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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남한산성에 오릅니다(詩山會 제344회 산행)

남한산성에 오릅니다(詩山會 제344회 산행)

집결일시: 2018. 9. 30.(일) 10 : 30

집결장소: 전철 8호선 산성역 1번 출구

 

1.시가 있는 산행

철새
-이시카와 다쿠보쿠(1886~1912)

시아침 9/19

가을 저녁의 조용함을 휘저어놓고

 


하늘 저 멀리 구슬픈 소리가 건너간다.

대장간의 백치 아이가
재빨리 그 소리를 알아듣고는
저물어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새가 나는 흉내를 하면서
그 주위를 빙빙 돌아다닌다.
까악- 까악- 외쳐대면서.

철새들은 추위를 피해 남으로 간다. 그들에게는 날개가 있다. 구슬픔 속에는 떠남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우리도 어느 땐 이 구슬픔과 기쁨의 황홀을 사무치게 느낀다. 하지만 대장간의 백치 아이만큼은 아닐 듯하다. 결여를 가진 이들은 때로 그 답답한 결여를 불만 없이 사는 것 같다. 이 무구한 영혼은 어쩌면 신의 축복인지도 모른다. 아이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날개가 있다. 아이는 지상에서 훨훨 날고 있다.

<이영광·시인·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

 

2.산행기

시산회 323북한산’(정릉) 산행기<2018. 9. 8()> / 정한

◈ 월일/집결 : 2018년 9월 8일(토) / 4호선 길음역 3번 출구 (10:30)

◈ 산행코스 : 길음역-정릉역 옆-정릉-북악산길-508 스카이단지-육각정-보국사-뒤풀이장소

◈ 참석자 : 8명(종화, 재홍, 승렬, 원무, 동준, 정한, 광일, 양기)

◈ 동반시 :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 뒤풀이 : 양염돼지고기 구이에 소·맥주, 막걸리 및 물냉면 / '청수장'(정릉동)

 

‘시산회’ 343번 째의 날이다. 오늘이 가을을 알리는 백로(白露)이다. 이때쯤이면 밤에 기온이 내려가고, 대기중의 수증기가 엉켜서 풀잎에는 이슬이 맺혀 가을의 기운이 완연히 나타난다. 아침부터 맑고 쾌청한 가을의 날씨이다.

 

옛 중국 사람들은 백로입기일(白露入氣日)로 부터 추분(秋分)까지 시기를 5일씩 삼후(三候)로 나누어 그 특징을 말하였는데, 초후(初候)에는 기러기가 날아오고, 중후(中候)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말후(末候)에는 뭇새들이 먹이를 저장한다고 하였다. 이 때의 쯤에는 장마도 걷히고 중후와 말후에는 청결한 날씨가 계속된다고 한다.

 

산우들 대부분은 약속시간인 10시 30분, 집결장소인 길음역에 모였다. 이 총장님과 정릉동에 살고있는 염재홍 친구는 이정표를 보며 산책코스를 협의하고 있다. 8명의 산우들이 집결하여 정릉방향으로 출발이다. 우이신설선인 정릉역 근처의 아리랑골목시장을 지나서 한 이정표에는 좌측으로 300m에는 조선 제1대 태조비인 신덕왕후 원찰인 흥천사가 있고, 바로 앞에는 서울 정릉 정문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정릉의 정문 입구에는 매표소와 검표소가 있었고, 정릉에 대한 안내촉지도 및 세계유산과 사적 제208호 설명서가 표기되어 있다. 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1396)의 능으로 그 면적은 299,573 ㎡ 이다. 때마침 정릉의 문화해설사(황병주)가 아닌 주말이면 자원봉사를 해 주신다는 정한일(?)씨가 정릉(貞陵)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 주신다.

 

태조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싹 틔운 일화는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하다가 목이 타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처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 한 움큼을 띄워 이성계에게 건네주었다. 이성계가 버들잎을 보고 화를 내자, 처녀는 "갈증이 심해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해 그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마자 현비로 책봉되었고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본래 태조의 원비는 신의왕후였으나 태조 즉위 전인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사망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최초 왕비는 신덕왕후이다.

 

태조(이성계)는 고려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고향 부인), 경처(개경 부인)를 두었는데, 강 씨는 경처로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이다. 이성계는 원 동녕부를 원정, 공을 세우고 남해 일대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고려 중앙인 개성에 진출했다. 하지만, 지방 토호라는 출신 때문에 한계를 느꼈고, 개성의 권문세족 출신인 강 씨와 정략적으로 혼인을 하였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이성계)와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아들인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도록 애썼으며, 이와 관련해서 이방원신의왕후의 장성한 아들들과의 후계 다툼으로 알력이 있었다. 정도전과 합세하여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한 뒤 신덕왕후는 1396년 음력 8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2년 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의안대군을 포함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제거되었으며, 사위인 이제까지 살해를 당하였다. 이성계는 강씨의 사망 이후 실의에 빠져서 직접 능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행차를 아침저녁으로 바쳤으며, 1397년 1년여 공사 끝에 170여 간 규모의 흥천사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태종(이방원)은 신덕왕후를 후궁 지위로 격하시키고 태조가 애지중지하던 정릉을 태조의 사망(1408년 음력 5월 24일) 후에는 파괴하고 이전했다. 태종 9년 1409년 정릉은 서울 정동지역에서 도성 밖의 양주, 현재의 서울시 성북구로 옮겨졌다.

 

태종은 더욱이 정동에 있던 정릉의 원래 자리의 정자각을 헐고,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없애도록 명했으며,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하였다.

 

진입공간에서 상설도를 자세히 설명하며,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인 향로, 어로와 비각, 비각 비문 및 수복방, 제상과 신어상 등등의 설명과 태종의 명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옮긴 정릉은 향·어로가 “ㄱ”자로 꺾여 있어 일반적인 왕릉 조성양식과 차이를 보였으며, 정릉 제향일은 매년 9월 23일(양력)이란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정릉의 관람을 맞치고 정릉의 좌측에서 부터 경내의 둘레길을 한바퀴 돌고서 정문을 나왔다. 산우들은 북악산 ‘하늘한마당’ 쪽으로 올랐다. ‘508 스카이단지’를 지나 ‘북악산책길’이 있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배낭에서 간식을 내어 놓는다. 떡과 과일을 안주로 막걸리 한,두 잔을 마시고 다시 ‘북악산책길’로 걷기 운동을 하였다.

 

이정표에는 ‘하늘마루’종점에 까지 2.4km, ‘하늘한마당’시점 까진 800m로 되어있는 곳이다. 포장된 길가에서 휴식을 취한 후, 모다 점심때를 맞추어 뒤풀이장소로 내려가기를 원한다. 산책길을 조금 내려가니 ‘북악골프연습장’이 있고, ‘육모정’도 있는데, 미세먼지가 없는 좋은 날에 육모정에 앉아 먼 곳까지 전망이 좋은 곳을 배경으로 단체 인증사진을 촬영하였다.

 

육모정에서 휴식을 끝내고 미리 생각을 해 놨던 뒤풀이장소로 출발을 하였다. 뒤풀이장소는 양염돼지갈비가 맛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곳은 30년 전통 특제양염 돼지갈비와 함흥냉면이 유명한 식당으로 북악터널과 정릉2동주민센터 사이에 있는 ‘청수장’이란 곳이다.

 

‘청수장’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양염 돼지갈비를 굽는 사이에 오늘의 동반시를 낭송하자고 한다. 핸드폰에 올려 있는 동반시를 시력이 좋지 않아 동반시를 낭송 할 수가 없는데 옆에 앉아있는 종화 산우는 다촛점(돗보기+@) 안경을 건네준다. 오늘의 기자라 별 수가 없어 다촛점 안경을 끼고 동반시(나짐 히크메트 시인의 "진정한 여행")를 낭송하였다.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다.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낭만적인 혁명가로 불린 20세기 터키의 위대한 시인 ‘나짐 히크메트’, 그의 시는 5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나 조국 터키에서는 국적이 박탈되었고 1965년까지 시집이 금서였으며, 이후에도 그의 시를 읽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었다.

 

그러나 2000년, 50만 터키 시민이 청원서에 서명하고 노벨문학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히크메트’의 문학을 재조명하면서 그의 국적복원을 촉구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져 마침내 터키정부가 58년 만에 그의 복권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유해는 아직 모스크바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의 시 “감옥에서 쓴 편지”는 러시아어로 번역된 것을 백석 시인이 우리말로 번역을 하여 1956년 평양에서 출간했다. 잠언시 모음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이 시를 처음 소개하면서, ‘히크메트’의 이 시를 위해 시집을 내는 것이라고 편집자에게 말했었다고 한다.

무한한 희망과 무조건적 긍정으로 가득한 시를 그가 장기수로 복역하면서 한 평의 감옥 안에서 썼다고 생각해 보라. 그만큼 깊은 울림이 있는 시이다. 삶이라는 감옥 안에서 우리는 어떤 시를 쓰고, 어떤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가? “진정한 여행”이란 시는 의미가 깊은 좋은 시이다.

 

‘청수장’ 식당에서 30년 전통의 양염 돼지갈비와 함흥냉면을 맛있게 먹었는데, 동준이 친구는 뒤풀이의 비용을 협찬하겠다고 한다. 집행부와 산우들에겐 고마운 일이었지만, 이 총장님은 인근에 찻집(‘커피나무 아래’)에 가서 커피나 한 잔씩 하자고 하여 정릉역(2번 출구) 근처에서 팥빙수를 시원하게 먹고, 커피를 운치가 있게 마셨다.

 

이번 산행은 신나는 산행은 아니었지만, 세계유산 조선왕릉 중에 하나인 정릉(貞陵)을 탐방하여 조금이나마 조선왕릉의 역사를 알게끔 해 줘서 고마울 뿐이다. 조선조의 역대 왕릉에 대한 접근은 그 외형적 특징만으로도 당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반증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상이다.

 

조선조의 왕릉은 27대 왕과 왕비 혹은 계비(繼妃), 그리고 추존된 왕들을 포함해 전체 44기의 릉(陵)이 조성되어 있다. 이 중 태조의 비(妃) 신의왕후의 제릉(齊陵)과 정종(定宗)과 비(妃)인 정안왕후를 모신 후릉(厚陵)만 북한 개성시에 있어 우리가 아직 답사할 수 없는 지역에 있고, 거리상으로는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에 조성된 단종의 장릉(莊陵)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서울과 경기도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이나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西五陵), 서삼릉(西三陵)은 왕릉군(王陵群)을 이루고 있는 필수 답사지역이라 할 수가 있다. 서울 주변은 단순한 관람으로 왕릉의 진면목을 이해하기에 여러 가지 부족한 점들이 많다. 앞으로는 왕릉의 모습들을 살펴보고 우리 역사를 더듬어 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지? 산우들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차후 산행 때에도 조선조의 왕릉을 또 탐방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산회’ 화이팅!

2018년 9월 10일 정한 씀.

 

3.오르는 산

오르는 산의 부근에 여러 산우들이 살고 종화 산우가 쉬운 길로 안내한다니 따라 가고 싶은 마음 하늘을 찌르는 과장도 부족하지만 아직은 산우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요즘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도봉산에 오르지만 매번 중턱에서 점심을 먹고 내려오고 만다. 내년부터는 동반할 각오로 열심히 단련 중이다. 서운한 마음이야 산우들도 같겠지만 천천히 가라는 하늘의 뜻으로 알고 아직은 체력을 가다듬겠다. 부디 무리하지 말고, 잘 다녀오시고 맛난 뒤풀이도 즐기시라.

4.동반시

로버트 프로스트의 <자작나무> 원시는 매우 길다.

조금 자서전 같은 느낌이 드는....

 

그래서 읽기 편하고자 임의대로 압축을 해 본 것이 시인에게는 송구하지만,

누구의 가슴에나 살아 있을 법한 어린 시절 한 순수한 소년의 마음과,

삶의 오고감에 대한 통찰만을 간추려 음미해 본다.

 

관심 깊으신 분들은 원시를 다시 접해보시길 바라며....

 

 

 

자 작 나 무 /로버트 프로스트

 

꼿꼿하고 검푸른 나무줄기 사이로 자작나무가

좌우로 휘어져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어떤 아이가 그걸 흔들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흔들어서는

눈보라가 그렇게 하듯 나무들을 아주 휘어져 있게는 못한다

 

시골 구석에 살기 때문에 야구도 못 배우고

스스로 만들어낸 장난을 할 뿐이며

여름이나 겨울이나 혼자 노는 어떤 소년

아버지가 키우는 나무들 하나씩 타고 오르며

가지가 다 휠 때까지

나무들이 모두 축 늘어질 때까지

되풀이 오르내리며 정복하는 소년

그리하여 그는 나무에 성급히 기어오르지 않는 법을

그래서 나무를 뿌리째 뽑지 않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던 소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자작나무 타듯 살아가고 싶다

하늘을 향해 설백의 줄기를 타고 검은 가지에 올라

나무가 더 견디지 못할 만큼 높이 올라갔다가

가지 끝을 늘어뜨려 다시 땅위에 내려오듯 살고 싶다

 

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자작나무 흔드는 이보다 훨씬 못하게 살 수도 있으니까.

 

2018. 9. 29. 시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詩山會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