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緣起와 중도中道
연기緣起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하여 생기는 상관관계의 원리이다. 연기란 인연의 이치를 말하며 이를 차연성此緣性(이것에 연유하는 것, 상의성相依性)이라고 하는데, 현상의 상호 의존관계를 가리킨다. 현상은 무상하며 언제나 생멸生滅, 변화하는 것이지만, 그 변화는 무궤도적無軌道的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일정한 움직임을 가지는 것이며, 그 움직임의 법칙을 연기라 한다.
이 법칙은 붓다의 출현과는 관계없이 법法으로 결정되어 있는 차연성의 것이다. 연기설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그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그것이 멸한다”라는 불설佛說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말의 뜻은 조건에 의하여 생기는 현상의 법은 그 조건을 없앰으로써 모두 멸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연기와 법은 불교의 근본적인 특징으로서의 법인설法印說로부터 연기설이 생긴 것이므로, 연기설은 불교의 근본설이며, 연기를 법 자체라고도 한다. 원시 경전 속에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든가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나佛를 본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원시불교Primitive Buddhism에서 대승불교大乘佛敎에 이르기까지, 인도·우리나라·일본 등의 모든 불교국가에서는 이 연기설을 그 중심사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설이 충분히 이해되면 불교 자체가 이해되는 것이다. 연기설이야말로 불교의 중심사상인 동시에 불교가 다른 종교와 철학과는 상위相違되는 불교특유의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중도中道의 여러 가지 설 가운데 원시불교原始佛敎의 중도설, 중관파中觀派의 팔부중도설八不中道說, 천태종의 삼제원융관三諦圓融觀에 의한 중도가 널리 채택되었다. 원시불교의 중도설은 불교의 가장 근본 입장이 되고 있다.
석가모니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될 때까지 6년 동안을 대부분 가혹한 고행의 도를 닦았다. 그러나 그 고행도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일 뿐 참된 인생문제의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출가 전의 왕자로서 물질적으로 풍족하여 즐거움에 찬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나 그러한 물질적 풍족함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는 출가 전의 낙행樂行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버리고 고와 낙의 양면을 떠나서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는 중도에 설 때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도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에 의해서 자각한 것이다. 성도成道 후 함께 고행을 한 5인의 비구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한 것도 중도였다.
중도는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지탱되는 준엄한 도이며, 여기서는 나태·번뇌·노여움·어리석음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것에 집착하려고 하는 어떠한 일변도 모두 버려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참다운 진리가 모든 집착이나 분별의 경지를 떠난 무소득無所得의 상태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삼제원융관三諦圓融觀의 중도에 의하여 모든 존재가 제법실상諸法實相임을 밝히고 있다. 삼제는 진제眞諦로서의 공空, 속제俗諦인 가假,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진리인 중中의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제설은 수나라의 승려 지의智顗(538-97)가 처음으로 주창한 뒤 천태종의 근본교설이 되었으며, 그 뒤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 학설로 정착되었다.
원래 이 삼제설이 주창된 까닭은 제법의 실상이 중도에 있음을 밝히는 데 있으며, 공·가·중이 서로 원융圓融(모든 법의 사리가 구별 없이 널리 융통하여 하나가 되다)한 것을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
삼제 가운데 공제는 진리의 측면에서 이 세상을 본 것으로, 진리의 측면에서 보면 이 세상은 인연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제는 세속의 측면에서 이 세상을 본 것으로, 이 세상의 고정불변한 듯한 모든 것이 실제는 거짓과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중제는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의 입장에서 실상을 본 것으로, 제법의 실상을 공이나 가의 일면으로 관찰할 것이 아니라 중도의 절대적인 입장에 서서 진리를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삼제의 설은 교학적으로 매우 발전하여 쉽게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공과 가는 서로 진眞과 속俗이라는 상대적인 상황에 있고, 중은 진과 속을 가장 분명하게 이어주는 것이므로, 삼제는 어느 하나가 빠진 상태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셋의 관계를 삼제원융三諦圓融이라 한다.
삼제원융을 관하는 것을 삼제원융관三諦圓融觀이라고 하며, 중생의 일심이 곧 삼제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관하는 것을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 한다.
연기緣起와 중도中道라는 깨달음이 우리에게 실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엄격히 말하면 연기와 중도가 서로 다른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연기는 올바른 인식의 측면을 가리키고, 중도는 올바른 실천의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인연因緣은 연기의 다른 표현이다. 인연이란 연기를 보다 실체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연은 불교에서 파악한 현상전개의 인과법칙을 보다 명확히 표현한 개념이다.
이를 인간의 삶이라는 주체적 입장에서 이해할 때, 인연에서 인이란 나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나의 입장이나 견해나 주장을 뜻하는 한편, 연이란 다수의 존재방식으로서 나의 입장에 대한 타인, 즉 사회의 신용을 뜻한다. 그래서 인은 하나의 원인이요 연은 복수의 원인이라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해 역사와 현실은 전개된다고 보는 것이 인연이다. 그래서 붓다는 인연관을 통해, 자기라는 하나를 전환하여 타인이라는 복수를 낳는 생성의 이론을 주창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나와 사회가 별개일 수 없다는 불교적 인식이며, 인간 각자는 사회발전의 주체요 동력임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은 어떤 조건을 갖추는 동력인動力因이요, 연은 그 동력인이 영향을 미치는 질료인質料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인간이 자기 창조의 법칙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연 또는 연기는 곧, 중도요 공空이다. 근본경전에는 '중도 연기, 연기 공'이라는 이해가 이미 표출되어 있으며, 대승불교에 이르면 '공 연기 중도'라는 공식이 명확히 드러난다.
중도란 극단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태도로서, 고통과 즐거움의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다는 입장에서,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 또는 유한하다거나 무한하다는 생각의 어느 한쪽에 빠지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팔정도八正道와 육바라밀六波羅蜜(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해야 할 여섯 가지의 수행)이다.
중도를 설하는 경전에서 '중中에 의해 법을 설한다'고 하는 그 법의 내용은 '무명無明을 연緣으로 하여 행行이 있다'고 시작되는 십이인연十二因緣을 가리키고 있다. 중도가 연기임을 뜻하는 것이다.
[출처] 연기緣起와 중도中道|작성자 문화메신저
'연기설. 사성제. 중도. 삼법인. 오온'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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