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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스크랩] <공(空, 산스크리트어 sunya, sunyata)>이란

               <공(空, 산스크리트어 sunya, sunyata)>이란

                                

                   

   공(空)’이라는 용어의 산스크리트어 원어는 ‘sunya’라는 형용사로서 ‘속이 텅 빈’, ‘부풀어 오른’, ‘공허한’ 등의 뜻을 가졌고, 명사 ‘sunyata’라는 용어는 공한 것, 공성(空性), 영(零)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결국 공은 ‘부풀어 오른 모양으로 속이 비어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자니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빌 공(空)’자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空)’이라는 글자가 산스크리트 원어 ‘sunya’, ‘sunyata’의 참뜻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따라서 ‘空(공)’이라는 한자에 너무 집착하면 원래 의미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불교에 있어서 ‘공(空)’의 개념은 특수하다. 공사상(空思想)은 초기불교의 무아(無我)와 연기설(緣起說)의 일차적 변신이요, 재해석으로서 붓다의 기본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힌 대승불교 핵심사상이다. 따라서 공사상은 대승불교를 사상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철학사상이라 단언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말을 부정한다. 그리고 공은 인연(因緣)에 대한 해석이다. 인연으로 인해 태어난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는 말로서,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모든 고정된 속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은 단순히 소극적인 허무가 아니라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 무애자재(無礙自在)하는 절대적인 존재방식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공사상을 정립한 사람은 용수(龍樹, 나가르주나/Nagarjuna, 150?-250?)이다. 불멸 후 100여년이 지나자 교리의 해석문제로 의견충돌이 일어나서 점차 교파가 분열되기 시작함으로써 부파불교시대가 시작됐다. 그리고 소위 부파불교시대의 특징인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교학이 등장해 번쇄한 논장이 무성하게 발전했고, 윤회에 있어서는 중심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겼다.

   그에 따라 불멸 후 300년 경에 이르자 초기불교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었던 무아론(無我論)은 차츰 세력을 잃어가는 한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법체설(法體說)을 주장하고, 독자부(犢子部)에선 생사윤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윤회하는 개개 존재의 인격주체로 개아(個我, 人相,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했다.

   이러한 부파불교 아비달마교학의 잘못된 교의에 반기를 든 사람이 중관학파의 개조 용수(龍樹)였다. 그는 그의 명저 <중론(中論, Madhyamaka-Sastra)>을 저술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반야경> 계통 공(空)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켜 부파불교의 법체설이나 개아설을 뒤집었다. 용수는 법체(法體)나 개체(個體), 이런 말은 모두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아체(我體)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부정하면서 연기의 인연관계를 떠나서 자성(自性)이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에 「무자성(無自性) - 공(空)」이라고 주장했다.

   즉, 공(空)은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의 법체설(法體說)과 독자부의 개아설(個我說, pudgala) 등 유아론(有我論)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다. 부파불교에서 주장한 체성(體性)을 공격하기 위해 공(空)이란 말을 썼고, 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 dravya)’, ‘자아(自我, atman)’ 등과 같이 개개 인간의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공이란 말을 썼다. 그리고 용수 이후 공사상(空思想)을 기반으로 해 새로운 경전을 결집한 대승불교는 ‘유식(唯識)’과 ‘여래장(如來藏)’ 사상으로 발전했다. 이들에 의해 형성된 불교경전을 보면 공(空)이란 말을 심(心), 여래장(如來藏) 혹은 불성(佛性), 이(理) 등의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어 공(空)이란 마음(心)과 같은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공사상을 발전시킨 <중론(中論)>이 법의 고찰만 추구한 것과 달리 새로운 사상들은 공사상에 입각해 마음의 본질에 대한 규명에 중점을 두었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여래장사상’과 마음의 현실적 기능의 분석에 중점을 둔 ‘유식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여래장사상이고, 유식설이 아무리 뛰어난 논설이라고 해도, 공의 개념을 이론으로 이해하려 들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불교는 원칙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의 ‘공(空)’은 알음알이로 이해하려 들면 이해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공은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이며, 체득해야 하는 깨달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공을 알면 불교를 다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평생 공을 알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모르고 간 사람이 더 많다. 이론적으로 문자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바탕으로 하되 치열하고도 기나긴 수행 끝에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더 이상의 것을 알려면 수행을 통한 깨달음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언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공이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만 닿은 수 있는 영역이다.

   하지만 범부는 그래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문자로 어느 정도 알아야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게 중생들의 속성이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게 되는 것인데, 역시 범부들의 중생다운 행위이다.

   공(空)의 또 다른 측면을 보자. 공이란 곧 평등(平等)을 말한다. 인간에게는 영리하다ㆍ어리석다, 착하다ㆍ악하다, 재산이 많다ㆍ가난하다, 미남이다 ‧ 추남이다 등 여러 가지 분별이 있다. 그렇지마는 여기엔 모두 인간이라고 하는 평등한 면이 있다. 또 일체의 사물은 가지가지로 변해가지마는 그 변해가는 것 가운데 일관(一貫)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변한다고 하는 그 변하는 과정에는 어떤 준거(準據)의 틀, 곧 순서가 있다. 예컨대 봄(春) 다음에 반드시 여름(夏)이 오고, 여름 다음에는 반드시 가을(秋)이 온다. 이어서 겨울(冬)이 온다. 이 순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변화 가운데를 일관해서 변하지 않는 큰 것을 포착하는 것이 공을 아는 길이 된다.

   공이라는 것은 차별이나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무차멸(無差別), 곧 평등한 무엇인가를 잡는 것을 말한다. 흔히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니까, 모든 것이 다 허무(虛無)ㆍ허망(虛妄)하다며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정말 공(空)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에서 ‘색(色)’이란 모양을 뜻하며, 곧 차별을 뜻한다. ‘즉(卽)’은 떨어지지 않음(不離)을 의미한다.‘공(空)’은 평등, 즉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부언하면 차별이 있는 것, 곧 가지가지로 변해가는 것을 떠나지 않고, 그 가운데를 일관(一貫)해 있는 평등의 이치(理致)를 구한다는 것이 곧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천지간의 만물이 다 각각 다르다. 인간도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다른 인간을 떠나서 도(道)를 구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차별 있는 인생을 떠나지 않고, 그 차별 있는 인생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그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평등한 이치를 포착하는 것이다. 결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차별 가운데서 평등한 이치를 잘 분별하는 장점을 갖춘 이가 혜명 수보리(慧命須菩提) 존자이다. 그래서 공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해서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칭했다  

   공을 어떤 분은 무(無)라고 해석하고, 어떤 분은 수학에서 말하는 제로(0)라고 주장하는데, 공이라고 하는 말은 무(無)의 개념이 아니다. 공(空)과 무(無), 이 둘 차이를 이해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공하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실체가 없어서 모양이나 형태가 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모양이나 실체가 없지만 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온갖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 몸뚱이도 움직인다. 만약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라면 마음이라는 말도 없어야 하며, 없다는 표현 또한 붙일 수가 없다. 가만히 있으면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가 다시 생각이 일어나곤 한다. 그 원래 자리,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 그 자리가 공이다. 그렇다고 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 빈 자리에서 또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니 무(無)는 아니다. 

   이와 같이 공은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비어있다. 비어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무(無) - 없다'는 것은 고정된 주체(자아)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몸은 분명히 있다. 또 생각도 있다. 하지만 그 실체가 없다. 그러니 비어있어 공이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없는 듯 있는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산스크리트어 sunya'에 해당하는 공의 참뜻에 가까운 말이다. 허공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허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텅 비어 있으나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오고 가나 분명히 현상으로는 작용하나니, 즉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은 참다운 공을 말하며,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묘하게 존재하는 진공묘유의 관계, 이것이 나아가면 불교의 우주관이고 본질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공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비어있는 것을 말한다. 우주가 비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공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무(無)는 공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되므로 무(無)와 공(空)의 의미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무(無)는 존재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진공(眞空)조차도 무가 아니다.   

   공이란 자기부정이며,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며, 공 자체도 공하며,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란 이런 것이다. 공(空)한 그것도 공한 것을 공공(空空)이라고 한다. 이를 필경공(畢竟空)이라고 한다. 구극의 공(空)이란 뜻이다.

   진공묘유란 진실로 비운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비웠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움의 작용은 있다. 도인(道人)이 그 작용을 일으키면 그에는 아상(我相) ,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의 번뇌 없이 마음을 내는 작용이므로 도력(道力)이라 하지만 범부중생이 작용을 하면 온갖 망념이 덩달아 일어나므로 생각이나 행위 모든 것이 난잡할 수밖에 없다. 진공묘유의 작용은 지혜에 속하지만 군더더기가 붙은 마음의 작용은 번뇌일 뿐이다.

   공(空)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빛[因]이 프리즘[緣]을 통과하면 7색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果]과 같아서 진실로 비어있다(眞空)는 것은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妙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진공묘유란 불변하는 실체 없이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며, 공을 근원으로 해서 존재하는 절대 진리를 말한다. 공의 당체(當體-본체)는 공이 아니라 진공묘유이다. 그리고 좀 더 발전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진공묘유 그 자리가 바로 불성(佛性)의 자리이자, 자성(自性)을 말한다.

   "우리가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우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온갖 집착에서, 작은 명예에서, 사소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기를 텅 비울 때 모든 것이 비로소 하나가 되며, 자기를 텅 비울 때 그 어떤 것에도 대립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기 자신이 드러난다. 즉, 텅 비울 때 오묘한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모든 고난으로부터 해탈된 자기, 모순과 갈등을 벗어버린 자기, 개체인 자기로부터 전체인 자기로 변신이 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는 길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자기실현의 길이고, 형성의 길이다. 부처는 단지 먼저 이루어진 인격일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온전한 인간에 이르는 길이다." 법정 스님의 <일기일회> 중에서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 미 산(이 덕 호)

※여러 가지로 부족한 글입니다. 다만 공부하는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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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misan511
글쓴이 : 아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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