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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소설, 때때로 맑음 3

소설, 때때로 맑음 / 이재룡

 

날카로운 분석력과 통찰력, 지성미 넘치는 문체로 문학평론가이자 프랑스 문학 번역가로 활발하게 활동해온 이재룡 교수가 <꿀벌의 언어>에 이어 두 번째 에세이집 <소설, 때때로 맑음 1>을 선보인다.

2013년 2월부터 현재까지 「현대문학」에 연재 중인 동명의 비평에세이 중 18편을 일차적으로 묶은 이 책은 프랑스의 최신작 중 문제작들을 골라 정치, 사회, 문화, 역사 등 시대를 가로지르는 문학을 둘러싼 다방면의 분야를 총망라, 자유롭게 관통하며 그 연결고리를 탐색하는 프랑스 소설 연대 산책이라 할 수 있다.

수록된 글들은 각 편별로 테마가 되는 작품과 작가가 등장하고, 이와 관련 있는 최근 프랑스 문학계 이슈와 문학사적 전개가 곁들여진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프랑스 소설을 읽는 것이 나의 일이다. (……) 가급적 남보다 먼저 읽은 신간 소설을 소개하고 거기에 오래된 책에 대한 기억도 겹쳐놓아 새것과 옛것을 비교해보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는 개성 있는 소설 읽기 방식과 더불어 저자 특유의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독창적인 문체로 문학과 예술, 삶과 세계에 대한 냉철한 분석력을 동원한 비평적인 사유의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심장과 실핏줄
개의 아포리즘
숲 속의 빈터
파리의 황금기
모호와 양가
가족작가, 대중작가
우유 같은 소설
토요일 오후 네 시
이별의 4부작
유혹의 산
미치거나 죽거나
2013년산 전후문학
검은 영혼 하얀 언어
20세기의 악몽
팔베개의 서사
말의 씨
지하철과 시장
메두사의 뗏목

에필로그

 

  •  
  • P. 54-55“자, 오늘 너의 라캉이 무슨 말을 했니?” 나는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갖지 않을 것을 주는 것이라고 하던데”라고 했다. 기의에 대한 기표의 우위성도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건 소쉬르의 말이잖아. 아니 그 이전에 라 로슈푸코도 한 말이고.” 나는 다시 상징계를 부풀려 설명하고 그것이 우리를 구성하는 것이며 체험이란 헛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건 레비스트로스의 말이네”라고 그녀가 대답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압축과 전치보다는 은유와 비유를 논하는 것이 훨씬 흥미롭다는 말도 전했다. “그건 야콥슨의 말이네.” 나는 다시 죽음의 본능에 대한 진정한 명칭은 엔트로피라고 설명했다. “그건 이미 프로이트가 한 말인데.” 말싸움에 지쳐 짜증을 내며 라캉을 그의 발화에 환원시키는 것은 바보짓이며 라캉은 그의 발화행위 속에서 전모가 드러난다고 했다. 그녀는 “그건 추종자들의 전형적 대답일 뿐이네”라고 반박했다. 그녀는 라캉에 대한 나의 맹목성과 그녀에 대한 신경질을 전이현상 탓으로 돌렸다. 모든 전이현상 중에서 가장 자아를 소외하는 현상이며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집단심리학과 자아의 분석』을 다시 읽어보는 게 좋을 거야”라고 했다.
    ― pp. 54~55,「숲 속의 빈터」  접기
  • P. 244-245작가 르메트르는 이 소설을 통해 문자 그대로 전후의 프랑스 정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전쟁이 끝나면 승전국은 있게 마련이지만 개개인은 모두 패자이다. 작가는 소설 말미에서 그가 참고한 여러 전쟁소설과 역사 서적을 밝히고 인물의 형상화를 위해 참고한 전후 소설과 탐정소설을 나열했다. 전몰장병 기념비를 둘러싼 사기극은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시신 처리와 관련된 스캔들은 당시의 신문기사에 기반을 둔 것이라 적시했다. 얼굴 없는 괴물 에두아르도 전후 참전국이 겪은 사회문제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현대적 성형 수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니 근래 성형 대국으로 부상한 우리네와 전혀 무관한 전쟁도 아닌 셈이다.
    ― pp. 244~245,「2013년산 전후문학」  접기
  • P. 302인간사의 모든 가치는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을 파보면 징그러운 벌레가 튀어나오는 돌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화들짝 놀라 내던졌지만 차마 바깥에 내다 버리지 못하고 방구석에 방치한 돌.
    ― p. 302,「20세기의 악몽」
  • P. 308팔베개라는 사소한 동작에는 사랑의 서사가 농축되어 있다. 팔베개는 제안하는 남자나 머리를 얹는 여자나 너 나 할 것 없이 자발적이며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이 자세는 피차에게 부담스럽다. 처음에는 솜털처럼 가볍던 것이 낙수 방울이 돌을 뚫듯 서서히 팔을 저리게 하며 인간 머리의 하중을 절감하게 만든다.
    ― p. 308, 「팔베개의 서사」  접기
  • P. 328그녀는 한 대담에서 고대 그리스는젊은이들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육체의 건강뿐 아니라 뇌근육의 발달에도 진력했음을 환기시키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서가 18세기처럼 유한계급이 살롱에서 즐기는 사교 활동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모두에게 보편적인 뇌근육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독서는 낯선 나라의 시민이 되는 고독한 체험이라며 헝가리 사진작가 안드레 케르테스Andre Kertesz의 사진집 『독서On reading』를 펼쳐보라고 권한다. 그의 사진집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거리, 공원, 카페, 버스, 전차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이 실려 있다. 책을 펼쳐 든 어린아이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그 책을 어깨 너머로 함께 보는 아이들, 소란스러운 카페에서 책에 몰두한 여인, 낙엽을 깔고 앉아 홀로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는 남자의 뒷모습 등 모두 지금, 여기를 떠나 어느 다른 세계에 고독히 침잠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대체로 카메라를 들이대면 어색해지기 십상이지만 『독서』의 피사체만은 예외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다. 다만 그들 손에는 책 대신에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 p. 328, 「팔베개의 서사」  접기
  • P. 382-383세계의 후미진 구석까지 적용되는 이 시대의 유일한 법칙, 그것은 시장의 법칙이다. 한 인간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그가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구매품을 보면 된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아니라 쇼핑몰의 수레를 들여다보면 그의 인간 됨됨이까지 훤히 알 수 있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여기에 매월 들이닥치는 신용카드 명세서까지 더한다면 무엇을, 어디에서 소비하는지, 즉 그 인간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19세기에는 아케이드를 어슬렁거리면 파리의 풍경이 보인다고 했다면 2014년 세계의 풍경은 대형 쇼핑몰에 축약되었다. 세속시대의 거대한 사원으로 변한 쇼핑몰은 주말이면 꼬박꼬박 참배객이 밀려들어 물신에게 기도한다. 성당에 입당하려면 성수에 손을 적셔 성호를 그어야 하듯 참배객은 주차 자리를 고르고 손수레나 바구니를 찾는 의식을 갖춰야 하고, 나올 때에는 내밀한 욕망을 계산대에 빠짐없이 고백해야 한다. 그래서 작가는 “삶,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대상을 슈퍼마켓으로 골랐다”라고 말한다.
    ― pp. 382~383, 「지하철과 시장」  접기

    『소설, 때때로 맑음』은 최근 프랑스 소설계의 판도와 경향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런 ‘목적의 독서’는 이 책과 어울리지 않는다. (……) 그냥 우리에게 필요한 문학과 예술, 삶의 아이러니와 세상의 파노라마, 지성의 쓸쓸함과 영혼의 외로움이 어우러진 향기를 맛보면 된다. 그것은 훼손되기 이전의 인문의 정원을 산책하는 독법이다. 

    - 이남호 (문학평론가, 고려대 국어교육학과 교수)
     
     
    이재룡 (지은이)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 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 불어불문학과 명예 교수이다. 지은 책으로 『꿀벌의 언어』, 『소설, 때때로 맑음』 전 3권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장 에슈노즈의 『달리기』, 『일 년』, 『금발의 여인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조엘 에글로프의 『장의사 강그리옹』, 『해를 본 사람들』, 『도살장 사람들』,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 마리 르도네의 『장엄호텔』 등이 있다.
이재룡(지은이)의 말
프랑스 소설을 읽는 것이 나의 일이다. 남의 나라 말이라 여전히 새로운 표현이나 모르는 단어가 많다. 만사가 그렇듯 그런 일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나의 일상이다.
대체로 흐린 날이 이어지다가 때때로 햇살 한 줄기가 책갈피에 비치면 밑줄도 치고 메모도 한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펼치면 그 흔적이 내 것 같지 않고 무슨 이유로 밑줄을 쳤는지 속셈도 모르겠다. 어차피 까맣게 잊을 것에 왜 그리 시간을 보냈는지 허망한 생각이 들던 참에 『현대문학』이 귀한 지면을 내주었다. 밑줄과 메모를 정리해서 기록하라는 배려가 고맙지만 나의 사사로운 생각이 남에게 어떤 쓸모에 닿을지 걱정이고 가난한 집 제사처럼 매달 돌아오는 마감이 부담스럽다.
연재분 중 일부를 책으로 펴낸다. 가급적 남보다 먼저 읽은 신간 소설을 소개하고 거기에 오래된 책에 대한 기억도 겹쳐놓아 새것과 옛것을 비교해보려고 했다. 창가에 둔 화분이 자꾸 뿌리는 썩고 새잎은 말라버린다. 이 글이 부디 저 화분을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