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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 묵조선. 선

‘이뭣고’ 화두의 실참법

‘이뭣고’ 화두의 실참법

 

성철스님은 ‘이뭣고’ 화두에 대하여 ?성철스님 화두 참선법?에서 자세히 설하고 있다.

 

‘이뭐꼬’ 화두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대부분 ‘이뭐꼬’ 화두를 든다고 하면 그저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는데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것이 무엇인고?” 하면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앉아 있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중략)… 그래서 ‘이뭐꼬’를 할 때는 이 병폐 저 병폐를 없애기 위해 예전 조사스님들은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니, 그러면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야 들여다볼 수도 없고 경계에 따라서 이리 저리 따라갈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뭐꼬’라고 한 분은 성철스님인 것 같다. 그러면서 단순히 ‘이뭐꼬’가 아니라 전제어인 마음도, 물건도,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를 참구하라고 한다. 중복되는 감은 있지만, 다시 한 번 화두에 대해서 강조한 부분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제 내가 화두를 일러주겠습니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내가 일러준 이 화두의 뜻을 바로 알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고 자성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흔히 화두를 잘못 알고 “마음이라 하면 어떻고 물건이라 하면 어떻고 부처라 하면 어떠냐”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늘 마음속에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을 지어 가야 합니다.

 

성철스님은 대중 법문에서 직접 화두를 주겠다고 하면서 ‘마음도, 물건도,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이뭐꼬’를 참구하라고 한다. 경계에 끄달려서 볼 때마다 이것이 무었인고 라고 하면 잘못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마음이 산만해지므로 옛조사의 말에 중심을 두고 ‘이뭐꼬’를 하라고 한다. 이러한 당부는 뒤에 「지상문답」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근래에 월암스님은 ?看話正路?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청허의 ?선가귀감?에 시설된 이 공안법문이 그대로 용성의 이뭣고? 화두에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보면 이뭣고? 화두는 우리나라에서 근대에 와서 어느 날 갑자기 근거 없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중국 조사선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사상으로부터 시작되어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사상사에서 면면부절 이어져 내려온 조사활구로서 본참공안(本參公案)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월암스님은 ‘이뭣고’ 화두의 연원을 중국조사선의 本來無一物에 두면서 중국과 우리나라에 면면이 이어져 왔다고 한다. 그는 “근세에 와서 ‘이뭣고’ 화두를 수선자들에게 정식으로 제시한 분은 경허와 용성이다. 사실 두 선사는 근세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라고 일컫는 분들이다. 이 두 분의 선사에 의해 전통적으로 선문에 전해져 내려오던 시삼마(是甚麽: 이뭣고)의 화두가 다시 정립되어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앞에서 말한 성본스님의 중국이나 고려, 조선, 일본에도 없던 것이 근대 와서 참구되었으며, ‘이뭣고’를 참구하여 수행한 사례가 없다라고 하는 설과는 상반된다. 논자는 앞에서 용성스님이 밝힌 바와 같이 육조혜능에서부터 그 근거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와 전국선원수좌회에서 공동으로 편찬한 ?간화선?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 뭣고(是甚麽)?’ 화두 같으면 이렇다.

“밥 먹고 옷 입고 말하고 보고 듣는 이놈, 언제 어디서나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공 이놈이 무엇인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부모미생전 나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고?”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 뭣고?’ 화두는 앞에 든 여러 가지 중 하나만 택해 의심을 지어 가면 된다. 하나더 부연하자면 전제를 통해 화두를 들 때는 한 전제만 들어야 한다. 물론 그 전제 사이에 우열의 차이는 없다. 하나만 택해 간절히 들면 된다. 단제만 들면서 ‘이 뭣고?’ 할 때는 ‘이’를 약간 길게 하면서 마음 속으로 ‘이-’ 하는 이 놈이 ‘뭣꼬?’ 하며 의심을 일으키든지, 아니면 조금 막연하지만 ‘이- 뭐- 고?’ 하면서 의심을 길고 간절하게 가져가는 것도 요령이다. 곧 전제는 간단히 해서 그것이 망상의 근원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이 책은 2005년에 초판이 출판 되었으나 옛 조사들의 가르침을 중국선사들 중심으로 하다 보니 한국간화선의 특색을 들어낼 수 없어서 인용사례를 우리나라 선사들의 가르침으로 대체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초판에서 각 선원에서 제기된 문제점과 선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증보 재판을 출간하였다. 종단 교육원의 불학연구소가 중심이 되었지만, 특히 현재 한국 각 선원에서 참선수행하는 선원수좌회에서 대표를 선정하여 편찬위원회 참석하여 실참하는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이뭣고’ 화두에 대한 몇 가지 특색이 있다. 첫째는 지금까지 ‘이뭣고’라고 하여 ‘이’를 띄우지 않고 붙여서 사용하였지만, 여기서는 ‘이’와 ‘뭣고?’를 띄워서 표기하고 있다. 왜 그렇게 표기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지금까지는 ‘이뭣고?’가 ‘이 뭣고?’로 표기 하므로 ‘이’를 한 단어로 보고 ‘뭣고?’도 다른 단어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렇게 분리한 이유가 참구방법에서 “‘이’를 약간 길게 하면서 마음 속으로 ‘이-’ 하는 이 놈이 ‘뭣꼬?’하면서 의심을 일으키든지 아니면 조금 막연하지만 ‘이-뭣-고?’ 하면서 길고 간절하게 가져가는 것도 요령이다”고 한다. 이는 참선수행을 하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가미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령’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법은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할 때 一字念佛처럼 ‘나-’ ‘무-’ ‘아-’ ‘미-’ ‘타-’ ‘불-’과 같이 引聲念佛로 길게 뽑아 집중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더구나 염불선에서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念佛者是誰)’를 참구하는 것과도 유사한 수행방법이다. 논자는 현재 한국선원에서 ‘이뭣고?’ 화두가 이와 같이 수행지도 되고 있다는 점을 소개 하고자함에 있다.

 

이상에서 월산스님의 참구화두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월산스님이 참구한 화두가 ‘이뭣고’이다 보니 최근에 ‘이뭣고’ 화두에 대한 진위의 문제가 제기되므로 이를 소개하고 잘못됨을 밝히는 과정에서 문장이 장황해졌다.

첫째, 월산스님은 1945년 만공스님으로부터 ‘이뭣고’ 화두를 받아 선문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별로 깊이 참구하지 않다가 1946년 경 완도의 바닷가에서 금오스님으로부터 ‘이 돌멩이는 마음 안에 있느냐? 마음 밖에 있느냐?’ 라고 세 번에 걸쳐 다그치면서 묻는데 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 ‘돌멩이 화두’ ‘이뭣고’의 문제를 가지고 22년 동안 오매불망 화두에 전념하다가 1968년 스승인 금오스님의 임종직전에 답을 내어놓고 인가를 받았다. 이 화두를 들고 청도 적천사 도솔암 토굴에서 가난 속에서 처절한 수행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가난과 청빈 속에서도 탁발 하여 토굴의 양식보다 다리 밑의 걸인들에게 베풀었다는 이야기는 가난과 검소가 몸에 밴 월산스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교적 여유 있는 불국사의 주지를 하면서도 석굴암에서의 토굴생활과 불국선원에서 수좌들과 함께 보냈다. 자신의 토굴을 만들거나 사설 사암 하나 없이 수행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둘째, ‘이뭣고’ 화두가 화두가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의 학설을 소개하고 이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이뭣고’ 화두의 전제어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하고, 월산스님도 전제어를 말하면서 ‘이뭣고’를 참구하라고 설법하였다. 그런데 ‘이뭣고’는 화두가 아니며, 중국이나 우리나라, 일본에도 없던 것이 근래에 와서 이를 화두화 하여 참구하라고 하니 잘못되었다는 학설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셋째, 是甚麽 화두의 전개에 대해 역사적인 자료를 제시하였다. 특히 용성스님은 육조혜능이 화택신회와의 문답과 남악회양과의 문답에서 연원을 두고 있음을 밝혔다. 그러다가 서산대사 등을 거처 근세에 와서 경허스님과 용성스님이 활발하게 ‘是甚麽’, ‘이뭣고’ 화두로 제자들을 접인하였음을 밝혔다. 여기에는 반듯이 전제어가 있으며, 이를 단순화 시켜서 ‘이뭣고’ 하라고 지도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넷째, 현대 우리나라 선원에서 ‘이뭣고’ 화두의 실참법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성철스님의 ‘이뭣고’ 화두의 실참지도 방법과, 종단과 수좌회에서 편찬한 ?간화선?에서 게재된 것을 소개 하였다. 현재 선원에서 ‘이뭣고’의 실참수행방법은 선원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이 월산스님의 ‘이뭣고’ 화두법이 잘못되지 않았을 밝혔으며, 처절한 수행으로 덕숭선맥을 계승한 선지식의 수행과정을 정리해 보았다.

[출처] ‘이뭣고’ 화두의 실참법|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