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과 의상대(詩山會 제87회 산행)
산 : 소요산 (587미터)
코스 : 1안 자재암-상중하백운대-칼바위-금송굴-자재암
2안 자재암-상중하백운대-칼바위-의상대-일주문
소요시간 : 1안 2시간 30분
2안 4시간
모이는 곳 : 국철 1호선 소요산역 대합실
일시 : 2008년 6월 15일 (일) 9시 50분
준비물 : 맛난 안주, 식수, 중식 (막걸리는 총동창회에서 제공)
연락 : 김종화 총장(010-2406-0332)
블로그 및 카페 : 사진 이경식 blog.daum.net/sisan20
산행기 김정남 blog.daum.net/yc012175
동창회 광장 김용우 cafe.daum.net/K-20
동백꽃 진 빈자리 받치듯
백목련 조금씩 벙글기 시작한다
옆집 가시찔레는 아직도 동면중이다
능소화 나들이 채비 서둘 유월이면
지나는 동네 아낙들 웃음꽃 다발다발
담장 넘어 던질 일만 남았다
봄 한 철 우리 집 정원은 행복놀이터다
지난해 입주한 금강초롱 매발톱도 꽃등을 내걸었다
늙은 석류나무 사춘기의 영산홍 모두
우리 집 우편번호를 달고 있다
그것들이 아무리 쿡쿡 향기로 찔러도
아프지 않다 새들이 떨구고 간 눈물도
여기 내려놓으면 꽃거름이 된다
우리 집 정원에 핀 꽃은 모두 우리 식구다
집배원 아저씨도 꽃 속에 숨어 있다
-이광석 '우리집 꽃밭' 전문
자그마한 정원에 나른한 행복감이 출렁인다.
철따라 찾아오는 꽃 식구들 덕이다.
금강초롱 능소화 영산홍 가시찔레…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이들이 무심하게 향기를 토해낸다.
새들이 떨구고 간 눈물도 꽃거름이 되는 곳.변함없이 찾아드는 꽃 식구들이 없다면 어수선한 나날들이 얼마나 더 삭막할까.
아무리 바빠도 짬을 내서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게 아니냐’는 꽃들의 속삭임을 들어 볼 것.
-시평(이정환)
6월. 누리달. 온 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 차 넘치는 달이다.
겨울은 지리산 천왕봉 통천문 계단 밑에 흙먼지가 낀 흰 얼음으로만 남아있다.
이제 온전히 봄이다. 꽃이 피는 것은 힘들어도 지는 것은 순간이다. 바람이 불고 잎이 지는
날, 꽃잎도 지난 세월을 그리워하며 하롱하롱 떨어져간다. 오늘처럼 흐린 구름이 떠가고 버림받은 생각이 들 때면 떠도는 자가 되고 싶다.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면 어떠랴. 그곳에 민들레 홀씨처럼 내려 앉아 떠도는 자의 탁한 노래처럼 긴 한숨 한 번 쉬면 될 일이다.
시산회 제 86회 “북한산(칼바위능선)” 산행기(2008. 6. 1/ 염 재 홍)
참석자 : 12명 (기세환, 김용우, 김정남, 김종화, 나창수, 박형채, 염재홍, 위윤환, 이경식, 이승렬, 이원무, 이재웅)
몇 일간은 무척 더웠었는데, 오늘 날씨는 어떨런지. 아침에는 그런대로 시원한 느낌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건너편 북한산 형제봉을 바라보니 능선이 시원하게 한눈에 다 보인다.
나는 당초 김 총무와 약속하기를 새로 이사간 집이 정릉이라 마나님과 정릉에서 올라 대동문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는데, 마나님께서는 오늘은 그냥 성당에나 가겠다고 한다. 계속 조를 수도 없고 하여 나도 수유역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고 배낭을 챙겼다. 막걸리, 안주, 식수를 가져오라는 김 총장의 메일 안내가 생각났다.
물은 냉장고에 있는 얼음물을 준비하고 막걸리는 길음역 부근에서 한병 사서 넣었다.
그러나 안주는 조금 귀찮기만 한 것 같고 하여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보니 산우들 모두가 그런 생각이었나 보다.
9시 45분경에 수유역 1번 출구에 도착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까지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것 같다. 조금 기다리니 김 전회장이 계단에서 올라온다. 나 혼자 있는 것을 보고 휴게소옆 커피숍을 들여다 보는 것 같다. 잠시 후 전철 도착과 함께 한무리의 일행이 올라와 보니 나로서는 졸업 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김용우 친구가 참석하였다.
고교시절 3년동안 한번도 같은 반이 되지않아 얼굴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출구를 빠져나와 10시 정각에 인원점검을 해 보니 오늘은 12명의 산우들이 동참하게 되었다. 1번 마을버스를 타고 들머리인 아카데미하우스 앞 종점에 도착하니 10시 40분이다. 오늘 산행기를 나보고 써 달라는 김 총장의 엄명이다.
오늘 산행코스는 김 전회장이 제안하였는데, 뒷풀이를 겸하여 점심식사도 하여야 하니 산행시간을 약 3시간 전후로 하기로 하고 대동문으로 올라 진달래 능선으로 내려오기로 하였다. 산우들중 누군가는 ‘너무 짧은 코스가 아니냐’ 는 하는 반론도 있었으나 점심식사를 하산한 후에 하여야 했기에 대부분이 그렇게 하기로 찬성하였다.
“아카데미하우스”는 역사가 40여년 된 호텔로서 그 곳에 예식장이 있어 나는 몇 년 전에 아는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한 일이 있어 한번 와 본 곳이다. 아카데미하우스 탐방지원센터앞을 지날때 나이는 좀 들었으나 인상 좋은 예쁜 여직원의 ‘좋은 산행하십시오’라는 인사말에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로 답례하고, 칼바위능선, 대동문쪽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대동문 1.21 km 라는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왼쪽으로 아카데미하우스의 시멘트 담벼락을 끼고, 오른쪽으로는 물은 말랐으나 계곡으로
되어 있는 등산로이다. 얼마를 오르지 않아 막걸리와 파전 등을 파는 산속의 허름한 오두막 가게가 있었다. 국립공원구역 내에 있는 낡은 가게라서 미관상 썩 좋아보이질 않는다.
막걸리를 미쳐 준비하지 못한 용우 친구가 한 병을 산다. 등산로는 산객들이 이 길을 잘 모르는 건지 등산객들이 별로 보이질 않는다. 10분도 채 오르지 않아 쉬어가자는 나 원장의 하소연에 중간휴식을 하였다. 경식 산우가 내어놓은 땅콩샌드 ‘국희’과자에 막걸리 한 잔씩을 마시고 윤환이 건내 준 큼직한 사탕, 포장지에서 말해 주듯 ‘塩あめ’, 'KASUGAI' 라고 표기되어 있다. 소금사탕이라는 뜻인지? 물건너 온 것인가. 아무튼 짭쪼름하면서 갈증해소에는 안성마춤일 것 같다.
담화도중 앞으로는 낙지, 홍어 등 특별 안주를 준비할 사람은 사전에 총무에게 이야기하여 겹치지 않게 하자는 건설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왜냐하면 잘 못하면 신경써서 준비해 온 나름대로 좋은 안주가 더 맛있는 안주 때문에 찬밥 신세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참나무 그늘 길을 따라 약 30여분 계곡을 오르니 드디어 칼바위능선에 도착하였다.
11시 10분, 능선 위로 고개를 내미니 정릉 쪽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칼바위능선 공원안내소에서 올라오는 길이 우리가 왔던 등산로 길과 마주친다. 오른쪽에 대동문 1 km라 표시된 안내표말을 뒤로 칼바위능선이 시작된다.
‘칼바위능선’은 이름 그대로 능선의 마지막 부분에 칼날 같은 암릉이 있어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정릉 쪽에서 북한산 주 능선에 오르는 옆길 능선이 바로 칼바위능선인데, 능선이 구불구불 약 3 km에 이를 정도로 길게 뻗어 있어 산길에 변화가 많고, 조망이 다양하다고 한다.
저 멀리 남산 타워에서 가까이는 바로 앞의 산불감시탑, 건너편의 형제봉 능선, 뒤로는 삼각산의 세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성문은 약간 고개를 내미나 보국문은 더 가까워도 보이지는 않는다. 대성문은 누각이 있으나 보국문은 누각이 없고 암문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엎드려 바위를 잡으며 약간을 기어오르니 넓적한 바위가 펼쳐 있어 사진 촬영이 그만이다. 우리도 몇 번을 치즈, 개구리, 멸치대가리를 하며 기념촬영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올라온 세 사람은 또다시 발길을 막고 한번 더 찰깍! 이런 사진들을 여기에 같이 실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드디어 칼바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네발로 기어오르면서 밑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난 목요일 나 혼자 왔을 때는 여기를 오르지 않고 우회로를 찾아 돌아서 올라갔다. 그런데 오늘은 일행을 쫓아 따라오다 보니 ‘위험! 이곳은 위험하니 우회하시오’ 라는 팻말을 못 보고 지나쳤다. 그 팻말은 아까 능선에 올라왔을 때 보았던 대동문 안내표말 바로 뒤에 서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리가 후들후들 제정신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꼭대기에서 또 사진을 찍는다. 모델이 될 자신은 없어 다른 산우들 사진만 찍어주고 계속 넘어 가니 다른 일행의 한 아주머니가 밑으로 내려가는 편한 길을 가면서 무섭다고 아우성이다. 앞을 보니 두어 발걸음 뛰어 넘어야 할 바위가 밑은 저 아래가 다 보인다. 우리 중에서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은 그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우회로로 내려왔다. 아홉 친구들은 용감무쌍하게도 잘도 넘어 온다.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다. 배도 출출하니 휴식을 취하며 막걸리라도 한 잔하며 간식이라도 하기 위해 등산로 옆 응달진 펑퍼짐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돗자리를 깔고 막걸리와 과일. 그 중에서도 이승렬 산우의 마나님 채희금씨께서 밤새 장만하였다는 과일 꽂이는 정성과 함께 복분자, 방울토마토, 사과, 배, 포도 등으로 보기가 좋게 한줄로 꿔어 놓아 영양도 함께 섭취하게 해 주어 오늘의 특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맛까지 느끼도록 기 회장님이 증명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재웅 산우는 올라오면서 아직은 먹을 시기가 아니라고 했던 무거운 등짐을 풀었다. 평생 두고 먹어도 썩지도 않고 식지도 않을 귀중한 것을 산우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동안 준비하여 온 정성이 눈에 선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자세한 것은 본인의 요청에 의해 대외비로 요청해서 여기에는 더 이상 부언 설명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러나 과일만 풍성했지, 술안주가 별로 없었기에 막걸리도 잘 안 팔리고하니 기 회장님께서는 ‘오늘같이 이렇게 음식준비가 빈약한 산행은 처음이다’ 라며 너무 심한게 아니냐고 하며 한 말씀 하신다. 오늘은 뒷풀이가 점심과 함께 예정되어 있었기에 다른 산행 때와는 달리 산우들 모두가 홍어 등의 맛있는 안주를 준비하지 못 한 게 아니라 안 했던 모양이다.
다음에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김 총장은 다음 산행 때에는 영산포 삼환표의 홍어가 예약되어 있으니 쫄깃쫄깃한 그 맛을 기대 하시라고 한다. 점심때가 지난 것 같아 지나가는 다른 일행들의 눈치를 보면서 막걸리 병을 싸서 넣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조금 올라가니 북한산성이 앞을 가로 막는다. 이제 주능선에 도달한 것이다. 안내표에는 대동문이 0.41 km 라고 표시되어 있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누차에 걸쳐 설명되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968년 12월 5일 사적 제 16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규모 543.795㎡ 임)
12시 45분쯤 대동문에 도착하였다. 등산객으로 넘쳐흐르는 시장이나 다름없다. 식사를 하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 조망을 하는 사람들 등등 모두를 뒤로 하고 우리는 바로 발길을 재촉하여 진달래능선으로 들어섰다. 선두는 처음처럼 계속 김 전회장이고 맨꽁무니에는 변함없이 김 총무가 맡아서 뒤에 처진 산우들을 챙긴다.
하산 도중, 경식 산우와 김 총무가 하는 말이 귀에 와 닿는다. 당분간 가능하면 김 전회장이나 신 이사가 참석할 때엔 그 두 산우들을 맨 앞에 세워서 산행을 하자고 한다. 항상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우리 시산회 산우들의 마음 씀씀이에 마음 든든하다.
5분쯤을 내려오니 오른쪽 아래로 옹달샘이 눈에 보인다. 그러나 들리지 못하고 지나친다. 다음 기회에 한번 물맛을 보자. 진달래는 보이지 않는 진달래능선 중간쯤에서 북쪽의 삼각산을 보니 세봉우리(백운대, 인수봉, 만경봉)가 우리를 굽어보고 있고, 백운대 꼭대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장벽을 이루고 있다. 역시 진달래는 꽃 피었을 때는 아름답지만 꽃이 진 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가려 제멋을 나타내지 못한다.
늦게 올라가는 등산객들과 옷깃을 스쳐가며 내려오니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여러 길이 있다. 그러나 되도록 먼 길로 돌아가자는 김 전회장의 인도로 한참 더 내려오니 백련공원지킴터의 안내표말이 보인다. 1시 47분 백련사에 도착하였다. 사찰을 뒤로하고 계속 내려오니 눈에 띄는 시비(詩碑) 하나가 있었다.
“ 솔 씨 ” (늘봄 이 호 정)
솔씨 하나가
절벽으로 떨어져
바위를 삭혀
뿌리를 내린다
하나된 솔과 바위
옥토(沃土)의 시작이다
응달에 해는 길어지고
그 아름다움이야
천명(天命)이여
무아(無我)여
(‘늘봄’ 이 호 정 시인은 김천고, 홍익대 법대를 졸업하고, 중앙대대학원 법학석사, 한신대 대학원 신학박사로 시인이며, 세무회계사, 목사로 활동하시는 분임.)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인 ‘현곡’ 양일동 님의 묘소와 ‘심산’ 김창숙 님의 묘를 뒤로 하고 드디어 버스길에 다다랐다. 버스길을 따라 한참을 가도 선두는 계속 가기만 간다. 건널목에 서서 배고픈 푸념을 하는 힘없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보다. 하산하여 약 20분을 더 가서야 비로소 김 전회장이 예약해 놓은 “미락”이라는 한정식집에 도착하였다.
“미락”이라는 집은 김 전회장이 옛날 이곳에 살 때부터 자주 찾던 한식집이라 한다. 예약된 방에 배낭을 벗고 막걸리와 맥주를 취향대로 시키고 여러 가지의 반찬이 차려졌다. 파전도 구미가 당기고 게장과 잡채도 맛있게 보이고 홍어무침도 나온다. 주인 아짐씨의 따님이 증명사진을 찍어 주었으니 다음 모임 때도 다시한번 와 봐야만 할 것 같다. 주인 아줌씨는 연신 들락거리며 부족한 것 있으면 더 달라고 한다. 음식솜씨와 풍족한 인심이 전라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지난번 조문에 대한 답례로 점심식사를 대접한다는 윤환 산우의 인사말과 이어서 기 회장님의 화답과 건배제의가 있었다. 우리 살다보면 생로병사, 누구나 다 겪어야만 될 일이지만 이번에 상배(喪配)를 당한 윤환 산우를 다시 한번 위로하고 하루빨리 마음의 안정을 찾아 옛날처럼 산행에도 자주 참석하고 사업도 번창하여 좋은 일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처음으로 산행에 참석한 이승렬 산우의 시산회 가입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전례대로 오늘의 동반시 “그 때에야 무슨 아픔이 있겠는가”를 낭송 하였고, 다음 산행은 시산회 제 87회로서 총동문회 산악회 등산계획과 연계하여 6월 15일(일) 소요산으로 결정 하였다.
자주 참석하지 못하는 산우들을 위해 2개월에 1회만 원거리 산행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가능한 원거리 산행은 국립공원 중에서 아직 가 보지 못한 월출산, 내장산, 주왕산을 꼭 가보기로 하고, 특별산행으로 단풍의 계절인 가을철에는 설악산(공룡능선)을 가기로 정하였다.
차기 소요산 산행에는 보다 더 많은 산우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기원하면서 두서없이 산행기를 맺는다.
2008년 6월 1일 염 재 홍 씀
산우들의 산행기를 읽어보면 광고인의 기본소양이 만만치 않게 상당히 높다고 확신한다. 다만 진흙 속의 진주일 뿐이다. 정성이 가득한 글이다. 글재주보다 정성이 가득한 글이 심금을 더 울리는 법이다. 그 정성으로 재주를 갈고 닦으면 좋은 문사가 될 소질이 충분한 산우다. 앞으로도 산행기를 자주 쓰기 바라니 그만큼 산행에 자주 참석해주기 바란다. 글은 자주 쓰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고 고쳐 마음에 들 때 세상에 내놓으면 좋은 글이 된다. 그런 정성이 깃든 글이기에 좋은 글일 수밖에 없다.
내가 지리산 종주 사진을 찍은 것을 메일로 보냈으나 실력이 부족하고 방법을 잊어버려 미수에 그쳤다. 두 딸이 컴퓨터를 전공했으나 딸들 중 큰애는 직장일로, 작은애는 졸업반이라 바빠서 다시 배울 시간이 없다. 한가할 때 배울 테니 보내주기 전에 내 블로그에 들어오면 볼 수 있다. 경식, 나, 용우의 블로그나 카페를 '즐겨찾기'에 등록해 두면 한 번의 클릭으로 쉽게 볼 수 있으니 자주 방문해주기 바란다.
이번 산행은 소요산이다. 총동문회 산악회에서 주관하는 산행이다. 동문회 행사는 매년 봄에 관악산에서 시산제를 올리고 가을에 근교 산행을 하는데 이번에는 봄의 소요산이다. 서울에서 접근하기 쉽고 산이 높지 않아 오르기도 어렵지 않으나 차편이 많지 않으니 늦지 않게 유념해야 한다. 의정부역에서 9시와 9시22분 차가 있으니 자기가 타는 역에서 의정부역까지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여 늦지 않기 바란다. 9시22분 차편을 타면 늦으니 유념하자. 소요산은 가을이 더 좋다고 하나 우리나라 산은 가을에 아름답지 않은 산이 없다고 한다. 소요산도 북한산과 같이 칼바위가 있으나 가파르거나 날카롭지 않지만 하루 산행으로는 좋은 산이며, 가파른 의상봉을 거쳐 내려오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나 지리산을 어렵지 않게 종주한 실력있는 산객들이니 이번에 시도해보자. 다만 먹으면 내려가는 우리 먹산회의 전통이 있어 그 빛나는 전통을 계속 이어갈지 모르는 일이다. 중백운대 부근에 식사하기 좋은 너른 터가 있으니 좋은 산에서 맛난 음식과 좋은 산우들과 한가로운 휴일의 한낮을 즐겨보자. 내려온 후에 베풀어지는 정겨운 뒤풀이의 즐거움도 뺄 수 없으니 모두 참석하자.
동반시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수필문학의 대가 피천득 선생의 시이다. 우리들은 중고교시절에 애틋한 가슴저림으로 만났던 그분의 수필을 잊지 못 한다. 그리고 자주 읽어보았다. 오월은 지나갔지만 오뉴월은 같이 가니 호시절 유월에 동반시로 선정했다. 젊은 시절에 그 분도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고통에 대해 겪어보고 많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믿음과 희생과 이해가 없으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그러기에 사랑에는 항상 기쁨만큼 고통이 따른다. 고통이 있다고 사랑의 기쁨을 외면하랴. 음미하면 할수록 참으로 서정성이 강한 시이다. 철 지난 바닷가에 감회가 없는 사람은 없다. 이 답답한 계절에 동해바다라도 보고 오면 꽉 막힌 가슴이 조금은 열리려나. 시인의 말처럼 우리의 마음을 항상 푸르른 오월 속에 둘 수 있다면 늙지 않으니 얼마나 좋으랴. 이 시를 중백운대에서 시원하게 얼린 한 잔의 막걸리를 곁들인 맛있는 식사를 끝내고 신록의 오월에 태어난 행복한 산우가 읊으면 좋겠다. 오월에 태어난 행복한 산우는 나서서 시 낭송의 즐거움을 맛보라.
오규원 시인의 절명시가 있다. 운명하기 전에 병상에 누워 지인의 손바닥에 쓴 시이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원고가 없으니 제목도 없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음이 모두 이럴까. 짧은 글 속에 많은 뜻이 들어 있겠으나 이 시만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특히 한가로운 오후에. 시란 짧은 글 속에서 많은 것을 표현하기에 우리는 시를 아끼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 특히 신록의 계절에.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2008년 6월 11일 식사를 마치고 한가로운 오후에
시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움쇠 김정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