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뜰 앞의 잣나무―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란 중국 당나라시대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가 제시한 유명한 화두(話頭)이다.
한 선승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달마(達磨) 대사가 서쪽(인도)에서 가지고 온 불법의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말이다. 즉, 무엇이 선(禪)의 진리냐는 말이기도 하다. 인도가 중국에서 봤을 땐 남남서에 위치하지만 당시 중국 사람들은 인도가 서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했었다.
조주 선사는 달마(達磨) 대사가 인도에서 불교수행의 핵심인 선법을 중국에 가지고 온 뜻을 묻는 제자의 질문을 두 번 받았었다. 이 에 대해 조주 선사의 답은 두 가지로 달랐다.
한 번은,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였고, 다른 한 번은, “판치생모(板齒生毛)”였다. 전혀 다른 두 답이지만 엉뚱하다는 점에서는 통하는 데가 있다. 그리고 이러나저러나 전하려는 내용은 같았다.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는 <무문관(無門關)>37, <종용록(從容錄)>47, <선문염송(禪門拈頌)>421에 나타나 있으며, 조주백수(趙州栢樹)’라고도 하는데, 선가에선 인구에 회자되는 화두이다.
이 화두가 설해진 절은 조주 선사가 만년에 머물었던 곳으로 지금도 백림선사(栢林禪寺)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절 마당 앞에는 ‘잣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무’가 무성하다고 한다. 그러니 뜰 앞의 ‘잣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무’라고 번역했어야 할 것이 잣나무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백(栢)’의 한자를 ‘잣나무 백’으로도 쓰고, ‘측백나무 백’으로도 써 왔다. 그래서 처음 우리말로 번역할 때 ‘뜰 앞의 측백나무’라고 해야 할 것을, 번역자가 사정을 몰라서 ‘뜰 앞의 잣나무’로 번역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렇다면 이 화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이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내용이다. 오로지 ‘시심마(是甚麽, 이 뭣고)’ 하는 의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생각이나 분별 지식을 가지고 화두의 의미를 이해하거나 설명하면 오히려 사구(死句)가 되고 만다.
조주 선사가 말한 잣나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나무, 은행나무와 같이 나무의 종류를 구분한 분별상의 나무가 아니라, 주관(보는 사람)과 객관(나무)이 나뉜 상대적 상태가 아닌, 주객이 하나가 된 초월적 세계, 즉 진리의 세계 진여(眞如)를 가리킨다. 분별적인 개념으로서 잣나무라는 물체가 아니라, 눈앞에 현전(現前)하는 진리 당체(當體) 바로 그것이므로 측백나무라 해도 좋고 잣나무라 해도 상관없다. 핵심은 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현전하는 진리의 당체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화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생각이 막히고 논리가 끊어진 경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분별과 차별의 양변(兩邊)의 상대적 경계를 떠난 공(空)의 세계를 체득하라는 말이다. 이 세계가 중도(中道)의 세계이고, 일심(一心) 불이(不二)의 자성(自性) 본체의 마음자리이다. 이 세계는 언어문자와 사량 분별을 떠난 불립문자의 경계이다.
화두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이다. 또한 화두는 암호나 밀명과 같아서 지식과 알음알이로는 분석되지 않는다. 오직 큰 의심을 가지고 탐구하고 탐구하다가 보면 결국 어느 땐가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선불교와 화두의 속성이다.
따라서 화두는 깨달음의 경지이므로 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도 언어로서 법의 본체를 삼지 않았던 것은 말과 문자는 진리를 일러주는 적절한 도구가 못 된다는 것을 통감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이치를 터득한 가섭(摩訶迦葉) 존자가 말 이전인 부처님의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 涅般妙心)을 이어 받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어리석은 중생은 문자가 아니면 도무지 접근할 방법을 모른다. 그것이 중생의 한계다. 사정이 이러하니 굳이 이해를 돕기 위해 억지를 부린다면, 잣나무는 감정이 없는 ― 무심한 나무이다. 무심(無心)이란 공(空)한 것을 뜻한다. 즉 무심한 공(空) 상태가 바로 달마 대사가 서쪽(인도)으로부터 가지고 온 선(禪)의 진리요, 그대가 찾는 깨달음의 세계라는 말인데, 이런 해석도 주제넘은 짓이다. 그 진의는 말 밖에 있다. 허니 답을 찾느라 불교서적을 뒤적거리며 시간 낭비하다가, “가리키는 달은 바로보지 못하고 달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한다. 말을 함부로 덧붙이다간 곧 바로 어긋나고 만다. 그래서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했다.
선(禪)의 세계에서는 논리와 이론적인 구조를 가진 언어를 배격한다. 그러나 뭇 중생의 생각과 모든 문화가 언어문자에 의해서 사유되고 창조됐다. 따라서 언어문자에 의해서 기록되지 않는 인간의 문화와 사유의 세계는 쉽게 소멸되고 만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로 삼은 선종의 조사들도 ‘조사어록(祖師語錄)’이라 해서 자신이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은 경계를 기록해 방대한 선서(禪書)를 남기고 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고도로 상징화되고 축약된 내용을 제시했다. 이렇게 해서 선문답이 생기고, 1700공안이 만들어졌다. 다만 유의할 것은, 문자에 현혹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 이에 관련된 예화가 있다.
유명한 선어록의 하나인 <벽암록(碧巖錄)>에 송(頌)을 붙인 운문종(雲門宗)의 설두(雪竇重顯, 980~1052) 선사가 공부하러 다닐 때 어느 절에서 한 도반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한참 이야기하다가 문득 보니 심부름하는 행자(行者)가 빙긋이 웃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손님이 간 후에 행자를 불렀다.
“이놈아, 스님네들 법담하는데 왜 웃어?”
이에 그 행자가 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란 그런 것이 아닌 줄로 압니다.”
“그럼 뭐냐?”
“ ‘흰 토끼가 몸을 비켜 옛 길을 가니, 눈 푸른 매가 언뜻 보고 토끼를 낚아가네(白兎橫身當古路 蒼鷹一見便生擒), 뒤쫓아 온 사냥개는 이것을 모르고 공연히 나무만 안고 빙빙 도는구나後來獵犬無靈性 空向古椿下處尋)’라는 말처럼 ‘뜰 앞의 잣나무’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지 잣나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 눈 뜬 매는 토끼를 잡아가 버리고 멍텅구리 개는 '잣나무'라고 하니 잣나무만 안고 빙빙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뜰 앞의 잣나무’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는 것이니 나무 밑에 가서 천 년 만 년 돌아봐야 그 뜻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두는 암호와 같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생각나는 대로 이리저리 해석할 수 없는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조주 선사의 그 유명한 ‘무자(無子)’ 화두나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묻는데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고 답한 것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 자리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조주 선사는 일체망념이 다 끊어져 도인의 경지에 이른 분이다. 60세까지 한 곳에서 참선하고, 80세까지 20여년을 천하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때로는 법거래(法去來)를 하고 때로는 초심자들과 함께 선방에 기거하면서 보림(保任)을 닦았다고 하며, 80세부터 낡은 암자에 기거하면서 120세까지 후학을 위해 제도를 했다고 한다.
그런 조수 선사께서 무심경계(無心境界)의 경지에서 말씀하신 화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사처럼 식신분별(識身分別)이 끊어져야 한다. 이러한 도의 경지에 다다라야 스님이 보여준 진리 자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분별식이 남아있는 우리들 중생으로서야 그 본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다소간 선사의 마음자리를 들여다볼 줄 있어야 한다.
부처님의 심법(心法)을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이어받았다는 달마 대사가 중국에 와서 소림굴 속에 들어가 면벽(面壁)을 시작하니, 심법을 전해줄 사람을 기다리는 처지에서, 달마 대사가 전하려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 질문의 단초이다. 말로는 전할 수 없다는,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해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중국에 전해진 그 수많은 불경의 가르침은 무엇이기에 심법이 따로 있다며, 부처님의 정법(正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고 하며 달마 대사가 왔으니, 그 달마(達磨) 조사가 전하려 한 정법의 핵심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는 것이다.
그 답이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달마는 부처님 법을 전하러 온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 법이 무엇일까. 바로 깨치신 마음이다. 그러므로 달마 대사는 부처님이 깨친 마음을 전하려 중국에 온 것이다. 왜냐하면 달마 대사는 부처님이 깨치신 그 심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심법의 이치를 알리기 위해 중국에 온 것이다. 그러나 그 깊은 뜻을 알 리 없는 중생으로서야 답답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 심법이란 게 무엇일까. 이것을 찾는 것이 선(禪)이다.
이것은 경전에도 없다. 마음이 어떻게 경전에 있겠나. 다만 선(禪)공부하고 수행한 사람만이 심법의 진리를 알고 그 대답의 비밀한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경전에도 없는 것을 “(조주 선사)내가 무슨 재주로 말로 알려주겠나.”그러니 “뜰 앞의 잣나무”라는 게다. 옛 선사께서 흔히 거론하신 토끼 뿔(토끼가 실지로는 뿔이 없는 짐승임)이나 거북 털(거북도 실지로는 털이 없는 동물임)과도 같은 속성의 말씀이다.
다 실답지 않은 헛소리일 뿐이다. 본분사(本分事)를 잊어버리고 지말사(枝末事)에 걸려 세월만 보내는 사람들, 따져서 이치로만 알려고 하고, 들려달라고 하니, 언어문자로 흉내만 내는 사람들에게 일러 줄 말이 ‘정전백수자’나 ‘판치생모’밖에 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말장난 할 생각 그만두고 가서 정진하라는 경책인 것이다. 결론은 깨치라는 말이다. 실답지 않은 말을 아무리 해봐야 무슨 소용이냐.‘달마대사 서래의(達磨大師西來意)’의 진의는 너 자신이 깨칠 때 드디어 드러날 것이란 의미이다.
------------------------------------------------성불하십시오. 아 미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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