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치명적 농담-금강경 別記/한형조
17.경전의 방대함에 놀란다. 13세기 팔만대장경이 목판 8만 1천장, 일본 신수대장경은 천여 쪽짜리 55권에 2천여 작품.
19.불교는 究竟이 아니라 방편이다. 경허 선사/그 뜻을 얻으면 거리의 잡담도 다 진리의 가르침이요, 말에서 헤매면 용궁의 보배곳간도 한바탕 잠꼬대
61.불교의 프로젝트는 불성, 번뇌와 무지, 반야의 삼각구도
109.열반은 탐욕과 증오, 기만(어리석음?)의 끝이다.
125.인간은 수백 개의 화살이 꽂힌 상처 입은 짐승이다/붓다
151.그의 마음은 항상 비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 있다. 공이란 자기이해와 관심으로부터의 해방. 불교가 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객관적 세계<法界>는 ‘거기 그렇게, 있는 그대로<眞如>’ 역력히 존재한다. 불교는 다만 그것이 ‘자아의 투사로 물든染 주관적 세계我相’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154.각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 속에 살고 있는데 불교는 이것을 相이라 하고, 相이 만든 마음속의 흔적과 찌꺼기를 業이라 한다.
155.우리가 보는 세계는 자아의 그림자라고 한다. 관점에 따라 인간에게는 물이 있다면 물고기에게는 집이고, 화학자는 산소와 수소로 볼 것이고 지옥에서는 고름, 천상에서는 감로수로 볼 것이다.
156.베이컨의 네 가지 우상(偶像)
*설명 - 베이컨은 우상에 관한 논의를 이용해서 학자들이 가지는 잘못된 편견을 지적하고, 이를 비판한다. 그가 지적하는 우상은 모두 네 가지로, 이것들을 다음과 같은 비유적인 이름으로 부른다.
39.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에는 네 종류가 있다. (편의상) 이름을 짓자면 첫째는 '종족의 우상'(Idola Tribus)이요, 둘째는 '동굴의 우상'(Idola Specus)이요, 셋째는 '시장의 우상'(Idola Fori)이요, 넷째는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이다.(48)
[네이버 지식백과] 우상의 네 가지 (베이컨 『신기관』 (해제), 2006.,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162.바라밀
부처가 되고자 하는 이, 즉 보살이라면 누구나 완전하게 이루어야 하는 덕목.
산스크리트 파라마(parama:'최고'라는 뜻)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러한 바라밀의 실천은 보살 수행 기간을 몇 겁에 걸치는 엄청나게 긴 기간으로 늘려놓는 한편 깨달음의 과정을 한 개인만이 아닌 온 세상을 위한 과정이 되도록 했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는 바라밀의 실천이 특히 강조되고 있는데, 통상 육바라밀이 널리 설해진다. 대승 이전의 문헌에서는 십바라밀이 열거되기도 한다.
6바라밀은 보시(dāna-pāramitā:재물을 주는 것,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 공포를 없애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등의 3종이 있음)·지계(śῑla-pāramitā:계율을 지키는 것)·인욕(kṣānti-pāramitā:적개심에서 나오는 행동에 대해 인내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참아내는 것)·정진(vῑrya-pāramitā:한결같이 깨달음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선정(dhyāna-pāramitā:명상으로 정신을 통일하고 안정시키는 것)·반야, 즉 지혜(prajñā-pāramitā:대상에 대한 온갖 집착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깨닫는 것)이다. 10바라밀은 여기에 방편(upāya[kauśalya]-pāramitās:상대방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화하는 것)·원(praṇidhāna-pāramitā:깨달음을 이루려는 굳은 결심)·역(bala-pāramitā:10가지 불가사의한 능력)·지(jñāna-pāramitā:온갖 사물의 실상을 여실하게 아는 것)를 더한 것이다.
164.五蘊(다섯 무더기) : ‘나는 오늘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보냈다‘를 풀어본다
1)두 物體-色-가 있다. 그리고 2)사랑한다는 감정과 슬프고 아쉬운 감정-受-이 있다. 3)눈물을 흘리는 한 물체가 다른 손 흔드는 물체를 지각-想-한다. 4)떠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충동-行-이 있다. 5)이 사건을 의식-識-하는 과정이 있다.
178.태어난 곳과 전법한 곳? 마가다국? 사위국? 사바티?
181.法-객관적 사실, 현상
184-185.갈기 달린 사자처럼, 공포와 두려움이 없는, 당황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그, 나가세나.
그리스의 논리가 불교의 지혜를 만났다. 먼지 없고 흠 없는 다르마 진리. 무엇이든 일어난 성질의 것은, 모두, 멈추게 되어 있다. 나가세나 존자는 그리스 메난드로스王에게 王者의 발식이 아닌 賢者의 방식(계급장을 떼어놓고 만나자는 메시지)으로 만나자는 요청을 하고 王은 흔쾌히 받아들인다./오온에 대한 수레의 비유가 나온다.
191.바지라라는 비구니가 붓다 앞에서 노래한 시
마치, 부분이 모일 때,
‘수레’라는 이름이 생겨나듯이
다섯 가지 요소(五蘊)가 존재하는 곳에
‘어떤 것’이라 부르는 관습이 있네
193.저는 불교가 말하는 無我가 “네 자아란 없다”는 뜻이라기보다, “너무 많은 자아가 있어,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란 뜻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공이라는 중관의 공이 있으며 비유비무의 공도 있다. ‘무아란 모든 사물이 서로 의지하며 지탱하고 있다’라는 존재의 진상을 뜻한다. 그런 경우의 我는 ‘나’라는 인칭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실체’의 뜻이다.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我이며 어떤 무엇에 지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 존재가 완전히 끝나 있는 것이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194.그러므로 단 하나의 얼굴로서의 ‘주체’, 혹은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無我의 뜻입니다. 부처님 자신 “자아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허무주의를 斷見이라 하여 크게 경계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다만 ‘단 하나의 고정된 가면’으로 여기고, 그 역할을 종신 철밥통처럼 ‘단 하나의 고정된 지위’로 간주하는 常見을 부정할 뿐입니다. 그 사이에 적절한 이해로서의 中道가 있습니다. <능가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생기고 이어지는 까닭에 ‘사물’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원인과 조건들이 ‘상대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202.하나의 사태에 우주의 전 요소들이 간여하고 있다는 華嚴의 근본이치
204.연기법적 사고와 인과율적 사고
206.자신의 부와 자산이 ‘자기능력’ 플러스, 수많은 인연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는 依他起性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인지한 결과가 아닐까
209.연기법의 두 얼굴 1)우리가 이렇게 서로 얽혀 있으므로 내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2)세상에서 내가 책임지는 것은 무한하다.
금강경의 마지막 충고가 장엄하게 울린다.
‘세상의 모든 일들, 꿈같고 신기루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것. 이슬처럼 덧없고,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
212.
1)불교의 첫걸음은 우리가 아는 ‘사물’의 세계가 주관적 욕망과 환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부터입니다. 주관적 욕망에 물든 세계를 相이라 하고, 그 칙칙한 점착을 벗어난 객관의 세계를 法이라 합니다.
2)불교의 지혜 혹은 반야는 이 두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뜻합니다. 그 통찰력이 고통과 갈등의 ‘이편此岸’ 세상을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저편彼岸’의 행복과 평화로 인도해줍니다.
3)오온은 바로 그 객관적 세계의 구성요소로, 오온을 통해 ‘자아’와 ‘이름’에 물든 주관적 환상의 세계는 폭로되고 無我 나를 떠남으로써, 나는 비로소 해방된다.
213.니체의 ‘신성한 예스’
214.학의 다리 긴 대로, 참새 다리 짧은 대로
여기까지는 법의 세계에 속하나 학의 다리는 길어서 좋고 참새의 다리는 짧아서 싫다고 말한다면 相의 세계에 떨어지고 만다. 이 분별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며, 에고의 우상이며, 불교의 무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216.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
우리가 사물을 주관적 환상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如如 바라본다면 차별 없는 평등이라고 부릅니다.
219.空은 無我와 동의어, 범주가 다르니 서로 방해를 하지 않으므로, 그래서 色과 空이 공존할 수 있다. 空인 色의 세계란 번역하자면 자아에 의해 오염되거나 굴절되지 않은, 나아가 인류의 집단적 환상과 편견으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세계-法界, 있는 그대로의 세계 - 眞如이다.
222.이미지-相, 실제-法
243.진실은 늘 상식과 어긋나 보이는 법正言若反이고, 진정 똑똑한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는 법大巧若拙.
251.수부티(수보리)야, 내가 말하는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래서 불법이라 한다./금강경
254.불교가 말하는 유무는 이른바 객관적 사태의 존재유무가 아니라, 이렇게 자아의 관심에 의해 ‘의미화된 것으로서의 존재’와 관련된 말. 즉 法이 아니라 相임을 기억하라.
257.세상은 본시 고요하고 평등한 것, 우리는 법계의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조각을 하며 자치기를 하고 노는 아이들이다.
260.불교나 유교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인 인간의 구원이라는 최종적 관심을 축으로 돌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다. 서구의 철학이 설정한 인식론적 관심과 논리학의 엄밀한 방법을 의식하거나 적용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철학은 아니다. 그러나 삶의 길을 제시하는 지혜에 대한 갈망과 추구로 규정한다면 철학이다.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둘 다 아닐 수도 있으나 나는 <그들의 가르침>이라고 본다.
266.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 시간도 공간도 없는 세계
금강경은 시간이 없다 하는데, 화엄경은 시간들이 서로 침투 융섭한다고 한다. 하여 무량겁의 시간이 일념에 나타나고, 현재 속에 삼세가 있다고 한다. 시간이 없으므로 그 자연적 귀결로 生死가 없다. 하여
‘生死가 곧 열반!“이며 이 통찰을 얻은 자 영원히 자유를 얻게 된다. 화엄경이 선재동자의 구도 순례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여러분이 그 수많은 여래 가운데 하나이니, 스스로 보살이고 여래라는 생각의 연금술, 그 믿음을 일으켜라.
269.자유는 관습적 시공을 넘어설 때 찾아오는 것임을 기억하라.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영웅주의를 닮았다.
312.주자학은 불교다/다산 정약용이 주자학을 비판한 논리가 바로, “주자학은 불교다”라는 것이다. 주자는 중국의 12세기 송대를 살았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대혜종고의 선을 접하고, 화두를 통해 명상을 하면서 인생의 진실과 세상의 이치를 한꺼번에 깨치려고 노력한다. <주자어류> ‘釋氏篇’에서 인용하고 있는 불교 경전들은 범위가 매우 한정되어 있으나 그가 주로 읽고 씨름한 것은 禪의 문헌들임을 비추어 볼 때 다산의 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26.우리가 꿈에 그리는 법계는 시간을 적용할 수도 없고, 공간도 특칭화할 수 없는 세계이다. 거기서는 움직임도 고요도 없다. 먼지 하나에도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지만 또 태허로도 다 감싸 안을 수 없는 규모이다. 법계에는 시간이 없으므로 생사가 없고, 공간이 없으므로 나와 남이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 불가사의한 곳을 짐작할 수 있겠느냐.
331.禪은 불교를 아버지로, 노장을 어머니로 둔 비범한 자식이다. 그런데 어미보다 아비를 더 닮은 것 같다.-오경웅<선의 전성시대> 원효의 글은 비유가 풍부하고 수사가 화려하다. 서로 모순되는 두 항을 설정하고 그것들이 서로를 물고 뒤채도록 몰고 가는 그 현란한 솜씨를......
332.원효, 자유로이 노닐며 익힌 불교
장자의 秋水(맑은 하늘이 비치는 고요한 가을물), 누런 황하와 푸른 바다가 마주친 이야기
337.장자는 화엄의 선배인가
토머스 머튼-장자의 사유와 정신의 진정한 계승자는 唐代의 불교 선사들
돈오라고? 그렇다면 불교는 없다
불교의 래디칼리즘(급진, 근본주의), 頓悟
341.원효의 돈오관
화엄경은 圓滿無上의 돈교법문이라 법계법문을 널리 열어 무변의 행덕을 현시한다. 大方廣佛華嚴經이란 이름은 법계가 무한하기에 大方이요, 행덕이 끝이 없으므로 佛華嚴이다.
343.禪이 대결하고자 했던 상대는 ‘대승의 번쇄 치밀한 교학’과, ‘정토의 의타적 기복의식’이었습니다. 교학에 대한 대결의식은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不立文字, 敎外別傳 마음의 본질을 곧바로 드러내어 直指人心 궁극적인 깨달음을 열겠다見性成佛”는 캐치프레이즈에 잘 나타나 있다.
禪의 정신을 간명하게 정식화한 頓悟漸修는 교학도 교학이지만, 특히나 정토를 의식하고 제창된 것이다. 정토는 자신의 내적 가능성보다 타율적 구원에 의존해왔다.
344.頓悟의 頓이란 깨달음에 이르는 기간의 장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불교가 말하는 궁극적 깨달음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사건이 문득,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화엄이 설파하듯 깨달음이란 원래 오고 감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다. 즉, 돈이란, “깨달음은 이미 여기 와있다!”는 것, 그러므로 찾거나 이루거나 하는 ‘시간’과 ‘점차’漸로 더듬지 말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다. 원효는 초시간적 사건으로서의 法의 세계가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움직이는 것도 멈추는 것도, 하나도 여럿인 것도 아니다”라고 설파했다. 시간을 전제로 하는 궁극의 깨달음에는 정작 시간이 없다. 시간이란 차이와 구분에서 탄생하는 바, 그 간격을 여읜 영원의 本地風光에서는 번뇌와 보리菩提 사이의 거리가 어느새 지워져있다.
지눌은 문자의 이해가 정확해야 길을 잃지 않는다고 강조했고, 頓悟를 불교의 진리에 대한 지적 이해라고 강조했다.
붓다의 위대한 가르침
왜 돈오인가
347.왜 돈오가 제창되었는가. 거기에는 불교가 오랫동안 깨달음의 성격을 오해해 왔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때까지 불교는 계율을 지키거나 좌선, 명상을 오래 하고 있으면 우리의 정신이 고양되며, 그러다가 어는 한순간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어떤 경지가 열린다고 생각했다. 그 같은 漸悟를 일거에 망치로 두들겨 깬 사람이 선의 실질적 창시자 육조 혜능이다.
348-9.점수漸修는 頓悟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다. 혜능이 남방의 오랑캐였고, 또 일자무식이라는 허구적 설정이 頓悟를 말하는 頓敎의 파격적이고 혁신적 성격을 말해주기 위한 무대장치 같지 않는가. 혜능은 “몸은 보리수도 아니고 마음 또한 거울이 아니다”고 했으니 그곳은 먼지 앉거나 때가 끼는 곳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마음은 이미 완전하기에 더 이상 닦을 것도 찾을 것도 없다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돈오다. 하여 제가 해석하기에 頓悟란 “깨달음悟이 이미頓 와 있다”는 뜻이다. 이를 禪은 다른 말로 “깨달음에는 漸次와 階梯(계단과 사다리)가 없다!”고 즐겨 표현한다. 그래서 선은 卽心(是)卽佛, “네가 곧 부처이니 어디 딴 데서 찾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그럼 사람들은 묻는다. “그런데 왜 다시 수행이 필요하지? 이미 깨달아 있다면서......” 깨달음에 대한 지적 통찰은, 그것을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일에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 노력을 漸修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頓悟는 완전하지 않다. 돈오는 불교적 진실에 대한 지적 통찰이니, 그것은 이제 시작이고, 전제일 뿐이다. 그 不二의 진실을 삶에서 구현해 나가는 것은 그의 삶 전체를 바쳐야 하는 멀고 힘든 길이다. 왜 지눌 스님이 解悟를 앞에 두고도 다시 證悟를 내세웠겠느냐.
돈오와 점수는 새의 양날개
돈오는 쉬운데 정말 점수가 어렵다.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되, 그 이치를 진정 믿기 어렵고, 또한 그 가르침대로 살기가 어렵다. 돈오를 이렇게 해석하는 데는 제 독단의 창안이 아니라 지눌께서 돈오를 해석하신 그대로 ‘돈오란 다름 아니라 마음의 실상에 대한 지적 이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돈오를 ‘살아가는 것’이 점수에 속한다. 그것은 끝이 없는 심화와 지속의 실천적 과정이다. 깨달음 한 번에 一大事因緣을 마치겠다는 턱없는 과욕과 오만을 버려라. 경허 대사의 탄식인지, 자부인지 모를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라.
돈오라는 점에서 내가 어디 부처와 다르겠느냐만, 多生의 習氣가 깊어서......바람은 멎었으나 물결은 아직 일렁이고, 진리를 알았지만, 상념과 정념이 여전히 침노한다.
돈오와 점수는 새의 두 날개처럼, 수레의 두 바퀴처럼 서로를 지켜주고 보완해주는 쌍둥이다. 돈점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도, 돈오한 ‘이후’에 점수하라는 말이 천만에, 아니다. 성철 스님은 돈오로 대장부 일대사는 끝났으니 점수를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고 단칼에 내쳤지만, 그러나 어떤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라도 多生의 習氣는 떨치기 어렵고, 또 유혹과 실수 앞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병속에 물이 있으면 흔들려서 불안하지만 물이 없다면 가볍고 걸림이 없어 즐겁다/도봉별곡- 지눌의 無心合道에서
2014. 7. 25. 신당동 雨休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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