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한 꽃들의 축제-금강경 소/한형조
6.저기 누가 묻는다. 금강경이 곧 불교냐? 팔만이라 겁주지만 기실 불교는 하나다. 나는 초기 경전에서 아비다르마, 중관과 유식, 화엄, 그리고 선불교까지 동일한 정신으로 투철히 무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불교 아닌 것까지 사무치게 불교이다. 이 책이 혹 그 증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다.
7.나를 건진 것은 선의 무의미였다. 敎와 禪이 다르지 않다는데 원각경과 화엄경은 낯선 암호였고, 금강경은 오가해조차 더욱 오리무중이었다.
8.이 책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빌려 썼다.
15.반야심경은 압축적이고 조직적이다. 금강경은 산문적이며 예언적이다. 나는 금강경을 통해 ‘마음’을 확인시켜드리고자 한다. 이유는 대승경전의 중심이면서 선의 所衣經典이기 때문이다. 반면 반야심경은 불교를 오래 섭렵해본 사람의 파이널 터치로 그만이다. 공을 중심으로 불법의 핵심이 간결하게 조직되어 있다. 혜능의<금강경구결>을 보면 그가 일자무식이라는 말은 앞으로 꺼내서는 안 된다. 야부 도천의 격외의 시는 맛이 다른 수확이다.
22.가장 강한 것이 금강이다. 혜능은 반야, 즉 지혜가 반야를 닮았다고 해서 금강반야라 부른다. 반야는 마음의 내적 방해물을 포착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힘이다.
24.혜능은 예리하며 견고한 반야를 통하여 번뇌와 절망을 부수고자 했으니,
인간의 마음은 금강처럼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어떤 절망과 번뇌에도 파괴되지 않으니 거기에 지혜의 검을 발휘하여 번뇌와 절망을 쳐부수자.
25-6.바라밀은 도피안이다. 서방정토로 믿는다. 그러나 서방정토는 없으니 “마음이 헤매면 此岸이고 마음이 깨달으면 彼岸이다.”
26.마음의 안쪽에 무엇이 있느냐고 묻는가. 거기 불건전한 상념, 정념, 충동 등이 있으니, 이 無知, 즉 無明이 있는 것이 이 언덕이고 이것을 불식시키고자 마음이 밝아진 곳이 저 언덕이다. 결국 度彼岸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난 사태, 彼岸은 시공을 점하고 있는 어떤 다른 세계에 있지 않다. 극락은 없다. 다만 비운의 왕자 구마라집이 만든 허구의 언어다. 젖과 꿀이 흐르는 환상의 땅, 서방정토도 없다. 혜능은 대중을 앞에 두고 얘기한다. “내가 서방정토를 보여주랴‘ 마음이 헤매면 此岸이고 마음이 깨달으면 彼岸이다.”
27.電光石火. 발뒤꿈치 한 번 돌리면 열리는 세상이기에, 불교는 하나도 어렵지 않다. 조고각하. 어려운 것은 이 밝은 지식의 불꽃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頓悟는 쉬운데 漸修는 어렵다. 요컨대 불교는 이렇다 할 물건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無得이라고 했으니. 깨달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漸修가 필요하다. 불건전한 상념과 정념, 충동 등은 한번 태운다고 고이 물러가는 것은 아니니......여러 생을 거쳐 묵은 業障과 태어난 이후 한 번도 닦아본 적이 없는 習氣는 손대기 여간 뻑뻑하지 않다.
깨달음으로 일대사 인연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조주가 빗자루를 들자, 객이 핀잔을 주었다. “먼지 하나 없고 깨끗한데 뭘 더 쓸려고 그러시오.” 조주가 허공을 가리키며 한 말이다. “이런, 여기 또 하나 날아오네.”
33.초기 경전들도 오래 구전되고 편집을 거쳤지만, 대승의 경전들은 명백히 후대에 지어진 것들이다. 이 사실을 설득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설이 생겨났으니 용궁 창고의 경우다. 원효의 <金剛三昧經>을 두고 하는 전설이었으니. 상식은 이것을 영 엉터리 소리로 置簿하려 한다. 그러나 달리 보자. 진리는 새로운 것이 없다. 그래서 늘 옛길이다. 철학자 듀런트는 “오직 誤謬만이 새롭다.”
38.우리는 주고받음에 대해, 도덕적 습관에 대해, 그리고 감각적 쾌락이 얼마나 공허하며, 또 무서운가에 대해, 거기에서 물러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에 대해......고집멸도, 고통의 현실과 기원, 소멸과 거기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사성제, 중도, 오온, 삼독, 팔정도, 삼법인에 대해, 거기에 이르는 방법과 이르면 왜 좋은가에 대해 너무 모른다. 그러나 감히 말한다, 방법을 알면서 가지 않는 것과 가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아야 한다.
40.기원정사/祈樹給孤獨園의 감동적 이야기
祈는 태자의 이름, 祈樹는 태자가 기부한 숲, 給孤獨은 수닷타 장자의 별칭으로 수닷타 장자가 소유한 정원의 뜻. 대단하다.
夜叉 시바카가 수닷타에게 속삭인 말, 그것은 자신에 내면에서 나오는 불성의 소리에 다름 아니다. “코끼리와 말, 나귀 수레 백 대도, 보석 귀고리로 작성한 수백 명의 여인들도, 네가 내딛는 한 걸음의 16분의 1의 가치도 없다. 나아갈, 장자여. 나아가라. 물러서지 마라!” 이 속삭임은 우리 모두 듣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무시하고 살거나, 업장이 두터워 아예 듣지 못한다. 그렇지 않은가.
41.위대한 거지들의 공동체
초기에 붓다는 “한 곳에서 사흘 머물지 말고, 밥을 빌어먹으며, 오전에 한 끼만 먹으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마라.” 그것이 거지들의 위대한 공동체, 초기 승가였으니.
44.평생을 걸려 노력해 이제 예수처럼 강을 건너게 됐다는 사람을 보고 “동전 한 닢이면 건널 수 있는 것을 , 그래 평생을 죽자고 고생했단 말이오.” 마음을 비우라 했는데, 우주를 말아먹을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여, 그의 말을 들어라.
<금강경>이 가르치는 중심은 “法도 空하다”로 요약할 수 있다. 육조 혜능은 四相을 경계하면서 진리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접고, 평상심을 되찾으라고 역설한다. 希望心을 접어야, 즉 일체의 지배와 공격성을 괄호 칠 줄 알아야 마음이 본래 空함을 볼 수 있다. 그 마음의 빈자리만큼 사람들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이익 될 방도를 찾는 마음이 열려간다.
50.로마의 노예 현자 에픽테토스의 잠언
모든 사물에는 양면이 있으니 한쪽으로 보면 해결되지 않는 것이 다른 쪽을 보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화해는 사물의 뒷면을 보면서 시작되고, 지혜는 그도 저도 분별하지 않는 데서 자란다. 장부의 채무란도 좀 보고 살자. 가장 좋은 일은 장부를 보지 않고 사는 것인 즉. 불교는 관용의 정신을 依他起性, 위대한 방임을 圓成實性이라고 부른다.
54.깨달은 자의 징표 중 하나가
“밖으로 사람들의 악행과 실수를 덜 기억하고 곱씹는 것外不見人之過惡”와 易地思之. 여기서 간화선의 ‘궁극적 깨달음’을 높거나 위태로운 것이라 하면 아주 낮은 ‘일상적 깨달음’으로 보면 지혜와 용기를 일상적 생활 주변에서, 구체적 일과 관계에서 실천하는 일이 귀하고 또 귀한 일이다.
55-6.혜능의 구결 정신-새 술을 헌 부대에
應無所住 以生其心/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라.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불순물과 고착을 걷어내라, 범부의 습기와 수행자의 욕심까지.
57.布施는 자기정화, 제 마음 속의 먹구름을 흩어내는.
59.혜능의 三學/戒定慧
마음에 아무런 허물이 없고 갈등이 없는 것, 자신의 불성이 아무런 혼란 없이 스스로의 빛과 활동을 해나가도록 하는 것.
‘좌선’이라는 전통적 수행법도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고, 명상에 빠져드는 특정한 作法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아무런 외적 유혹에 이끌리지 않고 본래의 빛을 차단하지 않도록 하는 각성의 길.
62.산문은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한 문체, 시는 표현하고 공감하기 위한 형식.
63.“불이야!”라고 말한다고 어디 입을 태워먹느냐!
66-9.불교가, 특히 대승과 선이 왜 그토록 진리에 대해 말하는 언어를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대하는 지 궁금한가? 불교의 기획은 1)자아는 자기 욕망으로 객관적 세계의 자장을 흔든 뒤튼다는 것 2)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이렇게 에고가 뒤틀어놓은 세상의 본래 모습을 되찾고자 한다는 것 3)그 실상의 확보와 더불어, 세계는 화평해지고, 수행자는 가장 무서운 괴물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를 찾는다는 것
여기서 언어는 삶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필요한 도구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위에서 적은 대로 자아의 욕망으로 인해 비틀어진 세상을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한다. 불교는 이 거울을 깨뜨리지 않으면 진정한 해방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자를 탕탕 친다.
언어는 괴물이다. 생각의 산물이자 친구다. 이 둘은 자아의 충실한 도구이고 노에다. 말과 언어가 바람 소리와는 달리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있고 목적하고 있는 점에서 자유롭지도 않고, 객관적일 수도 없다고 말한다.
말이란 바람에 울리는 소리와는 다르다. 의도에서 발한 말은 편견의 소산이므로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욕망과 이념의 도끼날이다. 난무할수록 날은 벼려지고 강도는 더해진다. 불교는 이 수십 억 년의 관행에 제동을 걸려고 자꾸 시비를 건다. 色卽是空. 이 말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 적어놓은 채권은 없으며 세상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없다는 뜻이다. 붓다도 자신이 서 있는 한 뙈기의 자리만 임시로 누린다고 했지 않는가. 말은 무릇 세계를 자아화하는 도구이며, 자신의 의도대로 요구하는 깡패는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말은 늘 시끄럽고 우는 소리를 네며 덱덱거린다. 요구가 많고 불만이 많은 사람은 말고 많고 탈도 많다. 그래서 말은 늘 위태롭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늘 조용하다. 그게 늘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불교는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말을 저게 하하고, 궁극적으로는 말을 아예 꺼내지도 말라고 강요한다. 묵언 수행의 근본 뜻이다. 불교는 늘 일깨우기를, 보디스바하, 모든 것이 ‘거기 이미’ 이루어져 있으니 더 보태고 뺄 것이 없다고 일깨운다.
“있는 그대로如如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미 일은 틀어졌다.” 이 開口卽錯의 법문은 “너는 아무것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진리조차 그렇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야부가 시에서 채용하고 있는 달과 거울, 먼지가 대체 무엇을 비유하고 있는가.
靜夜長天一月孤
고요한 밤 길게 걸린 하늘에 달 하나가 외롭도다.
바다는 파도를 떠나있지 않으니 파도가 곧 바다이다. 먼지가 붙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을 때 거울과 바다는 응당 한 점 흠 없이 천지를 비출 것이니, 보라, 보라.
고요는 법석 떨지 마라는 것이고, 외롭다는 모든 인간적인 흔적이 지워진 곳, 즉 자아의 준동과 개입이 멈춘 곳이다. 달이 홀로 떠 있다고 외롭다고 말할 수 있는 자 나와보라. 몽둥이가 백 방이다.
71-2.파도는 물을 떠나지 않는다
무의식의 심층
불교 유식은 표면적 6식 너머에 자아의식 7식, 그 너머에 무의식 8식, 그리고 때때로 9식까지 있다고 알려준다. 프로이트는 인간 자아의식의 뿌리에 잡동사니 가득 찬 무의식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융은 그보디 깊은 의식의 심저에 영원한 고요와 평안의 에너지 창고가 있다고 반발한다. 불교는 아마도 프로이트가 8식 주변을 보았고, 융이 8식의 심층, 혹은 9식의 정체를 파악했다고 할지 모르겠다.
다시 보라, 자아의 활동이 숨을 죽일수록 우리는 우리 내부의 더 깊은 불성과 만나게 된다는 것. 이 ‘합치‘와 더불어 세계는 더 이상 자아의 투사, 혹은 그림자로 드러나지 않고 자신이 본래 갖고 있던 모습,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如如, 如是‘를 증현하게 된다. ’먼지 없는 거울’ 일 때, 바람 그친 바다처럼 천지를 비출應現無瑕照天地 것이다. 여기가 반야바라밀이다. 이때 자신의 에너지는 본래의 불성으로부터 파편화되거나 소외되지 않는다. 이를 야부는 ‘물이 바다를 떠나지 않고 바다가 물을 떠나지 않았다’고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73.聞이라, 제발 남 쫓아가지 마라. 원숭이는 봉우리 위에서 울고, 학은 숲 사이에서 우짖는다. 조각구름 바람이 말려가고, 물은 긴 여울로 치고 흐른다. 좋구나! 늦은 가을 서리 내리는 깊은 밤에, 새 기러기 한 마리 차가운 하늘을 울고 간다./야부의 노래
77-8.萬法歸一 一歸何處(去) 둘로 부서지고 셋이 되는 것도 다 이것이 갈라진 결과다. 천지가 갈리기 전의 우주적 혼돈을 찾아라. 이것이 네가 해야 할 일생의 공부다. 팔만 사천 법문을 펼치면 만법이고 닫으면 하나이다.
時라, 때는 무엇인가. 세상은 스스로의 연기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니 찰나에 수많은 요소들이 결합하여, 다시 멸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만들고 가는 그 거대한 섭리의 ‘이성’에다가, 우리는 토를 달고, 불평을 토로한다. 왜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을까? 왜 온갖 악이 성행하고 없어도 될 것들이 間斷/끝없이 생겨나는가? 궁금한가? 그것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연 전체의 이성에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역발상을 해보라. 답이 나오는가? 모든 게 돌기 때문이다.
노자는 말한다.-도덕경 2장에서.
‘세상 사람들은 저한테 이쁘고 좋은 것만 선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잘못된 생각임을 모르는가!
세상은 그렇다. 세상의 꽃과 달, 짐승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안다. 그리하여 있을 때 있고 없을 때 없다. 청풍과 명월이 서로를 따른다. 조물주의 자연에 물으니 자기는 모른다 한다.
이미 이루어진 세상에 여래는 왜 오셨을까, 이미 이루어짐을, 그것을 공유, 향유할 줄 모르기 때문에 오셨으니 다만 손가락으로 가리켜주었을指月 뿐이며, 여래가 부는 피리 소리는 태평가인데 그 피리에는 구멍이 없다고 한 것이다.
81.異邦의 기독교의 화두-“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인간의 일은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고투라 아니할 것인가. 대체 이 자리는 어디인가
일본 임제종의 다쿠안(澤庵) 선사
“나는 부처를 팔고 그대는 몸을 파니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네 밤마다 물 위로 달 지나가지만 내 마음 머물지 않으니 달그림자도 남지 않네.”
84-5.感而遂通/주역-인연과 계기가 너를 부를 때는, 그때 적극 응답하라. 인연과 계기가 손님이니 손님을 잘 맞으라. 是客稍有賊氣在 知有賊氣 須打殺 아차, 도적이다 싶으면 바로 나가서 몽둥이로 때려잡아야 한다. 양기가 나에게 도적이라면 어찌 해야 하는가. 회원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으니 피해야 하나. 어쨌든 바로 잡아야 할까? 정신은 혼탁해지고 내면의 끈을 놓치기 싫으니 피한다?
隨緣無著(착) 인연에 따라 응하되 들러붙지는 말자. 명예와 재산의 물거품을 조금 헐겁게 두고 그 여력으로 자신의 귀한 불성을 보듬고 더 다듬으면 어떨까. 如來如去 인연이 오면 맞이하고 인연이 다하면 손을 흔들자. 어차피 내 듯대로 되지 않는 세상인데.
85.중국집 테이블의 지혜-노예 현자 에픽테토스
<금강경>의 노래처럼 그 희망심의 흔적들을 태우고 “과거의 여광도 흩어졌고, 미래의 환상도 거품이며, 현재의 집착도 물거품일 뿐 過去心, 現在心, 未來心不可得이니.
2장. 붓다에게 길을 묻다
격외선(格外禪)
불교에서 행하는 말이나 문자로 논할 수 있는 격식을 초월한 선법(禪法). 상식이나 지식, 이론의 범주를 초월한 최상승선(最上乘禪)이다.
인도에서는 계(戒)·정(定)·혜(慧) 3학(三學) 중의 하나인 정과 6바라밀(六波羅密) 중의 하나인 선정을 선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독창적인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주창하고, 선의 맥은 교의 밖에서 따로 전해져왔다고 주장하는 격외선의 이론을 전개시켰다. 즉, 말과 문자로 된 경전의 이론이나 지식의 범주를 초월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을 격외선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의 무염(無染)이 ≪무설토론 無舌土論≫에서 최초로 이 선법을 주창하였다. “석가모니가 밝은 별을 보고 도를 깨친 뒤에 다시 설산에서 진귀조사(眞歸祖師)를 만나서 현극(玄極)한 뜻을 전해 받았으니, 이것이 교외별전의 연원이다.”라고 한 것이나 석존의 삼처전심(三處傳心)을 말한 것 등이 모두 격외선에 관한 주장이다.
고려 중기의 지눌(知訥)도 “정혜쌍수(定慧雙修) 밖에 본분종사(本分宗師)의 별전 선지가 있다.”라고 하였고, 조선 중기의 휴정(休靜)도 ≪선교결 禪敎訣≫에서 격외선을 강조하였으며, 조선 후기의 백파(白坡)는 의리선(義理禪)에 상대되는 것으로 격외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의리선(義理禪)
불교의 삼종선(三種禪) 가운데 하나. 경전이나 선록에서 제시한 의리(義理)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선을 말함.
의리선이라는 말은 조선 후기에 긍선(亘璇)이 저술한 『선문수경(禪門手鏡)』에서 처음 공식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긍선은 선을 깨침의 정도에 따라, 의리선(義理禪)·여래선(如來禪)·조사선(祖師禪)의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임제3구(臨濟三句) 가운데 제1구는 조사선, 제2구는 여래선, 의리선은 제3구에 해당한다.
임제 제1구는 삼요(三要)이니, 이 도리를 얻으면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되므로 조사선의 근기이다. 제2구는 삼현(三玄)이니, 이는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게 하므로 여래선의 근기이다. 제3구는 유(有)·무(無)·중(中)을 희롱하는 것이니, 이것으로는 자기 한 사람도 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긍선은 의리선을 임제 제3구에 적용시켜 자기 구제도 어려운, 근기가 낮은 이를 위한 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한 논법에 관해 잘못을 논파하는 후학들의 비판적 저술이 나와, 약 150년에 걸쳐 논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즉, 대홍사 의순(意恂)의 『사변만어(四辨漫語)』를 비롯하여 홍기(洪基)의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과 유형(有炯)의 『선원소류(禪源溯流)』, 진하(震河)의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 등이다.
의순은 우열을 논한 긍선의 삼종선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인명에 의한 조사선과 여래선, 법명에 의한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義理禪)으로 분류하고, 언어와 논리로 표현할 수 없는 가르침이 조사선이고, 격을 갖추어서 나타낸 것이 여래선이라 하였다. 또, 예로부터 격외와 의리라는 말은 있으나 격외선과 의리선이라는 용어는 없었음을 강조하고, 이들은 조사선과 여래선을 법의 입장에서 달리 부른 것이라고 하였다.
홍기는 임제 제2구가 규모와 교격을 갖춘 언설로서 의리선이며 여래선이라고 보았다. 유형이 긍선을 지지하고 나오자, 다시 진하는 조사선과 여래선의 격외선은 활구(活句)이고 의리선은 사구(死句)라고 주장하였다.
92.사리불(자)/지혜제일과 수보리/解空제일
93.공자의 낡은 수레와 수제자 顔淵(산의 높은 모양 안, 깊은 물 연)의 장례비용에 얽힌 이야기.
101.如來는 如來如去의 줄인 말. 오고 간다.
109.성문ㆍ연각ㆍ보살에 대한 세 가지 교법(敎法). 승(乘)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하니, 부처님의 교법도,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데 비유.
(1) 성문승. 4제(諦)의 법문이니, 부처님이 말씀하는 소리를 듣고, 이를 관하여 해탈을 얻음.
(2) 연각승. 12인연의 법문이니, 스승에게 가지 않고, 스스로 잎이 피고, 꽃이 지는 따위의 이치를 관하여 깨닫는 것. 벽지불
(3) 보살승. 6바라밀의 법문이니, 보살은 이 법문에 의하여 스스로 해탈하고, 남을 해탈케 하여 부처를 이룸. 영웅들의 수레
113-5.세상은 평온한데 내 마음은 공연히 조급하고 바쁘다. 언제 한번 마음을 쉬어보나. 그게 어렵다. 한순간에 팔만 팔천 번의 상념이 오간다. 이 뿌연 먼지들을 가라앉히는 작업은 다만 自性의 마음을 믿고 그저 조용히 바라보라고만 권한다. 혜능의 돈교는 그 믿음이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해 줄 것이라고 설파한다. 즉 자기 내부의 불성의 자각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를 정화해나간다는 것이다. 般若智로 망녕되이 憎愛를 일으키지 않고 육진에 물들지 않게 하여 생사의 고해에 빠지지 않게 하며, 마음이 바르게 있어 사악한 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色卽是空이라,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 내부의 사랑과 미움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런 사적 관심이 어지럽게 분출하는 것을 조정하고 편견의 고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꿈꾸는 세상은 성큼 다가올 것이다.
117.돈교, 새 불교의 목소리
禪의 정체는 자성불이면서, 핵심은 ‘자신에 대한 전폭적 신뢰’라고 답할 것이다.
자성불이라, 나 자신이 부처이므로 따로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이 필요 없다.
123.야부-頭頭不離空王殿그래 봤자, 결국은 공의 궁전 안인 것을......
제3장.거기 ‘나’는 없다
133-4.내게 문제는 없다
1)보살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다. 붓다는 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려 한다. 즉 보살의 마음을.
그러나 나는 달리 해석한다.
2)돈교,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구원은 이미 성취되었다. 네가 더 이상 해야 할 것은 없다. 네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은 네가 하는 일이 아니다.
그 비움의 극점에 보살이 있고 마하살이 있다. 물론 자임한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35.보살-마하살은 누구인가
연각(벽지불)과 성문승은 오직 나의 자아를 길들여 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선근을 닦는다. 그러나 보살승은 ‘나는 나의 자아를 진여에 머물게 할 것이다. 아울러 ’다른 모든 생명을 또한 진여에 머물게 하여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존재를 열반으로 이끌 것이다‘의 자세로 수행한다.
진정한 무아는 타자를 향해 나의 모든 것을 비우고 바쳐야 한다. 이것이 역설이다.
140.보살의 발심과 여정에 대하여
1)보살의 삶은 보리심
2)몇 겁이 걸리더라도 육바라밀을 닦아나간다
3)보살은 ‘지혜’와 ‘자비’라는 두 가지 동기를 가진다. 지혜는 모든 존재의 空함을 깨닫는 것이고 지혜로운 자는 분별심을 내지 않는 사람이다. 분별은 무지/무명의 산물이다. 자비는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四無量心.
4)지혜의 극치에서 모든 존재의 空함을 깨달으면, 이제 순수하게 자비만을 밀고 나가는 힘이 된다. 물론 그는 알고 있다. 일체가 空하므로 중생도, 그들의 곤경도, 또한 그의 도움도 환상이라는 것을.
5)보살의 정신적 진전은 열 개의 단계로 나눈다. 화엄은 十地로 정리했다. 처음 6단계는 자신의 완성에, 다음 7째부터는 천상적 보살의 無功用行, 즉 인위적 노력이 필요 없는 실천의 삶, 마지막 10째 단계에서 그는 여래가 된다.
十地(십지)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52위(位) 중, 제41위로부터 제50위까지. 이 10위는 불지(佛智)를 생성(生成)하고, 능히 주지(住持)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온갖 중생을 짊어지고 교화 이익케 하는 것이, 마치 대지(大地)가 만물을 싣고 이를 윤익(潤益)함과 같으므로 지(地)라 이름. (1) 환희지(歡喜地). 처음으로 참다운 중도지(中道智)를 내어 불성(佛性)의 이치를 보고, 견혹(見惑)을 끊으며 능히 자리이타(自利利他)하여 진실한 희열(喜悅)에 가득 찬 지위. (2) 이구지(離垢地). 수혹(修惑)을 끊고 범계(犯戒)의 더러움을 제하여 몸을 깨끗하게 하는 지위. (3) 발광지(發光地). 수혹을 끊어 지혜의 광명이 나타나는 지위. (4) 염혜지(焰慧地). 수혹을 끊어 지혜가 더욱 치성하는 지위. (5) 난승지(難勝地). 수혹을 끊고 진지(眞智)ㆍ속지(俗智)를 조화하는 지위. (6) 현전지(現前智). 수혹을 끊고 최승지(最勝智)를 내어 무위진여(無爲眞如)의 모양이 나타나는 지위. (7) 원행지(遠行智). 수혹을 끊고 대비심을 일으켜, 2승의 오(悟)를 초월하여 광대무변한 진리 세계에 이르는 지위. (8) 부동지(不動地). 수혹을 끊고 이미 전진여(全眞如)을 얻었으므로, 다시 동요되지 않는 지위. (9) 선혜지(善慧地). 수혹을 끊어 부처님의 10력(力)을 얻고, 기류(機類)에 대하여 교화의 가부(可否)를 알아 공교하게 설법하는 지위. (10) 법운지(法雲地). 수혹을 끊고 끝없는 공덕을 구비하고서 사람에 대하여 이익되는 일을 행하여 대자운(大慈雲)이 되는 지위. 또 이것을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ㆍ방편ㆍ원ㆍ역(力)ㆍ지(智)의 10바라밀에 배대하기도 함. 그런데 보살 수행의 기간인 3대 아승기겁 중, 처음 환희지까지에 1대 아승기겁, 제7지까지의 수행에 제2대 아승기겁을 요한다 함. 이상은 대승 보살의 10지(地)이고, 이 밖에 3승을 공통하여 세운 삼승공십지(三乘共十地)인 간혜지(乾慧地)ㆍ성지(性地)ㆍ팔인지(八人地)ㆍ견지(見地)ㆍ박지(薄地)ㆍ이구지(離垢地)ㆍ아판지(已辦地)ㆍ지불지(支佛地)ㆍ보살지(菩薩地)ㆍ불지(佛地)도 있음.
6)붓다를 성취할 때 보살은 붓다의 三身, 세 개의 몸을 실현하게 되니 報身, 法身, 化身이다.
146.불교는 삼계를 말한다. 三界唯識. 욕, 색, 무색계.
147.滅度, 불을 꺼라
붓다는 우루벨라의 해질 무렵 불을 섬기던 가섭 형제들을 데리고 산에 올랐다. 저녁노을로 불타고 있는 하늘을 보고 말한다.
붓다의 산상수훈
수행자들이여, 사람도 저와 같이 불타고 있다. 사람의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 1)눈이 타고 있고 눈의 인식대상인 물질이 불타고 있다. 귀가 타고 소리가 탄다. 이것은 무엇 때문에 불타고 있는가. 2)그것은 貪瞋痴 삼독 때문에 타는 것이다. 그로 인해 생노병사가 타고 있다. 또한 근심, 슬픔, 번뇌, 괴로움愁悲惱苦이 타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여, 이 모든 불타는 것과 그 원인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일체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가질 때, 삼독의 불꽃이 꺼지고 四苦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될 것이다. 항상 잊지 말라.
148.법화경은 三界火宅을 말한다. 집이 온통 불타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속에서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않는다.
149.불교는 줄 것이 없다. “붓다는 왜 왔는지 모르겠다”거나 “붓다는 40년간을 장광설을 늘이고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우기는 것이다. 사실, 불교는 줄 것이 없다, 탐진치를 뺏어가고서, 붓다는 다시 오금을 박는다. “열반은 탐욕과 증오, 어리석음의 끝이다.”<상유타경>
149.四相, 무아로 여는 평화
구분 |
콘즈 |
각묵 스님 |
한형조 교수 |
我相 |
자기 |
영원불멸의 자아 |
개인적 수준의 자아의식 |
人相 |
존재 |
심리적인 인격의 중심 |
집단적.종족적 수준의 자아의식 |
衆生相 |
살아있는 것 |
개별적 생명 |
자신의 생명보존 원초적 욕구 |
壽者相 |
인간 |
죽어서도 지속하는 영혼 |
인간생명지속에 대한 무의식적 조바심 |
154.자아의 토대
우리는 이런 다양한 수준에서의 자아의식을 토대로 세상을 본다. 당연히 예외 없이 주관적 이미지相다.
이렇게 자기가 만든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삼계유식이라 한다. 나 밖의 대상은 언제나 ‘나에 대해서만’ 가치의 의미를 가지므로 빨간 딱지와 파란 딱지, 혹은 하얀 딱지로 구분한다. 나 밖의 것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만 인지되면서 이름표를 붙인다.
이 활동, 자연을 포획하여 재갈을 물리고 그것을 나의 목적에 맞게 노예로 부리는 모든 활동의 기저, 그것을 우리는 ‘나’라고 부른다. 우리가 말하는 세상, 혹은 인간관계는 이런 도구화의 위태롭고 불안정한 , 주로 엇갈리고, 때로 충돌하는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음을 고쳐야 세상 안팎의 평화가 온다. 이것이 ‘마음의 비밀’이다.
환상의 거짓 마음(假我)을 비우고, 진정 나였던(眞我) 마음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佛道다.
문득, ‘가아’의 마음을 비울 때 도구화의 네트워크였던 세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전혀 다른 천지가 펼쳐진다. 깨달음이다. 四相으로 인한 의식무의식적 오염을 제거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156.금강경은 말한다. 야생의 소를 길들이듯, 우리는 마음을 항복시켜야한다. 그 길들임의 온전한 과정을 十牛圖/尋牛圖는 열 개의 그림으로 정리해 두었다.
158.무지의 양상에 다른 생명 분류-혜능은 중생을 아홉 가지로 분류했다.
1)난생 2)태생 3)습생 4)화생 5)유색 6)무색 7)유상 8)무상 9)비유상비무상
160.혜능은 滅度, 즉 위대한 평정(涅槃)과 자유(大解脫)란 번뇌와 습기, 그리고 일체의 업장이 멸진하여 다시 찌꺼기가 없는 경지라고 썼다.
소승과 대승은 주도권을 놓고 싸울 일이 아니다. 여기서 혜능은 돈교를 열었고 돈교는 업장과 습기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자기 속의 본래의 힘과 광명을 믿고 따르는 단순한 길이다. 보살은 자기 속의 불성을 믿고 구원을 위해 부지런히 가는 길이다. 그래서 大乘起信이라 했으니.
혜능은 말한다. 망심이 거주하지 않은 것을 보리라 했으며, 생사와 열반은 본시 평등하다. 어디 다시 멸도할 일이 있겠는가!
163.無常한 法界는 부단한 生住異滅의 과정 속에 있다. 生死는 무릇 오고가는 법계의 무심한 변화일진데 우리는 가만 두지 못하고 관심과 충동에 따라 괜히 시비를 거는 것이다.
164-5.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중생과 불성은 다르지 않다. 다만 四相 때문에 무여열반으로 들어서지 못하는 것이니, 사상이 없으면 부처, 있으면 중생이다. 헤매면 부처도 중생이 되고 깨달으면 중생도 부처가 된다.
166-70.四相의 요체-반응의 동시성
혜능은 중생과 수행자들을 구분해 사상을 설명한다. 즉 두 세트를 준비해두고 요체를 설명하면서 무심 공부를 하라고 다그친다. 있으니 있고 문득 없으니 없다고 獅子吼를 토한다.
제4장. 세상에 공짜도 있다
180.應無所住 行於布施 계산이나 기대 없이 보시하라.
182.空의 축복
늘 거기 있었으면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대체 무엇인가. 예컨대 어린아이의 미소, 쌀과 공기와 구름, 나를 존재케 하는 것들에 대한 고마움 등이다. 이 각성과 더불어 우리는 사물을 전혀 다르게 보기 시작하며 아울러 그는 無我라는 이름의 자기 존재와 마주 본다.
처음 1)우리의 욕망과 그 ‘대사물’이었던 遍計所執의 세계는 2)사물이 서로 서로 관계하고 있는 依他起의 세계로 이동한다. 이것은 시선의 혁명적 전환이다. 그것은 욕망과 그 충족의 전망에서 바라본 시선이 아니라 유희와 소요의 시선이다. 그로써 돼지의 눈에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과 만나는 자기 혁명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거기서 남을 비난하기를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종교적 진화이자 치유의 시작이다. 그는 전혀 다르게 살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자기 마음의 우상을, 토대를 , 즉 相을 깨뜨림으로 얻은 것들이다. 그 축복은 세상 어느 것으로도 비유할 수 없다.
보살의 토대 없는 보시 복덕은 이 우주공간처럼 측량할 수 없다.
184.현실적으로 자기만족의 흔적 없이 또 돌아올 보상의 기대 없이 베풀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것은 위대한 실천이기 때문에 이것이 이룩한 공적은 양으로 계산할 수 없다.
남이 잘 되기 바라는, 항상 기뻐하며 고마워하는 마음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고 바라는 불성임을 알 때 이미 위대한 깨달음의 절반은 온 것이다.
자신 속의 잠재력을 격발시키려면 때로 충격요법이
유상보시, 무상보시, 무상심보시 필요하다. 남다른 고통을 겪거나 죽음의 문턱에 서본 사람은 이런 전환의 기회가 더 많다. 원효도 “生死를 한 번 겪어보아야” 불도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시간은 없다, 삶은 찰나이고 문 밖은 저승임을 몸으로 깨달은 사람은 이미 이전의 그가 아니며 자신의 껍질은 벗고 남을 향해 의미의 시선을 던지게 되니 이것이 初發心으로 그것으로 깨달음의 절반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 마음 하나 바꾸면 삼계가 함께 춤을 추며 노래한다. 如來들이 둘러서서 축복하고 일체의 人天 아수라가 그를 돌며 공양을 올린다.
186.보시는 아니, 나 자신을 향해 있다
혜능의 세 가지 보시
1)유상보시-범부들의 보시
2)무상보시-보살의 보시
3)무상심보시-주고받음에 아무 흔적이 없는 경지. 베푼다는 마음이 없고, 베푸는 물건도 보지 않으며 베풂을 받는 사람도 분별하지 않는다. 이것을 三輪淸淨이라 한다.
188.보시란 오직 늘 淸淨으로 돌아가 있고 만법의 空寂함을 각성한다. 만약 이 취지를 모르면 다만 제업을 늘릴 뿐이니 모름지기 안으로 탐애를 제거하고 밖으로 보시를 행할지니 안팎이 상응해야 얻는 복이 무량하다. 다른 사람이 악을 저지를 때도 그 허물을 보지 않고 자성에 분별을 내지 않는 것, 이것이 상을 떠났다는 뜻이다. 가르침에 따라 수행함에, 마음에 나와 그 대상이라는 구분(能所)이 없으면 곧 善法이다.
196.21세기는 불교와 유교의 시대다. 기독교 또한 이념의 도그마를 권위적으로 설파하는 역사신학보다 개인의 영성과 각성에 주력하는 영성신학이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다.
197.불교는 解脫·涅槃에 유교는 修身濟家治國平天下를 기본이념으로 삼는다.
제5장. 여래는 오지 않는다
210.여래는 상이 없어 육안으로 볼 수 없으니 오직 혜안, 지혜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215.법신은 얼굴이 아니고 마음이다. 법신을 본 자, 자기의 본성을 그리고 인간의 비밀을 본 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비전을 갖고, 사람들을 대하는 전혀 다른 태도를 키워갈 것이다. 그것은 성취와 실패, 잉과 손해 등의 속물적 삶을 누그러뜨리고 존재의 부름에, 삶의 의미에, 교감과 배려에 근거를 둔 삶이다.
이 無住相布施는 아상 없이 아낌 없이 주는 삶을 살라......가까이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잃지 말라. 그 실천의 삶이 반야바라밀이고......그렇게 사는 사람이 여래고 보살이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청정무구의 빛은 환하고 밝은데 우리의 무지(無明)으로 보지 못하고 오랜 윤회와 습기의 장애로 그 功能을 스스로 마비시켜왔거늘......
216.여래는 없지만, 그러나 있다. 이 역설을 야부는 한꺼번에 송하고 있으니
山是山 水是水 佛在甚麽處 有相有求俱是妄 無形無見墜偏枯 堂堂密密何曾間 一道寒光爍太虛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그런데 부처는 어디 있는가. 이미지/相에 붙들려 있거나 ‘지금 여기’ 너머를 추구하는 것은 허망한 시도라네. 그렇다고 여래는 없고 만날 수도 없다는 것은 절망의 구렁텅이. 보라, 저기 뚜렷하고 촘촘해서 한치 틈도 없는 것을.......차가운 빛 하나가 태허를 깡그리 태워버렸네.
218.廻光返照, 스스로에게 속지 말고 스스로를 돌아보기가 佛道의 決定이고, 명상과 좌선이 절실한 것이다. 불교는 역시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보다 더욱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종교이고 철학이다.
219-20.왜 여래를 눈으로 볼 수 없는가
<금강경>의 눈은 말한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여래가 법신을 드러내고 싶어서 일체의 상이 허망하다고 설한다. 만약 일체의 상이 허망할 뿐, 알맹이가 없는 것을 깨닫는다면, 즉 그는 여래가 무상인 이치를 볼 것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물질보다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더 고귀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또 다른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질의 우상보다 정신의 우상이 더 위태롭고 위험하다. 진리의 이름으로 특정종교를 독단화하는 사람들, 정의의 이름으로 특정 이념을 기치로 내거는 사람들이 저지른 죄와 피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불교는 진리를 우상으로 권력화하고 소유로 소외시킬까봐 여래를 희망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를 보자기에 숨겨버린다. 이 “쓰고 지움”이야말로 <금강경>이 베푸는 위대한 노파심이다.
기억하라. “여래 또한 그대 의지의 상관물일 뿐이니 여래가 인간의 몸을 하고 위대한 자의 표징을 하고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난감한 우리 앞에, 문득, 야부의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어디 말해보라. 지금 行住坐臥, 가고 서고 앉고 눕는 자는 누구인가. 제발 잠 좀 깨라. 바다 속에 몸 담그고 물 찾느라 법석이고, 날마다 봉우리를 오르면서 산을 찾아 헤매느냐. 꾀꼬리 우짖고 제비 지저귀는 소리가 다 매한가지니 앞의 셋은 무엇이고 뒤의 셋은 또 무엇이냐고 묻지 마라.
221.起信論/함허 득통
‘일체의 경계는 오직 망념에 의지해서 생긴 차별이니 만약 心念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의 상이 없어진다. 만일 모든 相이 상이 아님을 본다는 것은 색을 떠나 공을 보겠다는 離色觀空, 즉 지금의 형상을 버리고 다른 실체를 찾는 태도를 차단시키려는 것이다.
즉 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듣고는, 이제 無相인 佛身을 따로 구할까 보아, 다시 말하는 것이다.
224.유교의 성립. 불교의 득세, 다시 유교로, 새로운 유교, 즉 주자학의 탄생, 실학의 탄생.
231.이것이 대승이 가르친 핵심이이다.
붓다의 대답은 차원이 높으니 계율 준수나, 가부좌 등 자세 갖추기, 혹은 심리적 치료 같은 것을 말하지 않고, “즉 정신의 영웅, 보살에게는 자의식이 없다. 그런 사람이 되라. 자신을 넘어서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그러나 유의하라. 남을 위한다는 턱없는 우월과 자만을 갖지 않도록.....
233.如理實見分. 사태/理를 환상 없이 있는 그대로 본다
붓다는 덧붙인다. “무엇보다 환상을 갖지 마라. 자아의 환상은 물론이고 더욱 붓다와 여래에 대한 환상조차 갖지 마라. 내 분명히 말하노니, 여래는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마라. 네가 기다리는 님은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일 뿐이다.“
제6장 뗏목으로서의 불교
241.“진리는 없다. 그것을 알기에 진리라 한다. 그렇다고 진리가 없다는 판단에 빠지는 것도 또한 또 다른 허무의 자의식이니라. 그래서 말하노니 진리에도 빠지지 말고, 진리 없다는 데도 빠지지 말라. 이런 뜻에서 늘 말하지 않더냐. 수행자들이여, 내 말은 뗏목과 같아서 물을 건너면 버릴 줄 알아야 함을, 진리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진리 아닌 것임에야......“
244.불완전하고 오염된 언어 : 나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이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님의 침묵》 서문
色卽是空-우리가 보는 사물이 객관에 속하지 않고 주관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간단한 듯하나, 발뒤꿈치 돌리면 열릴 듯하나, 그러나 몇 겁을 태워도 다가서지 못할 높디높은 진실임을 새겨두자.
生死, 善惡, 美醜, 是非에서 최종적 범주인 有無를 넘어서는 곳에 객관적 사태/眞如로서 법이 있다. 그 자리를 대승 中觀은 中道라 부른다. 그래서 中道는 不可說,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四句百非라 어떤 판단도 중도 근처에 갈 수 없다. 하여 끝없는 ‘부정’이 중도의 전매특허가 되었다. 조주의 無자 공안의 비밀도 거기에 있으니 긍정이든 부정이든 언어나 판단을 통해서는 진실의 옷자락을 만질 수 없다.
246.뗏목의 비유
<금강경>은 뗏목의 선언을 통해 자신의 진리를 교조화하고 종교적으로 조직화할 길을 근원적으로 차단했다. 이 방편론에 철저함으로써 불교는 피비린내 나는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잔혹을 피할 수 있었다. 불교는 스스로 버림으로 써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 되었다.
259.四相을 극복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나
1)無我상이란 受想行識, 즉 감정, 지각, 의지, 의식 없다는 것이고 2)無人상이란 내 몸의 四大가 지속성이 없고, 마침내 地水火風, 먼지와 대지로 돌아가는 것 3)無衆生상은 生滅심이 없다는 뜻이며 4)無壽者상은 내 몸이 본래 없는데 무슨 나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이미지의 환상에 잡히지 않을 때 지혜의 法眼이 차갑게 뚜렷해진다. 그는 더 이상 유와 무의 이분법에 고착되지 않고 주장의 양 극단을 떠나게 되니 自心如來는 自悟自覺이라 번뇌와 망념에 이별을 고하는데, 그로 인한 복락이 무한하게 펼쳐진다.
262.說一體有部
초기 소승 아비달마는 자아의 통합적 중심은 없지만(즉 無我), 그렇더라도 五蘊은 실재한다고 말했다. 일체의 고차원적 사물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학파.
대승은 이 고차원적 사물, 즉 법의 실체를 부인하면서 출범하고 <금강경>은 그 주장의 가장 강력한 설파자인 中觀의 핵심경전임을 기억하자. 여기서 혜능은 “무아란 수상행식조차 없음을 말한다.”
265.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은 금강경의 마지막 구절이며, 모든 게 꿈이고 연기고 신기루고 그림자고 이슬, 번개 같다는 것.
266.空이란 혜능의 표현을 빌리면 有와 無 사이에서 오랜 방황을 끝내는 일이다. 분별, 양 극단, 이분법의 오랜 습성을 버리는 일이다.
269.금강경은 非法相의 구덩이에라도 제발 빠지지 말라고 달랜다. 그러면 어디에 기대는가고 물으면 중도를 부르며 보이지 않는 곳이 중도라고 설득한다. 중도야말로 훌륭한 善巧方便이니 우는 애를 어르는 종이돈에 혹하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러면서 경전은 불교의 가르침은 다만 뗏목일 뿐이라고 잡아뗀다.
277.不隨萎萎地 隨處作主 入處皆眞 우리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도 따르지도 베끼지도 말고 자신의 보고서는 자신이 알아서 작성해야 한다.
281.주먹을 펴면 손바닥인데
세상은, 그리고 너도 완전하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진리와 비진리 사이라, 주먹을 펴면 손바닥인 것을......뜬구름은 하늘로 흩어지고, 萬里는 다만 한 하늘로 길게 걸려 있다.
282.金은 金을 주조하지 못하고 물로는 물을 씻지 못한다. 아득한 절벽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 진정한 장부. 물은 차고 밤은 추워 물고기 흔적이 없으니 빈 배에 달을 실어 집으로 돌아올 뿐.
제7장 無爲法 안의 개성들
291.진리의 정체를 아는가. 움직이는 활물이어서 쉽게 포착되거나 형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금강경이 말하는 뗏목의 비유를 늘 가슴에 새겨두라. 그렇다. 진리는 자신 안에 있던 힘과 빛이니 너 자신이 진리다. 그것을 불성이라 한다.
292.자기 속의 부처를 확인하는 것이 頓悟라면, 부처를 보호하고 성숙시키는 것이 漸修이다.
295.진리는 소유할 수 없다. 그것이 마음에 차지하는 순간, 너는 너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지리의 노예로 떨어질 것이다. 돈교는 단도직입적으로 ‘깨달음은 없다’고 선언한다. 그것이 미리, 누구에게나 성취되어 있으므로 찾거나 얻을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며, 그 새삼스런 자각으로 인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299.無爲法은 무아, 무념, 무상 등 자아의 분별에 추동되지 않는 완벽한 행동. 생각의 방해 없이 행동하는 것.
303-4.위태로운 언어
선은 언어에 극단적 불신의 태도를 가지고 있으니, 원효는 “眞如는 언어를 떠나 있지만, 또한 언어에 의지하고서야 드러난다.” 離言眞如 依言眞如
제8장 이 四句偈를 수지하는 복덕이
317.금강경에서 붓다는 역설적 화법, 즉 수시로 ‘줬다 빼앗곤 한다.’ 立破與奪 아니면 ‘오리발 내밀기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를 귀의처로 삼아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라.
自燈明 自歸依, 法燈明 法歸依
이 열반송의 유훈에서 밝힌 것처럼 붓다는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르침이 절대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인지 후대의 저명한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종교적 체험을 논서나 경전으로 엮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 후대의 저작물을 경·율·논의 삼장에 포함함으로써 붓다의 말씀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교단의 열린 풍토는 불교사상을 확장하고 심화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붓다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불교의 수행과 공부는 불조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논사, 수승한 선사라 해도 붓다의 견해를 뒤집을 수는 없으며, 아무리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후대에 성립한 경전 구절이 초기경전의 위상을 깎을 수는 없는 것이다. 대승경전인 금강경을 바탕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금강경은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이 근본지침으로 삼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이다. 붓다의 깨우침과 가르침을 가장 체계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금강경은 불교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읽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불교경전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법으로 경전 공부를 한 스님들조차도 금강경은 어렵다고들 한다. 한자로 의역이 된데다 중국 선종(禪宗)의 맥을 잇는 조계종의 특성상 금강경에 대한 불교계의 주류해석은 다분히 선(禪)적이며 교조적인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경전들에 비해서 금강경에 대한 다양한 해설서들이 나와 있지만 내용이 각양각색이어서 오히려 경구의 원의를 헛갈리게 하기 십상이다.
제9장 아라한, 혹은 불교적 성숙의 네 단계
336.소승의 四果/聲聞四果
1)수다원/성스런 흐름에 들어선 자
2)사다함/단 한 번만 오가는 자
3)아나함/이제 더 이상 오게 되지 않게 된 자
4)아라한/자신과 다투지 않게 된 자. 넘쳐나는 것들(즉 감각, 욕망, 변전, 무지, 잘못된 견해)을 완전히 말려버려서 위대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며, 목표를 성취한 사람, 윤회에 매이지 않는 사람, 사물을 올바로 봄으로써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5)아란나/無諍三昧/깨끗한 삶을 위한 길/正見
348.눈이 있어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 의지가 눈이라는 기관을 만들어낸 것이듯이 의지가 윤회를 부른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으려면 맹목적 삶의 의지를 끊어야 한다.
356.卽心是佛 心卽是佛 自心是佛 육조단경은 이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지어졌다.
제10장 누가 불국토를 장엄하는가
363.우리가 불국토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불국토가 우리를 찾는다
366.應無所住 而生起心 그 어떤 토대에도 의존하지 말고 마음을 내어라/살아가는 법을 배워라.
371.무릇 금강경은 無相을 宗으로, 無住를 體로 妙有를 用으로 한다.
373.지눌과 혜능의 합창
혜능의 노래는 키워드를 자성에 둔다. 그는 무소득의 소식을 이렇게 노래한다. ‘그가 깨달은 것은 단 하나, 자성이 본래 청정하며 본래 번뇌 장애가 없다는 것, 그것은 自性佛로서 늘 寂而常照하다는 것, 하나이다.
지눌은 자성에 대해 화답한다. “네 몸에 있는데 다만 네가 보지 못할 뿐이다. 너는 하루 내내 배고픈 것을 알고 기뻐하기도 하고, 성질 내지 않느냐. 그게 바로 ‘그것‘이다.” 지눌은 다시 친절을 베푼다. “네 마음이 그렇다니까, 못 알아듣고서 무슨 수를 써야 하느냐고 묻느냐. 무슨 수를 쓰자고 들면 지식이 개입되고, 그럼 일은 어그러져 버린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제 눈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으니, 사물이 보이는 것으로 ’내 눈이 있구나‘ 하면 되지, 다시 그걸 찾아다닐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찾을 생각도 말고 안 보이니 어쩌니 하는 생각도 하지 말라. 내 마음의 신령스런 작용도 마찬가지라, 이미 활동하고 있는데 어디서 다시 찾을 것인가. 찾으려고 들면 못 찾은 것이고, 찾을 수 없다는 걸 알면, 바로 견성한 것이리.” 다시 이어진다. “道는 알고 모르고에 달려있지 않다. 나는 지금 모른다,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를 알려하는 마음부터 접고 다시 새겨들어라. 네게 보이는 사물은 다들 이미지에 불과하고 너의 수많은 생각 또한 본시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렇게 안팎이 비어 있는空寂 고에 신령스런 지식靈知의 작용이 환하게 밝다. 이것이 너의 본래면목이니 이것을 깨달으면 사다리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처의 지위에 오른다. 그때 너는 하늘과 땅의 스승이 되어 지혜와 자비의 두 날개로 自利와 利他를 갖추어 천지의 공양을 받을지니 진정 대장부로 일생 해야 할 일을 마쳤다.”
379.感而遂通-주역의 쾌. 제행무상, 모든 게 끈임없이 변하니 마땅히 사물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줄 알아야 한다.
觀音入理之門-세상의 수많은 소리를 분별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러면 虛空이냐, 제법무아, 형태가 없으니 마땅히 분별심을 내지 말라. 이것을 本來空寂이라 한다.
381.自性 혹은 佛性이란 우리 심신의 작용. 心卽是佛/作用是性-있는 그대로다/지눌
412.스티브 잡스-나는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죽음, 그것은 삶을 바꾸는 손이며, 낡은 것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위해 길을 내는 것이니, 지금은 당신이 새로운 것에 속하더라도 얼마 가지 않아 낡은 것이 된다.
제13장 이 지혜를 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하노니
418.佛說 붓다가 지혜라 하지만, 卽非 기실 지혜가 아니다. 是名 그래서 지혜라고 한다.
주었다, 빼앗고, 혹은 오리발을 내밀고.-無實無虛法/없으나, 그러나 있다.
422.내가 그동안 혀를 두드려 가르친 바 ‘불교는, 그대들의 그릇된 자아의식을 부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 가르침이 담긴 책을 신성한 장소에 보관하여 경배하지 말라. 희망을 주기 위해 약속한 여래 또한 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붓다는 치고 빠지며, 혹은 주었다 빼앗고, 오리발도 내밀면서 부정과 부재를 선언이야말로 末後句, 즉 불교의 진정한 희망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死卽必生 生卽必死 일전을 불사해야 전쟁을 막고 百尺竿頭進一步 아득한 절벽에서 발을 내디뎌야 길이 생기듯, 외물에 기대는 바가 없을 때,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동력의 자유와 힘을 얻는다.
429.슬픔은 정화와 성찰의 계기가 된다. 하이데거는 슬픔이야말로, 나아가 죽음이야말로, ‘존재의 부름’에 귀 기울이게 하는 계기라고 했으니. 슬픔은 찐득한 욕망과 얕은 일상의 거품에 허우적거리는 우리네 삶을 고양시키고 근원으로 환원하게 한다. 그 성찰이 희망이다. 어느 소설가는 ‘슬픔도 힘이 된다’고 했으니 여기서 그런 성찰은 일상에 공채의 의미를 가지게 한다. 님의 부재를 그리워하며, 부재의 임재를 의식하면서 만해는 불교의 헌신적, 자비적 가치를 설파하고 있다. ‘그대 지금, 누구를 그리워하고 있는가. 그대 지금 누구를 위해 울고 있는가.’
431.여기 만일 얻은 바 있다면 피안에 들지 못한다고 했거늘, 결코 피안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자리다. 네가 있는 곳.
432-4.愚心生滅. 혜능은 반야바라밀의 타켓을 거기에 둔다. 어리석은 마음에 오가는 생멸이다. 대승기신론은 마음에 두 종류가 있다고 했으니 ‘마음의 바탕’ 과 ‘마음의 파장’이니 전자를 心眞如, 후자를 心生滅, 붉는 마음의 근원을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다른 지평에서 본다는 점이다. 그곳은 의식의 잡동사니 ㅊ아고를 훌쩍 넘어선다. 마음의 바탕은 고래나 자라, 고기떼, 수많은 수초가 있는 활발발한 장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삶이 괴로운가, 자신의 삶을 보는 자기 자각의 불투명성, 불철저함에 기인한다. 자각적 주시는 괴로움을 1차적 차원에 묶어둔다. 그것조차 없다면 2차원으로 들어서서 종횡으로 괴롭힌다. 하여 ‘오로지 밖을 향해 탓하지 마라. 고통은 거의 대부분 그대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6근, 6경, 6식의 18계 이론을 통해 불교는 그것을 깨우치고 가르칠 뿐이다.
438.금강경은 세속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행자들, 종교 종파를 떠나서 소위 길을 간다는 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계하고 또 경계한 경전이다. 진정 불도를 익힌 자는 불교의 냄새를 풍기지 않음을 항상 기억하고 조심하라.
439.無生의 이치 혹은 진리
반야바라밀은 보리심을 발휘하게 하고 無生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無上의 도리를 성취케 하려는 것이다. 무릇 無生은 자연의 탄생과 번식을 멈춘다는 뜻이 아니고 심리적 변전과 윤회를 벗어난다는 뜻이다.
444.지눌의 당부-수심결에서
풀을 돌로 누르듯이 망념을 제거하려 들지 마라. ‘그만큼 위험한 시도가 다시없다’고 경계하셨다. 세 가지 길을 말한다.
1)只管打坐, 다만 앉으라, 좌선을 통해 먼지는 가라앉는다.
2)세속적이지 않고 경쟁적이지 않는 자기만의 가치를 추구하라. 그거면 충분하니 자유고 열반이다.
3)종교/철학을 배워라. 이 영혼의 기쁨은 모두를 즐겁게 한다.
445.婆子燒庵-노파와 땡중의 화두
447.마지막 구절, 일체 유위법이라 하니 마음이 멸하는 곳에 마음으로 하여 출몰하는 법상의 세계를 멸하라. 그래서 세계라 한다.
450.남의 티끌은 보면서 제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중용은 충고한다, 말은 내 행동을 돌아보고 하라고.
451.혜능은 五根(안이비설신) 중에 육바라밀을 닦으라. 意根 중에 無相無爲를 닦으라. 이 둘을 항상 훈련하여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처럼 협력하라 했다.
제14장 법문을 듣고 뜨겁게 울다.
465.혜능의 역설-無識불교-유식도 갖지 마라
제14장 마무리
왜 불교인가-無實無虛, 삶의 역설적 기술
473.금강경 칠사구게
금강경 사구게
1.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나니
만약에 모든 상이 상 아님을 안다면
곧바로 그 자리서 여래를 보느니라
2.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3.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만약에 색상으로 나를 보거나
소리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지라
여래를 능히 보지 못하느니라
4.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분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유위법
꿈과 환과 물거품 그림자니라
이슬 같고 또한 역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5.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항비법
(내가 설한 모든 법문은 뗏목과 같은 줄을 안다면 법이라 하더라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이야 말할게 있겠는가?
6.시법평등무유고하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 이 금강경의 법문은 고저빈부귀천 분별없이 평등하니 이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즉 아.인.중생.수자상을 내지 않는 마음이다)
7.여래자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여래는 온 곳이나 간 곳이 없음으로 즉 왕래가 없음으로 여래라 하느니라)
476.선도 화두도 이름이다.
부록
486.화두조차 틀에 잡힌 격식이라 하여 전통을 깨고 격외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다.
490. 불성
. .
492.불교의 3요소는 불성과 번뇌, 지혜
494.걱정하지 마라. 불성은 어떤 번뇌나 업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결코 소멸되는 법이 없으니.
496.금이 산중에 있어도 산은 이것이 보물인 줄 모른다. 보물도 이게 산인 줄 모른다.......
*‘축의 시대/카렌 암스트롱’을 읽으면서 한때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종교는 인간이 만든 창작물 가운데 최악의 실패작임을 느끼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면서 철학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인간이 악/선해지는 원인을 종교에서 찾으려 했는데, 아뿔싸, 종교가 더 극악한 집단인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종교에서 구원을 얻기를 포기했다. 구원은 철학에 있거나 아니면 차라리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시(詩)에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에 한 가닥 즐거움이 있다. 극명하게 말하건대 내가 죽을 때까지 종교는 인류를 구원해주는 절정의 도구는 아니라는 확신에 변함이 없을 것이다.
미워하지 마라, 판단을 그르칠 것이다. -갓 파더. 마론 부란도
깨달아서 뭐 할 건데? 수많은 역대 조사들이 제도 중생을 부르짖고 나섰으나 지금까지 변한 게 없는데, 우리는 천지개벽의 능력이나 손오공의 재주 있어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나서는 것일까. 그냥 살다가 가소. 그러나 가장 완벽해 흠잡을 곳 없는 붓다 말씀을 묻히기 아까워 우리는 그대로 가야겠다.
2015.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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