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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순자(荀子)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순자(荀子)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Ⅰ. 생각해보기

순자(荀子 : B.C. 313 - 238 조(趙)나라)는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로“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선한 것은 인위적인 노력의 결과다.”, “자연의 운행에는 항상 된 법칙이 있다.” ,“요임금과 같은 성인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걸 임금과 같은 폭군에 의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순자는 인간에 대해서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자연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접근한 사상가로 이름은 황(況)이며, 당시 사람들은 그를 높여(字) 경(卿)이라고 불렀다. 한대(漢代)에 와서 선제(宣帝)의 휘(諱, 아버지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못하는 것과 같이)를 避(피)하여 손이라고 부렸으며 손경(孫卿)이라고 불렀다. 자는 존칭으로 지금 말로 황 선생님이 된다. 50세에 제(齊)나라에 유학 가서 세 번 직하(稷下-제나라 직문稷門, 아래에 있었던 학사촌/학술원)의 원장을 지냈다. 제나라의 왕건(王建) 재위 기간에는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직하(稷下)의 학사(學士) 중 최장로(崔長老)로 존경받았다.

 

만년에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의 천거로 난릉(蘭陵 : 지금의 산동성)의 수령이 되었으나 춘신군이 암살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그 고장에서 학문을 닦고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진에 의해 천하통일이 되어가던 시대였다. 맹자가 어떻게 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중시한 데 비해, 순자는 통일된 천하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느냐 하는 것을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로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공자와 맹자와 같은 위대한 철학가이다. 법가의 대표인물인 한비자를 배출했다.

 

Ⅱ. 생각 확대하기

 

순자와 공자의 비교

 

순 자

勸學권학-학문에 힘쓰도록 권함.

 

修身수신-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도록 심신을 닦는 일.

 

요문堯問-『순자』의 마지막 편 「요문(堯問)」편은 『논어』의 「요왈」편의 형식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상가와 학파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가했지만 유가 외부의 적들뿐만이 아니라 공자의 진정한 메시지를 약화시키고 왜곡시킨다고 생각되는 유가 진영 내부의 적들에게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근자에 순자는 중국 고대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공 자

學而학이-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배우고 때대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爲政위정-"'爲政'의 요체는 좋은 신하를 등용하는 데 있다"공자가 노나라 애공을 만났을 때 애공은 위정(爲政)의 도리를 공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위정의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신하를 뽑는 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계강자 역시 위정의 도리를 물었을 때 공자는 "정직한 사람을 기용하여 사악한 사람을 고쳐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악한 사람도 정직한 사람으로 변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요왈堯曰-君子는 泰而不驕하고 小人은 驕而不泰니라

‘논어’의 맨 마지막 편인 ‘요왈(堯曰)’에서 공자가 제자 자장(子張)에게 일러준 말이다. ‘여유 있되 교만하지 않다’는 말은 ‘논어’ ‘자로(子路)’의 이 장(章)에 먼저 나왔다. 여기서는 정치를 담당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군자로서의 태도와 덕성을 포괄적으로 말한다. 태(泰)는 편안하면서 느긋한 태도이다. 도리에 따르기 때문에 편안하며, 바깥의 명예나 이익을 좇지 않고 내실(內實)을 다져 느긋한 것을 말한다. 태연자약(泰然自若)은 본래 이런 태도를 가리킨다. 이(而)는 연결사로 여기서는 앞과 뒤를 순순하게 이어준다. 교(驕)는 곧 교만(驕慢)이다. 사사로운 욕심을 지닌 자가 어쩌다 사정이 좋아졌다고 해서 멋대로 굴고 내실이 허(虛)하기에 바깥으로 기세를 부림을 말한다. 한문에서는 때때로 泰와 驕를 동의어로 보아 교태(驕泰)라고 복합해 쓰기도 한다.

 

내용보다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려고 했다.

 

1. 성선설(性善說)

맹자가 주장한 도덕설로 성선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지만 개인의 욕망이나 환경에 의해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은 맹자와 루소(J. J. Rousseau)가 있다. 맹자는 인간의 도덕적 기준을 ‘인의’에 두고 인간은 본래적으로 선하다는 성선설을 제창하였다. 인간은 본래 다른 사람의 불행을 차마 보지 못하는 순수한 마음인 불인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인지심을 인간이면 누구나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람마다 선천적으로 선한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뜻하며, 그러한 싹(端)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선이 우러나오는 마음씨(性)를 측은, 수오, 사양, 시비 등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봤다. 이것은 각각 인. 의. 예. 지의 4단이다. 사람은 4단을 가지고 있다. 단이라 함은 선이 발생할 가능성을 가진 시초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에 대하여 상세하고 논리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으며 또 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하였다.

 

맹자 시대에는 새로운 문제가 사상계에 대두되었는데, 인성의 선악 문제였다. 이른바, 인성이란 사람마다 본래 타고난 품성을 말한다. 그러한 논쟁 가운데서 맹자는 성선)을 주장했다. 『맹자는 성선을 말하였으며, 그것을 말함에 있어 반드시 요 ․ 순을 일컬었다.』(승문공상勝文公上)

 

맹자는 『무릇 도는 하나일 뿐이다.』, 『안연이 이르기를 '순은 어떠한 사람이고,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노력하면 그와 같이 되는 것이다.’』고 했다. 이런 맹자의 주장은 동 시대 사상가였던 고자와 대비된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性)에서 선악을 가릴 수 없다는 고자와 논쟁을 되풀이하였다. 고자는 인간이 타고난 그대로의 것(生之謂性)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는데, 이는 맹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서양에서 성선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상가는 루소이다. 『에밀』에서 주인공 에밀은 “나는 지상에서 악을 본다”라고 말하고 있다. 악은 노예 상태, 사회적 위선, 인위성 그리고 이기적 계산 등이다. 루소는 이러한 악이 인간의 본래 상태가 아니라 자연에서 분리되어 나타난 사회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루소는 평생 동안 많은 저서를 통하여 광범위한 문제를 논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 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 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자연)을 발견하여 인간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자연이 만든 사물은 모두가 선하지만, 일단 인위를 거치면 악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루소는 인간 본래의 모습을 훼손하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를 비판하였다. 성선설. 성악설은 송나라 때 주자학파에 의하여 본연기질론으로 정리 되었다.

 

동양 - ‘인간은 선하다’는 뜻으로 인간이 무리를 이루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인치(人治)가 반드시 필요하다. 성선설은 인간의 속성을 ‘선한 요소’에서 찾는데, 그 요소는 '도덕적 이성'이다. 때문에 성선설을 ‘유심주의(관념론)’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이성은 지식인에 한해 가능하다. 지식인이란 이성과 인격을 함양한 사람이다. 따라서 성선설은 지식인이 국가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즉 지식인이 관료와 정치가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의 사대부란 '지식인이며 관리이며 지주'인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지식-권력-경제'가 합쳐진 삼위일체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성선설은 지식인과 관료를 옹호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 성선설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고 다만 소수의 철학가와 교육가 사이에 유행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학설은 주로 스토아학파까지 소급될 수 있다. 스토아학파는 인성(人性), 물성(物性)의 자연에 근거하여 공동의 이성 법칙을 찾았는데 인간은 단지 자연의 이성 법칙에 따라서 행하기만 하면 이것이 바로 지선(至善, 지극히 착함)한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시세로(Cicero : 106∼43 B.C.)와 시네카(4 B.C.∼65 A.D.)에서부터 루소(J.J.Rousseau : 1712∼1728)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루소는 서양의 성선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민약론」(Contact Social)과 「에밀」(Emile)의 두 저서를 남겼는데 전자는 정치문제를 논하였고, 후자는 교육사상을 발휘하였다.

 

루소는 두 저서에서 자연 상태와 자연생활을 주장하였다. 인류의 자연본성은 본래 선한 것인데 역사문명과 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대개 자연으로부터 온 것은 반드시 참 되고, 참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하다.” “자연이 만든 사물은 모두가 다 선하지만 일단 인위를 거치면 악으로 변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은 천성에 속하고 악은 인위에 속한다. 그밖에 서양에서 성선의 관점을 가진 이는 피히테(Fichte : 1762∼1814)와 프로벨(Froebel : 1782∼1852)등이 이 있다.

 

본연지성(本然之性)

 

‘사람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심성’이라는 뜻으로, 지극히 착하고 사리사욕이 조금도 없는 천부자연의 심성을 말한다. 성리학의 심성론에서 유래되었다. 천명지성(天命之性) 또는 천지지성(天地之性)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에서는 사람의 성(性)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눈다. 주자에 따르면, 본연지성은 천부자연의 심성으로 지선(至善)이다. 기질지성은 타고난 기질과 성품을 가리키는데, 타고난 기질의 청탁(淸濁)과 편색(偏塞: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아첨함으로 막힘)에 따라 선하게도 나타나고 악하게도 나타난다. 이기론으로 말하면, 본연지성은 이(理)에 해당되고, 기질지성은 기(氣)에 해당된다. 그런데 기질지성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수양에 따라 탁한 것[濁]을 맑은 것[淸]으로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유가(儒家)에서는 기질을 정화시켜 지선의 본연지성을 회복하여 발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유가에서 이상으로 삼는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차이점은, 성인은 기질이 맑아서 본연지성이 잘 발현되는 반면에 범인은 기질이 탁하여 본연지성이 잘 발현되지 않는 데 있다.

 

2. 성악설

순자가 주장한 학설로서 ‘사람의 성은 악이다. 그 선한 것은 위이다.’위라는 것은 작위(作爲), 즉 배워서 말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자연의 성은 악이기 때문에 작위를 쌓아서, 즉 배우고 배워서 선으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성이 악이라는 근거를 리기적 욕망에 두었는데 선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인성의 선한 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행위의 도덕적 가치판단에서는 결과론의 입장에 섰다.

 

동양 - 성악설은 ‘인간은 악하다’고 본다. 순자는 예(행위 규범), 한비자는 법과 권력(法治), 묵자는 하느님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예(周禮)나 법은 국가의 제도이며, 이 제도를 운영하는 힘이 권력이다. 그리고 그 제도와 권력을 최종적으로 쥐고 있는 사람이 군주이며 하느님을 대신해서 인간 사회를 통치하는 것도 바로 군주이다. 따라서 성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강력한 군주 이론을 내세운다. 국가의 구성원을 크게 보아 ‘백성-관료-군주’라고 한다면 성악설은 군주를 옹호하는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국가의 힘은 백성의 생산. 전쟁 능력에서 나오기 때문에 관료의 착취와 비능률을 제거하고 백성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은 군주권과 국가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악설은 백성을 옹호하는 이론이 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관료. 지식인 중심의 성선설과 대립한다.

 

「순자」성악편에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인데 이것을 선이라 하는 것은 위 곧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다. 이제 사람의 본성을 보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 성질이 있어 이것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자연 다른 사람과 싸워 빼앗으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또 사람은 나면서부터 남을 질투하고 미워하는 성질이 있어 이것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자연 음란한 행실이 생기게 되고 동시에 예의와 조리(條理, 일을 해 나가는 도리 또는 경로)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타고난 본래의 성이나 감정이 가는 데로 따를 때에는 반드시 서로 싸우고 빼앗게 되므로 이것이 분한(分限)을 범(犯)하고 조리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되어 마침내는 난폭한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스승과 법도에 의한 교화와 예의에 의한 교도가 필요한 것이니 이것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사람은 서로 사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조리에 합하게 되어 마침내는 세상이 평화롭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인간의 본성은 악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니 이것을 선이라고 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나무는 반드시 이것을 바로잡는 도지개에 넣거나 또는 불을 쬐어 반듯하게 잡아준 다음에야 비로소 쪽 곧게 되는 것이요, 또 무딘 쇠붙이는 숫돌에 간 뒤에야 비로소 쪽 곧게 되는 것이요, 또 무딘 쇠붙이는 숫돌에 간 뒤에야 비로소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은 악이다. 이것은 반드시 스승과 법도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바르게 되고 또 예의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다스려지는 것이다. 후천적인 학습이라든가 노력이 전혀 없이 자연으로 이루어져 인간에게 갖추어진 것, 즉 선천적인 것을 일러 성이라 하고, 학습에 따라 능숙해지고, 노력에 따라 완성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는 것, 즉 후천적인 것을 일러 위 곧 인위라고 한다. 이것이 본성과 인위의 구별이다.

 

이와 같은 성악설을 묵자는 약자의 입장에 서서 ‘왜 강자는 힘으로 약자를 약탈하는가’를 묻는다. 현실이란 힘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그 힘이 꼭 그렇게 약탈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가. 반대로 그 힘으로 약자를 사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묵자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 사랑을 강자들에게 요구한다. 아니 더럽고 추악하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겸애이다.

 

한비자는 인간의 욕망에는 식욕과 성욕같이 생리적인 것이 있고, 권력욕이나 소유욕, 명예욕같이 사회적인 것이 있다. 고자나 순자는 타고난 인간의 본성을 ‘음식남녀(식욕과 성욕)’의 동물적 욕망으로 보는 반면 한비자의 성악설은 권력욕, 소유욕 같은 사회적 욕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한비자가 설명하는 인간의 본성은 소름 끼칠 정도로 사악하고, 그가 제시한 극단적인 인간 통제 방법, 즉 정치론은 섬뜩 하리만큼 억압적이고 전제적이다. 그러나 한비자가 설명하려는 것은 일반인들의 상식적인 삶이 아니라 나라를 통치해야 하는 최고 권력자의 일이다.

 

분한

실용 가치가 있는 일정한 한도(분도 分度). 신분의 높낮이와 위아래의 한계(분제分際). 법률의 규정에 의해 향유하는 지위의 한계.

 

서양 - 중국의 성악설은 성선설 다음에 나왔지만, 서양에서는 먼저 성악설이 후에 성선의 관점이 생겼다. 기독교는 인류의 시조 아담이 원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악한 길로 떨어졌고 그 후손들은 태어나면서 악한 경향을 가지고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자리를 잡게 된다. 중세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이래 모두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마키아벨리(1447∼1527), 영국의 홉스(1588∼1679), 독일의 쇼펜하우어(1788∼1860)도 모두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하였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이탈리아 사회의 부패를 직접 보았으므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단정하였고, 홉스는 원시사회 초기에 백성들이 혼전(混戰)하는 자연 상태를 가상하여 인간의 본성이 악함을 추론해 내었으며, 쇼펜하우어는 천국에서 쫓겨 내려온 신화를 형이상학적 진리로서 독실하게 믿었으므로 철리(哲理)를 교의에 부합시켜서 그 극단적인 인성악의 관점을 갖게 되었으니, 죄악이 인간 본성 가운데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제거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3. 성선설, 성악설 비교

 

근본적인 차이점

중국에서 인성문제가 철학적으로 처음 제기되는 것은 공자(551∼479 B.C,)부터 이다. 공자는 “사람의 성은 서로 비슷하나 습(習)으로 서로 멀어진다.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서로 바뀌어 질 수 없다.”하여 모순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맹자(372∼289 B.C.)는 “사람의 성은 선하다.”라 하였고, 순자(313∼238B.C.)는 “사람의 성은 악하다.”고 하였다.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불합리한 존재인가. 이 문제가 중국 철학에서 성선설과 성악설로 드러나는데, 이는 본성을 선과 악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하는 이론이다. ‘性’이란 인간의 마음에 ‘본래적인 것’, ‘타고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性’을 일단 ‘本性’이라고 번역하자. 성선론자들은 ‘본래적인 것’, ‘본질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중시하므로 그들이 쓰는 ‘본성’이라는 말은 ‘도덕적 이성’을 가리킨다. 그 이성이야말로 인간에게 본래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타고난 것’이라는 뜻을 중시하는 성악론자들에게 본성은 ‘감정 욕망’을 의미한다. 인간이 태어날 때 ‘타고난 것’은 바로 감정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학자에 따라 가리키는 대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본성’이라고 할 때는 일단 인간의 능력, 특히 마음의 본질을 말하며, ‘행위의 원동력’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 원동력이 선한가 악한가 또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를 탐구하는 이론일 바로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따라서 성선설과 성악설 모두 결국은 선악의 문제를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문제 삼는다.

 

인간을 비합리적인 존재라고 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하는 성악설로 드러난다. 그런데 성악설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다. 즉 성악설은 ‘인간을 비하하는 이론’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악설이 모든 인간은 악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언제나 비합리적이라는 것도 아니고, 악과 불의를 위한 이론인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비이성적이라면 이 세상에 남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뿐이며, 아무런 철학도 심지어는 성악설 자체도 펼 수 없을 것이다. 성악설은 오히려 이 세상의 악과 불의를 물리치기 위해 악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대처하자는 데서 나온 것이다.

 

4.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

성무선악설은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나 선택, 환경 등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동양에서 성무선악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은 고자(告子)이다. 고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로 이름은 불해(不害)이며, 맹자와 같은 시대의 학자로서 그와 인성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고자는 인간의 생리적 욕망이 곧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타고난 것이 본성이다.(생지위성 生之謂性)’는 것이 고자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사람의 생리적 욕망 중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식욕(食慾)이나 색욕(色慾)이다. 따라서 고자는 직접적으로 ‘음식을 좋아하고 색을 좋아하는 것이 성’이라고 했다. 식욕과 색욕 자체는 자연적인 본능으로서 선악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본성에는 선도 불선(不善)도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뜻에 근거하여 고자는 성을 “갇힌 채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아서,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주면 서쪽으로 흐른다. 사람의 본성에 선함과 선하지 않음의 구분이 없는 것은 마치 물에 동쪽과 서쪽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처럼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이 아니라면 인의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 되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성은 버드나무와 같고, 의는 버드나무로 만든 그릇과 같다. 사람의 본성으로 인의를 행하는 것은 버드나무를 가지고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따라서 도덕, 특히 맹자가 의라 부르는 것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고자는 인간에게 인의의 도덕적 덕목을 심어서 인성을 바꾸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천적인 환경과 교육을 통해서라고 말했다.

 

- 고자는 “태어난 것을 성이라 한다”고 성의 정의를 내리고 성에는 선도 부선도 없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은 맹자나 순자와는 달리 중성주의에 가깝다. 이는 성에는 선악이 없으며,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할 가능성이 있음과 선으로도 악으로도 갈 수 있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 밖에 이러한 학설을 주장한 사람으로는 호굉, 왕안석 등이 있다.

 

5. 혼재설

 

성선설은 인간이 저지르는 악을 설명할 수 없다. 사람들은 왜 악한 일을 하게 되는가. 결국 본성 밖의 다른 요소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맹자는 마음을 이성적 측면(心之官)과 감성적 측면(耳目之官)으로 나눈다. 전자는 선한 본성이며, 후자는 외부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인데, 그것을 따르면 선한 행위를 할 수도 있고 악한 행위를 할 수도 있다. 선한 본성인 도덕적 이성에 따른 행위는 그 결과가 어떻든 언제나 선하지만(절대적인 선), 육체적. 감성적 측면인 감정 욕망에 따른 행위는 그 결과에 따라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상대적인 선). 따라서 인간은 절대적인 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6. 백지설

 

모든 인간이 악하다면 이 세상에는 선이 없어야 한다. 인간은 악한 행위를 많이 하지만 그렇다고 선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선은 어디서 온 것인가. 선한 행위의 근거도 마음. 본성 밖의 요소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외부 요소는 ‘힘’, 그들이 본성이라고 규정한 감정 욕망보다 강한 힘이어야 한다. 그들이 보기에 본성은 선악이 없다는 점에서 백지이며, 동시에 외부의 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아무런 규정이 없다는 점에서도 백지이다. 7. 성삼품설(性三品說) 인성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는 주장이다. 서양에는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이 없다. 중국에서 이 학설을 주장한 사람은 왕충, 세자, 공도자 등이다. 한의 동중서, 가의, 순열, 한유등은 성을 상.중.하의 3품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이론은 종합이 아니라 짜깁기(syncretism, 혼합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삼품설은 두 설의 대립점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해결하여 장점만 종합한 것이 아닐 두 가지 설을 각기 다른 영역에 적용한 것, 다시 말해 올리는 무대를 달리한 것이다. 이는 문제 해결이 아니라 회피일 뿐이다.

 

Ⅲ. 생각 정리하기

 

1. 순자의 정치 사상

 

사회적 중심을 되찾아서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려고 한 순자의 의도는 결국 필연적으로 나라의 '군주'를 옹호하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는 절대적인 지배자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된 사회적 혼란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고 사람들의 힘을 통일할 수 있는 구심점은 오로지 절대적 군주의 강력한 지배력을 통해서만 주어진다고 확신한 것이다. 순자가 절대적 군주에 대해 가진 이러한 희망은 서구의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피력했던 주장들과 매우 유사하다. 순자나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갈등이 그들에게 강한 군주의 존재를 그리워하게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다른 일반 유학자들이 주로 공자의 생각에 따라 고대의 유토피아적인 이상 사회를 만든 성인들 즉 이전의 왕들[先王]을 회고하고추앙한 반면, 순자는 자기 시대의 현실적 왕[後王]의 출현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시대의 왕[後王]을 버려 두고 옛날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임금을 버리고 남의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과거의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회고적 그리움만 가지고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당대에서 강력하고 통일적인 힘을 가진 군주를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으로 인해 순자는 유교의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고 현실적인 정치관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2. 『순자』 작품이해

 

『순자』는 모두 32편으로 저술되었으나 후대의 양량이 이에 주석을 덧붙여 가면서 20권으로 편집한 후 편차를 개정하였다. 이것이 현존본(現存本)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성악설이 근저에 깔려있는 『순자』의 성악편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한다. 이를 두고 기독교의 원죄설과 같다. 인간의 지위를 낮게 평가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맹자의 논어에 나오는 고자편(고자의 학설을 발전 시켰다)의 “인간의 본성은 식(食)과 색(色)이다.” 는 학설을 이어받는다. 영화 이안감독, 음식남녀 고자의 식색을 확대한 말로 음식남녀는 예기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순자는 고자의 학설을 이어받아서 인간의 본성 속에 인의(맹자)를 향한 타고난 자연적인 경향이 없다고 봤다. 본성 즉 성은 선천적인 것으로 배우거나 노력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배우지 않았는데도 배고프면 밥을 먹으려 하고 추우면 따뜻한 옷을 입고 싶어 하고 피곤하면 쉴려고 하고 졸리면 자려고 하는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다. 눈은 아름다운 색을 보려고 하고 귀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입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하고 마음은 이익을 쫒는 것을 좋아 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의로 가려는 경향은 없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자연적인 욕망이 있다고 봤다. 맹자는 이성적으로 봤고 순자는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봤다. 효도하고 예의범절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은 결과로 위(거짓 위)다. 위는 인위(부단한 노력으로 이루어진다)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선한 것은 인위적인 노력의 결과이다.(긍정적인 의미) 그렇다면 예의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예는 성인의 작위(인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성인이 사려를 쌓고 생각을 많이 하고 자리를 지켜서 만든 것이 예의며 법도이다.

 

* 화성기위(化性起僞) - 본성을 변화시켜서 인위적은 노력을 기울인다. 부단히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성인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학습과 학문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 음식남녀- 중국인들이 한국 고대사회의 성풍속과 관습을 표현하는데 있어 약간의 표현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음란하다’는 것이다. 그 음란함을 ‘음(淫)’, ‘분(奔)’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음식남녀(飮食男女)’라는 말에서와 같이 식욕과 색욕을 인간의 가장 큰 욕망으로 간주하여 어느 민족 못지않게 자유롭고 활발한 성 관념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개방된 성문화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고대 중국 문화에서 남녀간의 자유로운 성관계를 표현하는 말로 감(感), 함(咸), 감(甘), 분(奔) 등을 쓰고 있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용어들에는 혼전에 남녀가 혼인하지 않고 성관계를 가진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의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중국 고대 의식의 하나인 춘사의식(春社儀式), 즉 “봄의 두 번째 달에 남녀를 만나게 하는데 이때만큼은 절차를 밟지 않고 자유롭게 성교를 하는 것(奔)을 금하지 않았다. 만일 이유도 없이 그러는 것을 따르지 않는 자는 벌을 주었고, 때가 지나도록 짝이 없는 남녀들을 모이게 하였다”고 한데서도 찾아진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분(奔)은 서로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의 성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분(奔)과 비슷한 의미가 야합(野合)이라는 용어에서도 찾아지고 있다. 춘추시대이래 분(奔) 또는 야합(野合)은 ‘중매인 없이 혼인이 이루어지는 남녀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를 공자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숙량흘과 안씨의 딸이 이구에서 땅을 쓸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을 만들어 기도하여 마침내 공자를 낳게 되었는데, 중매 없이 남녀간의 애정으로써 결합하였다고 하여 이를 야합하였다”고 하였다. 비록 공자가 야합으로 출생을 하였을 지라도, 고대 중국인들이 이를 두고 비난을 하거나 멸시는 하지 않았다. 남녀간의 이러한 자유스러운 성풍속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한대(漢代) 유적 중에 하나인 야합도에서도 찾아지고 있다.

 

유가 예의에서는 이러한 남녀간의 성적 음란함, 즉 분(奔)이나 야합(野合)을 방지하기 위해서 “남녀간에 구별이 있은 연후에 부부의 의로움이 있고, 부부의 의로움이 있은 이후에 부자간의 친함이 있고, 부자간의 친함이 있은 이후에 군주와 신하간의 바름이 있다. 그러므로 혼례란 예의 근본이다”고 하여 혼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옛날 혼례는 매우 중요한 일이어서 하나의 예절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자유롭게 성교 즉 분(奔)을 나누었다 하고 이를 야합”이라고 하여 혼(婚)과 분(奔)․야합(野合)간의 차이를 들고 있다.

 

Ⅳ. 논제 찾아보기

 

국가란 천하에서 가장 큰 그릇이요, 군주는 천하에서 가장 큰 권세이다. 여기에서 군주가 정도(正道)로써 나라를 유지하면 크게 태평하고 크게 번영하고 아름다운 덕을 쌓는 근원이 된다. 반면에 정도로써 나라를 이끌어 가지 않는다면 나라는 크게 위험하고 크게 해로우며, 나라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없는 것만 같지 못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한낱 서민이라도 목숨만 부지하기가 소원이어도 그것마저 안 된다. 제나라의 민왕(閔王)과 송나라의 헌왕(獻王)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권세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정도를 밟아 나가야만 비로소 태평할 수 있다. 여기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으로 도의를 앞세우는 사람은 패자(霸者)가 되고, 권모술수를 앞세우는 사람은 멸망한다. 이 세 가지로 말하면 현명한 군주가 아주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요, 덕이 있는 사랑이 명백하게 가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덕은 아직 충분하지 못하고 의는 완전하지 못하나, 천하의 조리(條理)는 대개 여기에 집중된다. 상벌이 명백하여 천하에 신용이 되고, 신하가 뚜렷이 그 요령을 알 수 있다. 정령(政令)이 한 번 결정되면 비록 이해가 있더라도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 약속이 한 번 되어 있으면 비록 이해가 있더라도 동맹국을 속이지 않는다. 그러면 군사가 강하고 국경이 튼튼하며, 적국이 두려워하고 국가는 통일된다. 또한 근본법칙이 명백하여 동맹국이 신 용하며, 비록 벽지의 나라라도 위엄이 천하에 울릴 것이다. 오패(五霸)가 그 예이다.

 

정교일치를 근본으로 한 것도 아니고, 예를 따른 것도 아니며, 규범의 형식을 다한 것도 아니고, 민심을 열복(悅服) 시킨 것도 아니다. 그러나 천하를 경영하는 데 노력하여 일의 어렵고 쉬운 것을 관찰하고, 물자의 저축과 군비의 확충에 힘을 쓰고, 상하 가 서로 신의가 있어 세상의 적대자가 없다. 그러므로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 합려, 윌나라 구천이 다 변방의 국가를 다스렸지만, 그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위엄이 있고 중앙의 국가들을 위협할 정도로 강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에게 신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용을 제일로 삼으면 패자(覇者)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국민에게 공리(功利)만 부르짖어 도의를 편다든가 신의를 지키려 힘쓰는 일은 없다.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여 안으로는 소리(小利)를 찾아 자기 백성들을 예사로이 속이고, 밖으로는 큰 이익을 얻기 위하여 자기의 동맹국을 거리낌 없이 속인다. 또한 안으 로 자기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토지 및 제물을 다스리려는 생각은 아니하고 언제나 남의 소유물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

 

사실이 이렇다면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가 속이려는 마음으로 자기 윗사람을 대하게 된다. 만일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속이고 아랫사람이 윗사랑을 속인다면, 결국 상하가 등을 돌려 사이가 멀어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적국은 경시하고 동맹국은 의심하고 권모술수만을 날마다 자행하여, 국가는 위태로움을 면하지 못하고 망할 것이다. 제나라 민왕과 그의 제상 설공(薛公)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들은 강국인 제(齊)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예의를 닦았던 것도 아니요, 정치와 교육을 기본으로 한 것도, 또 천하를 통일한 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끊임없이 말하는 세객(說客)을 수레에 태워 외국 각지로 돌아다니며 권모술수를 일삼게 하였다. 여기서 한때는 나라가 강대해져, 남쪽으로는 초나라를 쳐부수고, 서쪽으로는 진나라를 공격하여 굴복시키며, 북쪽으로는 연나라를 패배시키고, 또 중앙으로는 송나라를 멸망시키 고도 남을 만한 정도였다. 그러나 그 뒤 연나라와 조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함께 쳐들 어 왔을 때는 마지 마른 나뭇잎이 떨어지듯 아주 힘없이 떨어져 그 몸은 죽고 나라는 망 하여 천하에 다시없는 큰 치욕을 받았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이 악을 들어 말할 때는 반드시 민왕의 일을 거론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대에 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그들이 오직 예의를 무시하고 권모술수에만 의지한 대서 비롯한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세 가지, 곧 왕자와 패자(霸者)와 망국자로 말하면, 현명한 군주가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요, 덕이 있는 사람이 명백하게 가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 선택하는 사람은 왕자 또는 패자가 되어 남을 지배하게 되나 잘못 선택 하는 사람은 망국자가 되어 남에게 지배를 받게 된다.

 

-(荀子, 「王霸篇」) 논제 - 순자의 성악설은 인위를 중요시하는 현실성이 있다. 개인의 개성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교육의 효과와 한계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출처 : 독서신문(http://www.reader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