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기록

설악산 십이선녀탕 계곡(詩山會 제110회 산행)

설악산 십이선녀탕 계곡(詩山會 제110회 산행)

산 : 설악산 십이선녀탕 계곡

코스 : 남교리-십이선녀탕 계곡-안산 갈림길-대승령-대승폭포-장수대

소요시간 : 오름 5시간 내려옴 2시간

일시 : 2009년 5월 24일 6시 반

모이는 곳 : 전철 2호선 잠실역 3번 출구 너구리상을 돌아서 호텔 롯데 남측

준비물 : 가벼운 중식, 살얼음낀 막걸리, 안주, 과일(하산 후 뒤풀이 겸 저녁)

연락 : 김종화(010-2406-0332)

블로그 : 사진 blog.daub.net/sisan20

산행기 blog.daum.net/yc012175

카페 cafe.daum.net/K-20

 

 

 

 

오뉴월 흰 나비 떼처럼 낭창낭창한 햇살이

 

무등산 자락마다 온종일 머물고 있었다.

 

초록 벌판에 쉼표 없는 그날의 아우성들이

 

그대 떠난 발자국 뒤에 숨쉬고 있었다.

 

내 목숨의 모래톱 위로 누가 손짓하는가.

 

아직 우리가 가야할 초록 들길은 아득한데

 

이맘때쯤 그 입술에 파인 미소가 반짝인다.

 

말하자면 너는 운주사 천불천탑 미소처럼

 

내 청춘의 유곽에서 불멸하는 영혼이었다.

-‘그날, 극락강’-이승철(1958~ )

 

 

남도여행 갔다 극락강 건너 서울 온 며칠 후. 빛고을 그 강 내 젊은 벗들 피로 흥건히 흘렀다. 나만 강 건너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그때 내 청춘 내 양심은 죽었다. 주검을 빚 삼은 알량한 양심일 순 없어 술 마시고 울부짖던 그날 이후 일기장들. 극락강 건넌 영령들인가, 내 목숨 모래톱 위 순정한 빛으로 손짓하는 이들은. <이경철·문학평론가>

 

우리가 잔인했던 광주의 5월을 잊고 갈 수 없다. 내 인생도 거기서 갈렸지만 어느 것이 좋았을 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홧김에 그만 두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대전에서 살고 연구소 실장이나 부장쯤 하면서 정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입소 동기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상상이 가능하다. 산우들 누구 하나 특별한 상념이 없겠는가. 이제 와서 기리고 추모한다 해서 달라질 것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기억은 하고 지나가자. 우리의 애마 안에서 1분의 묵념이라도 올리자.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시산회 제109회 “병풍산” 산행기 (2009. 05.09~05.10, 맑음 / 이원무)

◈ 산행코스 : 한재골 대치(들머리) - 신선대 - 정상(깃대봉) - 넓적바위 - 천자봉(옥녀봉) -

대방저수지(날머리)

◈ 산행시간 : 4시간45분(07:55~12:40)

◈ 참석자 : 13명 (김용우, 김종화, 남기인, 이경식, 이원무, 이재웅, 임용복, 전 작, 조문형,

최영수, 한양기, 한천옥, 최승식)

 

먼저 이번 산행을 위해 초청과 안내를 해 주신 최승식 원장님과 산행 앞날 앞풀이시에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홍어와 죽엽탁주(동동주 포함)를 가지고 와 함께하여 준 박하영, 권재헌 두 친구께도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계절의 여왕답게 5월의 싱그러운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산행하는 마음보다는 여행을 떠난다는 설렘으로 아침부터 설치다가 약속시간인 오후 2시를 10분이나 지난후에 집결장소인 잠실역에 겨우 도착하였다. “다음에는 늦지 않겠소” 라고 읊조리고 난후 이 총장에게 ‘몇 명이나 가느냐’고 물으니 아직 한 명(조문형 산우)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며, 12명이라고 한다.

 

이번 산행기를 쓸 차례라고 미리 연락을 받고 보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5분후 조문형 산우가 연두빛깔 새 모자와 상의 조끼를 입고 나타 났었는데, 모든 산우들이 그 패션을 은근히 부러워하는 눈치였고, 시산회의 입담달인 한양기 산우가 평소와 다름없이 꼬치꼬치 캐물으니 조 산우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엊그제 며느리한테 어버일 날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애들은 아직 짝을 못 맞춰 주워 그런 선물도 못 받으니 부러울 수밖에 없지 않는가...? 어느새 우리를 태운 애마는 잠실을 벗어나 판교로 접어들었다.

 

경부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전 작 산우가 배낭에서 따끈따끈한 찐빵을 꺼내어주며, 아파트 상가에서 샀다고 하나씩 나누어 준다. 가운데에 달짝지근한 단팥이 들어있어 어릴 때 즐겨먹었던 추억의 그 맛 그대로였다. 찐빵 한 개로 점심이 해결되는 아주 커다란 빵이었다. 시산회가 아니면 그 어디서 그 맛과 추억의 낭만을 느끼리오.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이재웅 총장의 왕포도, 김용우 산우 회사의 워크샾 때 아껴놓았다가 가지고 온 청량리 할마니 곡주 등등 모두 감사히 잘 먹었나이다.

 

최근 필리핀을 오가며 동분서주하고 계시는 영원한 훈장님, 남기인 다솜유치원 이사장님은 “부모님의 언어” 라는 소책자를 나누어 주면서 유치원생 교육에 인기짱이라고 전하며, 손자, 손녀 교육에 활용하라며 건네주신다. 내용을 대충 훑어보니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언동의 기본이라 생각이 든다. 말이란 항상 상대방을 배려해서 정확하게 표현하여야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어느새 애마는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달리고 있다. 차창 넘어 멀리에 모내기준비와 밭농사가 한창이었다. 김 회장님이 지난번 산행 연기에 대한 설명과 이번 산행의 추진경위, 다음 산행일정에 대하여 안내가 있었다. 우리 시산회가 이렇게 탄탄히 유지되어 오는 것은 그동안 김 회장님을 비롯한 기세환, 김정남 전임회장님의 강력한 추진력과 탁월한 리더십 때문이라고 감히 언급하고 싶다. 모든 계획과 실행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산우들의 의견을 수렴하되 집행부의 결정에 최대한 협조할 때 명품 브랜드화가 된다는 것을 새삼 느껴본다.

 

우리의 애마는 벌써 논산을 지나 호남고속도를 타고 장성IC를 접어들었다. 새로 뚫린듯한 시원한 도로로 10여분 달리니 담양 입구의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에 도착하였다. 40여년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이 수종을 들여와 가로수로 심었다는 것이 바로 이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인데 신도로 확장으로 우려곡절이 있었지만, 담양군민이 지켜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메타세콰이어 20m 높이에 2km에 이르는 이 가로수 길은 가을동화에 소개된 춘천 남이섬의 가로수, 변산의 내소사입구 전나무숲과 더불어 연인과의 다정히 걷고 싶은 낭만의 길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념 촬영을 한후 담양 읍내를 지나 최승식 원장과 만나기로 약속한 “친정 가는 길”이란 식당을 찾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으나 김 회장님이 식당에 전화를 하여 오토바이를 탄 아줌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도착하니 최승식 원장님이 미리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며 반가이 맞아 주신다. 이경식 산우도 광주에서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후에 담양에서 양조장을 경영하고 있는 권재헌 친구와 광주에서 박하영 친구가 도착하였다. 서울 촌놈들이 고향 땅에 산행을 위해 왕림했다고 함께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어 동참한 것이다.

 

식탁에 둘러앉은 15명의 친구들은 ‘웰빙 식단은 이런 것이야? 말이 필요없잖아’ 하며 쑥국이며, 콩으로 만든 고기며, 짭조르만 참조기며,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왔다. 거기에다 광주에서 박하영 친구가 가져온 20인분의 홍어며, 담양에서 10여년간 양조장사업을 하고 있는 권재헌 친구가 손수 빚어 가져온 샛노란 빛깔의 조 껍떼기술과 죽엽탁주가 어느 대중가수의 가사처럼 정말 죽여주데요!~잉!

 

집행부에선 우리 시산회 친구들을 정답게 맞이해준 친구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증정하였다. 건강을 위하여 열심히 산행하시라고 등산용양말과 이 총장이 그동안 심혈을 기울려 작업한 노래모음 CD(제 3집) Set를 선물하니 모두가 흐뭇해들 한다. 정성어린 선물을 준비한 이 총장께 다시한번 고마움을 표한다. 이렇게 만남이란 즐거운 것이다. 더불어 맛있는 고향의 별미중 별미를 맛보며 술을 한 잔씩 하니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옛 말이 떠오른다. 처음 만나는 세 친구들께 시산회임을 자랑하다 보니 내일 정상에서 읊어야 할 시를 김 회장은 그냥 앞풀이에 읊어도 좋다고 하여 나에게 그 영광이 돌아왔다. 동반시는 김정남 전임회장님이 추천한 이근배 시인의 “찔레”이었다. 동반시를 읊고나니 이것이 뒷풀이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앞풀이를 맛깔나게 한후 연수원으로 이동하였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연수원은 고요하고 아늑하기만 하였다. 도시에서 공해로 찌든 삶에 활력소를 불어 넣기에 안성마춤의 장소였다. 그래서 전국에서 이 곳으로 연수(수련)를 온다고 한다. 별관에 여장을 풀고 잠시 둘러앉아 우리들의 지나간 일들을 하나하나 반추하며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 원장은 아껴놓았던 발렌타인 30년산을 내어 놓으며, 한 잔씩 하잔다. 조 껍떼기술과 죽엽탁주를 곁들이며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밤공기를 쐬러 밖에 나오니 밤뻐꾸기 소리와 함께 보름달이 휘엉청 밝기만 하다. 무엇보다도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하다. 연수원에서는 제주도, 구미, 전남지역에서 온 청소년 200여명이 함평 나비축제전 일환으로 노래와 춤 경연과 마지막으로 캠프파이어를 흥겹게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과거 속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일까?...

 

다음날 아침 6시에 기상하니 어제저녁에 내 모르게 있었던 사건이 있었단다. 일부 몇몇 산우들은 최 원장, 권 사장의 안내로 담양읍내까지 나가서 밤늦도록 노래방에서 풍류를 즐기다가 왔단다. 모처럼 고향땅에 왔으니 끼가 발동했나 보다. 내가 유했던 방에는 코를 고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잠을 잘 잤었는데, 최 원장의 말에 의하면 코고는 소리가 마치 쌍두마차로 함흥차 떠나갈 듯해서 잠자리를 학생들이 잠자는 곳으로 피했다고 한다. 누구나 다 피곤하면 코를 골게 되는데 조금 심하게 코골이를 하는 산우들이 있어 단체로 숙박을 할 땐 피해를 끼치기도 한다. 아마 한 모 산우(?)와 최 모(?) 산우인 듯하다.

 

우린 가능하면 조금 빨리 출발하기로 하고 연수원 식당에서 줄을 서서 배식받아 청소년들과 함께 식사를 하니 젊음을 불살랐던 옛 군시절이 생각났다. 식사 후 최 원장이 준비한 생수며, 오렌지, 과자, 오이와 이 총장이 나눠 준 찹쌀시루떡 등을 배낭에 챙겨 넣고, 병풍산 산행을 위해 들머리로 이동하였다. 병풍산은 담양군 수북면과 장성군 북하면의 경계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산행은 대부분 들머리를 대방저수지로 해서 천자봉 - 깃대봉(정상) - 투구봉 - 만남재 - 삼인산 - 삼방골(날머리)로 내려온다고 하나 최 원장이 무리한 산행을 피해 사전에 마나님과 함께 한재(대치)로 해서 깃대봉까지 답사하고 원점회귀 하였다고 한다.

 

버스는 산속길을 약 10여분을 달려 해발 400여m의 한재고개의 대치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들머리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정상의 높이가 822m 이므로 약 420m만 오르면 된다. 오늘은 가장 쉬운 산행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모두들 등산화를 새롭게 묶고 출발이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데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등산하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이다.

 

간혹 철쭉 꽃이 수줍은 아낙네처럼 나무사이로 우리를 반기는 듯하다. 약 30여분을 오르자 누군가 잠시 쉬어 가잔다. 어제밤 안주도 좋고 술이 맛이 있어 주량 이상으로 마셨나 보다. 땀을 식히고 다시 약 30여분을 더 오르니 산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이 신선대라고 한다.

 

산 아래에는 담양읍내가 내려보이고, 멀리 남쪽으로는 무등산이, 동쪽에는 추월산과 강천산이, 북으로는 내장산이 사방팔방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우리나이에 등산하기에 딱 좋은 코스였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산 능선을 따라 약 30여분을 더 올라 정상인 깃대봉에 도착하였다.

 

정상가는 길 옆에 몇 개의 돌탑들이 있었다. 어떤 것은 자세히 보니 돌을 하나하나 쌓으면서 세멘으로 붙여 놓았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난다. 돌을 쌓으면 탑이 되지만, 그냥 놔 두면 돌이 된다고... 우리들도 자기개발을 통해 부지런히 자신을 연마하라는 뜻일 게다.

 

시산회 역사상 최단시간에 정상에 올랐다. 시계를 보니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오전 9시30분밖에 안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 산들이 수련원을 중심으로 글자그대로 병풍처럼 둘러쌓아 었었다. 최 원장의 말에 의하면 코스가 다양해서 등산시간은 다양하게 조절이 가능 하단다. 자그마한 정상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다시 300m쯤 이동하여 먹을자리를 잡았다. 어제 먹다가 남겨 가져온 홍어, 김 회장이 준비하여 온 과메기를 죽엽탁주와 함께 과일, 오이, 시루떡 등을 주거니 받거니 맛있게 먹고 있는데 광주, 담양지역의 ‘푸른연대산우회’ 라고 하는 세 분의 산객과 합류하게 되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그러한가 보다. 잠시 서로 음식을 나눠먹으며 처음만나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갈 길이 달라서 그 곳에서 헤어져야만 했다.

 

원기를 보충하고 이젠 하산이다. 능선길을 따라 약 20여분을 내려가니 널다란 바위가 나타난다. 이곳이 넓적바위란다. 바위틈에 서있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한 컷을 찍고 내려가다 다시 한 봉우리를 올라서니 천자봉이란 표지석이 눈에 보인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다시 하산이다.

 

등산로는 700~500m 까지는 급경사 코스이고, 500m 고지 이하는 완만한 등산로가 이어졌다. 대방저수지 방향으로 내려오는데 설악산 한계령을 내려오는 길처럼 무척이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어느 산행이나 마지막 하산길이 항상 지루하고 어려운 시간이다. 이는 체력은 거의 소진되고 다리도 무릎도 아프기 때문이다.

 

우리의 애마가 기다리고 있는 대방저수지 옆 연수원 입구에 도착하니 12시 40분이다. 곧장 담양온천으로 이동하여 온천에서 잠시 산행으로 인한 피로를 풀기로 했다. 온천욕 시간은 일정상 30분밖에 없으니 시간준수를 하여 달란다. 조금 더 푸욱 담궜다가 나왔으면 좋으련만, 간단히 사워만 하고 탕에 잠시 있다가 나오니 훌쩍 30분이 지나버렸다. 담양온천은 호텔과 같이 있었는데 무척 한가로워 보였다. 이다음에 가족과 함께 다시 한 번 오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다음을 기약하고 뒷풀이 장소로 예약되어 있는 “감나무집식당”은 한옥으로 지은 큰 저택집이다. 시골에 있는 집치고는 깨끗한 인테리어가 동양화의 여유로움과 한가로움에 다시 찾고 싶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곳의 주 메뉴는 돼지갈비구이였는데, 주방에서 직접 구워 오는데 맛이 한결 부드러우면서 타지 않아 색달라 보였다. 여사장을 불러 누군가가 그 KNOW-HOW에 대해 물어보니 주방장인 남편자랑만 하고 가 버린다.

 

최 원장이 준비 한 ‘로얄샬루트’ 21년산 양주와 소·맥을 곁들여 마시면서 친구들의 건강과 우리 시산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였다. 담양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고향의 맛을 한껏 느끼는 즐거운 일정이었다. 이번 담양 병풍산 산행의 1박2일의 일정은 젊음의 기를 듬뿍 받고 우정을 다시 한 번 소중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되며, 최승식, 박하영, 권재헌 친구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단풍이 붉게 물들 때인 금년 가을 산행을 다시 한 번 기대하면서......(1박2일은 무조건 GO, GO, GO)

2009년 5월 16일 이 원 무 씀.

 

이상은 항상 그러했듯이 이 산우가 작성한 글을 제가 일부 빠진 내용들을 추가하여 편집하였습니다. 시산회 친구들을 위하여 숙소제공은 물론, 동반 산행과 고향의 맛있는 음식점을 소개해 주시고, 아껴두었던 발렌타인 30년산 등 양주와 아침식사 등을 제공하여 주신 최승식 원장님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합니다.

 

또한, 양조장 사장님답게 텁텁한 정으로서 담양의 명품인 죽엽탁주와 조 껍데기술을 제공하여 주신 권재헌 친구와 광주에서 특별히 시간을 내어 20인분의 맛있는 홍어를 가지고 오신 박하영 친구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모두가 같은 고교를 나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그립고, 따뜻한 정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시산회를 대표하여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며, 친구들의 건강과 함께 하시는 모든 일들이 번창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날씨가 좋아 병풍산 정상(깃대봉)에서 발아래 펼쳐지는 풍경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공,사간에 바쁜 일정으로 함께 하지 못한 산우들이 있었기에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금년도 가을 단풍시즌(10월하순~11월초순) 때에 최 원장과 협의하여 다시 한 번 일정을 잡을 계획이오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음 산행은 '설악산(12선녀탕)'으로 당초에는 5월 23일(토)이나 그 날은 총동문회 체육행사와 일정이 겹쳐 5월 24일(넷째 일요일)로 변경 실시키로 하였아오니 착오 없으시기 바라오며, 건강한 모습으로 많은 산우들이 함께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 시를 좋아하고 산을 사랑하는 산 사람들의 모임 “시산회” / 김 종 화 올림 -

 

도움쇠도 사족을 붙여 본다. 건장하며 말없는 사나이에게 이렇게 훌륭하고 깊은 감성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간혹 시니칼하게 씨익 웃는 모습과 그 웃음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다. 듬직하고 멋진 사나이.

 

 

산우들, 오랜만이다. 산행기를 올리려고 무심코 회차를 누르는데 108회쯤 되려니 하고 눌렀는데 벌써 111회가 되었다. 세월이 빠른 것인지 내가 무심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더 많으니.

 

집 근처 중랑천 고수부지 자전거도로에서 산악자전거를 타다가 모자가 벗겨져서 급정지를 하다 넘어지면서 두꺼운 바지가 구멍이 날 정도로 큰 무릎 부상이 있었는데 본시 작은 상처는 쉽게 잘 낫는, 좋은 살성을 가지고 있어 간단한 소독만 하고 곧 나으려니 하고 방치했었다. 한잔술에 취한 상태에서 또 자전거를 타다가 이번에는 다친 무릎과 어깨까지 다치는 사고가 생겼다. 그래도 방치하다가 쉬 낫지 않고 붓고 통증이 심해져서 병원에 갔더니 봉화직염이란다. 어깨는 인대가 늘어져서 무거운 것을 들지도 메지도 못하는 약간 심각한 상태로 발전했다. 고교 4년 후배인 의사선생님 말씀이 60-70년대에서는 군인의 사망 1순위였을 만큼 어려운 병이었는데 지금은 의학수준이 발달하고 약이 좋아져서 그 정도는 아니지만 쉽게 낫는 병이 아니니 꾸준히 치료하란다. 못 배운 인상이 아닌데 행동은 무식했다며, 자신의 몸에 무심했다고 약간 꾸중을 하신다. 이제는 거의 나았지만 무릎은 아직도 약간 욱신거리고 왼쪽 손목은 시큰거리며, 어깨는 약간 무겁다. 무릎의 상처는 아직도 까맣다. 내가 진단할 상처가 아니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가 당시 상황에 꼭 맞는 말이다. 그래도 산우들이 보고 싶고 산을 오르고 싶은데 의사의 승낙을 받고 겨우 오르기로 맘먹었다. 다시 악화되더라도 다른 곳도 아닌 설악의 십이선녀탕계곡과 안산, 대승령, 대승폭포, 장수대 코스를 아니 갈 수 없는 일.

 

국방과학연구소 시절. 1978년 5월로 기억한다. 한참 설악에 반해 자주 오르고 내릴 때 1박2일의 일정으로 연구소 직원들과 토요일 오후에 출발하여 남교리 민박집에서 1박, 아침밥을 지어 먹고 주먹밥을 싸서 7시에 출발. 북천을 건너는데 지금은 수량이 적고 다리가 있어 도보로 건너지만 그때는 수량도 많고 다리가 없어 민박집 아줌마 사공이 줄로 연결된 목선으로 강을 건너주었다. 지금은 천이 맞지만 그때는 분명히 강이었다. 그것도 너른 강. 제대로 된 길이 없어 신발을 벗고 계곡을 건너기도 하고 물이 불어 길이 끊기니 로프를 메고 암벽을 타고 길을 개척해가며 올랐으니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 시간이 걸리고 힘들었지만 얼마나 좋았겠는가! 탕을 지날 때마다 나오던 탄성은 복숭아탕을 지나면서 탄성이 절정에 올랐다.

 

긴 등반시간에 비해 자주 나타나는 절경에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십이선녀탕의 끝인 두문폭포 밑에서 간단히 싸온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랬다. 안산을 향해 출발하고 두문폭포를 지나면서 맞은 편의 직벽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의 탄성은 예고편이었다. 바위에 두른 푸른 이끼와 바위 틈에 난 관목, 검푸른 바위의 조화에 모두 얼이 빠졌다. 그때의 감격과 탄성이 지금도 마음과 귀에 선하다.

 

그 후 두문폭포까지는 특히 가을에 가족과 함께 혹은 친구와 수차례 올랐고 두문폭포를 지나 대승령까지는 가을에 한 번 간 적이 있으니 신록의 5월에는 두 번째가 되겠다. 그때의 감동이 살아날 만큼 아직도 그 아름다운 조화로움이 남아있을 지 궁금하고 걱정되지만 그래도 산을 오르는 것만으로 행복한 일이다. 거기부터는 쉬지 않고 전진. 원시림의 상태였다. 지금은 길이 넓어져 그때의 맛이 나지 않는다. 안산과 대승령으로 갈리는 삼거리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체력이 남았던 나와 몇 명은 안산까지 달려갔다, 돌아왔다. 한창 때의 혈기방장한 젊은 나이였으니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는 눈요기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삼거리에서 바라본 설악의 전경에 한 번 더 넋을 잃고 영원히 설악을 사랑하기로 다짐했다. 그때의 마음가짐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니 내 맘의 형태도 일편단심형이다. 당시까지 야생의 반달가슴곰이 서식하고 있다고 했다.

 

갈림길에서 대승령까지는 쉬운 길. 대승령에서 왼쪽으로 난 길이 휴식년제로 출입금지된 흑선동계곡인데 2006년의 가을 10월 1일. 45회 산행 때 1인당 50만원의 과태료를 낼 각오로 아름드리 전나무 등 침엽수가 울울창창한 원시림을 구경한 적이 있는 시산회는 참으로 용감하고 멋있는 모임이다. 신 이사가 있으니 지금은 어렵지만 그때 결행한 게 참으로 다행이다. 흐흐흐. 내친 김에 직진하면 설악의 정상 대청까지 서북주릉이라 한다. 언젠가 가보자. 어렵지만 해보지 않고 미리 포기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대청에서 더 전진하면 내가 그리도 가고 싶은 화채능선이다. 휴식년제가 풀리기를 기다리다가 시체말로 ‘손자 환갑되겠다’. 내 여건이 되면 꼭 간다. 동반자가 없으면 혼자라도 꼭 간다. 주머니에 50만원의 과태료를 담고 꼭 간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산에 관한 한 가고 싶은 곳은 꼭 갔다. 권금산성까지 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머리 휘날리며 내려온다. 상상만 해도 즐겁게 웃을 일이다. 대승령에서 장수대로 내려오는 길에 대승폭포가 있는데 당연히 입에서 톡 쏘면서 살살 녹았던 ‘삼환표 흑산 홍어’가 생각난다. 이번에도 부탁하네. 완도산 문어도 올라올 때가 되었다.

 

1979년 무렵 박통 시해사건 직전이었을까, 가을에 대승폭포를 지나다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밑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물이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오색무지개가 피는 것을 보며 울렸던 탄성도 기억한다. 이 정도면 산우들의 마음은 이미 설악에 있을 것이다. 모두 가자. 신 이사는 빠져서는 안 된다. 그래야 좋은 가을날에 신 이사에게 부탁하여 백담사-영시암-구곡담계곡-봉정암(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을 거쳐 중청산장에서 1박하고 대청에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밝은 해를 바라보고 동해바다로 고래를 잡으러 가자. 구곡담계곡은 설악의 또 다른 백미이다. 후년의 봄에는 가야동계곡도 건너야 한다. 개인적인 소망이지만 속초 근처에 터를 잡고 사시사철 친구들은 부르고 동해의 해와 달과 별을 벗삼아 구름이 낀 설악을 바라보며 살다가 설악에서 죽고 싶다. 배 한 척 구할 능력이 있으면 바다낚시도 즐기면서.

 

신 이사에게 연락이 왔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가지 못 하나 공원 직원을 동행시키겠다는 전언이다. 내 전화번호를 알려줬으니 알아서 도움을 청하든지 하란다. 길을 잘 아니 함께 갈 필요가 없겠지만 회장과 산우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하산 후에 뒤풀이 장소는 잘 알 테니 그때 도움을 청해도 좋겠다. 신 이사는 당연히 가야하고 가고 싶으나 못 가니 가을에 또 가잔다. 신 이사 부탁은 우리가 거절하지 못 한다. 수해가 난 후 오르기 쉽게 복구가 됐는데 자원보존 이사로서 당연히 들러야 하는데 바빠서 기회가 없었나 보다.

 

 

한 세상 살아보니-한 세상을 육십갑자가 돌아오는 육십년으로 해석하고-용서가 최대의 복수이고 내가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이 그렇게 한 것이고 내가 넘어진 것은 나의 탓이지만 일으켜 주시는 것은 하느님이 해 주실 것이라 생각해본다. 하도 답답해서 산보삼아 산에 올랐다 내려오면서 눈에 뜨이는 길가의 손금을 보는 집에 들렀다. 복수도 용서도 하지 말고 여태까지 살아온 그대로 살란다. 그래도 당신의 삶은 다른 사람에 비해 충분하고 넉넉할 만큼 행복한 삶이었고 행복할 삶이란다. 당신은 절대 나쁘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니 주변과 조상들이 돌볼 거란다. 맞다. 가족이 건강하고 산우들이 있으니 충분하게 행복한 사람이다. 아직은 건강한 두 다리가 있고 한국의 산하가 머리속에 있으니 나만큼 행복한 사람도 드물지 않겠는가. 이제 됐다. 더 나빠질 일이 없다. 다시 올라가거나 이대로 살면 된다. 언젠가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님에게 불평했더니 하나님 말씀이 “너가 진정으로 불행한 것을 모르는 구나 진정으로 불행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줄까?”라 했다는 내용을 기억한다. 전제조건으로 오만하지 않아야 한단다. 관상을 보니 그러고 살았을 가능성이 있단다. 그러면서 사족을 붙인다. 여복이 있는 관상이라고, 그것도 한참 연하의 여자친구가 생긴단다. 보통은 여자를 사귀면 돈이 많이 드는데 당신은 돈이 드는 여자가 필요 없단다. 흐흐흐. 이래서 웃어본다. 그 분의 재미있고 유쾌한 립써비스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사랑시 50편 중에서 동반시를 골랐다. 때를 기다리다 이제야 동반한다. 백석, 그가 쓴 시 중에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이란 시도 있다. 길어서 망설여 지지만 그 시도 언젠가 동반한다. 백석이 누구인가. 자야가 누구인가. 길상사가 어떤 곳인가. 법정 스님이 운영하는 산방을 내준 분이 자야 여사다. 우리 모두 안다. 멋진 사나이 백석. 우리도 이처럼 살다 갈 수 없을까.

 

추한 세상을 뒤로 하고 나타샤, 함께 산골로 가자.

이 시는 바야흐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싶은 시인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짜 연애편지다. 어느 밤 눈은 내리고 연인이 있는 곳에도 연인과 함께 가고 싶은 곳에도 눈이 푹푹 내릴 때 한 대책 없는 시인이 사랑을 노래한다. 그윽한 영상을 펼쳐 보이며 잔잔하게 전개되는 이 시는 두 번의 절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시의 도입부에 단도직입으로 펼쳐진다.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단다! 중증의 나르시시즘이다, 요샛말로 '자뻑'이 한참 심하다. '낙엽이 져요, 당신이 그리워요' 이게 순서 아닌가. 그런데 이 시는 대뜸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여 낙엽이 지고,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꽃이 핀다는 것이다. 사랑의 힘을 이토록 과장되게, 그러나 천진하고도 사랑스럽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시뿐이리라. 두 번째 절정은 3연. 산골로 도망가자고 연인을 꾀는 시인의 속내에 그대로 드러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이 시가 발표된 때는 1938년이니 일본제국주의 압박이 점차 수위를 높여갈 때다. 세상은 갈수록 추해져 가고, 우리는 더러운 세상에 섞여 살기 힘든 순결한 존재들. 그러니 더러운 세상에 상처받지 말고 우리가 먼저 세상을 버려버리자고 이 시는 선동하는 것이다. 기막힌 사랑의 선동이 어이없으면서도 흐뭇하다. 상대를 단박에 무장해제시키는 철없고 순수한 자긍심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 이 정도는 돼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일 만하지! 게다가 이 말은 시인의 입을 통해 나오지 않는다. 출출이(뱁새) 우는 산골로 가 마가리(오두막집)에 살자고 하는 시인에게 나타샤가 응답하며 고조곤히(조용히) 속삭이는 말로 설정해 놓았는데, 묘하게 아련하고, 아프고, 캄캄하다. 사랑하는 그대가 이렇게 말해주는데 도리 있나. 푹푹 내리는 흰 눈 속에 응앙응앙 울며 어서어서 흰 당나귀가 와야지!

 

이제 당나귀를 타고 떠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이를 어째! 언젠가 눈은 그치고 말 텐데! 더러워 버린 세상에서 여전히 시인은 살아내야 하는 걸! 몽환적인 한 편의 흑백영화 같은 이 시는 그래서 더욱 애잔하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했고 시 잘 쓰고 핸섬한 모던 보이 백석(1912~1995)에겐 여자가 많았다. 그 중에도 통영 처녀 '란(박경련)'과 기생 '자야'의 인연은 특별해 보인다. 누런 미농지 봉투 속에 든 이 시를 백석에게서 직접 받았다고 전하는 자야 여사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첫눈 오는 날 길상사 마당에 뿌려달라고 유언했고, 그리 되었다. 생사를 알 길 없이 남과 북에 헤어져 살면서도 백석의 생일날이 돌아오면 금식하며 그를 기렸다는 한 여자가 첫눈 속에 돌아간 흔적이 아득하다.

-시평(김선우. 시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년>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2009년 5월 18일

詩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움쇠 김정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