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기록

덕숭산과 수덕사(詩山會 제105회 산행)

덕숭산과 수덕사(詩山會 제105회 산행)

산 : 덕숭산(예산. 495 미터)

코스 : 수덕사 주차장-정혜암-정상-견성암-주차장(원점회귀)

소요시간 : 오름 1시간 30분 내려옴 1시간 10분

일시 : 2009년 3월 8일(일) 8시

모이는 곳 : 교대역 8번 출구 노란색 25인승 버스 드림관광

준비물 : 간식, 안주, 과일, 사진기(점심은 하산 후 뒤풀이 겸)

연락 : 이재웅(010-3454-7717)

블로그 : 사진 blog.daum.net/sisan20

산행기 blog.daum.net/yc012175

카페 cafe.daum.net/K-20

 

 

동백꽃이 피었을 터이다

 

그 붉음이 한 칸 방이 되어

 

나를 불러들이고 있다

 

나이에 맞지 않아 이제 그만 놓아버린

 

몇 낱 꿈은 물고기처럼 총명히 달아 났다

 

발 시려운 석양이다

 

이제 나는 온화한 경치처럼

 

나지막이 기대어 섰다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 벽을 두른다

 

동백이 질 때 꽃자리엔 어떤 무늬가

 

남는지 들여다보는,큰 저녁이다

 

문 없어도 시끄러움 하나 없이 들끓는 방이다

 

-장석남 '방'전문

 

세월이 흐른다는 것,흐르면서 모두가 변한다는 것,속절없이 늙어간다는 것. 받아들이기는 싫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자꾸 늘어난다.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다. 악착같이 붙들고 있던 꿈들을 많이 놓아버렸다.

 

이제 꿈보다는 추억에 기대어 살아야 하리라.다시 동백꽃 피는 계절. 머지않아 핏빛 꽃송이가 시들지도 않고 툭툭 떨어질 것이다.

 

빛나는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그 단호함에 감탄하면서도 꽃 진 자리에 남아 있는 쓸쓸한 무늬를 오래 들여다 본다. 어느덧 한 생에서 발시린 석양. 온화한 경치처럼 세상 낮은 곳에 몸을 맡겨야 할 때다.

-시평(이정환. 언론인)

 

 

시산회 제 104회“구병산”산행기 (2009. 02.28, 흐리고 맑음 / 한천옥)

 

- “왕 회장 ‘디카’를 ”구병산“정상에다 묻다.“ -

 

참석자 : 14명 (김용우, 김정남, 김종화, 박형채, 위윤환, 이원무, 이재웅, 전 작, 정해황, 조문형, 최광일, 최근호, 최영수, 한천옥)

 

6시쯤 기상을 하여 밖을 내다보니 아직은 어둠이 거치질 않았다.

공기도 그다지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약간 흐리긴 하지만 편안한 느낌이 등산하기에는 좋을 것 같다.

 

진도산 울금을 가미한 호박즙을 15봉, 맛있는 사과, 말랑말랑한 제리 1봉을 배낭에 챙기고 잠실행 버스를 타고 지하철 2호선 잠실역 3번 출구 쪽으로 다가가니 낯익은 모습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용우가 반갑게 맞이한다.

조금 지나 윤환이가 나타났다.

 

노란색 버스를 찾아 셋이서 3번 출구를 나섰다.

길 건너 석촌호수 쪽에 원무와 전작이의 모습이 보인다.

곧 이어 근호와 해황이까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니까 건너편에 노란색 버스가 나타났다.

 

무단횡단을 하여 노란색 버스에서 내리는 재웅이와 조우를 하고서 문형이, 정남이, 영수, 형채, 종화, 맨 마지막으로 광일이 까지 줄줄이 나타난다. 무려 14명이 참석한 것이다.

당초 15명이라 했는데, 경식이는 갑자기 사정이 생겼단다.

출발하면서 시계를 보니까 7시 10분이다.

 

중부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한 시간이나 달렸을까?

아침에 집합시간이 너무나 빨랐는지, 아침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온 친구들이 많다고

이 총장이 인심을 크게 쓴다(사실은 왕 회장이 아침은 가다고 먹기로 메일로 공지를 했었는데, 메일을 못 봤었다).

 

"음성휴게소"였던가?... (기억이 안난다.)

각자 식성대로 '우거지갈비탕'과 '올갱이해장국'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 우리의 노란색 애마는 청원-상주간 고속국도를 향하여 쌩쌩!.달린다..

 

'속리산IC' 에서 빠져나와 상주를 향해 가다가 이정표를 따라 도착한 곳이 적암리 마을!

그야말로 한적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9시 40분, 잠실에서 2시간 30분만에 주파를 했단 말인가?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 알았으면 8시쯤에 출발했어도 되는건데... 왕 회장의 넉두리!

주변의 얌전한 산봉우리들에 비해 유난스레 울퉁불퉁한 수 많은 봉우리를 보니 저절로 생각나는 것이 ‘알프스’... 여기가 ‘충북의 알프스’란다. (산행 안내판에 그렇게 표시되어 있었다.)

 

 

< 충북 보은군에서 인터넷에 올린 "구병산"의 소개>

 

구병산은 호서의 소금강인 속리산에서 뚝 떨어져 나와 마로면 적암리와 경북과의 도계에 웅장하고 수려한 아홉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가을단풍이 기암절벽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어 가을 산행지로 적격이다.

 

구병산은 산악탐방 코스로 연계된 관광자원으로 10㎞ 정도 거리에 아름다운 자연과 시설물이 조화를 이룬 서당골관광농원과 서원, 만수 계곡, 삼가호수등이 있으며 계곡 주위에 자리잡고 있는 99칸의 선병국 고가를 비롯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인 삼년산성, 그리고 우리나라 8경의 하나인 제2의 금강산 소금강이라 불리는 속리산 등이 자리하고 있어 머물면서 자연과 문화유적을 둘러볼 수 있는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구병산은 속리산의 남단에 위치하여 속리산의 명성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최근 많은 등산객이 찾고 있다. 특히 가을단풍이 멋들어진 곳으로, 구병산은 적암리 휴게소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되며, 대락 다섯시간 정도의 산행코스이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면서 산행코스를 자세히 보고, 산행통제소 관리인에게 확인(왕복 4시간 30분)까지 하고, 09시 50분경에 들머리를 들어섰다.

 

출출한데 그냥 등산만 할 위인들이 아니지!...

약 30여분쯤 오르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펴고, ‘전 작’표 여수 직송 막걸리에 ‘근호’표 한우 불고기(마늘과 함께 볶았으니 맛이 배가 되었다.)의 궁합에 크!~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오고... ‘정남’표 한과까지 더하니 입맛이 새롭다..

 

원기를 보충하였으니 다시 또 올라가야지!

한 시간 정도 끝없이 계속되는 오르막길!

헉헉대며 능선길에 오르니 왼쪽으로 2.3 km지점에 ‘구병산’정상이 있다는 이정표!

능선길이라 힘이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오십분은 걸어가서야 정상을 밟을 수 있었는데 우리 소대가 자리잡고 쉴 만큼 널따란 공간이 없다. 등산 인파도 꽤나 많다.

 

서둘러 단체 증명사진을 찍고서 앞서가는 친구들을 따라 돌아서 한참을 내려갔는데 꼬리가 짤렸다. 왠일인가 하면서 기다리는데 이 총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 총장이 김 전회장의 디카를 구병산 정상에서 절벽 아래에다 놓쳐서 숲속에 묻었단다.

 

꼬리를 다시붙여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을 간단히 해결(상주에서 사업을 하는 왕 회장의 고향 친구가 낙동강 매운탕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다기에.)하려 했으나 그래도 푸짐하였다.

‘영수’표 오곡 주먹밥, ‘순단’표 곰피쌈, ‘행복’표 족발, ‘전작’표 화순 김치, ‘광일’표 햇딸기 등등 ‘재웅’표 찰밥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따끈따끈한 커피로 마침표를 찍고 그리고 오늘의 시 낭송!...(산행기를 쓴다고 내가 읊었다.)

 

“혼자가는 먼 집”- 허 수 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하산길은 딱히 쉴만한 곳도 없어 구병리까지 한번도 안 쉬고 직하산!

 

오후 2시 30분!

4시간 40여분의 구병산 등반을 마치고 서울로 가기 전에 즐겨야 할 또 한 가지!

올라갔던 구병산을 바라보며 상주 시내를 통과하여 한 시간 정도는 족히 이동하였을까?

상주시 낙동면 신상리에 민물매운탕과 토종닭도리탕을 전문으로 하는 "신상매운탕"집..., 널따란 낙동강을 바라보며 뱅뱅이(피래미) 튀김요리에다 맥주와 소주 한 잔!,잡어 매운탕에 밥 한 그릇!,침 넘어 가지않는 사람 있을까? 오늘 산행에 참석하지 못한 산우들은 두고두고 후회가 막심할걸...아마?

 

고맙소!

우리의 왕 회장과 그의 고향 친구!

따뜻한 마음을 가진 당신, 사업도 번창하시게나...

 

서울로 올 때에는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여주까지는 무사 통과하였으나 여주에서 중부고속도로와 합류할 때까지 약간 지체되었다.

 

그래도 상주에서 5시 20분경에 출발하여 잠실에 8시 20분경에 도착하였으니 올라올 때는 약 3시간정도 밖에는 안 걸렸구나!

 

3월 8일에 또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시산회 파이팅!

 

2009년 2월의 마지막 날에... 한천옥 씀.

 

 

이상은 금년들어 처음 참석(4회중 1회)한, 한 교장을 집행부에서 지명, 산행후기를 쓴 걸 제가 생각나는 것과 체제만 일부 편집하여 그대로 옮겼습니다.

 

앞으로 산행에 계속해서 3회 이상 빠지면 반드시 산행후기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행여 못 쓰겠다면 벌금(1만냥)을 징수 하겠사오니 본인과 집행부를 위하여 열심히 산행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벌금은 회비에다 저축해서 “산과 시” 책자 발간에 사용 위계임).

 

산행은 다른 누구를 위함이 절대로 아닙니다.

본인의 건강을 위하여 열심히 산행에 참석토록 하십시다. 옛말에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했습니다. ‘돈’이, ‘자식’이, ‘마누라’가, ‘친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음 산행은 충남 예산에 소재한 “덕숭산”입니다.

가까이 있는 수덕사도 구경하고, ‘덕산온천’에서 ‘온천욕’을 하고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해안으로 가서 맛있는 회를 먹을까(?) 하오니 온천욕과 회를 좋아하시는 군기반장님 나 원장을 비롯한 많은 산우들의 참석을 바랍니다. (경치 좋고 맛있는 횟집을 안내 하겠나이다.)

 

또한, 이미 메일로 통보 해 드린 바도 있습니다만, 금후 ‘원거리산행’에 대하여는 산우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금년 1년 산행계획을 정할까 하오니 적극 푸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 e-mail을 개설하지 않은 최(영수) 산우는 이번주 목요일까지 꼭 개설하여 회장단에게 통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여불비례 -

2009년 03월 01일(월) / 김 종 화 배상.

 

구병산행 때는 디카를 잃은 것은 그동안 찍은 것이 컴에 저장이 되어 있고 USB에 또 저장이 되어 있음을 확인했으니 그날 찍은 것만 날아가서 다시 사면 괜찮지만 제발 하산과 식사는 함께 하자. 부탁이다. 한 차로 가서 함께 땀흘리며 오르고 정상에서 증명사진도 함께 찍었으니 하산도 함께 하고 식사나 간식도 함께 먹자. 차가 어디에서 기다리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더구나 집행부인 김 회장과 이 총장, 위 등반대장 및 안내를 맡은 도움쇠가 없는데 어디로 먼저 간다는 말인가. 집행부가 늦게 내려가는데 소수의 몇 사람이 먼저 먹고 있으면 본인들은 맘이 어떤지 모르지만 늦게 내려간 집행부가 볼 때는 그 모습이 초라하고 궁색해 보인다. 제발 부탁이다. 함께 하자. 역지사지. 기세환 전회장이 왜 오지 않았는지 모르나 모두 특히 집행부 모두가 아쉬워한다. 다음 산행 때는 꼭 참석바란다.

 

덕숭산은 쉬운 산이다. 산행노트를 보니 ‘2004. 6. 18. 178회 산행. 동반시는 한용운 님의 ’알 수 없어요‘. 흐림. 오름 1시간 30분. 내려옴 1시간. 수덕사 경내를 서성이다가 장대한 몸집을 가진 스님이 대웅전 옆의 계단 위에서 많은 신도를 내려다 보며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있으나 갈 길이 멀어 그냥 올라갔다. 서울로 오는 길에 아산온천을 들러 40분간 온천욕. 언제 보아도 항상 깨끗하고 다양한 체험이 가능한 온천이다’ 결과적으로 홀로 산행으로서는 마지막 산행이 되었다. 시산회를 결성하여 1회부터 다시 시작했지만 홀로 산행은 마지막 산행이 될줄 몰랐다. 온천집 남자도 남의 온천에 가서 색다른 체험을 하고 올 때도 있다. 덕산온천도 좋지만 이번 산행 때는 전문가 입장에서 아산온천을 권하고 싶다. 회를 먹을 예정이라니 가까운 덕산호텔의 온천도 괜찮다. 함께 가지 못해 아쉽다. 어찌 될지 모르지만 4월부터는 빠지지 않을 예정이다. 일엽 스님 때문에 알려진 수덕사이니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간단히 그 분에 관하여 올린다. 일독을 바란다.

 

비구니 일엽 스님은 신학문을 섭렵한 문인이자 선각자로, 출가 후에는 만공 선사의 맥을 이은 선승으로 칭송 받았던 인물이다.

 

1896년 평남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스님은 부친이 목사인 까닭에 어려서부터 기독교계에서 설립한 구세학교와 삼숭보통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하며 부족함 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1907년 갑작스런 어린 동생의 죽음은 이후 스님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동생의 죽음을 접한 스님은 그 통탄의 심정을 글로 옮겼고, 이것이 한국문학상 신시의 효시로 불리는 ‘동생의 죽음’이었다. 동생의 죽음으로 비애감에 젖어 있던 것도 잠깐, 14세 되던 해 스님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고, 남은 동생들도 차례로 단명(短命)하는 불운을 겪었다. 어린 나이에 가족들의 잇단 죽음이라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스님은 이후 서울로 상경, 이화학당에 입학하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이후 동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스님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성 잡지를 통해 신여성운동론을 전개했다. 특히 화가 나혜석과 더불어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던 스님이 불가(佛家)에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백성욱 박사와의 만남 이후부터다.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백성욱 박사와의 만남은 스님에게 삶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특히 백성욱 박사가 들려준 불교에 대한 설명은 스님으로 하여금 ‘대자유인이 되는 길은 곧 깨달음에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후 불교잡지에 지속적으로 글을 쓰는 동시에 수행에도 매진했다. 그러나 이런 수행이 계속됐어도 가슴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아쉬움은 그대로였다. 그러던 스님은 덕숭산 수덕사에 주석하던 만공 스님의 법문을 듣고 비로소 크게 발심해 출가의 길에 들어섰다.

 

1928년 스님의 나이 33세 되던 해, 금강산 서봉암에서 성혜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이후 선학원에서 만공 선사 문하로 득도, 수계했다.

 

불문에 입문한 스님은 수행에 있어서도 남달랐다. 오후불식, 장좌불와는 물론 목숨을 건 스님의 구도행은 그 어떤 수행자도 쉽게 따를 수 없었다. 그러기를 몇 년 스님은 마침내 ‘고인(古人)의 속임수에 헤매고 고뇌한 이 예로부터 그 얼마인가. 큰 웃음 한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라는 오도송을 부를 수 있었다. 비로소 팔만 사천 번뇌를 모두 털어 버리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일엽 스님은 이후부터 중생제도와 비구니 스님의 위상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섰다. 특히 스님은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함으로써 세간에 불교에 대한 환희심을 일으키게 했으며 당시 이렇다할 비구니 수행처 하나 변변치 않았던 한국불교에 비구니총림원을 설립하는 등 후학 비구니들을 위한 일에도 앞장섰다.

일엽 스님은 1971년 1월 28일 세수 76세, 법랍 43세로 입적했다.

 

동반시를 사랑시로 선정한다.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33번째이다. 구병산의 동반시가 어렵다니 쉬운 시로 골라 보았다.

 

섬진강 시인, 섬진강이 제 노래를 하기 위해 낳은 시인, 그래서 섬진강을 전담해서 다 노래하는 시인, 초등학교 2학년이 좋아 오랜 세월 2학년 담임을 전담했다던 선생님 시인, '집을 향하기 전에 2학년 1반 교실 유리창을 다 닫고 그 너머로 강변 마른 풀밭 풀잎 위에 남은 햇살들을 보'(〈나는 집으로 간다〉)는, 주로 1반만 있는 시골학교의 평생 평교사 시인,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스스럼없이 "나가 김용택인디!" 하는 타고난 붙임성의 시인, 까마득한 후배를 만나도 늘 다른 무엇도 아닌 "큰 성(형님)"이 되어 주는 시인, 약간 높은 톤으로 말하며 하하하! 웃는 시인, 콩 타작 마당에서 쥐구멍에 들어간 콩을 보며 〈콩, 너는 죽었다〉고 동시도 쓰는 시인, 연애시도 잘 쓰지만 막상 연애박사일 성싶지는 않은 순정파 시인, 지난 여름 아쉽게 퇴임한 할아버지 시인, 이해인·김훈·도종환·안도현·성석제·정호승·장사익 등 당대의 쟁쟁한 문인과 예인들로부터 퇴임을 위로하는 글 잔칫상 《어른 아이 김용택》(문학동네)을 받은 복 많은 시인, 김용택 시인(60)!

 

시를 보니 그는 '월인천강(月印千江)'한 저녁, 그만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어 연인에게 전화를 해댔구나.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당가를 서성이다가, 최대한 낮게 숨을 고르고 나서 '달이 떴다고, 섬진강 변이 너무나 환하고 곱다'고.하고 싶은 말은 그러나 더 있었을 터. 그 말은 차마 못하고 더듬거리며 '달 이야기'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심전심(以心傳心), 척 알아듣고 이렇게 답을 보냈다.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이렇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를 쓴 이는 시인이 아니라 그 연인이어야 하는데 작가는 김용택 시인이라니 혹시 '슬쩍' 한 것인가? 그럴리야. 그러한 애틋하고도 향기로운 답을 받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과 그리움이 이 시가 된 것이리라. 그래서 스스로 전화하여 마음으로 말 걸고 스스로 답을 만들어 받은 것이 이 작품인 것이다. 절로 미소가 흘러나오는 행복의 순간 같지만 그 이면엔 쓸쓸함이 아침 안개처럼 흐르기도 한다. 물론 사실 그대로일 수도 있겠으나 더 아름다운 달이 뜨는 강변을 가진 연인을 상상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김용택 시인은 농경 공동체를 온전하게 체험한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그의 몸과 기억에는 근대 이전의 우리 공동체가 경험한 감각들이 고스란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그래서 '온전한' 고향의 노래이고 그가 노래한 사랑 또한 '오리지널'한 고향의 사랑 노래다. '내가 그냥 좋아했던 이웃 마을 그 여자/ 가을 해가 뉘엿뉘엿 지는 날/ 이 길 걸으면 지금도 내 마음 속에서 살아나와/ 저만큼 앞서가다가 뒤돌아다보며/ 단풍 물든 느티나무 잎사귀같이 살짝 낯을 붉히며 웃는,/ 웃을 때는 쪽니가 이쁘던 그 여자/ 우리나라 가을 하늘같이 오래 된 그 여자"(〈애인〉)에 나타나듯 그가 사랑한 '우리나라 가을 하늘같이 오래 된 그 여자'는 실은 우리들 모두의 저, 낮은 자리 마음이 늘 사랑한, 사랑할 그 여자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 용 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이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2009년 3월 4일

詩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움쇠 김 정 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