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종에서 바라보는 깨달음의 유형과 방식
석길암/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I. 시점(視點) 그리고 시점(時點)
II. ‘佛華嚴’, 그리고 믿음
III. 화엄가들이 말하는 깨달음, 그 유형과
방식
IV. 맺음말
[요약문]
본 논문의 주제는 화엄사상에서 생각하는 깨달음의 유형과 방식은 무엇일까 하는 점
이다.
첫 번째,『화엄경』의 視點은 다른 경전들의 視點과 다르다.
『화엄경』에 있어서 중생이 중생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 중생이 번뇌를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본질인 지혜가 번뇌에 의해 일시 가려져 있는 상태를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에 불과하다. 흔히 말하는 ‘깨달음’은 번뇌를 토대[依持]로 하는 중생의 상태
가 지혜를 토대로 하는 붓다의 상태로 근본적인 전환을 이룸을 말한다. 그런데 화엄의
관점에서 중생이 붓다로 전환한다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으며, ‘이미’ 붓다인 중생이 붓
다임을 자각하고 붓다로서의 상태를 현실에 구체화시켜 현현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
리고 그것을 화엄에서는 ‘成佛’이라고 표현한다.
두 번째, 그렇다면 화엄사상이 그렇게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근본적으
로『화엄경』의 구조에서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화엄경은 붓다의 ‘始成正覺’의 세계
자체를 설한다. 이때의 ‘始’는 붓다가 처음 깨달은 그 때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無始無終
의 始’라는 의미이다. 시간적 점차로서의 구세(九世)의 바깥에 ‘一念’을 설정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의미이다. 그 일념은 구세의 바깥에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구세의 모두에
대응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화엄경혹은 화엄이 말하는 時點은 다른 경전이
말하는 時點과 차별성을 지닌다.
본 논문에서는 이 화엄이 가지는 視點과 時點의 다름을, 화엄경혹은 그것을 주석하
는 화엄가들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검토하였다.
I. 시점(視點) 그리고 시점(時點)
화엄종에서의 깨달음을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첫 번째로 부딪친 문
제는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화엄’에 ‘깨달음’이 있을까? 그리고 ‘화엄’에서 ‘깨달음’을 말한다는 것이
중요할까? 그리고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태가
어디에 두어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다시 화엄에서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의 생각은 화엄경의 視點이 다른 경전들의 視點과 다르다는 점이다.
‘화엄에 깨달음이 있을까?’ 그리고 ‘화엄에서 깨달음을 말한다는 것이 중요
할까?’ 단적으로 표현한다면,『화엄경』에는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번뇌로 가득 차 있는 번뇌의 덩어리를 토대로 하는 존재로서의 중생은 존재하
지 않는다.『화엄경』에서 말하는 중생은 번뇌의 덩어리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것
이 아니라, 지혜의 덩어리를 토대로 하고 있는 중생이며, 그 자체로서 지혜덩
어리이기 때문이다.『화엄경』에 있어서 중생이 중생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 중
생이 번뇌를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본질인 지혜가 번뇌에 의해 일시
가려져 있는 상태를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깨달음’은 번뇌를 토대[依持]로 하는 중생의 상태가 지혜를 토대로 하는 붓다
의 상태로 근본적인 전환을 이룸을 말한다. 그런데 화엄의 관점에서 중생이 붓
다로 전환한다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으며, ‘이미’ 붓다인 중생이 붓다임을 자
각하고 붓다로서의 상태를 현실에 구체화시켜 현현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
리고 그것을 화엄에서는 ‘成佛’이라고 표현한다.
成佛, ‘붓다를 이루는 것’이니 굳이 말하자면 ‘깨달음’일 수도 있겠다. ‘成正
覺’이란 말 역시 ‘정각을 성취한다’는 의미이지만, 화엄가들은 이 단어 역시
‘成佛’로 이해한다. 그리고 화엄가들이 ‘成佛’이라고 할 때는 말 그대로 ‘부처를
이룬다/성취한다’는 의미이며, 그 ‘이룸’ 혹은 ‘부처임을 드러냄’에는 上下와
頓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룸’은 말 그대로 ‘부처였음’ 혹은 ‘부처
임’을 드러냄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 ‘이룸’의 전후에 토대[依持]의 차별은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현실의 중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
생을 바라보는 視點이 중생의 그것이 아니라 붓다의 그것이라는 점은 중요하
다. 붓다의 세계 안에, 깨달음의 세계 안에 중생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두 번째는,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근본
적으로『화엄경』의 구조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화엄경의 구조에서 전제되
어 있는 것이다.『화엄경』은 붓다의 ‘始成正覺’에 기반을 둔다. 아니 ‘始成正覺’
의 세계 자체를 설한다. 이때의 ‘始’는 붓다가 처음 깨달은 그 때를 의미하는 것
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無始無終의 始’라고 말해야 한다. 시간적 점차로서의
삼세(三世) 나아가 구세(九世)의 바깥에 ‘一念’을 설정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의
미이다. 그 일념은 구세의 바깥에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구세의 모두에 대응하
는 시간이기도 하다. 곧 ‘깨달음의 세계를 말하는 화엄, 화엄에서 말하는 깨달
음의 세계’는 중생의 근기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되 동시에 중생의 근기를 넘
어 진여의 깨달음 세계에 부합하는 어떤 것이라는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이
점에서『화엄경』혹은 화엄이 말하는 時點은 다른 경전이 말하는 時點과 차별
성을 지닌다.
본 논고에서는 이 화엄이 가지는 視點과 時點의 간격을『화엄경』혹은 그것
을 주석하는 화엄가들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서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화엄이 말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정의를 드러내보
고자 한다. 다만『화엄경』과 화엄가 전체의 견지를 포함해서 논의하는 것은 지
나치게 범주가 넓어지게 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화엄경』의 구조에 대한
논자의 이해해온 관점을 먼저 제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화엄의 깨달
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華嚴一乘成佛妙義의 5門 중의 제1
‘出成佛種’와 제2 ‘辨定得人’에서 見登이 정리하고 있는 바를 따라가면서 논의
하는 방식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II. ‘佛華嚴’, 그리고 믿음
1. ‘初發心時便成正覺’의 해석
『화엄경』제3회 법회의 「범행품」에는 유명한 ‘初發心時, 便成正覺’1)의 구절
이 존재한다. 이 구절에 대해 화엄가들과 여타의 주석가들은 확연히 다른 해석
을 가한다.
1) 大方廣佛華嚴經「梵行品」, T9, p.448c. “初發心時, 便成正覺, 知一切法真實之性, 具足慧身, 不由他悟.”
정영사 혜원은 “초발심은 온전히 증득하지 못하였음이다. 때문에 因 가운데
果를 설함이 된다.”2)고 말하고, 智顗가 설하고 灌頂이 기록한 摩訶止觀에서는
“다음의 初住에 들어감은, 무명을 깨뜨리고 佛性을 봄이다.『화엄경』에 ‘처음 발
심하였을 때 곧 정각을 성취한다. 진실한 성품은 다른 이의 깨달음에 말미암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 뜻이다.”3)고 하였다. 이 부분은 六卽을 설하는 부분에
서 발심주를 分眞卽에 분류하고 있는 것4)에서 그 의미가 分證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법상종의 基는 “이 경 가운데서 證發心에 의거하니, 초지에서 보리
를 증득함을 논하여 해석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 ‘초발심에서 곧 正覺에 오
른다’는 것은 種性發心으로 보리의 因이기 때문이다.”5)고 말한다.
2) 大乘義章, T44, p.703a. “初發心者一向未證, 是故名為因中說果.”
3) 摩訶止觀, T46, p.99a. “次入初住, 破無明見佛性. 華嚴云, ‘初發心時便成正覺, 真實之性不由他悟’
即此意也.”
4) 摩訶止觀, T46, p.10c. “分真即者, 因相似觀力入銅輪位. 初破無明見佛性, 開寶藏顯真如, 名發心住,
乃至等覺. 無明微薄智慧轉著, 如從初日至十四日, 月光垂圓闇垂盡.”
5) 妙法蓮華經玄贊, T34, p.786. “或此經中據證發心, 論解證得初地菩提, 故其初發心即登正覺者,
種性發心菩提因故.”
因 가운데의 果를 설한다는 혜원, 分眞卽에 해당한다는 지의, 보리의 因이라
고 설명하는 법상종 基의 설명 등 화엄가가 아닌 이들의 초발심주에 대한 설명
은 모두 보리도에 들어선 초입이라는 부분에 초점이 있다.
그러나 화엄가들은 이들과는 좀 다른 관점의 해석을 보여준다.
智儼은 “[문]이 가운데서 처음으로 십주 초발심의 因을 밝혔는데, 어째서 이
를 果行이라고 말하는가? [답]이것은 자체의 참된 발심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후제에 계합하여 體를 포함하되 바깥이 없음이다. 또 이 자체의 발심 가운데의
果는 희론이 없는 行일 따름이다.”6)라고 말한다. 지엄의 설명은 질문에서 명백
히 드러난다. 십주 초발심의 因이 곧 果行인 이유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발심
의 佛果가 희론이 없는 무분별의 行이라고 설명하는 것에서도, 이후의 행이 果
行이며 因行 곧 修行이 아님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 지엄이 보여주는 관점의
특징이다.
6) 搜玄記, T35, p.35b. “又問. 此中始明十住初發心因, 何故乃言是果行也? 答. 此明自體真發心故,
契於後際體包無外也. 又是自體發中果, 無戲論行耳.”
원효는 金剛三昧經論의 「입실제품」에서 “네 번째의 여러 보살이라는 것
은 地前菩薩이니, 만약 법성이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님을 아는 자는 처음 발심할
때 곧 정각을 이룬다. 그러므로 말을 끊고 곧바로 보리를 얻으니, 발심에 즉하
여 법성을 알 때, 이 때 무상보리를 바로 얻는다. 이 뜻은 화엄경의 「발심공덕
품」에 있다.”7)고 해석한다. 원효 역시 지엄과 마찬가지로 초발심시변성정각
을 무상보리의 증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을 취한다.
7) 金剛三昧經論, T34, p.983a. “第四中言諸菩薩者, 地前菩薩, 若知法性不有不無者, 初發心時便成正覺.
故切言即得菩提, 謂即發心知法性時, 是時即得無上菩提. 是義出華嚴經發心功德品也.”
이처럼 화엄가와 화엄가가 아닌 다른 종파의 주석가 사이에는 ‘초발심시변
성정각’의 한 구절 해석에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8)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차
이는 아니며, 경의 구조 및‘초발심시변성정각’에 앞서는 화엄경의 ‘믿음’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차이가 드러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8) 이상의 차이에 대한 언급은 이미 김천학(2009), 「동아시아 화엄학에서의 성불론」,한국사상사학
32, 86-88에 지적되어 있다. 김천학은 해석관점에 차이가 드러나는 이유로 “화엄사가 아닌 경우는
자신의 종파와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방향으로 경문을 해석하는데 반해, 화엄사는 경문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언표나 분별과는 먼 경지임을 명언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2. 믿음, 그리고 ‘佛華嚴’9)
9) 이 절의 앞부분 곧 화엄경 제2회 법회의 구조를 설명한 부분은 「대승불교의 믿음, 출발점인가
도달점인가」(오강남 외, 믿음, 디딤돌인가 걸림돌인가, 2012)의 ‘믿음의 대상과 믿음을 성취하
는 양상’의 일부를 논지에 맞게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화엄경』에서 믿음의 대상과 성취의 양상을 초점으로 삼는 부분은 두 번째
법회이다. 일명 첫 번째의 보광명전 법회이다. 이 법회에서는 문수사리보살이
여래의 삼업 및 믿음의 단계에 대한 교법을 설한다. 모두 여섯 품이 이 법회에
서 설해지게 되는데, 부처님의 신・구・의 삼업을 설하는 「여래명호품」「사제품」
「광명각품」의 셋과 해(解)・행(行)・덕(德)을 설하는 「보살문명품」「정행품」
「현수품」의 셋으로 구성된다. 이 중 앞의 셋이 믿음의 대상이 되고, 뒤의 셋은
믿음을 성취하는 양상과 믿음을 성취한 공덕을 주제로 한다.
두 번째 법회의 앞 세 품은 ‘부처를 보고, 듣고, 느낀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
고, 마지막「현수품」의 해인정은 보고 들음에 의해서 성취된 믿음이 바탕이 되
어서 방편을 증득한다는 것과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앞의 세 품 곧 「여래명호품」「사성제품」「광명각품」은 부처를 보
고 듣는다는 것에 해당하는, 다시 말하면 부처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이며, 부
처의 가르침을 어떻게 들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설정된 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보고 듣는다는 것과 직접 관련된 「명호품」과 「사성제품」
은 부처님의 명호의 한량없음과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성제 각각에 해당하는
명칭의 한량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의 명호가 한량이 없다는 사바세계
의 중생들이 저마다 제각각의 입장에서 여래를 알고 보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설한다.10) 이것은 가르침을 대표하는 사성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10) 大方廣佛華嚴經「如來名號品」, 대정장10, p.60a, “諸佛子! 如娑婆世界, 如是東方百千億無數無量,
無邊無等, 不可數, 不可稱, 不可思, 不可量, 不可說, 盡法界, 虛空界, 諸世界中, 如來名號, 種種不同,
南西北方四維上下,亦復如是. 如世尊昔為菩薩時, 以種種談論, 種種語言, 種種音聲, 種種業, 種種報,
種種處, 種種方便, 種種根, 種種信解, 種種地位而得成熟, 亦令眾生如是知見而為說法.”
그리고 그렇게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통해서 부처
님의 한량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느꼈을 때, 중생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라
는 의심을 내게 된다. 그 의심을 집약하여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보살문명품」이
다. 이 품의 의심이 해소되어가면서 보살은 그 행업을 닦게 되는데 그것이 바
로 「정행품」이다. 부처님을 보고 듣고 느꼈을 때[앞의 세 품], 의심이 일어나고
그 의심을 해소하는 과정에서[보살문명품] 삼업을 청정하게 닦게 되면서[정
행품], 그 결과로 신심을 원하게 성취하게 된다[현수품].
여기에서 믿음의 출발점은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見佛
과 聞經]이라면, 믿음을 증장시키는 것은 의심하고 의심을 해소하는 과정[解]
에 있으며, 그 믿음의 성취는 가지가지 방편삼매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
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믿음과 이해가 함께 한다는 것이다. 물론 믿음이 앞
서고 이해가 뒤따르는 형태의 교설이긴 하지만, 동아시아의 불교가들은 이것
을 일반적으로 양자가 겸행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례로
“믿음은 있으나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무명(無明)만 증장(增長)하고, 이해는 있
으나 참다운 믿음이 없으면 삿된 견해만 증장한다. 그러므로 알라. 믿음과 이
해가 서로 겸해야만 도(道)에 들어감을 빨리 얻는다.”11)고 진심직설은 강조
하고 있다.
11) 보조사상연구원 編, 진심직설, 보조전서, 불일출판사, 1989, p.49, “信而不解 增長無明
解而不信 增長邪見 故知 信解相兼 得入道疾.”
여기에서 화엄가들이 화엄경 제2회 법회의 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은 명료
하다. 십주 이후의 법회에서 십지법회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보살도를 보살
의 수행도가 아니라 보살의 실천도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보살의 수행도로
받아들인다면, 믿음의 완성[信滿]으로부터 드러나는 初發心住는 수행의 출발
점이 된다. 하지만 보살의 실천도로 받아들인다면, 믿음의 완성으로부터 드러
나는 초발심주는 실천의 출발점 곧 行道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화엄
가들과 비화엄가들의 사이에 나타나게 되는 ‘초발심시변성정각’에 대한 해석
시각의 근본적인 차이를 낳게 되는 원인이다.
그렇다면 왜 화엄가들은 비화엄가들과는 다른 해석을 하게 된 것일까? 논자
는 그 근원이 ‘佛華嚴’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화엄경』은 잘 알려진 것처럼, 붓다가 설하는 경전이 아니며, 붓다를 설하
는 경전이다. 달리 말하면, 깨달음의 세계를 설하는 경전이라는 것이다. 깨달
음의 세계 위에 펼쳐지는 보살의 행, 그것이 십주에서 십지에 이르는 보살도
법회로 형상화되고 설명된다. 그 각각의 법회는 보살이 불을 성취해가는 법회
가 아니라, 보살이 불의 본원력과 위신력에 가피를 받아 ‘이미 부처인’ 중생들
을 하나하나 성취해가는 법회로서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제2
회 법회에서 ‘정행품’을 설하고 제3회 법회의 초발심주 이후에 ‘범행품’을 설
정하는 이유이다.『화엄경』의 편찬자들은 의심을 끊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완
성의 과정[닦음]을 淨行으로, 믿음의 완성[信滿] 이후에 이루어진 보살도의 과
정을 梵行으로 표현하여 명료히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의 첫 번째 장면에서 현시되는 시성정각과 그로부터 설시되는 깨
달음의 세계, 곧 佛世界를 장엄해가는 하나하나의 꽃은 淨行이 아니라 梵行인
것이다. 초발심주 이후에 나타나는 梵行들에 의해 장엄되는 불세계, 그 불세계
는 꽃들에 의해 장엄되는 세계라는 것이 ‘佛華嚴의 세계’라는 것이 經名이 가지
는 의미이며, 따라서 그 꽃들에 해당하는 것이 하나하나의 범행인 셈이다.
화엄가들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점이며, 비화엄가들은 십주로부터 십지를
거쳐 불에 이르는 과정을 보살의 수행도로 파악하기 때문에 화엄가들과 다른
해석의 관점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佛에서 衆生에게’의 관점을 취
하는 것이『화엄경』과 화엄가의 관점이라면,『화엄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衆
生에서 佛에게로’의 관점을 취한 것이 비화엄가들의 관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화엄경』과 화엄가들의 관점이 화엄 특유의 깨달음에 대한 해석을 낳게
된다.
III. 화엄가들이 말하는 깨달음, 그 유형과 방식
『화엄경』은 ‘初發心時便成正覺’을 말한다. 그리고 그 초발심은 초발심주를
이르는 명칭이기도 하다. 그리고 초발심주는 앞서 설해지는 십신의 信滿에서
任運하여 이르는 자리 곧 信滿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行布의 차제적인 의미
에서 본다면, 초발심주로부터 佛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보살도의 차제가 설시
된다. 화엄가들이 말하는 깨달음 혹은 성불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간격을 해소하기 위한 제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보살이 방편행을 구
족해감에 대하여 방편행의 六相圓融을 설하여 항포와 원융을 동시에 세우고,
항포가 곧 원융이고 원융이 곧 항포라고 설하는 것도 이 같은 문제의식과 관련
이 있다. 먼저 화엄 성불론의 몇몇 특징적인 술어를 간략하게 살핀 후, 그 기반
에 대해서 언급하기로 하자.
1. 깨달음의 유형과 방식
법장은「화엄경탐현기」에서 「노사나불품」을 해석하는 말미12)에 보장엄동
자가 성취한 지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삼종의 成佛을 말한다. 이 삼종의 성불
은 位・行・理의 세 가지 기준에 의거하여 成佛을 나눈 것이다.13) 이 중에서 位를
기준으로 하는 성불은 흔히 信滿成佛이라고도 말해지는 것으로, 信滿位 곧 初發
心住의 지위를 기준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둘째의 行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지위에 기대어 말하지 않고, 행을 성취함을 기준으로 성불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의 理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일체중생 역시 모두 진여를 본체로 삼기
때문에 일미로서 평등하다는 기준에서는 부처 아님이 없다는 뜻을 설명한 것
이다. 이것은 본래성불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 세 가지
성불이 모두 信滿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에는 차별이 없어 보인다. 아래에서
는 지위에 따른 성불과 理에 따른 성불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12) 華嚴經探玄記, T35, p.166b. “三約理, 則一切眾生竝已成竟, 更不新成, 以餘相皆盡故, 性德本滿故.”
13) 화엄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유형과 방식을 설명한 이 부분의 전체 논의는 기본적으로 견등의
화엄일승성불묘의의 제1 ‘出成佛種’과 제2 ‘辨定得人’의 범주구분을 따라 논의하였다. 견등은 이
부분의 논의를 주로 법장의 오교장과 탐현기 그리고 지엄의 공목장 등을 중심으로 정리하
고 있는데, 해당 부분의 인용은 오교장과 탐현기 그리고 공목장로부터 직접 인용처리하였
음을 밝혀둔다. 고익진(1989)은 이 두 부분을 정리하는 견등의 초점이 ‘疾得成佛’을 강조하는데 있
으며, 화엄의 ‘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는 성불론의 초점에 대한 유가의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구성이라고 해석하고 있다.(p.359)
1) 位를 기준한 成佛; 信滿成佛
법장은 위에 의거한 성불과 행에 의거한 성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 이 가운데 동자가 법을 얻은 것은 어떤 위(位)인가? 의미를 상하의 경
의 뜻에 준거하면, 세 가지 성불이 있다. 첫째는 지위[位]를 기준하였으
니, 六相方便으로써 十信의 마지막 마음[終心]의 승진분의 뒤 十解의 초위
에 들 때 곧 성불한다. 이것은 三乘終敎의 불퇴위에 말미암은 까닭이다.
일승의 六相으로써 융섭하면, 곧 모든 지위를 갖추어서 불과에 이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동자가 첫 부처님을 뵙는 것을 신위의 자분으로 삼으
며, 첫 경을 듣는 것을 신위의 승진으로 삼고, 뒤의 부처님을 뵙는 것은 해
위의 첫 자분에 해당하고 뒤의 경을 듣는 것을 해위의 첫 승진으로 삼아,
모든 지위를 포섭하여 다 구족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행(行)을 기준하였
으니, 모두 지위에 의지하지 않고, 다만 자분과 승진의 구경(究竟)이면 곧
불과에 이른다."14)
14) 華嚴經探玄記, T35, p.166b. “又此中童子得法是何位者? 義准上下經意有三種成佛. 一約位,
以六相方便, 即十信終心勝進分後, 入十解初位, 即成佛。以此是三乘終教不退之位故.
以一乘六相融攝, 即具諸位, 至佛果也. 是故此中童子, 見初佛為信位自分, 聞初經為信位勝進,
見後佛當解位初自分, 聞後經為解初勝進, 以攝諸位皆具足故. 二約行, 總不依位,
但自分勝進究竟即至佛果.”
화엄가 중에서 信滿成佛을 특히 강조한 것은 法藏이다. 법장은 오교장의
「行位差別」 중에 별교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지위에 의거하여 드러내는 부
분’[約寄位顯]에 거의 동일한 설명이 있다.15) 탐현기의 位를 기준으로 한 설
명과 거의 동일하지만, 이어지는 문답에 좀더 자세한 설명이 부가되어 있다.
15) 華嚴一乘教義分齊章, T45, p.489b. “一約寄位顯. 謂始從十信乃至佛地六位不同, 隨得一位得一切位.
何以故? 由以六相收故, 主伴故, 相入故, 相即故, 圓融故. 經云, 在於一地普攝一切諸地功德, 是故經中,
十信滿心勝進分上得一切位及佛地者, 是其事也. 又以諸位及佛地等相即等故, 即因果無二始終無礙.
於一一位上即是菩薩即是佛者, 是此義也.”
"[문] 만약 그러해서 이 初門이 일체라고 한다면, 어째서 십신의 초심에서
득한다고 말하지 않고, 滿心에서 설하는가?
[답] 만약 이 별교라면 지위에 의거하지 않고 이루지만, 여기에서는 삼승
종교의 지위에 의거하여 설했다. 저 敎[삼승종교] 중에서는 信滿하여 물
러나지 않아야 바야흐로 지위에 들어갈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 지위에
들어갈 수 있는 곳에 붙여서 일시에 일체의 앞뒤에 있는 온갖 지위와 行
相을 얻는다. 때문에 십신의 초심이라고 설하지 않으니, 물러나지 않음
[不退]을 얻지 못하면 지위의 相이 이루지 못해서 다만 行이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住位成佛이라고 말해야지 어째서 信滿[成佛]
인가?
[답] 믿음을 말미암아서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行佛이지 位
佛은 아니다."16)
16) 같은 책, p.490a. “問.若爾是初門即一切者, 何不說信位初心即得, 而說滿心等耶? 答. 若自別教,
即不依位成, 今寄三乘終教位說. 以彼教中, 信滿不退, 方得入位. 今即寄彼得入位處, 一時,
得此一切前後諸位行相. 是故不於信初心說, 以未得不退未成位相, 但是行故. 問. 若爾應言住位成佛,
何名信滿? 答. 由信成故, 是故是行佛非位佛也.”
십신만심의 승진분 위에서 일체의 지위와 佛地를 성취한다는 것이 법장의
주장이다. 주장의 특징은 십신만심의 승진분 위에서 일체의 지위와 佛地를 포
섭한다는 점이다. 법장은 “만약 믿음이 가득차서 位를 얻은 다음을 기준으로
한다면, 일으킨 바의 行用은 모두 법계에 두루한다”17)고 말한다. 이것은 십신
의 만위(滿位)를 기준으로 하는 성불론이라고 할 수 있다.
17) 같은 책, p.489c. “若約信滿得位已去, 所起行用, 皆遍法界.”
다만 왜 믿음을 처음 일으킨 때가 아니라 믿음을 완성한 때를 기준으로 하는
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법장은 삼승종교는 불퇴의 지위, 곧 位에 의거하여
설하지만, 화엄에서는 位가 아니라 行에 의거하여 성불을 가름한다고 말한다.
곧 하나하나의 지위가 점진적으로 불지에 나아가는 단계적 지위가 아니라, 믿
음을 완성하여 지혜가 현전할 때 이루어지는 행 하나하나가 바로 부처이며, 불
지와 다르지 않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의상의 강의를 담고 있는 화엄경문답에도 동일한 취지의 문답이 있는데,
“초지가 곧 信의 초발심이니, 다만 信解를 일으키는 문에서 信・解・行・回向・十
地・佛地가 서는 것이다. 가령 이 가르침을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은 행동 그 자
체가 모두 수행이다. 말하자면, 信을 닦을 때 解가 없다면 어찌 信이겠으며, 또
行이 없다면 어찌信이겠는가. 회향이 없다면 어찌信으로 향하겠으며, 또한 증
득하는 실체가 없다면 어찌 信의 대상이 되겠는가.”18)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초지와 십신의 초를 들고 있지만, 역시 십신을 기준으로 하여 그 증득함에 따
라 전후의 여섯 지위를 모두 갖춤을 말한다.
18) 華嚴經問答, T45, p.607a. “問. 云何十信初心即初地乎? 答. 既約初地證中, 立十入以六相示, 即可知.
初地即信初發心, 但生信解門中信, 解行回向十地佛地立. 若聞此教, 修行人行頭竝修行.
謂修信時無解何信, 復無行何信, 無回向何所向信, 亦無證體何所信. 故得行頭竝. 既行並者, 信滿即解滿,
是故位位每滿位成佛現示.”
(원문 교감과 번역은 김상현 교감, 교감번역 화엄경문답, pp.117-118.)
2) 理에 기준한 成佛
법장은 理에 기준한 성불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셋째는 이(理)를 기준으로 하였으니, 즉 모든 중생이 더불어 이미 성취하
여 마쳤으며, 다시 새롭게 성취하지 않고, 나머지 양상도 다 없어졌기 때
문이며, 性德은 본래 만족하기 때문이다."19)
19) 華嚴經探玄記, T35, p.166b. “三約理, 則一切眾生竝已成竟, 更不新成, 以餘相皆盡故, 性德本滿故.”
理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理의 측면에서 보면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
는 곧 평등일미라는 의미에서의 설명이다. 理, 곧 理法界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체는 무차별이고 공적한 평등의 일미일 따름이다. 연기한 법이라 할지라도
無自性・空의 입장에서 취해진다. 따라서 분별을 특징으로 하는 事가 아니라 무
분별을 특징으로 하는 공의 입장에서 부처와 중생을 파악하는 것이므로, 양자
의 사이에 차별이 존재할 까닭이 없다. 理를 기준해서 보면, 중생 역시 부처와
동일하므로, 理를 기준으로 보는 중생은 이미 성취한 중생이며, 다시 새롭게
성취할 필요가 없는 중생이고, 性德 역시 구족한 것이기에 成佛이라고 말해진
것이다. 물론 理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 중생이 空하다는 것은, 색즉시공의 입
장만이 아니라 공즉시색의 입장까지 망라하기 때문에 여기에 다시 남는 문제
가 존재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어쨌든 이 부분에 대해 견등은 “생각을 말하자면, 일체 중생은 모두 진여로
본체를 삼는다. 그 체성을 따라서 차별상을 논하지만, 그 相이 모두 다하면 일
미로서 평등하다. 때문에 먼저 佛에 총괄한 것이다. 묻는다. 부처는 깨달은 자
이고, 중생은 계위에 미혹되었다. 어째서 一味이며, 진여로 체를 삼았기 때문
에 모두를 총괄하여 부처라고 하였는가?”20)라고 묻는다.
20) 華嚴一乘成佛妙義, T45, p.778a. “意云, 一切眾生皆真為體. 隨其體性, 論差別相, 其相皆盡,
一味平等. 故先總佛. 問, 佛者是覺者, 眾生迷位, 何以一味, 真為體故, 皆總是佛.”
‘相이 모두 다하면, 일미로서 평등하다.’ 하지만 ‘부처는 깨달은 자이고, 중
생은 계위에 미혹되었다’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런데 어째서 일미라고
하는 것인가? 혹시 중생도 부처도 모두 진여로서 본체를 삼기 때문에 모두를
총괄하여서 부처라고 하고, 그것을 성불이라고 이야기한 것인가 하는 점이 견
등의 질문이다. 여기에 대한 견등의 자답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진리로써 체를 삼는다면, 중생은 저 위의 양상으로 역시 전혀 차
별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은 깨달은 자이고, 불신이 드러난 것이다.
저것이 드러낸 중생은 능히 드러난 불신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
생은 성불하지 못함이 없다."21)
21) 같은 책, p.778b. “答. 以一真理為體, 眾生彼上相, 亦都無差別. 是故一切眾生覺者, 佛身所現.
彼所現眾生, 同能現佛身故. 故眾生無不成佛.”
부처와 중생은 동일한 理를 체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은 그 동일한 理를
기반으로 나타난 양상이며, 그 동일한 理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깨달은 자라
는 것이다. 또한 理는 그 자체로서 佛이므로, 중생은 佛身에 의지해서 나타난 것
이고, 따라서 佛身이 드러낸 중생이 능히 드러난 중생과 다를 리가 없다는 것이
설명의 핵심이다. 때문에 일체중생은 이치로 보아서 성불하지 못함이 없다고
견등은 말한다.
하지만 중생이 부처와 같다면, 그리고 부처와 중생이 같다면, 이것을 어떻
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치적으로 일미평등이라는 것은 색즉시공의 입장을 염
두에 둘 수밖에 없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색즉시공이라는 입장만을 염두에 두
고서 理成佛을 말한다면 이미 부처밖에는 존재하지 않을 터이다. 이미 부처밖
에 없다면, 다시 부처로 나아감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게 된다. 곧 중생이 번뇌
를 끊고 발심하여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22)
22) 理成佛에 있어서 부처와 중생의 차별에 대해 견등은 “宗意라면,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일 때는 부처
와 중생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동일한 연기법이기 때문에 부처일 때는 모두 부처이고 별도로 중
생이 없으며, 중생일 때는 전부가 오직 중생이어서 역시 별도로 부처가 없다. 전부 부처가 아니거
나 전부 중생이 아니라면, 연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일체법은 진
여로 이루어지는 연기법이다. 그러므로 서로 전체를 포섭하여 비로소 衆生門을 세우기 때문에 전
부가 중생이며, 佛門이기 때문에 전부가 부처이다. 그러므로 저 교화하는 부처와 교화대상인 중생
이 없는 것은 아니다.”(같은 책, p.791a. “問. 宗意, 一切眾生皆是佛時, 佛與眾生, 有何差別? 答. 同一緣起
法故, 佛時全佛無別眾生, 眾生時全唯眾生亦無別佛. 若非全佛非全眾生, 緣起不成. 故無眾生亦無佛. 一切法
是一如所成緣起法. 故互全攝方立眾生門, 故全眾生, 佛門故皆佛. 故非無彼能化佛所化眾生.”)라고 말한다.
동일한 내용이 화엄경문답(T45, 606b)에도 조금 달리하여 나타난다.
하지만 理成佛일지라도 중생이 발심하여 성취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견등의 견해이다. 견등은 이 점에 대해 “한 부처가 그러한 것처럼,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의 법문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앞서 앞서 성취하여 마치고, 뒤에
뒤에 새롭게 새롭게 또한 성취한다. 이것은 나타나는 부처와 마찬가지로, 나타
내어지는 중생도 하나의 뜻이라도 결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지위 역시
갖춘다.”23)고 말한다. 나타내는 부처와 나타내어지는 중생이 앞서고 뒤를 따
르며, 뒤를 따르고 앞에 선다.
23) 같은 책, p.778b. “如一佛爾, 攝十方三世諸佛門亦然. 故先先成竟, 後後新新亦成. 此如能現佛,所現眾生無
闕一義. 故諸位亦具足也.”
이 점에 대해「화엄경문답」에서는 “이 때문에 부처는 ‘나는 너희들과 더불
어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너희 스스로가 차별을 생각한다는 것이 이
뜻이다. 부처가 중생을 전적으로 자신의 몸과 같이 보고 있으나, 너희들이 스
스로 부처임을 모르고, 다만 스스로 여러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영겁동안
동체대비를 일으켜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함께 닦고, 함께 이루며,
함께 괴로워하고, 함게 즐거워하며, 잠시도 버리거나 떠나 있을 때가 없다. 이
때문에 경에 ‘大悲牛’라 하였다.”24)고 말한다.
24) 華嚴經問答, T45, p.600b. “問. 佛見惑眾生時中, 惑見耶, 覺見耶? 若惑見者, 惑不見惑, 何能見惑?
若覺見者, 覺非惑, 故即不及見. 云何能見眾生乎? 答. 二俱得. 二俱不得. 所以者何? 言二俱得者,
若非惑不得見惑故, 得以惑見, 以他非自知故. 既云自惑見故, 見者即非惑. 故亦得以覺見. 是故佛言,
我與汝不異汝自為別此意. 佛見眾生全吾身是, 而自佛是汝不知, 徒自受諸苦故, 永劫起同體大悲不
捨眾生故. 同修同成同苦同樂, 暫時無捨離時也. 是故經云大悲牛也.”
3) 疾得成佛
질득성불을 말한 것은 지엄이다. 지엄은 孔目章「釋四十五知識文中意章」에
서 다섯 종류의 질득성불을 들고 있다. 좀 길지만 해당 부분 전체를 인용한다.
"또 미륵선지식의 문장에 의하면, 여러 불보살은 무량겁을 닦는데 선재는
一生에 모두 증득한다. 화엄경에 의하면 빨리 성불함[疾得成佛]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뛰어난 몸에 의지하여 一生에 곧바로 얻는 것이니, 見
聞位로부터 뒤의 一生에 離垢定에 이르며, 後身에 바로 성불한다. 둘째, 見
聞에 의지하여 생을 거쳐서 빨리 극복한다. 셋째, 一時에 빨리 성불한다.
넷째, 一念에 의지하여 빨리 성불한다. 다섯째, 無念에 의지하여 빨리 성
불한다.
첫째 뜻에 넷이 있다. 첫째는 世界性 등 열 가지 세계신에 의지하며, 輪王
의 아들은 現身으로 성불한다. 보장엄동자 등과 같다. 둘째, 천자의 뛰어
난 몸에 의지하며, 삼악도로부터 벗어나서 도솔천에 태어나 現身으로 성
불한다, 셋째, 염부제의 뛰어난 공덕신에 의지하며, 선재 등이 현신으로
普賢行의 구경에 이르러, 뒤에 태어나 부처를 본다. 넷째, 법화경에 의하
면, 용녀의 몸으로 남방에서 성불한다. 뜻은 迷惑이 남은 몸으로 빨리 성
불함에 해당한다.
둘째, 견문에 의지하여 생을 거쳐서 빨리 극복한다는 것은, 初地 가운데
서 “세 시기의 이익이 있다. 첫째는 듣는 때의 이익이고, 둘째는 수행할
때의 이익이며, 셋째는 전생할 때의 이익이다.”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
로 지론에 “이 모든 여래와 모든 보살이 가호하는 이 사람은 능히 이와
같은 미묘한 법을 듣고 지니니, 이것이 들을 때의 이익이다. 모든 地에서
청정과 無垢를 차례대로 만족하고, 부처의 열 가지 힘을 증득하여 무상보
리를 성취하니, 이것은 수행할 때의 이익이다. 큰 바다나 劫盡火 가운데
있더라도 미음이 決定하여 의심이 없으면, 반드시 이 경을 들을 수 있으
니, 이것이 전생할 때의 이익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일시에 빨리 성불한다는 것은, 선재동자가 선지식의 처소에서 일
시지간에 보현법을 얻음과 같다.
넷째, 일념에 의지하여 빨리 성불한다는 것은, 보현법에 계합하여 一念에
바로 성불함과 같으니, 이것은 속제의 일념에 의거한다.
다섯째, 무념으로 빨리 성불한다는 것은, 일체법은 불생이고 일체법은
불멸이니,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참된 부처를 보기 때문
이다."25)
25) 孔目章, T45, p.585c. “又依彌勒文, 諸佛菩薩無量劫修, 善財一生皆得者. 依華嚴經疾得成佛,
有其五種. 一依勝身一生即得, 從見聞位後, 一生至離垢定, 後身即成佛. 二依見聞逕生疾剋.
三依一時疾得成佛. 四依一念疾得成佛. 五依無念疾得成佛. 初義有四. 一依世界性等, 十世界身,
輪王之子, 現身成佛, 如普莊嚴童子等. 二者依天子勝身, 從三惡道出, 生兜率天, 現身成佛. 三者
依閻浮提勝功德身, 如善財等現身究竟普賢之行, 後生即見佛. 四者依法華經, 龍女之身, 南方成佛.
義當留惑之身疾得成佛. 二依見聞逕生疾剋者, 如初地中說, ‘有三時益, 一聞時益, 二修行時益,
三轉生時益.’ 故地論云, ‘是諸如來, 加護於諸菩薩, 此人能聞持, 如是微妙法.’, 此是聞時益.
諸地淨無垢, 漸次而滿足, 證佛十種力, 成無上菩提, 此是修行時益. 雖在於大海及劫盡火中, 決定信無疑,
必得聞此經, 此是轉生時益. 三依一時疾得成佛者, 如善財童子於知識處, 一時之間獲普賢法.
四依一念疾得成佛者, 如契普賢法, 一念即成佛, 此依俗諦念也. 五無念疾得成佛者,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是人見真佛故.”
이상의 질득성불은 빨리 성불함의 종류를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질득성불에 대해 지엄은 그 예
를 들고 있는데, 보장엄동자와 선재와 제시된다. 첫째의 몸의 뛰어남에 의지하
여 一生에 곧바로 얻는다는 것은, 미혹이 남아있는 몸으로 질득성불 한다고 설
한다. 이때 미혹이 남아있다고 하는 것은, 육신의 성불을 의미한다.
이 일생의 성불에 대해「화엄경문답」은 “이와 같은 것은 또 문자의 양상에
의거한 것으로, 見聞 등 三位에 의거하면 三生이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했을
따름이다. 실제에 의거하면, 모두 동등하여 다만 一身 가운데 부처를 성취한다.
一身은 法性身이지 별도의 分段 등의 몸은 없다. 가령 인연을 따라 성불함을 나
타내는 것은 삼승교에서 설하는 것이다. 일승교의 실법에 의거하면, 念念마다
성불하는 것이니,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26)고 말한다. 분단신이라는 것은 事
로서의 개성을 드러낸 육신을 의미한다. ‘분단 등의 몸은 없다’는 것은 나아감
의 분위에 따른 생사와 변역의 관점에서 몸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
것을 일신은 法性身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理의 관점
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一身 그 자체를 法性身으로 한다는
측면에서는 현신으로서의 성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6) 華嚴經問答, T45, p.612b. “此等且約文相, 據見聞等三位為三生, 故作如是說耳. 約實共皆同,
但以一身中成佛. 言一身者法性身, 無別分段等身. 若隨緣現成佛, 即同三乘教所說也. 約一乘教實法,
念念每成佛等. 如前說也.”
일승교의 실법에 의거한다고 하므로, 인과가 다르지 않아서 일시, 념념에
성불하는 것이다. 이상의 질득성불은 신만 혹은 住初에 들어감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位成佛이나 行成佛에 해당하지 않는다27)고 볼 수 있다.
27) 견등은 一時成佛과 一念成佛만 信滿과 住初에 들어감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理成佛이라고 말한다.
(화엄일승성불묘의, T45, p.791a)
2. 근원적 관점: 구래성불 그리고 본래성불
이상에서 차제적인 지위를 기준으로 성불을 말하는 것은 位成佛과 行成佛이
다. 이른바 신만성불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신만성불은 성불하는 동시에 “六
相으로써 융섭하면, 곧 모든 지위를 갖추어서 불과에 이른다”28) “처음 十信으
로부터佛地에 이르기까지 여섯 지위가 같지 않지만, 한 지위를 얻음에 일체의
지위를 얻는다”29)고 설해진다. 행도하여 신만에 이르러 성불한다고 표현했지
만, 그것은 이미 성불해 있었음에 대한 확인에 다름 아니며, 신만의 그 찰나에
일체의 지위와 불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취하여 마쳤음을 드러내는 부분이
기도 하다.
28) 華嚴經探玄記, T35, p.166b.
29) 華嚴一乘教義分齊章, T45, p.489b. “一約寄位顯. 謂始從十信乃至佛地六位不同, 隨得一位得一切位.”
한편 住位成佛이라 하지 않고 信滿成佛이라고 하는 것 역시, 信滿이라고 하는
行의 이룸에 초점을 둔 것이지, 행으로 인해 도달한 지위를 기준으로 성불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삼승종교의 불퇴위를 의미하는 住初를 굳이 초
점으로 하지 않으려는 사유에 따라 등장하는 명칭이 信滿인 셈이다. 이를 통해
서 화엄가들은 지위의 나아감에 따른 차제로서 보이는 성불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理의 成佛 역시 마찬가지이다. 理를 기준으로 하면, 일체의 모든 중생
이 이미 성불해 마쳤음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치에 의거하여 중생이 이미 성불
해 있다고 하더라도 중생의 발심은 당연히 이루어지며, 이 점에 대해 “한 부처
가 그러한 것처럼,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의 법문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앞
서 앞서 성취하여 마치고, 뒤에 뒤에 새롭게 새롭게 또한 성취한다. 이것은 나
타나는 부처와 마찬가지로, 나타내어지는 중생도 하나의 뜻이라도 결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지위 역시 갖춘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理를 단순히 응
연불변하여 공적한 어떤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앞서 앞서 성
취하여 마치고, 뒤에 뒤에 새롭게 새롭게 또한 성취한다’는 것에서 붓다라는 상
태, 정각이라는 상태가 이루어서 그치는 상태가 아님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중생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으며,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지 못했는데
왜 舊來成佛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에서 다음과 같
이 말한다.
"[문]얽매여 있는 有情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고, 아직 복덕과 지혜를 이
루지 못했는데, 무슨 뜻으로 舊來成佛이라 하는가? [답]번뇌를 아직 끊지
못했으면, 성불이라고 하지 않는다. 번뇌를 다 끊고 복덕과 지혜를 성취
하여 마쳐야, 이후부터 舊來成佛이라고 한다.
[문]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어떠한가? [답]십지경론에서 설한 것과 같이,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뒤도 아니니, 앞과 중간과 뒤를 취하는 까닭이다."30)
30) 華嚴一乘法界圖, T45, p.714a. “問. 具縛有情, 未煩惱斷, 未成福智, 以何義故, 舊來成佛也? 答.
煩惱未斷, 不名成佛. 煩惱斷盡, 福智成竟, 自此已去, 名為舊來成佛. 問. 斷惑云何? 答. 如地論說,
非初非中後, 前中後取故.”
번뇌를 끊지 못했으면 성불이 아니다. 번뇌를 다 끊고 복덕과 지혜를 성취하
고 마치면, 그때부터는 ‘예부터 이미 성불해 있었다[舊來成佛]’라고 말한다. 그
렇게 말하는 의미는 다음의 문답에서 드러난다. 처음을 취한 것이나 중간을 취
한 것 혹은 뒤를 취해서 ‘예부터[舊來]’라고 이름붙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앞과 중간과 뒤를 취해서 ‘예부터[舊來]’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곧 成佛이 시분
의 분제에 있는 것이 아님을 지목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징관은 “마음이 지극
한 道에 冥合하면 古今은 渾一한다. 법계는 無生이어서 본래 時分이 없다.”31) 道
에 명합한다는 것은 무생임을 철견한다는 것이고, 그 무생은 무생임을 드러내
는 순간에 더 이상 時分이 없는 것이었음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31) 大方廣佛華嚴經疏, T35, p.505a. “夫心冥至道, 則混一古今. 法界無生, 本亡時分.”
의상은 그 의취를 끊음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거듭해서 드러낸다.
"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다. 이와 같이 끊기에, 아직 끊기 이전에는 끊
었다고 이름하지 않고, 지금끊은 이후로는 ‘예부터 끊었다[舊來斷]’고 이
름한다. 마치 깨는 것과 꿈꾸는 것이, 잠듦과 깨어남이 같지 않은 것과 같
다. 그러므로 이룸과 이루지 못함, 끊음과 끊지 못함 등을 건립하지만, 그
실다운 도리는 제법의 實相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본래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번뇌의 법 가운데 한 법도 줄어드는 것을 보
지 못하며, 청정한 법 가운데 한 법도 늘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32)
32) 華嚴一乘法界圖, T45, p.714b. “云何斷? 如虛空. 如是斷故, 未斷已還, 不名為斷, 現斷已去,
名為舊來斷也. 猶如覺夢睡悟不同. 故建立成不成斷不斷等. 其實道理, 諸法實相, 不增不減, 本來不動.
是故經言, 煩惱法中, 不見一法減, 清淨法中, 不見一法增, 是其事也.”
끊는다는 것에 있어서도 의상은 ‘예부터 끊었다[舊來斷]’고 말한다. 이때의
끊는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끊기 전에 끊었다고 말하지 못하며, 끊고 난
이후에는 ‘예부터 끊었다[舊來斷]’고 말한다. 이것은 화엄의 사유가 서있는 지
점 혹은 지평을 보여준다. ‘舊來不動’을 그 근원적 지평으로 삼되, 그 구래부동
의 근원적 지평은 行者의 끊음과 이룸에 의해서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박보람은 십지경론에서 제법의 실
상, 진여의 참모습을 서술하는 구절을, 세친이 ‘지혜를 얻음’과 ‘번뇌를 끊음’
의 선후관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파악하고, ‘非初非中後’를 옳지 않다고 하고,
지혜의 끊임없는 상속/흐름에 의해 번뇌를 대치한다고 풀이한 것[前中後取故]
을 지적한다.33)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동아시아 화엄에서 “번뇌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단지 번뇌가 본래 끊을 바가 없음을 아는 것이
[번뇌를] 끊음이라고 설”34)하는 것에 이르렀음을 지적한다.
33) 박보람(2016), 「십지경 ‘非初非中後’게송과 그에 대한 십지경론 주석의 이해」, 불교학보74.
34) 박보람(2014), 「…번뇌를 끊음이라는 번뇌를 끊음 없다는…」, 한국불교학76, p.264.
아마도 박보람의 지적처럼, ‘非初非中後’ 게송에 대한 세친의 해석은 창조적
변용일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서 화엄이 서 있는 지점이 명료하게 드러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혹은 화엄이 나아간 바가 거기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
다. 하지만 ‘始成正覺’이라는 대지위에 菩薩地盡을 목표로 일승의 보살도를 건
립한『화엄경』구조의 특징상, 오히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
리고 舊來成佛 혹은 本來成佛은 ‘舊來性’ 혹은 ‘本來性’이 추구하는 철저한 추궁
에 의해, 끊임없이 현실재편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구래성/본래성
을 담지하고서 구래성/본래성의 대지 위에 서있는 현실의 중생에게 번뇌가 끊
을 바가 없는 것임을 ‘알도록’ 끊임없이 재촉하는 현실태의 구현을 요구하는
것에 다름아닐 것이다. 住初가 아니라 信滿에서 화엄의 깨달음이 설해지는 이
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IV. 맺는 말
화엄의 性起는 본래부동의 무분별인 적정의 세계[性]와 무분별로서의 일어
남[起]이 일체화된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무분별 적정이자 본래부동
으로서 性은, 그 일어남[起]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화엄의 성기는 ‘중생의 마음경계에 현현하는 것으로서의 佛世界’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라고 논자는 생각한다. 곧 중생의 마음경계에 현현하는 것이 起이며,
무분별 적정 그대로의 세계가 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중생의 마음경계
에 현현하지 않는 것은 이미 性이 아니며, 佛이 아니다. 性/佛의 존재의의는 현
현함에 있기 때문이다. 연기한 법은 하나하나가 무자성이며, 일어나는 것[起]
이 일어나지 않는 것[不起]과 합치한다. 본래부터 일어나지 않는 것이 果法이
다. 그렇지만 그 과법이 연기의 일어남에 의지하여 성기가 있게 된다. 모든 연
기된 법은 무자성이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일체화되
는 것이다. 이것이 성기 곧 여래의 출현이다.
『화엄경』은 不動이면서 動이며, 不動이면서 用을 드러내는[顯] 것을 근본적인
구조로 한다. 부처가 시성정각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각
각의 회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구조는 動이면서 不動임을 나타낸다. 부동이
면서 동이며, 동이면서 부동인 구조, 부처가 그러한 구조에 끊임없이 수렴하듯
이 중생 또한 마찬가지여야 한다는 것이 화엄이 취하는 기본적인 관점이 아
닐까.
[출처] 화엄종에서 바라보는 깨달음의 유형과 방식|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수행과 깨달음은 무엇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붓다의 깨달음과 명상법 (0) | 2021.09.15 |
---|---|
해탈로 인도하는 산냐 (0) | 2021.07.23 |
초기선종에 나타난 ‘見性’의 구조와 의미에 대한 고찰/자성에 대한 글 (0) | 2021.07.17 |
초기 불교에서 재가자의깨달음에 대한 재고-깨달음의 세 가지 특성들과 관련하여 (0) | 2021.07.17 |
초기불교 문헌에 나타나는 깨달음의 다원적 양상-니까야를 중심으로 (0) | 2021.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