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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종교(특히 기독교 신앙)와 철학·과학이 통합할 수 없는 이유

종교(특히 기독교 신앙)와 철학·과학이 통합할 수 없는 이유

인간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어서 신전을 만들어 그 안에서 기거하게 했다. 비슷한 관점에서 흐르는 시간의 존재를 잡을 수 없어서 시계를 만들어 시간을 계량함으로써 시간을 잡아두었다. 때로는 인간이 오를 수 없었던 히말라야의 고봉을 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숭배하기도 했다. 그곳들을 신과 시간이 사는 곳으로 한정하였다. 시간은 그대로 장난감 속에 있지만, 신은 신전을 벗어나 인간세계로 나와 인간을 호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영악한 직업종교인 또는 경제적 종교인인 사제들이 뒤에서 태엽을 감아 작동하는 장난감병정의 역할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종교와 과학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내로남불의 관계이며, 과학은 철학에게 종교를 끌어들여서는 자신에게 접근하지 마라고 한다. 종교는 지적설계론을 들고 나와 기어코 과학과 연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은 지적설계론을 16가지의 이유를 들어 유사과학이라고 주장하여 과학적 논리실증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과학의 입장에서는 논리실증주의에 입각한 실험과 관측을 통한 증명 외에는 어떤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므로 형이상학적 입장의 종교는 그러한 형이하학적 방법으로는 신을 증명할 방법이 없으므로 둘의 관계는 절대 통합 불가능하다.

뉴턴 때까지 과학과 철학은 한 몸의 두 얼굴과 같이 과학자는 곧 철학자, 철학자는 과학자였다. 기독교의 예수가 나타나면서 야훼의 300년은 탄압의 시간을 맞았으나, 325년 기독교가 세계의 열강 로마의 국교가 되는 순간부터 오랜 시간 야훼의 기간을 누렸다. 깨어질 것 같지 않던 야훼의 시간을 결정적으로 흠집을 내기 시작한 것은 과학이었다. 그것은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이었다. 하늘은 야훼의 영역이었다. 그러므로 지구를 도는 하늘이 지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전지전능의 존재였다.

그러한 무지에 대한 반동으로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시동을 걸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여전히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행성의 궤도를 타원이 아니라 원으로 생각했고, 우주를 유한한 구체(球體)로 보았다. 또한 천동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을 피해, 지동설이 "계산하는 데 편리하다"고만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개혁적 완성을 위한 작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으며 개혁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만큼 종교의 편향성은 뿌리 깊다.

1548년 나폴리의 조르다노 브루노가 과학의 순교를 통하여 반동의 속도를 냈으며 갈릴레오에 이르러 기독교는 사법적 협박을 동원하여 사실로 굳어져가는 지동설을 막았으나 이미 그때부터 힘이 부족하여 그 사실을 막기에는 역부족한 상태였다.

16세기 후반,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은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가 관찰보다 수학적 일관성을 중요시한 것을 비판했지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코페르니쿠스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이론 안에 있는 "천구는 불멸하며, 지구, 달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브루노가 활동하던 시기의 코페르니쿠스 모형은 아직 논리적 결함이 많았고, 천동설이 더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동의하는 천문학자는 거의 없었다.

이 시기의 요하네스 케플러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아직 젊은 사람들이었다. 브루노는 천문학자는 아니었지만, 가장 빠른 시기에 지구 중심설과 천동설을 배척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을 받아들였다.

브루노의 주장에서 가장 획기적이었던 것은 "지구 자체가 회전하고, 따라서 지구상에서는 천체가 회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브루노는 우주가 유한하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세상의 중심은 지구 또는 태양이다"라는 논리를 초월하여 3세기 플로티노스와 같은 사상, 즉 우주의 중심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당대 천동설과 지동설을 주창하던 양 측이 보편적으로 따르던 "우주는 유한하다"는 믿음에 반하는 생각이었다. 브루노는 태양 주위의 행성들, 즉 태양계와 같은 시스템은 우주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라고 생각했다.

브루노는 하나님이 무한한 존재인 이상,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우주와 시간은 무한하며, 무한히 넓은 우주에 지구가 아닌 곳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오로지 지구만이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당시의 기독교적 우주관을 뒤집는 것이었다.

브루노는 천구에서 움직이지 않는 별들이 바로 항성이라고 주장하였고, 빛과 열을 발산하는 항성과 그 주위를 돌며 빛과 열을 받는 행성을 구분하였다. 브루노는 고대 원소설(물, 공기, 불, 흙)은 믿고 있었지만, 우주가 특별한 물질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똑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지구상에서 보여지는 운동 법칙이 우주 어디에나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인류는 밤하늘의 별들은 실제로 태양과 같은 항성이며, 외계 행성이 실제로 존재하며, 태양계 밖 천체들도 스펙트럼 분석을 통해 지구와 같은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고, 이는 브루노의 주장 일부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우주의 항성과 항성 사이에 있는 무수한 거리는 에테르에 의해 충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마법과 점성술, 신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우주가 수학적 계산을 통해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별들의 의지에 의해 운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애니미즘적 우주관은 브루노 우주론의 특징 중 하나이다.

사형에 대한 것에 대하여, 정해진 해석 외의 나머지 모든 것을 부정하는 로마 가톨릭교회 주도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브루노의 생각은 이단으로 몰아졌다. 권위적인 종교기구들만이 할 수 있는 성경의 해석에 반대되는 이러한 생각들은 일개 인간이 성경을 '재해석한 것으로 판단되었으며 이는 곧 신에 대한 불경이었다.

로마에서 그는 8년 동안 잔혹한 심문을 당하며 산탄젤로 성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예수회의 추기경인 로베르토 벨라르미노가 주재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종교 재판 심리 과정의 일부 중요한 문서들이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어떤 문서는 남아있으며, 그 중 하나는 1940년에 발견된 요약집이다. 그의 저서와 증언들에 근거해 적용된 죄목은 신성모독, 비윤리적 행동, 교의신학의 문제에 대한 이단적 해석을 포함하며, 또한 그의 철학과 우주론에 대한 기본적 주장과 관련이 있다. 루이지 피르포(LuigiFirpo)는 브루노의 죄목을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1. 기독교 믿음과 교리에 배치되는 의견.

2. 삼위일체를 부인함.

3.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함.

4.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의견.

5. 성체와 미사에 대한 다른 의견

6. 복수의 세상이 있으며, 그들의 영원성을 주장함.

7. 윤회와 인간 영혼이 짐승에게 들어간다고 믿음.

8. 마법을 연구하고 점을 침.9. 성모 마리아의 처녀성을 부인함.

브루노는 베네치아의 자기변호에서 교회의 교리적 가르침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을 유지했다. 특히 브루노는 세상이 하나뿐이 아님을 믿었는데,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그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화형될 것이라는 협박에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에게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해야 할 이유가 없고, 그러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철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사형 선고가 내릴 때, 그는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은 채 자신을 기소한 사람들에게 "내 형량이 선고되는 것을 듣는 나 자신의 두려움보다 당신들의 두려움이 오히려 더 클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재의 태양계 구조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17세기 초의 케플러와 17세기 후반의 뉴턴이 등장하기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등장으로 근대 과학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초판본을 출간한 지 불과 두어 시간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류의 역사가 예수를 기준으로 양분되는 전환기를 맞이했을 때 그 변화를 생생하게 상징하는 것이 아토스 산이다. 그리스의 아토스 산에는 두 개의 전설이 서려 있다. 첫 번째 전설에 따르면 거인 아토스가 포세이돈을 죽이려고 던진 돌이 변해서 아토스 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화시대의 아토스 산 정상에는 제우스를 모시는 신전이 세워졌다. 두 번째 전설의 주인공은 성모 마리아이다. 성모 마리아가 유대의 땅을 떠나 처음 유럽에 발을 디딘 곳이 아토스 산이란 것이다. 성모를 태운 배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닿았던 곳이 바로그곳이다. 뱃전에 선 성모 마리아의 시야에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의사원이 들어오자 사원은 저절로 산산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훗날 아토스 산에는 그리스정교회의 수도승이 속세를 떠나 은거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길이 40킬로미터, 폭 10킬로미터의 험악한 산악으로 이뤄진 반도에 우뚝 솟은 해발 2000미터의 아토스 산에는 약 20개의 수도원이 들어서 있다. 그뿐 아니라 골짜기마다 움막이 숨어 있고 절벽 끝에는 까치집처럼 암자가 매달려 있다. 육로가 험한 터라 오로지 뱃길로만 갈 수 있는 그곳은 지금도 그리스 국가로부터 독립된 자치구로서 수도원의 대표승려로 구성된 '성스런 공동체'에 의해 운영된다. 외부인이 그곳에 들어가려면 별도의 입국비자를 발급받아야 할 정도로 자치권이 보장된 국가 속의 국가이다. 단, 비자는 '아바통'이라 불리는 계율에 따라 오로지 남자에게만 부여된다. 예수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이곳에 어떤 여자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계율 때문이다. 수도원과 암자, 그리고 공동 수도생활을 거부하는 은자의 토굴에는 검은 승복을 입고 긴 수염을 기른 남자들만 살고 있다.

철학과 신학

고대 철학을 전공한 화자가 아토스 산을 탐사하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화자의 눈을 통해 두 개의 세계를 만난다. 첫 번째는 아토스 산에 성모 마리아가 오기 이전의 그리스 시대이다. 인류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를 연구하는 주인공 덕분에 독자는 아테네 대학의 철학 강의를 귀동냥하게 된다. 두 번째 세계는 세상을 등지고 아토스 산 속에 칩거한 은수자들의 세계이다. 우선 주인공 어깨너머로 철학 강의를 들어보자.

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천문학자, 기하학자, 대수학자, 물리학자, 박물학자, 의사, 시인, 정치학자 등이 모인 이질적 집단이란 것을 발견했다. 테아노 교수는 기원전 7-6세기 사이에 살았던 탈레스가 어떻게 피라미드의 높이를 계산했는지 설명해주었다. 지팡이를 모래에 세운 후 그림자의 길이가 실제 높이와 일치되는 시간을 골라 그는 피라미드의 그늘을 재서 높이를 계산한 것이다. 그것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자연과 인간이 공기에서 탄생했는지, 아니면 물, 불, 흙, 그도 아니면 이 원소들의 결합에서 발생했는지를 따지는 그들의 관심사는 흥미롭지 않았다. 엠페도클레스에 의하면 인간이 시금치처럼 흙에서 발생했다는데 그 말을 듣고는 자칫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하나만은 확실했다. 어떤 신도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테아노 교수는 인간의 사유가 그 가능성을 발견하여 그 사유가 작용하는 영역을 무한히 확장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고 결론내렸다.

테아노 교수에 의하면 초월적 신이나 조물주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추론과 논리만으로 자연과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리스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모든 존재의 근원에 조물주를 상정하지 않은 철저한 유물론적 태도가 그들 사유의 토대였으니 이른바 철학이란 것은 그리스인의 발명품인 셈이다. 다시 테아노 교수의 강의를 들어보자.

소크라테스 이전의 학자들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 길이 무척 어렵다는 것도 동시에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 중 몇몇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를 견지했다는 것도 나름대로 수긍할 수 있다. 그들은 회의를 키우고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것을 의심했으며, 그것이 진화한다는 것도 의심한 나머지 우주의 존재마저도 의심했다.

인류 최초로 철학을 발명한 그리스인에게 기독교의 도래는 재앙이었다. 아토스 산의 신전이 부서지고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그리스 철학은 그 맥이 끊긴 것이다. 그리스 뭇 신의 신전과 조각상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교회와 성상이 세워졌으며 제각기 다른 기능을 지닌 그리스 신들은 기독교의 성자로 대체되었다.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변한 데 따른 민중의 허전함은 앞서 인용했던 기독교의 뭇 순교자들을 숭배하는 것으로 다소 보상받은 셈이다. 강의실을 나오며 주인공은 눈앞에서 땅이 융기하여 두 개의 높은 흙더미로 쌓이는 것을 상상한다. 하나는 '의심의 언덕'이며 다른 하나는 '확신의 산'이었다. 스물네 살의 주인공이 이 언덕과 산을 순례하는 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민주주의의 탄생

화자의 논문을 지도하는 역사학 교수 베지르치스는 아토스 산에 성모가 방문함으로써 그리스는 의심의 시대에서 확신의 시대, 달리 말하면 철학의 시대에서 신앙의 시대로 넘어갔다고 주장한다. 그의 강의에 따르면 그리스 고대 철학은 세상을 창조한 신이나 사후세계를 상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인간의 영생불사, 나아가 부활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사후세계의 꿈을 박탈당한 인간은 오로지 현세에서 최선을 다해 그 보상을 받아야만 했다. "죽은 자를 살리려던 아스클레피오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벼락을 맞았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죽음은 대단히 슬픈 현실이었고 인간들에게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주기 위해 고대 종교인은 민주주의를 제공한 것이다. 인간이 처한 비극적 운명에 대한 인식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진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영생과 부활, 혹은'윤회에 근거한 종교는 인간에게 내세의 희망을 주는 대신 각박한 현실, 나아가 불평등한 현실을 인내할 여지를 남긴다. 예컨대 목화밭에서 흑인노예를 짐승처럼 부리기 위해 농장주들은 그들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쳤고 브라만은 불가촉천민에게 환생의 헛된 꿈을 주입하여 부당한 현실에 대한 불만과 개혁의지를 무산시켰던 셈이다. 베지르치스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기독교로 개종한 비잔틴의 황제가 과연 신을 믿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는 정신적 타락이 극에 달하고 무당과 점쟁이가 떼돈을 버는 제국에 새로운 종교를 이식하려 했다. 가난한 자를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제국의 신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그는 믿었을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도들이 겪은 박해에 대해선 많은 것을 알지만 그것은 교회에서 말하는 것만큼 큰 박해가 아니었다. 반면에 그들이 이교도, 특히 유대인에 가한 박해에 대해선 거의 모른다. 그들은 이교도를 불태우고 십자가형에 처하고 자살을 강요했다. 5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강의했던 철학자이자 수학자 히파이티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졌다. 그 만행에 축성을 내린 주교 시릴은 수도승들에게 비신자들에 대한 징벌 원정을 사주했다." 베지르치스 교수에 따르면 비잔틴 제국이 본격적으로 철학과 다신교를 파괴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부터였고 서기 392년 테오도즈 황제의 이교도 학살은 종교가 아니라 문명의 파괴로 이어졌다. 529년 드디어 아테네 학당이 폐쇄됨으로써 그리스 철학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1837년에 이르러서야 아테네 대학에 철학 강좌가 생겼다. "우리는 13세기 동안의 지적 무기력, 13세기 동안의 침묵을 거쳤습니다. 이 시기 동안 그리스의 책에서 자유란 단어가 사라졌었지요. 우리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그 단어를 다시 찾았습니다." 의심과 회의를 질식시킨 기독교에 순종하는 은둔 수도승이 지켜야 할 첫 번째 계율은 생각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사유는 신앙의 적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끊는 것은 신에게 귀의하는 첫 번째 길이다. 그러나 과연 수도승은 기도를 통해 회의와 유혹에서 벗어났을까.

농밀한 확신

그리스 조각을 보고 나면 그 이후의 모든 예술은 코흘리개가 주물러 만든 조악한 키치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세월이 흘러 경제가 발전하고 먹고사는 것이 편해져도 종교와 예술을 비롯한 인간의 정신은 그리스 시대보다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다.(정신문명은 축의 시대<기원전 9세기 ~ 2세기 : 700>를 넘어선 적이 없다는 야스퍼스의 주장이 맞다) 물적 토대와 상부구조가 거의 무관한 것임을 보여주는 웅변적증거가 고대 그리스 조각이라 생각된다. 조각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국가가 실현하고자 표방한 민주주의는 여전히 그들이 이룩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리스는 그 찬란했던 문명이 무너지고 철학이 파괴되고 남의 속국이 되었다가 내전과 군사혁명을 거친 후 요새는 유럽 경제의 발목을 잡는 지진아 취급을 받는다.

그리스 출신의 프랑스 소설가는 아마도 아토스 산을 화두로 잡아 그 몰락의 시원을 짚어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 이후』는 아토스 산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척박한 바위산을 걸어 수도원을 돌아다니고 『우천염천雨天炎天』이란 아토스 산과 터키를 관광한 기행문을 썼다. 제목에서 '우천'이 바로 아토스 산에 해당된다. 작가는 음식에 호불호가 분명하긴 하지만 바깥세상을 두루 주유한터라 개방적 미각을 지녔을 법하다. 그런데 아토스 산의 독거 수도승이 내놓은 음식만은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저녁 식사 또한 끔찍했다. 우선 빵, 정말 형편없는 물건이다. 언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돌처럼 딱딱한 데다가 한쪽에 푸른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그것을 세면대에 넣고 수돗물로 불린다. 그다음에 그것을 체에 받쳐 물기를 빼고 주는 것이다. 물에 불려 주는 것만으로도 친절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도저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콩 수프, 거기에 식초를 듬뿍 쳐서 내놓았다. 식초를 넣으면 힘이 난다고 그는 말한다. 그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맛은 엉망진창이다."

하루키는 독거 수도승의 움막과 식사에 진저리를 치고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하루키가 머문 숙소, 그가 먹은 빵은 1000년 동안 아토스의 수도승이 잤던 곳이고 먹었던 것이다. 걸핏하면 그 빵마저도 끊고 며칠씩 금식하는 것 역시 1000년간 지켜온 그들의 계율이다. 도망치듯 그곳을 떠난 하루키는 며칠이 지나자 "이상할 정도로 아토스가 그리워졌다"고 고백한다. 그런 감정은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고 음식은 "생생하고 실감있는 맛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한다. 지저분한 원숭이 같은 수도승이 정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조금도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 수도사의 말에는 이상한 설득력이 있었다. 아마 그것은 종교를 운운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확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확신이란 점에서는 전 세계를 찾아봐도 아토스처럼 농밀한 확신에 가득 찬 땅은 아마도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그들에게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신에 가득 찬 리얼 월드인 것이다." 하루키가 묘사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농밀한 확신'이란 표현을 바실리스 알렉사키스의 용어로 번역하면 '철학의 여지가 없는 신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