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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 묵조선. 선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선禪까지(142) 선종의 수행론-조사선②등현스님 /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선禪까지(142) 선종의 수행론-조사선②

등현스님 /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밖에 다른 마음이 없다. 그대들은 지금의 ‘자신의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믿으라.”

 

삶과 죽음은 의식이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을 향해 가는 것에 불과하다. 모든 나타난 현상, 경험되어지는 세계는 본래 고요하고 적멸하다. 왜냐하면 대상들은 형상, 이름, 분별들인데 모두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고, 의식이 의미를 주지 않으면 대상들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본래의 법은 모양(無相, ābhāsa)도 개념도 없기 때문에 수행의 순서나 상속도 말할 수 없다. 큰 불덩이가 맹렬히 타오를 때 여러 모양과 색깔이 다채롭게 보이듯이, 삼계(三界, 三有)는 모두 마음이 드러난 모양일 뿐이고, 현재나 과거로 투사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적멸의 상태를 벗어난 적이 없다.

 

적멸의 상태를 여환삼매로 여러 모양으로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여래의 마음이다. 적멸한 까닭에 초지와 여래지의 구별이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만 돈오하면 돈수이고 점수를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

 

모든 단계의 경지와 불지(佛地)도 오직 마음일 뿐이어서 영상(影像, akara)이 없으므로 깨달음을 주장(pratijñā)하는 어떠한 상태도 용납하지 않으니, 오직 자기 마음뿐임을 보면 곧 시비 분별을 여읜다. 이것이 바로 귀류논증의 핵심이다.

 

모든 대상을 경험할 때마다 보는 마음으로 돌아온다면 시비와 취사를 떠나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니, 보는 마음의 성품은 청정하기 때문이고, 청정한 마음으로 보면 세간은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이기 때문이다.

 

마조가 강조한 이 마음은 그런 의미에서 생멸심이 아니고 여래장의 마음이다. 이 여래장의 마음이란 모든 것을 알면서 모든 것에 물들여지지 않는 여래의 마음이다. 그러나 여래장을 영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여래장이 영원하다면 외도의 아트만 설과 동일하게 될 것이고, 만약 무상이라면 주체와 객체로 나뉘어 필경 단멸하여 없어지고, 여래의 복과 지혜마저 다 헛될 것이므로 여래장은 무상함이 아니다.

 

여래는 다른 의미에서 영원하다. 왜냐하면 현재의 지혜로써 영원한 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깨달은 지혜는 영원하니 여래도 또한 영원하다. 모든 여래가 깨달은 법의 성품(法性)은 여래께서 세간에 나오거나 않거나 항상 머물러 있어 바뀌지 않으며, 이것이 공하여 없는 것은 아니다. 여래란 청정한 지혜로 법성을 깨달아 그 이름을 얻은 것이지, 심의식(心意識)이나, 온처계(蘊處界)등의 무상한 법으로써 이름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계는 모두 허망한 분별이지만 여래는 허망한 분별이 아니다. 여래는 일체법이 생하지 않음(無生相)을 깨달았기 때문에 상(常)과 무상(無常)의 양변을 초월한다. 나아가 조금이라도 분별이 남아 있다면 항상하고 무상함의 허물이 있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존재와 무’의 두 가지 분별을 없애어 조금도 두지 말아야 하고 적정분리의 견해가 소멸되어서는 안된다. 여래는 상(常)과 무상(無常)을 멀리 떠나있지만, 상과 무상을 인연 따라 자유롭게 나투나니 이와 같이 부처님을 관하면, 사견을 여의게 된다.

 

이러한 여래장의 마음을 바르게 관하는 것을 마조는 평상심이라고 보았다. 여래장이 시비 분별에 휩싸이면 제8 알라야식으로 드러나고, 시비 분별이 사라지면 제8식이 청정해지며, 그 청정해진 마음을 여래장 또는 평상심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조는 “만약 도(道)를 알려고 할진대는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이다. 평상심이란 조작(造作)이 없는 마음이다. 시비(是非)와 취사(取捨)가 없고 범성(凡聖)과 단상(斷常)이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출처]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