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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해탈.열반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제4강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범부가 부처가 되는 길’, 거기에 불교의 핵심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핵심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 어떠하였는가를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으시는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셨을까? 이것은 부처님이 얻으신 깨달음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 있어서 싯다르타 태자의 심경까지 자세하게 전하는 경전은 없다. 하지만「사분율(因分律)에 싯다르타 태자가 육년 고행을 욕심과 악(惡)과 불선법(不二善法)이었다고 고백하는 부분은 우리에게 그 심정을 추적함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싯다르타 태자의 육년 고행은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와 철저한 금욕(禁欲)의 생활이었을 텐데, 왜 싯다르타 태자는 그리한 생활을 욕심과 악과 불선법의 생활이었다고 고백하였을까. 하지만 우리는 육년 고행을 하면서 싯다르다 태자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인간은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은 이세상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 있고 그러기에 노(老), 병(病), 사(死)의 고통이 담아 있다. 그러면 늙음,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가. 병, 병들음,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가? 아니면 죽음,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가? 아니다. 젊음에 접착하여 늙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 건강에 접착하여 병이 들고 싶어 하지 않는 나의 마음, 삶에 애착을 느껴 죽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병들음과 늙음과 죽음이 태자를 괴롭혔던 것이 아니라, 젊음과 건강과 삶에 집착하는 태자의 마음이 태자를 괴롭힌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태자가 가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에 육년 고행은 생로병사에 집착되어져 있는 욕심. 악. 불선법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또 궁전에서 풍족한 재물과 아리따운 여색에 빠져 살던 삶과 재물을 멀리 하고 여색을 멀리 하며 살았던 육년 고행의 삶 그 두 가지의 삶 모두가 재물과 여색에 집착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궁전에서의 삶만이 재물과 여색에 집착한 삶이었고. 육년 고행의 삶은 재물과 여색에 집착한 삶이 아니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재물과 여색을 추구하는 것이나 또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 재물과 여색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 태자가 육년 고행 역시 재물과 여색에 빠진 모습이었기에 욕심과 악과 불선법이었다고 고백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면서 태자는 육년 고행의 결과로써 삼법인(三法印)을 발견한 것이다. 모든 것은 항상 변화하기에 항상 하는 것이 없건만 항상 하여야 한다고 착각하는 태자의 마음(諸行無常)이 태자를 괴롭히는 것이었고, 또 늙음이 자신의 것이 아니면 이 젊음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닌데 늙음만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고 젊음은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마음(諸法無我)이 태자를 괴롭혔고,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진정한 나란 이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하고서 참 나를 찾아 참 나와 함께 사는 것이 바로 생로병사를 초월한 경지(涅槃寂靜)라는 사실을.......

이러한 결론은 태자로 하여금 육년 고행을 그만두도록 하였다. 태자의 마음속에는 생로병사를 초월하는 어떠한 경지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있어서 커다란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삶, 건강, 젊음에 짐작하여 죽음, 병, 늙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집착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젊음, 건강, 삶에 집착하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하여 마을의 소녀인 수자타가 공양 올리는 우유죽을 받아 드시고 나이아자라 강가에서 목욕을 하시기 시작했다. 이것은 다시 육년 고행으로 인하여 지쳐버린 심신을 달래고서 진정으로 구해야 할 참 나를 발견하실 명상에 들어가시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태자의 모습을 보고 태자와 함께 수행하던 다섯 명의 비구는 태자가 타락하였다 하여 태자의 곁을 떠나버렸다. 이제 홀로 되어 버린 태자는 보리수 밑에 앉아 참 나를 찾기 위한 최후의 명상에 몰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태자는 참 나를 찾기 위하여 자신의 내면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까지 부정하려고만 했던 자신의 번뇌가 있는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경전은 마왕이 부처님에게 쳐들어오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사실이 태자를 괴롭혔던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젊음, 건강, 삶에만 집착했던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 괴롭힌 것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리고 늙음과 병들음과 죽음이 두려워 떨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 그것이 가장 먼저 보였던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태자가 인정하기 싫었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늙음과 병들음 죽음을 향하여 6년 동안 철저하게 고행하였던 것이다. 고행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면 그냥 인정하면 될 것을.

이렇게 모든 것이 무상한 자연 현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거늘, 단지 모른다고 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자기 자신, 그리고 그것을 수용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싯다르타 태자는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러한 두려움도 스스로의 내면에 용해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 모습을 경전에서는 마왕이 공갈, 협박을 하는 모습으로 쓰여 있고, 그러한 마왕이 태자의 내면에서 용해되어짐을 경전에서는 싯다르타 태자가 마왕을 물리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추악한 자신의 모습을 태자는 만나게 된다.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러한 것을 부정하려고만 했던 자신의 모습, 그러한 모습은 그것을 긍정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재물과 명예, 권력을 부정하려는 그 마음 또한 그것을 인정하는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싯다르타 태자는 처음으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이미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버리려는 마음도, 구하려는 마음도 모두가 싯다르타 태자의 내면으로 용해되어져 버렸던 것이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마왕이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태자를 유혹하였고 태자가 이를 물리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태자는 마지막으로 추악한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즉 애욕을 부정하려고 하였던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 또한 애욕을 긍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마음과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태자는 이러한 자기 자신의 모습도 긍정하였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애욕 또한 태자의 내면에서 용해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 부분을 경전은 마왕이 절세미인인 자신의 세 딸을 보내어 태자를 유혹하고, 태자가 이것을 물리치는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태자가 발견하신 참 나의 모습은 청정하고 깨끗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태자는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그러한 모습들은 이미 자신의 적이 아니었고 자신이 극복하여야 할 어떠한 대상도 될 수가 없었다. 즉, 이렇게 추악한 마왕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쫓아내려 하지 않고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내면에서 용해시켜버리고 이미 그러한 세계를 초월해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불교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가르침이 아니다. 즉 사함과 정의로움을 구분하여 사함을 부수고 정의로움을 세우려는 그러한 가르침은 아닌 것이다. 사함과 정의로움을 구분하려는 분별심을 그만 두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함의 위치에 섬으로써 그 사함과 정의로움을 자신의 내면에서 용해시켜 버리는 그러한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는 파하여야 할 대상이 없고 그러니 적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없다. 따라서 경전에 등장하는 마왕의 그 모습 또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의 모습으로서 인정하여야 할 대상인 것이다.

즉, 스스로의 모습이 마왕임을 인정한 싯다르타 태자가 부처가 된 모습, 이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합리화 시키려 하고 변명하여, 스스로를 장식하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는 곳에 번뇌가 있고, 또 그것을 인정하는 곳에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싯다르타 태자는 부처가 되었다. 하지만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은 깨달음의 내용을 일반 중생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마왕임을 인정시키는 것이 그 깨달음의 요지인데 다른 이가 "당신은 마왕이오"라고 하는 말을 듣고서 그 말을 기쁘게 들으며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아마 그런 말을 하는 이를 보고 "당신이야말로 마왕이오"라며 공격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 때문이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스스로만의 깨달음으로 만족하시고 그만 열반에 드시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부처님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생각들이 전광석화처림 스치고 지나갔다. "나도 분명히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왕의 성품을 이기려고 육년 고행도 하였다. 그러한 나도 내가 마왕임을 인정할 수가 있었다. 과연 이것은 내가 수승하여서 그랬던 것일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이러한 참 나를 드러나게 하였단 말인가. 커다란 바위에 떨어지는 물방울,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물방울에 의하여 거대한 바위에 구멍이 뚫리는 것, 과연 그것은 그 물방울만의 힘일까. 아닐 것이다. 바위에게 구멍이 뚫릴 성질이 없었다면 아마 그 구멍은 뚫리지 않았을 것처럼 아무리 내가 진리를 보고자 노력하였어도 진리가 나를 깨우치고자 하는 성질이 없었다면 나는 진리를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참 나를 발견한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나에게 참 나를 발견시켜 주려는 또 다른 힘이 있었구나. 그것이 무엇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른 싯다르타 태자는 더욱 깊은 사색에 빠져 들기 시작하였다. 그 사색은 진리에 대한 사색이었다. 그리고 결론에 이르렀다. 스스로에게 불성이라는 거울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제까지 그 불성이라는 거울에 자기 합리화와 자기변명이라는 이물질이 끼어 있었기에 참 나를 볼 수 없었고, 그리고 이 거울은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으며 진리의 힘은 끊임없이 모든 중생에게 참다운 자신의 모습을 비쳐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결론에. 그리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중생들에게 스스로가 마왕임을 가르쳐 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성이라는 거울에 끼어있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변명이라는 이물질이 제거되도록 도와주어야겠다. 그러면 그들 스스로가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부담 없이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느새 녹야원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성에 대한 발견과 항상 참 나를 발견시켜 주려는 진리의 움직임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처럼 현재도 모든 중생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은 부처님. 즉 진리의 작용에 대한 발견이었고 그것이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대한 발견이었다. 이렇게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은 완성되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자기 합리화와 자기변명 속에 묻혀버린 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 즉 참 나의 발견이며 그 참 나의 발견을 도와주고 또 항상 함께 하시는 부처님에 대한 발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카페 : 금강/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 윤거사

[출처] [펌] 제4강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작성자 정진연하경

[출처] 제4강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