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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바로 나 스스로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바로 나 스스로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이다.”

 즉 처음 물었던 그 두 가지 질문이 각각 다른 질문인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결국 하나의 물음이었다. 그 물음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성현과 석학이 수없이 물어온 질문이다. 최근 유행하는 인문학 강연을 살펴봐도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앞에 두고 동서양 고전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많은 듯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의 강연이나 글을 통해 찾는 것은 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고전을 참고할 수는 있어도 결국엔 본인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직접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진정한 나를 경험할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우선 내가 아닌 것들을 하나하나씩 제거하면서 마지막까지 무엇이 남는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보라색 꽃이 있는데 이 꽃은 내가 아니다. 왜냐면 이 꽃은 관찰되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나는 대상화돼 관찰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관찰되는 모든 것은 대상(object)이지 내(subject)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몸도 진정한 의미의 내가 아니다. 왜냐면 몸 역시 꽃처럼 관찰되기 때문이다. 몸 어디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모양이고 하는 것들은 내 안에서 바라보며 관찰할 수 있다.

 똑같은 논리로 보면 우리 감정이나 생각도 역시 진정한 나는 아니다. 감정이나 생각도 올라오고 사라지는 것들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화가 났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화가 풀려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억과 같은 생각도 마찬가지로 구름처럼 일어났다 어느덧 자기 스스로 사라진다는 것이 관찰된다. 만약 감정이나 생각이 진정한 나였다면 그러한 감정이나 생각이 사라질 때 나 또한 함께 사라져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몸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생각도 아닌 진정한 나는 무엇인가. 나의 경우 몸, 감정, 생각과 나를 동일시하는 버릇을 잠시 내려놓으니 그것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면서 남겨놓는 자유로운 빈 공간들이 있었다. 그 자유로운 텅 빈 공간은 몸 안쪽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시작과 끝, 안과 밖의 구분이 없다. 공간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그 공간이 묘하게도 살아서 감정이나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안다. 하지만 그 자체는 앎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모르는 채로 온전히 자유롭다.

 오색 연등 아래를 걸으면서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나와 같은 젊은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 고민해도 괜찮다고.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서 부디 나만의 답을 직접 경험하라고 응원해주고 싶다.

혜민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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