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산 / 아흔두 살의 여인. 이재룡 비판에세이
2006년 3월 7일 화요일. 정교회는 오늘 메가르의 로랑, 에프라임, 위젠의 성자 축일을 기린다. 나는 그 셋 중 어느 누구도 모른다. 같은 날 축일 기념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 같은 시대에 살았던 모양이다. 정오의 땡볕 아래 로마 원형경기장 한가운데 서 있는 그들을 상상해본다. 성자들이 늙어서 침대에서 편안히 죽는 법은 드물다. 세 사람 중 가운데 서 있는 성자 에프라임이 나머지 두 사람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양손으로 그들 손을 잡는다. 하지만 그들은 철책 우리 안에 갇혀 울부짖는 맹수들에게 전혀 겁을 먹은 표정이 아니다. 군중들은 초조하게 기다린다.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다. 황제가 한쪽으로 약간 머리를 기울인다. 철책이 길게 쇳소리를 내며 천천히 올라간다.
소설은 필경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장면을 주인공이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흥분한 관중 앞에서 맹수에게 찢겨 죽은 순교자를 상상하는 화자는 아테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며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련된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는 중이다. 그의 아버지는 정치에 다소 관심이 있을 뿐 철학에는 무심한 평범한 배관공이고 어머니는 신실한 그리스정교 신자이다.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처지지만 그는 좁은 기숙사에서 사는 친구들과 달리 넓은 정원이 딸린 대저택에서 산다. 숙식을 제공받는 대가로 주인공은 늙은 집주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한다. 철학 전공인 그가 순교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거부인 선박왕의 딸로 넉넉한 삶을 보낸 여주인 나우시카는 노년에 들어 시력을 잃었지만 우아한 자태와 교양은 잃지 않았다. 주인공은 거실에 걸려 있는 그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고 얼핏 사랑을 느낀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노인이 아니라 과거 속의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드미트리스의 성화를 침실에 모시고 사는 아흔두 살의 여주인은 비잔틴 시대의 기독교에 관심이 많다. 어느 날 그녀는 주인공에게 연구비를 줄 테니 아토스 산에 얽힌 역사와 그곳에 사는 수도승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부탁한다. 원래 인류 최초의 철학자라 일컬어지는 탈레스를 연구하려던 화자는 이를 계기로 관심의 폭을 넓혀 초기 기독교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중에야 나우시카가 아토스 산에 은거한 수도승에 대한 조사를 부탁한 이유가 밝혀진다. 그녀의 남동생이 서른아홉 살이란 늦은 나이에 정교회 수도승이 되어 아토스 산에 들어간 후 반세기가 넘도록 소식이 끊긴 터라 죽음을 앞둔 누나가 동생의 안부를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20장으로 나뉜 소설 『예수 그리스도 이후』는 화자가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들으며 아토스 산에 산재한 수도원과 암자를 뒤져 여주인의 동생을 찾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인류의 역사가 예수를 기준으로 양분되는 전환기를 맞이했을 때 그 변화를 생생하게 상징하는 것이 아토스 산이다. 그리스의 아토스 산에는 두 개의 전설이 서려 있다. 첫 번째 전설에 따르면 거인 아토스가 포세이돈을 죽이려고 던진 돌이 변해서 아토스 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화시대의 아토스 산 정상에는 제우스를 모시는 신전이 세워졌다. 두 번째 전설의 주인공은 성모 마리아이다. 성모 마리아가 유대의 땅을 떠나 처음 유럽에 발을 디딘 곳이 아토스 산이란 것이다. 성모를 태운 배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닿았던 곳이 바로그곳이다. 뱃전에 선 성모 마리아의 시야에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의사원이 들어오자 사원은 저절로 산산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훗날 아토스 산에는 그리스정교회의 수도승이 속세를 떠나 은거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길이 40킬로미터, 폭 10킬로미터의 험악한 산악으로 이뤄진 반도에 우뚝 솟은 해발 2000미터의 아토스 산에는 약 20개의 수도원이 들어서 있다. 그뿐 아니라 골짜기마다 움막이 숨어 있고 절벽 끝에는 까치집처럼 암자가 매달려 있다. 육로가 험한 터라 오로지 뱃길로만 갈 수 있는 그곳은 지금도 그리스 국가로부터 독립된 자치구로서 수도원의 대표승려로 구성된 '성스런 공동체'에 의해 운영된다. 외부인이 그곳에 들어가려면 별도의 입국비자를 발급받아야 할 정도로 자치권이 보장된 국가 속의 국가이다. 단, 비자는 '아바통'이라 불리는 계율에 따라 오로지 남자에게만 부여된다. 예수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이곳에 어떤 여자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계율 때문이다. 수도원과 암자, 그리고 공동 수도생활을 거부하는 은자의 토굴에는 검은 승복을 입고 긴 수염을 기른 남자들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