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논쟁 16 - 7.성유식론에 나타난 종자(種子)의 유래논쟁 / 이동우
1.머리말
제법의 종자(種子)는 본래부터 있는 것인가, 아니면 본래는 없던 것이 훈습에 의해 새롭게 생겨난 것인가? 1) 종자를 본유(本有)와 신훈(新熏)으로 분류한 것은 이미 미륵(彌勒) 보살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大正藏 30, p.573中)에도 나타나 있다. 이 논에서는 종자를 본성주종자(本性住種子), 선습기종자(先習起種子), 가수치종자(可修治種子), 불가수치종자(不可修治種子)의 4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이 넷 가운데 처음의 본성주종자와 선습기종자는 차례로 본유종자(本有種子: 本性住種)와 신훈종자(新熏種子: 習所成種)에 해당된다
이는 종자의 유래를 묻는 문제이며, 바로 이 문제를 《성유식론(成唯識論)》 제2권에서는 따로 지면을 할애하여 주제적으로 다루고 있다. 곧 종자의 본유의(本有義), 신훈의(新熏義) 그리고 본유신훈합생의(本有新熏合生義)이다. 이 셋의 학설 가운데 종자의 본유의는 호월(護月, Candrapala) 논사(論師)가, 신훈의는 난타(難陀, Nanda)가, 본유신훈합생의는 호법(護法, Dharmapa칕a)이 주장한 것이다.
세 명의 논사 가운데 호월은 유루(有漏)·무루(無漏)를 막론하고 그 어떤 종자도 훈습에 의해 새로이 조성되는 것은 없으며, 예외 없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한다. 호월 논사에 의하면, 현행의 훈습을 통해서는 단지 기존의 본래부터 있던 종자의 증장(增長)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에 반해 난타 논사는 유루·무루를 막론하고 종자는 모두 훈습으로 인해 생겨난다고 한다.
난타 논사에 의하면, 본유종자(本有種子)란 것은 없으며 종자는 예외 없이 능훈식(能熏識)의 훈습을 통해 새롭게 생겨난다. 한편, 호법 논사는 종자에는 본유(本有)와 신훈(新熏)의 두 종류가 모두 있다고 한다. 호법 논사는 유루·무루의 종자에는 본유와 신훈이 모두 있거니와, 오직 본유만이 있다거나 또는 오직 신훈만이 있다고 주장할 경우에는 온전한 의미의 인연(因緣)의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호법 논사에 의하면 종자의 인연의(因緣義)는 본유·신훈의 쌍방의 합생(合生)을 통해 성립한다. 곧 본유종자가 능훈(能熏)의 현행을 생하고 능훈의 현행이 소훈처(所熏處)에 신훈종자를 훈습함으로써 종자·현행 사이에 온전한 의미의 인연의 뜻이 성립하게 된다.
이상 세 논사의 학설을 검토해 볼 때, 종자의 유래와 관련된 각자의 상이한 입장은 종자와 현행 사이에 성립하는 인연의에 대한 각자의 해석에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유·신훈 논쟁의 배경에 종자의 인연의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본고에서 이 논쟁을 시설한 텍스트와 그 주석서를 다루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2. 호월(護月)의 본유의(本有義)
호월 논사는 종자에 본유만을 인정하되, 신훈은 인정하지 않는다. 종자는 본래부터 본식(本識) 안에 함장되어 있는 것으로서, 현행(現行)의 칠전식(七轉識)에 의해 새롭게 훈성(熏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뜻이다. 호법(護法)의 《성유식론》에는 호월 논사의 이런 뜻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일체의 종자는 모두 그 성품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지, 훈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훈습력(熏習力)에 의해서는 단지 [종자의] 증장(增長)만이 가능할 뿐이다. 2) 護法 等造, 玄? 譯, 《成唯識論》(大正藏 31, p.8上). “一切種子皆本性有不從熏生. 有熏習力但可增長.”
호월 논사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경론의 문구를 끌어온다. 먼저 《성유식론》 제2권에서 호월 논사에 의해 인용된 것으로 소개하고 있는 경론은 《무진의경(無盡意經)》, 《아비달마경(阿毘達磨經)》, 《능가경(楞伽經)》,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이다. 3) 護法 等造, 玄? 譯, 《成唯識論》(大正藏 31, p.8上∼中) 참조.
호월 논사는 종자는 비롯없는 때로부터[無始時來] 있어 왔고, 또 유루(有漏)든 무루(無漏)든 훈습(熏習)에 의해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 없다는 이들 경론에 의거하여, 종자는 모두 본래부터 있다 본유(本有)는 ‘종자의 본유의(本有義)’를 확립하려 한다.
그런데 종자에 본유(本有)의 뜻만을 인정할 경우에는 종자로부터 현행이 발생하는 일은 가능해도, 훈습의 의의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훈습의 의의가 없으면 종자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일은 물론이요 위축되고 소멸하는 일도 불가능하게 된다. 호월 논사도 어떻든 이 훈습의 의의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지, 훈습력에 의해서는 단지 종자의 증장만이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호월 논사는 이렇게 훈습에 있어 ‘증장(增長;長養)의 계기’만을 인정하고 ‘섭식(攝植)의 계기’는 인정하지 않는다. 규기(窺基)의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는 호월 논사의 뜻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뭇 경론(經論)에서 [종자는] 훈습(熏習)에 의해서 있게 된다고 말한 것은, 곧 [기존의 종자의] 증장(增長)을 뜻하는 것이다. [종자는] 새롭게 훈성(熏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 基 撰, 《成唯識論述記》(大正藏 43, p.304中). “諸經論言由熏習有 此謂增長. 非新成故.”
호월 논사에 의하면, 훈습의 의의는 기존의 법이(法爾)의 종자를 증장시키는 데 있지, 소훈(所熏)의 본식(本識)에 종자를 새로이 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호월 논사가 의미하는 훈습에는 이처럼 ‘종자를 심는다’는 뜻, 다시 말해 ‘종자를 섭식(攝植)한다’는 뜻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훈습이 단지 이런 내용을 갖는 것에 불과하다면, 종자는 오직 인(因)이 될 뿐이고, 현행은 오직 과(果)가 될 뿐이라는 결론밖에 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경우는 능생(能生)의 인(因: 種子)으로부터 소생(所生)의 과(果: 現行)가 현출되는 이른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의 한 방향의 인과(因果)만이 있되, 거꾸로 소생의 현행이 인(因)이 되어 본식 중에 다시 종자를 심는 이른바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의 역 방향의 인과는 없다.
따라서 이 때는 “전식(轉識)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해 인연의 뜻이 있다.”고 한 유식학파 소전(所傳)의 여러 경론의 말씀에 위배된다. 이런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호월 논사는 자신이 훈습의 뜻으로 인정한 ‘현행이 종자를 증장시키는 측면’만을 내세워 이를 인연이라 부른다. 종자섭식(種子攝植)의 뜻은 이렇게 해서 다시 인연의(因緣義)에서 배제된다.
호월 논사가 현행훈종자의 인과에서 종자섭식의 계기를 배제한 이유는 현행이 본식에 거듭 새로운 종자를 훈습할 경우에는 인(因)·과(果)의 균형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본유종자의 현행으로 신훈종자가 훈습되어 생긴다면, 원래는 하나였던 능생(能生)의 인(因)은 종자가 새롭게 훈습됨으로 인하여 둘이 되고, 이렇게 훈습이 계속되면 될수록 그에 따라서 인도 역시 계속 불어나게 될 것이려니와, 그렇다면 나중에 과를 생할 때 이 과는 다수의 인 가운데 어떤 것에서 생하게 되는지 혼란스럽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능생의 인이 다수가 될 경우에는 소생의 과를 결정하기가 곤란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뜻에서 볼 때, 종자의 인연의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종자섭식의 계기를 배제해야 하는 것은 호월 논사의 입장에서는 필연적이다.
그런데 온전한 의미의 훈습의 뜻은 앞서도 이미 밝히고 있듯 증장(增長)과 섭식(攝植)의 두 계기를 동시에 함의한다. 따라서 현행훈종자라는 말에도 또한 동시에 두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는 ‘현행(現行)이 [기존의] 종자를 증장시킨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현행이 [새로운] 종자를 [본식 중에] 섭식한다’는 뜻이다. 호월 논사가 인정한 현행훈종자의 인연의에는 오직 전자의 뜻만이 있다.
3. 난타(難陀)의 신훈의(新熏義)
난타 논사는 호월 논사와는 정반대로 종자에 오직 신훈(新熏)만을 인정한다. 《성유식론》에는 난타 논사의 이런 뜻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종자는 모두 훈습에 의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소훈(所熏)·능훈(能熏)은 함께 비롯 없는 때로부터 있어 왔다. 그 때문에 뭇 종자는 비롯 없는 때로부터 [훈습에 의해] 성취된다. 종자란 본래 습기(習氣)의 또 다른 명칭이다. 습기는 필연적으로 훈습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다. 마치 꽃으로 훈(熏)하기 때문에 마(麻)의 향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 5) 護法 等造, 玄? 譯, 《成唯識論》(大正藏 31, p.8中). “種子皆熏故生. 所熏能熏俱無始有. 故諸種子無始成就. 種子旣是習氣異名. 習氣必由熏習而
난타 논사에 의하면, 유루·무루를 막론하고 종자는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롯 없는 때로부터 훈습에 의해 성취된다. 곧 현행의 능훈의 전식(轉識)이 소훈의 본식(本識)에 종자를 훈습하기 때문에 종자는 성취되는 것이다. 난타 논사는 이렇게 위의 호월 논사와는 달리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의 인과의(因果義)를 배제하고 현행훈종자의 인과의만을 인정한다.
이렇게 볼 때, 난타 논사는 호월 논사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인연의를 전개시키는 셈이 된다. 곧 이 경우는 능훈의 현행이 인(因)이 되고, 소훈처(所熏處)에 훈부(熏附)되는 바의 종자가 과(果)가 된다. 난타 논사 역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경론의 문구를 끌어온다. 《성유식론》 제2권에서 난타 논사에 의해 인용된 것으로 소개하고 있는 경론은 《다계경(多界經)》, 《섭대승론본(攝大乘論本)》,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등6)이다. 난타 논사는 이들 경론의 문구에 의거해 종자의 신훈의(新熏義)를 확립하려 한다. 6) 護法 等造, 玄? 譯, 《成唯識論》(大正藏 31, p.8中) 참조.
난타 논사는 위의 《다계경》을 해석하면서 계경에서 더럽거나 깨끗한 온갖 법의 훈습에 의하지 않고도 뭇 종자가 적집된다고는 말하지 않으므로 모든 종자는 예외없이 신훈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7) 基 撰, 《成唯識論述記》(大正藏 43, p.305中) 참조.
또, 그는 《섭대승론》에서 인용된 ‘내종자8)에는 결정적으로 훈습9)이 있으나, 외종자10)에 있어서는 훈습이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없다.’라는 내용 가운데, 내종자에는 결정적으로 훈습이 있다는 위의 인용문을 전거로 해서 종자신훈의(種子新熏義)를 확립하려 한다. 8) 내심(內心)의 종자를 이른다.
9) 유루(有漏)의 문혜(聞慧)·사혜(思慧)·수혜(修慧)의 훈습을 이른다. 이들은 지전(地前)의 자량위(資糧位)와 가행위(加行位)에서 닦는다. 10) 호마(胡麻) 등과 같은 것을 이른다. 11) 護法 等造, 玄? 譯, 《成唯識論》(大正藏 31, p.8中). “內種定有熏習. 外種熏習或有或無.”
그리고 명언(名言) 등의 3종의 훈습12)에는 총괄해서 일체의 유루 종자가 남김없이 섭수되는 바, 이 3종의 훈습은 이미 훈습에 의해 그 종자가 있게 된 것이므로, 따라서 유루종자는 필연적으로 훈습을 가자(假藉)해서 생겨난다13)고 난타 논사는 주장한다. 12) 3종의 훈습(熏習)이란 명언습기(名言習氣)·아집습기(我執習氣)·유지습기(有支習氣)를 말한다. 명언습기는 모든 법의 직접적인 인연 신인연(親因緣)이 되는 종자를 이른다. 명언습기를 명언종자(名言種子), 명언훈습(名言熏習), 또는 등류습기(等流習氣)라고도 부른다. 아집습기는 실아(實我)를 집착하는 소견에 의해 훈습된 종자를 이른다. 유지습기는 삼계(三界)·오취(五趣)·사생(四生)의 과보를 이끄는 종자를 이른다. 유지습기를 업종자(業種子), 또는 이숙습기(異熟習氣)라고도 부른다.
그에 의하면, 무루종자도 또한 오직 훈습에 의해서 새로이 생겨난다. 문훈습(聞熏習)은 정법계(淨法界: 淸淨法界)로부터 평등하게 흘러나오는 바른 법 등류정법(等流正法)을 듣고서, 훈습하여 일어난다고 말하기 때문에, 또 유루문훈습의 종자는 출세간심(出世間心)의 종자성(種子性)이 된다고 하기 때문에14)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평등하게 흘러나오는 바른 법이란 정지(正智: 根本智) 등에 따라서 법계(法界: 眞如法界)로부터 평등하게 유출되는 정법(正法)을 이른다. 난타 논사는 유루문훈습의 종자, 곧 유루의 정문훈습(正聞熏習)의 종자는 청정한 법계로부터 흘러나온 십이분교(十二分敎) 등의 교법(敎法)을 듣고서 훈습한 종자인 바, 이 종자로부터 초견도위(初見道位)에서 비로소 무루의 출세간심이 생겨난다고 한다. 15) 난타 논사의 이런 주장은 정문훈습종자(正聞熏習種子)를 언급한 무착(無著) 보살의 《섭대승론본(攝大乘論本)》(大正藏 31, p.136下)이나 무성(無性) 보살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大正藏 31, p.394中) 등의
다시 말해 유루의 문훈습의 종자는 무루의 출세간심에 대해 인연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난타 논사의 종자신훈의를 살펴보면, 훈습에 섭식의 계기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나, 증장의 계기가 있는지의 여부가 불분명하다. 그렇더라도 난타 논사는 신훈종자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현행의 훈습을 통해 종자가 먼저 소훈처에 섭식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신훈의의 경우는 설령 훈습에 증장의 계기가 있다 하더라도 종자의 섭식이 증장보다 우선하며 증장은 종자가 섭식된 이후에야 가능하다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확인시켜 준다.
4. 호법(護法)의 본유신훈합생의(本有新熏合生義)
호법 논사는 종자에 본유(本有)와 신훈(新熏)을 모두 인정한다. 곧 일체의 유루와 무루의 종자에 각각 본유와 시기(始起;新熏)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성유식론》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자에 각각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본유(本有)이다. [본유란] 곧 비롯 없는 때로부터 이숙식 중에서 법이(法爾)로 있으면서 온(蘊)·처(處)·계(界)를 생하는 공능차별(功能差別)을 이른다. (중략) 둘은 시기(始起)이다. [시기란] 곧 비롯 없는 때로부터 자주 현행(現行)에 의해 훈습되어 있게 된 것을 이른다. 16) 護法 等造, 玄? 譯, 《成唯識論》(大正藏 31, p.8中). “種子各有二種. 一者本有 謂無始來異熟識中法爾而有 生蘊處界功能差別. (中略) 二者始起 謂無始來數數現行熏習而有.”
이 본유종자와 시기종자에 대해 호법 논사는 차례로 본성주종(本性住種)과 습소성종(習所成種)이란 명칭을 각각 부여한다. 호법 논사는 종자에 오직 본유만을 인정하는 호월 논사에 대해 만약 종자가 오직 본유가 될 뿐이라면, 전식(轉識)이 아뢰야(阿賴耶)와 더불어 인연성이 될 수 없어야 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17) 護法 等造, 玄? 譯, 《成唯識論》(大正藏 31, p.8下) 참조.
또 호법 논사는 종자에 오직 신훈만을 인정하는 난타(難陀) 논사에 대해 만약 종자가 오직 시기(始起)가 될 뿐이라면, 유위의 무루는 인연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생겨날 수 없어야 할 것18)이라고 비판한다. 유루를 무루의 종자가 된다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18) 護法 等造, 玄? 譯, 《成唯識論》(大正藏 31, p.8下) 참조.
예컨대 앞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난타 등의 논사는 유루문훈습의 종자를 출세간심(出世間心)의 종자성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루문훈습의 종자는 출세간법을 위해 수승한 증상연(增上緣)이 되어줄 뿐이다. 출세간법에 결정적인 인연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무루성(無漏性)의 문훈습의 종자이다.19) 무루성의 문훈습의 종자는 출세간법의 체(體)를 변별해서 생하기 때문이다. 19) 護法 等造, 玄? 譯, 《成唯識論》(大正藏 31, p.8下) 참조.
호법 논사는 모든 법이 발현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현출시키는 직접적인 원인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원인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직접적인 원인은 인연(因緣: 親因緣, 正因緣)을 말한다. 간접적인 원인은 조연(助緣)을 말한다. 간접적인 원인인 조건, 곧 2차적 원인은 1차적 원인, 곧 직접적인 원인을 무르익게 한다. 이를 통해 직접적인 원인이 무르익는 과정이 바로 ‘성숙(成熟)의 과정’이다.
직접적인 원인이 무르익어 그로부터 결과를 산출하는 때를 ‘성취(成就)’라고 한다. 종자가 현행을 생하는 이른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의 인과에는 바로 이 무르익은 ‘성숙한’ 원인이 결과를 현출하는 성취의 뜻이 담겨져 있다. 종자가 현행을 생하는 국면의 이면에는 이처럼 기존에 습득한 여러 연(諸緣)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앞에서 우리는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의 인과를 다루면서 훈습이 증장·섭식의 두 계기를 모두 가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증장은 ‘기존의’ 종자를 장양(長養)시킨다는 뜻이고, 섭식은 본식 안에 ‘새로운’ 종자를 심는다는 뜻이다.
현행이 종자를 훈습함에 따라서 이런 성숙의 과정은 반복된다. 훈습을 통한 성숙의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종자생현행의 인과는 현재에 과거의 배후를 현전의 전경(前景)과 대면시키면서 전진하는 것이며, 현행훈종자의 인과는 현재에 현전의 전경을 과거로 묻으면서 미래의 배경에로 전진하는 것이다. 호법 논사의 종자·현행의 인연의에는 바로 이런 훈습에 의한 종자 성숙의 과정이 담겨 있다.
그러면 이 훈습의 내용을 이루는 종자의 증장과 섭식은 자·타의 종자에 대해 어떤 기능을 하는가? 먼저 증장의 경우를 살펴보면, 능훈(能熏)의 현행이 자종자(自種子)를 증장시키는 경우에는 인연이 되고, 여타의 종자를 증장시키는 경우에는 증상연(增上緣)이 된다. 섭식의 경우를 살펴보면, 능훈의 현행이 종자를 섭식하는 경우에는 인연이 된다. 따라서 증장의 계기는 인연과 증상연에 모두 통하나, 섭식의 계기는 인연에만 통한다. 물론 이렇게 섭식된 종자가 다시 현행하여 여타의 종자를 증장시킬 때는 증상연이 된다.
그런데 위에서 호월 논사는 훈습에 증장의 계기만을 인정하되, 이를 인연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호법 논사에 의하면 이는 인연과 증상연을 혼동시킬 우려가 있다. 만약 능훈의 현행이 여타의 종자를 증장시킬 때도 인연이 된다고 한다면, 선·악의 업(業)도 이숙과(異熟果)의 종자에 대해 인연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악의 업은 저 종자에 대해 저를 성숙시키는 증상연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한편 난타 논사의 경우처럼 현행훈종자의 인과만을 인정한다면, 견도(見道)에서 최초로 일어나는 유위(有爲)의 무루(無漏)는 결코 생겨날 수 없게 된다.
저를 직접 생하는 종자의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유루문훈습(有漏聞熏習)의 종자는 무루의 인연이 아니며, 무루에 대해 단지 수승한 증상연이 될 뿐이다. 종자의 본유의(本有義)만을 인정하는 호월 논사의 인연의로는 종자생현행의 인과와 자종자(自種子)의 훈습만을 확보할 수 있으며, 종자의 신훈의만을 인정하는 난타 논사의 인연의로는 현행훈종자의 인과만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자에 본유와 신훈의 뜻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행을 종자로 환원시키거나 종자를 현행으로 환원시켜서 인연의 뜻을 구하지 말고, 종자가 현행을 생하는 계기와 현행이 종자를 훈습하는 계기를 하나의 틀 안에 함께 수렴시켜서 인연의 뜻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앞의 두 논사가 범했던 것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증장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깊어지고 그에 따라 세계도 점점 깊어진다. 섭식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넓어지고 그에 따라 세계도 점점 넓어진다. 증장은 심화시키고 섭식은 풍부하게 한다. 훈습은 이런 내용을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 성숙의 견인차가 된다. 호월 논사의 성숙은 깊어지기만 하되 넓지 못하고, 난타 논사의 성숙은 넓어지기만 하되 깊지 못하다. 오직 호법 논사의 성숙만이 더없이 깊고 한없이 넓다고 하겠다.
5. 맺는 말
호법 논사의 본유신훈합생의(本有新熏合生義)에는 종자가 현행을 생하는 종자생현행의 인과의와 현행이 종자를 훈습하는 현행훈종자의 인과의가 서로 교차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호법의 본유신훈합생의는 호월의 본유의와 난타의 신훈의를 회통(會通)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월 논사는 마음은 처음부터 기존의 종자로 꽉 차 있으며, 이들 종자의 수는 더 이상 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 따를 경우에는 엄격히 말해서 새로운 지식이나 새로운 행동양식의 획득을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난타 논사는 마음은 본래 백지상태이며, 훈습에 의해 새로운 지식이나 행동양식이 습득된다고 보았다. 호월 논사는 조건들은 약화시킨 채 단일한 원인의 단일한 결과에만 주목했으며, 난타 논사는 오직 시원의 텅 빈 바탕으로 되돌아가 그로부터 형성되고 늘어나는 결과 습득의 과정에만 주목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훈습에 증장과 섭식의 두 계기가 있다고 구분한 것은 순수하게 필자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여러 유식학(唯識學) 관련 전적들을 면밀히 살펴볼 때, 훈습이란 말은 질적인 성장과 양적인 성장의 두 계기를 동시에 함의하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이 뜻을 보다 극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필자는 훈습을 질적인 성장이란 뜻의 증장과 양적인 성장이란 뜻의 섭식의 두 계기로 나누어 생각한 것이다. 온전한 의미의 훈습은 이렇게 증장·섭식의 두 계기를 모두 갖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유식론》을 포함한 유식학파의 여러 전적들이 훈습에 일관되게 이런 식의 구분을 적용시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증장을 오직 질적인 성장의 계기만을 뜻하는 것으로 쓰지도 않으며, 섭식을 오직 양적인 성장의 계기만을 뜻하는 것으로 쓰지도 않는다. 훈습을 언급하고 있는 유식학 관련 전적들을 살펴보면, 비록 드러나지는 않지만 증장에도 섭식의 뜻이 있고 섭식에도 증장의 뜻이 있다. 필자가 행한 구분은 훈습이 함의하고 있는 이런 중첩된 계기들을 분석해서 보다 명확히 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동우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 졸업. 〈유식학파의 아뢰야식 종자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강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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