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크리슈나-신화가 되어 버린 위대한 영혼/로맹 롤랑
라마크리슈나의 생애는 실로 하나의 종교 이야기이다. 그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직접 신을 만나게 한다. 누구든 그의 삶과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오직 신만이 실재하며 다른 모든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신의 화신(化身)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어떤 배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삶의 바다에서, 진정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감동을 준다. 오늘날에도 그의 가르침은 그지없이 혼란스러운 우리에게 찬란한 빛과 생생한 믿음을 줄 것이다. 그의 생애는 비폭력의 산 증거였다. 그의 사랑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향해 흐른다.
-마하트마 간디
라마크리슈나는 인도의 종교가·사상가로, 불타(佛陀), 샹카라(Shankara)와 함께 인도의 3대 성자로 꼽힌다. 사망 이후 그의 제자들은 인도 각지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각국과 영국·미국·프랑스 및 남아메리카 등지에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설립하여 그의 종교를 계승하였다. 특히 스와미 비베카난다는 스승의 종교 사상을 세계 여러 곳에 전파했다. 라마크리슈나의 업적은 힌두교의 전통을 현대에 살려 인도 사람들의 자신감을 고취시킴과 동시에 모든 종교의 조화를 설파, 인류협동의 이상을 드높였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의가 부여되고 있다
머리말
나는 모든 신앙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라마가 진정 내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내가 그를 신의 화신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존재 속에서 신을 본다. 나는 온 우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을 가장 작은 미물 안에서도 본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다.
종교적이라 자칭하는 자들은 사면의 벽 안에 칩거하면서 사원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틈만 나면 그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적 삶을 부정하려 한다. 그런 반면에 자유사상가들은 대개 종교적 이해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종교인들에 맞서 투쟁하고 그들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다. 그러나 이미 긴 세월 동안 이끼로 뒤덮여버린 고문서를 갖고 벌이는 종교적인 토론은, 그것이 진짜 역사이든 거짓 역사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고뇌 속에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된 이 비극적인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비애로 가득 찬 하나의 인격적인 신을 믿지 않는다. 창조는 매순간 새롭게 일어나며 종교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는 행위이고 전진하는 의지이며 샘솟는 물이다. 그것은 결코 흐르지 않는 연못이 아니다. 우리는 종교와 신앙의 신들을 볼 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 거인 키클롭스가 아닌 두 눈을 가진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1장 유년 시절의 복음
라마는 1836년, 인도 벵골의 둥그런 마을, 카마르푸쿠르의 전통적인 브라만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화 같은 얘기지만 그의 탄생 신화는 인도의 가장 중요한 신, 비슈누가 나타나 “내 세상을 구원하고자 다시 태어나리라.”는 계시를 받고 태어났다. 발랄했던 라마는 1842년 7살 때, 황홀경에 빠져 무아경에 이른 경험이 있었다. 신의 계시는 여러 가지 길을 통하여 나타난다. 요컨대 어떤 간절한 대상에 대한 사랑 혹은 염원, 극기, 성실하고 사심 없는 봉사, 자비, 명상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그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길은 모든 것에서 신의 아름다운 면모를 보는 것이었다. 8살 때는 시바 축제 때 연극에서 시바 역을 맡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시바에게 사로잡혀 환희의 눈물을 흘리고 신의 축복 속에서 자신을 잃고 의식을 잃었으며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 소년에게 무아경의 체험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났다. 서양에서라면 정신병원에 가야 할 체험 때문에 주변의 걱정은 많았지만 죽지 않고 자랐다.
제2장 어머니 칼리
칼리라는 여신을 모시는 사원에 성직자의 직책을 맡은 것은 20세 때였다. 당시는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여주인 칼리를 섬기기로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젊은 성직자는 마법에 걸린 듯 십 년의 세월을 그 여주인의 품 안에서 보내야 했다. 왜냐하면 수많은 환영의 태풍이 몬순 기후의 영향을 받은 회오리바람처럼 사원 안으로 몰아쳐 들어오곤 했기 때문이다. 힌두교와 이슬람교도를 포함하여 수많은 순례자, 사두, 성직자, 그리고 그저 신에 미친 사람들이 끊임없이 사원을 찾아오곤 했다.
개신교도이건 가톨릭교도이건, 유럽의 신자들에게 가장 놀라운 부분은 아마도 인도의 신앙인들이 체험하는 종교적 계시의 강력한 구성체일 것이다. 훗날 수제자 비베카난다가 스승 라마에게 물었다.
“스승께서는 신을 보셨는지요?”
라마는 이렇게 답하였다.
“나는 지금 내가 그대를 보고 있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또렷하게 신을 보고 있다”
라마의 이러한 답변은 신이 어떤 비인격적인 추상적 존재가 아님을 암시해준다(물론 라마는 후에 비인격적인 신도 실현했다).
라마에게 그녀는 한결같이 인각된 웃음을 띠고 기도를 흠향하고 있는 조상(彫像)이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 있었고 숨을 쉬었으며, 잠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들고 다니며 먹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곤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라마는 칼리의 가시에 찔리게 된다. 그녀는 라마에게 열정만을 심어놓은 채 사라져버렸고 다시는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여신을 향한 그의 열정은 오직 자신만을 새까맣게 태우고 있었다.
종교의 나라 인도에는 법열의 체험으로 이끌어주는 상세한 체계로서 수세기에 걸쳐서 의학과 신학의 세밀한 부분까지 꼼꼼히 포함된 가르침이 전해내려 오고 있었으나 그는 그런 것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그는 맹목적인 열정으로 그녀를 찾았으나 전혀 인도를 받지 못하여 그의 고양된 상태는 열정의 극한까지 가는 위험천만한 상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는 의식을 진행하는 도중에도 무의식 상태에 빠지거나 갑자기 쓰러져 넋을 잃고는 했다. 그럴 때면 마치 간질을 앓는 것처럼 온몸의 관절 마디마디가 뻣뻣해지면서 석고처럼 굳어버렸다. 때로는 여신과의 놀라운 일체감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피부를 뚫고 온몸에서 핏방울이 스며 나오고 그의 몸 전체가 불타는 듯 했으니 그의 영혼은 용광로였으며, 그 용광로에서 피어나는 불빛, 그것은 신이었다. 라마는 그러한 신체와 정신의 이상을 의사의 처방에 따라 치료를 받았으나 소용없는 짓이었으며 마침내 ‘신들린 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침몰하지 않은 채 마침내 폭풍의 곶을 통과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의 영혼이 폭풍의 곶에서 기쁨과 조화로 충만한 힘을 얻어 결국 인류를 위해 위대한 실현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때의 환상적인 체험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영적 도취와 절망을 오가면서 2년의 세월을 보낸 뒤, 마침내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제3장 앎으로 이끌어준 두 인도자
이때까지 라마의 영혼은 굉음을 내며 흐르는 급류와 소용돌이를 무작정 견뎌가며 방향도 목적도 없는 채로 홀로 헤엄치는 꼴이었다. 그는 거의 익사 직전에 있었는데 그제야 그의 앞에는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났고, 그들은 라마의 머리를 강물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강을 건널 때는 물의 흐름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한 사람은 벵골의 브라만 귀족에 속한 브하이라비 브라마니라는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신이 직접 라마를 게시해주며 메시지를 전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왔다고 했다. 그는 그녀를 신뢰하여 신을 찾는 과정에서 겪은 모든 경험, 고행, 정신적 · 신체적 고뇌를 털어놓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미친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하고 근심스러운 어조와 겸손한 태도로 그들의 말이 옳은지를 물었다. 그녀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바크티 경전에 기술된 가장 높은 경지의 단계인 사다나에 도달했음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의 고통은 단지 그의 성장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뿐이며 그의 건강을 돌봐주고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일깨워주었다. 그녀의 보살핌을 받은 그는 더욱 열중하여 마침내 조금만 집중해도 신의 현존을 느끼고 볼 수 있었다. 마침내 그의 존재는 신비한 음악으로 채워졌으며, 물질세계는 사라졌다. 이를 사비칼파 사마디(초의식적 무아경의 상태)라고 하는데 이 경지는 영혼이 여전히 내적인 사고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생명이 신과 함께 있음을 누리는 단계이다. 다음은 니르비칼파 사마디(불멸의 무아경의 상태)로 절대적인 합일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각의 멈춤;이 가까워졌음을 뜻하며 이러한 궁극적인 합일은 완전한 포기와 헌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라마는 모든 사람들이 산정상이라 생각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믿었지만 거 가파르게 솟아있는 최후의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브하이라비의 능력은 최후의 도약으로 이끌기에는 부족했으며 그녀는 결국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
69.힌두 사상에서의 깨달음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인도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고 수세기에 걸쳐 시험되고 적절하게 기록된 것으로 과학적인 방법과 주의 깊은 실험에서 얻어진 일종의 논리적인 결과물이다.
70.우리는 오직 하나인 브라흐만의 존재를 깨달을 때까지 마야, 즉 시간이라는 관념조차 초월한 환영에 홀려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불변의 실재라고 여기는 것들은, 실은 보이지 않는 원천 혹은 하나의 실재에서 생성하여 끊임없이 스쳐가는 상의 흐름일 뿐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길, 혹은 무기가 있는데 첫 번째는 ‘아니다! 아니다’의 길로서 이지적인 지식만을 신뢰한 채로, 철저란 부정을 통한 지식의 길이며 ‘즈냐니의 무기’로 불린다. 둘째는 ‘그렇다! 그렇다’의 길로 사랑을 증폭시킴으로써, 점진적인 긍정을 통한 지식의 길이며, ‘바크타의 무기’로 불린다. 라마가 맹목적인 본능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걸어간 길은 후자다.
77.1864년이 저물어갈 무렵, 라마가 인격적인 신을 성취했던 바로 그때, 드디어 비인격적인 신의 사자(使者)가 아직 자신의 사명을 모르는 채로 다크시네스와르에 도착했으니 그는 뛰어난 베단타 금욕자이자 떠돌이 승려로써 법명은 도타푸리였으며, 그는 40년 동안의 수행을 거쳐 궁극적 계시에 이른 해방된 영혼으로서 세상의 환영을 무심한 시각으로 꿰뚫어보았다. 둘이 처음 만나던 날, 토타푸리는 지나던 길에 언뜻 라마를 보았으며, 라마는 사원의 계단에 앉아 남모르는 견신의 행복 속에 녹아들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토타푸리의 마음이 움직여 “나의 아들이여, 그대는 이미 진리의 길을 멀리 여행하였구려. 그대가 원한다면, 나는 그대를 다음 단게로 이끌어줄 수 있ㅇ소. 내게 베단타를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소?”
라마는 승낙하고 먼저 입문 시험을 거쳐야 했다. 첫째 조건은 그의 모든 특권과 장식, 성직자의 직위를 포기하고 브라만임을 상징하는 끈마저도 풀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이미 라마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크나큰 노력과 말할 수 없는 고통 끝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연결된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는 그 문턱을 넘자마다 저 궁극의 장, 주체와 대상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리는 경지인 니르비칼파 사마디(三昧)에 도달했다.
“만물이 사라져버렸다. 공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엔 사념의 그림자들이 마음의 희미한 저편에서 떠올랐다. 흐릿한 자아의식만이 단조롭게 똑딱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것마저도 멈추었다. 오직 존재만이 남았다. 영혼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원성이 사라지고, 유한과 무한은 하나였다. 언어를 넘고 사념을 넘어 그는 그저 브라흐만일 뿐이었다.”
토타푸리가 40년에 걸쳐 성취한 것을 라마는 단 하루만에 실현하고 그것을 뛰어넘었다. 오히려 스승과 제자 사이가 바뀐 것이다.
88.라마는 제자가 된 토타푸리의 두 가지 경험을 이렇게 요약했다. “절대의 존재를 비활동적이고, 창조도, 유지도, 파괴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면 나는 그를 브라흐만, 푸루샤, 혹은 비인격적인 신이라 부른다. 인격적인 신과 비인격적인 신이 있어 그 차이는 그들이 다른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은 결국 하나다. 우유와 그 흰 빛깔, 다이아몬드와 그 광채, 혹은 독사와 그 몸짓(독)이 하나이듯 하나를 나머지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성스러운 어머니와 브라흐만은 하나이다.”
제4장 절대와의 합일
89.라마가 깨달은 이 위대한 사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도의 정신은 수세기 동안 이러한 사상 위에서 성장해 왔으며 베단타 철학에 의해 끈임없이 조형되고 심화되고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쳐 왔다. 이 사상은 위대한 두 베단타 학파, 즉 절대적 일원론을 주장하는 샹카라 학파와 제한적 일원론을 주장하는 라마누자 학파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된 주제였다. 전자의 절대적 일원론은 우주가 비실재적이고 절대자만이 유일한 실재라고 주장하는 반면, 후자의 상대적 일원론은 브라흐만을 유일한 실재라고 인정함과 동시에 현상의 세계와 개체적 영혼들도 헛된 것이 아니라 브라흐만의 속성을 반영하는 존재로 인정한다. 따뜻하고도 유연한 본성을 가진 라마의 입장은 라마누자의 회유적인 해결책에 기울어져 있으며, ‘절대’가 순수한 지성의 결정체라고 하더라도 일원론적인 개념 하에서는 지적으로 추구할 대상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반론에 샹카라는 이렇게 답한 바 있다. “태양은 비출 대상이 없어도 (스스로) 빛난다.” 그러나 람의 표현은 이와 다르다. 그는 태양을 다음과 같이 여러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것은 악한 자에게나 선한 자에게나 똑같은 밝기로 비친다. 그것은 등불의 빛과 같은 것인데, 누군가는 그 빛으로 성전을 읽고 다른 이는 위조죄를 범할 수도 있다. 그것은 개미들 앞에 놓인 설탕덩어리와 같다. 개미들은 약간의 부스러기만 먹을 뿐이지만 배가 부르면 다 먹어 치운 것처럼 여긴다. 또 우리는 바다의 깊이를 재려고 하는 소금 줄자와 같다. 소금 줄자는 바다에 넣자마자 녹아 없어진다.
라마는 영감에 의해 쓰인 성전도 이미 사람의 입을 거쳤기 때문에 다소간은 더렵혀져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더러움은 실재하는 것인가? 더러움이 존재하려면 그 반대의 개념, 즉 순수 혹은 브라흐만이 먼저 전재되어야 한다. 1882년 라마는 거의 생애의 끝에 있었으며 사상적으로 완전히 정립된 상태였다. 절대적 무한과 순간적으로 접촉하게 되면, 우리와 다른 모든 사람이 개별화된 자아라고 하는 환영이 즉시 사라진다. 그러나 라마는 우리가 세계의 일부분이고, 자신의 본체를 확인하기 위하여 세계의 실재를 인정하는 체험하는 입장에 있으면서, 감히 세계는 실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명백히 지적한다. 정화된 성자라고 해도 삼매에서 깨어나 일상생활의 차원으로 돌아오면 다시 개별화된 자아의 껍질을 입어야 한다. 즉, 상대성의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모든 것이 신이다. 신은 모든 것에 내재해 있다. 신은 빛 속에도 있고 그림자 속에도 있다. 18세기 영국의 필멸론자(mortalist)의 영향을 받은 빅토르 위고는, 태양은 신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만약 라마였다면 그림자도 빛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인도의 다른 모든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라마는 자신의 존재를 통하여 직접 실현해보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믿지 않았으며, 그런 만큼 그의 사상은 생명력으로 충만했다. 그는 ‘관념들’ 조차도 명백하고 구체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파악했다. 믿는 다는 것은 포용하는 것이며, 갓 여물기 시작한 열매를 소중히 간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라마가 그러한 진리를 깨달은 이후로, 진리는 더 이상 그에게 관념이 아니었다. 생명을 얻고, 신앙에 힘입어 다채로워지며, ‘구체화’라는 과수원에서 번성하고 열매를 맺는다. 그는 성체(聖體)를 발견했으니, 그가 맛본 그것이 곧 우주의 본체이며 동시에 모든 식탁과 종교의 본체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님의 만찬에서 불사의 음식을 함께 나누니, 그때 라마는 단지 열두 사도만이 아니라 모든 굶주린 영혼과 만물과 함께 있는 것이다.
라마의 핵심적 사상에 대하여 라마를 이 세상에 묶어둔 것은 육체적인 두려움과 도덕적인 고뇌였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온통 상처를 남길망정, 아무리 불순하고 잔인한 것일지라도 온 세상의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그는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모든 차별상이 곧 신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부류와 신분의 인간 안에 존재하는 신을 사랑했다. 아무리 그들이 적대적이고 악의에 차있다 하더라도, 그는 인간을 서로 대립하게 하는 모든 형식의 사상 속에 존재하는 신, 인간 존재를 사랑했다. 요컨대 라마는 모든 종교가 비록 그 길은 다르지만 같은 신에게로 이끌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종교를 열심히 탐구하고자 했다.
제5장 인간에게로 돌아오다
1866년, 라마가 첫 번째로 탐구하고자 한 것은 이슬람의 종교였다. 라마는 자신의 신들에게 예배드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알라의 이름을 부르고 이슬람교도의 옷을 입었다. 이렇게 다른 세계의 정신에 자신을 완전히 맡김으로써 이 열정적인 예술가의 영적 여행이 항상 그런 결과를 가져왔듯, 마침내 그 뜻이 현시되었다. 엄숙한 얼굴에 하얀 수염을 단 눈부신 인물, 예언자 마호메트가 ‘힌두적 상징을 지닌 브라만’이었던 라마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즉 서로 적대적인 형제였던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들은 일원론의 근거가 되는 ‘무형의 절대적 신’을 통해서만 재통일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에 라마 선교회에서는 히말라야의 깊은 곳에 모든 종교를 위한 광대하고 복합적인 기념물의 주춧돌로서 스승에게 바치는 성전을 세우게 된다.
아무튼 그로부터 7년 후에, 그는 다시 비슷한 체험을 통해 기독교의 영성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화신은 아니었고 붓다와 라마의 관계도 같았다.
후에 그는 제자들에게 “나는 모든 종교를, 힌두교 · 이슬람교 · 기독교를 실천해 보았다. 그리고 힌두교 종파들의 길도 가보았으나 모든 것은 같은 신을 향해 간다고 말할 수 있다.” 신을 보았던 일을 제외하고라도, 라마는 순례의 길에서 더 중요하고 의미 깊은 무언가를 만났는데 그것은 고통 받는 인간의 얼굴을 보았다. 사실 이제까지 그는 금빛으로 칠해진 자신의 성소 안에서 그저 황홀한 최면상태에 빠진 채 살아왔다.
*나는 모든 종교를 실천해보았으나 다른 길이기는 해도 모두가 같은 신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다만 무수한 이름으로 불리는 동일한 신임을 알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그러나 바다로 통하는 강은 많다. 그 한쪽 강에서 힌두교도들은 주전자에 물을 담으며, 그것을 잘이라 부른다. 다른 쪽 강에서 이슬람교도들은 가죽주머니에 물을 담으며 그것을 파니라 부른다. 또 다른 강에서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워터라 부른다. 결국은 바다로 흘러가는데 알지 못하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테오그하르에 도착한 라마는 그곳에서 헐벗고 야윈 사람들이 굶주리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세상으로 나왔다. 그후에 제자들이 세운 라마 선교회는 그러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며 오늘까지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신이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그들에게 은총을 베푼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은총이 아니라 봉사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으로서 경외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신은 모든 사람 안에 내재해 있으나 모든 사람이 신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고통 받는 까닭이다.” 신에 대한 라마의 관념은 더욱더 깊어졌다. 처음에는 신은 어디에나 있으며 만물을 비추는 태양처럼 삼라만상이 그의 품 안에 있다는 개념에서 시작하였으나 이후에는 모든 것이 자신 안에 신을 내재하며 각자는 활동하는 태양들로서 만물이 곧 신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라마의 사상은 사람이 브라흐만, 어떤 의미에서는 신과 같다는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사상을 펼치며 실천에 옮겼다. 그의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브라흐만과 아트만 (범아일여)
브라흐만 – 모든 것. 실재 전체 또는 존재의 본질. 존재하는 만물의 기초. 존재 자체. 우주를 지탱하면서 우주가 성장하고 발전하게 해주는 힘. 베다 종교의 최고의 실재이다.
아트만 – 내 안의 진정한 나. 출가자와 <우파니샤드>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한 불멸의 영원한 자아. 브라만과 동일하다고 믿었다.
베다에서는 광대한 자연의 질서와 운행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신을 이렇게 외면의 세계에서 찾았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는 심원한 내면의 세계에서 신을 찾았다. 그들은 먼저 신으로서 외면의 세계를 지배하고, 일체만유를 생겨나게 한 유일지고한 힘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절대자의 아트만이라고 말하였고, 숭배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신들이 아니라, 바로 이 아트만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절대자의 아트만은 모든 個我에게 있는 아트만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들은 신의 거처는 인간의 가슴 속이다고 하였고, 당신은 브라흐만의 집이다고 하였으며, 우리 개아의 근원인 불멸의 내적 자아(아트만)와 장엄한 우주력(브라흐만)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그래서 ‘브라흐만이 아트만이며, 아트만이 브라흐만이다고 말하여지게 되었다. 우리의 내적 자아와 절대자의 내적 자아가 하나이다‘는 범아일여의 사상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2013.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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