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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인도불교의 발전과 쇠퇴과정에서의 힌두교의 영향 이 은 구*

인도불교의 발전과 쇠퇴과정에서의 힌두교의 영향

이 은 구*

인도에서 발생하여 세계 종교로 발전한 불교가 왜 인도에서는 사라졌는가 하는 의구심을 간혹 갖게 된다 . 본고는 이에 대한 원인을 불교 자체의 내재적 원인보다는 인도의 사회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불교가 인도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힌두교와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융해된 것이라는 점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

다시 말하면 불교가 인도에서 생겨나게 되는 배경과 발전 과정 그리고 쇠퇴의 원인을 힌두교 ‘세계’라는 맥락에서 파악해 볼때,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힌두교에 점차 동화된 것이라는 점을 밝혀 본다.

Ⅰ. 서 론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였다 . 그 과정에서 우리 나라도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불교는 한국문화의 한 근간을 이루어 왔다 .

그리하여 우리는 한국불교의 전통과 사상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 하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의 장을 보다 더 넓히기 위해 불교 발생의 배경과 이의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도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 대해 살펴보려면 우선 불교가 인도의 종교적, 철학적 토양 위에서 그 시대와 문화의 산물로 발생한 것이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근본적인 이해는 당시의 인도적인 독특한 종교적 철학적 전통을 이해하는 가운데 가능할 것이다.1) 불교는 힌두교 2)의 초기형태라고 할 수 있는 브라흐만교 3)의 형식주의적 의례의 전통을 반박하면서 인간의 내면적 자기성찰을 시도한 혁신적 종교형태로 출발하였으므로 불교의 사상적 본류를 이해하려면 인도의 사상적 전통의 뿌리인 힌두교에 대한 이해가 당연히 필요하다고 하겠다 .

여기에서는 불교가 성장 쇠퇴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과연 인도의 종교적, 사상적 배경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독자적인 사상을 설파할 수 있었는가를 힌두교와의 관계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인도에서의 불교의 위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알아본다 . 동시에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원인을 불교 자체의 내재적 원인보다는 인도의 사회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힌두교와의 상호 영향관계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

Ⅱ. 인도불교의 특성과 이의 힌두교와의 관계

계급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힌두교와는 달리 불교는 인간의 자유 평등적 가치관에 바탕을 두고 있어 세계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전통적인 힌두교는 계급 제도를 인정함으로써 인도 이외의 지역으로 전파되기 어려웠다 .

유대교가 유대인들의 선민의식 때문에 그들만의 종교에 머물고 말았던 것처럼 힌두교 역시 카스트 제도라는 계급 제도에 그 기반을 두고 있어 이를 인정하고 있는 인도 내에서만 그 종교적 특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힌두교는 힌두로 태어나 카스트의 위계질서에 편입되어 카스트의 구성원이 된 힌두교도들만이 신앙할 수 있다는 한계점을 갖고 있다 .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힌두교를 수용한 경우에도 카스트 제도를 수반하는 계급 제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 교단(san.gha; 伽 )에서 만큼은 어느 누구도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던 불교는 자유 평등사상에 기초하여 인도적 한계를 넘어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4)

비구니 (nuns) 를 불교 교단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을 보더라도 불교는 과거 힌두 전통으로부터 훨씬 관대하였다 .5)

​또한 불교는 인간 구원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정립하여 인간 구원의 전형을 창출하였다 .6)

여기서 나온 내세관은 인도 이외의 지역에서 적극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불교 교단의 성격은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평등에 있었으며 , 불교 사상은 그 교의를 실천하는 주체가 인간의 인격 속에 있음을 내세우는 인간성의 고찰이다 .

이런 점에서 윤회로 말미암아 인간의 계급이 나면서부터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브라흐만교 7)와 비교해 볼 때 불교는 가치 기준부터 달랐다. 말하자면 불교는 외면적인 형식주의에서 내면적인 인간주의로 가치를 전환시킨 혁신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처럼 브라흐만교에 반대하여 베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 극단적인 고행이나 희생의식을 경시하였던 불교가 인도에서는 사회성을 잃은 반면에 국경을 넘어 각 나라의 민간 신앙을 흡수하면서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붓다는 깨달은 바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주로 브라흐만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던 산스끄리뜨(sanskrit; 梵語 )어가 아니라

​마가다 지역에서 주로 쓰이던 빨리 (pa?i) 어를 사용하였다 .

그리하여 이 빨리어 성전에 밝혀진 초기불교는 어디까지나 비 (非)브라흐만교의 입장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개인적 해탈을 추구하는 상좌부 불교 (소승불교 )에서 후대로 내려와 대중을 구제하는 대승불교로 전환함에 따라

​산스끄리뜨어로 된 소위 범어 (梵語 ) 경전이 다시 나오게 된다 .

이는 힌두교가 부흥하면서 범어가 다시 등장하게 된 사실과 관련하여 특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8)

붓다의 가르침은 당시로서는 여러 면에서 놀랄만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

붓다에게는 자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무명 (無明 , avidya) 에서 벗어나는 지혜가 주된 관심사였다 .

붓다의 기본 입장에서 볼 때 예배나 기도 등의 행위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예배의 대상이 없고 진정한 의미의 신격이라는 것도 없어 불교는 무신론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초기의 불교도들은 붓다를 종교적 수행자, 진리의 발견자 내지는 정신적 스승으로 추앙했을 뿐이었다 .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힌두교의 종교적 전통과 환경 아래서 붓다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비춰지게 되었다. 처음부터 붓다의 생애에 관한 몇 가지 구전口傳 )이 있었다.

여기에다 불교 이외의 대중들 사이에 나돌던 민간설화나 전설을 포함하는 『자따까 (Jataka)』 (본생경)가 편집되었다. 이는 붓다의 전기 (傳記 )에 관해 기본적이고도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나 사료 (史料 )에서 붓다의 역사적인 모습은 점차 사라진다. 그 대신 붓다는 신앙적으로는 신격화되고 철학적으로는 법(dharma) 이 되고 문학적으로는 이상화된 전륜성왕(轉輪聖 , CakravartI Ra?a?이 된다 .

불교는 무신론에 바탕을 두고 , 브라흐만에 의해 형성된 계급 제도와 의례주의 (ritualism)를 배격하면서 모든 자의 평등을 제창한 일종의 브라흐만교에 대한 개혁적인 종교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 관념인 업과 윤회사상 9)을 받아들였다 .

10) 업과 윤회사상은 카스트 제도라는 인도의 계급 제도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힌두교의 중심사상인 것이다. 말하자면 힌두교의 업과 윤회사상을 받아들인 불교는 인도의 전통사상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불교는 카스트의 무의미함을 설하고 실제로도 그러한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 계급 제도를 극복하는 사회 개혁 운동으로 나아가지는 못함으로써 힌두교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다. 인도에서 굽따 왕조시대 (320-647)는 힌두교가 그 면모를 완전히 갖춘 시기이다 . 한때 아쇼까 대왕 (기원전 269 -232)의 비호 아래 불교가 북인도에서 주민 다수의 종교로 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불교가 인도 전체의 지배적인 종교로 되었던 때는 한 번도 없었다.11)

즉 불교는 브라흐만교와 힌두교의 한 가운데서 태어나 그 가운데서 자라났고 , 이들보다 한 번도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였으며 언제나 한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었다.12)

아쇼까 대왕 이후 꾸샨왕조의 까니슈까 왕만은 불교를 적극 옹호하였다 . 주화를 보더라도 불교 색채가 뚜렷한 주화가 나왔던 것은 까니슈까 왕 때 뿐이고, 그 후의 왕들은 대개 힌두교의 쉬바 신을 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불교에서는 신을 거의 무시했으나 대승 불교에 와서는 붓다가 중생 구제를 위해 신의 화신으로 인식되었다 .

이처럼 붓다를 사실상 신격화시킨 대승불교에 이르러 불교는 힌두교와 여러 면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많이 내포함으로써 불교의 독자적인 위상이 흔들리게 된다.

대승불교에서는 불상 을 경배하고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를 행했다 . 우주에 천국과 지옥 을 마련하고 ,13) 성자 (聖 )를 앉히고, 또 향과 촛불과 성수 (聖 )로 예배도 올렸다. 주문을 사용하고 , 호화롭고 장대한 의식과 의례 등을 행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불교도들은 그들의 정서적 요구에 맞게 대중적 민간신앙인 힌두교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였다 . 이런 과정에서 불교와 힌두교 사이의 믿음과 관행의 구분이 점차 사라졌다 . 그리하여 현재 인도의 재가신도들은 비슈누 신이나 붓다 그리고 쉬바 신이나 아와로까떼슈와라 (觀音菩 ), 그리고 따라( 羅 )와 빠르와띠 여신 숭배의 차이점을 크게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도에서 대승불교의 등장은 곧 불교가 대중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지만 , 힌두교에 융해되어 주체성을 잃고 , 독자성을 상실하게 된 계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14)

특히 굽따 왕조시대에 불교는 힌두신과 힌두의 주술적 의례를 대폭 수용하고 있다 . 이것은 불교의 독자적인 것으로 변용되었다기 보다는 힌두적인 관념이나 의례 를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힌두적인 요소를 받아들였음을 감안한다면 불교가 힌두화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힌두 세계에서 더이상 개혁적인 종교로서의 근거를 상실하여 , 결국 붓다가 비슈누 신의 화신 ( , )으로 간주되고 말았다. 현재 힌두교도들은 붓다를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이라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붓다는 힌두교의 주신 (主 ) 비슈누 그 자체인 것이다. 비슈누 파의 신도들이 기원 후 4 세기경부터 붓다를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수용하게 된 것은 틀림없이 불교가 독자적인 운동으로서 위치를 확립하는 데 위협이 되었다 .

밀교 (Tantrism) 시대 (7 세기 이후 )에 들어서게 되면 불교의 깨달음과 이에 근거를 둔 종교적 특성은 힌두교의 그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된다 . 불교의 독자적인 사상이 철학으로써 연구되거나 주장되기는 했지만, 불교도의 실천적 생활에는 그다지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없었던 것이다 .

여러 가지 정황과 맥락에서 볼 때 사실 불교는 이 전의 많은 전통적인 요소를 물려받았다 .

불교는 정통 브라흐만교 15) 에서 탈피하려는 이단적 종교집단의 하나로 출발하였지만,16) 브라흐만교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 특히 우빠니샤드의 사상 그리고 비(非 )브라흐만적인 종교인 아지비까 (A?Ivika)와 자이나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17) 그림 (G. Grimm) 같은 학자는 “붓다는 우빠니샤드의 이상을 완전히 실현한 자이다 .” 18) 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 불교는 분명히 브라흐만교와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 하지만 불교는 브라흐만교의 바탕에서 생겨났고 , 사실 초기불교는 브라흐만교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다.19) 그 한 예로 붓다가 브라흐만 사제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브라흐만들이 주장하는 브라흐만 계급의 다섯 가지 뚜렷한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들었다. ‘브라흐만은 태생 (가문 )이 훌륭해야 하고, 베다를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어야 하고 , 용모가 빼어나야 하고 , 덕망이 높아야 하며 , 또한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붓다는 가문 , 베다 , 피부색 등은 배제되어야 마땅하다고 하였고, 단지 덕행과 지혜의 필요성만을 주장하였다 . 그리고 결국 이 두 가지는 불교에서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20)

Ⅲ. 인도불교에 미친 힌두교적 요소의 내용

1. 힌두신의 불교신전으로의 이입

베다시대 이후로 인도의 신들은 토속적인 신들까지 포함해서 아주 다채롭게 등장한다 . 이 다양한 신들은 보다 더 대중화되면서 인도사람들과 더욱 친근해졌다 . 불교에 의해 배척받은 의례 중심적인 브라흐만교가 힌두교의 형태로 대중화하면서 불교만큼 보다도 훨씬 더 대중적인 종교로 발전하였다 .21) 그리하여 불교도 힌두교의 이러한 변화 추세에 무관심할 수 없었으며 , 힌두세계의 신들에게도 무관심할 수 없었다. 즉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일상생활 속에 함께 지내온 대중의 신들을 완전히 부정해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인도인들의 특성으로 보아도 굳이 힌두 세계의 신을 배척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상당수의 힌두의 신들이 불교에 흡수되었으며, 이들 불교의 신들은 우리 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까지 전파되었다 .

원래 불교의 구도는 자등명( 燈明)과 법등명(法燈明)이라고 하는 붓다의 가르침이 말하듯이 스스로의 청정한 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법을 구현해 나가는 삶의 방식이었다 .22) 따라서 불교는 분명히 무신론으로 출발하였으며, 의례나 예배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와서 보신불(報 佛) 응신불(應 佛) 사상이 정착되고 여러 보살들도 증가하여 , 유신론적 신앙형태로 성립되어 갔다 . 그러면서 굽따왕조 이후 (7 세기 이후 )에는 힌두교도가 신봉하던 상당수의 신들이 불교에 유입되어 불교문화 속에서 갖가지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힌두적 요소를 대폭적으로 수용하여 형성된 불교 신전 (神殿)이 7세기 이후에는 완성된 신전으로 계승된다.23)

힌두적 요소가 대폭적으로 수용되어 불교문화의 내용이 크게 확장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힌두 신들의 수용일 것이다. 불교에서의 제석천(帝釋天)은 베다에서는 일체의 악마를 정복하는 천둥 벼락의 신이었으며 , 우빠니샤드 시대에 와서는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모든 신을 주재하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던 인드라(Indra) 신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불교에 귀의하여 도리천(瀟利 )의 주인으로서 수미산 정상에 살며 범천 (梵天)과 함께 불법수호의 역할을 하게 된다 . 범천 (梵天, Brahma?은 브라흐만교에서 만유의 근원인 브라흐만을 신격화한 우주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는 제석천과 함께 불법수호의 역할을 하게 된다 .24) 금강역사 (金剛力士 , Vajradhara) 는 ‘금강저 (金剛杵)를 든 자’라는 뜻으로 원래 인도에서 문을 지키는 야차 (夜叉 , Yaks )의 종류에 속하는 수호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를 인왕 (仁王)이라고도 한다 . 사천왕(四天王 )은 원래 힌두교의 신화에서는 호법신이었는데 나중에 불교에 유입된 것이다. 동방을 수호하는 지국천(持國天)은 힌두신인 드리따라쉬뜨라 (Dhr ara?s a), 남방을 수호하는 증장천(增長 )은 비루다까(Viru? aka), 서방을 수호 하는 광목천(廣目 )은 비루빡샤 (Viru?a?s ),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 (多聞天)은 바이슈라바나(Vais avan )에서 온 것이다. 팔부중(八部衆)은 불법을 수호하는 8 가지 신으로서 원래는 고대 인도의 신들이었다 . 그 성격은 악마나 귀신이지만 붓다에게 교화되어 10 대 제자와 함께 붓다의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 천( )은 데바(Deva), 용(龍 )은 나가 (Na?a), 야차 (夜叉 )는 약샤 (Yaks ), 아수라(阿修羅)는 아수라 (Asu?a), 건달바 (乾 婆 )는 간다르바 (Gandharva), 긴나라( 那羅)는 낀나라(Kim ara), 가루라( 樓羅 )는 가루다 (Garud ), 마후라가 ( 羅伽 )는 마호라가 (Mahoraga), 대흑천( 黑 )은 마하깔라(Maha?a?a) 에서 온 것이다. 이 밖에도 변재천 ((辨財 )은 힌두교의 사라스와띠 (SarasvatI) 여신 , 길상천 (( )은 락슈미(Laks I)여신 , 밀교화되어 불교에 들어온 성천 (聖 )은 쉬바 신의 아들인 가네샤(Ganes )신 , 위타천(韋 )은 가네샤의 남동생이며 군대의 신인 까릇띠께야(Ka?ttikeya), 재보를 관장하는 비사문천 (毘沙門 )은 꾸베라 신의 다른 이름인 바이슈라바나(Vais avana), 수천 ( )은 베다 시대의 신인 바루나(Varun ), 화천 ( )은 아그니(Agni)신, 일천 (日 )은 수르야(Su?ya) 신, 월천 (月 )은 짠드라(Candra)신, 명부의 왕 염라 (염마 ; 閻)는 야마 (Yama)신에서 온 것이다 .

2. 힌두신과 불보살

밀교 시대 (7∼ 8세기 )에 이르게 되면 여러 관음 신앙은 이에 대한 예배형식이 확립되고 , 예배의례를 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은혜 등의 기능이 보편화된다 . 본래부터 관음 신앙은 현세적 이익과 관련이 있어 아무 무리 없이 힌두신을 대폭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25) 이에 따라 관음의 종류도 증가하게 되는데, 그 대다수는 민간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 관음은 특히 자비를 본질로 하는 보살로서 민간신앙적 숭배 대상을 불교에 이입시키고 정착시키는 통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 그러다가 7 세기 이후에는 사람들의 요청과 기원 목적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신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천수관음 ( 手觀音 , Sahasrabhuja -avalokites ara)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인드라 신이나 비슈누 , 쉬바 같은 힌두신들의 특성이 불교적으로 변용된 것이다. 그 밖에 많은 관음들이 힌두신의 성격에서 차용되거나 음역되어 그대로 불교경전에 전해지고 있다 . 특히 관음 신앙은 북서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국 등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 지역의 토착 신앙을 흡수하여 불교적 민중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다 . 마두 ( 頭 )관음은 하야그리바(Hayagriva) 신으로서 원래는 비슈누의 화신이라고도 하고 , 혹은 물고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비슈누에게 살해된 악마라고도 한다 . 불공견삭 (不空見索 , Amogha -pa? )도 역시 쉬바 신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관음이다 . 준제 (准提 )관음은 춘디 (Chundi)라고 하는 힌두의 토착적 요소가 강한 여신이다 . 청경 ( )관음은 쉬바 신의 다른 이름인 닐라깐타 (N lakan a; 푸른 목을 가진 존재 )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인도의 여러 지방에서 쉬바 신의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 엽의 (葉衣 )관음은 빠르나샤바리(Parnas vari)이며 , 다라 ( 羅 )관음은 특히 밀교에서 숭배되는 따라 (Tara)이다 . 관세음(觀世音)보살은 아와록까떼쉬와라 (Avalokites ara), 여의륜(如意輪)관음은 찐따마니짜끄라 (Cinta?mani -Cakra), 대세지 ( 勢至)관음은 마하스타마쁘라따(Maha?stha?a -pra?a), 지장 (地藏 )보살 은 끄쉬띠가르바(Ks tigarbha), 미륵 (彌勒 )보살은 메이뜨레야 (Maitreya), 문수 (文 )보살은 만주슈리 (Man?us i), 보현 (普賢 )보살은 사만타바드라(Samanthabhadra), 일광 (日光 )보살은 수르야쁘라바(Su?ya -prabha), 월광 (月光 )보살은 짠드라쁘라바(Candra-prabha), 십일면( 一 )관음은 에까다샤무카(Ekadas mukha)인데 이의 원형은 고대 인도의 폭풍의 신 루드라 (Rudra)에서 연유된다.

3. 힌두 예배의례의 수용

초기 불교에서는 붓다나 상좌승(Arhat; 阿羅 )에게 그 제자나 재가신자들이 존경의 뜻으로 합장하여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산찌 (Sa? I)에 있는 탑(stu?a) 의 조각이나 그 외의 미술품을 보면 향, 꽃, 음식물을 바치며 공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이것은 힌두교의 예배 양식(pu?a?26)이 불교에 도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굽따 왕조시대에 불교에 미친 힌두문화의 영향은 힌두적 신들의 수용과 주술적 의례의 도입뿐만이 아니다. 불교교단의 승려들은 이미 힌두적인 제례의식의 방법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법현 (法顯 )이 기록한 『법현전』(法顯傳)은 불교가 이미 5세기에 와서 힌두교의 관행을 상당히 따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 빠딸리뿌뜨라(Pataliputra; 현재의 Pat a葡?의 묘사에서 는 수레를 장식해 거기에 불상을 싣고 이동하는 예배나 제례가 불교 승원에서도 성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이는 현재 오릿사주 (州) 등지에서 성행하는 힌두교의 신 자간나타(Jaganna?ha) 를 받드는 수레행렬(rath -ya?ra? 과 유사한 것이다 .

또한 3세기초의 『마등가경』( 登加 )에는 힌두교 호마의례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이는 의례의 한 방법으로서 베다 시대부터 전래된 불의 제사인 호마(Homa; )를 불교가 수용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병의 치료를 위한 주술적 기원도 불교 교단에서 점차 받아들여졌다. 주술은 원래 불교의 본의와는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불교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를 개방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4세기 이후에는 병의 치료를 위한 다양한 주술의례를 설하는 문헌들이 제작되어 이에 관한 경전이 상당수에 이르게 되었다. 7세기 중반 경에는 관념론적 불교도들이 주술의 방법을 통하여 범신론적인 절대의 경지를 추구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브라흐만적인 힌두교와 근본적인 입장에 동조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과 뒤섞이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불교를 금강승(Vajraya?a) 혹은 딴뜨라승 (Tantraya?a) 이라고 하는데, 쉬바 파(派)와 비슈누 파 (派)를 약간 변형시킨 것에 불과한 금강승에서 비구 (승려 )는 주술사(siddha)나 마법사(vajra?a?ya) 로 대체되었다 .27) 이들은 주술적 관념 및 주문과 관련을 맺고 있어 다라니 (dharani ; 羅尼)28) 와 만뜨라(mantra; 眞言 )를 사용하게 되었다. 힌두교도들 사이에서 흥행하던 여러 가지 주술적 요소 , 주문 (呪文 ), 주구(呪句 )가 그대로 불교에 유입된 것이다 .

붓다 및 그 이후의 상좌승 (上座 )들은 세간 차원의 불교의례에 대해서 신자들에게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았다. 원래 불교의 본의는 이러한 세간차원의 의례와 관계가 없었으며 , 사실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 따라서 재가신자는 일상의 세간적 차원에서는 기존의 힌두교적 관념과 의례를 수용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기원 의례와 주술 등이 점차 생겨나면서 불교화되어 갔다 .29) 이와 같이 불교도들은 점점 불교의 본뜻과는 관계가 없이 예전부터 힌두 사회에 전승되어온 관념과 의례를 일상생활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

4. 힌두 예술기법의 도입

굽따 왕조시대에 이르러 힌두문화가 부흥하는 추세에 따라 힌두문화는 불교문화에 더욱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이는 힌두적 신들의 수용 , 주술적 의례나 예배 방식의 수용에서 뿐만 아니라 불교 미술에 나타나는 힌두 예술의 영향에서도 알 수 있다 . 초기의 불상은 마투라에서나 간다라에서나 모두 간단한 옷을 걸쳤을 뿐이다. 장식품을 걸치거나 치장하려는 흔적은 없다 . 그런데 굽따 왕조시대 이후의 불상 , 특히 불 보살상은 호화롭게 치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 이것은 힌두신상의 모습을 불교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7세기 이후에 나온 아잔따 (Ajanta? 나 그 밖의 석굴사원에 남아있는 붓다나 보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머리에 보관 (寶冠 )을 쓰고 금이나 은으로 된 허리띠를 두른 모습이다 . 아잔따의 유명한 지연화보살 (持蓮華菩 ; Padmapani) 과 그 밖의 다른 불 보살들은 브라흐만이 입문식 후에 두르는 성삭 (聖索 )30) 을 몸에 걸치고 있다 . 불상이나 보살상에 성삭을 두른 것은 브라흐만의 권위를 자신들의 보살에 표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연 불교의 보살에 브라흐만의 권위를 차용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불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

보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쉬바나 비슈누 같은 신의 모습을 불교미술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 또한 왕의 즉위식 때에 거행되는 관정 의례가 불교에 도입되어 , 후에 밀교에서 붓다의 자리에 오르는 상징적인 의례로 완성되어 가는데, 그 선구적 사례는 굽따 왕조 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이것은 세속적 관습이 종교 세계에 흡수되는 풍조에 편승한 현상으로써 , 불교가 힌두 사회 속에 정착해 가는 하나의 패턴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1)

5. 산스끄리뜨어 (梵語 )의 수용

불교가 불법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브라흐만 계급의 언어인 산스끄리뜨 (Sanskrit) 어를 사용하지 않고 마가다(Magadha) 지역에서만 주로 쓰이는 빨리 (Pa?i)어를 사용하였다 . 이것은 브라흐만교의 전통에서 탈피하겠다는 불교의 정 신과 불교가 발생한 마가다 지역의 역사적 환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빨리어 경전에 밝혀진 초기불교는 어디까지나 비 (非 )브라흐만교의 입장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후대로 내려와 개인적 해탈을 추구하는 상좌부(테라바다 ) 불교에서 대중을 구제하는 대승불교로 전환함에 따라 산스끄 리뜨어로 된 소위 범어 (梵語 ) 경전이 나오게 된다 .

유부 시대에는 불교혼효범어(佛敎 梵語; Buddhist Hybrid Sanskrit)가 씌어졌으나 대승 불교에 들어와서는 비문이나 불교경전이 산스끄리뜨어 (梵語 )로 씌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혼효범어로 씌어졌던 불전도 산스끄리뜨화되었다 .32) 이러한 것들은 굽따 왕조의 성립 (320년)을 기점으로 하여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이는 굽따 왕조시대에 힌두적 가치관이 중시되었던 역사적 흐름에 따른 것으로, 불교 교단은 언어의 면에서도 힌두 세계의 경향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33)

6. 힌두교 박띠 신앙의 영향 5∼6 세기경부터 따밀 (Tamil)을 중심으로 한 남부 인도에서는 힌두교 박띠 (bhakti; ) 신앙의 거대한 흐름이 인도인들의 종교생활을 변모시켜 나아갔다 . 그리고 7∼ 8세기에 이르러서는 힌두교 박띠 신앙이 널리 전파되면서 불교가 크게 위협을 받는 시대가 시작된다 . 힌두교의 박띠 사상은 어려운 문헌이나 까다로운 의식에 따르지 않고 오로지 신에 기도하여 그 은총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신에게 헌신하여 신의 가호를 받고자 하는 일념으로 기원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박띠 신앙은 계급 , 재산 , 직업에 관계 없이 모든 민중들에게 받아들여졌다.34) 이에 편승하여 박띠 신앙의 흐름을 이어받은 비슈누 파와 쉬바 파의 성자들이 출현하게 된다 .

알와르(A?va?) 와 나야나르 (Na?ana?) 라고 불리는 비슈누 파 및 쉬바 파 성자들은 불교나 자이나교에 공개적으로 적대적이었다.35) 특히 불교의 교세 확장을 막고 힌두교에 철학적 이론을 부여했던 사람이 샹까라(S n.kara; 788∼ 838 년경 )였다 . 께랄라 지방의 브라흐만 출신인 샹까 라는 짧은 생애 동안이지만 힌두 포교단을 결성하여 인도 각지에 힌두 교리를 전파하였다 .36) 신에 대한 정열적 사랑을 역설하는 박띠 운동은 특히 밀교를 중심으로 하여 힌두교의 여러 신들이 불교에 흡수되어 불교의 신전 ( 殿 )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37) 불교 본래의 참신한 종교성이 점차 희박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신에 대한 정열적 사랑을 역설한 박띠 운동의 출현은 인도 불교의 쇠퇴를 더욱 촉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Ⅳ. 인도불교의 쇠퇴에 대한 힌두교적 관점

우리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세계 종교로 발전한 불교가 왜 인도에서 사라졌는가 하는 의구심을 간혹 갖는다. 그런데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할 당시의 사회 문화적 배경과 불교가 발전하면서 변모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불교가 범세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뿐만 아니라 , 동시에 불교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에 대해서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여기에서는 불교의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교가 인도에서 생겨났다가 인도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불교는 인도의 사상적 토양에서 자라나 인도의 커다란 사상적 흐름인 힌두교와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융해된 것이라는 점을 인도의 관점에서 설명해 본다 .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고, 힌두교에 융합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불교의 태생적 특성과 발전 과정에 있어서의 힌두교와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고찰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서는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게 될 것이다. 우선 불교가 인도에서 힌두교에 융해될 수밖에 없었던 내재적인 요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몇 가지 점만을 간략히 들기로 한다 . 대신에 앞 장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본대로 불교가 출가자 집단의 종교에서 출발하여 다시 대중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도의 대중적인 신앙인 힌두교의 요소가 불교에 유입되는 역사적 사실을 종합해 정리할 것이다. 다음으로 불교의 쇠퇴 원인을 힌두교와의 상호관련성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는 어디까지나 힌두교를 바탕으로 하는 인도적인 시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불교의 발 전과 쇠퇴과정에 있어서 힌두교와의 상호 연관성에 대해 살펴본다.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게 된 원인에 대한 논의를 거듭해 왔다 . 하지만 그 원인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데에는 의견일치를 보면서도 각론에 따른 구체적인 증거는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인도불교 쇠퇴에 관하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 주요 원인으로 불교 교단 내부의 부패 , 종교적 분파주의 , 사회화의 실패 , 국왕 보호의 철회 , 무슬 림의 침입 , 불교도들의 도덕적 타락 , 신도들을 충분히 교화하고 양성하지 못한 점 등을 들고 있다 . 사실 불교가 사라지게 된 원인은 이 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미묘하다 . 그런데 우선 불교적 관념과 실천 방식의 힌두교로의 흡수 그리고 그 반대로 불교의 힌두화의 과정은 국가종교 내지는 토착종교로서의 힌두교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불교가 힌두교의 밀교 (Tantrism)와 관련을 맺으면서 생긴 이의 오용과 폐해는 인도불교가 쇠퇴하게 된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만뜨라(眞言)와 다라니에 힌두교적인 신앙과 의식이 가미되어 7세기경부터 성행한 밀교 (密敎 )는 확실히 불교의 변질을 보여주고 있다 . 불교는 내부적으로 힌두교의 샥띠즘(S ktism) 과 딴뜨리즘 (Tantrism)의 영향을 받아 그 자체의 종교적 본질을 상당히 상실하고 만다. 밀교 (Tantric Buddhism)가 불교의 ‘타락한 형태’라고 하는 관념은 인도에서 학자들에게조차 관심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왜냐하면 초기불교에서 해악 의 원인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후기불교의 의미체계에서는 정신적 발달의 전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열반에 이르는 수단으로써 계 ( ; s la), 정( ; samathi), 혜( ; prajna)를 추구하는 것 대신에 밀교에서는 신비적 결합을 추구하고, 또한 여성 배우자를 쾌락 ( 樂 ; maha?ukha)을 얻는 수단으로 여긴다.38)

이처럼 인도에서 불교는 비록 7세기경 이미 기울기 시작했지만, 12 ∼ 13세기까지 지속되었다.39) 그리하여 시기적으로 보더라도 , 대다수의 인도학자들은 인도에서 불교가 자취를 감추게 되는 과정에서 무슬림 침입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고 본다 . 즉 무슬림의 침입 , 특히 투르크 정복자들의 인도 침입이 인도로부터 불교가 자취를 감추게 된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이슬람의 인도 침입이 북인도 불교의 쇠퇴를 채찍질하고 문화적 타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수세기 전부터 인도에 들어와 있던 이슬람교가 1197 년에는 불교의 마지막 거점을 침략했다. 8세기 이후에 터키계 이슬람교도가 북서인도에 진출하게 되는데, 11 세기의 가즈니 왕조와 고르 왕조 등도 북부 인도에 들어왔다. 그들은 우상을 혐오하여 아프가니스탄, 간다라, 까슈미르 등지에서 불상의 얼굴을 훼손해 버리거나, 목을 치는 등 사원을 파괴해 버렸다. 그리하여 12세기말에서 13세기에 걸쳐 벵갈과 비하르의 불교 사원은 이슬람 군대의 침공으로 경전이 소각되고, 건물이 파괴되는 등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40) 그러나 이것이 인도 불교 쇠퇴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근거가 미약하다. 왜냐하면 무슬림의 침입 이후에도 힌두교와 자이나교는 현재까지 인도에서 계속 살아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종교가 몇몇 사원이 파괴되고 약탈당했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겠는가 하는 점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슬람의 침입이 북인도 불교의 쇠퇴를 촉진하고 문화적 타격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 그것만이 불교 쇠퇴의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앞 장에서 자세히 살펴 보았듯이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북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에 걸쳐서 불교는 힌두 ‘세계’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힌두세계에 흡수되어 그 모습을 상실해갔던 것이다 .

힌두교도와 불교도 그리고 자이나교도와의 관계가 언제나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41) 어쨌든 굽따 왕조시대 (320∼ 647) 이후에는 불교 문화와 힌두교의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상당히 혼융되었다 . 즉 불교문화 속에 많은 힌두교의 요소가 들어온 동시에 힌두교 안으로 불교 문화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

힌두교에 미친 불교의 영향 중에서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굽따 왕조시대 후기에 붓다가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는 불교가 힌두 사회에 정착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비슈누 신앙 및 힌두사회가 불교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편입시킴으로써 불교의 세계관이 힌두교에 흡수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례라고 하겠다 .

지금도 인도에서는 불교와 힌두교가 서로 다른 종교라기 보다는 같은 힌두교 중의 다른 종파로 간주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 이러한 사실에는 “진실은 하나이나 , 현자들은 이를 여러 가지로 부른다”는 힌두교의 사유방법과 관련이 있다 . 그리하여 현재까지도 불교는 힌두교라는 큰 ‘세계’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꽃을 피운 종교로서 , 힌두교도에게는 동료의식을 갖게 하는 친숙한 종교이다 . 그리고 이것은 힌두교도의 입장에서 불교가 힌두교의 또다른 하나의 흐름으로 간주되는 원인이 되었다 .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불교가 인도에서는 역사의 흐름과 함께 힌두교와 혼융됨으로써 불교 특유의 사상적 기반을 잃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 불교는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가 범아시아적 종교의 기반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사유와 확실한 내세관, 그리고 보편적인 가치를 내세움으로써 인도의 사상과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는 것이다 . “낡고 오래된 병에 불교라는 새로운 술(wine) 을 넣자 힌두교는 병 모양을 더 좋은 것 으로 새롭게 바꾸고 새 음료를 채워 잘 간직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불교는 힌두교의 형태를 이용했다면 힌두교는 불교정신의 무엇인가에 동화되었다 .” 42) 라는 말처럼 불교가 힌두문화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하겠다. 지금까지도 힌두교도에게 있어서 붓다의 가르침은 모두 힌두교 안에 살아있으며 , 현재 힌두들의 종교정신에 깊이 새겨져 있다 .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불교는 힌두교라는 큰 ‘세계’ 안에서 독창적이고 체계적인 교리를 전개해 나아갔다. 그러므로 붓다의 귀중한 가르침의 대부분은 인도 사상 속에 깊이 뿌리 내려 있다 .

Ⅴ. 결론

지금까지 인도에서 발생하여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한 불교가 인도에서는 힌두교라고 하는 인도의 사상적 토양에서 나와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통해 불교가 인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인도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 그 과정에서 불교의 근본적인 관심과 세계관은 분명히 인도고유의 사상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힌두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하였다는 점을 알아보았다 . 실제로 인도의 초기불교는 힌두교라는 ‘세계’를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다. 생활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 , 사실상 불교도와 힌두교도의 사회 및 생활양식이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도에서는 불교와 힌두교가 서로 다른 종교라기 보다는 같은 힌두교 중의 다른 종파로 간주될 수 있었다.

굽따 왕조시대 이후 불교의 대중화 과정에서 살펴보았듯이 불교는 힌두교의 신, 힌두교의 예술기법 , 산스끄리뜨어 (梵語 ), 힌두교 박띠 ( ) 신앙 등 힌두교의 관념과 의례를 많이 받 아들이고 있다 .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는 힌두 사회 내부에서 안정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에서의 불교 쇠퇴의 원인은 불교의 점진적인 힌두교로의 동화에서 찾으면 좋을 것이다. 불교는 평등사상에 그 기반을 두고 과거 정통파적 관행에서 벗어나 개혁적인 종교로 출발했지만 그렇다고 힌두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하였다 . 그런데다 불교는 힌두들에게 힌두교의 끄리슈나와 같은 인간신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나 문학의 역사를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국 불교는 힌두교와 구별하기 힘들 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힌두 ‘세계’에 흡수되어 그 모습을 상실해갔던 것이다 .

결국 불교가 인도에서 생겨나는 배경과 발전 과정 그리고 쇠퇴의 원인을 힌두교 ‘세계’라는 맥락에서 파악해 볼 때, 불교는 힌두교로 점차 동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

[출처] 인도불교의 발전과 쇠퇴과정에서의 힌두교의 영향 * 이은구|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