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시집 <방랑자의 노래> 시인의 후기 2
시민혁명의 시작은 프랑스대혁명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혁명의 성공을 위해 고안하여 반혁명분자를 처단한 단두대에서 자신도 사라져간 로베르 피에로를 잠시 떠올린다. 자유는 혁명을 통한 진통을 겪어야 성취할 수 있고 민주도 기득권을 꺽어야 이룩할 수 있으니 흔히 민주와 피는 불가분의 관계라 한다. 역사상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일일이 늘어놓을 수 있다. 대학시절 몸소 겪은 것들은 그 흐름 속의 조그만 파장에 지나지 않았음을 안다.
산문은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한 문체, 시는 표현하고 공감하기 위한 형식. 나는 서사시의 형식으로 터를 잡았다. 바꾸는 것과 해보지 않은 것을 하는 것은 나의 오랜 취미가 되어왔다. 앞으로는 참여문학으로 눈을 돌린다. 내게는 반골과 혁명의 피가 흐른다. ‘축의 시대*/카렌 암스트롱’을 읽으면서 한때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종교는 인간이 만든 창작물 가운데 최악의 실패작임을 느끼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면서 철학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시를 쓰면서 아직도 혼돈과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들에 대해 나의 생각을 설정해야 했다. 첫째 무아론과 유아론의 정립. 둘째 오도의 작용기제와 깨어남인가 깨달음인가. 셋째 돈오돈수인가 돈오점수인가 점오점수인가 아니면 점수점오점수인가에 대해 내가 갈 방향을 결심해야 했다. 넷째 많은 설화에 대한 입장 정리. 다섯째 윤회의 주체. 여섯째 윤회와 무아를 무시하며 힌두의 아뜨만(영원불멸의 자아)과 비슷한 개념인 자성을 중시하는 선불교에 대한 입장 정리. 일곱째 경·율·론의 역사성과 진위 등에 대해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인간이 악해지고 선해지는 원인을 종교에서 얻어 해결책을 찾으려 했는데, 아뿔싸, 종교가 더 극악한 집단인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종교에서 구원을 얻기를 포기했다. 구원은 철학에 있거나 아니면 차라리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시詩에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에 한 가닥 즐거움이 있다. 극명하게 말하건대 내가 죽을 때까지 종교는 인류를 구원해주는 절정의 도구는 아니라는 확신에 변함이 없을 것이다. 깨달아서 뭐 할 건데? 수많은 역대 조사들이 제도 중생을 부르짖고 나섰으나 지금까지 변한 게 없는데, 우리는 천지개벽의 능력이 있어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나서는 것일까. 그러나 가장 합리적이며 완벽해 흠잡을 곳 없는 붓다 말씀을 묻히기 아까워 나는 그대로 갔다.
삶의 잔혹함에 지친 사람들에게 마지막 피난처였던 붓다, 붓다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세상과 그 괴로움을 초월하는 방법, 인간의 편협함과 편의주의를 넘어서서 절대적 가치를 발견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다. 우리는 붓다가 제시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실천에 옮길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향상된 인간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삶의 미망에서 깨어난 뒤, 그는 평생 동안 여러 곳을 다니며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삶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영국의 저명한 비교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열일곱 살 되던 해 수녀로서 로마가톨릭에 귀의하지만 수녀원의 엄격한 규율 등에 실망한 후 7년 후 환속한 후 옥스퍼드에서 수학하지만 간질(뇌전증) 등의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꾸준히 저작활동을 하며,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인 빨리어 경전을 토대로 붓다의 삶을 재구성하고, 신화와 전설 속에 갇힌 그의 삶과 가르침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저자는 석가공화부족연맹 부족장의 장자인 싯달타 고따마가 영적 성장을 위해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가 궁극적인 니르바나(열반)에 들기까지 그의 삶을 추적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빛을 발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내 오온이 해체될 날이 가까워지는 지금 사무치도록 그리운 분은 고따마 붓다이다. 본시 나라는 위인은 남의 밑에 있어본 적이 거의 없어선지 ‘내 삶은 나의 것’이라는 신념으로 살아왔고, 신앙생활을 한다거나 남을 따른다는 것은 꿈조차 꾸어본 적이 없을 만큼 독자적인 삶을 살아온 것으로 미루어보아 어릴 적 들은 사주관상쟁이 말 ㅡ이 아들은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ㅡ 대로 가는 편이다. 70살 가까이 살아 겪으면서 내가 품은 의혹, 의심, 의문, 원한, 실수, 잘못을 시원하게 풀어줄 분은 오직 한 분 붓다이다. 나에게 종교에 귀의할 성향은 전혀 없고 불교는 글자대로 풀이해도 종교가 아닌 철학에 가까운 붓다의 교설, 즉 가르침이다. 따뜻한 철학자 마르크스는 ‘철학의 목표는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결코 종교와 철학과 관계가 있는 수많은 성자가 다녀갔어도 세상은 변한 것이 없고 변할 가능성도 없다. 성자들이 세상을 변화시켰다면 넘쳐나게 많은 경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물리학의 미래 예측에 따르면 64억년 후 태양이 식으면서 지구도 함께 멸망한다는 과학적 가설로 보더라도 그 안에 인류는 변할 가능성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너와 나의 차별성으로 인해 생기는 이기적 유전자 때문이다. 붓다, 성악설의 순자,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아직도 유효하며 인간의 이기심은 한편으로는 존재의 이유인 까닭에 교육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본성이 변한다고 인류의 개선과 직결됨은 확실할 수 없다. 그렇다고 본성을 바꾸자는 혁명을 꿈꾸고 실천해도 성공할 확률은 제로라고 보면 된다. 그런 이유로 뭐든 바꾸기 좋아하는 천성 탓에 내가 시를 쓰는 이유가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은퇴 후의 본직인 명상에 전념한다 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 명상의 과학적 한계 때문이다. 제대로 배우고 익힌 선생의 숫자도 많으나 반면 스승이 되어 제자가 많아지면 잘못된 궤도였음을 알게 되어도 차마 수정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므로 자기주장이 강해져서 잘못된 방향으로 쭉 나가게 됨을 봐왔다. 그렇다면 움직일 수 없는 시류에 따라가지 않는 내가 산행과 시 쓰기 두 가지를 하지 않고는 달리 할 짓이 없다. 부수적인 것으로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지적인 공부 및 명상 또는 사색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하여 여러 면에서 부족한 내가 시를 쓰는 이유다. 나에게 시는 농담을 섞은 언어의 유희 놀음이다.