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창작 교실의 철학 강의 노트

종교와 고대 철학 - 철학사상과 사회과학의 만남

 

종교와 고대 철학 - 철학사상과 사회과학의 만남

 

사람이 사물을 생각하고 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색의 단계에 도달한 것은 우선 종교의 영역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계기는 인간의 죽음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 이외의 동물은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초기에 한때 식육을 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30만 년 전의 북경원인의 유골에는 식육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한편 5만 년 전의 네안델탈인의 유적에는 벌써 죽은 자를 묻은 흔적이 보인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종교의 출발이 사람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느냐의 물음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확실히 이 의문은 조상 대대로 죽음을 맞이한 인간의 머리에서는 풀기 어려운 난문이었다. 생물학적으로는 죽음이 설명되겠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것이 인간의 머리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을 만든 것이 누구이며 인간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가 궁금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생명력이 보여주는 위력을 느끼고 그것을 경외하게 되고 다음에는 그것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위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간청하여 소망을 기도하게 된다. 여기서 주술이라는 것이 생긴다. 인간의 힘에 한계가 있다 보니 누군가에게 도와주기를 바라고 싶고 주술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현대의 인간에게도 보이는 인간의 심성이다.

여기까지는 개인의 문제이지만 곧 사회가 발달하고 단순한 사람들의 군집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국가로 발전하게 되면 주술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고 사회의 문제가 된다. 단순한 개인적 소망에서 연대를 갖는 가족의 평안을 생각하고, 나아가서 동족, 씨족, 부족, 민족, 국가의 문제로 규모가 커지다보니 일이 복잡해진다. 그와 더불어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연이란, 우주란 무엇인가? 라는 보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어엿한 종교가 되고 사상이라는 모양을 갖춘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시야가 인류의 일부에만 한정되어있다. 개인을 초월한 위력이나 생명력은 부족신이나, 민족의 신으로 한정되고 있으니 아직 인간이나 우주의 오감을 초월한 세계로 넓혀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기원전 5-6세기 전후에 인류의 사상에 하나의 비약이 일어난다. 인간의 생각이 감각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형이상학적인 세계에까지 도달한다. 이렇게 되면 생각하는 자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도 단순한 부족이나 민족에 한정되지 않는다. 즉 인류 전체를 생각하는 세계적인 종교와 사상으로 확대된다.

이 시대를 철학자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라고 부른다. 유태교의 예언자, 그리스의 철학자, 페르시아의 배화교(조로아스터), 인도의 석가무니, 주나라의 공자와 노자 등이 나타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세계종교는 이 축의 시대에 그 토대가 형성되었다. 세계종교라면 몇 개가 있다. 그것은 각기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의 천고의 의문에 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또한 심각한 의문은 이 세상의 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람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의 의문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과 결부되어있다. 사람은 올바르게 살고 좋은 일을 하라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반드시 올바른 사람, 좋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올바르게 살고 좋은 일을 한 사람이 괴로움을 받고 불행한 일이 많을 수 있다. 이것으로는 과연 정의가 있는가, 신이 있는가의 소리가 당연히 나온다. 이리하여 사람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의 의문은 이 세상에 의가 있는가, 신이 있는가의 의문과 당연히 결합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세계종교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두개의 의문에 답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답(神義論)에는 다음의 유형이 있다고 한다.

행복의 신의론-------------유교와 도교
선과 악의 투쟁-----------조로아스터교
고난의 신의론---업의 교의--힌두교, 불교
예정설-------칼비니즘

이 중 행복의 신의론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의 테마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당연히 이 세상에 의가 있다고 대답한다. 즉 이 세상에 의가 있으며 행복의 내용인 복(자녀), (금전), (장수)를 구하는 것은 주저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수양해야 한다. 이것은 세계 어디에도 있는 생각이지만 그 대표적인 것이 유교와 도교이고 특히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주장되고 체계화되어 있어서 중국의 사상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고난의 신의론은 인간이 왜 괴로워해야 하는가의 테마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에 대해 두 가지 답이 있다. 하나는 인도의 업의 교의이다. 인간은 업(카르마)이라는 전세에 행한 일과 운명이 결부되고 있다. 이것에 의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가, 불행하게 사는가가 정해진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행한 일이 업이 되어 내세에 어떻게 되느냐가 정해진다. 이처럼 삶은 한없이 술래(카르마)처럼 이어진다. 이러한 신의론 밑에서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이어진다.

예정설은 근세에 나온 것이지만, 신의 섭리에 의해서 이 세상의 운명은 한 사람의 운명을 포함하여 일체가 이미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구제되는가 안 되는가도 이미 정해져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모른다. 그만큼 신의 존재는 위대하다. 따라서 인간은 구제된다는 확신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개신교의 유파인 칼비니즘의 교의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신의론을 갖는 우주론은 이 세상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언젠가 세상에 종말이 오고 최후의 심판이 행해진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고난의 신의론과 행복의 신의론의 중간에 선과 악의 투쟁을 주장하는 이원적 신의론이 있다. 즉 이 세상은 선의 신과 악의 신의 투쟁의 장소이고 곧 이 두개의 신이 자웅을 결정하는 최후의 싸움의 날이 온다는 것이다. 조로아스터, 마니교의 교의가 그러한 예이다. 종교의 교의는 이 외에도 많다. 특수종교와 군소종교를 합하면 그 수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이다.

한국에는 내세울만한 종교가 없었다. 그렇다고 종교적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교는 한국에서는 오늘날까지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멀리 전해온 전래의 샤마니즘이 흐르고 있다. 외국에서 불교나 기독교가 전해져와도 그것들은 샤마니즘적으로 변형되었다. 유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교의 가족적 전례는 샤마니즘과 결부되어 한국 사람의 종교적 욕구를 대신해 주었다. 샤만은 신탁을 전하고 선악을 다스리는 매개자이었다.

공식적 신의론은 유교이었지만 그것도 도입된 것이었기에 표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이 분리되고 있었고 표면은 유교이지만 내면은 샤마니즘의 잔재를 지니고 이었다. 따라서 종교가 사상으로 승화되지 않고 있어서 새로운 종교가 발붙일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외래종교가 정치의 바람을 타고 무자비하게 침투했지만 한국의 신앙심이 용이하게 넘어간 것은 현재에도 통용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가족구조의 뿌리가 깊어서 가족생활과 결부되고 있는 유교의 규범체계는 한국의 종교적 믿음의 심층의 핵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에서 처음 세계 최초의 철학이 탄생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물론 사람의 생각은 처음에 종교를 중심으로 하여 발달해 왔다. 종교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고대인은 자연현상의 설명에서 우주나 국가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신화나 전설에 의지하고 있었고 종교인이 자연현상을 해석하고 사람을 이끄는 지도력을 가지고 있어서 종교의 믿음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사회의 확대와 더불어 종교의 해석이 사람들의 삶을 충분히 해석하지 못하자 종교가 힘을 잃게 되고 거기서 만물의 근본 원리를 찾으려는 철학이 태어난 것이다. 종교가 정신의 세계에서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던 곳에서 철학의 탄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철학이 그리스에서 종교와 날카롭게 대결을 벌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종교와 구별되는 독특한 사상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폴리스생활을 하는 그리스인이 일방적인 믿음이 아니라 각성된 이성에 의해서 체계화된 해석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이 왜 필요해졌는가?

그것은 그리스가 처했던 환경과 관계가 있다. 이오니아 지방의 미레토스는 그리스의 식민지이었고 발전된 상업도시이었으며 각지에서 여러 사람이 모이고 상품이 자유롭게 교환되고 개방된 분위기에서 문화의 접촉이 활발한 곳이었다. 그 곳은 아시아의 변경에 있어서 아시아의 문명을 섭취할 수 있었는데도 서 아시아의 전제국가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를 받지 않고서 자유롭게 생활할 수가 있었다. 여기서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만나고 접촉하게 된다. 그러면 서로 이야기하는 전설이나 신화가 다르고 비교되면서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이 나올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서 아시아의 문명의 성과를 즐기면서 "폴리스"라는 도시국가의 체계를 갖는 최초의 시민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기에 폴리스의 합리적인 운영을 위해서도 종교와는 다른 철학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연유에서 그리스 중에서도 최초에 철학이 탄생한 것은 오늘의 터키 서부의 에게해에 면하는 이오니아 지방의 식민도시 미레토스이었다. 여기에서 기원전 6세기에 탄생한 것이 "철학"이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영어에서 'Phylosophy'라고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어의 'Phylosophia'에서 온 것이고 "지식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즉 이성의 입장에 확고히 서서 사실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미레토스에 등장한 탈레스(Thales. BC 624-546)는 최초의 자연철학자이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했다. 그는 세상의 만물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복잡한 세계는 제멋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원리(아르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물이라고 본 것이다. 세상의 도처에 물은 존재하고 있다.

물이 없으면 생물이 살지 못한다. 그래서 만물의 원천이 물이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이것은 세계가 자연이라고 파악한 것을 말한다. 현상의 배후에 초자연적인 신을 상정하지 않고서 신비적으로 생각되었던 자연을 합리적인 질서로 보는데 탈레스의 참신함이 있었다. 따라서 종교와의 사이에 약간의 긴장관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한 철학자의 처형 사실에서 들어난다. 그리스에서는 제우스를 주신으로 하는 "다신교"의 종교가 있었고 아테나이의 아테네신처럼 각각의 도시는 수호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학문으로까지 비약시킨 인물은 소크라테스이었다. 그는 아테나이의 전통적인 종교를 모욕하여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재판에 붙여지고 독배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보면 그리스에서도 철학자는 반전통적인 인물로 이단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든 철학자가 종교에 대립적이지 않았고 공존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고 피타고라스처럼 스스로 종교교단의 교주가 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종교와 철학은 실생활에서 경쟁하는 면을 피할 수는 없었고 철학자의 입장은 항상 벼랑에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철학을 허용한 것은 그리스가 새로운 사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리스철학의 최초의 테마는 종교와 비슷한 것이었으며 "우주란 것은, 세계란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2의 철학자는 탈레스의 제자 아낙크시만드로스(Anaximandros, BC610-540)이다. 그는 물이 아르케라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물이라고 단정하면 불이나 흙이면 안 되느냐의 의문이 나올 수 있다. 물만이 세계의 본질이라고 한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래서 "무한정한 것"(Apeiron)이야말로 기본적인 원리라고 생각했다. 무한정한 것이 보다 포괄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3의 철학자인 아나크시메네스(Anaximenes, BC 585-528)는 앞서는 선배를 비판한다.

그는 무한정한 것은 확인할 길이 없다고 보고, 또 물 자체에는 변화의 원인이 없으니 물을 포함하는 대기의 변화가 물의 변화의 근원이라고 하여 "세계의 근원은 공기"라고 답하고 있다. 남아있는 그의 문장에는 "우리들의 혼은 공기이고 그것들이 우리를 통괄하고 있는 것처럼 숨과 혼이 세계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고 쓰고 있다.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만한 이 세 사람의 미레토스의 철학자의 특징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세계의 공통된 성질을 추출하여 신화가 아니라 추상적인 실체로서 세계를 설명하려는 철학자이고, 모두 자연과학적으로 세계를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을 이어서 나온 것이 피타고라스(Pitagoras, BC 570-493)이다. 이오니아 해안에 가까운 사모아섬의 사람이고 또한 피타고라스는 혼의 정화를 원하는 종교결사의 교조이기도 하였다. 그는 미레토스의 자연과학자와는 달리 소재가 아니라 추상적인 논리(로고스)를 문제로 삼았다. 그리고 또한 수학자이기도 했기에 "모든 것은 수"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철학을 구체적인 감각을 넘어선 수라는 추상의 공통 영역으로 확대시키는 일대 발전을 보인 것이었다. 그는 미레토스의 사람처럼 세계가 무엇으로 되어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세계를 질서지우고 있는가를 다루었다. 철학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이었다.

이런 에게해의 동쪽의 이오니아의 철학에 대하여 서쪽의 이태리반도, 오늘날의 사레르노의 남 엘레아에서도 철학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엘레아학파이다. 그 최초의 사람이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BC 580-480)이다. 그는 이오니아 출신이지만 방랑 끝에 엘레아에 와서 거기서 살았다. 그의 철학은 살아 있는 인간과 같은 제우스를 위시한 올림포스의 신들을 조소하여 추상적인 유일 불변의 신적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크세노파네스의 제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 540-470)는 스승의 철학을 세련시켜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논리를 구사하였다.

따라서 존재란 무엇인가를 문제로 삼은 최초의 철학자이었다. 그는 왜 이것을 문제로 삼았는가? 말하자면 종래의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사고의 혼란과 논리의 모순을 보았기 때문이다. 감각은 사람에 따라 다르므로 감각에 의지하는 사고의 방법을 억설이라고 부정했다. 그는 감각에 의지하지 않는 길, 곧 누가 생각해도 틀림이 없는 방법은 없는가를 생각하고 그것이 논리적인 사고라고 했다. 이성으로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길의 정당성을 처음으로 시사하였다.

그의 제자인 제논(Zenon, BC 490-430)은 엘레아학파의 수호자이고 스승의 논리를 논증하기 위해서 논리를 치밀하게 추구하여 세상에 "제논의 궤변"이라고 알려진,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를 수 없다"든지, "나는 화살은 정지하고 있다"는 등의 논리의 모순을 지적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유한의 점을 유한의 시간 속에서는 통과하지 못한다, 그래서 운동의 존재는 불가능하다고 논증했다. 그는 수의 개념을 추구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무한으로 분할할 수 있음을 알고 거기서 논리의 패러독스를 제시해 보였다. 이것은 추상개념을 엄밀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사용한 결과이었다. 그는 주관적 변증법의 시조로 알려질 정도로 논리주의의 선구자이었다.

이들 철학자에 이어서 다음에 유명한 철학자가 나타난다. 그중에서 특히 잘 알려진 사람이 헤라클레이투스(Heracleitus, BC 544-848)이다. 이오니아 지방의 미레토스의 북방에 있는 에페소스의 왕가 출신이고 미레토스의 자연철학의 흐름과는 달리 세계의 근원이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루었다. 그는 세계를 움직이는 궁극의 실체를 ""이라고 보았다. 불은 무엇이 타고 있는 상태이고 타기 위해서는 산소가 필요하다. 사물은 타면 재가 되고 연기가 된다. 타는 불은 항상 움직이고 하나의 물질처럼 보인다.

그의 유명한 말에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라는 것이 있다. 강의 물은 항상 흐르므로 같은 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같은 사람도 어제와 오늘의 사람은 같지가 않다. 그리고 만물은 모두 대립물로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저녁이 있음으로서 낮이 있는 것이고 모든 대립은 분리할 수가 없는 것이고 같은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대립, 긴장, 투쟁은 그것 자체가 진정한 조화라고 생각했다. 그는 객관적 변증법의 시조로서 일컬어지고 있고 "만물은 유전한다"는 말로 유명하다. 그는 기인이라고 불리고 仙者처럼 도인의 생활을 하고 유럽의 최초의 忍者라고 알려져 있다.

시치리아의 아크라가스의 사람, 엔페도클레스(Enpedocles, BC 493-433)는 그 때까지의 자연철학을 종합하여 세계의 근원을 불, , 공기, 흙의 네 가지라고 들었다. 이 네 가지가 결합하거나 분리하면서 사물은 생성 소멸한다. 4원리 자체는 생성 소멸하지 않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사랑과 미움에 의하여 우주순환의 과정을 영원히 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여 죽음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에트나의 분화구에서 몸을 던졌다. 그러나 화산은 그의 구두를 뱉어내고 그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자연철학의 흐름은 에게의 북안 트라키아의 압드라에서 나타난다. 그것이 레우킵보스와 그의 제자 데모크리투스(Democritus, BC 470-360)이다. 레우킵보스는 데모크리투스에 의해 전해지고 있는데 그치고 있으나 그들의 주장은 "원자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세계를 환원하면 결국 그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원자(아톰)에 다다르고 이 원자의 결합과 분리에 의해서 만물이 설명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세계의 구성원리를 아톰이라고 하고 아톰이 존재하고 운동하기 위한 장소, 즉 케논의 실재를 주장하고 그것이 운동원리라고 했다. 그의 생각은 "없는 것은 있는 것 못지않게 존재한다"에서 출발하고 있다. 당구를 하려면 공만 있으면 안 되고 당구대도 있어야 하듯이 원자가 운동하려면 그와 마찬가지로 케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후에 마르크스가 박사논문에서 다룬 철학자이다.

이제까지의 군주정치나 귀족정치가 붕괴되고 강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의 승리에 시민군이 공헌한 바도 있고 해서 아테나이를 위시한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민주정치가 성립했다. 민주정치에서는 법률이나 제도를 시민들의 토의에 의해서 제정하거나 변경해야 한다. 여기서는 토의를 원활히 진행시키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변론술을 몸에 지닌 사람들이 필요하다. 따라서 변론술이나 기초적 소양을 교습하는 사람을 구했다.

이들이 소피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었는데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믿게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고르기아스, 웅변술의 선생 히피아스 등이 있다. 소피스트는 知者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다. 소피스트라는 말은 오늘날 "궤변을 다루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그들에 관해 비판적인 기록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생각을 회의나 집회의 장소에서 훈련되고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시민의 수가 많아지면 그만큼 민주정치는 성숙한다. 풍족한 시민이나 귀족의 자제에 지식을 전수하고 보수를 얻는 우수한 직업적 교사가 많이 나타났다. 이들 소피스트들은 교양을 널리 전수하는 교사이었다. 따라서 고대그리스에서는 소피스트가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들의 많은 사람들은 여러 나라를 순회하는 국제인이었기에 지방에 따라서 가치관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415)처럼 무엇을 선이라고 하며 무엇을 악이라고 하는가도 그 사람 나름이라고 보는 상대주의적 견해를 취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은 어떠한 제도를 취하느냐는 각 사람의 나름이라는 시민의 자기주장을 유도한다. 이리하여 자연의 원리에서 주체로서의 인간에게 철학적 물음의 방향이 전환한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도전한 것이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399)이었다.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나 회의론은 "가치나 인식은 모두 그 사람 나름이고 절대적인 규범은 없다"는 생각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가치의 난립은 인간에게 무엇이 중요한가를 상실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어딘가에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 있다고 하여 그것을 구하려는 것이 소크라테스이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인간이 선하게 살 수 있느냐 이었다. 그 문제를 말로 철저히 음미하여 타자의 양해를 얻을 때까지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인간의 모랄을 원리적으로 사고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인 중에 소크라테스 이상의 知者는 없다"는 델보이 신전의 계시가 있었다는 것을 친구로부터 들었다. 그는 자기를 그다지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리스인 중의 현자를 방문하고 자기보다 나은 현자가 있는가를 확인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용감한 장군은 용기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도 못하고, 공정한 정치가는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모르고, 현명한 시인도 "미란 무엇인가?"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들은 "무엇이 용감한 행동인가", 혹은 "무엇이 옳은 행동인가" 그리고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의 예는 들었지만 "용기나 정의나 미란 무엇인가"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현자 중에는 저명한 소피스트들이 많았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에 지지 않고 말이나 논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알았다. 다만 그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말 자체가 진실을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사실 자체 속에서 본질을 추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은 무엇이라도 말할 수가 있고 이기면 된다는 말의 본성을 소피스트가 발견한 데서 야기한 말에 대한 불신을 회복하기 위해 가치의 혼란과 싸웠다.

"용기란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는 점에서는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는 知者라고 믿고 있는 현자들에 비해 그는 "無知 "라는 점에서 앞서있던 것이다. 델보이 신전의 입구에는 "너 자신을 알아라"는 말이 조각되어 있다無知인 자기를 알았을 적에 안이한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고 참다운 진리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사람은 "단순히 사는 것이 아니라 보다 잘 살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가치관이 전부라고 알고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하는 소피스트는 자기만족밖에 모르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른다는 것은 타인과 이야기를 해보면 확실해진다. 자기의 무지를 깨달았을 적에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구, 즉 참다운 지에의 사랑이 일깨워진다. 그것을 젊은이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오로지 그들과의 대화에 분주하였다.

그는 그것을 상대방의 마음에 원래 있었던 "로의 각성"을 돕기 위한 "산파술"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그는 人知를 초월한 데몬(내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충고했다. 덕은 지라고 주장하여 무엇이 옳은가를 모르면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고 했으며 이 덕과 지를 결합함으로서 그는 지를 재건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기초 위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대 철학자를 탄생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당시의 권위 있는 지자의 무지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테나이의 유력자들은 그의 존재에 불안감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교를 유포하고 청년을 어지럽히는 자로서 재판을 받고 국외추방이나 사형을 선고받는다. 친구들은 국외추방을 권유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을 논증하는 사람이 그러한 논증을 하고서 죽음을 두려워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독배를 들이마신 것이다. 왜 그는 죽음을 선택한 것인가? 아테나이에 살았던 그가 망명하여 폴리스 밖에서 사느니보다 폴리스 속에서 사는 것이 소망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를 사랑했던 소크라테스가 지에의 사랑과 모순될 수는 없었다. 도대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영혼의 불멸을 논증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자기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을 자기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알고 있는 것 그것 자체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지에의 사랑과 모순되는 것이다. 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독배를 마신 것이다.

플라톤(Platon, BC 428-348)은 아테나이의 유복한 집안 출신이고 처음 정치를 하려 했으나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보고 충격을 받고서 정치를 단념하고서 철학에 매진한다. 그의 철학설은 한마디로 이데아설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엇이 용기, 정의, 선인가"가 아니라 "용기, 정의, 선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으나 그것이 무엇인가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데아라는 답을 준 것은 플라톤이었다. 가령 어떤 병사라도 용기를 이상으로 하며 어떠한 재판관도 정의를 지향할 것이다. 각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행하느냐는 각양각색이고 각자 조금은 비겁하거나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용기라는 것, 정의라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에는 틀림없다. 이 누구도 이상으로 하는 용기라는 것, 정의라고 하는 것들을 플라톤은 용기의 이데아, 정의의 이데아라고 부른다. 용기의 이데아, 정의의 이데아가 무엇이냐를 그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어떠한 성질을 가져야 하느냐는 말한다. 가령 정의의 이데아는 어떠한 시대나 지방이나 개인에게서나 같이 이상으로 하는 보편적이고 동일한 것이다. 개개의 정의의 행동은 끝나버리면 그것으로 그치지만 목표로 하는 이데아는 항상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다.

개개의 행위는 조금씩 불순하고 불안전하더라도 정의의 이데아는 완전한 진리이다. 용감한 행위를 목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완전한 용기가 실현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용기의 이데아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개개의 용감한 행위와는 다른 곳에 용기의 이데아가 있다. 무언가 훌륭한 것이 있더라도 곧 사라져버리는 불안전한 현실세계와는 다르게 영원하고 완전한 진리의 세계, 본질의 세계인 이데아계가 있다는 생각을 이데아설이라고 한다. 모든 것에 영원의 본질이 있고 진정한 진리는 하나뿐이라는 생각은 현대에서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불안전하고 순간의 현실과는 다른 완전하고 영원한 진리의 세계, 이데아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플라톤은 아테나이의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동굴의 비유"이다. 사람은 자유롭게 밖을 돌아다니고 여러 가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참다운 모습은 어두운 동굴 속에 붙들린 수인과 같은 것이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사람들은 동굴의 구석의 벽을 향하여 앉아있고 목을 돌릴 수도 없다. 그의 등 뒤에서는 악마가 동물들의 모형을 돌리고 있다. 악마의 뒤에는 불이 타고 있고 그 빛에 의해서 구석의 벽에 동물의 그림자가 비춰진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진짜의 동물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진정한 , 이데아의 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 어느 순간 이데아를 아는 철학자가 사람들에게 다가와서 사술을 풀어준다. 뒤에 있는 장치를 보이려고 해도 사람들은 빛이 부시어 눈을 돌려버린다. 철인은 더욱 사람들을 동굴 밖의 태양 밑으로 데리고 간다. 거기는 더욱 눈이 부시어 사람은 처음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눈을 돌릴 수는 없다. 눈부심의 고통을 견딘 사람만이 곧 진실인 이데아를 직시하는 힘을 갖는다.

이 비유는 다음의 사실을 의미한다. 플라톤에게서는 진실이란 것은 이데아계뿐이고 현실세계는 그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림자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이데아로 인도하는 것은 철인이다. 진실의 세계인 이데아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 즉 철인이야말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국가를 통치하는 자격이 있다. 이런 "철인 지배"의 이상을 플라톤은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국가론"에서 자기가 이상으로 하는 정치론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의 초점은 국가의 존재를 인간의 혼의 존재와 비유하여 생각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혼은 욕망의 부분과 이성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자기의 감정에 따라서 욕망을 추구하지만 후자는 그것을 억제하고 절제의 덕을 발휘한다. 이성의 부분이 욕망을 이기지 못하면 인간이 타락하는 것처럼 국가도 지도층이 대중을 잘 통제하고 그들이 바라는 요구를 통제하지 못하면 우중정치가 된다. 국가는 우수한 자질의 아이를 모아서 통치자가 되기 위한 전문교육을 한다. 그들을 부모로부터 격리시키고 사회가 기르고 일정한 나이가 되면 가정을 갖지 않고 공동생활을 하고 처도 공유한다. 필요 이상의 돈도 갖지 않고 오로지 국가의 수호자로서의 명예가 그들의 보수가 된다는 식으로 이상향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완전하고 영원한 진리의 세계가 있다는 플라톤의 생각은 매력적이지만 자연의 생명력을 무시하는 결함이 있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는 동식물이나 인간 등 자연속의 개개의 물체(개체)가 그 자체로서 가지고 있는 운동이나 생성의 힘에 주목하여 이데아설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연의 개체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벚꽃의 종자나 사람으로 태어난 유아로부터는 그것이 성장한 후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종자도 유아도 양분이나 영양을 열심히 섭취하여 벚꽃다운 모습, 사람다운 모습으로 변해간다.

이러한 성장해가려는 힘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작용인"이라고 부른다. 성장의 과정에서 목표로 되는 벚꽃이나 사람다운 자태를 "목적인"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이루는 본질이 "형상인"이다. 이것은 사물을 만드는 설계도와 같은 것이다. 벚꽃의 줄기나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섬유질이나 석회질처럼 그것들이 완성되기 위해 불가결한 물질적 자료를 "질료인"이라고 부른다.

종자나 유아는 벚꽃이나 사람으로서의 본질 즉 "형상"을 포함하지만 그것이 아직 실현되지 않는 "가능적 상태"에 있다. 그것이 실현된 "현실적 상태"에서는 그것들이 벚꽃이나 사람다운 "형상", 곧 섬유질이나 살이나 뼈 등의 "질료"를 갖는다. 형상과 질료로부터 형성된 개체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실체"인 것이다. 가능적 상태에 있는 개체가 성장의 목표가 되고 현실상태에 있는 개체가 갖는 형상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에 해당된다. 플라톤처럼 그것을 현실세계와 구별되는 이데아계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데아계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이지만 변화나 혼란에 찬 현실세계와는 구별된 별도의 질서를 동경한다는 점에서는 플라톤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행복관에서도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행복이란 신의 세계에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그에게서 신은 천체의 운행의 원인이다. 신은 자기 이외의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사색에 탐닉하는 완전한 이성적 존재이다.

천체는 신을 동경하여 움직인다. 따라서 신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남을 움직이는 것, "부동의 동자"이다. 이 신의 생활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상이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해야하지만 행복추구의 방법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욕망의 만족이나 쾌락을 추구하는 "향락적 생활", 명예와 정의를 추구하는 "정치적 생활", 그리고 다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자족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관조적 생활"이다. 이 중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신의 그것에 닮은 관조적 생활이다.

정치에 강한 관심을 갖는 플라톤은 정치적 생활을 지향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아테나이의 생활이 이상해질 무렵에 살아온 플라톤은 정치개혁에 열의를 가질 수도 있었다. 곧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제국이 일어나자 폴리스의 자치도 사라진다. 구질서가 소멸되는 시절에 태어나서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깨어난 눈으로서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가지고서 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었다. 이 태도는 헬레니즘의 철학자에게로 승계된다. 제국 그 자체가 소멸된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그리스인의 손으로부터 이슬람의 세계로 전해진다. 이것이 유럽 세계로 역수출된 것은 12세기가 되어서이며 곧 중세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친다.

[네이버 지식백과] 종교와 고대 철학 (철학사상과 사회과학의 만남, 2005. 11. 25., 고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