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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 묵조선. 선

看話禪에서 話頭의 양면적 기능

看話禪에서 話頭의 양면적 기능

김 호귀

 

1. 간화선과 화두

2. 화두의 수행

3. 화두수행의 목적

4. 화두의 양면적 기능

 

1. 간화선과 화두

 

간화선은 화두수행이다. 이것은 화두의 수행이라는 의미로서 그 수행방식에 기초한 말이

기도 하다. 그런데 화두수행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화두 그 자체를 수행한다는

말인가, 화두를 통해서 그 어떤 것을 수행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화두가 그대로 수행이라는

말인가. 이만큼 화두수행에서 화두와 수행의 관계는 밀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별개적인 것

이다. 그러나 화두와 수행에 대하여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딱히 갈라서 논할 수 없다는

것에 화두수행의 본질이 있다. 곧 화두와 수행은 전혀 별개의 갈래이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

자면 화두는 種의 개념이고 수행은 類의 개념이다. 따라서 화두와 수행을 평등한 관계에 놓

고 그 관계를 설정한다면 그 시도가 무모한 일이다. 애초부터 평등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의 경우 황인종을 예로 들자면 황색이라는 것과 인간이라는 것은 같은 범주가

아니다. 때문에 황색과 인간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다른 백색과 검은 색깔을 염두에 둔 개념

으로서 그 색깔의 입장에서만 그 관계를 비교할 수 있다. 황색을 지닌 인간이라 할 경우 얼

굴만 그런가, 몸 전체가 그런가, 피부만 그런가, 마음도 그런가. 마찬가지로 화두와 수행의

관계는 화두가 수행 그 자체인가, 화두를 통한 수행인가, 화두라는 수행인가 하는 점에서 논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적어도 간화선에서 수행의 본질적인 측면을 말할 경우 최소한도의 개

념정의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위에서 간화선은 화두의 수행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말은 화두가 수행에 필요

하다는 말임과 함께 화두를 수행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곧 간화선의 수행이 화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서 화두 자체를 수행한다는 말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화두를 필요로 한다고 말할 경우의 의미는 다분히 화두가 지니고 있는 도구적이고

수단적인 기능을 가리킨 말이다. 그리고 화두 자체를 수행한다는 것은 화두가 깨침의 다른

모습으로서 화두와 깨침이 분리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전자의 경우는 무엇

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인가, 그리고 후자의 경우 화두가 그대로 깨침이라면 화두를 타는 순

간 깨침을 얻는 것이 아닌가, 또한 수단과 도구로서의 화두와 깨침과 분리되어있지 않는 깨

침의 양태로서의 화두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간화선 수행에서 화두가 지니고 있는 이

와 같은 세 가지 점에 대한 측면을 무시해버리고 그저 단지 화두만 들어야 한다는 경우에

화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이 점은 화두가 지니고 있는 양면적인 측면과도 결부

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화두의 양면적인 성격을 먼저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2. 화두의 수행

 

선종의 수행방식에서 가장 독특한 것 가운데 하나가 화두를 통한 수행이다. 화두수행은

불교가 중국적으로 전개된 대표적인 사례로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선수행에서 그 보

편성을 인정받고 있다.1) 널리 보면 많은 선수행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선종

자체에서의 화두수행의 위치는 단연 압도적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행되고 있는 선법만

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을 통한 그 전개와 구미 및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래되고 있는 실정

이다.

 

1) 중국적이라는 말은 인도의 선법에서 보이는 차제적인 수행과 각 단계마다 설정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를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국적인 조사선의 개념에서 말하는 돈오적인 개념을 다분히 함유하고 있다. 중국에서 성립한 선종의 선의 특징의 하나로서 動的인 大機大用이 중시되고 있음을 들 수가 있다. 인도의 선은 염화미소의 고사에서 볼 수 있듯이 靜的이다. 그러나 이것이 중국에 들어와서는 臨濟錄의 경우만 보더라도 棒과 喝의 활용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인도에서 좌선을 중심으로 한 좌선이 중국에서는 문답상량을 중심으로 한 견성법문으로 전개되어 그것이 棒과 喝로 나타난 것으로 볼수 있다. 여기에서 문답상량을 선자들은 초논리적․모순적․비유적․즉물적인 표현방식으로 구사하였다. 이 문답상량이 정형화된 것이 곧 화두이다. 화두의 초기에는 스승이 문답으로서가 아니라 理法으로서 제자를 제접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가면서 많은 제자들을 제접하려는 고정화된 방식으로 현성되었다. 이처럼 화두가 고정화 내지 정형화되어감에 따라 고인의 일화 내지 언어와 신체행위 등이 하나의 표준으로 사용되어 갔다. 그 화두에 다시 拈古내지 頌古를 붙여 고인의 화두에 대한 追體驗을 하려는 참구태도가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송대에 간화선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화두의 성립은 역사적으로 석존의 성도에서 그 발단으로 엿볼 수 있다. 석존은 깨

침을 이루고서 「생사를 관찰하고 梵行을 하여 일체행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다시는 다음 생

을 받지 않는다.」 2) 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석존의 大悟의 경지야말로 불교의 本源이며 선의 起源임을 설파한 것이다. 지극히 간결하게 표현된 석존의 말을 보면 그 대오의 경지를 지식분별로써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久遠實成의 생명관도, 悉有佛性의 一乘思想도 모두 이 대오의 경지의 自內證的인 소산과 차이는 없지만 그 어느 것도 자내증 그 자체는 아니다. 깨침의 경지는 이와 같은 이론과 사상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 갇혀 있지 않고 훤칠하게 벗어나 있다.

2)「佛所行讚」卷4, (大正藏4, p.32上) “觀察生死流而擧於梵行一切作已作更不受後有”

 

이와 마찬가지로 화두란 직접 선에 참여하여 깨달은 사람들이 그 깨침의 경지를 표현해

놓은 말과 행위를 가리켜 일컫는 말이다. 그 말과 행위에는 다만 깨침의 경지에서 살아가는

것일 뿐 하등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도 있는가 하면, 특별히 남을

위하여 깨달은 심경을 보여주려고 하여 말하거나 행동한 것도 있다. 어쨌든 그 말과 행위는

완전히 당사자의 심적인 경지를 표현하고 있어서 아직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이해할 수 없으나 경험한 사람에게는 곧 긍정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간단한 말과 행위이면서도 이처럼 그것을 체험한 사람과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경계의

차이를 나누는 표준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이 화두가 지니고 있는 특질 가운데 하나이

다.

 

화두의 이와 같은 특질을 이해하지 못한 자라면 화두에 대하여 전혀 얼토당토 않는 느낌

을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처럼 화두를 체험하지 못한 자로 하여금 그가 지니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세계가 있음을 의식하게끔 한다.3) 그 결과는 왜 이러한

말과 행위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인생과 우주는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불러일

으키기에 충분하다. 원래 인간에게는 신기한 사물을 접할 경우 그것에 타당한 해석을 부여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성질이 있다. 하물며 그러한 사람들에게 인생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불안에 대하여 그 해결을 모색하고 안정된 세계를 동경하는 종교적 요구가 작용하고 있을

경우에는 화두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이한 성질은 대단히 매력적인 힘으로 그러한 사람들

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3) 看話라는 말이 화두를 본다는 의미와 더불어 화두를 보게끔 한다는 것은 이처럼 스승의 입장에서 제자를 제접하는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간화선에서는 大疑아래서 大悟한다는 말을 곧잘 한다. 인생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깊어지면 깊어지는 만큼 화두에 대한 관심은 깊어지고 또한 화두를 통해서 완전을 향해 나

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한 사색탐구가 엄밀하게 이루어지고 그 행위의 귀결이 분

명해질 때야말로 현실과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모든 성질의 색다른 깨침의 경지가 유일한

가치가 되리라는 희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화두는 단순히 깨친 자의 심경을

나타내는 말과 행위에 그치지 않고 아직 깨치지 못한 자의 마음을 사색의 심연에 이르게끔

분발시켜 깨침의 경지에 나아가는 매개작용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 자체를 두고 수단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물론 깨침을 얻기 위한 도

구로 출발을 한다. 그러나 화두를 참구해 나아가는 수행의 과정은 결코 깨침과 그것을 획득

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제1단계에서는 내가 있어 화두를 참

구한다. 그래서 나는 나이고 화두는 화두로서 나와 화두가 별개로 존재한다. 그러나 점차 화

두수행이 깊어짐에 따라 제2단계에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내가 화두가 되고 화두가 내가 되

는 話頭一念이 된다. 여기에서는 단순히 화두가 참구대상으로서의 화두만은 아니다. 화두는

다름아닌 의심이면서 곧 나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제3단계에서는 여전히 화두는 화두이고

나는 나이다. 화두와 내가 별개이지만 이미 화두일념의 과정을 거친 화두이므로 깨침의 화

두이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의문의 대상으로서의 화두가 아니라 진리가 드러난 대상으로서,

그리고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서의 화두이다. 이미 화두는 목적 내지 지향해야 할 대상 곧

깨침으로서의 화두이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수단이 될 수가 없다. 화두수행 자체이고 자기

자신이다.4) 여기에는 깨침의 實相으로 등장해 있다. 실로 깨침이라는 것은 조그마한 차이

곧 인식의 전환에 있다. 이처럼 화두는 깨달음에 필요충분조건이 되기도 하지만 하찮은 티

끌에 불과할 수도 있다.

 

4) 깨침을 향한 수행의 과정 내지 깨침의 존재방식에 대한 이와 같은 유형의 구조는 일찍이 靑原惟信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30년 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았을 때는 산을 보니 산이요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선지식을 친견하여 무언가 알고 보니 산을 봐도 산이 아니요 물을 봐도 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깨닫고 보니 산은 의연히 산이요 물은 의연히 물이더라.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見山是山見水是水及至後來親見知識有箇入處見山不是山見水不是水而今得箇休歇處依前見山祇是山見水祇是水大衆這三般見解是同是別”「五燈會元」卷17, (卍續藏138, p.670上). 한편 조동종의 조산본적은 五位旨訣의 偏中正에 대한 설명에서 이와 같은 구조의 표현을 적용하고 있다. (大正藏47, p.533中)

 

이 깨침의 경지의 완전한 표현을 가지고 깨친 자와 깨치지 못한 자의 구별을 나누는 표준

일 수 있다는 점과 깨치지 못한 자의 요구를 북돋우어 깨침의 경지로 나아가는 매개작용을

한다는 점이 화두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특질이기 때문에 화두가 선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

치를 간과할 수 없게 한다. 특히 화두수행을 주창하는 간화선에서는 모든 판단의 기준이 화

두가 된다. 여기에는 하나의 화두가 전체를 대변하는 경우도 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화두

가 개별적으로 나름대로의 의의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의 화두만 투과하면 온

갖 화두가 해결된다는 경우와 낱낱의 화두를 별도로 투과해야 한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화두의 역사상에서 나타난 화두관이기도 하다.

 

화두는 법령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 공안이라 하기도 한다. 따라서 화두는 불조

가 개시한 불법의 도리 그 자체를 의미하여 학인이 分別情識을 버리고 참구하여 깨쳐야 할

문제상황으로 나타났다. 그 시작은 중국 당나라 때였지만5) 송대에 이르러 난만하였다.6) 이

공안을 달리 古則公案이라고도 하는데 줄여서 古則이라 하기도 한다. 이 밖에 고인의 언설

이나 행위를 중심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話․話頭․因緣이라고도 하였다. ‘則’이란 법칙

을 의미하기 때문에 법령과 동일한 뜻이다. 법령은 국민의 생활을 보증하고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자칫 그것이 저촉되는 자가 있으면 단연코 그 조문에 따라 처분한다. 법령은 국

가의 의지의 所在, 곧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공안이라는 용어를 禪者의 깨침을 표현하

는 말과 행위로 轉用하여 진리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삼은 것은 타당한 사용법이라 할

수 있다.

 

5) 일찍이 조사들의 가르침을 적은 책을 公案이라 불렀는데, 이는 당나라 때 생겨 송대에 성행하게 되었다. 그 유래는 참으로 대단하다. 이 公案이라는 두 글자는 세속에서 말하는 이른바 관리들의 문서에 해당하는 것으로 세 가지 역할이 있다. (碧巖錄 序文, (大正藏48, p.139中-下) 그리고 앞서 언급한 公案의 출현과 그 활용은 이미 看話禪에서 話頭의 의미처럼 스승이 제자에게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는 점에서 公案禪의 원류를 唐代로 볼 수가 있다. 특히 看話禪이라는 본래 의미가 話頭를 본다 는 의미보다는 스승이 제자에게 화두를 보게끔 시킨다 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스승이 제자에게 깨우침의 수단으로 활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6) 여기에서는 특히 看話禪이 명실상부하게 선종에서 깨달음에 나아가는 테크닉으로서 송대 곧 남송대에 수행방식의 하나로서 정착되고 전개되어 갔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법령이 아무리 완비되어 있어도 그 존재를 알고 그것을 지키는 국민의 관심이 없다

면 空文에 불과할 것이다. 법령에는 그 대상인 국민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만약 국민에게 국

가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욕이 왕성하다면 잘 완비된 법령이 없다 해도 임시의 계약이라든

가 무엇이라도 만들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라면 몇 줄 안되는 법

령만 가지고도 천하가 다스려질 것이다. 화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완전하게 깨침

의 경지를 표현한 화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관심을 지닌 종교적 요구가 깊은 사람이 없

다면 거기에서 그 화두의 의의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종교적 요구가 깊은 사람이 있다면 고칙공안은 마치 굶주린 자가 밥을 만난

듯이 목마른 자가 마치 물을 만난 듯이 기뻐하겠지만, 만일 고칙공안이 없다 하더라도 이러

한 사람은 우주 일체의 사물을 의심하고, 모든 것에 대하여 공안과 같은 성질을 부여하여

마침내 깨침의 경지에 대한 매개작용을 찾아내기에 이를 것이다. 그리하여 일단 깊은 종교

적 의문을 품은 자에게는 일체의 사물, 곧 하늘에 떠 있는 日月星辰도 하늘을 떠도는 구름

도 새소리도 거위의 울음도 푸른 버드나무도 붉은 꽃도 모두가 懷疑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

이 없어 의심의 투철에 대한 깊고 옅음을 있을지라도 의심이 있으면 반드시 깨침의 경지가

전개되어 간다. 그래서 일체는 화두가 지니고 있는 깨침의 경지에 대한 매개역할을 하는 것

이다.

 

이러한 이유는 다른 측면에서 설하는 것이 편리할지도 모른다. 선자의 깨달은 입장에서

말하자면 고칙공안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깨침을 표현하고 있는 것

이어서 하나의 미세한 티끌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행위의 어떠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본래 해탈의 경지에 있는 안심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족된

채로 개개가 圓成되어 있어서 굳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언급할 필요가 없다. 祖師가 자신에

게는 한 법도 사람들에게 전해 줄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그리고 일생동안 노력하여 수

행한다 해도 가히 얻을 만한 법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말할 경우 석존께서 49년 동안 행한 설법도 평지풍파에 불과하고, 조

사들의 천 칠백 화두가 쓰레기만큼도 가치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선에 있어서는 일체가

이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것들이 깊은 종교적 요구를 지닌 사람들에 대하여 그

眞相을 누설하여 깨침의 경지로 향하는 매개작용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주간의 일체법은 광의의 화두이다. 선자가 화두를 참구하는 자세에

서 필요조건으로서 大信根․大疑團․大憤志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의 종교적 요구는 처음 현실생활의 불안으로부터 일어나 점차 심화되고, 막연한 것으

로부터 명료한 것으로 진행되어 나아가며, 그 사람의 性情과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종교

의 영향에도 의존하는가 하면, 혹은 신의 사랑에 의하여 구제되기도 하고 佛의 자비에 완전

한 안정에 들기도 하지만 신과 佛을 의심하고 마침내는 신과 佛을 의심하는 자신까지도 의

심하여 禪門에 들기도 한다. 이러한 때에 어쨌든 그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요구를 선

문으로 이끌어 들인 것은 바로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훌륭한 불조의 행위와 깨침

을 얻은 사람들의 안심이라 할 수 있는 깨침의 경지를 표현한 화두가 그것이다. 이러한 것

들을 見聞하여 확실하게 자기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음을 믿고 그것

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을 결심이 있어야 비로소 실제로 선을 향한

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저절로 일어난 자기의 종교적 의문을 스스로 정리하고

홀로 스스로 수행하여 독창적으로 깨침을 얻은 예는 극히 희박하다. 대부분은 불조의 화두

를 실행함으로부터 시사를 받아 그 의문을 정리하고 방향을 결정하여 노력한 사람들이다.

 

이미 설한 바와 같이 우주의 일체가 그만큼 완전하게 깨침의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면 왜

종교적 의문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그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경우

가 많지 않은가. 그 이유를 말하자면 선은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주도 자

연도 고칙도 화두도 반드시 한 번쯤은 마치 은산철벽과 같이 전혀 단서를 잡을 수 없는 존

재라는 것을 경험하게끔 한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전혀 단서를 잡을 수 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고칙공안은 이미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과 고칙공안을 참구하는 사람을 매

개로 하고 있다. 그래서 수행하는 당사자의 체험을 표현함에 있어서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

자면 깨침은 더 이상 전달대상의 진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는 깨침이 자기의 가까이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없는 때가 없고 없는 곳이 없을지라도 그것이 언제 전달될는지 모른다는 의식을 지니게 한

다. 내 주변의 전체가 깨침이고 깨침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우주 일체의 사물 곧 天然의 공안은 진리 그 자체이고 깨침의 경지 그 자체이다.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 하는 것에는 하등 경계의 차이가 없다. 공안이라는 것만으로도 완전하고 위

대한 것이다. 天衣無縫으로서 어떤 부족함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天然의 공안이 이와 같

이 無言이고 絶對임에 비하여 고칙공안은 소리와 자취로 나타내어 참학자를 유도하고 그 요

구를 자극하여 그 성공의 가능성을 믿게끔 한다. 이러한 차이가 바로 근본적인 이론으로서

실제상 화두선 수행에 크게 도움이 된다.

 

3. 화두수행의 목적

 

세상의 많은 종교들 가운데 불교가 지니고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깨침의 수행을 중시

한다는 점이다. 그 깨침을 추구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수행을 의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운

데서도 화두수행은 깨침에 나아가는 방법으로 일찍부터 중시되어 다양하게 개발되어 왔다.

그 발생은 온전히 중국적인 사유의 구조 속에서 등장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곧 인도

에서의 선정수행은 제법의 생멸과 연기의 구조를 통한 직관속에서 단계적으로 번뇌를 멸하

고 지혜를 계발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그래서 선정의 삼매에 있어서도 마음속에서 나타나

는 변화에 따른 단계를 설정하여 많은 禪理의 천착이 있었다. 이와는 달리 중국에서 전개된

선종의 경우에는 깨침에 단계성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을 밝혀 곧장 깨침의 세계에 들어간다

는 돈오의 입장도 아울러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깨침의 구조를 논하기보다는 우선 깨침

의 성격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깨침의 성격이란 깨침 자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규명이 아니다. 오히려 수행을

통한 결과로서 도달된 상태에서 그것을 어떻게 규정짓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깨침

의 경지란 自內證의 경지로 간주하여 감히 이러쿵저러쿵 언급하는 것을 회피해 온 것이 사

실이다. 이것은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었으나 꿈속에서 본 것을 표현하지 못한 것과 같다.

꿈을 꾸었으면 언설로 표현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이 깨침에 대하여 비유나 상징을 통하

여 어떤 측면으로든지 논증이 없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침 자체에 대한 논증

을 회피해 온 것은 깨침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言說不及이라는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논하는 것은 곧 그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縣崖想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묻어 두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여타의 종교에서는 절대적인 존

재에 대한 논의를 부정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佛身자체까지도 문제로 삼아 논하는 것이

그 특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깨침 자체에 대한 논증은 전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중국의 선종에서는 그 깨침에 대하여 좌선을 통한 마음의 발견 내지

사물을 통찰하여 얻는 반야직관의 획득에 대한 돈점이라는 과정상의 문제에 치중하였다. 곧

證보다는 修에 중점을 두었다. 그 과정에서 다시 그 깨침을 얻는 방법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곧 수행방식의 다양한 전개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 간화선이 등장하였다. 간화선이 등장하게 된 필연적인 근거는 아무래도 올

곧은 수행을 진행시키기 위한 모색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초심자가 좌선에서 겪는

가장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妄想으로 인한 散亂心과 寂寂空無에 떨어지는 혼침을 쉽게

추스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화두에 전념하여 話頭一念의 상태가 되면 더 이상 산란

심과 혼침을 발붙일 곳이 없어지고 만다. 일차적으로 이러한 산란심과 혼침을 동시에 해결

하기 위해서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든다.7)

 

7) 선의 생명은 불도를 수행하고 깨치는 것이다. 깨침이란 사량분별에 끄달리지 않고 천지우주와 자기가 하나가 되어 能所가 泯絶하여 所觀의 理와 能觀의 智가 不二一體가 되는 無碍淸淨한 작용이다. 이와 같은 작용으로 이끌어들이는 데에 사용된 선의 테크닉 가운데 하나가 화두이다. 따라서 화두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깨침으로 나아가는 도구 곧 수단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간화선이 등장하게 된 필연적인 근거는 아무래도 올곧은 수행을 진행시키기 위한 모색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초심자가 좌선에서 겪는 가장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妄想으로 인한 散亂心과 寂寂空無에 떨어지는 惛沈을 쉽게 추스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것이 타성화 되면 久參衲子라도 예외는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산란심과 혼침의 두 가지를 제거하기 위하여 제시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화두를 드는 것이다. 화두를 들고 있음으로 해서 화두에 전념하기 때문에 부산하게 일어나는 망상을 피우지 않게 되고 동시에 살아 있는 송장처럼 죽어 있는 듯 살아 있는 듯 하는 혼침도 제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두에 전념하여 話頭一念의 상태가 되면 더 이상 산란심과 혼침이 발붙일 곳이 없어지고 만다. 이러한 산란심과 혼침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든다.

 

화두는 또한 선수행에서 등장한 숱한 일화 내지 의도적으로 스승이 제자를 제접하기 위해

서 내세운 정형적인 가르침이기도 하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의문방식이

었다. 따라서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받은 화두는 단순한 의문의 대상만은 아니다. 의문의 대

상임과 동시에 믿음의 대상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는 위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大信根․大疑問․大憤志의 세 지가 필수적인 요소로 언급되었다.

 

대신근은 화두 자체를 믿음과 함께 화두를 제시해 준 스승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다. 자신

이 화두수행을 통해서 반드시 깨침에 이른다는 사실과, 화두수행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자

기자신을 통째로 믿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인과법만큼이나 명확한 명제이기도 하다.

대의문은 대신근의 바탕 위에서 화두 자체에 대한 의문을 지니는 것이다. 자신이 해결해

야 할 지상의 과업으로서 화두를 들어 그것을 투과할 때까지 내 머리를 내어줄 것인가 화두

의 의문을 해결할 것인가 하는 치열한 행위이다. 여기에서의 의문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다.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의문으로서 그 누가 대신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 아

니다. 자신의 철저한 체험을 통하여 스스로 冷暖自知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의문이 더 이상 의문에 머물러 있지 않고 확신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까지 잠시도

방심하지 않고 오매불망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화두가 자신을 참구하는 경험을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화두가 하나가 되는 경험이 화두일념이다. 화두일념을 통하여 더

이상 자신과 화두라는 분별과 그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밀고 간다.

여기에서는 화두 이외에 부처도 조사도 용납되지 않는다.8) 오로지 화두만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화두를 들고 있는 자신은 항상 惺惺歷歷하게 空寂靈知하게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하

다.

 

8) 임제록에서 말하는 殺佛殺祖라는 말은 바로 화두의 참구에서는 부처와 조사라는 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한 것이다.

 

대분지는 위의 화두를 줄기차게 진행시켜 나아가는 정진이다. 단순하게 의문만 가지고는

오래 계속하지 못한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맹세 내지 오기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화두를 들다가 죽을지언정 화두에서 물러나지 않으려는 고심참담

한 노력이다.

 

이와 같은 화두선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등장한 것이 곧 ‘狗子無佛性話’로서 흔히 無字話頭

라 한다. 무자화두는 조주와 그 제자 사이에 있었던 일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개한테 불성이

있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조주는 ‘無’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무라는 글자에 대한 의

문방식이 무자화두이다. 그러나 화두를 드는데 있어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

은 화두에 대한 의문방식이 ‘왜’가 아닌 ‘무엇’이라는 것이다.9) 곧 ‘왜 조주는 개한테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라는 의문이 아니다. 이것은 화두에 대한 분별심만을 키울 뿐이다. ‘왜’라고

묻는 것은 과학이고 수학일 뿐이다. 화두는 과학도 아니고 수학도 아니다. 논리를 초월한 소

위 초월논리이다. 따라서 반드시 ‘조주가 개한테 불성이 없다고 말했다는데 그것이 무엇인

가’ 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는 해답을 기다리는 질문이다. 이미 제기된

질문[화두]에 대하여 대신근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질문일 뿐이다. 그러나 ‘무엇’의 장식은 특

별한 해답을 요하지 않는다. 이미 제기된 질문[화두]에 대한 대신근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

는 참구방식이다. 그래서 狗子無佛性話라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인가’ 라는 참구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9) 졸론,금강경과 선종의 공안 -그 구조를 중심으로-,한국선학제3호. 한국선학회.

 

화두에 대하여 ‘왜’ 라는 접근방식은 분별망상일 뿐이다. 하나의 화두에 전념하면 그것이

내면에 깊숙하게 의문덩어리로 자리잡게 된다. 여기에서 그 의문을 지속적으로 진행시켜 나

아가다 마침내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생긴다. 이것이 화두타파의 기연이다.

그 기연을 통하여 마침내 氷消瓦解처럼, 거품처럼, 봄 햇살을 받은 눈처럼 흔적도 없이 말끔

하게 의문이 해소되는 과정이 화두의 타파이다. 그런데 무자의 화두공부도 간화선에 있어서

화두공부 그 자체가 문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자의 화두공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견

성의 전제적인 필수조건으로서의 의단의 형성에 무자의 화두가 부여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서 무자화두의 의정이 의식집중의 원동력으로써 작용되고 있다. 이때 의식에 나타난 것은

화두에 대응하는 의정이기 때문에 그 의정을 현전시키는 것이 무자 화두를 드는 이유이다.

 

이와 동시에 무자화두는 의식집중을 강화하는 기능도 수반된다. 이것은 무자가 의정을 현

전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疑情을 타파해 나아가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주의 무자는 否定作用의 無[意識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라는 의미와, 주

체로서의 無[자기의 심성에 철저한 상태]라는 이중적인 면이 엿보인다. 부정작용으로서의 無는 주체적인 無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어서 일체의 상대적인 개념을 부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주체로서의 無는 이러한 대립을 초월하는 독자적인 無그 자체이다. 따라서 주체로

서의 無는 일체를 초월한 無임과 동시에 일체를 포함하고 일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활동시키

는 근본주체이다. 이리하여 분별의식을 부정한 결과로서 획득되는 초월적이고 주체적인 체

험[견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화두로서의 의심은 사량분별을 끊고, 자신

에게로 회귀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잘못된 분별을 타파하는 것이고,

후자는 正知見을 나타내는 일이다. 이와 같이 心이 분별하는 허구를 타파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을 의식상에 현성시켜 나아간다. 바로 이것이 무자화두를 수행하는 목적이고 의의

이다.

 

그런데 화두공부에서 반드시 필요한 자세가 절대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결심이다. 현대

와 같이 분주한 생활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

은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 여유는 당장 이 자리

에서 깨침을 얻어야 한다든가 당장 부처가 되어야 한다든가 하는 조바심이 아니다. 깨침은

본래부터 자신속에 있었음을 자각하여 그대로 익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다.

어디서 빌려오거나 한순간에 퍼뜩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은

특별히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대로 앉아서 화두를 든다든가 좌선을 하면 그것으로 훌륭하

다. 화두를 통해서 좌선을 통해서 깨침이 얻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곧 待悟之心을 가

져서는 안된다.10) 깨침을 법칙으로 삼되[以悟爲則]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혜심도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특히 주의해야할 점, 즉 간병론에 관하여 위의「구

자무불성화간병론」뿐만이 아니고, 그의 어록에서도 항상 깨침을 기다려서는 안된다고 말한

다. 곧 宗敏上人에게 보이는 글 에서도 “미혹으로써 깨치기를 기다리지 말라.”11)고 표현하

고 있고, 淸遠道人에게 보이는 글 에서도 “또한 그렇게 말한다고 하여 한결같이 눈을 감은

채 텅 비고 쓸쓸한 그대로 흑산귀굴 속을 향하여 앉은자리에서 깨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

다.”12) 고 말하며, 空藏道者에게 보이는 글 과 大休上人에게 보이는 글 등에서도 話頭參

究시의 주의점을 열거하면서 “미혹으로써 깨치기를 기다리지 말라.”13)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10)「大慧語錄」卷25, (大正藏47, pp.919下-920上)

11)「曹溪眞覺國師語錄」, (韓佛全6, p.25下)

12)「曹溪眞覺國師語錄」, (韓佛全6, p.27上)

13)「曹溪眞覺國師語錄」, (韓佛全6, p.31下; 6, p.33下)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은 大疑團이 아니라 한낱 쓸데없는 분별심일 뿐이다. 待悟之心은 모

든 知解의 근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는다는 사

실 자체가 자신을 아직 깨치지 못한 중생으로 미혹 가운데에 자승자박해버리는 것이다. 그

리고 깨침을 얻기 위해서 갖가지 계교나 사량분별 및 허망한 노력을 하게 만드는 근원처이

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오지심의 부정은 철저하게 知解를 타파하여 대오지심이 없이 자신이 곧 부처임

을 확신하고 드는 간화, 즉 더 이상 깨침에 있어서까지도 얽매이지 않는 대의단의 행위이다.

이것은 곧 자신이 곧 부처라는 확고한 신심을 바탕으로 하여, 일체 지해의 근원인 대오지심

을 타파한 상태에서 오로지 화두에 전념하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지해의 근저에

다름아닌 대오지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리고 나면 더 이상

그에 대한 집착이 없어 깨침에 대한 번뇌가 사라진다. 이것은 무심하게 화두를 들라는 것이

다. 간화선법의 기본정은 곧 무심이다. 무심의 상태가 깨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무심이라는 생각까지도 없어야 참다운 무심이라 하였다. 무심한 후에도 간화를 해야 하며,

또한 간화를 통하지 않고는 상대적인 무심으로 흐를 염려가 있다. 곧 간화선 곧 공안선은

어떤 문제를 제시하여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제시하는 방법으로서 無心合道의 현현

이다. 때문에 하나의 화두 이외에 어떤 화두가 다시 필요하지는 않다.

 

화두참구에서는 진리는 온 우주에 遍在하므로 항상 우리 주변에서 이를 체득해야 함을 강

조한다. 그래서 화두를 드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가능하다. 만일 일상생활에서 떠나 따

로 나아가는 길이 있다면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멀어지고 만다. 자신의 삶이 곧 하나의 화

두이다. 그래서 자신을 깨치는 것은 곧 화두를 깨치는 것이다.

 

4. 화두의 양면적 기능

 

일반적으로 선종이란 깨침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 불교의 종파이다. 따라서 선종은

깨침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 가운데 일종의 공안 곧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소위 간

화선이다. 간화선은 깨침을 主로 하여 직관주의를 채용하는 것이라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이다. 간화선이 깨침을 목표로 수행하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스스로 참구하는 수행자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화두를 본다’는 의미이다. 그러

나 또한 제자를 제접하는 스승의 입장에서 보면 제자로 하여금 ‘화두를 보게끔 한다’는 의미

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화두수행이란 화두를 들어 통째로 간파하여 화두 자체에 대한 추호

의 의심도 없이 그 전체를 체험하여 자신이 화두 자체가 되는 과정이다. 이것을 화두일념이

라 한다. 그러나 화두가 곧 깨침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화두는 화두이고 깨침은 깨침이다.

그래서 간화선에서 화두와 깨침의 관계는 修證의 관계이면서 因果의 관계이기도 하다. 중생

적인 입장에서는 수행 그 자체가 깨침일 수 없고 因그 자체가 果가 될 수 없는 도리이다.

다만 반드시 수행이 깨침으로 나아가고 因이 반드시 果로 드러나는 경우에야 비로소 수행이

깨침과 다르지 않고 因이 果와 다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깨침을 상정하지 않는 수행은

무의미하고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또한 果를 부정하는 因이란 무지의 소치일 뿐

이기 때문이다. 행위자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果라고 해서 그 因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수행과 깨침 사이에 어떤 시간적인 행위라든가 행위주체의 노력이라든가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 그 수행과 깨침의 관계속에서 매개체로서 수단과 도구적인 기능 내지

깨침의 작용적인 기능을 소위 화두라고 한다면 화두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공능이 있

다. 화두에 예비적인 방편기능과 본질적인 정기능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화두의

양면적인 기능이 드러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는 수단과 도구적인 기능으로서 방편수행의 기능이다. 이 경우에 화두는 깨침이 목표

는 아니다. 깨침을 목표로 삼아 수행하기 위하여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예비기능일 뿐이다.

이 경우 화두는 깨침에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화두일념을 유도하는 행위로서 작용

한다. 산란심과 혼침 속에서는 정신집중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령 순간적인 정신집중이

가능하다해도 그 지속적인 유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란심과 혼침을 동시에 제

거하기 위해서 화두를 필요로 할 뿐이다. 따라서 도구적인 기능으로서 작용할 경우에 화두

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은 아니다. 달리 수식관을 통해서 산란심을 대치할 수도 있고, 염

불관을 통해서 혼침을 대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두는 일체의 망상을 동시에 제

거하는 것으로서 제기되었다.14)

14) 이에 대해서는 공안이 수행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가령 공안수행의 경우 心一境性의 경지가 되어 공안을 참구하는 당사자와 공안 사이에 따로 구별이 없어지는 話頭一念의 경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공안은 그 목적이 처음 산란심과 혼침을 제거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공안의 위상까지도 초탈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안이 수단적인 성격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화두는 달리 공안이라고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화두를 공공문서가 지니고 있는 그

권위에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사사로이 처리할 수 없듯이 스승의 엄격한 검증의 과

정을 거친 연후에야 비로소 그 수행의 경지를 인가받게 되는 師資相承의 원리이다. 후대에

정형화된 의미에서의 화두는 조주와 임제를 거쳐 대혜종고에 이르러서 大成하게 된다. 이때

가 되면 불조의 기연이 정형화되어 수많은 화두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근기가 다양한만

큼 화두도 다양하여 일상의 생활 하나하나가 화두로 등장한다. 그러나 간화선에서 화두참구

를 으뜸으로 내세워 그것을 최고의 수행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대혜 당시에는 좌선이 수행납자 뿐만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 널리 의논되기도 하고 실

천되면서 발달해가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진실한 심지를 구명하기보다는 오히

려 형식으로 흐르게 되면서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좌선의 역

할을 새롭게 부각시킬 필요가 생겨나게 되었다. 대혜는 좌선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좌선에서의 마음자세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을 새롭게 추구한 것이 화두

수행이라는 방법이었다.

 

대혜는 화두에 의해서 자기의 망상을 제거하는 것을 그 하나의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일

환으로 대혜는 가령 조주선사의 무자화두를 강조한다. 그리하여 무자삼매에 들어 내외가 타

성일편되는 심경에 도달하여 그것으로써 모든 분별망상의 불식시켜가는 것이다. 이처럼 화

두가 화두일념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적인 기능으로서 작용할 때 화두는 깨침에 나아가는 통

로로서 방편적인 기능을 제공하게 된다. 그 다음은 화두에 대하여 大疑團을 불러일으켜 大

疑大悟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화두를 들지 않고 의심이 없이 묵묵히 앉아 좌선만

하게 되면 枯木의 禪에 빠져 마침내 暗證의 禪에 떨어지게 된다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소

위 黙照禪의 배격으로 나타난 것이다.곧 대혜는 黙照邪師輩는 無言無說로 極則을 삼아, 그

것을 威音那畔의 事로 삼고, 空劫以前의 事로 삼는다. 그리하여 깨달음의 門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깨침을 미친 것으로 삼고, 깨달음을 제2칙으로 삼으며, 깨침을 방편으로 간주하

고, 깨침을 接引의 수단쯤으로 간주한다. 15)고 하였다.

 

15)「大慧語錄」卷28, (大正藏47, p.933下) “今黙照邪師輩只以無言無說爲極則喚作威音那畔事亦喚作空劫已前事不信有悟門以悟爲誑以悟爲第二頭以悟爲方便語以悟爲接引之詞

 

따라서 묵조 그 폐풍을 다스리는 입장으로 대혜는 생생하게 화두를을 들어 끊임없이 의심

에 의심을 더해가야 한다고 설한다. 이에 상대하여 대혜는 깨침을 제일로 삼는다. 깨치는 데

에는 ‘우선 의심해야 한다’라고 말하여 그 의심을 화두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大疑

에서 大悟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혜는 古人의 화두에서 의심을 일으켜야지, 문자

위에서 의심을 일으켜서는 안되고, 經敎위에서 의심을 일으켜서도 안되며, 일상의 俗塵속에

서 의심을 일으켜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오로지 古人의 無字위에서 의심을 지어가며 그 無

字를 투과해야만이 모든 의심덩어리를 꿰뚫어 佛陀의 心境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정신집중과 깨침의 주체로서 정수행의 기능이다. 화두가 지니고 있는 둘째 목표는

대의단을 불러일으켜 大疑大悟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두를 들지 않고 의심이 없이

묵묵히 앉아 좌선만 하게 되면 枯木의 선에 빠져 마침내 暗證의 선에 떨어지게 된다 하였

다. 이것이 이른바 소위 묵조선의 배격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서의 화두는 깨침에 직접

나아가는 본질적인 정기능을 수반한다. 화두 자체를 참구하는 행위가 그대로 깨침이 화두를

벗어나 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화두가 깨침의 또 다른 양상으로서 참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참구는 더 이상 깨침을 기다리는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깨침을 참구하는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화두의 참구행위에서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화두

참구자가 화두일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두일념이란 화두를 참구하는 자와 참구되는

화두가 분리되어 있지 않는 경지이다. 그래서 이 경우의 화두는 전체로서의 화두이다. 전체

로서의 화두이기 때문에 화두를 참구하는 주체와 참구되는 화두의 구분이 없다. 여기에서

이제 화두는 이전까지의 방편적인 화두의 속성을 상실한다. 방편적인 속성을 벗어난 화두는

참구의 대상이 아니다. 화두가 그대로 목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두와 참구행위

자와 깨침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그 연결고리가 다름아닌 참구자의 참구행위이다.

여기에서 참구자에 의한 참구행위가 여일하게 유지되는 것이야말로 화두일념의 핵심이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화두를 깨치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 자의 주체적인 몫이다. 화두 자체

가 저절로 화두참구자에게 깨침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참구행위를 수반하지 않

으면 언제까지나 화두는 화두이고 깨침은 깨침이며 화두참구자는 화두참구자일 뿐이다. 그

래서 화두의 본질적인 정기능이란 화두가 깨침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경우이고, 화두 참구자

에게 화두일념의 참구행위가 성취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산란심과 혼침 등 망상을 제거하는 방편적인 기능으로서의 화두와 깨침의 유지 내

지 지속상태로서 본질적인 정기능으로서의 화두는 동일해야 하는가, 아니면 각각 다른 화두

이어야 하는가. 간화선수행에서 화두에는 제2의 화두가 없다. 그리고 단계도 없다. 하나의

화두가 전체의 화두이고, 처음의 화두가 궁극의 화두이다. 달리 화두가 있다면 그 경우에는

화두를 참구하는 자가 다를 경우이다. 화두는 전체로서 그리고 동시에 동공간에 작용한다.

따라서 방편적인 기능과 본질적인 화두는 본래 하나이다. 하나의 화두가 지니고 있는 양면

적인 기능일 뿐이다. 망상이 제거되는 찰나 화두일념이 된다. 망상을 대치한 화두가 바뀌어

화두일념의 화두로 둔갑하는 것도 아니다. 이전의 화두가 그대로 화두참구자에게 있어 역할

변동일 뿐이다. 따라서 화두참구자가 화두를 참구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망상을 제거하고 난

이후 다음 단계로서 화두일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망상이 제거되는 순간 이미 화

두일념이 되어 있다. 그래서 간화선에서 화두참구는 화두의 두 가지 방편적인 기능과 정기

능의 양태를 분별할 뿐이지 화두 자체를 분별할 수는 없다. 또한 방편적인 기능과 정기능의

측면에서 화두 참구자와 참구되는 화두가 분리될 수도 없다. 화두일념의 상태가 되는 순간

망상은 제거되고 망상이 제거되는 순간 화두와 화두 참구자와 깨침은 드러난다. 중요한 것

은 결코 지속적인 화두참구의 행위를 결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