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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메모

김수영 자유의지와 자유정신 그리고 '행동에의 계시’

김수영

 

자유의지와 자유정신 그리고 '행동에의 계시’

 

屛風병풍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하여 있는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하여서도 무관심하다.

주검의 같은 너의 얼굴 위에

용이 있고 落日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해사(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

 

병풍의 실용적 기능은 그것이 글씨든 그림이든, 또 몇 쪽으로 이루어졌든 상관없이 이동성 장식 용구로써 높은 품위의 위상을 지키는 것이지만 때로는 방풍(防風)으로, 혹은 가리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적 용도를 뛰어넘어 상징적 기능으로 변용되는 것이 시적 기능이다. 물론 사실적 기능을 바탕으로 거쳐 가는 경우도 있지만 처음부터 거기에 철학적사색이나 직관적 인식이 비약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시에는 사실적 감각과 상징적 감각이 번갈아 작용하면서 삶과 죽음의 관념이 교차하고 있다. 즉 병풍 그 자체의 외면적 · 사실적 감각에서 끌어낸 무관심과 죽음..의 의식이 설움과 허위의 인식으로 이어지고 여기에 맞서 병풍 속의 그림(飛瀑과 幽島, 육칠옹해사의 인장)은 처음부터 그 허위를 극복하는 위상을 드러낸다. 그래서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 이라는 것은 죽음과 삶의 양면의 갈등을 시사하는 것이고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는 것은 병풍의 외면에서 온 주검의 인식이 내면의 그림에서 얻은 삶의 인식으로 극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병풍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의 의식과 인식이 인장을 비추고 있는 달빛 쪽에 쏠리고 있다는 사실은 죽음보다는 삶의 의지 쪽으로 쏠리고 있음을 명백히 한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삶의 의지는 많은 시인들에서 볼 수 있는 내면적 열화(熱火)와는 달리 체온으로 달궈진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는 시를 "行動에의 啓示"로 간주한다.

 

김수영은 이렇게 말한다. "들어맞지 않던 행동의 열쇠가 열릴 때 나의 시는 완료되고 나의 시가 끝나는 순간은 행동의 계시를 완료한 순간이다"라고. 흔히들 이 시인을 두고 모더니스트니 참여 시인이라고 치부한다. 이 두 가지 유형에 매김하려면 적어도 거기에 상응하는 목적의식이나 일관된 지속적 사고가 있어야 한다. 그의 몇몇 작품에서 현실적 사회의식이판 박힌 뚜렷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해서 참여 시인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고, 전위적인 실험성이라든가 반전통적인 파괴성은 분명히 모더니즘의 계열을 벗어날 수 없지만 여타의 많은 이질적 작품을 이러한 잣대로 포괄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 역시 시인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잘 대변해준다. “종교적이거나 사상적 도그마를 시 속에 직수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 본 일은 없다. 시의 어머니는 어디까지나 언어, 따라서 나는 시의 내용에 대해서 고심해 본 일이 없고 나의 가슴은 언제나無, 이 無 위에서 파괴와 창조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의 시학과 미학의 본령은 자유분방하고 다이너믹한 행동성 그것이다.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눈」).

 

떨어져 쌓인 눈은 정지 상태다. 그것이 정적(靜寂)이나 고요의 미로 승화되는 것은 동양적인 전통미의 전형이다. 이것을 살아 있는 호흡(기침)으로 파괴함으로써 동적인 생명성을 창조한다. 「꽃 2」에서는 피어 있는 꽃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와 미래에 통하는 견고한 꽃이 공허의 말단에서 찬란하게 피어오른다"고 읊고 있다.

「폭포」에서는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물론 고매한 정신이나 곧은 소리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적 내의(內意)로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 비」에서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읽는다. 아무것도 그 속에 지니지 못한 충동적 행동 그것은 한갓된 욕망, 그러나 이 욕망 속에서 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사랑이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 사랑의 본거지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변주곡으로 끝나는 그릇된 명상의 무위한 간이역, 결국 그의 행동은 행동으로 남는 숙명적인 반복의 회로, 이 회로의 절정을 구가한 것이 「풀」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이 시의 중요한 골격은 바람과 풀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풀의 행위와 그 행위의 유형과 시간적 선후의 관계다. 그런데 여기서 바람을 전제하지 않는 풀의 동작은 전무하다. 말하자면 풀의 자생적인 생명성이나 정서가 구가된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대타(對他) 관계에서 발생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시적 행위의 전부다. 그리고 그 동작은 눕고 일어나고 울고 웃는 것으로 연속된다. 빨리 눕고 울고 먼저 일어난다. 발목까지 눕고 늦게 누워도 먼저 일어난다. 늦게 울어도 먼저 웃는다. 이러한 행위를 압축하면 눕고 일어나고 울고 우는 것이고 이를 수식하는 시간적 수사는 먼저와 나중이다. 여기에 사회의식적 상징의 옷을 입힌다고 할 때 행위의 모둠(주제)을 '약자의 강인한 생명력'이라고 규정하면 무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풀이 고고한 양반 계급의 품위를 상징하는 대나무에 비해서 소박하지만 서민계급의 유연한 강인성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해석의 방향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이해 선상에서 이미 정평이 되어버린 '바람'은 '외세의 압력'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시사성이나 사회성의 잣대는 시의 의미를 축소할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시인은 시평에 있어서 심미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어느 쪽도 그 편향성에 반대했다. 심지어 시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시를 쓰고 있다는 의식조차 큰 부담으로 느꼈다. 그런 의식이 적으면 적을수록 사물을 보는 눈은 더 순수하고 명석하고 자유로워진다고 믿었다. 마침 여기 풀」의 순수한 실상을 조명해주는 보조등(補助燈)과 같은 작품이 있기에 그 한 부분을 소개해본다.

 

라디오의 시종을 고하는 소리 대신에 西道歌와

목사의 열띤 설교 소리와 심포니가 나오지만

이 소음들은 나의 푸른 풀의 가냘픈/

영상을 꺾지 못하고

그 영상의 전후의 고민의 환희를 지우지 못한다.

(「풀의 영상」)

 

「풀」의 '바람'에 의미상으로 상응되는 것이요, '목사의 설교소리'요, '심포니'다. 이것을 통칭해서 '소음(騷音)‘이라 했다. 종교의 권위나 음악적 가치관이 풀의 영상에 접근되지 못하고 부정되거나 파괴되어버린다. 특히 「풀」의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는 부분은 「풀의 영상」에서 “그 영상의 전후의 고민의 환희" 라는 말과 딱 맞아떨어진다. 즉 전후'는'먼저'와 '늦게'에 '고민'은 '울어도'에, '환희'는 '웃는다'와 그 의미가 일치한다. 이렇게 되면 '바람'의 상징적 의미가 사회성이나 시사성의 내성(內城)으로 한정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김수영, 그는 '아무것에도취하여 살기를 싫어하는 시인이다. 이상(李箱)을 닮은 위트와 패러독스(「아버지의 사진」)의 깊은 내면의식과 니체를 닮은 절정의식과 자유의지, 자유정신, 이를 구체화하는 행동 미학(「폭포」, 「푸른 하늘을」)은 그의 경악(驚愕)으로 떠 있는(?) 큰 눈에서 내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