를 지내야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얻는다’하였다.

 

如是辨明 至於圖中 排定頓漸行相

여시변명 지어도중 배정돈점행상

亦不相雜 所以然者 以其衆生根機

역불상잡유 소이연자 이기중생근기

或有二乘種性 或有菩薩

혹유이승종성 혹유보살

種性 或有佛種性 利鈍各別故也

종성 혹유불종성 이둔각별고야

敎中亦有如是具佛種性衆生

교중역유여시구불종성중생

於生死地面上 頓悟佛乘 齊證齊修

어생사지면상 돈오불승 제증제수

之旨 何得南宗 有頓門耶

지지 하득남종 유돈문야

 

이렇게 분명히 밝히고, 그림 가운데 돈·점의 구체적 내용을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잘 배열해 놓았는데 이는 중생의 근기가 이승적인 성품도 있고, 보살의 성품도 있고, 부처의 성품도 있어서 예리하고 둔함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종에서도 부처의 성품을 갖춘 중생이 생사의 땅에서 부처의 경지를 단박 깨달아 한꺼번에 증득하고 닦는 이치가 있는데 어째서 남종(南宗:혜능을 개조로 하는 돈오<頓悟>의 종파)에만 단박 깨닫는 법이 있겠는가?

 

但學敎學禪之者 雖遇妙旨 高推聖境

단학교학선지자 수우묘지 고추성경

自生怯弱

자생겁약

未能深觀自心日用見聞覺知之性

미능심관자심일용견문각지지성

是無等等大解脫故 生多般疑惑耳

시무등등대해탈고 생다반의혹이

此後更引誠證 具明頓超見性者

차후갱인성증 구명돈초견성자

雖不藉三乘漸次行位

수불자삼승점차행위

亦不碍悟後圓修行門 如是悟修本末

역불애오후원수행문 여시오수본말

不離圓明 覺性惺寂之義 願令修心人

불이원명 각성성적지의 원령수심인

遷權就實 不枉用功 自他速證無上菩提

천권취실 불왕용공 자타속증무상보리

 

다만 교(敎)나 선(禪)을 배우는 사람이 오묘한 뜻을 만났다 해도 성인의 경계로만 미루고 지레 겁을 먹는다. 나날이 쓰고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제 마음의 성품이 바로 부처님과 같은 큰 해탈임을 깊이 관찰하지 못하므로 온갖 의혹을 낼뿐이다. 이래서 다음에 다시 진실한 증거를 대어, 점차로 닦아가는 삼승에 의지하지 않고도 단박에 견성하는 자가 깨달은 다음에 원만히 수행하는 데에 전혀 장애가 없고, 이렇듯 깨닫고 닦는 본말 그대로가 원만하고 밝은 깨달음의 성품을 떠나지 않은 부처의 경지임을 자세히 밝혀 마음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권학(權學)을 버리고 진실한 곳으로 나아가 헛된 공력을 들이지 않고 자타가 빨리 위없는 보리를 증득케 하리라.

 

 

 

<17 >

 

 

변함없는 성품 법계 증득해 알면

삼세가 한생각서 떠나지 않는다 .

 

且如法集別行錄云 始自發心

차여법집벌행록운 시자발심

乃至成佛 唯寂唯知 不變不斷

내지성불 유적유지 불변부단

但隨地位 名義稍殊 謂約了悟時

단수지위 명의초수 위약료오시

名爲理智 約發心修時 名爲止觀

명위이지 약발심수시 명위지관

約任運成行 名爲定慧 約煩惱都盡

약임운성시 명위정혜 약번뇌도진

功行圓滿成佛之時 名爲菩提涅槃

공행원만성불지시 명위보리열반

當知始自發心 乃至畢竟 唯寂唯知

당지시자발심 내지필경 유적유지

據此錄之旨則雖今時凡夫

거차록지지즉수금시범부

能廻光返照 善知方便 均調昏散

능회광반조 선지방편 균조혼산

惺惺寂寂之心 該因徹果 不變不斷

성성적적지심 해인철과 불변부단

但生熟明昧 隨功異耳

단생숙명매 수공이이

 

또 <법집별행록>에는 ‘처음 발심해서 성불에 이르기까지 오직 고요하고 아는 것〔知〕, 그것은 변하거나 끊어지지 않고 단지 그 지위를 따라 이름이 다소 다르다. 만약 밝게 깨달았을 때는 이(理:고요함)와 지(智:아는 것)라 하고, 발심해서 수행할 때는 지(止:반연을 쉬어 고요함에 합하는 것)와 관(觀:마음을 보아 앎에 합하는 것)이라 하고, 제대로 연마하여 행을 이룰 때에는 정(정:선정, 즉 고요함에 듦)과 혜(慧:선정에 의해 분별없는 앎이 생김)라 하고, 번뇌가 완전히 사라지고 공을 쌓는 수행이 원만하여 성불할 때에는 보리(菩提:깨달음, 즉 안다는 것)와 열반(涅槃:번뇌의 사라짐, 즉 고요함을 말함)이라 한다. 그러므로 발심해서 최후까지 오직 고요하고 안다’하였다. 이 <별행록>의 뜻에 의하면 지금은 비록 범부일지라도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춰보고, 방편을 잘 알아 혼미함과 산란함을 잘 조절하면 깨어있되 고요한 마음이 인과(因果)를 두루 포함하여 변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지만 단지 공부가 익었는가 덜 익었는가, 밝은가 어두운가에 따라 다를 뿐이다.

 

若圓照自心 眞常性德 動靜雙融

약원조자심 진상성덕 동정쌍융

證會法界則便知諸地功德 塵數法門

증회법계즉편지제지공덕 진수법문

九世十世 不離於當念 以心

구세십세 불리어당념 이심

性靈妙自在 含容萬種法

성영묘자재 함용만종성

萬法未嘗離自性 如轉如不轉

만법미상이자성 여전여부전

性相體用 隨緣不變 同時無碍

성상체용 수연불변 동시무애

初無今古凡

초무금고범

聖善惡取捨之心 而不妨功用漸增

성선악취사지심 이불방공용점증

歷諸地位 悲智漸圓 成就衆生

역제지위 비지점원 성취중생

而始終 不移一時一念一法一行也

이시종 불이일시일념일법일행야

 

만일 자기 마음의 진실하고 변함없는 성품이,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 융화됨을 비추어 법계를 증득해서 알면 모든 지위의 공덕과 한없는 법문과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생각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음의 성품은 신령하고 자재로우며 온갖 법을 포용하고 있다. 그 온갖 법은 각자 자기 성품을 떠난 적이 없어,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 본성(本性)과 현상, 본체와 작용, 인연을 따라 변하는 것과 불변하는 것이 동시에 서로 걸림이 없으므로 거기에는 애초부터 옛날과 지금, 범부와 성인, 선과 악,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리하여 공을 차츰 많이 쌓고 보살의 여러 지위를 거치는 동안 자비와 지혜가 점점 뚜렷해져서 중생을 구제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때도, 한 생각도, 한 법도, 한 행도 변함이 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 18 >

 

걸림없는 연기법 말하면서도

왜 자기 마음 작용 보지 못하나 .

 

華嚴論云 以自心根本無明分別之種

화엄론운 이자심근본무명분별지종

便成不動智佛 以法界體用

편성부동지불 이법계체용

以爲信進悟入之門 從信及入爲進修

이위신진오입지문 종신급입위법수

乃至經十住十行十回向十地十一地

내지경십주십행십회양십지십일지

摠不離本不動智佛

총불리본부동지불

不離一時一念一法一行上 而有無量無

불리일시일념일법일행상 이유무무량

邊不可說不可說法界虛空界微塵數法門

변불가설불가설법계허공계미진수법문

何以故 爲從法界及根本不動智上

항이고 위종법계급근본부동지상

爲信進悟入故

위신진오입고

 

<화엄론>에는 ‘자기 마음 가운데 분별하는 종자인 근본 무명으로써 움직임이 없는 지혜의 부처를 이루고, 법계의 본체와 작용으로써 믿음과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문을 삼으며, 여기에서 더 닦아 십주(十住:보살 수행에서 편안히 머무는 지위)·십행(十行:보살의 수행에서 중생 제도에 노력하는 지위)·십회향(十回向:중생 제도와 함께 불과<佛果>를 향해 노력하는 지위)·십지(十地:흔들림 없는 부처의 지혜를 내는 지위)·십일지(十一地:성인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흔들림 없는 지혜의 부처를 떠나지 않는다. 한 순간, 한 생각, 한 법, 한 행도 떠나지 않은 가운데, 한없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법계와 허공계의 티끌 수같은 법문이 거기에 들어있다. 왜 그러냐 하면 법계와 흔들림 없는 근본 지혜 위에서 믿고 나아가 깨달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하였다.

 

又云不同三乘權敎 約劣解衆生

우운부동삼승권교 약열해중생

存世間三世之性 說佛果 在三僧祗之外

존세간삼세지성 설불과 재삼승지지외

據此論之旨 圓宗圓信之者

거차론지지 원종원신지자

以自心根本無明分別之種

이자심근본무명분별지종

便成不動智佛 從信乃至究竟位

편성부동지불 종신내지구경위

無有轉變成壞之相 可謂心性

무유전변성괴지상 가위심성

本來自在 隨緣似轉而常無變易者也

본래자재 수연사전이상무변이자야

 

그리고 또 ‘삼승(三乘)의 방편에서 가르치듯이, 용렬한 견해를 가진 중생을 상대로 해서 세간에는 삼세(三世)의 성품이 있다고 한 말과 불과(佛果)는 삼아승지겁 밖에 있다고 말한 것과는 다르다’하였다. 이런 논지로 보면 원종(圓宗)을 원만히 믿는 사람은 자기 마음 가운데 분별을 일으키는 근본 무명이 바로 흔들림 없는 지혜를 이루고, 믿음의 지위에서 마지막 지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도 바뀌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른바 심성은 본래 자재하여 인연을 따라 변하는 것같지만 변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近來 唯習言說者 雖廣談法界無碍緣起

근래 유습언설자 수광담법계무애연기

初不返觀自心之德用

초불반관자심지덕용

旣不觀法界性相 是自心之體用

기불관법계성상 시자심지체용

何時開自心情塵 出大千經券

하시개자심정진 출대천경권

經不云乎 知一切法 卽心自性

경불운호 지일체법 즉심자성

成就慧身 不由他悟

성취혜신 불유타오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비록 법계의 걸림 없는 연기법(緣起法)을 말하지만 애초부터 자기 마음의 덕의 작용은 돌아보지 않는다. 이미 법계의 성상(性相)이 바로 자기 마음의 본체와 작용임을 보지 못하는데 언제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티끌을 열어서 삼천대천세계의 큰 경전을 연설하겠는가. 경에도 ‘일체의 법이 마음의 자성(自性)인 줄 알면 지혜의 몸을 이룬다. 결코 다른 것에 의해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하지 않았는가.

 

 

 

 

< 19 >

 

 

얽매임을 벗어난 진여라야

선정과 지혜가 밝아지는 것.

 

又不云乎 言辭所說法 小智妄分別

우불운호 언사소설법 소지망분별

是故生障碍 不了於自心 不能了自心

시고생장애 불료어자심 불능요자심

云何知正道 彼由顚倒慧

운하지정도 피유전도혜

增長一切惡 伏望修眞高士

증장일체악 복망수진고사

依如上懇苦之言 先修深信自心

의여상간고지언 선수심신자심

是諸佛本源 以觀照定慧之力發出之

시제불본원 이관조정혜지력발출지

不可端居抱愚 效無分別 而爲大道

불가단거포우 효무분별 이위대도

所謂在纏眞如 昏散皆具 出纏眞如

소위재전진여 혼산개구 출전진여

定慧方明 總別條然 前後

정혜방명 총별조연 전후

無濫故也

무람고야

 

 

그리고 ‘말로 하는 설법은 작은 지혜의 망령된 분별이다. 그러므로 장애가 생겨 제 마음을 알지 못한다. 제 마음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바른 도를 알겠는가. 그들은 뒤집힌 지혜로 말미암아 온갖 악을 더할뿐이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삼가 바라나니, 진리를 닦는 높은 선비는 이상의 간곡한 말에 의해 먼저 제 마음이 바로 부처의 근본임을 깊이 믿고, 그 근본을 비춰보는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밝혀야 할 것이다. 어리석음을 안고 단정하게 앉아 분별이 없는 것만을 본받는 것으로 대도라 해서는 안된다. 얽매임 속에 있는 진여는 혼침과 산란이 들어 있고, 얽매임을 벗어난 진여라야 비로소 선정과 지혜가 밝아지는 것이니, 그것은 전체와 개체가 서로 조리가 있어 앞뒤가 질서정연하기 때문이다.

 

 

亦不可謂 現今治其染 當來得其淨

역불가위 현금치기염 당래득기정

不觀本妙 自生艱阻 而勞修漸行

불관본묘 자생간조 이노수점행

唯心訣云 或讓位 高推於極

유심결운 혹양위 고추어극

聖 或積德 望滿於三祗 不知全體現前

성 혹적덕 망만어삼지 부지전체현전

猶希妙悟 豈覺從來具足 仍待功成

유희묘오 기각종래구족 인대공성

不入圓常 從成輪轉  

불입원상 종성윤전 지

爲昧於性德 罔辨眞宗 捨覺徇塵

위매어성덕 망변진종 사각순진

棄本就末 此之是也

기본취말 차지시야

是故 修心之人 不自屈不自恃

시고 수심지인 불자굴불자시

恃卽墮於此心 不守自性 能凡能聖

시즉타어차심 불수자성 능범능성

刹那造作 還復漂沈之用 是以

찰나조작 환부표침지용

 

 

또 ‘금생에 물든 번뇌를 다스려서 내생에는 청정해지리라’하여 본래의 묘한 마음을 보지 않고, 스스로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점차로 닦아가는 수행을 택해서는 안된다. <유심결>에 ‘보살의 지위를 사양하여 지극한 성인에게 미루고, 혹은 덕을 쌓아 삼아승지겁이 차기를 기다리고, 혹은 전체가 앞에 나타난 것도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묘한 깨달음만을 바라니 어찌 본래 구비해 있는 진여(眞如)를 깨닫겠는가. 이래서 공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원만하고 변함없는 데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침내 생사에 헤매는 것은 단지 성품에 어두워 참된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버리고 번뇌를 쫓아가고, 근본을 버리고 줄기로 나아가는 것이다’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닦는 사람은 비굴하지도 말고 의지하지도 않아야 한다. 의지하면 마음이 자성을 지키지 못하여 범인도 되고 성인도 되며, 찰나찰나로 조작하여 다시 떴다 잠겼다 하는 작용으로 돌아가는 데에 떨어지고 만다.

 

 

 

 

< 20 >

 

수행과 성품이라는 두 문은

새의 양 날개와 같은 것이다

是以 晝三夜三 懃懃蘊習 惺惺無妄

시이 주삼야삼 근근온습 성성무망

寂寂明亮 不違修門 屈卽失於此心

적적명료 불위수문 굴즉실어차심

靈通應物 常在目前 終日隨緣

영통응물 상재목전 종일수연

而終日不變之德 是以 將痴愛

이종일불변지덕 시이 장치애

成解脫眞源 運貪嗔 現菩提大用

성해탈진원 운탐진 현보리대용

逆順自在 縛脫無拘 順於性

역순자재 박탈무구 순어성

門也 此修性二門 如鳥兩翼 闕一不可

문야 차수성이문 여조양익 궐일불가

 

 

그러므로 밤낮 부지런히 공부하여 항상 깨어있으되 망령됨이 없고, 고요하되 밝아야 하는 그런 수행의 문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만약 물러서면, 항상 눈앞에서 사물을 상대하며 종일 인연을 따르되 변함이 없는 신통한 마음의 덕을 잃고 만다. 그러므로 어리석음과 애욕 가운데서 해탈의 참된 근원을 이루고, 탐욕과 분노를 잘 운용하여 보리의 큰 작용을 나타내어, 역경과 순경에 자재하여 결박과 해탈에 구애되지 말고 성품에 순응해야 한다. 수행과 성품이라는 두 문은 마치 새의 양 날개와 같아서 하나만 없어도 안된다.

 

 

先德云 恰恰用心時 恰恰無心用

선덕운 흡흡용심시 흡흡무심용

曲談名相勞 直說無煩重 無心恰恰用

곡담명상로 직설무번중 무심흡흡용

常用恰恰無 今說無心處

상용흡흡무 금설무심처

不與有心殊 若能於此 得意進修

불여유심수 약능어차 득의진수

則雖是末世衆生 何患乎落斷常之坑也

즉수시말세중생 하환호낙단상지갱야

向來所謂塵數法門 諸地功德

향래소위진수법문 제지공덕

妙心體具 如如意珠 豈誣也哉

묘심체구 여여의주 기무야재

言妙心者 是惺惺寂寂之心也

언묘심자 시성성적적지심야

 

 

옛 스님의 말에 ‘자연스럽게 마음을 쓸 때에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없이 쓰게 된다. 굽은 말은 이름과 모양을 헤아리느라 수고롭고, 바른 말은 번거로움과 되풀이가 없다. 무심히 자연스럽게 쓰면 항상 써도 자연스러워 쓰는 것이 없다. 지금 말한 바 마음이 없다는 것도 바로 마음이 있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만약 여기에서 뜻을 얻어 닦아나간다면 말세 중생이라도 어찌 단(斷: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과 상(常:항상 있다는 생각)에 떨어질 걱정을 하겠는가. 지금까지 이른바 수 없는 법문과 보살의 모든 지위의 공덕이 다 묘심의 본체에 갖추어져 있음이 여의주와 같다 한 것이 어찌 거짓말이겠는가. 묘심이란 바로 깨어있으면서도 고요한 마음을 말한다.”

 

 

問今時修心之人 若博學多聞

문금시수심지인 약박학다문

說法度人 則損於內照 若無利他之行

설법도인 즉송어내조 약무이타지행

則何異趣寂之徒也

즉하아취적지도야

答此各在當人 不可一向 若因言悟道

답차각재당인 불가일향 약인언오도

藉敎明宗 具擇法眼者

자교명종 구택법안자

雖多聞而不起認名執相之念 雖利他

수다문이불기인명집상지념 수이타

而能斷自他憎愛之見 悲智漸圓

이능단자타증애지견 비지점원

妙契 中則誠當實行者也

묘계환중즉성당실행자야

 

 

물었다. “지금 마음 닦는 사람이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서 설법으로 남을 제도할 경우에는 마음을 관조하는 공부는 손실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이타행(利他行)이 없다면 고요함만을 즐기는 무리와 무엇이 다른가.”

답하다. “이는 개인의 문제라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말로 인해 도를 깨닫거나 교(敎)에 의해 종지를 밝히거나 일단 법을 택하는 눈을 갖춘 이는 많이 들었다 해서 이름과 형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이타행을 하더라도 자기다, 남이다 하여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생각이 끊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점점 원만해져서 절대의 법계에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참다운 수행인이다

 

 

 

 

< 21>

 

 

혼탁한 애욕이 마음 얽어매어도

버리지 못하니 스스로 괴로워라

若隨語生見 齊文作解 逐敎迷心

약수어생견 제문작해 축교미심

指月不分 未忘名聞利養之心

지월불분 미망명문이양지심

而欲說法度人者 如濊蝸螺 自濊濊他

이욕설법도인자 여예와라 자예예타

是乃世間文字法師 何名專精定慧

시내세간문자법사 하명전정정혜

不求名聞者乎

북구명문자호

 

 

만약 말에 따라 견해를 내고, 글을 따라 해석을 하고, 교(敎)를 좇아 마음이 미혹되어 손가락과 달을 분별하지 못하고(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본다는 뜻), 명예와 이익에 대한 생각을 잊지 못하면서 설법으로 남을 제도하겠다는 사람은 마치 더러운 달팽이가 자기도 더럽히고 남도 더럽히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문자법사(文字法師)일뿐이니, 어찌 선정과 지혜를 닦으며 명예를 구하지 않는 이라 하겠는가.

 

 

華嚴論云 若自有縛 能解他縛

화엄론운 약자유박 능해타박

無有是處 誌公法師大乘讚云

무유시처 지공법사대승찬운

世間幾許痴人 將道復欲求道

세간기허치인 장도부욕구도

廣尋諸義紛 

광심제의분운

自救己身不了 專尋他文亂說

자구기신불료 전심타문난설

自稱至理妙好 徒勞一生虛過

자칭지리묘호 도로일생허과

永劫沈淪生老 濁愛纏心不捨

영겁침륜생로 탁애전심불사

淸淨智心自惱 眞如法界叢林

청정지심자뇌 진여법계총림

返作荊棘荒草 但執黃葉爲金

반작형극황초 단집황엽위금

不悟棄金求寶 口內誦經誦論

불오기금구보 구내송경송론

心裏尋常枯燥 一朝覺本心空

심리심상고조 일조각본심공

具足眞如不少 阿難曰 一向多聞

구족진여불소 아난왈 일향다문

未專道力 先聖之旨 明踰日月

미전도력 선성지지 명유일월

豈可廣尋諸義

기가광심제의

不求己身 而永劫沈淪乎

불구기신 이영겁침륜호

但時中觀行餘暇 不妨披詳聖敎

단시중관행여가 불방피상성교

及古德入道因緣 決擇邪正 利他利

급고덕입도인연 결택사정 이타이

己而已 非爲一向外求 分別名相

기이사 비위일향외구 분별명상

如入海算沙 虛度光陰

여입해산사 허도광음

 

 

<화엄론>에 ‘스스로 결박되어 있으면서 남의 결박을 풀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하였고 또 지공법사의 <대승찬>에는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사람이 도(道)를 가지고 도를 구하려 하는가? 여러 가지 뜻을 찾아 헤매다 제 몸도 미처 구제하지 못하는구나. 남의 어지러운 글만 보면서 지극한 이치가 묘하다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헛되이 일생을 보내니 영원히 생노병사에 빠지고 마는구나. 흐린 애욕이 마음을 얽어매어도 버리지 못하니 청정한 지혜의 마음은 스스로 괴로워라. 진여법계의 총림이 도리어 가시덤불 거친 풀밭이 되었구나. 누런 잎을 가지고 금이라 하여 그걸 버리고 참 보배 구할 줄 모르니 아무리 입으로 경론을 외더라도 마음은 항상 메말라 있다. 하루아침에 마음이 공한 줄 깨달으면 완전히 갖추어진 진여가 적지 않으리라’하였다. 또 아난은 ‘많이 듣기만 일삼으면 도력에는 마음을 쓰지 못한다’하였다. 옛성현의 교훈이 일월보다 분명한데 왜 잡다한 뜻을 찾아다니고 자신에게서 구하지 않아 영겁의 생사에 빠지랴. 다만 관행(觀行)하는 여가에 성현의 가르침과 도에 들어간 옛스님들의 인연을 자세히 살피고 정사(正邪)를 가려 남과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은 무방하다. 한결같이 밖에서 찾으며 이름과 모양을 분별하기를 마치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를 세듯이 하면서 헛된 세월을 보내서는 안된다.

 

 

 

 

< 22 >

 

 

남 제도할 서원 세웠으면 먼저 선정과 지혜 닦아야 한다

先德曰 菩薩本爲度他 是以先修定慧 선덕왈 보살본위도타 시이선수정혜 空閒靜處 禪觀易成 少欲頭陀 공한정처 선관이성 소욕두타 能入聖道 此其證也 旣發度 능입성도 차기증야 他之願 先修定慧 有道力則雲布慈門 타지원 선수정혜 유도력즉운포자문 波騰行海 窮未來際 救拔一切苦惱衆生 파등행해 궁미래제 구발일체고뇌중생 供養三寶 紹佛家業 공양삼보 소불가업 豈同趣寂之徒也 기동취적지도야 問今時行者 雖專定慧 多分道力未充 문금시행자 수전정혜 다분도력미충 若也不求淨土 留此穢方 逢諸苦難 약야불구정토 유차예방 봉제고난 恐成退失 공성퇴실

 

 

옛스님의 말에 ‘보살은 본래 남을 제도하기 위해 먼저 선정과 지혜를 닦는다. 그래서 한가하고 조용한 곳이라야 선관(禪觀)을 이루기 쉽고, 욕심이 적은 고행이라야 성인의 도에 들어갈 수 있다’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이미 남을 제도할 서원을 세웠으면 먼저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한다. 그리하여 도력이 있으면 자비의 문을 구름 펼치듯 하고, 행(行)의 바다에 물결 출렁이듯 하여 미래세가 다하도록 모든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해서 삼보에 공양하며 부처님의 가업을 이어가는 것이니, 이 어찌 고요한 데에만 들어가는 무리들과 같다 하겠는가.”물었다. “요즈음 수행하는 사람은 선정과 지혜에 전념하고 있으나 대개는 도력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만약 정토(淨土)를 얻지 못하고 이 사바세계에 머문다면 온갖 고난을 만나 타락할까 두렵다.”

 

 

答此亦各在當人 不可一例取之 답차역각재당인 불가일례취지 若是大心衆生 依此最上乘法門 약시대심중생 의차최상승법문 決定信解四大 如泡幻 六塵似空花 결정신해사대 여환포 육진사공화 自心是佛心 自性是法性 從本以來 자심시불심 자성시법성 종본이래 煩惱性自離 惺惺直然惺惺 번뇌성자리 성성직연성성 歷歷直然歷歷 依此解而修者 역력지경역력 의차해이수자 雖有無始習氣 以無依住智治之 수유무시습기 이무의주지치지 還是本智 不伏不斷 환시본지 불복부단

 

 

답하다. “그것도 각자에게 달렸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만약 큰마음을 가진 사람이 최상승의 법에 의해 이 육신은 물거품이나 허수아비와 같고, 육진(六塵)은 허공의 꽃과 같으며, 자기 마음이 불심이요, 자기 성품이 곧 법성이라서 원래부터 번뇌는 떠났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려면 바로 깨어있고 분명할 때는 그대로 분명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알아서 여기에 의해 수행하는 사람은 비록 오래된 습기(習氣)가 있더라도 집착이 없는 지혜로 다스리면 그것이 곧 본래의 지혜이므로 억제하거나 끊을 것이 없다.

 

 

雖有方便三昧 離昏散之功 수유방편삼매 이혼산지공 以知緣慮分別 是眞性中緣起故 이지연려분별 시진성중연기고 任性淨而無取攝之相 임성정이무취섭지상 雖涉外緣違順之境 爲了唯心 수섭외연위순지경 위요유심 無自他能所故 愛憎嗔喜 任運不生 무자타능소고 애증진희 임운불생

 

 

비록 방편의 삼매로써 혼침과 산란함을 버린 공도 있겠지만 모든 생각과 분별이 바로 참된 성품 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성품의 깨끗함 그대로에 맡겨 취하거나 거두어들이는 일이 없고, 바깥 인연의 역경이나 순경을 당하더라도 오직 마음인줄을 알아서 자타와 주관 객관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이나 미움, 분노와 기쁨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23 >

 

인연따라 보살도 행하면

삼계안에 처하더라도 법성의 정토.

 

 

如是任法 調治習氣 使稱理智增明

여시임법 조치습기 사칭이지증명

隨緣利物 行菩薩道 雖處三界內

수연이물 행보살도 수처삼계내

無非法性淨土 雖經歲月 體不離時

무비법성정토 수경세월 체불이시

任大悲智 以法隨緣故

임대비지 이법수연고

此人雖不如上古過量人 一超登位

차인수불여상고과량인 일초등위

具足通力者 然以夙植善根 種性猛利

구족통력자 연이숙식선근 종성맹리

深信自心 本來寂用自在 性無更改故

심신자심 본래적용자재 성무갱개고

於諸世難 無有退失之患 華嚴論

여제세란 무유퇴실지환 화엄론

所謂大心凡夫 能生

소위대심범부 능생

信證入故 生如來家 不言已生佛家

신증입고 생여래가 불언이생불가

諸大菩薩者也 今時如此修心者

제대보살자야 금시여차수심자

爲上近也

위상근야

 

 

이렇게 법에 맡겨 습기(習氣)를 다스려서 이치에 맞는 지혜를 더욱 밝게 하고, 인연 따라 만물을 이롭게 하는 보살도를 행한다면 비록 삼계(三界) 안에 처하더라도 모두가 법성(法性)의 정토요, 비록 세월이 지나도 본체는 때를 떠나지 않는다. 대자비의 지혜에 맡겨 법으로써 인연을 따르기 때문에 이 사람은 비록 옛날에 뛰어난 사람이 한 번에 성인의 지위에 올라 신통력을 갖춘 이보다는 못하더라도 숙세에 심은 그 선근(善根)으로 성품이 영리하여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고요하고 자재로운 그 성품은 변함이 없음을 깊이 믿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어려움에도 실망할 염려가 없다. <화엄론>에 ‘이른바 큰 마음을 지닌 범부는 신념으로 깨달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여래의 집에 태어난 것이지, 부처의 집에 태어나서 대보살이 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하였다. 오늘날 이렇게 마음 닦는 이는 상등 근기라 할 것이다.

 

 

或有行者 聞自心淨妙之德 信樂修習

혹유행자 문자심정묘지덕 신락수습

然以無始堅執我相 習氣偏重

연이무시견집아상 습기편중

致諸惑障 未能忘情者 且以空觀

치제혹장 미능망정자 차이공관

推破自他身心 四大五蔭 從緣幻出

추파자타신심 사대오음 종연환출

虛假非實 猶如浮泡 其中空虛

허가비실 유여부포 기중공허

以何爲我 以何爲人 如是深觀

이하위아 이하위인 여시심관

巧洗情塵 心常謙敬 遠離 慢

교세정진 심상겸경 원리교만

折伏現行 資於定慧 漸入明靜之性

절복현행 자어정혜 점입명정지성

 

 

어떤 수행자는 자기 마음이 깨끗하고 미묘한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즐겁게 받아들여 닦고 익힌다. 그러나 옛날부터 아상(我相)에 집착된 그 습기가 너무 무거워서 온갖 의혹의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이래서 망령된 정(情)을 잊지 못하는 자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는 모두 인연 따라 환영(幻影)으로 생긴 헛 것이라 진실한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물거품과 같이 그 속이 비었는데 무엇을 <나>라 하고 무엇을 <남>이라 하겠는가?’하는 공관(空觀)으로 아상을 깨부수어야 한다. 이렇게 관찰하여 세상의 번뇌 티끌을 잘 씻고, 항상 겸손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교만심을 없애며 현재의 번뇌를 억제한다면 선정과 지혜에 힘입어 차츰 밝고 고요한 본성에 들어갈 것이다.

 

 

然此人 若無萬善 助開自力 恐成迂滯

연차인 약무만선 조개자력 공성우체

直須勤供養三寶 讀誦大乘 行道禮拜

직수근공양삼보 독송대승 행도예배

懺悔發願 始終無廢

참회발원 시종무폐

 

 

그러나 선행을 하며 자력적인 개발이 없으면 우회하거나 막히기 쉬우니 항상 삼보에 공양하고 대승경전을 읽으며, 수행하고 예배하며, 참회와 발원을 쉬지 말라.

 

 

 

 

< 24 >

 

 

더러운 마음 일으키면

어느 부처가 맞아주겠는가.

 

 

以愛敬三寶淳厚心故 蒙佛威加

이애경삼보순후심고 몽불위가

能所業障 善根不退 若能如是自力他力

능소업장 선근불퇴 약능여시자력타력

內外相資 志求無上之道

내외상자 지구무상지도

則豈不具美乎

즉기불구미호

 

 

이렇게 삼보를 공경하는 순수한 마음 때문에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어 업장이 녹고 선근(善根)이 물러나지 않게 된다. 이처럼 자력, 타력의 안팎으로 서로 도와 최상의 도를 구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此內外相資中 有二種人所願各異

차내외상자중 유이종인소원각이

或有悲願重者 於此世界 不厭生死

혹유비원중자 어차세계 불염생사

自利利他 增長悲智 求大菩提

자리이타 증장비지 구대보리

所生之處 見佛聞法 以之爲願也

소생지처 견불문법 이지위원야

此人不別求淨土 亦無逢難退失之患

차인불별구정토 역무봉난퇴실지환

或有淨穢苦樂 欣厭心重者

혹유정예고락 흔염심중자

所修定慧 及諸善根

소수정혜 급제선근

回向願求生彼世界 見佛聞法

회향원구생피세계 견불문법

速成不退  來度生 以之爲願也

속성불퇴 극래도생 이지위원야

 

 

안팎으로 서로 돕는 것에도 소원이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즉 비원(悲願)이 많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나와 남을 이롭게 하며 자비와 지혜를 더욱 늘리어 큰 보리를 구하므로 태어나는 세상마다 부처를 뵙고 법을 듣기를 원한다. 이런 사람은 따로 정토(淨土)를 구하지 않더라도 어려움 때문에 후퇴할 염려가 없다. 다른 하나는 깨끗함과 더러움,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해 기뻐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수행하는 선정과 지혜와 모든 선근을 회향하되 저 세상에 태어나서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듣고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 힘을 얻어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중생을 제도할 것을 소원하는 사람이다.

 

 

此人意謂雖專內照 忍力未成

차인의위수전내조 인력미성

留此穢土 逢諸苦難 恐有退失之患

유차예토 봉제고난 공유퇴실지환

此內外相資二種人志願 心諧聖敎

차내외상자이종인지원 심해성교

皆有道理 此中求生淨土者

개유도리 차중구생정토자

於明靜性中 有定慧之功

어명정성중 유정혜지공

縣契彼佛內證境界故

현계피불내증경계고

望彼但稱名號 憶想

망피단칭명호 억회

尊容 希望往生者 優劣可知矣

종용 희망왕생자 우열가지의

 

 

이런 사람은 비록 마음을 관조하는 일에 전념하였으나 인내력이 모자라서 더러운 이 사바세계에 머물다가 여러 고난을 만나게 되면 공부를 포기할 염려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어쨌든 안팎으로 도와 수행하는 두 종류의 사람은 마음이 모두 성인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도리가 있다. 그러므로 정토에 나기를 구하기만 한다면 이미 밝고 고요한 성품 가운데 선정과 지혜의 공로가 있으므로 저 부처님이 깨달은 경계와 부합되는 것이다. 그러니 단지 부처님의 명호만 부르고, 거룩한 형상만 생각하며 극락왕생을 바라는 사람과 견주어보면 그 우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智者大師 臨終謂門人曰火車相現

지자대사 임종위문인왈화차상현

一念改悔者 猶能往生 況戒定慧薰

일념개회자 유능왕생 황계정혜훈

修行道力 功不唐損 淨名經云

수행도력 공불당손 정명경운

欲淨佛土 當淨其心

욕정불토 당정기심

 

 

지자 대사는 임종 때 제자들에게 ‘지옥의 불수레가 나타나더라도 한 생각만 고쳐먹어도 극락왕생하는데 하물며 계정혜로 닦으며 수행한 도력이라면 어찌 그 공덕이 헛되겠는가’하였고, <정명경>에는 ‘불토(佛土)를 깨끗이 하려면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25 >

 

 

자기 마음의 근원을 떠나서 어디로 찾아 들어가겠는가.

 

 

隨其心淨 卽佛土淨 法寶記壇經云 수기심정 즉불토정 법보기단경운 心地但無不淨 西方去此不遠 심지단부부정 서방거차불원 性起不淨之心 何佛卽來迎請 성기부정지심 하불즉래영청 壽禪師云 識心方生唯心淨土 수선사운 식심방생유심정토 着境只墮所緣境中 如上佛祖 착경지타소연경중 여상불조 所說求生淨土之旨 皆不離自心 未審 소설구생정토지지 개불리자심 미심 離自心源 從何趣入 이자심원 종하취입 如來不思議境界經云 三世一切諸佛 여래불사의경계경운 삼세일체제불 皆無所有 唯依自心 菩薩若能了知諸佛 개무소유 유의자심 보살약능요지제불 及一切法 皆唯心量 得隨順忍 급일체법 개유심량 득수순인 或入初地 捨身速生妙喜世界 혹입초지 사신속생묘희세계 或生極樂淨佛土中 此其證也 혹생극락정불토중 차기증야

 

 

마음이 깨끗하면 불토가 깨끗해진다’하였고, <법보기단경>에는 ‘마음이 깨끗하면 서방정토는 여기서 멀지 않지만 더러운 마음을 일으키면 어느 부처가 와서 맞아주겠는가’하였다. 수선사는 ‘마음을 알면 바로 유심정토(唯心淨土)에 나고, 경계에 집착하면 집착하는 그 경계에 떨어진다’하였다. 이상과 같이 부처와 조사들이 말한 바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취지는 모두가 자기 마음을 떠난 것이 아니다. 자기 마음의 근원을 떠나서 어디로 찾아 들어가겠는가? <여래불사의경>에 ‘삼세의 모든 부처가 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마음에 의지해 있다. 만약 보살이 부처나 일체의 법이 다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 마음에 안주하며 움직임 없는 경계 즉 수순인(隋順忍)을 얻으면, 초지(初地)에 들어가 몸을 버리고 묘희(妙喜)의 세계에 나기도 하고 혹은 극락의 깨끗한 부처 나라에 나기도 한다’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以此而推 雖不念佛求生 但了唯心 이차이추 수불염불구생 단료유심 隨順觀察 自然生彼 必定無疑 수순관찰 자연생피 필정무의 近世多有義學沙門 捨命求道 근세다유의학사문 사명구도 皆着外相 面向西方 揚聲喚佛 以爲道行 개착외상 면향서방 양성환불 이위도행

 

 

이렇게 미루어본다면 염불하며 왕생을 구하지 않더라도 오직 마음에 있음을 밝게 깨달아 그대로 관찰해 나간다면 저절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요즘 경을 배우는 사문들은 목숨을 버리고 도를 구하면서도 모두가 바깥의 상(相)에 집착하여, 서방을 향해 앉아 소리 높여 부처를 부르는 것으로 도행(道行)이라 여긴다.

 

 

前來學習發明心地 佛祖秘訣 전래학습발면심지 불조비결 以謂名利之學 亦謂非分境界 이위명리지학 역위비분경계 終不掛懷 一時棄去 旣棄修心之秘訣 종불괘회 일시기거 기기수심지비결 不識返照之功能 徒將聰慧之心 불식반조지공능 도장총혜지심 虛用平生之力 背心取相謂依聖敎 허용평생지공 배심취상위의성교 諸有智者 豈不痛傷 제유지자 기불통상

 

 

그리고 전부터 배우고 익혀 마음을 밝혀놓은 부처와 조사들의 비결을, 오히려 명리(名利)를 얻으려는 학문이다 하거나 또는 자기 분수에는 맞지 않는 공부라 하면서 마침내 생각에 두지 않고 일시에 버리고 만다. 이미 마음 닦는 비결을 버렸으니 마음을 관조하는 공부는 알턱이 없고, 단지 세속적인 지혜로 평생의 힘을 헛되이 소비하면서 마음을 등지고 상(相)을 취하는 것으로 성인의 가르침에 의지한다 하니, 어찌 지혜 있는 사람으로서 슬퍼할 일이 아니겠는가.

 

 

 

< 26 >

 

 

“밝고 고요한 본체로 돌아가기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다” .

 

 

孤山智圓法師阿彌陀經疏序云

고산지원법사아미타경소서운

夫心性之爲體也 明乎靜乎一而已矣

부심성지위체야 명호정호일이이의

無凡聖焉 無依正焉 無延促焉

무범성언 무의정언 무연촉언

無淨穢焉 及其感物而動 隨緣而變

무정예언 급기감물이동 수연이변

則爲六凡焉 爲四聖焉 有依焉

즉위육범언 위사성언 유의언

有正焉 依正旣作則身壽 有延促矣

유정언 의정기작즉신수 유연촉의

國土有淨穢矣

국토유정예의

 

 

고산 지원 법사는 <아미타경소>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심성(心性)의 본체는 밝고 고요하여 하나일 따름이다. 거기는 범부도 성인도 없고, 의보(依報:인간이 의지해 사는 국토, 집, 의복, 음식 등)도 정보(正報:과거의 업에 의해 현재에 받은 몸)도 없고, 수명의 길고 짧음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물에 감응하고 인연에 따라 변할 때에는 여섯 가지 범부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네 가지 성인도 되며 의보(依報)도 있고, 정보도 있게 된다. 이미 의보와 정보로 태어났기에 수명에는 길고 짧음이 있고, 국토에는 더러움이 있다.

 

 

吾佛大聖人 得明靜之一者也

오불대성인 득명정지일자야

乃假道於慈 託宿於悲 將欲 群迷

내가도어자 탁숙어비 장욕구군미

使復其本 於是乎無身而示身 無

사부기본 어시호무신이시신 무

土而示土 延其壽淨其土  其欣 促其

토이시토 연기수정기토 비기흔 촉기

壽穢其土  其厭

수예기토 비기염

旣欣且厭則漸諭之策 行矣 雖寶樓金池

기흔차염즉점유지책 행의 수보루금지

爲悅目之翫 而非惑蕩之色

위열목지완 이비혹탕지색

而能達唯心無境矣 雖風樹鳥聲

이능달유심무경의 수풍수조성

有入耳之娛 而非  之音 而能念三

유입이지오 이비첨체지음 이능념삼

寶有歸矣 夫如是則復乎明靜之體者

보유귀의 부여시즉부호명정지체자

如轉掌耳

여전장이

予謂圓師 深知吾佛善權本末者也

여위원사 심지오불선권본말자야

今引繁文 庶使今時求淨土者

금인번문 서사금시구정토자

知佛意而修之 不枉用功耳

지불의이수지 불왕용공이

 

 

우리의 부처님 대 성인은 밝고 고요한 하나를 얻은 분이시다. 이에 자비의 방법을 빌려서 헤매는 중생으로 하여금 그 근본에 돌아가게 하고자 육신이 없지만 육신을 나타내고, 국토가 없지만 국토를 나타내어 수명을 늘리고 국토를 깨끗이 하여 그들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수명을 단축하고 국토를 더럽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싫어하게도 하신다. 그들을 기뻐하고 싫어하게 하여 차츰 깨우치는 방법을 행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보배로 된 누각이나 금으로 된 연못은 눈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마음을 홀리고 방탕하게 하는 빛깔이 아니다. 여기에서 마음의 경계가 없음을 밝게 알 수 있다. 나무의 바람소리와 새 소리는 귀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이는 마음을 흔드는 음성이 아니다. 이런 소리에서능히 삼보를 생각하고 귀의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밝고 고요한 본체로 다시 돌아가기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다.”

나는 지원법사가 우리 부처의 교묘한 방편의 본말을 잘 아는 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번거로운 글을 인용하여 지금 정토를 구하는 이로 하여금 부처님의 뜻을 알고 수행하여 노력을 그르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 27 >

 

 

부처의 참뜻을 아는 사람은

고요한 성품에 어긋남이 없다.

 

 

知佛意者 雖念佛名 懃求往生

지불의자 수염불명 근구왕생

知彼佛境莊嚴等事 無來無去

지피불경장엄등사 무래무거

唯依心現 不離眞如 念念之中

유의심현 불리진여 염념지중

離於昏散 等於定慧 不違明靜之性

이어혼산 등어정혜 불위명정지성

則分毫不隔 感應道交 如水澄月現

즉분호불격 감응도교 여수징월견

鏡淨影分 故萬善同歸集云 佛實不來

경정영분 고만선동귀집운 불실불래

心亦不去 感應道交 唯心自現

심역불거 감응도교 유심자현

又偈云 能禮所禮性空寂

우게운 능례소례성공적

感應道交難思議 此人必不取心外

감응도교난사의 차인필불취심외

境界 而興 計倒執 招諸魔事

경계 이흥변계도집 초제마사

違背佛意也 諸修道者 切須在意

위배불의야 제수도자 절수재의

切須在意

절수재의

 

 

부처의 참뜻을 아는 사람은, 부처의 이름을 생각하며 극락왕생을 간절히 바라지만 저 부처나라의 장엄한 일들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고, 오직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서 진여를 떠나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생각 생각마다 번뇌를 떠나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하여 밝고 고요한 성품에 어긋남이 없다. 이래서 도(道)와 서로 감응하는 것이 털끝만큼도 간격이 없어서 마치 물이 맑아 달이 나타나고 거울이 깨끗해 그림자가 분명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선동귀집>에도 ‘실제로 부처는 오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이 가는 것도 아니라 도와 서로 감응하여 마음이 스스로 나타난 것이다’하였고, 또 그 게송에는 ‘예배하는 이나 예배를 받는 부처의 성품은 모두 비고 고요한데, 도와 통하여 서로 감응하는 이치는 헤아리기 어렵도다’하였다. 이런 사람은 마음 바깥의 경계에 집착함으로써 잘못된 생각에 빠져 온갖 악마의 일을 불러들여 부처의 참뜻을 어기지 않을 것이니, 수도하는 사람은 부디 명심하여라.

 

 

或有行者 堅執名相 不聞大乘唯心法門

혹유행자 견집명상 불문대승유심법문

又不識吾佛 於明淨性中 以本願力

우불식오불 어명정성중 이본원력

權現身土 幻住莊嚴

권현신토 환주장엄

攝引衆生 令其耳目所翫 達唯心無境

섭인중생 영기이목소완 달유심무경

復其本之善權  謂念佛往生

부기본지선권 각위염불왕생

將五蘊身 受無量樂 以是情執

장오온신 수무량낙 이시정집

未忘故 或見修禪者 以爲是人

미망고 혹견수선자 이위시인

不念佛求生 何時出離三界哉

불념불구생 하시출리삼계재

不知聖敎 所明心淨故 卽佛土淨之旨

부지성교 소명심정고 즉불토정지지

又聞說所修心地 空明無物

우문설소수심지 공명무물

以謂無身受樂之處 恐落空去

이위무신수락지처 공락공거

 

 

혹 어떤 수행자는 명상(名相)에 집착하여 대승이라는 마음의 법문을 듣지 못하고, 또 우리 부처가 밝고 청정한 성품 가운데서 본원력(本願力)을 세워 일부러 방편으로 육신과 국토를 나타내어 환영(幻影)인 장엄(莊嚴)으로 중생을 이끌어들여 눈과 귀를 즐겁게 함으로써 마음에는 경계가 없음을 깨닫게 하여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교묘한 방편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염불하여 왕생하면 이 몸은 한없는 즐거움을 받는다’고 한다. 이래서 마음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혹 참선 수행자를 보면 ‘이 사람은 염불로 왕생을 구하지 않으니 언제 삼계를 벗어나겠나’고 한다.

경(經)에서 밝힌 ‘마음이 깨끗하면 곧 불토(佛土)가 깨끗하다’는 뜻을 알지 못하고, 또 ‘닦아야 할 마음은 밝고 비어서 아무 것도 없다’하는 말을 들으면 ‘그렇다면 육신에는 즐거움을 누려할 곳이 없어진다’하며 공(空)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한다.

 

 

 

<28 >

 

본성만 믿고 萬行을 닦지 않으면

많은 장애가 생겨 참으로 원통 .

 

 

不知空本無空 唯是如來圓覺明淨之心

부지공본무공 유시여래원각명정지심

同虛空遍法界 該衆生心 無間斷處

동허공변법계 해중생심 무간단처

一切衆生 無明分別之心

일체중생 무명분별지심

當處虛明 與十方諸佛 同一智海

당처허명 여시방제불 동일지해

同一法性  爲衆生 終日其中行履

동일법성 지위중생 종일기중행리

而自背負恩德耳 不知斯旨者

이자배부은덕이 부지사지자

以執吝貪着之心 求佛境界

이집인탐착지심 구불경계

如將方木 逗圓孔也

여장방목 두원공야

 

 

공(空)이라 하지만 본래 공이란 것도 없다. 단지 여래의 밝고 청정하게 깨달은 마음이 허공처럼 법계에 가득하여 끊임없이 중생심을 포용하고 있을 뿐이다. 일체 중생의 무명분별심(無明分別心)도 그 자체는 비고 밝아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와 동일한 지혜의 바다이며, 동일한 법성이다. 다만 중생들이 종일 그 가운데서 살면서도 스스로 그 은덕을 저버리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집착하는 마음으로 부처의 세계를 구하는 것이니, 마치 모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과 같다.

 

 

或有行者 稟性浮僞 聞此心法

혹유행자 품성부위 문차심법

信樂修習 然得小爲足 不可決擇

신락수습 연득소위족 불가결택

知見未圓 全恃本性 不修萬行 亦

지견미원 전시본성 불수만행 역

不求淨土 見求生者 而生輕慢

불구정토 견구생자 이생경만

此上二人 於佛法中 不善用心

차상이인 어불법중 불선용심

多有滯障 可悲可痛也 若是最下根人

다유체장 가비가통야 약시최하근인

盲無慧目 而知稱佛號則歎其希有

맹무혜목 이지칭불호즉탄기희유

豈以不知佛意修行 爲過哉

기이부지불의수행 위과재

 

 

어떤 수행자는 성질이 들뜨고 허황된 사람도 있어, 심법에 대해 듣고는 그대로 믿고 수행하지마는 작은 것에 만족하여 더 큰 세계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러니 지견(知見)이 원만하지 못하여 단지 자기 본성만 믿고 만행(萬行)을 닦지 않으며, 또한 정토(淨土)를 구하지 않고 왕생을 구하는 사람을 보면 업신여기는 마음을 낸다. 이런 두 종류의 사람은 불법(佛法) 안에서 마음을 쓸 줄 모르니 많은 장애가 있게 되니 참으로 원통한 일이다. 만약 아주 낮은 근기의 사람으로서 지혜의 눈은 없다 해도 부처의 명호를 부르며 희유(希有)함을 찬탄할 줄 안다면 이 어찌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수행한다 하여 허물할 수 있겠는가.

 

 

或有行者 受氣剛大 情緣最深 聞此心法

혹유행자 수기강대 정연최심 문차심법

不知措意之處 然能觀彼佛白毫光明

부지조의지처 연능관피불백호광명

或觀梵字 或誦經念佛

혹관범자 혹송경념불

如是行門 專精不亂 能調妄想

여시행문 전정불란 능조망상

不被惑障 梵行成建 此人初從事行

불피혹장 범행성건 차인초종사행

感應道交 終入唯心三昧故

감응교도 종입유심삼매고

亦是善知佛意者也

역시선지불의자야

 

 

또 어떤 수행자는 기질이 굳고 크며 감정도 깊다. 이런 사람이 심법을 들으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나 일단 부처의 백호광(白毫光)을 관하거나 범자(梵字)를 관하거나 경전을 외거나 염불을 하라 하면 이런 수행에는 산란함이 없이 정신을 집중시킨다. 그래서 망상을 다스리며 번뇌의 장애를 받지 않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이룬다.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도(道)와 서로 감응하여 끝내는 마음의 삼매에 들어가기 때문에 부처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 29 >

 

 

부처의 이름을 생각하는자 반드시 삼매를 이룬다 .

 

 

飛錫和尙高聲念佛三昧寶王論云 비석화상고성염불삼매보왕론운 浴大海者 己用於百川 念佛名者 욕대해자 기용어백천 염불명자 必成於三昧 亦猶淸珠下於濁水 필성어삼매 역유청주하어탁수 濁水不得不淸 念佛投於亂心 탁수부득불청 염불투어난심 亂心不得不佛 旣契之後 心佛雙亡 난심부득불불 기계지후 심불상망 雙亡定也 雙照慧也 定慧旣均 상망정야 쌍조혜야 정혜기균 亦何心而不佛 何佛而不心 心佛旣然 역하심이불불 하불이불심 심불기연 則萬境萬緣 無非三昧 즉만경만연 무비삼매 誰復患之於起心動念 高聲稱佛哉 수부환지어기심동념 고성칭불재

 

 

비석화상의 <고성염불삼매보왕론>에 ‘큰 바다에서 목욕하는 이는 이미 온갖 시냇물을 쓰는 것이고, 부처의 이름을 생각하는 자는 반드시 삼매를 이룬다. 그것은 마치 물을 맑히는 진주를 흙탕 물 속에 넣으면 흐린 물이 맑아지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염불을 산란한 마음에 던지면 산란한 마음이 부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이렇게 합해지면 마음과 부처를 모두 잊게 된다. 모두 잊는 것은 선정(禪定)이요, 모두 비추는 것은 지혜이다. 선정과 지혜가 고르면 어떤 마음이 부처가 아니겠으며, 어느 부처가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부처가 그러하다면 온갖 대상과 온갖 반연이 삼매 아님이 없을 것인데 누가 다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고성으로 부처를 부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文殊所說般若經中 明念佛 문수소설반야경중 명념불 得一行三昧者 亦同此意也 不了此意者 득일행삼매자 역동차의야 불료차의자 却將見愛之情 觀彼佛相 念彼佛名 각장견애지정 관피불상 염피불명 日久歲深 多爲魔魅 所攝 顚狂浪走 일구세심 다위마매 소섭 전광낭주 虛勞功夫 傾覆一生 허로공부 경복일생 近世頻頻見聞如此之人 皆由不知 근세빈빈견문여차지인 개유부지 十界依正 善惡因果 唯心所作 십계의정 선악인과 유심소작 無體可得故也 무체가득고야

 

 

문수보살이 말한 <반야경>에 ‘염불해서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얻는다’ 한 것도 바로 이런 뜻이다. 이런 뜻을 모르면 도리어 견애(見愛)의 정을 가져 부처의 형상을 관하고, 부처의 이름을 생각하며 오랜 세월을 보내면 흔히 마귀에 끌려서 미치광이 짓이나 하며 공부가 헛되어 일생을 망친다. 요즘 이런 사람을 자주 보는데 그것은 다 시방세계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와 선악의 인과가 오직 마음이 짓는 것이라 그 본체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或於坐中 見天人菩薩像 혹어좌중 견천인보살상 或如來相好具足 或端正男女 혹여래상호구족 혹단정남녀 及諸恐怖之相 說諸種種幻惑之事 급제공포지상 설제종종환혹지사 或雖非 혹수비 外現之相 於自心中 隨順魔事 惡覺情見 외현지상 어자심중 수순마사 악각정견 不可具陳 當此之時 昏迷不省 불가구진 당차지시 혼미불성 無慧自救 橫罹魔網 良可傷哉 무혜자구 횡리마망 양가상재 또 혹 좌선하는 동안에 천인(天人)이나 보살상, 혹은 여래의 원만한 상호(相好)나 단정한 남녀나 혹은 온갖 무서운 형상이나 갖가지 현혹시키는 일을 말하는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밖으로 나타나는 형상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 속에 악마의 일을 그대로 따르서 나쁘게 깨달은 그릇된 소견 따위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런 경우를 만나면 정신이 혼미해서 살필 수가 없고 자기를 구원할 지혜가 없어서 악마의 그물에 걸리고 마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30 >

 

 

부처의 이름을 생각하는자

반드시 삼매를 이룬다 .

 

 

飛錫和尙高聲念佛三昧寶王論云

비석화상고성염불삼매보왕론운

浴大海者 己用於百川 念佛名者

욕대해자 기용어백천 염불명자

必成於三昧 亦猶淸珠下於濁水

필성어삼매 역유청주하어탁수

濁水不得不淸 念佛投於亂心

탁수부득불청 염불투어난심

亂心不得不佛 旣契之後 心佛雙亡

난심부득불불 기계지후 심불상망

雙亡定也 雙照慧也 定慧旣均

상망정야 쌍조혜야 정혜기균

亦何心而不佛 何佛而不心 心佛旣然

역하심이불불 하불이불심 심불기연

則萬境萬緣 無非三昧

즉만경만연 무비삼매

誰復患之於起心動念 高聲稱佛哉

수부환지어기심동념 고성칭불재

 

 

비석화상의 <고성염불삼매보왕론>에 ‘큰 바다에서 목욕하는 이는 이미 온갖 시냇물을 쓰는 것이고, 부처의 이름을 생각하는 자는 반드시 삼매를 이룬다. 그것은 마치 물을 맑히는 진주를 흙탕 물 속에 넣으면 흐린 물이 맑아지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염불을 산란한 마음에 던지면 산란한 마음이 부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이렇게 합해지면 마음과 부처를 모두 잊게 된다. 모두 잊는 것은 선정(禪定)이요, 모두 비추는 것은 지혜이다. 선정과 지혜가 고르면 어떤 마음이 부처가 아니겠으며, 어느 부처가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부처가 그러하다면 온갖 대상과 온갖 반연이 삼매 아님이 없을 것인데 누가 다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고성으로 부처를 부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文殊所說般若經中 明念佛

문수소설반야경중 명념불

得一行三昧者 亦同此意也 不了此意者

득일행삼매자 역동차의야 불료차의자

却將見愛之情 觀彼佛相 念彼佛名

각장견애지정 관피불상 염피불명

日久歲深 多爲魔魅 所攝 顚狂浪走

일구세심 다위마매 소섭 전광낭주

虛勞功夫 傾覆一生

허로공부 경복일생

近世頻頻見聞如此之人 皆由不知

근세빈빈견문여차지인 개유부지

十界依正 善惡因果 唯心所作

십계의정 선악인과 유심소작

無體可得故也

무체가득고야

 

 

문수보살이 말한 <반야경>에 ‘염불해서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얻는다’ 한 것도 바로 이런 뜻이다. 이런 뜻을 모르면 도리어 견애(見愛)의 정을 가져 부처의 형상을 관하고, 부처의 이름을 생각하며 오랜 세월을 보내면 흔히 마귀에 끌려서 미치광이 짓이나 하며 공부가 헛되어 일생을 망친다. 요즘 이런 사람을 자주 보는데 그것은 다 시방세계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와 선악의 인과가 오직 마음이 짓는 것이라 그 본체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或於坐中 見天人菩薩像

혹어좌중 견천인보살상

或如來相好具足 或端正男女

혹여래상호구족 혹단정남녀

及諸恐怖之相 說諸種種幻惑之事

급제공포지상 설제종종환혹지사

或雖非

혹수비

外現之相 於自心中 隨順魔事 惡覺情見

외현지상 어자심중 수순마사 악각정견

不可具陳 當此之時 昏迷不省

불가구진 당차지시 혼미불성

無慧自救 橫罹魔網 良可傷哉

무혜자구 횡리마망 양가상재

 

 

또 혹 좌선하는 동안에 천인(天人)이나 보살상, 혹은 여래의 원만한 상호(相好)나 단정한 남녀나 혹은 온갖 무서운 형상이나 갖가지 현혹시키는 일을 말하는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밖으로 나타나는 형상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 속에 악마의 일을 그대로 따르서 나쁘게 깨달은 그릇된 소견 따위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런 경우를 만나면 정신이 혼미해서 살필 수가 없고 자기를 구원할 지혜가 없어서 악마의 그물에 걸리고 마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31>

 

 

“법륜 굴려 중생 구제

모든 부처의 은혜 갚자” .

 

 

同生淨土 愚智行相

동생정토 우지행상

天地懸隔 何如現今學大乘唯心法門

천지현격 하여현금학대승유심법문

專於定慧 免墮凡小心外

전어정혜 면타범소심외

取色分齊之見也

취색분재지견야

 

 

비록 다같이 정토에 난다고 하나, 우자와 지자의 수행은 천지차이니, 이제라도 대승의 유심법문을 배우고 선정과 지혜에 힘써서 범부와 소승들이 마음 밖의 물질이나 분별을 취하는 소견에 떨어지는 것을 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如是則雖曰同生淨土 愚智行相

여시즉수왈동생정토 우지행상

天地懸隔 何如現今學大乘唯心法門

천지현격 하여현금학대승유심법문

專於定慧 免墮凡小心外取色

전어정혜 면타범소심외취색

分齊之見也 若是祖宗門下 以心傳心

분재지견야 약시조종문하 이심전심

密意指授之處 不在此限 琪和尙云

밀의지수지처 부재차한 기화상운

能悟祖道 發揮般若者

능오조도 발휘반야자

末季未之有也 故此勸修文中

말계미지유야 고차권수문중

皆依大乘經論之義 爲明證

개의대승경론지의 위명증

略辨現傳門信解發明之由致

약변현전문신해발명지유치

竝出生入死 淨穢往來之得失

병출생입사 정예왕래지득실

 

 

그러므로 다함께 정토에 난다고는 하나, 어리석은 이와 지혜로운 이의 수행하는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인데 어찌 대승의 유심법문을 배워 선정과 지혜를 닦아 범부와 소승들의 마음 밖의 물질적 차별을 취하는 것과 같겠는가. 조종(祖宗)의 문하에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비밀한 뜻을 가르쳐주는 곳은 이 차한(此限)에는 없다. 그래서 기(琪)화상은 ‘조사의 도를 능히 깨달아 반야를 발휘하는 이는 이 말세에는 없다’하였다. 그러므로 이 권수문에서는 모두 대승 경론의 이치에 따라 밝게 증명하고, 현재에 전하는 법을 믿고 알아 밝힌 이치와 또 삶으로 나오고 죽음으로 들어가고, 정토와 예토로 가고 오는 이익과 손실을 간략히 분별하였다.

 

 

欲令入社修心之人 知其本末

욕령입사수심지인 지기본말

息諸口諍 辨其權實

식제구쟁 변기권실

不枉用功於大乘法門正修行路

불왕용공어대승법문정수행로

同結正因

동결정인

同修定慧 同修行願 同生佛地

동수정혜 동수행원 동생불지

同證菩提 如是一切 悉皆同學

동증보리 여시일체 실개동학

窮未來際 自在遊戱十方世界

궁미래제 자재유희시방세계

互爲主伴 共相助成 轉政法輪

호위주반 공상조성 전정법륜

廣度群品 以報諸佛莫大之恩

광도군품 이보제불막대지은

仰惟佛眼 證此微誠 普爲法界群迷

앙유불안 증차미성 보위법계군미

發此同修定慧之願

발차동수정혜지원

 

 

그리하여 이 결사(結社)에 들어와 마음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본말을 알게 함으로써 모든 논쟁을 쉬고 그 방편과 실제를 분별하여 대승법문을 바로 수행하는 길에서 그릇되게 공부하지 않아 바른 인(因)을 같이 맺고 선정과 지혜를 같이 닦으며, 행원(行願)을 같이 닦으며, 부처의 땅에 같이 나고 도를 같이 깨닫는 등, 이런 일들을 모두 같이 배워 영원토록 시방세계에 자재로이 노닐며 서로 주인과 손이 되어 서로 도와서 공을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려 중생을 두루 구제하여 모든 부처의 막대한 은혜를 갚으려 하는 것이다.

우러러 바라나니 부처의 눈으로 이 보잘것없는 정성을 증명해주고, 이 법계의 무지한 중생들을 위하여 이러한 선정과 지혜를 같이 닦으려는 원을 내게 하소서.

 

 

 

 

< 32 >

 

 

삼학 의지하지 않고 성불 불가능 사람만이 보리로 나아갈 수 있다.

 

 

嗚呼 衆生之所以往來者 六途也 오호 중생지소이왕래자 육도야 鬼神沈幽 愁之苦 鳥獸懷  之悲 귀신침유 수지고 조수회휼월지비 修羅方瞋 諸天正樂 수라방진 제천정락 可以整心慮趣菩提者 가이정심려취보리자 唯人道能爲耳 人而不爲 吾未 유인도능위이 인이불위 오미 如之何也矣 知訥囊閱大乘 여지하야의 지눌낭열대승 歷觀了義乘經論所說 無有一法 역관료의승경론소설 무유일법 不歸三學之門 無有一佛 不藉三學而 불귀삼학지문 무유일불 부자삼학이 成道也 성도야

 

 

아아, 중생들이 오가는 곳은 육도(六道)이다. 귀신은 어두운 곳에서 근심하는 괴로움이 있고, 새와 짐승은 잡힐까봐 날고 도망가는 슬픔이 있고, 아수라는 성을 내고, 제천(諸天)은 한창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각을 정돈하여 보리로 나아갈 이는 오직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이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난들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저번에 대승경전을 열람하면서 ‘요의승’의 경론에서 말한 것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한 법도 삼학(三學)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었고, 어떠한 부처도 삼학에 의지하지 않고는 성불하는 법이 없었다.

 

 

楞嚴經云 過去諸如來 斯門已成就 능엄경운 과거제여래 사문이성취 現在諸菩薩 今各入圓明 未來修學人 현재제보살 금각입원명 미래수학인 當依如是法 是故我輩 당의여시법 시고아배 今結佳期 預伸密誓 금결가기 예신밀서 當修梵行則仰慕眞風 不生自屈 당수범행즉앙모진풍 불생자굴 以戒定慧 資薰身心 損之又損 이계정혜 자훈신심 손지우손 水邊林下 長養聖胎 看月色而逍遙 수변임하 장양성태 간월색이소요 聽川溪而自在 縱橫放曠 逐處消時 청천계이자재 종횡방광 축처소시 猶縱浪之虛舟 若凌空之逸  現形容於 유종랑지허주 약능공지일핵 현형용어  宇 潛幽靈於法界 應機有感 환우 잠유영어법계 응기유감 適然無準矣 予之所慕 意在斯焉 적연무준의 여지소모 의재사언 若修道人 捨名入山 不修此行 약수도인 사명입산 불수차행 詐現威儀   사현위의 惑信心檀越則不如求名利富貴 광혹신심단월즉불여구명리부귀 貪着酒色 身心荒迷 虛過一生 탐착주색 신심황미 허과일생

 

 

<능엄경>에도 ‘과거 모든 부처님도 이 문에서 성취하였고, 현재의 모든 보살도 지금 원만하고 밝은 데로 들었으며, 미래의 수학하는 사람도 이 법을 의지한다’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아름다운 기약을 맺고, 미리 비밀한 서약을 펴서 깨끗한 행을 닦으면서 참되고 바른 유풍(遺風)을 우러러 사모하여 스스로 물러서지 않고, 계율과 선정과 지혜로써 몸과 마음을 닦아 번뇌를 덜고 또 덜어서 물가나 숲 속에서 성인이 될 씨앗을 기르면서 달빛을 보며 소요하고, 냇물 소리를 들으며 자재하여 종횡으로 걸림이 없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마치 물결 따라 가는 빈배와 같고 허공을 나는 새와 같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몸은 우주에 나타내되 그윽한 마음은 법계에 잠기게 하고, 얽매인 기준이 없이 인연 따라 감응할 것이니, 내가 바라는 뜻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일 수도하는 사람이 명리를 버리고 입산해서 이러한 수행을 하지 않고 거짓으로 형상만 나타내어 신심 있는 신도를 속이고 산다면 그것은 차라리 명리와 부귀를 바라고 주색에 빠져서 신심이 혼미하여 헛되이 일생을 보내는 것만도 못하다.

 

< 33 >

<34 >

 

한 생각 깨끗한 마음 바로 도량

수많은 칠보탑 공덕보다 수승 .

 

文殊偈云 一念淨心是道場

문수게운 일념정심시도량

勝造河沙七寶塔 寶塔畢竟碎爲塵

승조하사칠보탑 보탑필경쇄위진

一念淨心成正覺 故知少時攝念無漏

일념정심성정각 고지소시섭념무루

之因 雖三災彌綸而行業

지인 수삼재미륜이행업

湛然者也 非特修心之士

담연자야 비특수심지사

成其益也 以此功德

성기익야 이차공덕

上祝聖壽萬歲 令壽千秋

상축성수만세 영수천추

天下泰平 法輪常轉 三世師尊父母

천하태평 법륜상전 삼세사존부모

十方施主 普及法界生亡

시방시주 보급법계생망

同承法雨之所霑

동승법우지소점

 

또 <문수게>에 ‘한 생각의 깨끗한 마음이 바로 도량이다. 이는 강의 모래처럼 많은 칠보탑을 만드는 공덕보다 훌륭하다. 보배탑은 결국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의 깨끗한 마음은 정각(正覺)을 이룬다’ 하였다. 그러므로 잠깐이라도 번뇌가 없는 깨끗한 생각을 가지는 그 인연은 비록 삼재가 휩쓸더라도 수행의 업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특히 마음 닦는 선비만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공덕으로 위로는 성수(聖壽)만세하고, 태자는 천세하고, 천하가 태평하여 항상 법륜이 굴러가고 삼세의 스승과 부모와 시방의 시주와 널리 법계의 산 자와 죽은 자가 한 가지 진리의 비에 젖게 함이다.

 

永脫三途之苦惱 超入大光明藏

영탈삼도지고뇌 초입대광명장

遊戱三昧性海 窮未來際 開發蒙昧

유희삼매성해 궁미래제 개발몽매

燈燈相續 明明不盡則其爲功德

등등상속 명명부진즉기위공덕

不亦與法性 相終始乎

불역여법성 상종시호

庶幾樂善君子

서기낙선군자

留神思察焉 時明昌元年庚戌季春

유신사찰언 시명창원년경술계춘

公山隱居牧牛子 謹誌

공산은거목우자 근지

 

그리하여 길이 삼도의 고뇌를 벗어나 대광명에 뛰어들며, 삼매의 바다에 노닐면서 미래가 다하도록 몽매한 중생을 깨우쳐서 불법의 등불이 이어져 광명과 광명이 다하지 않으면 그 공덕이 법성(法性)과 함께 영원하지 않겠는가. 바라나니 선(善)을 즐기는 군자는 정신을 차리고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명창 원년 경술년(1190) 늦 봄,

공산에 숨어사는 목우자 지눌은 삼가 쓴다.

至承安五年 庚申 自公山

지승안오년 경신 자공산

移社於江南曹溪山 以隣有定慧寺

이사어강남조계산 이인유정혜사

名稱 混同故 受朝旨 改定慧社

명칭 혼동고 수조지 개정혜사

爲修禪社 然勸修文 旣流布故

위수선사 연권수문 기유포고

仍其舊名 彫板印施耳

잉기구명 조판인시이

 

승안(承安) 5년 경신(1200년)에 이르러 이 결사를 공산에서 강남 조계산으로 옮겼더니, 그 이웃에 정혜사(定慧寺)가 있었다. 이름이 혼동되었기 때문에 나라의 명을 받아 정혜사(定慧社)를 수선사로 바꾸었다. 그러나 권수문(勸修文)이 이미 세상에 유포되었기 때문에 옛이름을 그대로 판에 새겨 인쇄하여 널리 반포한다.

[출처] https://blog.naver.com/bhjang3/140037577081

[출처] 지눌(知訥) 보조국사(普照國師) ◈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작성자 불교기초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