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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양주 불곡산에 오릅니다(詩山會 제 88회 산행)

양주 불곡산에 오릅니다(詩山會 제 88회 산행)

불곡산과 임꺽정봉

산 : 불곡산(465 미터)

코스 : 샘내-불곡산장-주차장-임꺽정봉-투구봉(정상)-백화사-유양초교 (역순 중 선택)

소요시간 : 오름 1시간 40분 내려옴 1시간 20분

일시 : 2008. 7. 6 (일) 10시

모이는 곳 : 전철 2호선 가능역 대합실

준비물 : 과일, 안주, 막걸리

연락 : 김종화(010-2406-0332)

블로그 : 사진 이경식 blog.daum.net/sisan20

산행기 김정남 blog.daum.net/yc012175

동창회카페 김용우 cafe.daum.net/K-20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 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젊은 여자가 아름다운 것은 편견에 물들지 않은 까닭입니다. 많은 말들로 채워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나이 많은 여자가 아름다운 것은 편견을 비운 경험이 들어 있는 까닭입니다. 말 속에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없는 젊음 뒤에는 체험이 없는 늙음이 따라간다지요. 어느 사진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름이 많게 나온 여인에게 사진을 수정해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사진의 주인은 자신의 주름을 빼거나 넣을 수 없는 세월 그 자체라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이는 자신에게 걸맞은 얼굴을 주지요.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할 때가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 아시지요? 오래전에 사둔 백자 등잔 하나.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습니다. 불을 켜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황홀한 빛을 밝히는 게 아닙니까? 아직 여자인 몸에 불이 켜지는 게 아닙니까?

-시평(박주택. 시인)

 

여자는 귀한 존재다. 항상 아끼고 사랑하면 그 이상의 즐거움을 주는 존재다.

여자는 산과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잉태한다.

산이 정복의 대상이 아니듯 여자도 결코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여자는 늙어도 아름답다지 않는가. 나이를 먹으면 먹은대로.

여자는 사랑할수록 아름답다. 백자 등잔 같은 여자가 밝히는 황홀한 사랑 한번 해보자.

-도봉생각

 

 

 

7월 견우직녀달. 견우직녀가 만나는 아름다운 달이다. 총동문회 하계등산 모임을 소요산에서

갖기로 하였으나 정해진 시간에 소요산역에 도착하니 동문으로 보이는 산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한산하다. 김 총장이 도착하여 상황을 살펴보니 한산하여 흥이 나지 않는다니 모두 모여

오늘은 시산회의 모임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회비가 만원이니 아낄 겸 그 회비로 뒷풀이를

보다 흥겹게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나왔고, 코스도 항상 다니는 상중하 백운대는 자주

다니니 이번에는 올라본 적이 없는 공주봉과 의상대로 오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대로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김종화 총장의 명에 따라 산행기는 이재웅 산우가 썼다.

 

시산회 제87회 “소요산”산행기 (2008. 6. 15/이재웅)

 

참석자 : 오늘 참석인원, Lucky Seven, (한양기, 전작, 임삼환, 이재웅,

이원무, 김종화, 김정남 - 가나다 逆順)

 

시산회 이번 제87회 등산은 『소요산』이었다.

2007년 1월 21일 제52회 산행도 이 산이었으니 이번이 소요산 두 번째 등산이다. 그러나 소요산 매표소 길을 중심으로 2007년 1월에는 좌측을 등반하였고 이번에는 우측을 등반하였으니 각기 다른 맛을 느끼는 등산이었다.

 

소요산을 한 인터넷 지식창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경기도 동두천시와 포천시 신북면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536m, 주봉(主峰)은 의상대(義湘臺), 서울특별시에서 북쪽으로 44km, 동두천 시청에서 동북쪽으로 약 5km 지점.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워서 경기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함, 645년 신라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개산(開山)하여 자재암(自在庵)을 세운 이후 974년(고려 광종 25)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중대암(中臺庵)·소운암(小雲庵)·소요암·영원사(靈源寺) 등의 사찰과 암자가 있음, 1981년 국민관광지로 지정, 자재암은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로서 원효대사가 수행 도중 관세음보살과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고 하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음.

소요산에는 청량폭포(淸凉瀑布)와 원효폭포가 있는데, 이 지대를 하백운대(下白雲臺, 500m)라고 하고, 그 오른쪽에 원효대(元曉臺)가 솟아 있고 원효대사가 수도한 곳이라고 전하는 옥로봉(玉露峰)을 넘어 북동쪽으로 나한대(羅漢臺, 571m), 의상대(587), 비룡폭포가 나옴. 또 원효대에서 약 30m쯤 되는 절벽 위를 상(上)백운대라고 하며, 그 밑으로 선녀탕(仙女湯)을 볼 수 있음. 자연석굴인 나한전과 산중턱의 금송굴도 유명함. 산 입구에는 구한말에 독립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홍덕문의 추모비가 있음』

 

소요산이 서울근교산행권에 든 것은 소요산전철역이 생긴 2006년 무렵 부터가 아닌가 싶다.

7호선전철을 타고 도봉산역까지 40분 정도는 홀로 외롭게 이동했으나 도봉산역에서 1호선을 갈아타면서 “전작” 산우와 조우하여 1호선 종점인 소요산까지 20분 정도는 외롭지 않게 이동을 할 수가 있었다

오전 10시 몇 분 전 소요산역 플랫폼에 다다르니 김정남 초대회장님, 김종화 총장님, 이원무 전(?) 사진전문위원, 한양기 전 총장님, 임삼환님 등 다섯 산우님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모두 일곱 명인데 필자의 기억으로는 가장 적은 인원수여서 처음엔 다소 실망감도 있었으나 일곱 분들의 면면들을 생각하니 모두들 (지난 5월초 지리산을 종주한) 쟁쟁한 등반가들 이기에(필자도 여기에 낄지는 의문이지만?) 마음을 고쳐먹고는 오늘 하루 충실한 등산을 다짐하였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도 때로는 폭이 좁은 강줄기가 있듯이 오늘의 참가 인원수가 비록 소수이더라도 큰 맥을 이어가는 과정의 한 단면이라 생각하면서 오늘의 등산에 참석을 못한 산우들이시여 우리 7인이 오늘의 시산회 등산의 맥을 잘 이어 갈테니 오늘 님들이 등산을 못할 정도로 불가피하게 꼭 하셔야하는 다른 일들을 자알 하시게나.

 

오늘의 산행에는 기세환 회장님이 사정상 불참하였으므로 김종화 총장님과 김정남 전 회장님이 오늘 산행을 지휘하게 되었다.

당초 산행계획으로는 총동문회 산악모임에의 합류계획도 있었으나 우리가 소수인원인 점 등 여러 요인을 감안하여 지휘부(김종화총장, 김정남 전회장)에서 다른 산악회와의 합류를 하지 않고 우리 독자 등산을 하기로 하였고 나머지 일행도 그에 따랐다.

 

타 산악회와의 합류계획을 취소함에 따라서 막걸리, 김밥 등 일부 음식을 새로 사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김정남 전 회장님의 물건구입기법(?)을 보면서 맘속으로 한 수 배웠다(이제 글로 표현하였으니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맘속으로”란 말은 필요 없지만). 소요산역 부근지역을 벗어나기 직전의 끝 가게에서 막걸리 몇 병을 구입하기위해 흥정을 하다가 시중 일반가격보다 비싸다고 생각했는지, 김밥 등 다른 장도 볼 겸 결단력 있게 대화를 정리하고는 왔던 길을 한 참 되돌아가서 장을 봐오는 모습에서 필자는 한 수 배웠다.

 

등산은 10시 10분에 시작되었다.

소요산역 부근의 시가지를 지날 때 어느 음식점사람이 나와서 영업 홍보 겸 등산길 안내까지 하는데 매표소를 통과하는 길로 가면 1인당 2천원씩인가를 문화재관람료로 내야 되는데 소요산 입구 10m정도 지나서 우측소로로 진입하면 문화재관람료를 내지 않고도 등산을 할 수 있다고 안내를 했다.

우리는 음식점사람이 안내한 그 소로로 접어들었다. 2, 3분쯤 오르니 완전 특이한 장관이 전개되었다. 들머리에서부터 공주봉(해발526m) 도착직전의 헬기장까지 한 시간 남짓 걸린 등산로는 경사가 급한 흙길 등산로인데 상당히 높은 곳까지 아스라이 바라다 보이고 굴곡이 거의 없는 가파른 오르막 길에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높이로 짙푸른 나뭇잎 구름판이 하늘 전체를 낮게 덮고 있는 것 같은, 그야말로 장관이고 낙원이었다. 그러나 들머리에서 의상대(해발587m)까지의 등산에 제동을 거는 요소가 있었으니 그것은 중간에 평지나 내리막길이 거의 없는 가파르게 긴 거리가 계속되는 오르막길에다가 무풍혹서(無風酷暑)였다.

오늘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기온은 높은 한 여름 날씨다. 아마 섭씨 30도를 넘는 것 같다. 들머리에서 공주봉까지의 약 1시간 35분간의 등산을 하는 동안 시원한 바람 맛을 한 두번 밖에 보지 못했던 것 같다. 헬기장에서 공주봉을 거쳐 의상봉에 오르는 50분 정도의 코스는 가파른 오르막 능선길이지만 동두천시가지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등 전망도 좋았고 시원한 산바람의 상쾌함도 몇 번은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무풍과 혹서는 등산에 좀 불편한 것이었을 뿐 우리 일행 모두는 임삼환표 영산포홍어에 막걸리가 있었고 김정남 왕회장님과 한양기 전 총장님의 구전정담(口戰情談 - 필자가 즉흥적으로 만든 말임, 사전에는 없는 말일지 모르나 적절한 표현이리라 생각함)을 관전하면서 무풍혹서를 거뜬히 해소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필자의 추측만은 아니기를 바람).

 

무더위 속 가파른 오르막길을 시작으로 등산을 하던 우리는 출발한지 20분쯤인 10시 30분에 에너지를 충전할 자리를 폈다. 임삼환산우가 이번 산행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 온 영산포홍어에 시원한 막걸리로 모두들 에너지충전을 한다. 15명 정도가 되리라고 준비해 온 분량인데 일곱 명이 소진을 시켜야 하니 오늘 참석한 사람은 홍어회를 먹을 복이 많은 셈이다. 임삼환 산우가 요즘같은 불경기에 비싸디 비싼 홍어를 요로코롬 많이 준비해 왔는데 오늘의 등산에 참석 못한 친구들은 임 산우에게 많이 많이 미안해 해야 할 줄로 아네. 지나가던 여자 등산객들이 홍어냄새 운운하며 침을 삼키며 지나가기도 했는데 그 일행이 한 두명도 아니고 더군다나 男人 보호자들까지 있는데 감히 그네들을 부를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출발한지 2시간 20분이 지난 12시 30분경에 소요산 정상인 의상대(해발587m)에 도착하였다. 의상대에서 일곱 명 단체 증명사진 촬영을 한 후 의상대에서 조금 내려와서 넓지는 않지만 아늑한 자리에 점심상을 차렸다. 점심식사 자리를 갖는 데에 한양기(전)총장님은 조금 아래쪽 자리로 하자하고 김정남왕회장님은 윗자리가 더 넓고 좋다하면서 또 한 차례의 구전정담이 있었다. 오르막길에서 한 판을 벌렸으나 아직도 푸짐하게 남은 임삼환표 홍어, 전작표 떡, 김종화표 유부초밥 같은 특별음식에 소요산역부근에서 장을 봐온 막걸리와 김밥 등으로 점심식사를 잘 했다. 함포고복이다.

 

이번 산행의 동반 시(詩)는 피천득의 “오월”인데 임삼환 산우가 결코 짧지 않은 시 “오월”을 낭랑한 음성으로 자알 낭송하였다.

임삼환 산우의 시 낭송이 있은 후 필자는 시 한 수를 암송하겠다고 나섰다. 지금까지의 동반시 중 필자가 아얘 암기해서 완전히 필자 본인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이은채시인의 “그만큼만 아프고 그만큼만 그리웠으면”을 암송했다. 이 시를 읊을 때는 내 몸의 모든 연약한 부위가 애절하게 꿈틀거리는 감정을 느낀다. 뇌, 간, 창자, 온갖 실핏줄, 오금, ………

그 시를 다 외워서 암송하여 박수를 받기는 했으나 나는 좀더 시 암송에 좋은 목청을 갖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점심 후에 7월달 산행계획, 11월달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계획 등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오후 2시 20분경에 골짜기 길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하였다. 산을 오를 때에 그랬듯이 내려가는 길도 오르내리는 굴곡이 거의 없이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되었다.

 

한 시간 정도 내려 왔을 때 (원효대사가 수행 도중 관세음보살과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고 하는)자재암을 만났다. 양손 합장하고 허리굽혀 뭔가를 부처님께 비는 등산객들이 눈에 띄고 법당 안에서 기도를 하는 중생들도 많았다. 특히 석굴로 되어있는 나한전(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법당) 안에서 기도하는 신도들의 모습이 색달라 보였다.

 

각자 무슨 소원이 그리도 많길래 사찰, 교회, 성당 …… 신(神)님이 계시리라고 믿어지는 곳마다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든당가요?

어느 신(神)을 향해 소원을 빌든 분명한 것은 “신(神)님!!! 저에게 어진 지혜를 주십시오”의 의미를 가지고 평소에 빌면서 살아야지 무슨 난제가 닥쳤을 때 갑자기 신(神)앞에 다가가서 그 난제를 해결해 달라고 백날 빌어봐야 헛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여!!!. 특히나 무슨 시험을 보는데 내 자식은 붙고 남의 자식은 떨어지라는 심보를 품고 백날 기도해봐야 헛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여!!! 실수하지 말고 평소 닦아 온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해 주시고 설혹 시험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낙망하지 말고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라고 빌어야 복을 받는 것이여!!!(필자의 ○○철학이겠지만)

필자 나이 20대 때에 한 친구를 따라서 6개월정도 성당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 분명하게 배운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은 하늘나라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 우리 곁에 계시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곧 하느님일 수 있고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하느님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집사람이 절실한 불교신자여서 가끔은 사찰에 함께 가서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도 있는데 불교 법문의 대부분도 (필자가 느끼기에는) 내가 깨달으면 내가 곧 부처요 내 이웃이 즉 부처이며 각자가 지혜를 깨우치자는 데에 법문의 맥을 두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필자는 될수록 신의 섭리, 자연의 섭리를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상황에 맞춰 헌신 노력하는 생활이 필자의 기본 생활바탕이다. 그러므로 필자에게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좋고 맑은 날, 비오는 날, 눈오는 날, 더운 날, 추운 날이 다 좋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바라볼 때에도 얼마 전까지 활기찬 청장년이었고 짧지 않은 인생역정을 지내 오셨을 것을 생각하면 더욱 더 아름다워 보인다. 근거리 산행도 좋고 원거리 산행도 좋다. 도로운전 중 길이 뚫려서 쌩쌩 달리면 신나게 달려서 좋고 교통이 막히면 앞에 도열해 있는 자동차들의 장관을 감상하면 된다. 도로의 교통체증은 바로 내차 때문이며 등산길에서 길이 막힐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시간에 내가 거기서 등산을 하기 때문에 막히는 것이다. 필자는 제2의 직업으로 택한 것이 수많은 사람들과 (대부분 ‘을’의 입장에서)상대하는 직업인데 신의 섭리 자연의 섭리를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상황에 맞춰 헌신 노력하는 방식으로 응대를 하니 괴팍한 외골수와도, 보는 것마다 참견하는 따발총 아줌마와도, 알콜중독 주정꾼과도 진상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정한 교류를 할 수 있게 된다.(산행기에 썡뚱맞게 개인생활철학까지 넣게 되어서 쑥스럽습니다. 그런데 필(筆)의 방향이 그렇게 가니 어쩔 수 없었네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이 딱딱한 내용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서 최근에 귀동냥한 우스개 한마디 하겠습니다 - 웃어주쇼>

아줌마부대와 조폭이 비슷한 점 몇 가지가 있데요.

⑴ 칼을 잘 쓴다.

⑵ 자주 떼지어 몰려 다닌다.

⑶ 문신을 한다.

⑷ 검정색 옷을 자주 입는다.(이것은 어째 좀 딱 들어 맞는 것은 아닌 것 같음)

⑸ “형님”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ㅎ ㅎ ㅎ

 

오후4시경에 처음 들머리였던 곳의 한 음식점에 도착하여 생맥주와 부침개로 뒤풀이를 하고 오후 4시 30분경 소요산을 출발하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오늘 산행에서 김종화총장님의 명(命)에 의해 필자가 인터넷용 사진전문위원역을 맡았습니다. 이경식산우가 인터넷용 사진을 촬영했었고(오늘 산행에는 참석을 못 했지만), 이원무산우가 인화용 사진을 전에 촬영하였었듯이 필자도 그렇게 사진찍기를 해 볼려고 노력도 하긴 했으나 필자는 사진찍는 테크닉도 딸리고 등산일행의 전후좌우를 빠른 걸음으로 누비지도 못하고 겨우 뒤쳐져서 따라가는 등산실력의 체력이니 앞으로는 사진전문위원 역을 필자에게 명(命)할 때 깊이 좀 헤아려 주사와요.

 

긴 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상 필자 이 재 웅>

 

 

산행기를 돌아가면서 쓰기로 한 지 수 회가 지나 보내온 산행기들을 보면서 시작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는데 별다른 테크닉은 필요 없고 성실한 태도면 된다는 것이 도움쇠의 일관된 생각이다. 이런 빛나는 재능을 썩히지 마라.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시련을 겪으면서 자라고 꽃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핀다지 않는가. 이재웅 산우는 시산회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서 항상 고마운 마음이 든다. 금수산행 때 자네의 진도 문어의 항홀한 맛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이번에는 창동 하나로마트에 들러 하나로표 문어는 내가 공급하겠네. 홍어는 냄새가 지독해 열차 안의 승객에 폐를 끼치니 여름철은 삼가하겠네. 본인의 등산 능력이 떨어진다고 하나 자네 덕분에 우리도 숨을 돌리기도 하지 않은가. 우리 시산회는 그것을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산우들에 비해 산행을 자주해 본 도움쇠도 산행을 중단하면 뒤처지기도 한다. '가난한 것은 잘못이 아니라 다만 불편할 따름이다'는 말이 있듯이 산행의 능력은 그날의 컨디션이나 마음의 상태에 다라 달리지므로 조금라도 신경을 쓸 일이 아니다.

 

불곡산은 해발 465 미터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암릉이 아기자기하고 길게 이어지는 바위산이라 매우 스릴 있으면서도 위험하지 않고 정상과 군데군데의 암벽 및 암봉은 전망이 뛰어난 서울 근교 명산 중의 하나라고 박형채, 이재웅, 김용우 산우 등이 추천했던 산이다. 언젠가는 갈 산이니 미뤄뒀는데 이번에 간다. 내려와서 소주를 곁들여 의정부 부대찌개라도 먹으면서 산행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모두 모이자. 또 북쪽의 산이냐는 산우가 있었지만 명산이 북쪽에 편중해 있으니 어쩌랴. 이해하기 바란다.

북한산행 때 맛나께 먹었던 예쁜 과일꼬치는 김용우 산우 어부인의 작품이 아니라 이승렬 산우의 어부인 채희금 여사의 작품임을 알린다. 본인의 강력한 항의(?)다. ㅎㅎㅎ

기세환 회장님의 병환-허리 삐긋-이 있어 당분간 못 나온다니 걱정이다.

모두 안부전화라도 하자. 빠른 쾌유 바란다. 회장님은 산행과 뒷풀이의 즐거움을 참지 못해 빨리

쾌유하리라 믿는다.

 

 

몸과 마음이 바쁘고 여유롭지 못할 때 김 총장의 독촉이 있어 급하게 선정해야 하는 동반시 선정은

부담스러웠는데 요즈음 약간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미리 여러 가지의 시를

마련했는데 이제는 어떤 시를 동반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시의 바다를 항해하다보 면

짧지만 가슴에 짜릿하게 와 닫는 시를 접하게 된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이다.

짧게 감상해보라.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단 세 줄의 시에 우리는 많은 상념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전반에 관한 것이든

사랑에 관한 것이든 희생과 봉사에 관한 것이든. 두고두고 곱씹어봐도 깊은 맛이 난다.

소요산 등산의 동반시를 김삼환 산우가 읊은 후에 이재웅 산우는 자진하여 자신이 암송해둔

이은채 시인의 ‘그만큼만 아프고 그만큼만 그리웠으면’을 그답게 티없는 얼굴로 약간은 어눌하게

띄엄띄엄 읊었는데 오히려 임 산우가 시를 낭송할 때보다 박수를 더 많이 받았다. 본인은 앞으로

기회가 되면 외워서 읊는다 했다. 시는 읽고 잊으라 했다. 그러면 필요할 때 끄집어낼 수 있기도

한다 했다. 그러나 암송할 수 있는 시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시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도 좋은 시 열 수 정도는 외워보자. 시인들이 애송하는 시 첫째가 김춘수 시인의 <꽃>이다.

전에 동반한 적이 있다. 다시 감상해보자.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 가슴에 담겨오는지.

이재웅 산우는 그 시를 반드시 외워와서 불곡산행 때 우리에게 좋은 시를 듣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

낭송해주라. 오를 때 암송하면서 가면 산행이 훨씬 편할 것이다.

동반시 두 편을 메일에 올려놓고 고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출장갈 일이 생겨 미리 인쇄해 두려

한다는 김 총장의 전화에 김용택 시인의 <사랑의 노래>를 보냈다. 다음의 시도 좋은데 조금

후회했다. 아니다 다음에 가져가면 된다.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의 시인으로 유명하다. 초등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면서 쓴 그의 시나 이야기는 맑고 깨끗함 그 자체이다. 이 시도 섬진강기슭 어느

마을의 시이다. 우리는 그런 곳에서 살고자 하나 결코 하지 못 한다. 그날의 산우들 중 자신이

가장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산우가 나서서 읊어라. 안 나서면 도움쇠가

지명한다. 그 산우가 그런 사람이다.

 

 

사랑의 노래 / 김 용 택

나는 노래를 얻었네

저 굽이치는 저문 강물과

김나는 저 새벽 논밭이

나에게 그런 복을 주었다네

나는 노래하리

내가 사랑하는 이 작은 마을을

내가 태어나 자란 곳

내 피와 살과 내 뼈를 주고

내 영혼이 살아 숨쉬는 곳

내 노래는 샘물처럼 솟아나고

흐르는 물처럼 끝이 없으리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과 별들이 또 그렇게 지는 그 길을 따라

서서 씨 뿌리고

엎드려 땅을 파며 살다가

일생을 눕히는 곳

내 노래는 그들의 손 끝에 닿아

햇살 실은 씨앗처럼 땅에 떨어지고

내 노래는 풀과 나무, 저 산 끝에 가 사무치리

나는 노래하리

나와 내 마을을

해 저문 저 산 아래

한 떨기 풀꽃처럼 사라질 때까지

나는 노래하리

목숨과 이 땅이

나에게 그런 아름다운

짐을 짊어주었다네

벗을 수 없는 이 아름다운 짐을

 

햇볕이 되었거나 노을이 되었거나 / 이기철

 

들판에 흩어져 피는 꽃들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놓은 사람들은 어언 제 이름도 꽃이 되었거나

꽃술에 취해 잠든 나비가 되었거나

 

한 해 봄에서 가을까지 날아가도 제 그리움까지 닿지 못한 작은 새들에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은 제 이름도 어언 새가 되었거나

오리나무 가지에서 우는 새의 울음이 되었거나

 

도라지꽃을 피워놓고 혼자 잠든 산과 산에 그 키와 봉우리에 알맞는 이름을 붙여놓은

사람들은 벌써 산이 되었거나

산을 씻으며 흘러가는 강물이 되었거나

 

산 너머 또 산 너머 잠들어 있는 마을에 제가끔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은 벌써

제 이름도 햇볕이 되었거나

햇볕의 마지막 숨소리인 노을이 되었거나

 

2008년 7월 2일

시를 사랑하는 山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움쇠 金 定 南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