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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창작 교실의 철학 강의 노트

니체와 칸트가 말하는 신이 죽은 시대의 내로남불에 관한 이론적 고찰과 판단

니체와 칸트가 말하는 신이 죽은 시대의 내로남불에 관한 이론적 고찰과 판단

신이라는 절대적 인식자가 사라진 이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결정하는가?

1.'이웃'의 내로남불을 향한 비판

1) 내로남불의 부도덕성

21세기 대한민국, 오늘 우리는 누구나 내로남불에 대해 말한다. 사실 모든 것이 내로남불이다. 모든 사람이 타인의 내로남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너는 그녀는, 그는, 그들은, 저들은, 모두 내로남불이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나의 내로남불, 우리의 내로남불을 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적어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사실 우리는 이 단락의 첫 번째 문장을 다음처럼 바꾸어야 할지도 모른다. 21세기 대한민국, 오늘 우리는 누구나 내로남불에 대해 말한다, 오직 타인의 내로남불에 대해서만! 이런 면에서 내로남불은 늘 타인의 내로남불만을 배타적으로 향하고 있는 어떤 것, 사실상 이미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내로남불'이다. 이는 달리 말해 오늘 대한민국의 내로남불이 (행위와 비판 담론을 막론하고) 사실상 권력투쟁, 보다 정확히는 담론투쟁을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해 보자. 오늘 대한민국의 내로남불은 행위와 담론을 막론하고 모두 오직 타인을 향해 있으며, 그 일차적 효과는 도덕적임과 동시에 늘 정치적이다. 내로남불의 담론 효과가 도덕적이라는 것은 타인의 내로남불 행위를 비판하는 담론은 그러한 비판이 향하는 대상이 자신과 타인에게 적용하는 다른 잣대, 이중잣대를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는 담론, 곧 상대의 부도덕을 비판하는 담론이라는 의미이다. 내로남불 비판 담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명백한 가치판단을 담고 있는 도덕적 담론, 그리고 그렇게 설정된 도덕적 기준을 통해 상대의 부도덕을 비판하는 도덕적 담론이다. 당연히, 내로남불 행위는 도덕적으로 결코 권장될 일이 아니다. 내로남불은 게임의 규칙을 위반하는 행위, 불공정 행위, 한마디로 반칙이다. 게임의 규칙을 성실히 지키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내로남불, 곧 내가 준수하고 있는 게임의 규칙을 누군가가 몰래 어기는 행위, 참여자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가정되는 공동체의 규칙, 공동체의 성립 근거를 무시하고 자신만을 예외로 두어 자신의 이익을부당한 방식으로 도모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에 틀림없다. 따라서 내로남불은 부도덕한 일이다.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정당한 이의를 제기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2) 내로남불 비판과 칸트의 도덕법칙

내로남불의 부도덕함을 비판하는 기본적 논의구조는 사실상 상당 부분 도덕성에 대한 칸트의 논의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칸트는 자신의 윤리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1786) 와 이어지는 3비판서 중 하나인 『실천이성비판』(Kritik derpraktischen Vernunft, 1788)에서 어떤 행위의 도덕성 유무에 대한 기준을 제공하는 근본원리를 의미하는 도덕법칙을 '순수 실천이성의 원칙'이라는 이름 아래 다음처럼 기술한 바 있다.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하라."10

칸트의 이러한 '순수 실천이성의 원칙'은 조건적인 가언명법(假言命法)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정언명법(定言命法)이다. 조건적인 가언명법은 이익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감기에 걸리지 않고 싶다면, 밤에 이불을 잘 덮고 자라'와 같은 문장이다. 이는 이익에 관련된 명령으로 칸트에 따르면 도덕성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도덕성에 관련되는 무조건적인 정언명법은 이익에 관련된 명령이 아니며, 당사자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 의지, 또는 호오와 무관하게, 어떤 누구의, 어떤 예외도 없이, 무조건 준수되어야 하는 명령이다. 칸트는 양자의 차이를 '충고'와 '명령'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다. 매우 복잡하게 들리는 위의 원칙은 쉽게 말해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남들이 네게 요구했을 때 네가 받아들일 수 없는 원리를 남들에게 제시하지 마라.'

남들이 네게 했을 때 네가 용납하지 않을 일을 남들에게 하지 마라! 이것은 반박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도덕성이란 그 자체로 대등한 양자 사이의 평등이 전제될 경우에만 성립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칸트가 제시한 실천이성의 정언명법은 건강한 상식인이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이다. 그리고 내로남불 행위는 바로 이 칸트적 정언명법을 어기는 행위이다. 남들이 했을 때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을 나는 남들 몰래 뒤에서 하는 일, 이것이 내로남불의 행위이다.

3) 내로남불 비판 담론의 정치적 층위

타인의 내로남불 행위에 대한 비판은 그 자체로 이미 평등하지 않은 관계, 불평등한 관계에서는 제기될 수 없는 비판이다. 평등하지 않은 관계란 그 자체로 이미 '너는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나는 해도 된다, 또는 할 수 있다'라는 말, 곧 일종의 '내로남불'을 당연한 전제로서 받아들이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로남불에 대한 비판은 오직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평등한 관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비판이다. 내로남불에 대한 비판이란 '우리는 평등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평등하지 못하다'라는 분노의 말, 나아가 '우리가 평등하지 못한 것은 너의 규칙 위반, 반칙 행위 때문이다'라는 비판의 언사와 다름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내로남불에 대한 비판은 철학적 보편성의 관념, 실제적인 사회적 평등의 관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내로남불은 공정(公正, fairness)과 정의(正義, justice)에 관계된 말이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내로남불은 그 자체로 이미 사회적·정치적 차원을 포함한다. 사회적·정치적으로 대등하지 않은 이들 사이의 관계에서 누군가가 타인의 내로남불을 비판한다고 해서 실제의 사회적 현실이 이를 반영·수정한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영과 수정은 내로남불 비판 담론이 (약자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강자'에 의해서 발화되었을 경우에만 실제로 수행될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내로남불 행위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현실적인 사회 · 정치적 평등이 실제 사회에 확립되어 있을 때, 또는 적어도 확립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해당 사회의 구성원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해지는 정치적 담론이다.

따라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내로남불 비판 담론이 거의 지배적'시대정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이미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이전과는 다른 사회로 진입했다는 방증이다. 왜냐하면 내로남불 현상은 인류 역사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없었던 적이 없으며, 사실상 (오직 줄이고자 노력할 수 있을 뿐) 영원히 근절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결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자만이 하고 싶은 일을 규칙을 어겨 가며 할 수 있었던' 내로남불 현상은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유사 이래로 늘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늘 있어 왔던 내로남불 현상이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사회적 의식의 표면에 떠올랐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내로남불 현상과 그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차라리 다음과 같은 질문일 것이다. 왜 이제까지는 별로 의식되지도 않았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늘 용납되어 오던 어떤 일이 어느날 갑자기 내로남불이라는 호칭과 더불어 의식의 전면에 떠올랐는가? 내로남불 비판 담론이 사회적 의식의 전면에 떠올라 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사실들을 의미한다. 이는 현상과 비판을 막론하고, 내로남불이 사회적 의식의 전면에 부상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제까지는 늘 있어 왔고 늘 용납되어 왔던 내로남불이라는 일이 이제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가 이러한 일이 부당하다는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고,이런 일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약자들의 연대가 그러한 일을 실제로 퇴치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을 보유했다는 자신감을 반영하는 사태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20세기의 대한민국이 아닌 것이다.

4) 내로남불이라는 내로남불?

이처럼 새롭게 등장한 현상으로서의 내로남불 비판 담론은 철학적으로 다양한 인식론적 문제를 제기하는데, 아래에서는 이를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내로남불 비판 담론은 사실상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내로남불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설령 이러한 나의 지적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어떤 '개인적인 도덕적 게으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인식론적 오류 내지는 무지가 근본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내로남불을 말하고 있으며, 모든 이들이 진영논리가 아닌 '불편부당한' 관점에 기초한 '객관성'과 '중립성', '전체를 보는' '균형 잡힌 시각에서 사태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내로남불을 말하는 이들을 차분히 살펴볼 때, 이들 모두는 자신이 아닌, 오직 타인들의 내로남불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나의 내로남불이 아닌, 오직 타인들의 내로남불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내가 옳은 말을 하고 있고 상대가 잘못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은 아닐까?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일반론을 말할 수 없고, 매번 저마다의 개별적 사례를 잘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들이 볼 때에는 나 역시 타인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확신은 조금 지지하기 어려운 곤란한 결론을 가져온다. 모든 상황과 경우에 대하여, 오직 나만이 늘 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오류가 전혀 없고 실수가 전혀 없는 전지자, 곧 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 중에는 신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타인들의 내로남불만을 말하는 나는 늘나 자신을 내로남불의 바깥에, 곧 예외로 두고 있는 것이다. 또는 보다 정확히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타인들의 내로남불만을 말하고 있는 나는 늘 나 자신의 내로남불에 대해 눈감으면서 나 자신을 내로남불의 바깥에, 곧 예외로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이렇게 타인의 내로남불을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은 내로남불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자기기만'이라는 도덕적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분노해야 하는 것일까?

5) 상대주의의 문제

물론 누군가가 자신만을 늘 내로남불의 예외로 두면서 타인들의 내로남불만을 비판할 때 이는 분명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일한 하나의 사태에 대해 여러 사람이 모두 동시에 옳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입장은 그 자신의 관점에서는 옳은 것일 수 있다는 반론이 바로 그것이다. 남들이 보면 그 입장은 틀린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타당한 것, 옳은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상대주의(相對主義, relativism)라 불리는 입장이다.12) 상대주의는 물론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하나의 절대적·보편적 기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구체적·개별적 상황들에만 적합한 매번 다양한 복수의 기준들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상대주의 비판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러한 입장에도 문제는 있다. 전통적 비판은 두 가지인데, 우선, 상대주의는 자신의 입장만은 상대주의적인 것으로 가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입장과는 모순되게도 자신의 입장을 '보편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상대주의에 대한 이런 비판은 상대주의가 다음과 같은 자기모순적인 형식을 갖는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말은 옳다. 그런데 이 말만은 상대적이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아마도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상대주의를 옹호하려는 논리의 일관성을 파괴하고 만다. 다음으로, 이러한 상대주의적 주장은 '일정한 시점에서 적절한 진위판단의 체계가 주어진다면 상대주의로 나아가지 않을 수도 있는 모든 사태를 상대주의로 몰고 간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이는 상대주의가 논리의 다양한 층위

12) 상대주의는 절대주의(絶對主義, absolutism)에 짝하는 말로서 모든 것에 들어맞는 하나의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경우에만 들어맞는 여러 개의 기준들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유사한 의미를 가지지만, 철학에서는 사실 절대주의라는 말보다 보편주의(義, universalism)라는 말을 선호한다. 우리는 이러한 보편주의의 상대어로서, 개별자의 구체적인 매번의 상황을 지칭하는 특수주의(特殊主義)라는 말이 존재하지만, 상대주의와 관련된 논변에서 이 용어의 사용빈도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따라서 독자는 '상대주의에 짝하는 말은 보편주의이다'라는 정도로만 기억해 두면 앞으로의 논의를 따라가는 데 충분할 것이다.

를 무시한 입장일 수 있다(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논리의 층위를 무시하는 행동 자체가 이미 상대주의의 입장과는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보자. 가령 우리가 차와 커피, 녹차 또는 콜라 중 무엇을 마시고 싶은가라는 문제가 있다고 할 때 이에 대해서는 하나의 유일한 답이 있을 수 없고, 실은 있어서도 안 된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영역, 가령, '과연 우리가 약자에 대한 혐오 담론을 인정하고 용인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경우, 상대주의는 이러한 혐오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 어떠한 유의미한 반대 논거를 제시하기 어렵다. 상대주의를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입장, 곧 '강한' 상대주의의 입장 아래 정식화시킬 경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입장은 각기 나름의 이유를 가질 것이므로, 상대주의의 입장 그 자체만으로는 이렇게 혐오를 정당화하는 주장을 적절히 제어하거나 반대 논거를 들기 어렵다. 이 세상의 모든 입장은 나름의 가치가 있으며, 모든 것은 관점의 문제라는 것이 상대주의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한 의미의 상대주의는 '다양성의 존중'이 문제시되는 경우에 대해서는 유익한 결과를 발생시킬 수'산, 때로는 '모든 입장에 대한 가치판단을 전적으로, 또는 상수분 유보함’으로써 현실에 존재하는 강자의 '부당한' (상대주의의 입장에서는 이 또한 또 하나의 상대적인 입장에 불과하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본의 아닌?) 결과를 가져올 위험이 높다.

정리해 보자. 우선, 상대주의는 어떤 특정 영역, 또는 특정 사태를 바라보는 일정한 진위판단의 체계가 주어지지 않았을 경우, 옳은 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때로 (일정한 진위판단의 체계가 일정한 시점에 주어졌을 경우 적절히 제어될 수도 있었을) 다양한 가치판단들 사이의 위계를 부분적으로, 또는 전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이러한 가치 체계들 사이의 가능하고도 '정당한 위계를 파괴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마지막으로, 아래와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이는 사실 상대주의의 '약점'이라기보다는 차리리 상대주의에 대한 '오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내가 녹차와 콜라 중 하나를 택할 때는 이를 제어할 체계가 주어질 필요도, 당위도 없겠지만, '맥주 다섯 병을 마시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라는 주장은 처음부터 상대주의적 논변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 자체가 아니다. 이는 상대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음주운전'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맥락을 이해하고 있는 어떤 누구에게도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종류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상대주의 이러한 여러 특성을 감안해 본다면, 우리는 앞서 우리가 검토하던 주장, 곧 '모든 주장은 각자의 관점에서는 옳은 것일 수 있다'는 주장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각자는 나름의 관점에서 보면 나름 옳은 주장, 타당한 주장,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상대주의적' 주장은 일정한 진위판단의 체계가 주어지기 전에는 타당할 수도 있는 주장이다. 하나의 동일한 사태를 누군가는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저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기 때문이고, 실제로 모든 사태는 모든 사람에 의해 바로 실제로 늘 이렇게 바라보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우리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한 사실적 묘사로서 바라본다면 이는 더없이 적절한 기술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든 것을 늘 이렇게 본다는 사실이 있다고 해서, (살인이 늘 일어난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듯이) 우리가 일제의 침략이나, 나치의 학살, 광주학살, 나아가 지금도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 갑질과 왕따, 강도와 살인, 아동학대와 성폭력을 모두 '그럴 수도 있는 일, 그래도 되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일들은 다를 뿐만 아니라, 단순히 '틀린' 일들이다. 따라서 내로남불에 관련된 (적어도 '강한' 의미의 상대주의적 주장은 기각되는데, 이 경우 우리의 결론은 이른바 '비판적 상식'에도 들어맞는다.

6) 각자의 '상대적' 관점을 넘어서는 '객관적' 관점은 불가능할까?

우리는 늘 어떤 '하나의 동일한 사태'를 각자의 관점으로 본다(실은, 우리들 각자가 '동일한' 하나의 사태를 보고 있는지조차도 논쟁적이다). 실은 우리 중 누구도 나의 관점이 객관적 관점이라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그리고 스스로가 객관적인 관점이라고 믿는 경우라 할지라도 이것이 스스로의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넘어선 실제의 '객관적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것인지를 확신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하나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사실판단이라고 보는 것이 신중한 입장일 것이다. 논점의 이해야말로, 학문과 철학의 기본이라고 할 때, 우리가 이 책에서 살피고자 하는 단 하나의 논점은 바로 이것이다. '각자의 관점으로 본다'라는 말은 무엇인가 우리를 필연적으로 상대주의, 주관주의, 나아가 편파적인, 부분적 인식으로 이끌고 가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주의적, 상대주의적, 부분적, 편파적 인식이 아닌, 불편부당하고 중립적인 객관주의적, 보편주의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인식, 전체를 바라보는 균형 잡힌 인식은 정말 불가능할까? 그런 인식은, 비록 아직 우리가 도달하지 못했고, 따라서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라 해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우리가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것 역시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또는 실은 이미 우리 중 누군가는, 감히 조금 더 정직하게 말해 본다면, '나'는 이런 판단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이에 연관되는 논의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과 연관되는 현대 철학의 핵심적 논점 중 하나이다. 철학과 일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철학과 일상은 둘이 아니다. 또는, 차라리 철학은 일상과 일생을 아주 조금, 그러나 근본적으로 바꾼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작은 아주 조금이 나의 일상과 일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이에 연관되는 논의는 이 책의 핵심 주장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므로 이 부분은 현재의 논의를 마친 후, 별도의 독립적인 장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2.'강자'의 내로남불을 향한 비판

1) 권력의 남용에 대한 비판

이제 다음으로, 상대적으로는 '보다 단순한 경우인 것처럼 보이는'(그러나 사실은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강자의 경우를 살펴보자.

먼저, 강자의 내로남불 행위에 대한 비판 담론은 매우 건강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팔이 안으로 굽게 되어 있는 것이라면, 사실 내로남불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행위, 인지상정에서 기인한 행위일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론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가 실제로 목격하는 강자들, 사회 기득권의 내로남불은 상대적 약자, 곧 반인들의 내로남불과는 실로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없다.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 이른바 '아빠찬스, 엄마찬스라는 말로 대변되는 강자, 가진 자, 기득권 계층의 내로남불 행위는 이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내로남불 자체가 이미 게임의 위반, 곧 반칙이지만, 강자의 내로남불은 실로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반칙이다. 사회의 공정 게임은 반칙이 게임의 일부이자 전술로 용인·활용되는 프로레슬링 또는 축구와는 다른 게임이다. 이러한 사태는 섬세한 정신으로 옥석을 가려야 할 일이고, 구성원들 스스로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타인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는 구성원들의 결단이 필요한 영역이나, 결론적으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13) 나는 2010년대 이후의 한국 소설, 특히 최은영, 황정은, 정세랑, 한강 등과같은 이들로 대표되는 젊은 여성 작가들에게서 이런 태도가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내가잘 알지 못하는 타인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는 이러한 섬세한 윤리적 결단은비단 한국 문학만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결코 유례가 없는 새로운 종류의 윤

리적·문학적 감수성으로 보인다. 이제까지의 한국 소설이 그려 내고 있는 주인공, 또는작가의 분신으로서 작가가 공감하는 화자의 상당수는 국가의 폭력이든, 개인적·사적 영역의 폭력이든) 보통 피해자들로 그려졌다. 목소리를 빼앗긴 피해자에게 그들의 목소리를돌려준다는 이러한 의도와 목적은 매우 고귀한 것이며,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이들로 대변되는 새로운 시대의 작가들은 이를넘어, 이를 포용하면서, 나 자신이 가해자가 될 가능성, 내가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사유함으로써 그 지평을 넓혔다. 나는 이를 한국 소설을 넘어, 소설 그 자체의 새로운 성숙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2) 공정한, 진영으로부터 자유로운 비판?

강자의 내로남불에 대한 비판은 이견의 여지 없이 올바른 행위이다. 그러나 앞서도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강자'의 문제는 몇 가지 복잡한 인식론적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우선, 강자가 과연 (보통 사람 또는 약자와 늘 분명히 구분되는) '독립적 실체'인가라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진영논리에 따라 강자를, 실은 강자만을 비판하는 '선택적 비판의 경우를 살펴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자의 비판이 역차별로 기능하는 지점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아래에서는 이를 순서대로 간략히 다루어 본다.

① 우선, 강자는 (보통 사람 또는 약자와 늘 분명히 구분되는) 독립적 실체인가라는 문제를 살펴보자. 앞서 지적했던 대로 '강자'는 주어진 구해치 · 사회적 현실 속의 강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강자'라는 개념이 늘 그렇게 명확히 구분 가능한 독립적 실체인 것만은 아니다.

먼저, 이 경우의 강자가 저 경우의 약자가 되고, 이 경우의 약자가 저 경우의 강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한 예로서 회사의 말난 사원인 약자가 집에서는 연장자이자 경제적 능력을 갖춘 유일한 인물인 가장이 되면서 강자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하 직원 앞의 강자는 상급자 앞에서는 약자가 된다. 강자와 약자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듯이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특징 지역, 특정 시기의 특징 상황에서 이러한 구분은 일정한 지속성을 갖기도 한다. 가령 회장의 아들인 신입사원은 이타의 신입사원들과 겉으로는 같이 보이지만, 이들이 같은 회사를 계속해서 다니는 한, 기본적으로 따른 신입사원들에 대한 심지어는 자신의 상급자들에 대해서조차) 강자의 지위를 점유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기득권층은 일정한 예외를 제외한다면 상당수의 경우 그들의 일생 동안 그 사회의 기득권을 갖는 '강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이 재산과 권력, 그리고 능력의 '상속자들'은 각종 유·무형의 '자본을 대물림 받은 사회의 기득권층, 곧 강자들이다. 이들은 원칙과 현실 양 측면 모두에서, 주어진 사회 안에서의 기회와 능력의 원초적 불평등을 증거하는 존재들이다.

나아가, 두 사람이 존재한다고 할 때, 이 측면의 강자가 저 측면에서 보면 약자가 되기도 하고, 이 측면의 약자가 저 측면에서 보면 강자가 되기도 한다. 말단 직장인인 나는 회사에는 일반적으로 '약자'에 속하게 되지만, 태어날 때부터 정신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고 무직의 기초생활수급자인 어떤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정상인', 곧 사회적 '강자'로 비춰진다. 회장의 딸로서 27세에 전무가 된 나는 회사에서는 '강자'이지만, 집에서는 가장이자 회장인 아버지에게 여전히 구타를 당하는 말 못하는 아픔을 지닌 '약자'일 수 있다. 그 자체로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그 사람이 지금어디에, 누구와 있는가에 따라서만, 그의 키가 크거나 작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한 인간은 현재 자신이 속한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서만 특정 방식으로 규정 가능하다.

② 다음으로, 진영논리에 따라 강자'만'을 배타적으로 비판하는 선택적 비판의 경우를 살펴보자. '나는 진영논리를 따르지 않겠다' 또는 '진영에 따라 판단하지 않겠다'라는 말은 나의 편, 남의 편을 가리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말이다. 그러나,이 책의 뒷부분에서 보다 상세히 다루게 되겠지만, 내로남불은 다른 어떤 영역에서보다 특히 정치·사회의 영역에서 강력히 관찰되는 현상이다. 내로남불이란 바로 이렇게 내가 속한 진영, 또는 보다 정확히는 내가 속해 있다고 스스로 믿는 진영에 따라, (거의) 동일한 사태에 대한 판단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적절히 설정된 것이라면 현실적인 여러 문제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간단히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또는 속해 있다고 믿는 진영의 논리에 따라 동일한 사태를 달리 보는 '편파적' 관점을 버리고, 오직 '사실에 입각한' 정직한 태도로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아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아닌 타인들, 나와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집단의 내로남불만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들의 생각은 이렇다. 상대는 진영논리이지만, 나는 진영논리가 아니다. 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 대립하는 이들 두 진영은 진영논리이지만, 이 두 진영의 바깥에서 적절한 거리를 취하며 사태를 바라보는 나는 진영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나는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이들 중 누구도 보지 못하는 단순한 '진실', 사태의 '본질'을 본다. 이러한 태도가 내게 가능한 것은 내가 어떤 관점이나 이익과도 무관하게 객관적인 위치를 신중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이때의 '객관적'이란 용어는 '중립적', '있는 그대로' 등의 용어로도 바꾸어 쓸 수 있는 용어이다. 자,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타당할까? 이런 관점은 가능할까? 이것은 악의는 아닐지라도, 하나의 무지, 하나의 단순한 인식론적 오류에 기초한 말이 아닐까? 나는 >방금 이렇게 썼다. 자기가 속한 진영, 또는 보다 정확히는 내가 속해있다고 스스로 믿는 진영에 따라, (거의) 동일한 사태에 대한 판단이 전혀 달라진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이 속한 또는 속해 있다고 믿는 진영의 논리에 따라 동일한 사태를 달리 보는 '편파적' 관점을 버리고, 오직 '사실에 입각한 정직한 태도로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러한 말을 분석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사항에 대해 세심히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진영 없이, 나의 이해·관심(interest)과 무관하게 중립적, ‘객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을까? 이른바 '객관성'이라는 19세기의 신화는 철학이나 과학의 영역에서는 파기된 지 오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아직도 상당 부분 유의미한 담론으로 남아 있다. 나는 이 책을 이러한 '객관성의 관념이 오히려 현실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쓰고 있다. 니체를 다루는 부분에서, 상세히 검토하게 되겠지만, 어떤 누구도 관점·관심없이,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이는 어느 누구도 특정 진영에 입각하지 않고 사태를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물론 한 사람은 어떤 사태에 대하여 지금 현실에서 대립하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진영들이 대립하는 사태에서 이들 중 어느 진영의 해석에도 얽매임 없이(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진영논리에 속하지 않고'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또는 그렇다고 내가 믿어 의심치 않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이 사태에 대한 올바르고도 중립적인 판단인가라는 문제는 이러한 자신의 신념 또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 속하는 사태이다.

다음으로, '동일한' 사태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다시 검토해 보아야한다. 과연 이 세계에 동일한 사태라는 것이 있을까? 이러한 표현은 두 개의 다른 사태들 중 같은 부분만을 지칭하고 나머지 부분은 거론하지 않기로 결정한 선택을 의미하는 수사학적 표현이다. 각자의 연인에게 '실연' 당한 두 명의 인간은 '나는 여전히 그를 보고 싶은데 상대는 나를 떠나갔다는 사실만을 제외하고는, 글자 그대로 그 외의 모든 상황, 가령 서로가 만난 기간, 사회자본 및 경제적 능력상의 차이, 서로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 떠난 사람의 성별, 두 사람의 나이 등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를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실연이란 건 말이야-" 하고 말을 건네는 사람은 자신의 주관적 체험을 비슷한 상황의 보편적인 상황으로 간주하는 일반화하는 오류를 피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매번 모두 다른 사태들이고, 동일하거나 거의 동일한 사태가 두 번 일어나는 일이란 전혀 없으므로, 우리는 매번의 다른 사태들에 대해 섬세한 정신으로 이를 세심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③ 마지막으로, 강자에 대한 비판이 역차별로 기능하는 지점에 대해 검토해 보자. 사실, 강자에 대한 비판이 역차별로 기능하는 경우는 위에서 우리가 검토한 두 가지 요인들로 인해 충분히 가능한 사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사회라면, 약자의 인권만큼이나, 강자의 인권 역시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 차별과 역차별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차별을 막기 위한 섬세한 구분방식은 강자와 약자를 상황과 무관한 독립적 실체들로서 가정하는 오류를 피하는 일과 같다. 강자와 약자란 오직 그 주체가 놓인 상황, 그들 주변에 있는 이들과의 상대적 관계 규정에 따라서만 결정 가능한 사항일 따름이다. 영원한 강자, 모든 면에서 강자가 한편에 있고, 영원한 약자, 모든 면에서 약자가 다른 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강자와 약자란, 실체적 규정이 아니라, 각각의 상대적 관계를 따라 달라지는 생성적 규정에 따르는 두 개의 지칭들, 편의를 위한 지칭들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아무도 내로남불을 피할 수 없다. 내로남불은 인간 인식의 불가피한 조건이다.

우리는 모두 남불을 행한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들의 내로남불만이 아니라, 타인과 나 자신 모두의 내로남불을 감시하고 따져 묻는 비판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편안함은 물론 좋은 것이지만, 철학은 마냥 편안함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긴 안목으로 볼 때, 비판받지 않는 편안함, 곧 지나친 편안함은 결국 더 많은 문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이 건강한 불편함을 지향한다'고 믿는다. 내가 쓴 이 책은 바로 이렇게 철학이 지향하는 건강한 불편함을 가져오기 위한 작은 시도이다.

누가 전체를 볼 수 있는가? 우리 중 누구도 '숲'을 볼 수 없다. 숲, 곧 전체를 볼 수 없고, 모든 사람이 오직 나무들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인식은 부분적 인식, 곧 치우친인식, 편파적 인식이다.

어떤 인식이 아니라, 모든 인식, 곧 '인식' 그 자체가 편파적이다. 너와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불가피하게' 편파적이다. 어떤 인간도 이러한 사실의 예외가 될 수 없다.

| ISBN:979-11-6684-106-4 03120

3장 니체에 이르는 길 '신은 죽었다'

니체, 신이 죽은 시대의 내로남불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의 부제는 이 장의 소제목, '신이 죽은 시대의 내로남불이다. 이때의 '신이 죽은'이란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니체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파스칼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처럼,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철학과 무관한 일반인들 모두가 철학자의 이름과 그의 말을 정확히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문장이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는 말은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 이를 위해서는 오늘 여기 내가 이 말을 듣고 받은 나의 인상만큼이나, 이러한 명제의 발화자인 니체 자신의 내적 맥락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받은 인상은 내가 평상시에는 정확히 모를 수도 있는 나의 의식적·무의식적 이해의 구조를 드러내 주는 소중한 자료, 나아가 나만의 고유한 문제의식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내가 받은 인상과 발화자의 의도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 말의 발화자가 어떤 의도와 의미에서 그러한 말을했는지를 이해하려는 태도 역시 매우 중요하다. 내가 책을 읽고 받은 인상을 늘 옳은 것, 당연한 것으로 가정하기보다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가 읽은 책의 관점에서 내가 받은 인상을 차분히 검토하는 것 역시 매우 필요한 태도이다. 내가 책을 읽듯이, 책이 나를 읽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1.

"신은 죽었다" : 자기비판으로서의 그리스도교 비판

니체의 "신은 죽었다" (Gott ist tot)라는 말은 물론 그리스도교의 신이죽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물론 신이 어디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비유, 곧 '어린 시절의 우리가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었던 하나의 유용한 오류, 거짓말'로서의 신이라는 의미체가 그 효과를 다했다는 말이다. 니체의 아버지는 루터파의 개신교 목사였고, 교단에 올라 설교를 하고 놀았다는 니체의 어렸을 적 별명 역시 '꼬마 목사'였다. 1844년생인 니체의 '신이 죽었다'는말은, 우리로 치면 조선 시대 아버지가 선비였던 1844년생인 한 청년이 '성인, 군자는 죽었다', '공자는 죽었다'와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보면 그 의미가 더 쉽게 이해된다. 니체의 이러한 발언은 자신의 가문, 종교,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궁극적으로는 자기비판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이 어릴 적 조건화된 신념 체계를 유일한 올바른 삶의 체계로 믿고 평생을 사는 사람(북한을 생각해 보면 된다)과 자신이 조건화된 신념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자기비판을 수행한 사람(니체로 대표되는 새로운 인간형)을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 하나의 유일한 '정답'이 있는 세계의 종말

물론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무한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단적으로 '정답이 있는 사회'가 끝났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가령 1750년 같은 해에 태어난 독일과 조선의 두 남성을 생각해 보자. 이들 모두의 삶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다. 그들이 태어나기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하는 삶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정답'이 나는 무슨 직업을 가질 것인가?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실은 그들은 결코 스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냥 나의 아버지의 직업이 나의 직업이 된다. 아버지가 귀족이면 나도 귀족이고, 아버지가 백정이면 나도 백정이 된다. 나는 진학을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은 필요 없다, 귀족이라면 일정한 시기까지는 공부를 하게 될 것이고, 아니라면 학교 근처에도 가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혼을 할 것인가? 그런 고민은 할 필요 없다. 그냥 나이가 차면 무조건 하는 것이다.

결혼을 안 한다는 것은 (경제적·사회적 지위와 여건이 받쳐 주지 못해서 할수가 없는 경우가 아닌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식을 낳을 것인가?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불임이 아닌 이상, 자식이 없는 결혼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단순한 결격 사유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종교를 가질 것인가, 갖는다면 무슨 종교를 가질 것인가? 자유롭게 종교를 가질지의 여부를 개인이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종교를 가질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냥 나는 내 나라보다 정확히는 내 나라의 지배자)의 종교를 갖는다. 이 모든 것은 내가 태어나기 이미 오래전부터 결정되어 있는 일이다. '신이 죽지 않은 나라가 유지될 수 있는 핵심 조건은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조선의 속담은 '여성이 스스로 생각하고 인권의식을 갖게 되면 조선이 망한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며, 실제로 조선이 망하기 전까지 여성의 인권은 철저히 짓밟혔고, 여성의 인권은 조선이 망한 이후에야 의식의 표면에 떠오를 수 있었다. 여성의 인권과 조선의 존재는 '하나가 죽어야 나머지 하나가 사는' 양립 불가능한 것, 생사를 걸고 투쟁하며 대립해야 하는 두 가지 적대적 모순이었다.

2) '정답'은 '본질'의 존재를 가정한다

이러한 '정답'을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은 이러한 정답을 말하는 이들이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결코 변화한 적이 없는 이 세계의 본질, 영원불변한 진리'를 알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계의 불변하는 유일한 진리를 알고, 그 진리가 하나라면,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은 단순히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반드시 '틀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사실도, 진실도, 진리도 아닌 것을 진리, 옳은 것으로 믿게 된 이유는 단순한 개인적 악의로부터, 사회에 대한 불만, 진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아집, 무지, 오류, 가장 좋은 경우에 타인의 거짓말을 순진하게 믿은 어리석음, 그리고 속임수 등등 다양하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자가 볼 때,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그들이 거짓을 진실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논의는 이러한 진실을 믿고 있는 사람이 이 세계의 진리 또는 진실, 곧 이 세계의 영원불변하는 본질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3)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아는가?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이,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실제로 진리이자 본질로 믿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여 이런 확신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 사람의 이런 확신은 과연 옳을까? 물론 이 사람이믿고 있는 것이 실제로 영원불변하는 이 세계의 유일한 진리이자 본질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와 본질을 아는 사람이나일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은 너일 수도, 또는 또 다른 누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나 나는 진실과 본질 그 자체를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믿음과 앎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사실, 진정 흥미로운 것은 나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나만은 이 영원불변하는 유일한 진실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무엇인가를 진실이자 본질이라고 믿고 있는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각자에게는 각자의 진실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까?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고, 아직 합의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의 유일한 진실이 존재할 가능성을 처음부터 아예 부정한다는 것은 논리적 오류가 아닐까?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나름 옳을까? 각자에게는 각자의 진리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 각자에게마저도 각각의 장소·시간, 곧 상황에 따라 각각의 옳은 것들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앞서 간단히 논의한 상대주의에 대한 논의에서도 이미 충분히 드러났듯이. 진실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정의하고 확정하는 문제는 대단히 복잡한 또 다른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이를 해결하는 것이 인류역사의 가장 큰 난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진실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판정하는가? 이에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해결책들이 있어 왔다. 아래에서는 이들 중 대표적인 몇 가지 해결책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독자들은 우리가 아래에서 간략히 검토하게 될 여러 해결책이 모두 누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출된 것임을 잘 기억하며 글을 읽어 주기를 바란다.

4

칸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의 인식은 우리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내재된 어떤 특정한 조월적 틀, 형식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이는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하고, 그 대상을 존재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경험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은 동시에 그 경험의 대상들을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56

이는,

"진리가 또는 가상(가짜)은, 그것이 직관되는 한에서,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사고되는 한에서 대상에 대한 [인식주관의 판단 안에 있기 때문이다."57

57)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21, 백종현 옮김, 523쪽; KrV, A293, B350.인용자 강조,

백종현은 이를 오직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인식된 대상을 갖는다. 인식함으로써 알려져 있지 않던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백종현, '칸트 이성철학 서 5제: '참' 가치의 원리로서 이성, 아카넷, 2012, 39쪽.

간단히 말해, 초월적 틀은 대상의 인식/존재 가능 조건(condition of possibility of recognition/existence)이다. 칸트는 이를, 자신만만한 어조로, 자신이 이룩한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렀다. 이제 대상에 대한 인식과 대상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이 인식주관의 '초월적' 틀이 그것에 의해 존재 - 인식 가능해진 대상보다 더 중요하다. 단적으로, 인식되는 대상보다, 인식하는 주관이 더 중요하다. 인식주관이 없으면, 대상은 처음부터 아예 인식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사실상 존재할 수도 없다. 인식주관이 선험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초월적 인식은 '대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정초적 인식, 곧 표상이나 개념 또는 원리'를 말한다. 칸트는 1783년에 발표한 『형이상학 서설』(Prolegomena)에 붙인 각주를 통해 '초월적'이라는 용어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59)

“낱말 '초월적'은 모든 경험을 넘어가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에 선행하면서도 선험적이면서도), 오직 경험인식을 가능하도록 하는 데에만 쓰이도록 정해져 있는 어떤 것을 말한다. "60)

59)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칸트에서는 기본적으로 우리마음의 둥식이 성립하여 마음이 보편적 주체/주관을 지칭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칸트는 보편적 주관주의자라 일컬을 수 있다.)" 같은 책, 40쪽, 인용자 강조

칸트가 사용하는 의미의 초월적이라는 용어는 “① '모든 경험에앞서는', 즉 '비(감각) 경험적이고 '선험적이면서, 동시에 ② 한낱 '경험을 넘어가 버리는 것초경험적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인식을 가능하게 하는'(Erfahrungserkenntnis möglich machend), 요컨대(①+②), '선험적으로 경험인식을 규정하는'(Erfahrungserkenntnis apriorisch bestimmend)을 뜻한다. 1 따라서, 초월적인 것은 어떤 대상이나 주관 자체가 아니라) ‘경험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인 동시에 '그 경험의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 초월적인 것은 조건들 자체이다. 칸트의 초월철학은 따라서 '경험인식의 가능원리인 의식의 초월성을 바꾸는 철학', 또는 '경험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주관의 초월적 조건을 해명하는 철학'이다. "62)

한편, 칸트에게 초월적인 것은 기본적으로 규정(Bestimmung), 곧 형식/틀(Form)을 의미한다. 그리고, 칸트는 이전과 달리 "이 형식을 모든 인간 의식에서 선험적인 것, 즉 순수 주관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우리에게 존재자는 모두 현상으로서, 이 현상은 무엇이든 어떻게 있든 순수 주관적인 형식, 곧 공간 • 시간이라는 직관 형식과 지성이라는 사고 형식에서 규정된다"고 바라본다.

칸트 이전까지, 서양 철학은 이른바 '초월적인 것'을 신의 영역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칸트는 대상의 인식과 존재를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 인식주관의 선험적 틀을 초월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알 수 없는' 무한한 신의 초월성이 이제 주어진 한계 안에서 엄밀한 검증을 거쳐 작용하여, 결국 '알 수 있는 유한한 인간 이성의 속성이 되는 것이다.

칸트 이후로, 인간은 현상, 곧 자신의 인식 대상을 걸고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으며 오직 자신이 그 대상을 바라보는 일정한 틀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 이제 인식되는 대상보다 인식하는 주관이 더 중요하며, 따라서 철학의 과제 역시 이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가정되어 검토된 적이 없었던 인간의 인식주관, 보다 정확히는 인식작용의 기능과 구조, 한계를 밝히는 일이 된다. 이는 현상보다는) 오히려 우리 인간에게 현상의 인식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인식 가능 조건을 더 중요시하는 입장이다. 단적으로, 현상이 아니라, 현상을 가능케 한 가능 조건들을 살펴야 한다. 64)

64)이러한 입장은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관념론(Ideallsm), 나아가 구성주의 (conutructuvism)라 불리는 입장에 속한다.

이제, 칸트 부분을 마치면서 아래에서는 다소 복잡한 이제까지의 논의를 우리의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정리해 보자.

첫째, 칸트에 따르면, 이제, 인식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¹66기보다는 오히려 인식주관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65) 칸트에 따르면, 나는 '선험적으로 주어진66) 초월적 인식의 틀 없이는 어떤 대상도 인식할 수 없다. 내가 하나의 대상을 '인식했다'는 사실은 이미 내가 그 대상을 일정한 방식으로 인식 · 존재하도록 '포섭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나는 이러한 틀 없이는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

둘째,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미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에 의해 근본적으로 규정된 것, 조건 지어진 것이다. 달리 말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미 나의 인식을 조건지은 (내가 알거나 모르는) 틀에 의해 근본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68)

65)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세상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더 잘 보여 준다.

66)가령 푸코는 이 '선험적으로 주어진'이라는 용어를 '특정 사회와 역사에서 그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선험성, 곧 그렇게 조건화된 선험성', 다시 말해, 역사적 선험성(a priori historique)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푸코는 이른바 (칸트적) 선험성의 선험성을 부정한다.

67)칸트는 이 틀을 초월적인 것, 곧 선험적 · 형식적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했다. 따라서 칸트에게는 여전히 '보편적' 인식이 가능하다. 칸트적 인식은 '내용은 잡다(多)이나, 형식은 보편()'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여전히 인간이 세계를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보편적 · 형식적 틀'이라는 관념이 파괴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니체를 기다려야 한다. 니체에 의해 보편적 인식은 '힘에의 의지가 작동하는 동인이자 결과, 그 메커니즘'으로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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