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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 깨달음은 무엇인가

해탈로 인도하는 산냐

해탈로 인도하는 산냐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선禪까지 (69) 금강경의 수행론 ㉑ 수행에 이익되는 산냐

등현스님 /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 해탈로 인도하는 산냐

불교의 해탈론적 관점에서 보면, 일반 범부들의 인식은 왜곡되고, 오염되었으며, 전도되어 있다. 부처님은 <전도경(Vipallāsa Sutta)>에서 인식, 마음, 그리고 견해의 네 가지 전도들을 설명하고 있다. 네 가지 전도는 무상한 것을 항상한 것으로,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자아가 아닌 것을 자아로, 부정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는 네 가지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전도는 범부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감각된 것들을 집착하게 하며, 결국 괴로움(dukkha)으로 이끈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도 이와 같이 왜곡되고 전도된 불건전한 산냐는 온전한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일반적으로 산냐(想)는 불건전한 인지(認知)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전도경>에서는 전도되지 않은 네 가지 인식을 말하며 적극적으로 계발해야 할 것으로 말하고 있다. 즉, 무상한 것은 무상한 대로, 괴로운 것은 괴로운 대로, 자아가 아닌 것은 자아가 아닌 대로, 깨끗하지 않은 것은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전도되지 않은 인지가 건전한 산냐 중 하나이다. 현상 혹은 경험들을 무상, 고, 무아로써 의도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건전한 산냐(想)를 수행 도구로써 적극적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기리마난다 경(A. V. 108-109.)>에서는 10가지 건전한 산냐(想)를 말한다. 그것은 ① 나 또는 나의 경험을 구성하는 오온에 대해서 무상하다고 인지하는 것이고 ②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육내외입처)와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인식과정들이 조건에 의존해서 일어난 것일 뿐 변치 않는 실체가 아님(무아)을 인식하는 것이며 ③ 이 몸이 부정함을 인지하는 것이다. ④ 이 몸은 여러 가지 병이 생길 수 있다는 위험을 인지하는 것이고 ⑤ 감각적 욕망, 악의 등 나쁘고 해로운 법들에 대한 버림을 인지하는 것이며 ⑥ 모든 형성된 것에 대한 집착을 멀리하는 것이며 ⑦ 모든 형성된 것들의 소멸에 관한 인지이다. ⑧ 세상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세상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것이며 ⑨ 모든 형성된 것들이 무상함을 인지하며 ⑩ 들숨날숨에 마음챙김이다.

 

그리고 이들 건전한 상들은 무상, 고, 무아의 상이 가장 일반적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상이 다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빠빤짜라는 잘못된 자아의식의 망상으로 이끄는 불건전한 상이고, 이것은 제거되어져야 할 대상이다.

 

두 번째는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히려 계발되어야 할 건전한 상인 무상, 고, 무아의 상이다. 오온을 무상, 고, 무아로 꿰뚫어 보는 것은 염오(nibbidā), 이욕(virāga), 해탈(vimutti), 해탈지견(vimutasmiṃ vimuttīti ñāṇa hoti)이라는 과정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염오라는 단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염오 또는 무집착”은 빠빤짜와 대조된다. 즉, 불건전한 상은 오온에 대한 “갈애 자만 견해의 형태로 자아의식을 가지는 망상인 빠빤짜”로 이끌지만, 건전한 상은 오온에 대한 “염오심과 무집착”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saññā-vitakka-papañca(papañcasaññāsaṅkhā)의 인식과정은 십이연기에서 보면, 느낌과 갈애 사이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만약 상이 오염되고 전도되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빠빤짜(빠빤짜산냐상카) 즉, 잘못된 자아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연결은 뒤이어서 모든 괴로움의 발생 혹은 윤회의 전개로 나아간다. 그러나 만약 상이 전도되지 않았다면, 거짓된 자아의식이 생성되지 않고, 따라서 이것은 갈애로 이어지지 않고, 뒤이은 괴로움이 끊어지게 된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도 두 가지 산냐를 말하는데, 망상의 자아의식(빠빤짜)과 결부된 산냐는 번뇌로 이끌기에 소멸해야 할 산냐이고, 3법인과 결부된 산냐는 수행에 장애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해탈로 인도하는 샨냐이다.

[출처] 불교신문

[출처] 초기불교에서 선禪까지 (69) 금강경의 수행론 ㉑ 수행에 이익되는 산냐 - 해탈로 인도하는 산냐|작성자 향림

[출처] - 해탈로 인도하는 산냐|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