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기 생각의 비망록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이 보다 나은 삶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모티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벼랑 끝으로 내몰고 성공의 유도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길을 선택해야만 했을 때 나는 늘 왼쪽으로 난 길을 택했다. 세상은 좌우의 날개로 난다.
가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날이 섰다. 그 날 위에 춤춘다. 마치 박수무당이 숙명을 피하지 못해 춤추는 것처럼. 이 좋은 가을에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먹고 지고 놀고 지고. 아흐 동동다리!
남자가 군대, 운전, 섹스에 대한 뻥을 빼면 남자가 아니다. 여기서 뻥은 무죄다.
인간이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1.우주의 기원 2.신과 영혼의 존재 3.선악의 귀결-권선징악적 보상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종교가 필요 없게 된다.
인간 자신에 대하여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볼 때 인간은 역사 최초보다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우리 인간은 아직도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왜 존재하며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으나 영원히 풀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종교의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전북 장수군 계남면 호덕리 장수하늘소 마을
착한 마음이야말로 가장 축복받은 자가 펼치는 최고의 지고선(至高善)이다. 그걸 아는 데 육십년이 걸렸다.
인류사에서 항상 현재의 이 시점에서 위험과 기회가 정확히 같은 양으로 공존한다는 점이다.
시련과 도전이 없는 인생은 없다.
내가 왜 그럴까.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지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라.
젖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가는 인생은 없나니. 몸은 낮출수록 행복해지고 마음은 비울수록 풍요로워진다.
자기가 참이거니 하는 것처럼 거짓이 없고 선하거니 하는 것처럼 추한 것은 없다. 제법 무던하거니 생각하는 것이 법이고 자랑하고 싶지 않아야 한다. 서로 마음을 비워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하는데, 당신은 나를 우습게 아는데 풀 길이 있겠나요. 나라는 짐을 벗어두고 편하게 가볍게 멀리 멀리 훨훨 날아가소.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높이는데 자신이 깨어있지 않는 한 어떠한 역경, 주역(易經, 周易)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깨어있다면 모든 것이 괘이고 주역이다.
내가 산이고 산이 바로 나다. 내가 다시 물이 된다. 물이 구름이고 구름이 바람이고 바람은 꿈이다. 꿈은 사랑이고 사랑은 미움이고 미움은 이승이고 이승은 하늘이 된다. 불가에서는 모든 경계가 허물어졌다고 한다. 소위 고승이라는 작자들의 말장난이라면 부처는 누구며 나는 무엇인가. 부처 앞에서 몸을 낮추기 위해 수많은 부처와 싸워야 했다. ‘신은 악마다’라고. 그들의 신성을 빙자하여 얼마나 많은 악이 자행됐는가. 하여 신은 악마다. 그들에 의해 자행된 해악이 얼마인가. 억만의 선행을 하여도 하나의 악을 행하였다........
그는 악마다. 그러다 내가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달이 되고 해가 되고 꽃이 되고 산이 되고 물이 된다. 마침내 신이 된다. 되어보니 신이 별거냐. 부처 앞에서 몸을 낮추는 순간 그가 부처가 되었다. 부처나 예수나 마호멧도 처음에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다만 후에 그의 제자들이 신격화 시킨 것에 불과하다. 수많은 제자들과 그를 신격화함으로서 이득을 볼 수 있는 자들이 만들어낸 피조물에 불과하다. 부처의 팔만 사천 법문은 웃기는 일이다. 나뭇잎에 새긴 그의 말이 어떻게 팔만사천개의 경문으로 나타나는가.
부자란 쓰고 싶은 대로 써도 마르지 않는 사람이다.
현생에 모든 것을 이루려하지 마라. 어리석은 짓이다. 부처 이전에 부처가 있었듯이 부처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현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바람에 그늘이 있다. 바람에 그늘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나는 늘 바람의 그늘 속에서 쉰다.
잘못 생각하고 있거나 사상의 오류가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책을 읽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권력을 잡을 때 주변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 또 한 가지 방식이나 원칙만을 고집할 때 주변을 참 불편하게 할 수 있다. 선인과 악인은 주변의 사람을 괴롭혔느냐 행복하게 해줬느냐의 차이로 구별한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 세상의 이치와 도를 알고 결 따라 사는 자는 지혜롭고 행복하다. 목표가 길이라면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 거슬리며 길을 가는 삶은 수고로운 삶이다. 행복은 눈 아래에 있다. 오욕에서 자유로우면 행복. 재산은 나눌 수 없으나 지혜는 나눠가질 수 있기에 지혜로운 친구를 갖는 자 행복하고 돈 많은 친구는 해악을 끼치나 지혜로운 친구는 해악을 제거해준다. 행복이란 마음 속 지평선에 펼쳐진 이상향이 아닐까요? 절대적인 행복에 실제로 다다를 수 없지만 행복해 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런 동경 속에서 작은 행복을 누린다.
인생연감/프리모레비-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태인. 신의 존재를 부인
이 작품 속의 적은 나치가 아니라 내 안의 적이다. 파쇼와 싸우다 파쇼로, 나치와 싸우다 나치로, 독재와 사우다 독재로 변한다. 이것이 인간이다.
기독교가 이교라고 부르는 그리스·로마의 신을 믿는 이 종교는 교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리를 해석하여 신자들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성직자 계급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을 유지하거나 미사를 드리거나 불우한 자에 대한 자선사업 비용.......
계획 없는 삶은 꿈이 없는 삶이다. 꿈이 없는 삶은 불행한 삶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신의 주체성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은 죄라고 결론을 내리고 악이란 무엇인가.
서평 ‘세상을 보는 지혜’
60년 한 갑자를 살아보니 삶이란 수레바퀴처럼 반복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부처님은 이것을 윤회라 했을까? 세상에는 수많은 지식과 경험이 있다. 세상의 이치를 다 경험할 수 없으니 간접경험이라도 하게 되면 시행착오를 덜 범하고 그러면 손해를 덜게 된다. 독설가 쇼펜하우어가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 오만하리만큼 자존심이 강한 대철학자인 그가 극찬한 사람이면 대단한 사람이다. 쇼펜하우어는 스페인어로 쓰인 이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펴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쓴 ‘세상을 보는 지혜’라는 책인데 인간에 대한 성찰로 가득 찬 작품이다. 이기적이고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상처를 덜 받고 현명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 중 하나는 냉철한 이성, 둘은 마키아벨리즘(권모술수)이며 사람은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영리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들이 전편에 흐르는 기본사상이다. 즉 개개인의 삶에 있어 냉철한 마키아벨리즘이 필요하다고 보며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결론을 보면 세상이나 남에게 결코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아야 남 또는 세상에게 속지 않고 권모술수를 써서라도 속이고 이기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라시안은 사람을 대단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는 냉철한 사유를 통해 아무런 꾸밈없이 이기적이고 허영심에 차고 변덕스럽고 사악한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들이 사는 세상과 어떻게 교제해야 할지 충고하고 있다. 마지막 경구에서 그가 “성자가 되라”고 말하는 것은 앞서 그가 말한 모든 충고와 교훈 뒤에 마지막으로 덧붙인 하나의 미사여구에 불과하고 그의 경구들은 대가적인 풍부한 정신력, 사고력, 위트, 서슴지 않는 파라독스(독설), 번쩍이며 신랄한 재치, 빛나는 언어, 깊은 통찰에서 우러나온 인간에 대한 경멸로 가득 차 있다.
세 명의 사기꾼
진실을 아는 모든 인간에게 중요하지만, 극히 적은 수만이 그것을 알고 있다. 왜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진실을 탐색할 능력이 없다고 믿거나 아예 그런 노력을 기울일 생각조차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이 우습고 부질없는 견해들로 득실거린다 한들 어차피 그런 것들이 풍미하는 게 다 무지 때문인 바,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실제로 신성이나 영혼, 정신과 관련한 생각과 그로부터 초래되는 온갖 오류의 근원에는 다름 아닌 무지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자고로 날 때부터 지녀온 선입관에 안주하고 돈으로 사람을 움직여 일련의 고정관념을 옹호함으로써, 결국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무조건 대중에게 설파하고자 하는 게 요즘 만연하는 관례요, 추세다.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이란, 신에 대한 판에 박은 관념들을 차곡차곡 모으되, 그것을 면밀히 검토해보지도 않고, 곧이곧대로 믿게끔 대중에게 주입하는 데 있다. 아울러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빠져 있는 오류를 바로 보게 해줄지도 모를 진정한 식자(識者)들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감을 미리 갖도록 할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제는 누군가 나서서 그 어설픈 사고를 바로잡고 낡은 선입관을 쏟아 붓는다면, 대중은 차츰 눈을 떠 진실을 알게 될 것이며, 신이란 여태까지 상상해오던 그런 존재가 결코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컨대 고도의 사색이랄지, 자연의 깊은 비밀을 꿰뚫고 들어가는 것도 필요 없다. 신이란 결코 질투하지도, 분노하지 않는 존재임을 알아차리기 위해선 그저 약간의 상식만 있으면 된다. 정의와 자비 역시 저들이 신에게 부여한 거짓 특성임을 대중은 깨닫게 될 것이다.
동반시
젖지 않는 마음 - 편지 3/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들풀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직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은 마음과 젖지 않은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불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허무를 향해 / 박재삼
제주 성산포에 처음으로
쫒겨오듯 와서
어쩔거나
화산 분화구 같은 곳에 빨려들 듯하면서
햇빛 속에 세상은 이리 허전하고
밑도 끝도 없이 묻히고 싶구나.
멀리 바다에서는
바람과 함께
하얀 파도가
연방 밀려와서는
천 년 전에도 했을
지겨운 반복을 귀찮지도 않은지
허무를 향해 부지런히 하고 있고
아, 가까이 유채꽃은
눈이 모자라게 흐드러지게 피어
이승의 마지막처럼 눈부신데
사람은 한번
지독하게 사랑을 한들
반드시 끝장이 있는 사실을
곰곰이 새로 느끼며
파도의 영원을 멍청히 보고 앉았네.
부처님 앞에 몸과 마음을 낮추면 눈물이 난다.
임종의 순간에 새로운 공간을 향해 즐겁게 출발한다면 죽음이 무섭지 않으리라.
헤세/생의 계단
신을 위한 변명 497
어느 날 브라흐만 사제가 나무 밑에서 명상에 잠긴 부처를 보고 그의 평온함과 자제력에 크게 놀랐다. 엄청난 힘이 비범한 평온함으로 승화되는 느낌은 마치 거대한 코끼리를 연상시켰다. 그래서 사제는 “당신은 신입니까? 아니면 천사나...... 영(靈)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부처는 자신이 단지 인간의 새로운 잠재력을 드러내 보였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보여준 갈등과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다른 존재들과 화합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진리였다. 그냥 믿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자기중심적 사고를 뿌리부터 발까지 체계적으로 없애 나가는 부처의 방법을 수련해야만 그러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수련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평상시 죽어있었던 정신의 부분들을 활성화하면서 완전히 깨우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부처는 호기심 많은 사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깨어있는 자로 기억해주게“
세계종교사입문 116~117
부처가 본래 가르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지금 정확하게 재구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당시 인도에 일반적이던 사상을 다시금 활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그는 윤회와 업 그리고 해탈이라는 중요한 관념을 자신의 사상 속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인도 재래의 윤회와 업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해탈에 이르는 독특한 방법과 교설을 제시함으로써 그는 세계종교사 속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점유하는 ‘불교구원론‘의 정초를 놓았다.
본래 ‘구원’이란 ‘하나의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전이됨을 의미한다. 그것이 내포......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단지 인식론적 차원에서 하나의 정보를 더 획득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한 인간의 존재 자체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실천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체득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을 때 인간의 삶은 영원히 괴로움의 굴레인 윤회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12. 10. 2.
아인슈타인은 사망 1년 전 1954년 1월 3일 철학자 에리히 구스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게 신(God)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에 대해서도 “고결하지만 상당히 유치하고 원시적인 전설의 집대성이며 아무리 치밀한 설명을 덧붙이더라도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12/10/4
인간의 정의가 언제나 너무 늦게야 개입한다는 것이야 말로 불행 중의 불행입니다. 인간의 정의는 행위만을 벌하고 비방하지만 그런 행위를 저지른 자보다 더 높이,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못합니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민음사
히말라야의 숲에 이르면 경치 좋은 물가나 아름다운 숲 속을 즐겨 걸으며, 몸도 행동도 청결하고, 음악과 꽃과 향기를 즐긴다. 시킴 히말라야의 숲은 간다르바의 집이다. 어느 누구도 여기서는 그의 숨결을 피할 수 없다. 선계와 같은 이런 자리에서는 지복이 가득 차오른다. 어디선가 아름답고 고차원적인 영적인 힘이 몰려와 나의 내부를 가득 채워 준다. 그러면 내 자신은 충만한 사랑으로 눈부시고 충만해진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는 시선 닿는 세상의 삼라만상에게 축복을 나누고 싶어진다(漫然成福). 내 안을 가득 채운 지복을 두두물물과 나누고픈 순간이 뒤따라와 사방팔방을 자비의 시선으로 어루만진다.
“복 받으시라, 모두 붓다에 이르시라.“
이 지복이 브라흐만임을 안다. 따라서 근원에서 노닐며, 그 길을 잃지 않고, 그 원천을 끊이지 않게 하며, 내 삶을 다하리라‘ 맹세한다. -시킴 히말라야 347-348/임현담
영혼이란 한 개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고위(高位)의 에너지 형태다. 시킴 히말라야 362/임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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