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학의 탐구
정제두(鄭齊斗)의 심학(心學)과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전승
조선 후기 도학의 엄격한 정통의식은 더욱 배타적 성격을 발휘하였으며, 尹拯(윤증, 호 명재 明齋)은 전국 시대 패자(覇者)가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것’(협천자이영제후, 挾天子而令諸侯)처럼, 당시 도학자들이 주자를 빙자하여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억누르는 사실에 대해 ‘주자를 끼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협주자이겸중구, 挾朱子而箝衆口)이라 비판하기도 하였다. 주자의 견해와 약간의 어긋남이 보이면 곧 바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배척하는 도학의 독단적 정통론에서는 학문의 자유가 질식되고 다양성이 없어지게 되어 주자학 자체도 침체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는 반성적 인식이 당시의 개방적 유교 지식인들 사이에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도학이 근본으로 삼고 있는 의리 자체도 형식적 명분에 사로잡힌 공허한 것이라는 비판이 조선 후기의 실학의 학풍에서 제기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조선 후기 심학-양명학은 실학과 다각적인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 후기 심학-양명학을 본격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인 정제두(鄭齊斗, 하곡 霞谷, 1649-1739)는 박세채와 윤증의 문인으로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기에 심학-양명학의 학풍을 확립하고 있다. 그는 41세 때(1689) 이후 60세까지 안산에 살던 시기에 가장 왕성하게 양명학적 인식을 체계화하여 저술하였다. 또한 당시 소론계열의 대표적 학자인 스승 박세채 · 윤증을 비롯하여 친우 최석정(崔錫鼎, 명곡 明谷), 민이승(閔以升, 성재 誠齋) 등과 더불어 양명학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이 때 박세채는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을 짓고, 윤증은 「변설(辨說)」을 짓고, 최석정은 「변학(辨學)」을 지어 정제두의 양명학적 견해를 비판하였으며, 이에 대응하여 정제두는 『학변(學辯)』을 저술하여 주자의 견해에 대해 비판적 입장에서 심학-양명학의 정당성을 변론하였으며, 「존언(存言)」을 저술하여 양명학의 입장을 제시하였다.
당시 조선 후기 유교 지식인들 사이에는 양명학이 분명히 하나의 쟁점이 되고 있었으나 정제두를 중심으로 논쟁을 벌였던 인물들은 모두 소론에 속하는 사제관계나 교우관계의 친밀한 인물들 사이에 한정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양명학은 소론학파 안에서 성장하고 정제두 이후에도 소론의 가학(家學)으로 계승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정제두는 61세 때(1709)부터 8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화도 하곡리(霞谷里)로 옮겨 살았으며, 이 시기에 그는 양명학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저술을 하고 있다. 「심경집의(心經集義)」와 「정성서해(定性書解)」 같은 도학전통의 수양론서를 주석하거나 「경학집록(經學集錄)」에서 경전을 주석하고 또 자신의 후학들을 교육함으로써 양명학파를 성립시켰다. 그의 심학은 강화도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강화학파’라고 하며, 당시에 표면화되지는 못했지만 조선 후기 유교사에서는 도학의 학풍과 병립하는 학풍으로서 그 위치를 뚜렷하게 확보하고 있다.
정제두는 자신의 저술과 논변을 통해서 심학-양명학적 기본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1) 그는 생성활동하는 ‘생기(生氣)’와 영명(靈明)한 ‘정신’이 사람의 한 몸에 깃들어 ‘생리(生理)’가 되는 것이라 한다. 그의 ‘생리’ 개념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 깃든 이(理)로서 왕양명이 말하는 ‘심즉리(心卽理)’인 ‘마음의 이’(심지리, 心之理)를 가리키는 것이다.
(2) 또한 정제두는 ‘양지(良知)’ 개념을 ‘지각할 수 있는 심체(心體)의 전체에 이름 붙인 것’일 뿐이라 하여 생각이나 인식의 한 토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민이승의 「양지도(良知圖)」를 수정하여 제시한 자신의 「양지도」에서 마음의 성품과 감정은 바로 양지에서 본체와 작용이 되는 것으로 본다. ‘마음이 양지’고 ‘양지가 이’라 하여 ‘마음이 바로 이’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는 왕양명의 ‘치양지(致良知)’가 매우 정밀하지만 ‘감정에 맡기고 욕심을 따르는 근심’이 있는 것이라 하여, 양명좌파(陽明左派)에서 나타나는 욕망을 따르는 방종의 폐단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3) 그리고 ‘지행합일론’의 입장에서 그는 지와 행이라는 것은 하나의 양지와 양능(良能)이며 두 가지로 분리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지와 행을 분리된 것으로 인식될 때는 지(知, 양지 良知)에 치(致)를 붙이고 행(行)에 독(篤) 자를 더 붙인다면 그 본체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인 지각이나 행위에서는 분리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치지(致知)로서의 지와 진정한 독행(篤行)으로서의 행은 일치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4) 나아가 정제두는 자신의 심학-양명학 이론을 더욱 확고하게 뒷받침하기 위하여 경학연구에 깊은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심학 안에 경학영역을 열어 주었다. 그의 경학은 사서(四書)에 가장 많은 비중을 두고 있지만 그는 성인(聖人) 공자의 학문이 『대학』에 있으며, 전장(典章)이 『춘추』에 있다 하여 『대학』과 『춘추』를 성인(공자)의 학문과 제도를 이루는 두 축으로 삼고, 이 성인의 두 경전을 밝힌 경전이 바로 『맹자』라 파악하는 독특한 경학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정제두 이후 강화학파의 전승과정에는 그의 문인으로 이광명(李匡明) · 이광신(李匡臣, 항재 恒齋) · 이광사(李匡師, 원교 圓嶠)의 종형제들이 있다. 이광신은 「의주왕문답(擬朱王問答)」을 지어 주자와 왕양명의 학풍을 비교 · 검토하였다. 이광사는 당대 서예를 대표하는 명필로서 정음(正音) 연구에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아들 이긍익(李肯翊, 연여실 燃黎室) · 이영익(李令翊, 신재 信齋)을 통해 심학이 가학으로 계승되었고, 실학적 역사연구에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이광명의 아들 이충익(李忠翊, 초원 椒園)을 이어 그 후손으로 이면백(李勉伯) · 이시원(李是遠)을 거쳐 한말의 이건창(李建昌, 영재 寧齋) · 이건승(李建昇, 경재 耕齋) · 이건방(李建芳, 난곡 蘭谷)으로 가학이 이어지고, 이건방의 문인 정인보(鄭寅普)로 강화학파가 계승되어 갔다. 이광려(李匡呂)도 문인 정동유(鄭東愈)에게 강화학풍을 전승해 주고, 정제두의 문인 신대우(申大羽)는 아들 신작(申綽, 석천 石泉)에게 강화학풍을 전했는데, 신작은 고증학자로 탁월한 인물이었다. 정제두의 아들 정후일(鄭厚一)을 이어 그 후손으로 정문승(鄭文) · 정기석(鄭箕錫)으로 강화학의 가학이 이어 가기도 하였다. 강화학파의 학풍은 양명학을 표방하여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실학의 여러 영역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조선 후기 실학파의 중요한 학맥인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이병휴(李秉休) · 이기양(李基讓) · 권철신(權哲身) · 한정운(韓鼎運) 등은 강화학파와 별도로 18세기 후반부터 양명학을 수용하여 실학적 학풍의 형성에 활용하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조선 후기 심학은 실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점에서 그 특징의 일면을 드러낸다.
양명학은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러 새로운 각광을 받고 의미를 부여받기 시작하였다. 조선 말기 사회에서 도학이 침체되고 새로운 사회변동에 대하여 적응하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신념으로서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서도 큰 비중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계열의 인물들로 박은식(朴殷植, 백암 白巖)과 정인보(위당, 爲堂)를 들 수 있다. 박은식은 애국계몽운동가로서 스스로 도학에서 양명학으로 전환한 이후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를 저술하고 양명학적 정신에서 유교개혁론을 전개하여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저술하였다. 정인보는 이어서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저술하고 실심(實心)을 강조하며 ‘조선얼’이라는 민족정신을 역설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제두(鄭齊斗)의 심학(心學)과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전승 (한국유학의 탐구, 1999. 6. 10., 금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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