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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해탈.열반

깨침 혹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 고타마 싯다르타의 중도(中道) 연기(緣起)와 분황 원효의 일심(一心) 일각(一覺) ―

깨침 혹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 고타마 싯다르타의 중도(中道) 연기(緣起)와 분황 원효의 일심(一心) 일각(一覺) ―

 

이 논문은 고타마 붓다(기원전 624~544)와 분황 원효(617~686)의 깨침 혹은 깨달음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싯다르타는 진리에 ‘눈을 뜬’ 수많은 붓다 중에서도 탐욕[貪]과 성냄[瞋]과 어리석음[癡]의 삼독심을 버리고 가장 완벽한 해탈(解脫, vimutti/vimokkha) 열반(涅槃, nibbāna)의 길을 열음으로써 붓다의 이름을 전유(專有)하게 되었다. 붓다가 열어젖힌 해탈 열반은 선정 수행과 고행 수행을 넘어서는 완전한 깨침의 길이었다. 「초전법륜경」에서 설하는 것처럼 그것은 ‘중도’(中道) 즉 팔정도와 사성제 즉 십이연기의 가르침이었다.

 

원효는 무덤 속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각과 시각을 아우르는 ‘일각’(一覺)과 본각과 시각을 가로막는 불각 중 특히 그 속의 지말불각인 삼세(三細)상과 육추(六麤)상을 지멸시키고 보편적 마음인 ‘일심’을 발견하여 ‘눈을 뜬’ 붓다가 되었다. 카필라와 신라 즉 인도와 한국에서 일 천여 년이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붓다의 깨침과 원효의 깨침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다는 점에서 연속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두 사람의 방법에 있어서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내재해 있다.

 

그 연속성 위에서 싯다르타의 독자성이 드러나고 있으며, 그 불연속성 위에서 원효의 독자성이 나타나고 있다.

 

싯다르타는 사성제의 각성제를 세 가지 양상으로 살폈다. 먼저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다’[苦聖諦],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 한다’,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완전하고 바르게 이해했다’. 이어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다’[集聖諦] →‘이 ~는 바르게 잘 버려져야 한다’ → ‘이 ~는 이미 버려졌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다’[滅聖諦] → ‘이 ~는 마땅히 실현되어야 한다’ → ‘이 ~는 이미 완전히 실현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다’[道聖諦] → ‘이 ~는 마땅히 닦아야 한다’ → ‘이 ~는 이미 철저하게 닦았다’고 섬세하게 관찰했다. 그리하여 고성제에 대한 세 가지 양상 → 집성제의 세 가지 양상 → 멸성제에 대한 세 가지 양상 → 도성제에 대한 세 가지 양상을 아우르며 각 성제를 세 가지 양상의 단계로 살펴 모두 열 두 가지 형태를 조망했다. 그 결과 고타마 붓다는 “나는 태어남은 이미 다했고[我生已盡], 범행은 이미 확고히 섰고[梵行已立], 할 일은 이미 다해 마쳐[所作已作], 스스로 윤회의 몸을 받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自知不受後有]고 하였다. 이처럼 고타마 싯다르타는 각 성제에 대한 세 가지 양상을 살펴서 네 가지 성제를 ‘있는 그대로 알고’ → ‘보는 것이 완전하고 청정하게 되었을 때’ 천인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왕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선포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지견’(智見)이 생겨났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지견’ 즉 지혜로운 안목은 “내 마음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며,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효는 삼세상에 무명업상(無明業相), 능견상(能見相), 경계상(境界相)을 배속하고 제8아뢰야식 위(位)에 배대하고 있다. 육추상의 첫 번째인 지상을 제7 말나식 위(位)에 배대하고, 육추상의 상속상, 집취상, 계명자상, 기업상, 업계고상을 제6 요별경식 위(位)에 배대하고 있다. 이러한 배대는 제8 아뢰야식 위(位)를 제외하는 이전의 담연(曇延)과 혜원(慧遠)과 다른 것이며, 제8 아뢰야식 위(位)를 인정하면서도 제7 말나식 위(位)를 제외하는 이후의 법장(法藏)과도 구분되는 독자적인 주장이다. 여기에는 원효의 인간 이해와 세계 인식이 투영되어 있다. 원효는 제8 아뢰야식 위(位)에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제7 말나식 위(位)에 지식(智識), 제6 요별경식 위(位)에 상속식(相續識)과 의식(意識)을 배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육염심(六染心)에는 제8 아뢰야식 위(位)에 근본불상응염(根本不相應染),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 현색불상응염(顯色不相應染), 제7 말라식 위(位)에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 제6 요별경식 위(位)에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 집상응염(執相應染)을 배대하고 있다. 원효는 이러한 배대를 통해 오염을 탈각시켜가는 자신의 수행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붓다의 깨침 과정과 원효의 깨침 과정이 즉자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다. 이들 사이에는 불교사상사의 깊고 넓은 성취가 있다. 불교의 기반을 만든 붓다와 이후의 원효와 같은 불학자들이 심화 확장시켜낸 깨침 이론이 즉자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다만 불교의 궁극인 깨침 혹은 깨달음 내지 성불 혹은 열반이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노력 자체가 또 하나의 수행과정이 아닐까 한다. 인도의 고타마 붓다와 한국의 붓다로 불리는 분황 원효의 깨침 혹은 깨달음의 무엇이 연속되고 무엇이 연속되지 않는가를 밝히려는 시도 자체도 우리의 수행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물음은 논자에게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출처] 깨침 혹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 고타마 싯다르타의 중도(中道) 연기(緣起)와 분황 원효의 일심(一心) 일각(一覺) ―|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