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曉의 圓融會通사상 / 한 종 만
1.『起信論疏』에 나타난 會通사상
흔히 원효(617-686)를 이야기 할 때 和諍國師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和諍'의 의미는 단순히 싸움을 말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원효가 살았던 시대의 온갖 대립과 반목을 해소할 수 있는 통합의 원리를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하여야 한다. 원효가 위대한 점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당시 누구도 하기 어려웠던 바로 이러한 통합의 원리를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통합의 원리를 높이 평가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것이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相克보다는 相生의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귀중한 것이다.
원효가 제시한 통합의 원리는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나타나지만 먼저 그가 살았던 삶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즉 원효는 심오한 철학을 가진 사상가이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민중적인 면모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사상적 깊이와 대중적 풍모라는 이 두 가지 덕목은 한 인간이 모두 갖추기 어려운 대립적 측면이다. 보통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는 부족하기 쉽다. 사상적 깊이가 있는 인물은 대중이 접근하기 어려운 고고한 형이상학의 세계에 머물기 쉽고, 반대로 대중적인 인물은 철학이 없이 일시적인 대중의 인기만을 의식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바로 잊혀져 버리기 쉽다. 그런데 원효가 우리 앞에 등장하는 모습은 두 가지 모습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먼저 원효의 대중적 풍모는 '無碍行'으로 표출되고 있다. 1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에 관한 일화를 보면 요석공주와의 파격적인 결혼이라든가, 표주박을 두드리면서 시장의 주막집에서 사람들과 함께 '無碍歌'를 불렀다고 전해온다. 당시 신라사회가 철저한 신분제 사회이고 더군다나 나라 안에 고승석덕으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원효의 신분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행위는 신라사회 상층부에 일대 충격을 주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또 한가지 원효의 대중성과 관련하여 필자가 주목하는 사항은 전국사찰의 많은 수가 원효와 얽힌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전라도 지역의 상당수 사찰에서도 원효가 창건했다거나, 얼마간 머무르면서 수도했다는 이야기, 혹은 어떠 어떠한 이적을 나투었다는 일화들이 구전되어 온다. 구백제 지역으로서 경상도 일대와는 아무래도 왕래도 적고 소원했을 전라도 사찰에서까지 유독 원효 관련 설화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는 그만큼 원효의 민중에 대한 친화력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원효의 사상적 깊이는 그가 남긴 저술의 量과 質에서 나타난다. 그는 양적으로도 일생동안 86부 180여권의 저서를 남긴 대저술가로서 신라 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방대한 규모의 저술을 남겼다. 중국에서 내노라하는 대저술가들인 天台 智者가 30여부, 화엄학의 대가였던 法藏은 50여부, 唯識學의 窺基가 50여부를 남긴 것에 비하면 원효의 저술량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원효의 저술은 그 질에 있어서도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당시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기신론소』,『화엄경소』, 『금강삼매경론』등이다. 『기신론소』는 중국에서 '海東疏'라는 별칭으로 불리울 정도로 독자성을 인정받았다.
원효의 『기신론소』가 탁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답변한다면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의 대립을 해소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중관과 유식은 불교사상의 양대 줄기로써 소위 空․有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논쟁은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한국,일본 등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골머리를 아프게 하던 문제였다. 원효는 『기신론별기』에서 다음과 같이 중관․유식의 편향성을 규정하고 있다.
論(기신론)이 세우지 않는 것이 없으며 깨뜨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데 『중관론』과 『십이문론』같은 것들은 모든 집착을 두루 깨뜨리며 또한 깨뜨린 것도 깨뜨리되 깨뜨리는 것과 깨뜨림을 당한 것을 다시 인정하지 않으니, 이것을 보내기만 하고 두루 미치지 않는 논이라고 말한다. 또 『유가론』과 『섭대승론』같은 것들은 깊고 얕은 이론들을 온통 다 세워서 법문을 판별하였으되 스스로 세운 법을 모두 버리지 아니 하였으니 이것을 주기만 하고 빼앗지 않는 논이라고 말한다. 이제 이 『기신론』은 지혜스럽기도 하고 어질기도 하며, 깊기도 하고 넓기도 하여 세우지 않는 바가 없으면서 스스로 버리고, 깨뜨리지 않는 바가 없으면서 도리어 인정하고 있다. 도리어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저 가는 자가 가는 것이 다하여 두루 세움을 나타내며,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이 주는 자가 주는 것을 다하여 빼앗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것을 모든 논의 조종이며 모든 쟁론을 평정시키는 주인이라고 말한다.
원효는 중관사상을 '보내기만 하고 두루 미치지 않는 사상'이라고 규정하고, 유식사상을 '주기만 하고 빼앗지 않는 사상'이라고 규정하여 양자의 약점을 지적한 다음 『기신론』 은 이 양자의 약점을 모두 보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완하는가는 『기신론소』의 標宗體文에 나와 있다.
… 二門 一心의 법으로 요체를 삼고 있다. 二門의 안에 만 가지 뜻을 받아들이면서도 어지럽지 아니하며, 한량없는 뜻이 일심과 같아서 혼융되어 있으니, 이러므로 펼침과 합함(開合)이 자재하며 세움과 깨뜨림(立破)이 걸림이 없어서 펼쳐도 번잡하지 않고 합하여도 옹색하지 않으며, 세워도 얻음이 없고 깨뜨려도 잃음이 없으니, 이것이 馬鳴의 뛰어난 술법이며 『기신론』의 종체이다.
開와 合, 破와 立과 같은 대립적인 용어는 각각 중관과 유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二門 안에 만 가지 뜻을 받아들여도 어지럽지 않다?는 표현은 이들 대립적인 요소들을 二門 안에 귀속시켜도 문제없이 해결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二門은 다시 거슬러 올라가 一心이라는 구경의 용광로에서 최종적으로 통일된다. 『기신론』의 매우 복잡한 내용중에서 원효는 일심 이문의 구조에 주목하고 이를 문제해결의 기본틀로 사용한 것이다.
『기신론』의 이문을 중관․유식의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원효가 최초라고 한다. 원효 이전의 『기신론』연구로는 智愷의 『一心二門大義』(1권), 曇延의 『起信論疏』(卷上), 慧遠(523-592)의 『起信論義疏』(1권) 등이 현존하고 있지만, 그들에게서는 그런 뜻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혜원의 『기신론』주석은 심진여문을 제9식으로, 심생멸문을 제8식등으로 배대함으로써 유식학의 입장에서 보고 있다. 원효,혜원과 함께 기신론 3대 주석가의 한 사람인 法藏(643-712)의 주석은 일심 이문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대신에 '여래장이 수연하여 아라야식이 되며 또 자성이 없는 의타연기는 그 근본이 진여에서 나온 것이므로 결국 理事가 융통 무애한것'이라고 말하여 여래장 연기설 쪽으로 기신론을 주석한다. 여래장 연기설로 해석한 이유는 그의 스승이자 화엄의 第二祖인 智儼(602-688)의 사상적 노선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 한다.
중관․유식의 사상적 문제 외에도 원효가 기신론 주석에서 회통시키려 했던 또 하나의 문제는 眞俗, 혹은 세간과 출세간의 대립이었다고 여겨진다. 불교는 원래 세간사를 하찮은 티끌로 간주하는 성향이 강한 종교이므로 자연히 세간의 문제 해결에는 취약점을 보인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에 처음 들어올 때 중국인들에게 한결같이 비판받은 문제가 바로 人倫이라든가 국가경영의 문제에 소홀하다는 것이다. 유학자들의 불교비판은 주로 이러한 부분에 집중돼 있다. 따지고 보면 신라 圓光법사의 世俗五戒의 성격도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고 보여진다. 원효가 무애가를 부르면서 시정의 속인들과 춤을 추며 어울린 것도 알고보면 이러한 진속의 분별을 무너뜨릴려는 시도로 해석하여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俗에서 眞을 찾을려는 데까지 나아간다. 『기신론소』에서도 이러한 시도가 나타나 있다.
바닷물의 움직임이 곧 바람이요, 움직임의 물기운이 곧 바닷물이다. 바닷물은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까닭에 바닷물은 바람을 떠나지 아니하며 움직이지 아니하면 물기운이 아니다. 그러므로 움직임은 바닷물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닷물과 움직임은 진과 속, 본체와 현상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양자는 대립적이지만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함께 붙어다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원효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움직이지 아니하면 물기운이 아니다?라고 언명함으로써 움직이는 쪽에 더욱 비중을 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움직임의 의미를 좀더 확대해 보면 俗이 바로 眞이며, 잡다한 시장바닥이 아니면 여래의 법문을 찾을 수 없음을 말한다.
2.『金剛三昧經論』에 나타난 會通사상
『기신론소』와 더불어 원효의 걸출한 사상적 업적으로 평가되는 것이 『금강삼매경론』이다. 원래의 명칭은 『금강삼매경소』였는데, 중국의 역경가들(飜經三藏)에 의하여 『금강삼매경론』이라 하여?論?으로 존중 받았다고 한다. 중국 역경가들의 관례에 따르면 論이라는 명칭은 일반적인 저술에는 붙여 주질 않는다. 중국에 있어서도 중국불교의 기본적 틀을 완성했다고 일컬어지는 僧肇(384-414)의 저술인 『肇論』이 論으로 존숭받은 예에 해당한다. 따라서 중국의 자존심 높은 역경가들이 해동의 작은 나라인 신라 원효의 『금강삼매경소』를 승조의 『조론』과 같은 格으로 취급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 책의 내용이 탁월했던 것이다.
일본에서도 『금강삼매경론』은 매우 주목을 받았다. 원효의 玄孫 薛仲業이 780년에 신라 사신으로 일본으로 갔을 때, 그곳 眞人이 '일찌기 원효거사가 저술한 <금강삼매경론>을 열람하고, 그 사람을 보지 못했음을 깊이 한으로 여겼는데, 듣자니 신라 사신 薛은 곧 거사의 抱孫이라 하니 祖父를 보지 못했지만 그 손자를 만난 것이 기쁜 일이기에 시를 지어준다'고 하면서 원효를 칭송하는 시를 써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금강삼매경론』이 주변나라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그 이유를 禪․敎의 대립적인 요소를 화쟁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금강삼매경론』이 선종계통의 문헌임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선종계통의 문헌이라고 보는 첫번째 근거는 논의 제목에서 나타나는 '三昧'라는 용어에 주목해야 한다. 삼매는 고도의 정신적 육체적인 집중상태를 말하며 이를 禪定이라 한다. 원효는 『금강반야경』과 『금강삼매경』의 차이를 '저것(금강반야경)은 慧요, 이것(금강삼매경)은 定이다'라고 밝힘으로써 『금강삼매경론』의 定的인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定은 후대에 선종이 화엄을 비롯한 타종파를 이론에만 그친 불교라고 비판하면서 자기 종파의 실천적 성격을 부각시킬 때 제일 앞세운 항목이다. 실천이라 하면 수행에 중심을 두는 것이다.
둘째 『금강삼매경』은 시기적으로 원효가 활동했던 이후가 되는 중국 唐末시대부터 저명한 禪師들에게 널리 읽혀졌다. 예를 들어 규봉 종밀(780-841)의 『선원제전집도서』와, 영명 연수(904-975)의 『종경록』『만선동귀집』과, 송대 혜홍 각범(1071-1128)의 『임간록』『지증전』및 돈황출토의 『제경요초』등에 적지않게 인용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금강삼매경』을 주석한 원효의 『금강삼매경론』도 禪과 매우 밀접한 책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주의할 사항은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이 선종계통의 문헌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定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점이다. 慧도 역시 중시한다.
금강삼매란 일체의 모든 법을 다 쳐부수고 무여열반에 들어가 다시는 有를 받지 않는 것이다.
여금강은 작은 분량만이 비슷하다는 뜻을 취한 것으로서, 다만 번뇌를 깨뜨릴 뿐 나머지 법은 파하지 못했지만, 이른바 금강이라고 말하는 것은 온전히 같은 것을 바로 나타내는 것이니, 금강의 날카로움으로 모든 색상과 사물을 꿰뚫어 파하지 못함이 없으므로, 삼매의 공용 또한 그러하여 일체의 법을 파하지 못할 것이 없는 까닭이다.
부처님이 드신 선정은 일체의 법을 다 쳐부수어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금강삼매라 한다.
여기서 눈에 띄는 대목은 '법을 부순다'라는 표현이다. 집착중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집착이 法에 대한 집착(法執)이라고 한다. 법집을 요즘말로 하면 도그마(dogma)이다. 잘못된 도그마를 부수기 위해서는 고도의 慧가 필요하다. 定을 강조하는 목적도 결국에는 慧를 얻기 위해서인 것이다. 깊은 정에 들어가면 혜를 얻을 수 있고, 혜를 얻기 위해서는 깊은 정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볼 때 원효는 정과 혜를 수레의 두바퀴처럼 모두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은 그가 定의 異名 가운데 하나인 三摩地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발견할 수 있다.
定과 慧는 평등하여 서로 나누어 지지 않는 까닭으로 等持라 이름한다.
원효 이전까지는 三摩地를 단순히 등지라고만 해석하였으나 원효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좀더 심화시켜 이를 '정혜평등'이라는 진일보한 해석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정과 혜의 두 항목은 후일 불교사의 전개에 있어서 심각한 대립을 하게 되는데 원효는 이때 이미 이들 둘의 긴장을 인식하고 이들을 화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금강삼매경론』의 전체분량 가운데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주로 慧에 해당하는 부분에 할당돼 있다. 이때의 혜는 智慧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敎學에 관계되는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삼매의 깊은 경지는 문자로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교학적인 부분은 문자로 설명이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삼매의 경지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이지만 교학의 경지는 언어로 표현이 가능하다. 표현이 가능한 영역은 문자로서 설명이 가능한 영역까지 충분한 설명을 해줘야 한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경지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언어를 포기하는 愚를 범해서는 않된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과 『기신론소』에서 문자로 설명한 영역은 이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해석을 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가 『금강삼매경론』과 『기신론소』를 읽어 볼 때 禪書가 주는 명쾌한 느낌을 받기보다는, 敎學書적인 복잡한 느낌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기신론』의 二門에다가 교학상의 제반 문제들을 전부 몰아 넣은 후에 최종적으로 一心에서 이들을 통합 회통시킨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금강삼매경론』의 一心은 금강삼매와 일치한다. 즉 『금강삼매경론』의 一心속에는 모든 교학적인 문제를 해결한 『기신론』의 一心에다가 추가로 大禪定을 회통시킨 것이다. 굳이 『금강삼매경론』의 일심과 『기신론소』의 일심의 차이를 분별한다면 후자가 교학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심이라면, 전자는 더 나아가 '금강삼매'라는 大禪定까지를 포함하는 일심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진성공품』에서 대선정을 이름과 수를 넘어선 선정으로 밝히고 있다.
큰 선정은 모든 이름과 수를 넘어선 것임'을 밝힌 것이다 … 세간의 선정은 '이름과 수를 떠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요, 세간을 초월한 선정은 '저 이름과 수를 초월함'을 나타낸 것이다.
3. 老子思想과의 會通
『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에서 발견되는 재미있는 점은 원효가 『도덕경』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신론소』의 題名을 해석하는 대목에서?十善業을 잘 깨끗이 닦는 것으로 바퀴살을 삼으며, 淨功德 資糧으로 속바퀴를 삼으며?(以善淨十善業爲輻 以淨功德資糧轂) 라는 대목이 있다. 이는 『도덕경』 11장의 '삼십 개의 바퀴살은 비어있는 속바퀴를 중심해서 돌고 돈다. 이것은 속바퀴가 텅비어 있어야 수레의 작용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三十輻共 當其無 有車之用)와 거의 비슷한 문맥이다. 원효는 『도덕경』의 무를 바탕해야 유가 작용한다는 원리를 불교의 십선업과 정공덕자량의 원리와 회통시키고 있다. 즉 십선업을 바퀴살에, 정공덕자량을 속바퀴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바퀴살은 유, 속바퀴는 무에 해당한다.
『금강삼매경론』에서도 역시 題名을 해석하는 대목에서 ?因에는 공용이 있으나 果에는 공용이 필요 없으므로 덜고 덜어 무위에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因有功用 果無功用 損之又損之 以至無爲故)라는 대목이 있다. 이는 『도덕경』48장의 학문을 하면 날로 더해가는 것이요 도를 닦으면 날로 덜어진다, 덜고 또 덜면 무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함이 없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를 인용한 것이다. 원효는 금강삼매의 경지를 인위적인 공용을 넘어선 무위의 경지로 해석함으로써 『도덕경』의 핵심사상인 무위와 회통시키고 있다. 원효 저술의 정수라고 평가되는 『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에서 『도덕경』의 내용이 발견되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로 미루어 보아 원효는 불경 뿐만 아니라 당시에 유통되던 도교 문헌들도 섭렵했다고 추측된다. 따라서 한국 사상사의 특징인 삼교합일적 관점이 원효시대에도 이미 있었다고 추론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상으로 원효사상의 위대함을 다음의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기신론소』에서 중관․유식의 사상적 대립을 회통한 점,
둘째 『금강삼매경론』에서 선과 교학간의 긴장을 회통한 점,
셋째 이러한 회통을 시도하면서 一心으로 귀결시킨 점,
넷째 『도덕경』의 내용도 자유스럽게 사용한 점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모든 불교사상을 집결 회통시킬 때마다 즐겨 사용한 一心이라는 용어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 원효의 총체적인 사상을 한 마디로 '일심철학'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일심은 그 당시의 유명한 중국 고승들 한테서 빌려온 말이 아니고 원효 그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즉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한 마음이 일어나면 만가지 법이 일어나고, 한마음이 없어지면 만가지 법이 없어진다'는 오도송이 그것이다. 원효는 이 때의 체험을 통하여 외국유학을 취소할 정도로 확고한 깨달음과 더불어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다. 이 자신감이 결국 세계적인 수준의 중국 승려들도 해결하기 어려웠던 사상적 문제들을 종횡무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원효를 이야기 할때 이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출처] 元曉의 圓融會通사상|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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