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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도쿄대학 불교학과/정상교

도쿄대학 불교학과/정상교

 

46-47.나의 부정/수레의 비유-오온과 관련한 해답/무아사상의 배경-..치의 원인 제거

고대 인도 사상가들은 우주의 근본원리인 브라흐만()과 개체의 절대원리이며 사후 불변하는 불변의 아트만()을 상정한 후, 깨달음의 길을 통해 이 두 원리가 합일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추구하였다. 이처럼 영혼 등 불변의 존재가 행위의 과보를 받아 내생에 태어난다는 업보-윤회 사상은 불교 독자의 것이 아니라 불교 이전의 인도 사상계에 만연한 사상이다.

물론 불교도 업보와 윤회, 해탈이라는 사고 체계를 받아들였지만 영원불변한 브라흐만이나 영혼과 같은 아트만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흔히 불교의 대표이론으로 자주 거론되는 무아(無我)는 눈앞에 실재하고 있는 라는 존재를 무조건 부정하는 황당한 허무주의가 아니다. 무상을 덧없다고 해석하면 허무주의에 빠진다. 붓다는 영원불변한 아트만()이라는 것이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을 부정하게 되고, 또한 불변하는 존재는 자기중심주의와 집착의 대상이 되어 결국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므로 불변, 항상(恒常)하는 존재를 부정하였다. 이것이 무아사상의 배경이다. 기존의 브라흐만 사상에 반기를 든 운명론자, 불가지론자, 회의론자 등 자유사상가들이 생겨났으며 붓다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52.불교학자들은 불교 인식논리학이라는 무대에서 모든 존재의 찰나적 존재성 논증을 펼쳤다. 불교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므로 신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불교 인식논리학은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오직 바른 인식의 근거다.’ 그리고 바른 인식의 근거조차 무상의 불 속에 던져버림으로써 모든 종교와 사상이 빠지는 도그마(이성(理性)적인 비판이 허용되지 않고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단적인 교리(敎理)나 학설)를 부정하였다.

 

56.티베트 사자의 서

달라이라마 14세가 속한 갤룩파는 표절, 위작한 것을 미리 땅 속에 묻은 뒤, 고대에 감추어진 보물이라며 내보이는 매장서의 하나이다. 이것을 마치 사후 순간을 알려주는 티베트 불교의 진리를 담은 비전이라느니 최고의 경전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한다.

 

60.수나라 승려 담천(曇遷)은 저서 망시비론(亡是非論)에서 만약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나쁘다고 하고, 따지지 않는 것을 바른 것이라 한다면 시시비비를 비난하는 것이므로 여전히 그는 시비를 가리는 해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했다. 열반과 미혹의 세계를 혼동하여 헤매지 마라. 시비를 가리고 투쟁을 하는 가운데 붓다의 참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

 

71.모든 것이 장맛비에 개똥 씻겨 가듯이 하는 거다.- 똥개의 똥

 

131.유식 삼성/아뢰야식과 무의식/(프로이트, )의 관계. 아뢰야식과 윤회의 관계. 의타기성과 연기의 관계

반야심경의 사상이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대승불교의 양대 사상 중의 하나로서 인간의 의식구조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다룬 유식학파에 대하여 알아본다. 인도의 불교도들은 깊은 요가 수행상태에서 놀라운 발견을 하였다. 그것은 깊은 선정상태에 들어가면 육체는 죽음과 유사한 상태에 놓이지만 선정에서 깨어났을 때는 육체가 죽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의 활동만은 여전히 끈임 없이 이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식의 존재를 여덟 번째 감각인 아뢰야식, 8식으로 이름 붙이고 전생의 기억과 행위가 이 식에 저장되어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고 설파하였다.

이처럼 서양의 심리학이 그저 무의식으로 부른 영역에 대하여 그들은 이미 2,000년 전에 요가수행이라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그것을 체험하고는 깊은 인간의 의식구조를 정치하게 분석해놓았음을 알았을 때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것은 신비한 현상에 대한 경이로움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으로 이룰 수 있는 설명 가능한 영역 안에 있었으므로 불교의 수행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주었다.

 

134-135.북주의 무제-유교·불교·도교의 공개 토론/정영사 혜원(523~592)의 압승

북주의 무제는 도교에 대한 광신으로 불교를 폐지하고 도교를 부흥시키려고 했다. 이를 위한 명분으로 유교, 불교, 도교의 대표 지식인들을 한데 모아 공개토론회를 가졌는데 불교의 대표인 혜원의 압승으로 실망한 무제는 불교와 도교 모두를 폐지했다. 그 결과 3만 개의 사원이 없어지고 200만 명의 승려와 도교의 도사가 환속하게 되었다.

 

137-140.밀린다(메난드로스 : 그리스)王問經

무아와 수레의 비유/나가세나 존자와의 대화-불변의 실체를 부정하고 자아에 대한 집착을 끊고 무아를 알지 못하는 자는 해탈을 이룰 수 없다는 비유

 

142-144.티베트 삼예의 논쟁

8세기경 중국 선종 마하연(摩訶衍)과 인도 후기 대승불교 학승 까말라실라(740~795)의 논쟁-선종의 완패. 주지주의적 성향이 강한 인도 계통의 불교를 배운 티베트인들에게 계율조차 망상 분별이라며 부정하는 직관주의적 성향의 마하연의 가르침에 대한 논쟁. 불사불관(不思不觀)에 대해 붓다의 가르침인 무분별지(無分別知)空性의 바른 를 이해하지 못하는 저열한 가르침이라고 공격.

148.불교의 이론적 체계화에 큰 공헌을 한 아비달마불교의 이해, 일체 존재의 공성을 주장한 중관사상, 모든 것은 식이 만들어 낸다는 유식사상의 책들.............유감스럽게도 일본 책의 번역서.

 

159-160.영화 매트릭스/인도 대승의 양대 학파 중 하나이며 인류역사에서 인간의 의식구조를 가장 심도 있게 고찰한 유식학파의 일체 법은 오직 (컴퓨터)이 그려내는 표상(프로그램화 된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유식학파의 수행자들은 치열한 요가 수행을 통해 전생의 업이 인간의식 어딘가에 거친 강물처럼 흐르고 있음을 직접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의식이 전5식과 제6의식과 이기식인 제7말라식을 지나 제8아뢰야식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생의 업이 어떻게 저장되며, 어떤 메카니즘으로 현세에 발현되는지, 아뢰야식에 의해 인간이 어떻게 현시를 왜곡해 그리는지를 정치한 이론으로 정립시켰다.

불교란 신령의 계시나 믿음의 구호에 의존하지 않는, 오직 인간의 경험, 누구나 할 수 있는 심오한 경험에 바탕을 두어 이론을 구축했기에 신과 안녕을 고하고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유식학파의 실질적 설립자인 세친(무착은 그의 형)의 저서를 읽다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160.

해탈을 얻기 위한 선정 수행도를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말. 남방불교의 수행법인 위파사나 수행법. 허상을 바로 보고 실상은 제대로(있는 그대로) 보는 자, 붓다라고 한다.

 

163.불가에서는 흔히 욕망이 강한 자에게는 不淨觀, 잡념이 많고 마음의 동요가 심한 자에게는 數息觀을 닦으라고 가르친다.

 

168.의식은 고요하고 투명해야 하지만 버려라라는 말은 지혜의 기반이 되는 바른 이성까지 무시해버리는 이미지를 주기에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175.삶은 죽음을 의존해서 살아가고, 죽음에 기대어, 관계 맺음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이다. 시작과 끝이 정해지지 않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 현현되는 우주다.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나 無明에서 시작되는 일련의 관계 속에서 나고 죽고 윤회하는 중생들이다.

 

176.경험에 바탕을 둔 완벽한 불교 이론과 논리가 너무 좋았다.

 

184.더욱 더 깊어지는 기도 삼매 속에서 어떤 것도 이곳에 없다고 느끼는 무소유처를 넘나들 것이며, 관념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언어로서는 표현될 수 없는 삼매의 경지인 非想非非想處에 들겠지. 그리고 이러한 수행과 자비의 실천과 붓다의 지혜들이 쌓이고 쌓인 그 언젠가, 그것이 이번 생이 될지, 다음 생이 될지 알 수 없지만, 땅도, 물도, 바람도, 공무변처도 없고 식무변처도 무소유처도 비비상비상처도 없는, 이생도 내생도 없고, 해와 달도 없는,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머무르는 것도, 죽음이라는 것도 생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발 디딜 틈도 작용도 없고 대상도 없는, 그야말로 고통의 끝이라고 붓다께서 선언하신 想受滅定에 들어 지혜를 얻어 완벽한 해탈에 이르리라.

그것은 세속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선정의 절정에서 체득할 수 있는 어떤 것‘, 그들은 지혜의 소유자가 되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천둥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리라.

 

185.불교는 인간의 실천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며, 그래서 구름 위에 앉아있는 신들이 필요하지 않지만 행위의 시작과 끝을 찾아보는 수행 없이 성립할 수 없다. 수행도를 하면서 이론까지 공부하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달마의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188.불교에서 신이란 인간과 다른 삶의 한 형태로서 전생의 선업의 결과, 신이라는 존재가 되었을 뿐, 그들 역시 선업이 다하면 다시 윤회하는 존재일 뿐이다. 즉 해탈을 목표로 하는 불교에서 그런 신들은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긴 했어도 궁극적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므로 불교도가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귀의할 존재는 아니다.

 

196.인도에는 기원전 2,300~1,800년경,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를 중심으로 고도의 번영을 구가한 도시문명인 인더스문명이 존재하였다. 주인공은 현재 남인도에 거주하는 드라비다족의 선조로 추정된다. 이 문명이 멸망해갈 무렵인 기원전 1,500년경, 인도-아리안들이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펀잡지방으로 진입하여 선주민인 드라비다족을 정복하고 그들의 성전인 <리그베다>를 편집하여 인도사상사의 개막을 알렸다. 이들 아리안족은 남러시아 코카서스산맥의 북방에 거주하던 유목민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의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 여러 민족의 기원이 되었고 일부는 인도와 이란으로 들어갔다.

 

197-200.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인도 불교는 한역의 동아시아보다 같은 언어 계통인 유럽인이 독해를 더 잘할 수밖에 없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시구로 유명한 숫타니파타 등의 초기 경전의 복원작업은 리즈 데이비스가 1881년에 설립한 팔리성전협회의 노력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음을 불교학계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일본 뷸교학자인 다카쿠스 준지로의 <大正신수대장경>은 우리의 고려대장경을 참고했지만 오늘날에는 한역경전을 인용할 때 사용하는 세계표준이 되었음을 안타까워해야 한다.

 

202-204.1900. 5. 26. 도교 수행자였던 道士 왕원록(1851~1931)은 황무지 둔황까지 흘러들어와 막고굴을 관리하며 지내다가 1900526일 동굴벽 너머 내부에서 세기의 대발견을 하게 된다. 이것이 둔황의 고문서. 사방 3m의 방에 가득 찬 고문서들. 이 중에 신라 혜초(704~787)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들어있었는데, 이것을 1915, 앞에서 언급한 <대정신수대장경>의 편찬자인 일본 불교학자 다카쿠스 준지로가 연구를 통해 혜초 스님이 신라 출신임을 밝혀냈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세계 몇 대 여행기라며 너무나 뿌듯해하는 <왕오천축국전>이 우리 선조의 작품이라고 밝혀졌을까? 아찔한 상상을 해본다.

 

207-208.스스로 불상을 자기 집에 봉안하여 일상 속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익혀 나간 쇼펜하우어(1788~1860)는 당시 서구 철학자 중 유일하게 불교를 철학적으로 이해하여 서구 철학계에 불교를 소개한 철학자였다. 그의 역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에서 만일 나의 철학의 결과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불교라고 생각한다.”고 역설했을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다. 그의 철학적 사고는 훗날 노벨문학상 수장자인 토마스 만과 니체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은행원으로 평생을 팔리어 경전의 독일어 번역에 바친 외로운 역경가 노이만에 대해, 훗날 불교에 심취했던 대문호 헤르만 헤세는 노이만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불경 번역도 노이만의 역경에 견줄 수 없다. 그 부드럽고, 축제 같고, 경건한 부처님의 설법을 독일어 문체로 탁월하게 묘사함으로써 마치 곁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듯하다고 경탄했다.

 

228-229.중국 불교는 <능가경>, 한국은 <화엄경>, 일본은 <법화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우리의 화엄사상은 의상 대사와 원효 대사가 원조이다.

 

231.<반야경>을 필두로 하는 많은 경전이 공통적으로 선양하는 사상을 깊게 체득하여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다고 추앙받는 분이 나가르주나, 즉 용수(龍樹) 보살이었다.

 

235-240.대승불교의 대표 경전인 <화엄경>의 대미를 장식한 입법계품, 그 속살 속으로 들어가 보자. 문수보살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 수다나(선재동자)가 매우 뛰어난 법기임을 알아보고 대승의 바른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선지식들을 찾아 떠날 것을 권한다. 이에 선재동자는 보살도는 무엇인가?’라는 보리심을 일으키고 나서 53인의 선지식들을 차례로 찾아가서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보살행을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실천해야하는가?’하는 점에 대해서 묻고,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마침내 자비의 상징인 보현보살을 만나 깨달음을 완성한다는 내용이다.

선지식 중 가장 흥미로운 사람은 바수밀다인데 26번째 선지식으로, 유곽의 여인으로 나타난다. 선재동자를 만나서 들려주는 그녀의 설법이다. 이 설법으로 유곽을 찾아오는 중생들의 음욕심을 끊는다.

 

그대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이름은 탐욕의 경계를 여읨이지요.

-------------------------------중략-----------------------------

이와 같이 탐욕을 물리치는 경계에 머물러 보살의 온갖 지혜가 앞에 나타나는 걸림 없는 해탈에 들어가게 되지요.“

 

보살이란 다른 이의 아픔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대자비와 집착을 떨쳐내는 의 이치를 깨달은 밝은 지혜의 두 날개로 자유를 얻은 이들이다. 대승의 보살은 수많은 전생에서 수행과 복덕을 통해 다음 생에서는 윤회의 덫을 끊고 그 자신 어떤 산란한 미혹도 끊은 붓다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흙탕 같은 속세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을 외면할 수 없어 붓다가 됨을 잠시 미루고, 다시 보살로 태어나 인간세상에서 같이 뒹구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247.대한불교조계종 해동화엄 종찰 부석사-선종의 대표인 조계종과 교종의 대표인 화엄종이 함께 있는 부석사. 화엄경의 주불은 아미타불(무한한 생명의 붓다)이 아닌 비로자나불(우주에 충만한 빛)이다.

 

256.산스크리트어는 표음문자, 한자어는 표의문자로 근본적으로 문자체계가 다르다. 그러므로 번역을 통하여 본래의 뜻을 나타내기가 매우 어렵다. 사실 언어구조가 너무나 닮은 일본어와 한국어를 번역하려 해도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은 단어가 존재함은 당연한데 그 구조가 너무나 다른 산스크리트어에서 한문으로의 번역이란, 더구나 인도인의 사상 속에서 발전한 불교라는 심오한 이론을 담은 신스크리트어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상대 외국어 및 해당 경전의 내용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이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모르고서는 절대 매끄러운 번역이 될 수 없음은 상식이다. 그래서 상대 언어 및 경, , 논장의 삼장등 불교교리에 정통한 역경승에게 삼장법사라는 칭호를 부여한 것이다. 인도까지 그 먼 길을 찾아간 <서유기>의 현장, 푸른 눈의 불운한 구마라집, 진제, 불공 등이 있다.

 

258.위와 같은 이유로 교상판석(敎相判釋), 자신들이 속한 종파가 따르는 경전을 붓다의 최고, 최후의 가르침이라 하고, 나머지 경전들은 최고 가르침에 이르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가르침이라는 식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인해 해석의 차이가 너무 심해 서로 충돌하는 면이 많았다. 하여 학구열에 불타는 현장법사는 오직 숭고한 구법의 열정으로 특히 유식불교를 직접 몸으로 배워오겠다는 결심으로 당시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서역행을 결심하고 인도 유학을 떠났다.

 

268.푸른 눈의 서양인 쿠마라지바(鳩摩羅什), 중국으로 을 패스하다

쿠마라지바는(344?~413?)는 당시 실크로드에 위치한 타클라마칸사막의 북쪽, 지금의 신장 위구르자치구의 쿠차국의 왕자로 승려였다. 평생 총 74384권의 경전을 번역했는데 공로가 너무 커서 그 이전의 번역을 구역, 이후를 신역이라고 붙였다.

인류사상사, 특히 수학과 과학에 있어 획기적인 개념 전환을 가져온 아라비아 숫자 0, 은 산스크리트어로 순야라고 하며 인도인들이 아랍인들에게 전해준 것이다. 이 순야가 가진 오묘한 뜻을 사상적으로 발전, 강조한 것이 대승불교의 출발점인 반야경전이다. 이 공사상이 중국인들에게 전해졌을 때 중국인들에게 낯선 공 개념은 자신들에게 익숙했던 노장사상의 로 돌렸고, 쿠마라지바 이후 열반이라는 단어로 정착된 니르바나는 역시 노장사상의 無爲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입적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번역에 오류가 있다면 나의 혀는 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의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유해는 역경에 매진했던 소요원으로 옮겨져 다비식을 가졌는데 그의 혀는 타지 않았다고 <고승전>나집전에 전한다. 그만큼 그의 번역이 정확했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283-288.<반야경>, 의 혁명을 선언하다

붓다가 가르친 모든 현상이 끊임없이 생멸 변화한다라고 하는 無常無我의 교리는 불교와 절대불변의 실체를 상정한 다른 인도 사상을 구분 짓는 기준점이라 할 정도의 불교의 독특한 교리였다.

우리들의 사고는 언어를 통해 나타나고 이해된다. 즉 우리는 언어로써 모든 것을 개념화 시킨다. 그럼 언어, 命名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정확히 표현하는 타당한 인식의 근거라고 할 수 있을까?

바람이 분다

바람은 원래 불고 있는 것바람이라 하므로 바람이라는 말에는 불고 있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바람이 분다불고 있는 바람이 분다라는 의미가 되고, 이것은 중복의 오류에 빠진다.

그럼 반대로, ‘바람에서 불고 있는의 의미를 제거하고 그 대신 불고 있지 않는이라는 의미로 바꾼다면, ‘불고 있지 않은 바람이 분다가 되므로 현실적 상식에 반하는 오류에 빠진다.? 따라서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언어화되는 것은 불완전하며 일시적인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절대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우주현상의 본질과 일체법의 모든 것은 이어야 한다. 이런 일체법의 空性을 선언한 소수의 불교도들은 스스로를 대승불교라 칭하며, 진정한 지혜인 반야(般若)는 공의 체득을 바탕으로 이루어짐을 주장하며 붓다의 가르침은 실재하는 요소들에 의해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실재조차 임을 담대하게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 혁명선언서가 바로 <반야경>이었다.

그렇다면 나가르주나는 무엇을 근거로 <반야경>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을까? 그것은 바로 프리티트야-삼웃트파다, 연기緣起였다. 은 붓다가 설하신 연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290.<중론> 2418게는, 연기하고 있는 것, 그것을 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서로 서로 의존하여 일시적으로 假說된 것이며, 그것이 다름 아닌 中道이다. 19게는 어떠한 것이든 연기하지 않고 생겨날 수 없으며 어떠한 것이라도 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현상은 연기되어 있으므로 공이고 중도임을 나타낸 게송이다.

 

292.인식 존재의 이유

눈과 대상되는 사물의 형태가 접촉되는 것에 의해 이라는 의식이 생기는 것이고, 코와 향기는 맡음. 그래서 연기라고 漢譯한 것이다. 남녀 사이에 쓰는 만남의 인연이 있다 없다 할 때 쓰는 단어가 아니다.

 

293.나가르주나(용수 보살 : 2의 붓다라 일컬어진다), 연기를 깨달아 공을 채우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게 되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流轉門 : 順觀어떻게 미혹한 세계가 형성되는가를 설명).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還滅門 : 逆觀어떻게 미혹한 세계를 극복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이는 것).

 

 

302-303. , 떠나가는 자에게 떠남은 없어라/無常

이미 떠나 가버린 자에게 어찌 떠남이 남아 있을까

아직 떠나가지 않은 자에게 어찌 떠남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이란 머물 수 없는데 어찌 지금 떠나가고 있는 자에게 떠남이 있을까

만남도 떠남도 그 무엇에게 실체가 있을 것인가

()이로다. 모든 것이 공이로구나. 집착해야 할 고정불변의 실체란 없는 것임을

 

뱀이 허물을 벗듯

흐르는 물에 눈이 내리듯

 

317-319. 緣起의 이치/인식작용

나의 마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고요해진 마음에 눈을 감고 나를 바라보려 할 때, 그 짧은 시간에도 쉬지 않고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게 잡념이 흘러 나왔다. 잡념은 수미산보다 컸고 번뇌는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보다 많았다. 모두가 무시(無始) 이래 전생에서부터 흘러 흘러 들어온 집착이 그려내는 진실하지 못한 모습들뿐이었다. 그렇게 일어나서 생기는 것들은 규칙도 정해짐도 없었다.

반야의 지혜란, 내가 이끌려 다닌 그 마음의 움직임에 실체가 없음을 알고, 그것이 공함을 깨달아 그러한 마음의 이끌림에 이라는 집착을 버리는 것이었다. 지혜를 얻지 못함이란 그러한 마음에 이끌려 한평생, 몇 억 겁의 윤회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청정한 계율을 몸에 익힌 뒤, 스승이 가르쳐 준 대로 모든 일에 마음을 묶고, 의식을 집중하고 우주보다 넓은 마음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가르주나(용수 보살)는 세상 모든 것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나의 여섯 감각인 눈, , , , 피부, 의식이 각각 그 대상인 형태, 소리, 향기, , 감촉, 생각과 어우러져 빚어낸 하나의 실체 없는 이름일 뿐임을 체득하게 되었다./인식작용

존재란 그렇게 여러 원인과 그 원인이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 어우러져 생겼다가 사라져버림인데 그것을 모르고 그 명칭이 실재하는 것이라 믿어버렸다. 거기에서 이라고 하는 집착이 생겨버렸다.

마음이 만들어낸 무언가와 거기에 대한 집착, 그 둘은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가 없어지면 나머지 하나도 사라져버리고 마는, 서로 동일물은 아니지만 둘도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緣起의 이치였다.

그래서 떠남이라고 하는 성질을 가진, 떠남이라는 고정불변의 그 무엇이란 없었다. 그것은 마음이 만든 떠남이라는 실체화일 뿐이었다. 실로 고정되어 있는 떠남이란 없는 것임에도······

이미 떠나 가버린 자와, 아직 떠나지 않은 자, 그리고 지금 떠나고 있는 자, 나가르주나는 지금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시(三時)에 나눠 떠나는 작용이라는 실체에 대해 분석해보았다.

떠나간다는 정지한 것이 아닌 움직임이고, 따라서 그 움직임이 끝나버린 과거에는 이미 그 움직임이 있을 수 없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떠나가버린자에게 떠남이 있다면 그는 아직 떠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과거형 떠나간다는 논파되었다.

아직 떠나가지 않은 것은 당연히 떠남이 아니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어떻게 사라졌다 하겠는가. 그렇게 미래형 떠나간다도 논파되었다.

지금떠나가고 있는 것은 사라짐이 아니다. 떠나감이라는 움직임은 현재형으로 옳은 듯이 보이지만, 현재라는 것 자체가 파악할 수 없는, 머물 수 없는 우리가 만든 개념일 뿐이었다. 설사 지금이라고 파악하고 느낀다 하여도 그 순간 이미 과거의 움직임으로 변해갈 뿐이었다. 그러한 지금이 없는데 어떻게 지금 떠나가는 자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을까. 실체가 아닌 개념일 뿐이었다.

 

321-323. 중도의 길/독화살의 비유/중도와 無記의 관계/여기서 중도의 의미를 눈치채야 한다

어느 날, ‘존재의 근원은 유일까 무일까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은 제자가 붓다에게 물었다.

깨달은 자여,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달았다고 칭송받는 스승이시여, 어리석은 나의 질문에 답을 주소서.

이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인지, 아니면 영원하지 않은지.

이 우주는 공간적으로 한계가 있는지, 아니면 무한한지.

영혼과 신체는 동일한지 아니면 다른지.

당신과 같은 깨달은 자는 죽은 뒤에는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해 아직 명쾌한 답을 들어본 적이 없사오니 깨달은 자의 견해를 일러주소서.“/불교의 14無記를 검색해 보시게.

언제나 이름 있는 철학자들, 사상가라 칭하는 자들이 입에 올리기 좋아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좋은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물음에 대해 붓다의 대답은 비유로부터 시작되었다.

독화살에 맞아 죽음에 임박하여 괴로워하는 이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독으로 인한 상처의 치료이지 독화살이 날아온 방향이나 독화살을 만든 자에 대한 탐구가 아니듯, 죽음 이후의 존속 여부가, 이 우주의 영원함 여부와 유·무한이, 지금의 삶과 수행의 길에 있는 그대에게 어떤 도움을 준다는 말인가?

언제나 신의 입을 빌려서만 이야기되는 이러한 질문은 바른 지혜를 알아감에 무익한 사색이며, 해탈과 상관없는 질문이다. 만약 이러한 물음에 대해 까달은 자의 이름으로, 혹은 신의 이름을 대신하여, 사후 영혼의 존재, 우주의 유·무한이 반드시 있다라고 답을 내려준다면 어리석은 자들은 그저 존재함이라는 극단에 빠질 것이며, 만약 없다라고 답을 내려준다면 어리석은 자들은 그저 없음이라는 또 하나의 극단에 빠질 뿐이다. 이들 두 극단에서 자유로워진 중도(中道)를 붓다는 가르칠 뿐이다. 그리고 그대, 사랑하는 수행자여, 붓다의 지혜란 중생들의 과거를 알고 미래를 예언함을 일컫는 말이 아니요, 사후 존재의 있고 없음을 알려주는 말도 아님을, 그대 사항하는 수행자여 알아야 하느니.

그래서 그대, 관념의 유희에 빠져 있는 안타까운 수행자여.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지혜란, 끝없는 번뇌 속에서 괴로움의 윤회를 반복하는 가엾은 중생들을 위해, 저 길은 인생의 고통이 계속되는 길이며, 이 길은 대자유의 해탈을 얻는 길임을 가르쳐주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323-325. 의 완성-촛불의 비유

씨앗에서 싹이 나와 나무가 되면 씨앗은 싹과 다른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처럼 붓다는 집착의 원인이 되는, 이 세상 그 무엇도 있다, 없다, 동일하다, 다르다는 양 극단의 사고 논리를 떠나, 모든 것은 원인과 환경이 서로 이어져 끊임없이 변해가기에 동일하지도,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고, 새롭게 생겨남도 완전히 사라짐도, 또한 하나도, 그렇다고 둘도 아닌 연기(緣起)를 바르게 볼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렇다면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저 떠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명칭, 이름, 곧 언어였다. 이 일상의 세계로 굳어버린 일시적인 약속일뿐이었다. 해탈도 열반도 모두 언어였다. 거기까지였다. 거기까지만 인정하면 되는 것이었다. 뗏목의 존재 의의는 분명히 있다. 강을 건넌 이후까지 계속 뗏목을 가지고 갈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 사는 이 세상의 언어활동을 전부 거부하는 극단에 빠져서는 아니 되었다. 그렇게 언어의 효용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무지한 우리들은 약속에 불과한 언어의 본질을 넘어, 그 언어가 성립하기 이전에 고정불변의 추상적인 무언가가 그 배후에 앉아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고통과 집착의 출발이었다.

붓다는 달랐다. 밝음과 어두움이 각각의 불변의 성질을 갖고 있다면, 어찌 등불을 켜는 순간 어둠이 사라지겠는가?/나는 여기서 무릎을 쳤네만

이 우주란, 모든 것이 서로 이어져 서로에게 원인이자 결과가 되어 주었다. 서로 만났다가 헤어짐을, 매듭졌다가 풀렸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우주의 본 모습은 신이 아닌 연기(緣起)였다.

어둠이 없는데 어찌 밝음이 있겠는가.

밝음이 없는데 어찌 어둠이 있겠는가.

그것은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어둠은 밝음이 있기 위해, 밝음은 어둠이 있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어둠과 밝음은 서로 다르다고도, 그렇다고 동일하다고도 할 수 없는, 의존되어 연기되어 있는 존재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로 변해갈 수 있음은 불변의 무언가로 꽉 채워져서가 아니었다.

그래서 사물의 이치는 공()이었다.

 

327. 나가르주나(龍樹 보살) <마드야마카 카리카> 첫 머리

사라져버림도, 새롭게 생겨남도

단절되어버림도, 영원함도 아니다.

 

같은 것도,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또한 사라져가는 것도 아님을

 

모든 언어들의 유희에서 벗어난, 참으로 아름다운 진리인

모든 것은 서로서로 만났다 흩어져가는 연기의 진리를 가르쳐주신

모든 깨달은 이들 중 가장 거룩하신 붓다, 나는 그 분께 귀의하옵나이다.

 

14.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