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암산과 불암사(詩山會 제103회 산행)
산 : 불암산(510 미터)
코스 : 상계역-재현고-고개사거리-정상-불암사(하산 코스는 정상에서 결정)
소요시간 : 오름 1시간30분 내려옴 1시간 10분
일시 : 2009년 2월 8일(일) 10시
모이는 곳 : 전철 4호선 상계역 1번 출구
준비물 : 막걸리, 안주, 과일, 사진기(하산 후 뒤풀이 예정)
연락 : 이재웅(010-3454-7717)
블로그 : 사진 blog.daum.net/sisan20
산행기 blog.daum.net/yc012175
카페 cafe.daum.net/K-20
가섭이 물었다 '번뇌가 무엇이뇨'
그것은 바람이나 물 같은 것이어서 중생이 있는 곳이면 피할 수 없나이다
바람이나 물 없으면 못 살듯이 그것이 없으면 중생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나이다
'부처는 열반이로군'
가섭은 눈을 감았다
-유자효 '번뇌' 전문
번뇌나 걱정 없이 살아보려는 희망은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 가섭의 깨달음처럼 죽어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론 편안할 것 같은 사람들도 실은 걱정거리를 한아름씩 안고 살아간다. '일'만 해도 그렇다.
할 일이 없으면 일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많으면 힘들다고 불평한다. 일거리가 적당하면 일탈하기 쉽다. 돈도 다르지 않다. 없으면 절실하게 필요하다. 적당히 있는데도 더 벌려고 애 쓴다. 많으면 돈에 치이고 노예가 되곤 한다. 삶에 완벽은 없다. 현재에 대해 늘 불만이지만 미래에도 뾰족한 수는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번민하고 걱정한다. 살아 있음에 대한 대가다.
-시평(이정환. 언론인)
가섭이 누구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서 의발을 물려받은 첫째 제자이다. 의발을 물려받음은 법통을 물려받은 것이다.
살다보면 누구한테나 어려움을 찾아온다. 회한도 겪는 날이 있을 거다. 수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후회되는 날이. 그날이 빨리 오면 차라리 좋은 거고, 너무 늦게 오면 후회해도 늦은 거고.
살다 보니 용서가 이렇게 힘이 든다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적개심과 분노를 품고 그 사람에게 앙갚음을 할 방법을 찾는 동안 정작 혹독한 대가를 치른 것은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용서를 하려 해도 방법이 찾아지지 않는다. 용서가 왜 중요한지, 용서를 하면 뭐가 좋은지 누가 모르랴. 현실에서는 용서를 실천하기가 ‘이론’처럼 쉽지 않은 게 문제다. 삶이 그리 공평하지도 않고, 빈틈없이 균형이 맞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억울한 사연에 집착할수록 내 삶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인데 현자들은 용서로 가는 길은 배우고자 할 때는 먼저 겸손함과 공감의 기술을 터득하라 한다.
겸손함은 우리가 주변사람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 말라고 일깨워주고, 공감은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한발 물러나 다른 사람들이 겪는 상처를 이해하게 해준다고 한다.
그것이 쉽지 않고 마음 속에서 분노가 끊임없이 일어나면 분노를 삼키고 살아야 할 것인 지 터트리고 살아야 할 것인 지 결정한다. 분노란 열정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분노는 고통의 신호이자 열정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이 에너지를 억압하는 대신 긍정적 힘으로 전환시킨다면 고통의 시기도 거뜬히 넘길 수 있지 않을까. 분노가 결심을 부르고 열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성공은 멀리 있는 신기루가 아니다.
그것이 안 되면 매일 산에 올라 산에다 분노를 뿌리고 심고 오면 된다. 매일 산에 다니다 보면 용서조차 초월해버린 山人이 되거나 道人이 되어 하산하게 될 지 누가 아는가.
산우들아! 이런 날에는 부처님 같이 생긴 불암산에 올라 좋은 친구들과 더불어 번뇌라는 이름의 친구를 날려보내고 즐거움이라는 이름의 산우들과 지내다 오면 좋은 듯싶다.
시산회 제 102회 “운길산” 산행기 (2009. 01.18. 흐림 / 김종화)
▣ 산행코스 : 운길산역 - 진중리 - 수종사 - 정상 - 새우젓고개 - 새재 - 도곡리(덕소)
▣ 참석 : 11명 ( 김용우, 김종화, 나창수, 박형채, 신원우, 이경식, 이원무, 이재웅, 조문형, 최광일, 한양기 )
▣ 오늘의 동반시 : ‘백년(百年)’ / 문태준
▣ 뒤풀이 : 치킨과 생맥주 (덕소역 옆)
잔뜩 찌뿌린 날씨이다. 엊그제는 모처럼 행복 씨와 함께 1박2일로 멀리 나들이를 하였었다.
금년부터 내 생활의 활력소를 찾기 위해 가끔씩 시간을 내어 함께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결혼 후 30여년을 살아 왔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내 생활에 쫒기다 보니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날들을 무의미하게 살아온 것만 같아 새해 들어 마음도 새롭게 정리할 겸해서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여행 후유증으로 머리도 아프고 감기 초기증상인 듯 콧물이 줄줄 흐른다. 평소의 습관대로 잠자리가 바뀌어 잠을 편히 잘 수 없는 탓도 있었겠지만, 이틀동안 혼자서 운전을 한 탓이겠지? 하고 자위를 해 보았지만 몸이 무거워 천근만근 한 짐이다.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서니 8시10분이 지났다. 어제밤 최광일 산우와 왕십리역에서 9시까지 만나기로 약속 했었는데,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가 없을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잠실역에서 덕소행 직행버스를 탄 후 광일이에겐 전화로, 이 총장에겐 문자로 ‘덕소역에서 합류 하겠다’고 연락을 취한 후 부족한 잠을 청했다. 버스는 막힘없이 달렸는지 불과 약 25분만에 덕소역 앞에 도착, 전철역 승차홈에 다다르니 9시02분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철내의 승객들이 모두 등산복 차림을 한 산객들이다. 중앙선 전철이 국수역까지 연장되어 산행을 좋아하는 수많은 등산객들이 운길산역에서 내린다. 약속한 집결시간이 넉넉하여 역사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60~70대의 한 산악회의 노인분들이 운길산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자녀로 보이는 40대 초반의 아리따운 여성산객 두 분이 동행,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여 사진 한 컷을 찍고서 휴게실로 오니 이원무 산우가 미소띈 얼굴로 반갑게 맞이해 준다. 산행 때마다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말수가 적은 반면, 정이 있는 듬직한 산우이다.
역사 내 마트에서 캔커피를 사서 마시고 있는데, 이 총장으로부터 ‘어데쯤 오고 있느냐’고? 하면서 규율부장인 나 원장이 ‘벌금을 필히 낼 준비를 하라’고 이른단다. 난, 벌써 도착하여 30분 동안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 원장 생각은 아마도 내가 다음 차로 오면 15분 이상을 지각하겠지? 하고 생각한 것 같다. 잠시 후 전차가 도착하고 많은 등산객들 중에 언제보아도 반가운 산우들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 참석하기로 약속을 한 산우들은 당초 8명 이었는데, 3명(원우, 경식, 광일)이 추가 되었다고 한다. 사정상 조금 늦게 도착될 것 같다는 형채는 수종사나 운길산 정상에서 합류키로 하고, 09시55분, 등산로가 표지된 길을 따라 오늘 뒷풀이는 어데서 무엇으로 할까?를 고민하면서 마을길을 벗어나 들머리로 이동하였다.
수종사로 올라가는 들머리 입구의 등산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다들 겉옷을 벗고 배낭을 점검하는 동안, 이 총장은 오늘 산행기를 쓸 산우를 묻는다. 재작년 청계산 산행(제 67회,’07.09.02)후 뒤풀이시 산행기를 포함한 책(가칭 ‘산과 시)’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100회 달성을 기념으로 기념집 발간을 추진하기로 협의 하였으며, 방태산 산행(제 70회, ’07.10.21)후 뒤풀이 때 산행기 작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2008년에는 산우들이 돌아가면서 작성키로 하고 산우들의 성함자 순서에 의거 그동안 잘(25명중 22명 작성) 추진되어 왔었다.
산행기를 작성함에 있어서는 김 전회장님과 이경식 산우와 같이 글 쓰는 재주와 취미가 남달라 부담을 갖지 않고 쓰는 산우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산우들이 산행기 작성에 대한 부담을 갖는 것 같다. 산행기 때문에 즐거워야 할 산행이 괴로운 산행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판단하에 금년도 한 해는 당일 집결지에서 신청자를 받아 자진하여 쓰도록 하고, 만약 쓸 산우들이 없으면 집행부를 맡은 죄로 회장단에서 아무런 부담을 갖지 않는 몇몇 산우들에게 부탁하여 작성토록 할 계획이다. 다만, 금년 말 납회 시에는 한 해동안 가장 많이 산행에 동참하는 산우와 또 산행기를 가장 많이 작성한 산우에게는 특별 포상을 할 계획이니 참고하시기 바라며,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를 부탁드린다.
수종사 입구까지는 승용차로 갈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경사가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면서 산우들의 건강관리 이야기가 주요 화두에 오른다. 몸에 좋다는 인삼과 홍삼이야기, 입심이 좋은 한양기 산우의 홍차가 녹차를 삶은 차(?)라는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참을 오르다 다들 도로 가에서 잠시 쉬자고 한다. 산행 때 마다 항상 맨 뒤에 처져서 따라 오르는 이 총장이 배낭의 무게 때문인지 귤을 한 봉지 내어 놓는다. 달콤한 귤을 까먹으면서 오늘 참석하지 않은 정해황 산우의 반포 모시떡을 찾는 산우들이 있다. 아마도 아침을 거르고 온 모양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박형채 산우가 뒤따라 올라왔다. 수종사나 정상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서 초고속으로 날아왔는가 보다. 평소에도 3~40대의 젊은 산객들 못지않게 산행을 잘 하고, 여러가지 취미가 다양해 야채농사도 짓고 해서 작년엔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곰치를 기르다가 몇 그루 선물한 적도 있다. 나이들어 가면서 좋은 취미생활을 꾸준히 계속 이어가길 바란다.
10시40분, 다시 출발이다. 여기저기의 도로가에 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주차시설이 되어있지 않은 곳이라 산행을 하는 등산객이나 수종사를 찾는 사람들이 주차한 것으로 보인다. 10여분을 오르니 길 가운데 ‘雲吉山水鍾寺’란 커다란 입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우린 하산을 도곡리(덕소) 쪽으로 결정하고, 잠시 수종사에 들른 후 정상으로 오르기로 했다. 수종사는 내가 청평에 근무하고 있는 동안 사무실에 왕래하는 길목에 있어서 잠시 시간을 내어 두 번 와 본 절이다. 수종사에 대한 내력은 다들 알고 있겠지만, 참고로 인터넷을 뒤져 소개한다.
수종사(水鍾寺)는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의 정상 가까이에 위치한 봉선사의 말사이다. 특히 수종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을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경관이 뛰어나 해동 제일의 사찰이라고 옛 사람들로 부터 전해지고 있다. 서거정, 초의선사, 정약용, 송인, 이이 등이 머물던 곳으로 시 몇 수가 전해져 오고 있으며, 물 맛이 좋아 ‘차(茶)’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범우고(梵宇攷)에 의하면 세조가 이 절에 친히 행차하여 땅을 파서 샘을 찾고, 종을 발견했다고 해서 수종사(水鍾寺)라 하였다고 전하며, 1939년 석조 부도(浮屠)를 중수하면서 1439년(세종 21)에 조성된 부도로 확인되어 조선 초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종사는 여러 해를 거치면서 중창을 거듭하였는데, 오랜 세월로 인해 대웅전과 요사채가 무너지고 불상 또한 그 사정이 참담하였다. 1890년(고종 27)에는 풍계혜일(楓溪慧一)화상이 고종에게서 내탕금 8천냥을 받아 중창을 마쳤고, 이듬해에는 4천냥을 더 받아 불상 4존(尊)과 탱화 3축(軸)을 새로 봉안하였으며, 대법당· 나한전·어향각(御香閣), 그리고 산왕각(山王閣)을 단청하였다고 한다. 1939년에는 주지 일조태욱(日照泰旭)이 대웅전·선루(禪樓)를, 1940년에는 영산전(靈山殿)·독성각(獨聖閣)·산신각·어영각(御影閣) 등을 중건하였지만, 6.25전쟁 때에 모두 소실되었다. 1975년 혜광(慧光)스님이 대웅보전을 복원하여 사세를 확장해오며 1999년 주지 동산(東山)이 선불장과 삼정헌(三鼎軒)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2년 팔각5층석탑(지방문화재 제 22호)과 1995년 부도(제 157호)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보존되어 오고 있고, 500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지방보호수(남양주 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종사의 으뜸은 두물머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잔뜩 흐린 날씨에 안개가 끼여 산 아래의 아름다운 양수리의 풍경은 희미하게 보인다. 날씨만 맑았으면 좀 더 좋은 풍광을 볼 수가 있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조선초기 판서를 지낸 서거정이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고 하여 남긴 시가 있다고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마당 우측에는 세조가 수종사 창건 기념으로 심었다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안내판에 수령이 500년을 넘고, 나무 둘레는 7m가 된다고 한다. 작년 가을에 와 봤지만 노랗게 단풍이 물들면 수종사 전체에 등불을 켠 것 같아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이다. 경내에는 ‘삼정헌(三鼎軒)’이란 찻집이 있어 방문객들에게 차를 대접하고 있었다. 차 맛이 좋다고 하는데, 우리들은 시간관계상 다음기회로 미루고 오던 길을 다시 내려가 우측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운길산 정상을 향하였다.
한참을 오르다 나무의자가 있는 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 곳엔 “알아두면 재미있는 토막 산림상식”이란 게시판이 설치되어 있다. 나무와 풀의 구분?, 모든 나무에 꽃이 필까?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와 가장 오래된 나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나무? 키가 가장 작은 나무? 돈이 가장 많이 든 나무? 등등 아직까지 내가 모르고 있는 새로운 지식을 얻은 것 같아서 오늘 산행의 기쁨이 배가 된다.
11시55분, 약 5분을 더 오르니 운길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지난번 시산제 백운봉에서와 같이 표지석을 말끔히 단장해 세워 놓았고, 그 옆에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구름이 가다가 걸려서 멈춘다고 하여 ‘운길산(雲佶山)’ 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강원도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화천, 춘천을 거쳐 약 371 km를 흘러 내려 온 북한강물과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영월, 충주를 거쳐 흘러내려 온 남한강물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수(山水)가 모두 수려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라는 큼직하게 적어놓은 안내의 글이 눈에 들어 온다.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산객들이 증명사진을 찍고 있다. 우리도 표지석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고 하산을 서둘렀다. 운무가 자욱한 날씨이지만 먼 발치에 예봉산과 철문봉, 적갑산이 어슴프레 보인다. 새우젓고개로 가는 등산로는 뾰쪽뾰쪽한 암반길로 가파르기만 하다. 능선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에너지를 보충하기로 하였다.
12시30분, 11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잡고서 깔판을 펴고 다들 먹거리를 내어 놓는다. 오늘도 먹산회답게 먹거리가 다양하다. 문형이는 작년 납회 산행(관악산)때 약속 하였듯이 김, 미역, 파와 함께 잘 말린 영숙표 과메기를 충분히 준비하였고, 나 원장표 추어탕과 해황이가 불참하여 모시떡이 없는 대신 경식, 용우는 기전떡과 반달떡을..., 형채가 러시아에서 특별히 주문하여 가져 온 보약주(한약제와 호랑이뼈를 우려낸 술?이라 함)를 한 잔씩 하니 추위가 한결 가시고 배가 든든해 진다. 소주와 막걸리도 있었지만 오늘은 몸에 좋다는 보약주가 우선이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을 제공한 산우들께 감사드린다. 좋은 산우들과 산행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이 즐거움을 그 무엇에 비교하랴!!...
에너지를 보충하였으니 이젠 다시 가야만 할 시간이다. 운길산역 앞에서 만났던 노인산악회 일행들이 바로 인근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들도 건강관리를 잘 하면 저분들처럼 되겠지. 우리들의 미래를 본 듯하여 기분이 상쾌하다. 한적한 능선길을 계속 내려오니 새재고개가 나온다. 길가에 이정표가 표시되어 있고 목판에다 새겨놓은 이정록 시인의 “더딘 사랑”의 시가 눈길을 끈다.(내려오면서 알게 되었지만, 이정표마다 “더딘 사랑”이란 시가 걸려 있었다)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 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렸다”... 달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눈짓 한 번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한달이다. 감는데 보름, 뜨는데 보름이나 걸렸단다. 사랑이란 이렇게 더디게 오고, 더디게 가는 것이 아닐까. 시간의 영원성과 인간의 한시성을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이정록 시인은 공주사대를 나와 교직에 있으면서 많은 시를 발표했다. 대표적인 시집으로 ‘의자’가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단체 사진을 찍고 하산을 서둘렀다. 조금 더 내려오니 두 갈래 길이 있다. 이정표에 가까운 도곡리 길(1. 71 km)로 내려오니 등산객들을 위한 음식점들이 보이고, 덕소로 가는 마을버스 정류소가 있었다.
15시경, ‘배도 그렇게 고프질 않고하니 뒤풀이를 생략하자’는 산우들도 있었지만, 시 낭송도 하지 못하고, 또 다음 산행장소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헤어지기가 섭섭하였기에 덕소로 이동하여 덕소역앞에 있는 생맥주집에서 간단한 뒷풀이를 하였다. 정상에서 읊어야 할 오늘의 동반시 “百年”(문태준)은 내가 읊었다. 김정남 전회장이 왜? 이 시를 선정 하였는가?를 생각하며 조용히 읊었다. 누군가가 “인생은 B(Birth) and D(Death)"라 했었는데, 그 가운데에 C(Choice)가 있다. 누구나 사람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자기 삶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백년을 혼자 살 수는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백년을 살기는 힘드니, 고뇌에 찬 삶 속에서 함께할 수 없는 애끓는 사랑을 그리는 시인 듯하다.
뒤풀이 때에 협의된 주요 안건은 앞으로의 산행계획에 관한 건이었다. 2월부터 매월 둘째 주 일요일과 넷째주 토요일로 하되, 둘째 주 일요일엔 서울 근교산행으로 하고, 원거리 산행은 넷째 주 토요일로 하자는 산우들이 많았으나 나 원장을 배려하여 홀수 달에는 둘째주 일요일, 짝수 달에는 넷째 주 토요일에 원거리 산행을 할 계획이오니 자기 일정에 참고하시기 바란다. 다음 2월 8일(일)에는 서울근교의 산행으로서 ‘불암산’으로 정하고, 집결지는 상계역(10시)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오늘 개인사정으로 참석하지 못 한 산우들은 다음 산행 땐 꼭 참석하여 주시길 부탁드리면서 산행후기를 맺는다.
<2009년 1월 23일 김 종화 씀.>
김 회장님께서 강릉으로 발령이 났다. 제주나 여수 같은 곳으로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갈 때가 되어 갔다지만 많이 아쉽다. 먼 곳이라 토요 산행은 참석할 수 있지만 일요 산행은 산행 후 강릉까지 가야 하니 어려울 것이다. 도움쇠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분간 근거리 산행은 어렵더라도 원거리 산행은 곡 참석하려한다. 하여 기 전회장을 위시한 많은 산우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가를 바란다. 불암산은 설명이 필요 없는, 친근한 산이니 별도의 소개는 생략한다. 도움쇠는 불암산 자락인 중계동에서 14년을 살다 도봉구청 앞의 중랑천 옆으로 옮겼다.
이 총장에게 코스 및 뒤풀이에 대한 얘기를 했으나 이경식 산우가 불암산을 잘 아니 꼭 참석하여 안내해주기 바란다.
프롤로그 시는 한국경제신문에서 연재하는 ‘시가 있는 갤러리’에 수록된 시이고, 동반시는 동아일보의 ‘현대시 100년’에서 찾은 시다. 사랑시와는 다른 현실참여시에 가깝다. 최근의 상황에 비춰 읊어보면 좋을 듯하여 올린다. 인생역전은 누구에게나 오고 간다. 결코 좌절하지 말고 이겨내자. 불암의 정상에서 누가 읊겠는가?
‘폐허’‘패배’‘실패’등의 단어는 발성법 자체에도 균열과 하강의 기운이 스며 있다. 파열음과 마찰음으로 이루어진 이 단어들은, 소리들이 서로 부딪쳐 침전하며 서둘러 끝을 맺는 형태로 발음된다. 이‘패배적인’발성법을 세상 가득 울려 퍼지는‘노래’의 정반대 차원으로 바꾸어 놓은 시인이 있다. ‘패배는 나의 힘’이라는 시적 슬로건을 삶과 시의 행동강령으로 삼고 있는 황규관이 그이다.
‘예감’은 최근 우리의 어려운 경제상황과 직결되어 더 진한 실감을 안겨준다. 전 세계를 점령한 거대 자본의 위력은 사람들의 ‘밥벌이’를 점점 더 가혹한 투쟁의 행위로 만들고 있다. 밥벌이의 전쟁터가 된 도시에는 사랑이 깃들 공간조차 사라져, 이제 ‘사랑의 노래’는 곧 철거될 재개발 지역의 허름한 주점에서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궁핍한 생활에 지친 처자식의 신음은 지금의‘가난한 평화’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것인가를 날마다 일깨우며 가장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황규관은, 삶에 패배한 이 순간이 바로 노래가 터져 나오는 순간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노래’는 ‘나’를 압박해 오는 혹독한 삶의 무게를 “내 것으로 한 다음에”야 터져 나오는 것이다.‘노래’는 막바지에 이른‘나’의 사랑과 외로움을 전심전력으로 ‘울’며 터뜨리는 자기 갱신의 행위인 것이다. 그 순간에 ‘노래’는 비로소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지는 것이다. ‘백척간두’를 ‘힘’으로 삼는 놀라운 역전의 비밀,‘폐허’와‘폐허의 아침까지’를 울며 노래할 수 있는 의지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고단하고 지친 그대여, 황규관이 선창하는‘노래’에, 조만간 그대 스스로 터뜨리게 될 노래의‘예감’에 함께 젖어들지 않으시려는가.
―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예감 / 황규관
이제 사랑의 노래는
재개발지역 허름한 주점에서 부를 것이다
가난한 평화는 한 블록씩 깨어지고 있다
그 아픔의 마른 냄새를 맡으며
잃어버린 대지를 찾지 않겠다
모든 밥벌이가 단기계약이듯
사랑도 이제 막바지다
새끼들 칭얼거림을 다 듣고
아내의 지친 한숨도 내 것으로 한 다음에야 노래는
터져나올 것이다
깨어진 기억은 길가에 치워져 있다
천장이 한없이 낮아
일찍 취하는 주점에서
마시고 내린 빈 잔을 가슴에 가득 담을 것이다
사랑은 막바지고
외로움도 좋다
백척간두가 내 힘이다
그러나 다시 노래는 울고 말 것이다
끝내 오고야 말 폐허까지
폐허의, 폐허의 아침까지
2009년 2월 4일 신새벽에
詩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움쇠 金 定 南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