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종교는 어떤 관계일까? / 장성민 교수
사람들은 철학이란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다고 말한다. 그만큼 철학은 우리에게 너무 이해하기 힘든 학문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때론 이런 철학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개똥철학’이라고 말한다. 그깟 철학이 뭐라고 무시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어쨌든 우리가 철학을 무시하든 인정하든 철학이라는 학문은 우리 삶의 곁에 바짝 붙어있다. 어쩌면 종교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이 철학일지도 모른다.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철학이라는 학문을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냥 세상을 바라보는 합리적인 세계관이라 정의하면 어떨까 싶다.
1. 과연 철학은 무엇일까? 철학은 과학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철학적인 사고는 과학적인 지식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과학의 순수성과 객관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하기에 어떤 면에선 철학이 과학을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과학과 철학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을 만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결단코 같은 것은 아니다. 철학은 과학이 제공하는 지식을 바탕으로 신의 존재, 인생의 의미, 죽음의 의미 그리고 사후세계 등에 관하여 사색하는 학문이다. 그러니까 철학은 과학이 제공하는 객관적인 지식을 가지고 인생과 세상의 의미에 관하여 주관적으로 추론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과학을 형이하학이라고 부르고, 철학은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형이하학은 현실 세계를 직시하는 것이고, 형이상학은 정신세계를 논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철학의 잣대로 종교를 바라본다는 것은 과학의 잣대로 종교를 바라본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종교는 영적이고 신비한 측면을 말한다. 그러하기에 철학적인 입장에서 종교를 바라본다면, 종교는 너무 황당하고 비이성적인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인 입장에서 철학을 바라본다면, 철학은 너무 공허할 뿐만 아니라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철학이 과학적인 사실들을 기초로 하여 신과 인생의 의미 등은 논한다지만, 그 속성은 철학자 개인의 상상력을 기초로 하여 세워지는 매우 주관적인 추측이기 때문이다. 저명한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철학과 종교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종교는 철학과 구별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종교는 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 의식을 중심으로 고유한 인간 공동체와 맺어져 있으며, 신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종교는 항상 세속적이거나 거룩하지 못한 것에서 성별 된 거룩한 것, 곧 이 세상 안에 나타난 거룩한 것이라는 형태를 가지는 초월자와 인간 사이의 실제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이와는 반대로 철학은 그 자체로서는 어떤 의식도, 사제에 의해 인도되는 공동체도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다른 세계내 존재들로부터 성별 된, 세상 속에 나타난 거룩한 것도 모른다. 종교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한정시키는 것은, 철학에 있어서는 도처에서 그리고 모든 순간에 현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철학은 각 개인의 자유에서 생겨나는 것이기에 자유로운 전통 안에서 그때그때 변화되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에 속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인 것이다....... 종교에서 본다면 철학자의 하나님은 빈약하고 공허하다. 종교는 철학의 입장을 경멸적으로 이신론이라고 부른다....... 종교는 철학자의 하나님을 단순한 추상이라고 거부하며, 철학은 종교적인 신의 형상들을 설사 그들이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 하여도 유혹적 우상들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아 신뢰하지 않는다.[i] 그렇다. 철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종교가 과학적으로 전혀 증명할 수 없는 내용들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우리는 영혼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사후세계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종교는 과학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거짓으로 판명이 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종교는 증명하거나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과학이나 철학의 잣대로 종교를 이해하거나 증명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종교를 과학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보다는 신비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수 있다. 2. 근대와 현대 철학자들은 종교를 어떻게 바라볼까? 앞서 밝혔듯이 무신론 철학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종교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종교가 나약한 사람들의 심성을 이용해서 미혹한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종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내세에만 몰두하게 해서 현실세계에는 등한시 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인 마르크스(1818-83)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종교를 가리켜 환상적 행복이라고 말한다. 이는 종교의 현실 도피적 현상을 비판한 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적 억압과 착취를 당할 때에 천국이나 극락과 같은 종교적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간의 환상을 통해서 만들어진 거짓된 신비라고 주장한다.[ii] 포이에르바하(1804-1872)는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준 무신론 철학자이다. 그에게 있어 신이란 인간이 자신의 소원이나 꿈을 세상 속에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란 존재는 마치 그것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상상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의 정체는 상상을 통해서라도 대리만족을 원하는 인간의 꿈이요 소원에 불과한 것이다.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에서, 신은 인간이고 인간은 신이라는 사실을 주장한다.[iii] 놀랍게도 이러한 마르크스와 포이에르바하의 무신론적 철학사상은 석가의 무신론적 사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석가는 인간이 신처럼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마음에 의한 해탈뿐만 아니라, 지혜에 의한 해탈도 구현한다. 윤회를 끝내 버릴 수가 있는 그들은 참으로 나고 늙음을 받지 않는다. (Stn.727) 이 무명이란 크나큰 어리석음인데, 이로 말미암아 오래도록 윤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지에 이른 뭇 삶들은 다시는 존재에 도달하지 않는다. (Stn.730) 헤겔(1780-1831)은 유물론자 마르크스와 포이에르바하에 영향을 미친 현대계몽주의가 낳은 최고의 철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종교철학>에서 기독교를 가장 완전한 종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기독교는 이성적인 종교이다. 헤겔은 이성, 곧 인간의 정신을 신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종교의 주체는 인간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헤겔은 초월적인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정신)을 신의 모습 그 자체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보았다. 헤겔이 종교를 철학으로 대체한 것이라 볼 수 있다.[iv]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려는 인간의 정신이 신적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정신은 바로 합리적인 사고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헤겔의 철학은 석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석가는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가르쳤다. 석가는 말한다, 갈애에 사로잡힌 존재들 가운데, 세상에서 떨고 있는 뭇 삶을 나는 본다. 다양한 존재에 대한 갈애를 떠나지 못한 채, 못난 사람들은 죽음에 직면하여 비탄해 한다. 내 것이라고 동요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라. 잦아드는 물웅덩이의 물고기들과 같다. 이 모습을 보고, 나의 것을 떨치고 존재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유행하라. (Stn.776-77) 그러나 열반은 허망한 것이 아니다. 고귀한 님들은 이것을 진리로 아는 님들이다. 그들은 진리를 이해하기 때문에, 탐욕없이 완전한 열반에 든다. (Stn.758) 결국 인간의 합리성은 삶의 문제와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최상의 도구이다. 그리고 이러한 합리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꿰뚫어보는 인간의 정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조차도 초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기에 인간의 정신이 바로 종교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계몽주의 사상가의 대표로서 헤겔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독일의 철학자다. 칸트는 그의 저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라는 책을 통해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신의 섭리’나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인간의 윤리적 필요나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신의 존재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칸트는 하나님이나 사후세계 등과 같은 실체들은 우리의 이성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신이나 사후세계를 부정할 때에 생기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였다. 그는 사후세계를 부정할 때에 인간의 선하고 윤리적 삶이 너무나 헛되어 지는 것과 그로 인해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염려하였다. 그로 인해 칸트는 개인의 선한 삶이 보상을 받기 위해 사후세계는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이러한 사후세계를 가능케 하는 신의 존재가 요청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7-18세기 계몽주의[v]시대의 근대철학자들은 천동설[vi]을 포기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하늘에 있다고 믿었던 초월적인 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이는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등의 기적들을 단지 신화로 취급하거나 허구, 즉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낸시 피어시는 그녀의 저서 <완전한 진리>에서 이러한 계몽주의 시대의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접어들 무렵 (대략 1300년대에 시작되는데), 이성을 계시에서 완전히 해방시키자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점점 높아져서 (1700년대에 시작되는) 계몽주의의 시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계몽주의의 신조는 자율성이었다. 외적인 권위는 모조리 뒤엎고, 오직 이성으로만 진리를 발견하라! 계몽주의는 과학혁명의 눈부신 성공에 매료되어 과학을 참 지식의 유일한 근원으로 왕좌에 올렸다....... 또한 자연이 유일한 실재이며 과학적 이성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외쳤다.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환상이라고 선언했다. 이성이 철학적으로 중립적인 것인 양 선전되었지만 실제로는 과학적 유물론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vii] 근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쉴라이어마허(1768-1834)에 의하면, 종교는 헤겔이 주장하는 이성이거나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쉴라이어마허는 종교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즉 종교는 인간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절대의존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간의 감정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쉴라에르마허의 주장에 대한 헤겔의 반응이다. 쉴라이어마허가 “종교는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주장하자, 헤겔은 그렇다면 ‘개가 가장 종교적인 동물’이라고 응수하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대인들은 인간의 감정, 의식, 이성, 양심 등을 종교의 내용으로 삼았던 것이다. 과학 혁명시대인 17세기를 지나 18세기 계몽주의시대에 이르러 과학적 합리성이 열매를 맺었다. 이제 맹목적인 종교의 권위에서 벗어나 이성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철학이나 문화가 꽃을 피게 되었다. 이는 17-18세기 사람들이 초월적인 신에 대한 관심을 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그동안 인류 역사를 좌지우지한다고 믿었던 신의 자리를 대체하기 위하여 인간이나 자연을 종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리차드 미들턴은 17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현대인들의 세계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근대적 세계관은 이 최종적 질문에 대해서 자기를 정당화하는 답변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왔다. 자율적 주체는 과학을 통해 세계를 파악하고, 기술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며 변형시키는 존재다. 자율적 주체는 전통이나 무지, 미신 등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문제점을 스스로 고치고 치료한다. 근대에서 우리의 구원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진보는 세계사와 구속사 속에서 불가항력적이고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이 진보의 행진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구원한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 이것이 모더니티의 역사적 자신감의 요체이다.[viii] 스피노자(1632-77)는 인간이나 자연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은 이러한 범신론적 종교관의 대부이다. 그는 유대인 철학자로서 범신론을 주장한 계몽주의 초기의 철학자이다. 그렇다면 범신론은 무엇인가?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요, 신도 세상도 하나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오로지 자연 안에서만 존재하며, 생성하는 모든 것도 오직 자연의 무한한 가능성 안에서 생성된다고 것이다. 즉 자연이 신이라는 주장이다.[ix] 자연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신 조차도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무신론의 하나이다. 그는 천사는 환상이며, 영혼은 생명체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다가 유대교회에서 파문을 당하였다. 결과적으로 17-18세기의 근대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초월적인 신을 부정하면서 자연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이다. 특별히 인간에 대한 관심이 가장 중심적이고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이성이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그 외에 인간의 양심, 감정, 의식 등이 신의 자리를 물리치고 종교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계몽주의, 근대철학, 근대신학이 바로 스피노자의 범신론의 기초위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근대와 현대철학의 무신론적 사상의 계보는 스피노자(1632-77), 헤겔 (1780-1832), 포이에르바하 (1804-72)그리고 마르크스 (1818-83)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3. 석가와 계몽주의 철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어쩌면 이러한 범신론의 진정한 시조는 석가라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과 따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그 신적인 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으로 현실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진리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바로 사성제이다. 이런 면에서 석가는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철학자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한 현실세계의 문제들을 인간의 정신으로 극복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가 이성적인 사고로 파악한 객관적인 현실세계는 무엇일까? 첫째로 이 세상은 신에 의해 창조되거나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 세상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세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바로 이 부분이 도덕 철학자로서의 석가를 말하는 것이다. 첫째로 고통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결단코 신이나 외부적인 힘을 의지하지 말하는 것이다. 둘째로 고통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의 원인이 바로 인간 자신의 욕망에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자신의 욕망을 제거하기 위하여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석가의 사상은 무신론적 도덕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석가의 사상은 헤겔의 이성철학과 칸트의 도덕철학의 합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영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부정하고 오로지 인간의 육체와 정신만을 강조하는 석가의 유물론적 세계관은 스피노자의 범신론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4. 기독교는 무신론적 도덕철학을 인정할 수 없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이성은 그냥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다. 아무리 인간의 합리성이 뛰어나고 그것이 진리를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외눈박이 이성이다. 그래서 신의 존재나 영의 세계를 바라볼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 타락한 이성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온통 물질 세계와 인간의 정신 세계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과학적인 사고는 외눈박이 이성의 사고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신이 없는 우연한 세상이고, 하나님의 설계가 없이 진화된 우연한 세상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도덕성과 거룩함 조차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칠 수 없다. 그리고 신도 사후세계도 없는 마당에 무슨 도덕성이며 거룩한 생활이 필요하다는 말일까?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것은 무신론, 우연한 세상, 그리고 도덕 없는 약육강식의 자유로운 세상이거나 유신론, 목적이 있는 세상, 그리고 도덕이나 율법이 있어서 심판을 의식하는 세상이 바로 그것이다. [i]철학적 신앙, 79-80. [ii]위키 백과사전, 카를 마르크스 편 참조. 김종서 교수는 마르크스의 종교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종교이해는 대체로 산만한 편이다. 다만 그의 소외개념에 주로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종교적 신앙은 실제로 인간을 사로잡는 신비한 능력들의 실체가 지닌 특성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종교라는 것은 늘 소외의 한 형식 또 그 징후로 생각된다. 즉 인간은 자신의 내적 잠재력을 그 주변세계로 투사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투사물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점차 동떨어져 마침내는 신격화(또는 신비화)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신격화는 바로 소외의 극단적인 결과인 셈이다. 따라서 신격화된 의식으로서의 종교는 소외로부터 유래하는 일종의 ‘허위의식’이다. 이런 이유에서 종교는 비록 사회병리현상을 고친다 해도 문제의 심각성을 혼동시키고 진정한 해결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딜레마를 초래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소외로서의 종교는 결국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사회학, 12-13. [iii]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111. [iv] Ibid, 110. 헤겔은 자신의 저서 “정신현상학”에서 종교란 전체성, 유한 대 무한, 존재 대 비존재를 매개시키는 정신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은 인간들이 존재하는 요소로서 자기현시(자기를 보여줌)이다. 정신(이성)이 자체 발전과정(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역사발전과정)을 거쳐서 자기 자신에 복귀하는 것이 절대정신이고, 이 절대정신이 바로 계시종교로서 기독교라는 것이다. [v] Introduction to Comparative Philosophy, 59. [vi]이는 지구가 중심이 되어 고정되어 있고, 태양이나 달 등의 행성들이 규칙적으로 지구주변을 돈다는 고대 천문학설이다. 지구 중심설이라고도 한다. [vii]완전한 진리, 197. [viii]리차드 미들턴·브라이언 왈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파주: 살림, 2007), 38. [ix] P. T. Raju, Introduction to Comparative Religion (New Delhi: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1992),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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