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균형
우리는 八不中道가 존재하므로 어디서 왔거나 어디로 가지 않는다.
*팔부중도 :
八(여덟 팔):(왼편 네 손가락 상형)+(오른편 네 손가락 상형)의 지사자(指事字)이다.
不(아니 불):一(하나 일)+(새가 날아오르는 상형)의 상형자(象形字)이다.
中(가운데 중):넓은 공간에 깃발을 세워놓은 모양의 상형자(象形字)이다.
道(길 도):首(머리 수)+(걸어갈 착)의 회의자(會意字)이다.
팔부중도는 중관사상(中觀思想)을 정립시킨 제2의 붓다로 불리는 龍樹보살(나가르쥬나150~250년경)의 중론·귀경게(中論·歸敬偈)에 나타난 사상으로 생(生)과 멸(滅), 상(常)과 단(斷), 일(一)과 이(異), 거(去)와 래(來) 등의 여덟 가지 극단에 치우친 迷妄을 타파하여 깨달음의 중도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① 不生不滅(불생불멸)=生은 인연이 화합하여 일어난 것이며, 滅은 인연이 다하여 사라지는 것이므로 생멸의 兩 극단을 부정하는 것이다.
② 不一不異(불일불이)=一切法을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하나의 원리이므로 다른 현상에 집착하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③ 不常不斷(불상부단)=현상계의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상주하지도 단멸하지도 않는다는 주장이다.
④ 不去不來(불거불래)=삼계육도(三界六道)의 윤회 속에 이 세상에 잠깐 왔는데 영원히 온 것처럼 고집하는 견해를 부정한다.
즉, 진리의 당체(當體)는 因緣生起法(緣起法)에 따르므로 특별히 가고 옴이 없음을 깨우쳐 주고 있다.
금강신문 ggbn@ggbn.co.kr
우주의 거시이론인 상대성이론과 미시이론인 양자역학을 공부해보면 모든 물질은 입자이면서 파장이라는 이중성을 띄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물질을 보이게 만드는 것은 빛의 반사에 의한 것이다. 빛이 입자이며 파장이라는 것은 이제는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것도 관측을 할 때는 입자로 보이며 그 전에는 파장의 상태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도 입자이면서 파장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파장의 상태에서는 형체가 없지는 않지만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약간의 억지가 들어간 견강부회牽强附會이지만 붓다의 무아론이 원시적 물리이론으로 봐서는 맞다고 볼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관측도 상대성이론을 관련하여 보면 불확정성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더불어 아직도 우주의 기원을 모르므로 생명이 오고 감을 당연히 모른다. 나라고 하는 것도 뇌가 생각하는 것인데 뉴런이라는 1000억 개의 뇌세포와 신경접합부라 불리며 기억의 작용을 하는 200조 개의 시냅스, 그 사이를 오고가는 도파민을 비롯한 많은 신경전달물질들이 빛의 속도로 생성과 소멸의 변화를 거듭하는데 흔히 '나' 또는 有我論者들이 사용하는 '참나'라는 것의 순간성을 두고 '참나'와 '불성'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여래장사상에 다름 아니다. 나는 무아론자이므로 그들은 나를 붓다께서 연기와 팔정도와 탐진치를 포함한 사성제, 제행무상∙일체개고∙제법무아의 제행무상의 삼법인, 중도, 색수상행식의 오온으로 시작한 원시불교의 원리주의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붓다가 처음부터 주창한 무상∙고∙무아의 무아론에 충실하고자 하며, 그들 유아론자들은 과연 무아론에 충실하게 정확한 논리를 가지고 대적하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우선 개념의 오류를 원인으로 하는 것이 아닌지 안타까운 일임을 밝힌다. 물론 인간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여래장사상에 대해 시비를 가리는 것이 아님을 아시라. 간절히 강조한다. 붓다는 분명 연기의 적용을 받는 모든 것은 自性이 없다고 했으므로 自性을 空寂靈知라 생각하는 ‘참나’라는 개념이 힌두의 ‘아트만’과 같지는 않는지 열린 마음으로 살펴보시라. 自性과 佛性이 같음은 여래장사상 또한 심각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상기하시라. 아직까지 계속하는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오기나 하려는지 걱정스럽다. 다시 분명하게 밝힌다. 연기법의 적용을 받는 모든 것은 자성이 없으므로, ‘참나’는 연기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논리인지 명확하게 밝히기 바란다. 여래는 7번의 윤회를 거듭하면서 붓다, 즉 ‘스스로 깨어난 자, 항상 깨어있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깨달음 한 번으로 붓다가 되었으므로 더 닦을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선불교와 성철의 頓悟頓修는 참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화엄경 52위 중 처음 단계인 십신(十信)을 지나 겨우 一住에 해당되는 것, 소위 뇌의 각성작용에 지나지 않는 '깨달음'을 가지고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에 이르렀음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오만이며 봐줄 수 없는 오류임을 밝힌다. 一住에서 十住까지 올라갔더라도 끊임없이 실천해야 하는 십바라밀의 길도 기다리고 있는데 감히 妙覺을 이루었으니 다시 닦을 일이 없다는 돈오돈수는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짓거리냐.
-<도봉별곡>
*아트만
아트만(Ātman, 산스크리트어: आत्मन्)은 힌두교의 기본 교의 중의 하나이다. 힌두교의 또 다른 기본 교의인 브라흐만이 중성적(中性的) 원리라면 아트만은 인격적 원리라 할 수 있다. 힌두교에서 생명은 숨과 같은 의미로 쓰였으며 아트만의 원래 뜻은 숨쉰다는 뜻이다. 한국어에서 생명을 목숨으로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숨쉬는 생명인 아트만은 '나'를 말하며, 따라서 한자로는 아(我)로 표기된다. 힌두교에서는 개인에 내재 (內在) 하는 원리인 아트만을 상정(想定)하고, 우주의 궁극적 근원으로 브라흐만을 설정하여 이 두 원리는 동일한 것(범아일여, 梵我一如)이라고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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