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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나는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퇴옹 성철, 이 뭣고?)/서명원

나는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퇴옹 성철, 이 뭣고?)/서명원

 

1<禪門正路>에 나타난 선종의 전통에 대한 인식

1981년 출판된 성철 스님의 책의 제목을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는데, 이는 곧 수행의 바른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르지 않는 길도 있다는 뜻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성철의 대답은 아주 명확하다. 선 수행의 제일 바른 길은 하나밖에 없으며, 이는 곧 간화선수행을 통한 돈오돈수의 정로이다. 성철은 자신의 걸작 <옛 거울을 부수고 들어오너라 : 선문정로>에서 여러 이단의 길을 공격하기보다 하나의 대상만을 유일하게 비판하였다. 그것은 하택신회(668-760)로 말미암아 시작되고 규봉종밀(780-841)로 이어져, 보조지눌(1158-1210)이 집대성했다고 하는 돈오점수사상이다. 그 시대부터 지눌의 사상은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34.성철의 언어관-손가락과 달

성철은 깨침의 체험을 모든 언어를 완전히 초월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면서 언어야말로 달을 가리키는-보여 주는- 손가락(指月)’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길잡이의 역할을 해 주는 손가락의 필요성까지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가락이나 그 주인에 걸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한 까닭으로 성철이 입적하기 얼마 전 남긴 유언은 내 말에 속지 마라. 나는 늘 거짓말만 하니까.”였다. 당신 자신이나 자신의 말에 걸리지 않기를 바랐던 성철의 정신은 열반송에서도 두드러진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41.돈오돈수를 강조하기 위한 <선문정로> 각 장의 구조

각 장의 앞머리에서 성철은 그 구조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실마리를 제공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각 장의 인용문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각 장의 제목을 총해서 성철이 어떠한 취지로 그 장들을 구성하는 인용문을 발췌했는지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인용문들을 통해서 하나의 일관된 논지를 밀고 나가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증명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대응하기 위해서 인용문들을 축적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이러한 인용문들에 대한 성철의 해설은 설득력 있는 논의를 밝히지 않은 반복적 서술에 불과하다.

돈점의 근본 대립구조 말고는 전체적 구조나 각 장의 구조가 없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놀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종의 정신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47~48.성철 스님의 인용 방법에 나타난 창과 방패

성철 스님이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는 이들을 비난하며 자신의 사상인 돈오돈수가 선종의 전통임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경론이나 조사어록을 사용했음을 알고 있다. 이 대목에서 성철 스님이 그들을 정확하게 인용했는지, 아니면 我田引水 격으로 인용했는지 하는 점에 의심이 간다. 박성배는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 비판에 대하여>에서 그런 점을 많이 지적하였다.

심재룡은 청허 휴정이 <선가귀감>에서 보조지눌의 돈오점수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철 스님이 자신의 입장을 입증하기 위해 <禪敎訣>을 사용할 때 휴정의 돈오돈수만을 강조한 것은 인용방법에서의 문제를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55.전통에 대한 비타협성과 배타성

성철의 선배들(古鏡)을 향한 충실함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사상적 투쟁에 있어서 (마침내 그렇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가의 역할을 전혀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옳다고 본 옛 조사들의 참다운 전통만을 회복하려 할 뿐이었다. 그것은 전통을 해석하는 성철의 자신감이 절대적일 때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철은 당신 해석만 옳고 나머지는 모두 엉터리인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은 몇몇 학자들이 성철을 근본주의자 또는 시대정신을 놓친 사람등으로 비난하게 만들었다.

 

58.간화선수행-돈오돈수 체득을 위한 필수 수단

성철이 우리에게 권한 수행방법은 본인이 직접 행한 오후수행불행(悟後修行佛行)으로서,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66.성철의 돈오돈수 사상의 특성

.성철에 대한 비판 재고

필자는 성철의 생애 및 전서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쓰는 가운데, 국내 도처에서 성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들어야 했다. 학자들은 물론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간혹 돈오돈수 사상이 실제 삶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는 혹독한 질문을 하였다. 그 이유는 성철의 사상 자체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상을 전달하는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성철의 해석학적 순환의 문제

성철은 자신의 돈오돈수 사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점차적인 것은 무엇이든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묘한 돈점의 회통(會通)을 전혀 언급하지도 않고 오로지 돈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었으니, 시대에 대한 시간적 착오를 여기저기서 비일비재하게 저질렀다. 예컨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천태지의(538-597)의 원돈지관이나 육조혜능(638-713)의 가르침을 이보다 훨씬 후대인 송(960-1279)대의 원오극근(1063-1135)과 대혜종고(1089-1163)의 간화선수행과 거의 동일시 하였다. 또한 지눌뿐 아니라 다른 고승이나 조사들을 인용하는 경우에도 역사적 맥락을 경시하거나 또는 완전히 무시하면서 필요한 내용만을 아전인수 격으로 발췌하는 경향이 두루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성철이 축적하여 제공한 돈오돈수에 대한 수많은 경증들은 설득력이 약할 때가 많다. 진리의 절대성만 강조했지 상대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런 문제들 때문에 흔히 성철을 두고 물거품 속의 인물, 과거의 인물, 이제는 묻어도 되는 인물등이라는 표현을 쓰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성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지눌의 얼굴 표정은 온정과 친절을 풍기는 반면, 성철의 안광은 한결같고 형언할 수 없는 강경한 뱃심을 드러낸다. 저서에서도 상반된다. 지눌의 저서에서는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의 사상을 밝히려는 사변적 정신이 보이는가 하면, 성철의 저서에서는 시종여일 심하게 독단적이며 단호한 어조로 자신의 입장을 밀고 나가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학자들에게 지눌에 비해 큰 매력을 주지 못하는 듯 싶다. 그런데 두 사람의 영적 여정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성철은 출가한 지 3년 만에 혹독하고 순수한 간화선을 통해서 29살에 단박에 깨친 반면 지눌은 경전을 접하며 세 차례에 걸친 점차적인 깨달음을 경험했다. 118225살 때 <법보단경>, 31살에 이통현(635-730) <신화엄경론>, 40살이던 1197년에 <대혜종고어록>을 읽으면서 각각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성철은 출가하기도 전에 사상이 지극히 돈오돈수적인 영가현각(665-713)<증도가>를 숙독하였고, 또한 선종의 필독서인 대혜어록을 자신의 실제적 간화선수행의 지침서로 삼았다.

그렇다면 성철의 돈오돈수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1)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의 수행은 부처의 수행이다. 구경각인 오()를 단박에 이루는 수행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실제적으로 부처가 되므로, 체험한 그 순간부터 아뢰야식(견성은 제8아뢰야식인 3세를 영원히 끊은 무여열반이라야 하니 무여열반은 즉 무심이다. 그리하여 자재위 이상의 대보살들도 미세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제8아뢰야식에 머물러 있으므로 견성이 못 된다. 8의 미세한 망상까지 모두 없애야만, 여래의 정법안장을 전해받는다)에 있는 미세망념까지도 아주 다 사라져버려, 그는 더 이상 부처가 되기 위해 닦을 필요가 없게 된다는 의미다./173쪽 참조

2)법보단경에 나오는 오직 견성하는 법만을 전하며, 세상에 출현하여 邪宗을 파쇄하노라.”이다. 3)돈황본 육조단경에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느니라이다. 따라서 성철에게는 진리에 대한 체험이 무조건적으로 먼저라야 된다. 깨달음이 먼저지 팔만대장경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철은 단연코 단경을 공시적으로 이해하고 숙독했으니 이 점을 이해하기 어렵다. 선을 통한 깨침인 계란이 먼저라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 닭이 먼저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선교일치라는 생각에는 전혀 미치지 않았으니 답답한 일이다. 자신이 주장한 사상이 평범한 일반인에게 얼마나 극단적이며 추상적 이념으로 여겨졌는지 과연 인식했을지 하는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지눌도 깨달은 사람으로 단경들을 매우 아꼈음에도 불구하고 돈오점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누군가 돈오점수 사상을 완전히 배척했던 성철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고 물으면, “자나 깨나 외줄타기만 하는 곡예사라고 대답하면 될 것 같다. 참으로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외줄타기를 오매일여로 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의 여부를 물을 수밖에 없는 놀이를 念念修行佛行으로 하는 존재는 완전히 깨어있는 사람이나 신뿐일 것이다.

 

90.한국불교의 돈점논쟁에 대한 조명

지눌 이후 750여 년간 그의 사상적 영향 하에 있던 한국불교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런 논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다만 성철의 성정이 느슨한 불교종단의 수행에 대한 불만 때문인 것 같다. 당시 선원들의 분위기는 모두 돈오점수에 젖어있었다고 하니 한편 이해할 수 있으나 지눌은 일반적인 중생을 위해 돈오점수의 과정을 제공하였다. 그러면서 대혜종고의 어록을 읽으면서 간화선을 체험했고 이후 上根器의 수행자들에게 그 사상적 유산도 남겨주었다. 성철은 후세가 지눌의 사상을 지나치게 돈오점수 중심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불균형을 바로 잡으려는 반작용이 아니었나 싶다.

 

108..사상적 측면에서의 의의

필자는 지눌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철의 저서와 업적을 알게 된 후, 지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도대체 무엇이 결핍되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지눌이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혜종고의 어록을 읽으며,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깨달음을 얻었고 자신의 막혀있던 데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사라졌다면, 성철이 말하는 돈오돈수의 체험과 무엇이 다를까?’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 “선정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발마다 반연에 응하는 고시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구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일임을 알 것이다.하였다. 나는 거기서 가만히 그 뜻을 깨치게 되어, 저절로 물건이 가슴에 걸리지 않고 원수도 한 자리에 있지 않아 당장에 편하고 즐거워졌다.” 지눌, <보조국사전서> - 더군다나 지눌이 자기 사상의 세 번째 전개 단계에서 대혜 선사의 간화선을 완전히 이어받았다고 여겼다면, 성철의 간화선 사상과 지눌의 사상 사이에서의 차이점을 찾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둘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차이점 하나를 들자면, 지눌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대혜종고어록>에 근거하여 자기의 마지막 사상 단계로 넘어가면서도 <법보단경>과 화엄 교학에 입각한 제1단계와 제2단계에 대한 가치를 끝까지 인정했다는 것에 있다. 물론 간화선 수행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 교를 무조건적으로 버리고 임제종 양기파의 법맥을 직접 이어받아야 한다는 철칙을 세운다면, 역시 이를 근거로 지눌에게 잘못된 점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성철은 지눌의 실제 사상이나 역사적 배경을 전혀 무시하고 그를 비유적인 표적으로 삼아 자기의 선사상을 밀고 나가는 방편으로서 지눌을 비판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류제동, 2007, 지눌과 성철의 공통점에 대한 탐구-돈오점수적 구조를 중심으로

 

111.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성철은 위기에 빠진 20세기 한국불교의 난맥을 바로잡으려고 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어지러운 과거와의 관계를 끊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김종인은 돈오돈수론은 급변하는 새로운 문화적 환경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정체된 상태로 쇠락하고 있는 한국불교에 근본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논리적 토대라고 했다.

 

114.성철의 간화선 수행의 세 단계

성철은 점수를 그토록 반대하면서도 견성을 이루기 위해 겪어야 되는 세 가지의 수행단계-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어떤 스님들은 수행 단계를 공시적으로만 이해했다고 주장했는데 사실 그렇다 하더라도 불교의 핵심인 중도사상에 따라 통시적으로도 이해했어야 했다. 비유컨대 성철은 공중에서 외줄타기를 하다가도 땅으로 내려올 때가 있었다. 즉 성철은 오로지 외줄타기와 같은 돈오돈수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점진성을 내포하는 가르침이니 점수돈오적인 체험의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철 사상에서 돈과 점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성철은 돈과 점의 연관성에 대하여 시원한 확답을 제공해 주지 않았다. 또한 점진성을 모조리 배제하고 이 세 단계의 수행 과정을 묘사하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철의 모순과 자가당착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17.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수행의 극치인 깨달음을 강조했던 성철은 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에 있어 점수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나, 점차적인 세 단계의 과정을 제시하였고 이는 결국 점수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성철이 말하는 세 단계는 화엄교학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52에 비하여 훨씬 단순하다. 시공적인 관점에서 무상정등각에 이르는 단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간과한 것이다. 두 선사의 과정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쉬운 점은 상대방의 입장을 높이고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가리는 것이 바람직하나 그는 흑백논리에 입각하여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118.성철, 달라이 라마, 그리고 틱낫한

정확하게 성철의 돈오돈수론은 학문적 영구 대상으로 삼기 전까지 종교적 맥락에서 유효한 가르침, 즉 선원에 머물며 간화선에 집중하는 수행자들을 깨우치기 위한 고유한 사상이다. 그러나 이 사상은 마치 화두처럼 수행자들의 평상시 정신적인 균형 상태를 불안정하게 하는 것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가치관을 전도시키기 위한 극단적인 사상이 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위험할 수도 있다. 더구나 성철의 돈오돈수론은 진입하기도, 빠져나가기도, 매우 힘든 사상으로 다른 모든 배타적인 의미의 체계를 이룬다. 한편 성철이 일으킨, 한국 불교계의 화두와 같은 한국 돈점논쟁이 지닌 나름대로의 가치는 인정하되, 돈점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한국불교사에 큰 획을 그은 다른 큰스님들의 존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서양에서 높은 대중적 지지와 신뢰를 얻고 있는 종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1936- )나 틱낫한(1926- )이 정치적이거나 사상적인 면에서, 중국 또는 미국과 강한 대립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평화주의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더욱더 크게 깨달은 자로서 인정받고 있음을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돈점의 논쟁을 일으킨 성철은 자신의 사상을 밀고 나가면서도 지눌의 사상에 대해 극단적인 비판을 절제하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중도에 입각하여 보여주는 태도나 틱낫한의 참여불교를 통한 태도는 세계에 새로운 형태의 불교를 보여주면서 모두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자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72..성철의 불교 정통관과 보조지눌에 대한 이해

성철이 복원하고자 했던 선종의 정통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깨달음의 내용은 중도(173.성철의 중도-성철은 중도가 부처님이니 중도를 바로 알면 부처님을 봅니다. 중도는 중간, 도는 중용이 아닙니다. 중도는 시비선악 등과 같은 상대적 대립의 양쪽을 버리고 그의 모순, 갈등이 상통하여 융합하는 절대의 경지입니다. 이렇게 설파했다.)

)공안의 핵심인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깨달음에 도달

)깨달음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홀연히 성취

)진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의 수행은 살아있는 부처의 수행이 되므로, 그 사람은 더 이상 깨닫기 전인 무명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이에 반해 지눌은 늘그막에 대혜종고의 어록을 발견해서 돈오돈수적인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돈오점수적인 체험의 타당성, 즉 깨달은 뒤에도 오래도록 닦아야 한다는 깨달음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성철은 이 깨달음의 패러다임(한 시대의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식의 체계. 또는 다양한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구조. 미국의 과학사가 쿤(Kuhn, T. S.)이 그의 책 과학 혁명의 구조(1962)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지눌의 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즉 교종의 돈오점수와 선종의 돈오돈수 사이의 어딘가에 양다리를 걸치려고 하는 지눌의 논리를 반박한 것이다. 성철의 저서를 숙독해보면 성철은 지눌에 대해, 그가 처했던 맥락 안에 두고, 이해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12세기의 지눌에게 주어진 역사적 숙제란, 고려 역대 왕들이 교종과 선종의 알력 관계를 평정하고 그 둘을 화합시키려는 노력에도 계속 대립하는 두 종파를 화해시키려 했다. 그러나 성철은 지눌의 입장을 배려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분과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계속 공격하는 데서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과 함께, 자기 사상을 지속적으로 더 정확하게 밀고 나가는 것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74.결론-성철의 해석에 대한 고찰

오늘날 <법보단경>에 대한 역사적 비평의 관점에서는 이 책의 여러 판본 가운데 <돈황본 육조단경>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성철의 생각과는 달리 학자들은 그것이 돈오돈수만을 주장하고 점진적인 것을 배제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저자가 육조 혜능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 경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손실된 내용을 해석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매우 힘들 수밖에 없다. 성철은 끝까지 <돈황본 육조단경>을 육조혜능의 말씀 그 자체로 보고 싶어 했을 뿐만 아니라, 논이 아닌 경인 것만큼 석가세존의 말씀으로까지 보고 싶어 했다. 이 확신에 입각하여, 성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자주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주창을 확고히 했다. “지눌과 그분의 제자들이 오류에 빠졌다. 나는 옳다. 아직도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면 <돈황본 육조단경>을 읽어봐라.”성철이 역사적 비평의 필요성에 관한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로 불교를 독학한 사람임을 안다면, 그분의 지나친 주창을 필요 이상 경원시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눌을 전공한 수많은 불교학자들의 반발은 크다. 지눌 전공자들은 그들이 보조사상연구원을 설립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성철의 후학들은 성철선사상연구원을 만들었다.

성철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혜능과 당신을 동일시했던 경향이다. 즉 돈황본에 나오는 唯傳頓敎法 出世破邪宗-오로지 돈교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아가 삿된 가르침을 부수어버려라.’그러나 혜능이 단경에서 언급하는 돈점의 포괄적 내용을 소홀히 한 것 같다. ‘我自法文 從上已來 頓漸 皆立無念爲宗-예부터 나의 법문의 돈점이 모두 무념을 종으로 한다.’는 부분이다. 어쨌든 현재는 1987년 이후 돈황본 육조단경의 새로운 번역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육조혜능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2014.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