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오강남
-유식을 공부한 지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내 인생에서 매우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40살이 되면서 이만하면 경제적인 걱정을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해서 집사람에게 60살이 되면 애들도 일가를 이룰 나이가 되니 보리수 그늘 밑으로 가겠다고 공언을 하고 살았고 집사람은 계속 반대를 했습니다. 2009년에 모든 사업을 접고 재산을 처분하여 통장을 집사람에게 주고는 도서관에서 주로 역사, 종교, 철학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기회를 보고 있던 중, 선생님의 강의가 있으니 참석해보라는 말을 듣고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가 내가 만 60살이 되는 시기였습니다. 처음에는 유식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 책도 안 사고, 집에 불교서적이 많아 선의 전성시대도 사지 않고 듣는 것으로 만족하며 지냈습니다. 선생님의 지리산 수도 생활을 들으면서 보리수 그늘로 가는 것을 포기하며 진자 불교 공부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다 아시다시피 고교 때 짝이었고 대학에서 만났다가 60이 넘어 다시 만났으니 보통 인연은 아닙니다.
*붓다가 대답하지 않은 열두 가지 질문. 자등명 법등명, 영혼의 정체, 업습으로부터의 자유, 신화의 의미, 유물론과 관념론, 151 空이란 자기 이해와 관심으로부터의 해방이며 無我와 동의어라는 것을 잊지 마라. 깨우침은 자기 안의 불성과 만나 반갑고 즐겁게 노는 겁니다. 자기의 방식대로 가라, 무소의 뿔처럼.
부처님이 형이상학적 사변과 이론을 위한 이론을 기피한 것은 ‘부처님의 침묵’에서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부처님은 1)세상은 영원한 것인가?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 영원한 동시에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닌가? 2)세상은 공간적으로 무한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무한한 것임과 동시에 유한한 것인가, 무한한 것도 아니고 유한한 것도 아닌가? 3)여래는 죽음 후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가? 4)영혼은 육체와 동일한가, 다른가? 하는 14가지 질문을 ‘대답할 수 없는 질문(無記)’이라며 외면했다. 숲속의 나뭇잎 몇 개를 주어들면서 모든 것을 다 가르칠 필요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으며 다만 자유를 줄 수 있는 것만 가르치고 배우면 된다고 하였다.
불교, 이웃의 종교로 읽다/오강남
31.天上天下唯我獨尊-我를 개인적인 ‘나’로 볼 것이 아니라 ‘큰 나’ 혹은 ‘우주적인 나’로 보면 문제가 없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부처님이 선포한 ‘인간중심주의’의 선언이라고 보면 된다. 즉 인간의 운명은 인간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붓다의 자각을 표현한 것.
41.신화에 대한 다섯 가지 사실
1)신화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직접 관계가 없다.
2)신화는 보통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진리를 표현하는 특수 표현 양식이다. 탈신화화, 신화를 깸
3)따라서 신화를 놓고 그것이 거짓이냐 진실이냐 하고 따져서는 안 된다.
4)신화는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정보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기 위한 것이다.
5)신화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시원적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단군이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신화라는 것을 듣고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고 본다.
44.심리학자 융에 의하면 30대 초반이 되어야 인생사에서 참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우주의 기원, 신과 영혼의 존재, 선악에 대한 인과응보, 혹은 선악의 귀결/불가지론
간화선의 방식으로만 깨달음을 얻으려 할 것은 아니다. 敎와 禪은 다르지 않다는데 굳이 구별할 것은 아니며, 나는 선에서 무의미를 느꼈으니 심산토굴의 무문관 같은 선에서 빠져나오겠다. 동시에 공부의 부족함과 필요성을 느꼈으며 특히 空을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원효 같은 선지식들은 대승기신론에 대하여 왜 별기와 소를 쓰는가?
心卽是佛-너 자신이 부처다. 핵심은 부처를 자신의 밖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데 있다. ‘법등명 법귀의 자등명 자귀의’ 라면 낫지 이빨 빠진 노인네가 판치생모가 뭡니까? 40년을 속아서 지냈죠. 빠져서 지냈던지......
空은 無我와 같고 자기 이해와 관심의 탈각, 고로 색과 공이 공존. 다르므로 간섭하지 않고 공존.
부처님은 금강경 마지막 32장에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모든 생멸법이 이와 같은데 깨치거나 말거나 설령 깨쳤다고 대단해지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내 방식대로 공부하며 살려고 합니다. 안개 속 한 모퉁이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방법으로 공부하려 합니다.
2014.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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