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연사계
무비無比 스님 / 범어사 승가대학장
세불가사진勢不可使盡 복불가수진福不可受盡
규구불가행진規矩不可行盡 호어불가설진好語不可說盡
세력을 다 쓰지 말라.
복을 다 받지 말라.
법을 다 행하지 말라.
좋은 말을 다 말하지 말라.
- 오조법연 법연사계(法演四戒)
이 글은 오조 법연(五祖法演, ?~1104)스님이, 그의 제자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스님이 서주(舒州)의 태평사(太平寺) 주지를 맡게 되자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일러준 매우 간곡하고 요긴한 경책의 말씀이다.
당시 총림의 주지라면 1000여 명의 대중을 거느린 방장이요 조실이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눈 푸른 납자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수행을 지도하는 소임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에게 주지로서 반드시 삼가야 할 것을 일러준 것이 이 법연사계다.
스승의 이러한 사전 경책의 말씀으로 인하여 원오스님은 총림의 주지직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수많은 명안종사를 길러냈으며, 소위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라는 천하의 명저 <벽암록(碧巖錄)>을 세상에 남기게도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주지를 맡아 나가든가 중요한 소임을 보는 사람들은 으레 이 가르침을 좌우명으로 삼는 예가 많아졌다.
‘세력을 다 쓰지 말라’는 말은 주지가 되거나 총무원장이 되거나 대통령이 되거나 사장이 되거나 아니면 심지어 한 시골 마을의 동장이 되더라도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이나 힘이나 권세를 모두 다 쓰지 말라는 뜻이다. 만약 세력을 다 쓰게 되면 반드시 화가 돌아온다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분위기에 편승해서 정신을 잃고 놀아나기가 쉽다. 사실은 어떤 자리에 올랐을 그때가 가장 위험한 때다. 행운을 누릴 때야말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국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불행할 때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운이 돌아왔을 때 파국의 징조가 고개를 드는 것이다. 자리에 올랐을 때 함부로 살지 말고 반드시 엷은 얼음을 밟듯이 조심하며 살라는 뜻이다.
‘복을 다 받지 말라’는 말은 설사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재력이나 기타 의식주 문제에 있어서 넉넉한 복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모두 다 쓰면서 살지 말고 언제나 절약하고 검소하며 다른 사람의 사정도 살펴 가며 살라는 뜻이다.
만약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복이라고 해서 그것을 다 쓴다면 반드시 복력은 고갈되어 곧 바닥이 나고 마는 것을 스스로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인연은 외롭고 곤궁할 것이다. 설사 흘러가는 시냇물은 무한하지만 내가 쓸 물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흘러가는 물마저 아껴 써야 한다.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모범을 다 행하지 말라’라는 말은 단체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 모범적인 태도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언제나 모범을 앞세우고 솔선수범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오히려 번거롭게 생각하고 부담을 주는 일이 된다는 뜻이다. 지도자로서 너무나 빈틈이 없는 것은 사람들이 부담을 느껴서 그를 멀리하게 된다. 규칙적인 것이 좋은 점도 있으나 사람이 좀스러워 보인다.
관리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어딘가 빈틈이 있어서 숨구멍을 열어준다면 훨씬 인간적으로 존경하게 된다는 뜻이다. 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듯, 다 배웠으면서도 배우지 못한 듯, 다 경험하였으면서도 처음인 듯, 그래서 약간은 어리석고 부족한 듯 한 지도자가 오래 가는 지도자다.
‘좋은 말을 다 말하지 말라’라는 말은 아무리 좋은 말과 교훈이 되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전부 다 털어놓으면 사람들은 반드시 쉽고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다. 어떤 좋은 말일지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하거나 너무 세밀하게 하거나 하면 그 맛은 반감하고 만다. 어려운 일이지만 여운이 남는 알맞은 양의 말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한국불교에서도 이러한 풍토가 다시 살아나서 모든 소임자들이 이 법연사계(法演四戒)를 좌우명으로 삼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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